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5/01

Kang-nam Oh | 이집트 여행기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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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여행기⑧ – 사막의 교부들

‘이집트’하면 종교학이나 기독교에 관심이 있는 이들은 기독교 역사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이집트 ‘사막의 교부들’(Desert Fathers)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토마스 머튼도 이들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한 결과 이들의 지혜와 선불교 선사들의 가르침이 어떻게 비교될 수 있는지 알고 싶어 D. T, Suzuki에게 편지를 보낸 적도 있었습니다.  제가 이번 여행에서 이 사막 지방에 가보지는 못했지만 평소 흥미를 가지고 있었기에 이집트 여행기의 한 부분으로 이들에 대해 간단히 언급해보고자 합니다.
사막의 교부들은 대략 3세기부터 주로 이집트 나일강 하류 델타의 서북쪽 스케티스(Scetes) 사막에서 은둔생활과 금욕적인 생활을 하면서 신과 가까워지거나 신과 하나 되려고 노력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남자들 뿐 아니라 소수의 여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럴 경우 사막의 교모(Desert Mothers)라 하기도 합니다.
처음 이곳에 온 이는 로마 황제 데치우스(Decius) 치하에서 있었던 기독교 박해 기간(249-251)을 피해 들어온 테베의 바울(St. Paul of Thebes, 227-341)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가장 유명한 이는 대 안토니우스(St. Anthony the Great, 251-356)로서 기원후 270년 경 이 사막으로 들어와 사막 수도원 운동의 창시자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사막의 교부/교모들이 처음에는 개인적으로 혼자, 혹은 두 세 사람이 모여 동굴이나 오막살이에서 기거하며 수행하였는데, 날이 가면서 함께 모여 일정한 규칙을 정하고 공동체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나중 조직적인 기독교 수도원 운동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공동체 성격의 조직적 수도원을 남자를 위해 9개, 여자를 위해 2개를 창설한 사람이 그 유명한 성 파코미우스(St. Pachomius, 290-346)였습니다. 
기원후 350년 경에는 수천 명이 이곳 사막으로 모여들어서 아타나시우스가 “사막이 도시가 되었다”고 증언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청빈, 봉사, 극기의 삶을 본받아 살기로 서약하고, 예수님이 어느 청년에게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고 하면, 가서 네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어라. 그리하면, 네가 하늘에서 보화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19:21)라고 한 말씀을 문자 그대로 실천하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의 가르침을 모은 것이 <사막의 교부들의 말씀(Sayings of the Desert Fathers)>이라는 글 모음으로 내려오고 있습니다. ‘사막 교부들의 지혜’ 등의 제목으로 한국어로 번역된 책도 많습니다.
이들의 수행 방법은 주로 침묵과 금식과 기도였습니다. 이들의 삶과 수행법은 중세 경건주의 운동이나,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 암송, 베네딕도(분도) 수도원 규칙, 심지어 감리교 부흥 등 기독교 역사 전반에도 계속 영향을 주었지만, 특히 동방정교회 수행법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는데, 그중 하나가 Hesychasm(헤시카주의) 수행법입니다. 그리스어 ‘hesychia’란 고요함, 침묵 등을 뜻하는 말인데, 이 수행법 중 하나는 구체적으로 끊임없이 “주 예수 그리스도, 제게 자비를 베푸소서”하는 “예수 기도(Jesus Prayer)”를 외우는 것입니다.
이 수행법을 실천한 어느 러시아 청년의 생생한 경험이 책으로 나왔는데, 제가 번역하고 대한기독교서회에서 2003년에 낸 <영적 삶을 풍요롭게 하는 예수의 기도>입니니다. 이 책에 대해 aladin 전자서점에 나온 소개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책 선전하는 것 같아 죄송하지만 책을 사시라는 것이 아니라 이런 책이 있다는 것을 알려드릴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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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0년대 후반 러시아의 한 시골 청년이 쓴 것으로 알려진 책. '‘쉬지 않고 기도하는' 삶이 어떤 삶인지 보여준다.
   주인공은 어느 날 성경에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을 읽고 어떻게 하는 것이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인지, 그 방법을 찾기 위해 순례의 길을 떠난다. 그 길에서 순례자는 큰 스승을 만나 '예수의 기도(주여, 제게 자비를 베푸소서)'를 배우고, 하루에 3,000번씩, 6,000번씩, 나중에는 1만 2,000번씩 반복하여 기도를 함으로써 기도가 마음 깊은 곳에 이르며 평온해지고 하나님과 합일되는 황홀의 경지를 체험하게 된다.
