박정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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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담론에 맞선 상식의 목소리, 조던 피터슨
얼마 전에 중3 딸아이와 대판 붙은 적이 있다.
오밤중에 거의 헐벗다시피 으슥한 골목길을 혼자 가던 여자애가 길거리 미친놈에게 강간을 당할 지경에 이르렀다가 겨우 구제된 사례를 두고 일어난 말싸움이었다.
딸아이는 그 사건에 대한 어떤 정치인의 발언을 소개하면서 분개했다. “세상에 그 아저씨가 이 사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잖아. 밤길을 혼자 그런 옷차림으로 다니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고 말야. 진짜 웃기지 않아?”
웃기지 않았다. 나도 그 정치인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대중 앞에서 그런 말 하는 걸 보면 그 양반도 참 정치적감각이 영 아니네. 하지만 그 말도 일리가 있지 않냐? 피해자도 한번 당할 뻔했으니 다음번에는 또 그렇게 차리고 다니진 않겠지.”
그러자 엄마를 닮은 딸아이는 부르르 급흥분하더니, “아니! 그럼 엄마는 피해자의 잘못으로 강간을 당할 뻔했다는 거야?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어? 여자가 자신을 예쁘게 꾸미는 것은 자유야. 강간당할 수 있으니 꾸미지도 말란 말이야? 그렇게 하면 남자가 강간하는 것도 일리가 있다고?” 속사포처럼 쏘아댔다.
이에 부르르 급흥분의 원조인 엄마의 목소리도 함께 높아졌다.
“이게 그 강간범을 옹호하는 것으로 들리니? 강간사건에 대한 피해자의 기여도, 죄책을 논하는게 아니잖아. 지금 내 딸이 밤중에 헐벗고 혼자 싸돌아다닌다고 해봐. 일단은 강간을 당하지 않아야 하는게 제일 중요한 거 아냐? 그럼 엄마가 그런 말을 하는 것도 문제가 되니? 정치적으로 뭐가 옳고 뭐가 용인되고 따지는 것은 안전한 데서 나중에 해도 돼. 하지만 엄마라면 그 잘난 담론에 앞서 내 딸을 지키는 게 가장 우선이지. “
딸아이와의 논쟁은 이 테두리 내에서 변주에 변주를 거듭하며 격렬한 회오리바람을 일으켰다. 아무리 이야기해도 딸은 정치적으로 올바른 담론적 정합성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 딸과 나는 팽팽하게 맞서다 딸아이의 눈물을 끝으로 어색하게 마무리했다.
오늘 딸아이와의 설전이 떠오른 건 우연히 조던피터슨과 슬라보예지젝의 2019년 공개논쟁 기사를 읽어서이다.
한겨레신문은 “당신이 말하는 포스트모던 네오마르크시스트가 누구냐”는 지젝의 질문에 피터슨은 대답하지 못했다고 아주 고소해하며 소식을 전했다. 이를 근거로 한겨레는 조던을 깨죽으로 만든 지젝을 참지성인으로, 조던을 입만 산 셀럽으로 결론짓더라.
논쟁을 통해 참지성인을 가린다는 것 자체가 정말 한겨레스러웠다. ‘헤겔과 라캉과 마르크스를 변증법으로 읽는 것을 근본기획으로 삼는 지젝(나무위키 표현)’과 맑시즘에 대해서 논쟁하면 세상 누구라도 깨지는 건 당연한 일이 아닌가. 조던피터슨은 임상심리학자이고 자신의 생활경험과 임상심리학적 경험을 통해 알아낸 세상과 인생의 진실을 글로 썼다. 맑시즘 대가의 스파링파트너로 뛸 사람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하지만 논쟁에서는 지젝이 이겼을지는 몰라도 사람들에게 힘을 주는 실전에서는 단연 조던피터슨이 우위에 있다.
피터슨의 글은 전세계에 범람하는 PC주의와 입진보들의 횡포에 지친 젊은이들에게 선풍적 인기를 끌고 있다. 한국에서도 2030젊은이들, 특히 남성들에게 큰 힘을 주고 상당한 지지를 받고 있는 모양이다.
반면에 슬라보예지젝을 읽고 말빨과 지적자부심이 늘어났다는 사람은 있어도 그 책을 통해 인생에 힘을 얻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아는 것이 힘을 주지 못하는 지적체계라면 조금 미심쩍지 않은가.
제 1장, < 어깨를 펴고 똑바로 서라>를 읽을 때부터 나는 그에게 빨려들었다. 그는 현실세계의 냉엄한 경쟁규칙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존엄하게 이 현실을 헤쳐나가는 방법을 보여주었다.
젊은시절의 영향으로 나는 높은 사회적지위를 마음 깊은 곳에서는 동경하면서도 그를 얻기 위한 경쟁을 속물들의 리그로 경원시해왔다. 인류역사가 계급갈등을 통해 발전해왔으며 사회주의가 도래하면 계급이 사라진다는 맑시즘의 교의에 따라 계급을 인류에 특유한 사회문화적 현상, 언제가는 사라질 병리적 현상으로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조던피터슨은 사회적지위를 얻기 위한 경쟁은 인류에만 국한된 문화적요소가 아니라 심해에 사는 바닷가재조차도 본능으로 가지고 태어난다고 했다. 3억5천만년전부터 바닷가재는 그 단순한 뇌와 신경계에서 사회적지위와 계급에 대한 정보를 처리해왔다. 다시 말해 서열구조가 생명체의 영속적 특성, 즉 생존과 적응에 필수적인 구조로 자리잡아왔다는 거다.
인간과 바닷가재는 기본적인 신경화학이 똑같으므로 생각과 감정이 미치지 못하는 인간의 뇌 깊숙한 곳에서 우리는 사회에서 자신이 차지하고 있는 서열을 추적하고 관찰한다고 한다.
그렇게 수집한 증거를 근거로 뇌는 자동적으로 자신의 가치를 결정하는데 무서운 것은 이렇게 평가된 서열에 따라 세로토닌 분비가 결정된다고 한다. 세로토닌 수치가 낮으면 행복감이 떨어지고 고통과 불안이 증가하며, 질병에 걸릴 위험도 커지고, 오래 살 확률이 낮아진다. 게다가 세로토닌이 낮게 분비되는 상황은 세상에서 패배하기 쉽게 만들고 사회적 실패의 경험은 다시 세로토닌 분비를 감소시키는 음의 순환고리를 만들 수 있다.
여기서 그는 점점 나락으로 떨어지는 뇌와 몸과 사회의 순환고리를 끊고 양의 순환고리를 만들기 위한 해법을 제시한다.
“어깨를 펴고 똑바로 서라”.
감정은 대체로 몸으로 표현되고 그 표현 때문에 증폭되거나 줄어들 수 있다. 이 순환고리는 개인적영역을 넘어 사회적영역에서도 작용하므로 지금 움추린 어깨를 펴고 당당해질 것을 제일 먼저 주문하는 것이다. 뇌속의 패배한 바닷가재가 신경화학적으로 어깨를 움추리게 한 것을 인간의식으로 극복할 수 있는 첫걸음이 그것이다.
계급상승욕구를 언젠가는 극복해야할 속물의식정도로 생각해왔던 나에게 이 첫 장의 충격은 대단한 것이었다. 내 아이에게 도움이 되는 생활방식이 무엇일까, 구체적 생각의 근거가 보였다.
이 책에서 가장 이득을 본 게 있다면 엄마로서 꼬맹이들과의 관계설정이다. 내가 조던피터슨을 읽지 않았다면 처음부터 위에서 말한 논쟁을 하며 딸아이와 맞설 일이 없었을 것이다. 딸아이와 같은 정치평론의 입장에서 딸아이와 같은 생각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을테니까.
하지만 나는 조던피터슨을 읽으면서 세상을 거대체계로 이해하고 설명하기 위한 머릿속 싸움이 아닌 인생이라는 실전에서의 행복해지기 위한 싸움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나는 내가 부모이고 아이들이 내 보호와 책임 아래 있는 내 자식들임을 깨우쳤다. 그 동안 나는 이것이 반드시 좋은 결과로 이어질 올바른 결정이 아닐 수도 있는데 내가 엄마라는 이유만으로 길을 제시해도 될까, 망설이던 것에서 벗어났다.
내 아이의 행복을 위해서 내가 해야 할 일들이 분명히 있고 내가 해야만 할 일들이 보이면 그것은 해야 한다. 그렇게 두 아이들을 끌고 나갈 힘이 생겼다.
책은 작가의 생각을 읽어 새롭게 받아들이는 게 아니다. 내 안에 이미 있는 것들을 작가의 구체적 언어로 확인하는 과정이다.
아마도 젊은시절에는 피터슨이 말하는 바를 이해할 수도 없었겠거니와 로직을 겨우 따라잡는다 해도 "뭐 이런 책이 다 있어!"하며 던져 버렸을 게다. 하지만 지금 나는 이게 내 인생의 경험과 일치하고 내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다.