   이미 영어로도 여러 번역본이 출간되어, "러시아 영성의 고전" (휴스턴 스미스 교수, 미국의 종교학자), "지난 100년 동안 나온 가장 영향력이 큰 종교 서적으로 사람의 삶을 바꾸어 주는 희귀한 책들 중 하나"(샌프란시스코 대학 종교학자 제이콥 니들먼 교수) 등의 찬사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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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중에는 <필로칼리아> 같이 그 청년이 감동 받았던 사막 교부들의 책이나 가르침들을 많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참고: 토마스 머튼은 기독교 역사에서 사막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막 생활을 한 것, 예수님이 광야에서 40일간 금식 기도를 한 것, 바울이 사막에 가서 2년 동안 지낸 것 등입니다.  사막은 오로지 하늘만 바라볼 수 밖에 없으니 하느님과 가까울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머튼도 사막으로 가야하나 고민하다가 결국 지리적 사막이 아니라 심리적, 영적 사막으로 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켄터키 주 게세마니 트라피스트 수도원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의 책 <토마스 머튼이 길어낸 사막의 지혜>(바오로의 딸, 2011) 참조.


Kang-nam Oh
3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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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여행기⑦ - 도굴 원조국

이집트 무덤들은 왕들의 무덤이든 귀족들의 무덤이든 거의 모두 도굴 대상이었다고 합니다.  특히 왕들의 무덤에는 엄청난 양의 금은보화가 함께 매장되었기 때문에 무덤이 완성되는 다음 날이면 심지어 ‘무덤을 만든 이’들에 의해 도굴되는 경우도 허다했다고 합니다. 도굴은 어디에나 있는 현상이지만 3천년, 4천년 전 그 옛날에도 도굴이 그렇게 심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라 여겨집니다.
피라미드처럼 무덤이라는 것이 확실한 것은 그대로 도굴꾼들에게 노출되기 때문에, 어떻게든 도굴되지 않으려는 노력의 결과가 “왕가의 계곡(Kings’ Valley)”에 즐비한 왕들의 지하 무덤 조성으로 나타났습니다. Luxor에서 멀지 않은 왕가의 계곡에 가면 밖으로 드러나 보이지 않게 계곡 양 옆 언덕을 파고 왕들의 무덤을 조성하여 두었습니다.  현재까지 64개인가 66개의 무덤이 발견되었는데, 지금까지 발견된 무덤들은 거의 다가 도굴꾼들의 손을 타 텅 빈 상태입니다. 유일하게 투탕카멘과 그의 이모 겸 양어머니 네페르티티 왕비의 무덤만이 도굴을 면한 채 발견되었습니다. 
투탕카멘은 기원전 약 1331년 10세의 어린 나이로 이집트 제18왕조 12대 왕으로 등극하여 18세에 사망했습니다. 1922년에 발견된 그의 무덤은 다른 왕들의 무덤과 비교하여 작은 편에 속하지만 도굴을 면한 덕택에 거기서 발견된 황금 마스크로 유명세를 타게 되었습니다. 모든 왕들은 사후 미라로 처리하고 얼굴 위에 생전의 모습과 같은 황금 마스크를 씌우는데, 이 투탕카멘의 황금 마스크는 잘 생긴 젊은이의 얼굴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무덤에는 그 외에 5천 여점의 유물이 발견되었는데 그것을 밖으로 가져 나오는 데만 3년이 걸렸다고 합니다. 현재 그 황금 마스크와 유물들은 카이로에 있는 국립 이집트 문명 박물관(National Museum of Egytian Civilization) 2층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도굴되지 않은 무덤으로 최근에 발견된 무덤이 하나 더 있습니다. 이집트의 다신론 신앙을 태양신만을 섬기는 유일신 신앙으로 종교개혁을 단행한 제18조 제10대 왕 아크나톤 왕의 왕비로 그의 종교개혁을 함께 실행한 네페르티티(BCE 1370-1330경) 왕비의 무덤입니다. 그의 석회석 채색 흉상은 1914년 발견되어 현재 베르린 알테스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지만 그의 무덤은 최근까지 찾지 못하다가 몇 년 전에 (2021년에?) 찾았답니다.(연도를 정확히 아시는 분은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희가 갔을 때 ‘선택 관광’의 하나로 들어가 보았는데, 가이드 말에 의하면 입장료는 우리가 선택한 선택 관광 중에서,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비싼 편에 속한다고 했습니다.  그 안의 벽화에 묘사된 여인의 의상이 그림마다 달라 패션 전시회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습니다.
Alvin Dunn
Reply3 d


Kang-nam Oh
23 April at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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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여행기⑥ – 금자탑(金字塔)이 이집트에?