물론 동의할 수 없는 생각들도 보이지만 이 책을 읽는 내내 추상적 언어의 뜬구름을 잡던 젊은 시절을 지나 땅에 안착한 나를 발견했다고나 할까.
조던피터슨을 사람들은 보수주의자라고 한다(심지어 극우라고까지 말하는 인간도 있다). 그 말이 맞다면 나는 보수주의자가 된 것 같다. 말하자면 조던피터슨은 보수화된 내 정치적 정체성을 깨닫게 해준 고마운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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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미
때가 오면 우리 근현대사의 고비고비마다 솟아나 거리를 휩쓸다가,
때가 가면 슬그머니 뒷골목 어두운곳으로 스며 가라앉는 낡은 구호들은 지겹다.
"독재정권을 타도하자! 구태정권은 물러나라!"
때로 타도되고 때로 물러났지만 다시 타도되어야했고 다시 물러나아될 것으로 바뀌는 것을 짧은 인생에 벌써 두번이나 봤기 때문이다.
낡은 것은 낡은 것끼리 싸우고 부딪치다 무너져 역사의 뒷편으로 사라진다.
낡은 것을 떠미는 것보다 이제 새로운것을 마중나가고 싶다.
이제 내 인생에 한번쯤 새로운 구호가 대로변에 울려퍼지는 것을 들어보고 싶다.
내 인생 세번째의 구호는 달랐으면 좋겠다.
"새롭게 나라를 세우자. 새 정치를 이룩하자."
서로 상대를 가르키던 손가락을 거두어 모아 가슴에 얹고 다짐하는 구호였으면 좋겠다.
지금 그 때가 왔으면 좋겠다.
지금 그럴 수 있으면 좋겠다.
그래. 그 새로움을 위해 나부터 커밍아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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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ok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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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시대를 지나고 있다.
누구 때문에 무엇 때문에라는 여러 설왕설래도 있지만, 한번은 거쳐야될 과정으로 생각한다.
좀 거칠게 지나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우리의 역동성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허세일까?
요 얼마 동안 우리들은 여러 의미에서 자신을 커밍아웃 했다.
자신은 무엇을 커밍아웃했는지도 모르는 경우도 많지만 백일하에 '정체'를 들어냈다.
자기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구체적 사안에 대해서 정반대의 입장을 가진 것이 드러나 당황하고 심지어는 사이가 멀어지거나 나빠지는 경험들을 집단적으로 했다.
이 거친 세계를 경과하면서, 우리가 한 단계 성숙해질지 아니면 나락으로 떨어질지 최대의 분수령을 지나는 느낌이다.
이제 커밍아웃한 것을 토대로 나가보자.
솔직해졌다.
자기 쪽을 돌아보자.
아마 지금 정부의 레임덕 현상이 가속화될지 모른다.
본질이나 본체에 대한 치열한 투쟁이 아니라, 곁가지가 진영논리나 정서와 결합되면서 이런 현상을 나타내고 있다.
그것도 우리의 현실이다.
정반대 같지만, 내용이 같은 현상들이 일어난다.
틈이 생기고 있다.
새로운 정치주체와 정치문화가 등장할 수 있는 환경과 의식이 역설적으로 만들어지고 있다.
'중도' '실사구시' '구동존이' '협치' 등이 이제 극단적 세력들의 적대적 공존 속에서 구차한 모습으로 고개를 내밀던 것으로부터 당당한 단어로 중심 무대로 나와야 한다.
거듭 이야기하지만, 중도는 짜깁기나 섞어놓기나 사꾸라 같은 것이 아니다.
치열하게 이 시대의 '의'를 찾아가는 것이 중심이 되어 '창조성'과 '포용성'을 함께 갖는 것이다.
이제 좁고 구차한 골목에서 나와 자신을 당당하게 커밍아웃할 때라고 생각한다.
갈등이나 진영 싸움은 이상할 것이 없다.
현실에 바탕을 두고, 미래를 향한다면 그 싸움은 사회를 한 단계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동력으로 된다.
가장어려운 것은 현실과 유리된 낡은 관념과 정서가 갈등과 싸움의 바탕이 될 때, 사회를 해체시키고 나라를 쇠퇴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제 이런 저런 극단들이 사라져가고 있다.
묵은 업을 해소하는 방식이 거칠다.
새로운 것이 나와야 이런 상황을 벗어나 미래를 열어갈 수 있다.
거칠음을 역동성으로 전환할 수 있는 주체의 형성을 위해서,
그 새로움을 커밍아웃하자!
새벽의 단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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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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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서 나는 언제든 하늘의 호출이 있으면 돌아가야만 하는 임시거주자에 불과하다는 사실.
이렇게 살면 기한을 아무리 연장해봤자 인생 성적표는 크게 달라지지 않으리라는 것.
그럼에도 계속 이렇게 살 수밖에 없으리라는 것.
이제 조금 더 이 순간에 집중하여 더 소중히 더 고맙게 여기게는 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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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미
철학이 별 건가
얼마 전 독서모임에서 하이데거에 관한 박찬국교수의 개설서 <삶은 왜 짐이 되었는가>를 다루었는데 참 좋았다.
무엇보다 읽기 쉬웠고 내용이 알찼다. 박교수가 하이데거를 자신의 것으로 충분히 소화한 후에 쓴 책이라는 신뢰감이 들었다.
그래서 그 시리즈를 찾아서 다음편으로는 니체를, 마지막으로는 쇼펜하우어를 읽었다. 역시 좋았다.
검색해봤는데 철학계에서는 이 삼자의 관계를 밀접하게 다루는 것 같진 않다. 박찬국교수도 무엇을 염두에 두고 세명의 철학자를 연달아 다루었는지 밝히지 않았다.
하지만 이 책들을 통해 내가 이해한 바로는 쇼펜하우어에서 니체로, 니체에서 하이데거로 이어지는 생각의 흐름이 뚜렷하다는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칸트가 정립한 바에 의거, 우주적 실재인 ‘물자체’를 인식할 수 없는 인간존재의 한계를 강조함으로써 서양철학의 방향을 틀었다. 객관적진리를 인식하려는 철학적 전통을 자연과 인생에 대한 태도문제로 전환한 것이다.
그는 불교적세계관을 받아들여 세계의 본질을 욕망에서 비롯되는 악과 고통이라고 보았다. 이에 그는 금욕주의로 이를 극복하고 열반에 이르는 길을 제시했다.
니체는 쇼펜하우어의 욕망의지의 세계관을 받아들여 서양기독교문명을 반자연주의라고 비판하면서 그리스로마적 인간정신의 회복을 주장했다.
그는 성욕에서 사랑이 나온 것처럼 인간의 모든 욕망을 억압하는 쪽보다는 정신화하고 승화하는 데서 진정한 인간다움이 나온다고 했다.
하이데거는 더 나아가 현대기술문명의 위기를 진단하고 과학기술과 진화론에 오염된 인간존재의 본질을 회복하기를 주장했다.
그는 인간을 이성적존재로 파악한 서양철학전통이 극에 달한 것이 바로 과학기술문명이고 인간은 그 거대기계 속의 부품으로 소모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삶이 충만해지기 위해서는 ‘시인으로서 지상에 거주해야만 하는’ 인간소명을 회복해야 한다고 했다. 즉 모든 존재를 경이 속에 바라볼 때 사물은 신비를 드러내고 존재는 의미를 발한다.
하지만 이들은 선각의 사고에 올라탔으면서도 인간실존의 역사적과제에 따라 이를 극복하는 쪽으로 생각의 연쇄고리를 이어왔다.
먼저 니체는 욕망을 생의 본질이라고 보면서도 “생존이나 종족보존이 아닌 자신을 강화시키고 고양시키려는 욕망이 생의 본질”이라면서 쇼펜하우어를 뒤집는다.
하이데거는 자신을 맹목적으로 강화하고 증대하는 것 외의 다른 목적을 전혀 갖지 않는 ‘지배에의 의지’가 현대인들을 사로잡아 노예로 만들어버렸다며 니체를 직격하고 있다.
거칠게 말하자면 쇼펜하우어가 삶의 욕망을 단죄하고 거부했다면 니체는 권력의지로 삶을 장악하고 즐기는데 이르고 하이데거는 권력의지의 질주를 비판하고 삶의 목적성을 회복하자는 것으로 보인다.
맑시즘쪽에서 그렇게 욕을 해대는 관념철학이 뭔고 했더니 결국 삶의 자세를 말하는 거였다. 삶에 대한 느낌과 해석과 실천의지를 밝혀놓은 것이 철학이었다.
이렇듯 철학을 논리적으로 체계화된 에세이라고 한다면
나의 인생관과 쇼펜하우어, 니체, 하이데거의 철학사상은 엄밀한 개념구사와 논리적 정합성말고 무슨 차별성을 가질 수 있을까.