이집트로 여행가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피라미드를 보러 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코로나19 때문에 방문객 수가 좀 내려갔을 수도 있겠지만 한 때 일 년에 천5백만 명 이상이 피라미드를 보러 왔다고 합니다.  이집트는 프랑스, 이탈리아, 중국 등과 함께 조상 덕에 사는 대표적인 국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궁금해 하실 것 같아 처음부터 말씀드립니다.  우리가 보통 ‘금자탑’이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 후세에 길이 남을 기념비적 업적을 일컫는 말이라는 정도로 알고 있지만 사실 이것은 피라미드를 가리키는 한자어입니다. 피라미드 모양이 쇠금(金)이라는 글자(字)의 모양과 닮았다고 하여 ‘金字塔’이라 했다고 합니다.  중국, 한국, 일본 한문문화권에서 공통으로 쓰는 말인데, 한국이나 일본에서는 ‘피라미드’라고 부르는데, 중국은 아직도 피라미드라는 말이 아니라 금자탑이라는 한자어를 사용한다 하니 이 말은 중국 발명품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이집트에는 현존하는 70기인가 138기의 피라미드 중에서 제일 큰 기자의 大피라미드에 가 보았습니다.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알려진 이 피라미드는 이집트 고왕국 제4왕조의 쿠푸(Khufu) 왕의 무덤으로 지어졌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기원전 2700년에서 2500년 사이에 지어졌다고 하니 2500년이라고 해도 4천5백 년 전. 그러니까 지금이 단기로 4356년, 단군 할아버지보다 더 오래된 건축물인 셈이네요. 
이 피라미드의 높이는 146.6m, 하단 한 면의 길이는 230.33m라고 하는데, 현재 높이는 약간 낮아졌다고 합니다. 230만개의 석회암과 화강암으로 이루어졌는데, 그 무게가 6백만 톤이나 된다고 하네요.
피라미드를 처음 보면서 그동안 상상했던 것보다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정확하게 다듬어진 직사각형 돌을 차곡차곡 쌓아 올린 매끈한 건축물인 줄 알았는데, 울퉁불퉁하게 쌓여 있어 멀리서 보면 거의 거대한 흙더미처럼 보였습니다.  사실 처음에는 이런 울퉁불퉁한 돌들 위에 반죽한 석회암을 바르고 꼭대기는 황금으로 장식하여 더없이 아름다웠는데, 후대에 석회암이나 돌들을 다른 건축물을 위해 무단 채취해 갔기에 지금의 겉모양을 지니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단 쿠푸 왕의 아들과 손자의 피라미드가 그 주위에 있는데 손자의 피라미드 거의 윗부분에는 아직도 석회암 마감재가 남아 있어 매끄럽게 보였습니다.
이 대 피라미드를 짓는데 10년인가 20년 정도 걸렸을 것 같다는데, 지금까지 노예들의 피땀으로 지어졌으리라 믿고 있었지만, 1986년에 피라미드 근처 마을에서 발견된 유물이나 벽화에서 노예가 아니라 농민들이 나일강이 범람해 농사를 지을 수 없는 기간 동안 임금을 받으며 일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고 합니다. 한 일꾼은 어제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오늘은 일하러 갈 수가 없다는 식으로 말한 기록이 발견되기도 했다네요. 이들은 심지어 임금 쟁의까지 했다고 합니다. 한편 피라미드 공사도 농민들이 농한기 동안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마련된 측면도 있다고 합니다. 
<십계>나 <이집트의 왕자> 같은 영화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전을 짓는데 동원되어 말할 수 없는 고역을 치르고 있었다는 식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신전 자체의 건설과는 관계 없고 오로지 흙와 짚을 섞어서 벽돌을 만드는 데만 동원되었다고 합니다.
왕의 관은 피라미드 꼭대기에서 3분의 1 정도 높이에 위치하고 있는데, 관광객들은 거기를 보기 위해 전에 도굴단이 만든 통로를 통해 피라미드 안으로 들어갑니다.  저도 따라서 들어갔는데, 통로가 좁고 가파르고 낮아서 바닥에 나무막대기 같은 것을 박아 놓은 것을 밟고 기다시피 하며 올라가면서 여러 번 머리를 위에 있는 돌에 부딪히기도 하고 내려오는 사람들과 몸을 비빌 정도로 겨우겨우 비켜 가면서 왕의 관이 안치된 방에 도달했습니다.  관은 붉은 화강암으로 되어 있는데, 물론 지금은 빈 관이었습니다. 
기독교인들 중에는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사흘 되던 날 사람들이 무덤에 갔을 때 ‘빈 무덤’을 보고 예수님이 부활했다고 생각했다는데, 이집트인들이나 관광객들은 피라미드 안 ‘빈 관’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이집트 역대 왕들의 미라는 미라 박물관에 함께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Kwon Ji-Yo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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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ly5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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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ng-nam Oh
20 April at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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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여행기⑤ - 이집트의 신(神)들

이집트에는 신들이 많았습니다.  이집트가 지금은 기본적으로 이슬람 국가여서 알라 신 한분만 믿는 유일신 종교를 신봉하고, 이집트에 사는 콥트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로 유일신 종교인 그리스도교를 받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옛날에는 2천 이상의 많은 신들을 믿는 다신교 국가였습니다.  그 중 유명한 신은 남신 오시리스(Osiris), 여신 이시스(Isis), 그리고 이들의 아들 호루스(Horus)입니다. 
 땅의 신 게브(Geb) 남신과 하늘의 신 누트(Nut) 여신 사이에서 2남2녀의 신들이 탄생했는데, 오시리스(남), 이시스(여), 세트(남), 네프티스(여)였습니다. 오시리스가 이집트의 최고 권력자 왕으로 훌륭한 일을 많이 했는데, 그의 동생 세트가 그의 지위를 탐하여 그를 죽이기로 했습니다. 신들도 죽임을 당한다는 것이 좀 이상스럽습니다만, 이 이야기에 관계되는 몇 가지 버전 중 하나에 의하면, 어느 파티에서 세트는 훌륭한 관을 가지고 들어와 누구든지 이 관이 맞는 이에게 이 관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오시리스가 들어가 보았는데 세트는 관 뚜껑을 닫고 관을 나일강에 던져버렸습니다.  오시리스의 여동생이자 동시에 아내이기도 한 이시스가 관을 찾아냈지만 세트에게 발각되고 말았습니다. 관이 저절로 돌아왔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아무튼 이를 발견한 세트는 오시리스의 시체를 14토막으로 내고 이집트 각지의 들판에 흩어버렸습니다. ‘토막 살인’이 아니라 ‘토막 殺神’인 셈이네요.  
이시스는 다시 오시리스의 토막 난 몸의 부분들을 다 모아 붙인 뒤 생명을 불어넣어 오시리스를 부활시켰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남성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찾지 못했다고 합니다.  어느 설에 의하면 세트가 그것을 잘라 강물에 던져버려서 물고기가 먹어치워버렸기 때문이라 하기도 합니다. 아무튼 흙(혹은 황금)으로 그 부분을 만들어 붙였습니다. 이렇게 불완전한 몸이었지만, 일단 새로 부활한 오시리스를 통해 이시스는 임신을 하게 되고 거기서 태어난 아들이 호루스입니다. 호루스는 자라나 세트를 물리치고 이집트 전체를 치리하는 왕이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참고: 호루스가 세트와 싸우다가 눈 하나를 잃었지만, 지혜의 신 토트가 호루스의 눈을 찾아주었는데, 그것이 유명한 ‘우자트의 눈’이라는 것입니다.
이 신화와 관계해서 몇 가지 설왕설래가 있습니다.  첫째는 이시스가 오시리스와의 직접적인 성관계 없이 호루스를 낳은 것과 마리아가 남자와 상관없이 예수님을 낳은 것과 무슨 관계가 있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관계가 있을 것이라 주장하는 사람도 있고, 근거 없는 억측이라 반박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시스가 아기 호루스를 안고 있는 조각상이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모습과 흡사하다 해서 이런 논쟁을 더욱 부추기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둘째, 이집트 ‘아누’라는 곳에서는 오시리스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기 위해 그의 죽음과 부활을 재현하는 축제를 거행했습니다. 오시리스의 다른 이름이 Azar이어서 ‘Azar의 부활’ 축제인 셈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1장1-45절에 보면 예수님이 베다니에 살다가 죽은 나사로를 3일만에 부활시켰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느 학자들에 의하면 이 이야기는 유대인들이 Azar라는 이름에 엘리야, 엘리사라고 할 때처럼 신을 의미하는 El을 붙여 Elazar가 되고 여기서 E가 탈락되어 Lazar, 우리말 ‘나사로’가 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이와 함께 ‘베다니’라고 하는 곳은 이집트 Anu에다가 유대인들이 베델, 베들레헴 할 때처럼 지명에다 붙이는 Beth를 붙여서 ‘Bethanu’, ‘베다니’라는 유대식 이름이 된 것이라 보기도 합니다. 결국 베다니의 나사로 부활 이야기는 아누에서 있었던 오시리스의 부활 이야기를 원용했다는 뜻이지요.  믿으시거나 말거나 하는 것은 여러분의 몫이겠지요. (이 이야기는 제가 작년 부활절에 페북에 소개했고 자세한 것은 <오강남의 생각>(현암사, 2022) 27-30쪽에 나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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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ng-nam Oh
17 April at 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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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여행기④ - 모세 이야기

(이번 글은 좀 길어졌습니다. 2부로 올리려다가 한꺼번에 올립니다. 시간이 허락하시는대로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지난 번 홍해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홍해 하면 모세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히브리어 성경 <출애굽기> 혹은 <탈출기>에 의하면 아기 모세가 나일강 갈대 밭에서 ‘건짐을 받고’ 장성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홍해를 건넜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집트 방문 첫날 파라오 왕의 딸이 나일강가에 나왔다가 바구니에 담겨 나일강 갈대숲에 떠 있는 모세를 건졌다는 곳을 방문했습니다. 그 때는 강이었으나 지금은 아스완 댐에서 물을 막아 아스완 댐 이하 하류는 상당 부분 육지로 변했습니다.  따라서 모세가 떠 있었다는 나일강 갈대숲도 지금은 육지로 변해 있었습니다. 이곳에 Ben Ezra Synagogue라는 유대교 회당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보수 중이라 들어가 볼 수는 없었습니다.