이 책들을 읽은 소감을 한 마디로 말하자면 철학이 별 거 아니라는 것이다.
모두 자신의 인생, 타고난 성격과 환경에서 비롯된 실존을 주재료로 해서 삶의 윤곽과 의미를 체계정합적으로 서술하려는 노력이 철학 아닌가.
그러니 한 사람의 철학을 깊이있게 이해하는 것보다는 여러철학자들의 철학을 두로 살펴보는 것이 내 인생의 본질적문제를 해명해주는데 더 도움이 될 것 같다.
즉 해당철학의 논리일관성은 별론으로 하고 받아들이는 데에 철학적 일관성은 필요하지 않아 보인다. 삶의 여러국면과 역할에 따라 요구되는 자세가 달라지듯 원용되는 철학도 거기에 맞추면 되지 않을까.
예를 들자면, 미래를 꿈꾸는 청소년기나 사회생활 신나게 시작하는 야망가득 사회초년생 때는 니체를,
사회생활에 진력이 나고 삶의 의미에 목마를 장년기에는 하이데거를,
우울하고 외롭고 슬퍼서 혼자 누워있을 때는 쇼펜하우어를 읽는 것이다.
인생의 리듬에 맞는 철학을 택하여 그 굽이치는 인생의 국면을 깊이 맛보고 음미하고 승화하여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다.
철학자조차도 자기 철학책에 써진 대로 일관성있게 살지 못했다.
젊은시절 써놓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가 말년에 히트하여 명성을 누리게 되자 쇼펜하우어조차 만족스럽게 활짝 얼굴펴고 살았다고 하지 않은가.
철학의 체계는 논리적으로 정돈되어야 하지만 인생은 정연할 수 없는 것이다.
박찬국교수는 기독교세례를 받은 어린시절을 거쳐 극심한 사춘기를 겪으며 인생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철학에 덤벼든 사람이다. 그를 위해 대학에 들어와서는 맑시즘에 빠졌고 거기서 새로이 몸을 일으켜 서양과 동양적 사유에 천착한 이력을 갖고 있다.
그렇기에 서양기독교사상과 맑시즘을 함께 거쳐온 같은 86세대로서 더 이해가 되고 공감이 가는지도 모른다.
사회생활에 진력이 나고 삶의 의미에 목마를 장년기에는 하이데거를,
우울하고 외롭고 슬퍼서 혼자 누워있을 때는 쇼펜하우어를 읽는 것이다.
인생의 리듬에 맞는 철학을 택하여 그 굽이치는 인생의 국면을 깊이 맛보고 음미하고 승화하여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다.
철학자조차도 자기 철학책에 써진 대로 일관성있게 살지 못했다.
젊은시절 써놓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가 말년에 히트하여 명성을 누리게 되자 쇼펜하우어조차 만족스럽게 활짝 얼굴펴고 살았다고 하지 않은가.
철학의 체계는 논리적으로 정돈되어야 하지만 인생은 정연할 수 없는 것이다.
박찬국교수는 기독교세례를 받은 어린시절을 거쳐 극심한 사춘기를 겪으며 인생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철학에 덤벼든 사람이다. 그를 위해 대학에 들어와서는 맑시즘에 빠졌고 거기서 새로이 몸을 일으켜 서양과 동양적 사유에 천착한 이력을 갖고 있다.
그렇기에 서양기독교사상과 맑시즘을 함께 거쳐온 같은 86세대로서 더 이해가 되고 공감이 가는지도 모른다.
젊은 시절 지적호기심으로 당시 유행하던 니체, 까뮈, 사르트르를 집어들었다가 모호한 언어의 향연속을 헤매다 나온 기억이 난다. 번역서는 문장이 너무 거칠었고 개설서는 보이지도 않아서 철학은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어디 철학뿐이었겠는가. 대학가의 학적 풍토마저 무르익지 않아서 자기 전공분야를 제대로 이해하고 전수하는 교수님을 찾아보기 어려운 시절이었다.
나같은 일반독자가 철학사상의 전모를 파악함은 물론 그를 비판하며 자신의 견해를 세울 야망을 품을 수 있을만큼 우리나라 학계가 여물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겠지. 물질적 풍요와 함께 내가 모르는 지적세계의 문이 그 동안 활짝 열려졌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박정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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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련꽃 그늘아래 야한 단상.
생각하면 할수록 우리네 인생에는 재미가 없다.