 유대교에서는 모세를 유대교의 창시자라 여깁니다. 유대교는 자기 조상들의 이집트 탈출사건(Exodus)을 자기들 신앙의 중심이며 초석이라 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으로 그들은 그들 고유의 신 야훼 신을 알게 되고, 하나의 백성으로서의 민족적 정체성을 확립하게 되고, 선민(選民)의식도 갖게 되고, 십계명이라는 기본 법률도 가지게 되고, 자기들 고유의 신과 언약 관계도 설정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모세를 매개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새로운 국가, 새로운 종교, 새로운 신앙 의식을 확립하게 된 셈입니다. 
  이 이야기의 배경으로 <창세기>에서 야곱, 이삭, 아브라함이 언급되고, 더 거슬러 올라가 최종적으로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 결국은 천지창조의 이야기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이 이야기들은 어디까지나 모세와 이집트 탈출 이야기를 뒷받침하기 위한 배경 이야기라 보아야 합니다.
I. 강에서 건짐을 받다
 모세를 나일강에 버리게 된 이야기를 하려면 왜 모세가 이집트에 태어나 어째서 그런 위험에 처했는지 알아야겠지요. 아시겠지만, 직접적인 원인은 야곱과 열두 아들입니다. 히브리 성서 <창세기>에 의하면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 이삭의 아들 야곱은 아버지 이삭과 쌍둥이 형 에서를 속인 죄로 그의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가 그의 두 딸 레아와 라헬을 아내로 맞게 됩니다.  라헬을 사랑하여 그를 얻기 위해 7년간 일했지만 외삼촌의 속임수로 원하지 않던 레아와 먼저 첫날밤을 보내게 되어, 라헬을 위해서는 다시 7년간 일을 해주어야만 했습니다. 야곱은 이 두 여인과 그들의 여종들을 통해 모두 열 두 아들을 얻게 되었습니다. 
야곱은 그가 특별히 사랑하던 라헬에게서 난 요셉과 베냐민에게는 채색 옷을 입히는 등 그들을 몹시 편애했습니다. 따라서 다른 아들들이 요셉을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더욱이 요셉이 밭에서 곡식 단을 묶는데, 자기 단은 일어서고 형들의 단은 둘러서서 자기 단에 절하는 꿈도 꾸고, 또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자기에게 절하는 꿈도 꾸었다고 말하여 더욱 큰 미움을 사게 되었습니다. 
하루는 야곱이 요셉에게 형들이 들에서 양을 치고 있는데, 어떻게 하고 있는지 보고 오라 심부름을 시켰습니다.  요셉이 그들에게 다가가자 그들이 “꿈꾸는 자가 온다”고 하면서 그를 구덩이에 던져 죽이려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마침 이집트로 가는 미디안 대상(隊商)들을 보고 요셉을 그들에게 팔아 넘겼습니다.  이집트로 끌려간 요셉은 파라오(바로)의 친위대장 보디발 집에 팔려 갔습니다. 
 몇 차례에 걸친 보디발 아내의 유혹을 거절하다가 결국 감옥에 갇혔고 거기에서 왕의 술 맡은 관원과 떡 굽는 관원 두 사람을 만나 그들의 꿈을 해몽해 주었는데, 요셉의 해몽대로 술 맡은 관원은 사흘 만에 복직하여 다시 왕을 섬기게 되고, 떡 굽는 관원은 죽임을 당했습니다. 2년이 지난 어느 날 파라오가 꿈을 꾸고 그 뜻을 몰라 고민할 때 술 맡은 관원이 요셉을 기억하고 그를 천거하여 왕의 꿈을 해몽하게 하였습니다.  
 왕은 꿈에서 일곱 마리 살진 소가 나타났는데 그 후 일곱 마리 파리하고 흉한 소가 나타나 살진 소를 먹어버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깼다가 다시 잠들어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이 나타나고, 그 후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이 나타나 충실한 일곱 이삭을 먹어 버리는 꿈을 꾸었습니다. 일종의 예지몽 같은 것인데, 요셉은 이것이 이집트에 7년간 큰 풍년이 들었다가 7년간 흉년이 들 것이라 해몽하고, 왕에게 건의하여 7년 풍년 동안 곡식을 잔뜩 비축해서 7년 흉년을 대비하라고 했습니다. 이 꿈 해석을 들은 왕은 요셉을 이집트의 총리로 삼았습니다.
 정말로 7년 풍년 다음에 7년 흉년이 들었습니다. 흉년은 이집트 뿐 아니라 인근 지역에도 들어서 가나안에 살던 야곱의 식구들도 굶어 죽게 되었습니다. 야곱은 이집트에는 곡식이 많이 비축되어 있어 거기 가면 곡식을 구할 수 있다는 소식을 듣고 아들들을 그리로 보냅니다. 형제들이 요셉에게 절을 하며 곡식을 팔라고 간청했습니다. 길고 눈물 나는 이야기지만 눈물을 머금고 여기서는 생략합니다. 결론적으로 요셉의 주선으로 야곱과 그의 식솔들이 모두 나일강 하류의 기름진 땅 고센이라는 곳으로 이주하게 되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야곱도, 요셉과 그의 형제들도, 그들을 도와준 파라오 왕도 다 죽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점점 숫자가 늘어나고 강해져 갔습니다. 한참 지난 후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나타나 혹시 전쟁이 날 경우 강해진 이스라엘 백성들이 쳐들어오는 적들과 합세할 것을 두려워하여 이스라엘 가정에서 새로 태어나는 남자 아이는 모두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모세가 태어났을 때 그의 부모는 석 달 동안 아기를 숨겨놓고 키웠습니다. 그러나 아기의 울음소리가 커지면서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되자 갈대 상자에 역청과 나무 진을 칠하고 아기를 거기 담아 나일강 갈대 사이에 두었습니다.  이 때 왕의 공주가 나일강으로 목욕하러 왔다가 상자에 든 아기가 우는 것을 보고 불쌍한 마음이 들어 아이를 구하기로 하고, 모세의 어머니를 유모로 삼아 어느 정도 키운 다음 자기의 양자로 삼았습니다.  모세라는 말은 ‘물에서 건져내었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계속)
II.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해 내다
 이집트 궁전에서 왕자로 자란 모세가 어느 날 자기 동족 히브리인들이 힘들게 노동하는 것을 보았는데, 한 이집트인이 히브리인을 치는 것을 보고 그 이집트인을 쳐 죽여 모래 속에 묻었습니다.  다음 날 다시 나가 보니 두 히브인들이 서로 싸우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잘못한 사람에게 어찌하여 동포를 치느냐고 하자, “당신이 이집트 사람을 죽인 것처럼 나도 죽이려 하는 것이오”하며 덤볐습니다.  자기가 살인한 것이 탄로 난 것을 알게 되고, 왕도 이 사건 때문에 자기를 죽이려 한다는 것을 알고, 모세는 이집트에서 홍해 건너편 미디안 광야로 도망했습니다.  거기서 미디안 제사장의 딸 십보라와 결혼, 아들까지 얻으며 40년을 살았습니다.
 한편 이집트에 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더욱 고된 노동으로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소리가 하나님께 이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고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기로 하여 어느 날 불이 붙었으나 타지 아니하는 떨기나무에서 모세를 부르고, 네가 선 땅은 거룩한 땅이니 신발을 벗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이집트로 내려가 신음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해 내라고 명하셨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제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너희의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할 터인데, 내가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말할까 하고 물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그가 ‘스스로 있는 자’라고 하고 ‘스스로 있는 자’가 너를 보내 그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려 한다 말하라고 했습니다.  ‘스스로 있는 자’라는 말에서 이스라엘 신 ‘야훼’라는 이름이 나왔다고 봅니다. (성경에는 ‘여호와’라고 했습니다.)