놀이가 없다. 놀이문화 자체가 없다.인생이 이렇게 재미없는 건지 미처 몰랐다.
옛 놀이문화는 죽고 새 놀이문화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 재미없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70년대 내 어린시절만 해도 이런 꽃시절에는 그 험한길 버스타고 기차타고 또 버스 갈아타고서라도 기어코 동네사람들이 한데 모여 놀러들 갔다.
지지리도 못살고 어려운 시골 우리마을 사람들도 그랬다.
계를 조직하여 봄이면 꽃놀이, 가을이면 단풍놀이를 갔다. 그 중의 한 사람은 반드시 장구를 메고 갔고 때로 꽹가리도 끼었다.
꽃그늘아래 자리를 펴고 오랜만에 배불리 먹고 마시다 드디어 판을 벌였다.
돌아가며 노래를 불렀는데 처음 낀 새색시도 고개를 꼬아가며 이미자처럼 목청을 돋구었다.
노래로 분위기가 달구어지면 장구소리를 시작으로 모두 일어섰다.
그 음전하기로 소문난 종갓집며느리 우리엄마도 조심조심 팔을 휘젓더라.
밥집 술집을 가리지 않고 술 한잔 들어가면 얼근히 취기가 오른 남정네들은 상다리가 부러져라 젓가락장단에 맞춰 악을 쓰고 놀았다.
홍도오야아~~~우지마아라~~~오옷빠아가아 이이이있따아! 가 그들의 십팔번이었다.
지금은 아무도 그러지 않는다. 유신시절인가 그 즈음에 경범죄처벌법으로 단도리를 제대로 당한 탓이 크다. 그 다음에는 공동체문화, 공동체 자체가 해체되어버린 탓이 크다.
도동당동당 춤노래문화는 퀴퀴한 지하노래방에서 악을 쓰는 것으로 부활을 꾀하고 일부 용감한 젊은이들은 클럽으로 일부 용감한 노장층들은 콜라방을 전전하는 것으로 명맥을 이었으나 꽃그늘과 단풍그늘의 아취가 어디 지하방까지 미치겠는가! 음습해지고 격렬해지고 더 위험천만하게 번질 불조심사례가 속출한다.
산과들을 뛰어놀던 그 붉은 혈기를 지하에서 풀지 못한 청년과 중장년, 노년층은 공히 핸드폰만 붙들고 노는게 낙이 됐다.
애초에 놀아야 되는 에너지가 잘못 풀린 터라서 손가락장단은 깊이와 신중함을 잃고 우다다다! 쌈박질 댓글로만 흘러간다.
그렇잖아도 에너지넘치는 이 족속들이 숨구멍을 막아놓으니 과잉정치화와 과잉애국주의로 끼를 발산하는 것이다.
아! 우리에게는 노는 문화가 필요하다. 텔레비보고 핸드폰보고ㅡㅡ 보고 보고 보는 것 외에 몸을 써서 맺힌 감정을 풀고 흥을 풀어줄 놀이문화가 필요하다.
초등학교에서는 포크댄스라도 가르치고 중고등학교에서는 방송댄스를 필수교과로 이수케하는 것으로 물꼬를 트자. 체육을 즐기는 운동으로 바꿔 놀기특기종목을 하나씩 만들어주자.
운동을 즐기게 하고 춤을 가르치고 노는 것을 가르치자.
나는 춤 한번 못 춰보고 죽을 팔자지만 내 아이들에게까지 이런 재미없고 살벌한 세상을 물려주고 싶진 않다.
우리세대야 좋은세상 오기만 바라며 투쟁하는 것으로 날이 샜다지만 좋은세상이야 끝도갓도없는 것이고 덜좋더라도 재미난세상에 내 아이들, 손주들이 살았으면 좋겠다.
얼마전에 유투브로 평양시민들이 대동강가에서 노는 모습을 봤는데, 딱! 우리 어린시절 엄마아빠 모습이더라.
쿠바 사람들이 서늘한 해질녘만되면 거리로 몰려나와 춤을 춰대는 것은 또 어떤가.
가혹한체제압박과 경제적 곤란속에서도 비참하지만은 않고 나름 재미지게 살아가는 건 아직 놀이문화가 죽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우아한 목련꽃그늘아래 단상이 어울리지 않게 야하고 난하고 알록달록하다.
하지만 우리사회에도 이제 좀 나비처럼 가볍고 즐거운 놀이문화가 필요할 때다.
이 나이 되어보니 인생 뭐 별건가 싶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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