 여러 가지 핑계를 대며 피하려고 했지만 결국 모세는 그의 형 아론과 함께 이집트로 내려가 파라오 왕을 만났습니다. 그에게 여호와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을 내보내라 했다고 전하자 왕은 도대체 여호와 하나님이 누구길래 이런 요청을 하느냐 하며 일거에 거절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나일강 물을 비롯 모든 물이 피가 되는 재앙을 내렸습니다.  그 후 개구리 재앙, 이 재앙, 파리 재앙, 가축의 돌림병 재앙, 악성 종기 재앙, 우박 재앙, 메뚜기 재앙, 흑암 재앙, 그리고 마지막 열째 재앙으로 이집트의 처음 난 사람이나 짐승을 다 죽이는 재앙을 내리자 왕은 할 수 없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떠나가도록 허락했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해서 나오는데, 홍해가 앞을 가로막았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을 떠나가게 한 왕 파라오는 이를 곧 후회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 잡아오려고 스스로 기마병을 지휘하여 그들의 뒤를 좇았습니다. 모세가 홍해 위로 손을 내밀자 물이 갈라져 마른 땅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다 건너고 나서, 이집트 군대가 뒤따라 바다 가운데로 들어왔을 때 모세가 다시 바다 위로 손을 내밀자 바다가 합쳐져 파라오와 그의 군대가 다 물에 빠져 죽게 되었습니다. (이때 이집트 군대를 지휘하고 간 왕이 람세스 2세로 추정되는데, 람세스 2세는 수장되지 않고 ‘왕가의 계곡 KV7’의 무덤에 묻혔습니다.) 이것이 히브리 성서에서 말하는 “모세의 기적”이라는 것입니다.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들은 곧장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40년을 시내 반도에서 유랑생활을 하다가 결국 모세는 120세에 죽고 여호수아가 뒤를 이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 지금의 팔레스타인으로 인도해 들어갑니다.
모세의 출생 배경과 모세의 건져올려짐, 모세를 부르심,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해 냄 등을 이야기하려다가 너무 길어졌습니다.  기초적인 성경 지식이 갖추어지신 분들은 다 아는 이야기이지만 다시 한 번 상기하자는 의미로 올려보았습니다.  자세한 것은 성경 <창세기>와 <출애굽기>를 보시면 됩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유대교의 정신사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출해 냈을 뿐 아니라 모세 오경(五經)의 저자라고 전해 내려오는 모세 이야기가 중심이고 <창세기> 이야기는 모세와 이집트 탈출 이야기의 배경인 셈입니다. 물론 현재 상당수의 신학자들은 이 이야기가 역사적 사실일 수 없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지만 역사적 진위를 떠나 그 이야기에 담긴 속내는 알아보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겠지요. 
성경 이야기는 하나의 암호(cypher)라 할 수 있습니다.  암호해독(decyphering)이 중요합니다. 흑인 신학에서는 이 이야기에서 큰 의미를 찾고 있습니다.  한국인에게는 어떤 의미일까요?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지었을 때 야훼 신에게 “이제 주님께서 그들의 죄를 용서하여주십시오.  그렇게 하지 않으시려면 주님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저의 이름을 지워주십시오.”(출32:32)라고 탄원할 정도로 자기 백성들을 자기 생명보다 더 사랑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한국 역사에서 모세 같은 지도자는 누구일까요?
차춘희
불교에서 수행의 가장 높은 단계는 내가 사라지고 중생을 위해 돕는 것이라 했는데 모세가 그러한 삶을 살아간 사람이었군요
성서를 역사적 사건으로 읽으면 모순이 많겠지만 의미사로 읽어야만 그 본뜻을 깊이 이해 할수 있겠지요!!… See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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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ng-nam Oh
차춘희 의미사로 읽기-정말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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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ng-nam Oh
12 April at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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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여행기③ - 홍해는 붉은 바다인가?

이집트 하면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건넜다는 홍해를 연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홍해(紅海)를 영어로도 Red Sea라고 하는데, 홍해가 정말로 붉은 바다일까요.  
제가 같이 간 분들과 함께 휴양의 도시 후루가와에서 반잠수함 배를 타고 홍해를 항해해 보았습니다.  바다는 이름과 달리 마치 파란 잉크를 풀어놓은 듯 완전 파란색을 띠고 있는 ‘파란 바다’였습니다.  
(참고: ‘푸른 바다’라고 하면 안 된다고 합니다. 푸른색은 ‘풀의 색’이기 때문에 초록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푸른 바다’라고 하면 영어로 green sea가 되는 셈입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나라에서 푸른색과 파란색을 구별하지 않고 섞어 쓰는 경향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모든 색깔에 우리 말이 다 있습니다. 황-노랗다, 흑-검다, 홍-빨갛다, 백-희다, 청-파랗다 등. 그런데 유일하게 록(綠)에 대해서만은 우리 말이 아니라 한자어 ‘초록색’이라 합니다. 색깔 중 산이고 들이고 우리 눈에 가장 많이 보이는 색깔이 초록인데 여기에 해당하는 우리 말이 없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결국 풀색, 푸른색이 초록에 해당하는 우리 말입니다. 따라서 ‘푸른 초원’은 맞는 말이지만 ‘푸른 바다(풀색 바다)’, ‘푸른 하늘’(풀색 하늘)이라고 하면 안됩니다. 사족이 길어졌네요.) 
아무튼 물이 파란데 왜 붉은 바다라고 했을까요?  이번 이집트 여행에서 그 연유와 관계되는 몇 가지 설을 알아냈습니다.  첫째, 후루가와에서 사막을 보여주면서 지프 운전을 하던 현지 기사에 의하면 바다에 산호초가 많아서 홍해라 했다고 합니다.  특히 보름 때, 썰물이 되면 바다 속 산호초들이 가까이 보여 홍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 설입니다.  그런데 저희가 반잠수함 배를 타고 바다 물 밑을 내려가 보았는데, 산호초가 붉지 않고 회색을 띠우고 있었습니다.
둘째 설은 홍해 연안에 붉은 산맥들이 있는데, 그 산들의 붉은 빛이 바다에 비쳐서 붉게 보이기 때문에 홍해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럴 듯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셋째 이론이 가장 설득력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를 안내하던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튀르키예(터키)를 중심으로 하는 바다의 명칭이 동양에서 잘 알려진 오방색(五方色) 이론에 의해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입니다.  아시는 것처럼 오방색이란 중앙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사방을 색깔로 표시한 것입니다.중앙은 황, 북은 흑, 남은 홍, 서는 백, 동은 청. 이렇게 다섯 가지 색깔인데, 튀르키예 사람들이 자기들 사는 곳을 중심으로 북쪽에 있는 바다는 흑해, 남쪽에 있는 바다는 홍해, 서쪽에 있는 바다 지중해는 튀르키예 말로 백해라 부르게 되었답니다. 청해는 왜 없는지 모르겠습니다만, 혹시 카스피해가 청해였는지 모르겠네요. 
그런데 왜 갑자기 오방색? 투르키예인들은 돌궐족(突厥族)의 후예들이라 그들이 동아시아권에 있을 때 오방색 개념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아무튼 홍해는 이름과 달리 붉은 바다가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Kang-nam Oh
10 April at 2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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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여행기② - 나그 함마디에서 발견된 도마복음서

이집트 여행을 하면서 내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은 생각은 카이로에서 남쪽으로 약 500 Km 떨어진 나일강 상류 ‘나그 함마디(Nag Hammadi)’라는 곳에서 발견된 ‘나그 함마디 문서’였습니다.  
 1945년 12월 어느 날, 무함마드 알리라는 이집트 농부가 다른 몇 사람과 함께 이곳 산기슭에서 밭에 뿌릴 퇴비를 채취하려고 땅을 파다가 땅속에 토기 항아리가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혹시 귀신이라도 있으면 어떻게 하나 무서웠지만 금덩어리라도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서 항아리를 열어 보았습니다.  귀신도 나오지 않고 금덩어리도 없었습니다. 그 대신 가죽으로 묶은 열세 뭉치의 파피루스 문서가 들어 있었습니다.  그 고문서가 들어있는 항아리가 금으로 가득한 항아리보다 더 귀중하다는 사실을 알 턱이 없었던 농부는 혹시 고문서라도 골동품으로 값이 나갈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시장에 가지고 가서 몇 가지 식료품과 맞바꾸었습니다. 그 후 우여곡절 끝에 이 고문서는 전문가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4세기 초 로마제국을 통일한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제국을 통치할 통일된 종교적 이데올로기로 그리스도교를 채택하고, 그리스도교 지도자들에게 그리스도교를 ‘하나의 하느님, 하나의 종교, 하나의 신조, 하나의 성서’로 통일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는 325년 약 300여명의 그리스도교 지도자들을 지금의 튀르키예 이스탄불 서남쪽에 있던 니케아에 모이게 하여 공의회를 열게 했습니다.  여기서 예수가 인성과 신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는 것을 주장한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젊은 추기경 아다나시우스(Athanasius)가 예수의 인성만을 강조한 아리우스(Arius)파를 물리쳤습니다. 그는 그 여세를 몰아 그 당시 개별적으로 떠돌아 다니던 그리스도교 문헌 중 27권을 선별하여 그리스도교 경전으로 정경(正經)화했습니다. 그후 그는 한 걸음 더 나가 367년 자기의 신학적 판단에 따라 부적절하다고 여겨지는 문헌들은 모두 파기 처분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나그 함마디 문서는 이집트 최초의 수도원 파코미우스(Pachomius)의 수도승들이 부적절하다고 지목된 도서를 수도원 도서관에서 빼어내어 항아리에 밀봉하고 산기슭에 묻어 두었던 것이라 여겨집니다.
 이 문서 뭉치들 속에는 52종의 문서가 들어가 있었는데, 이 문서들은 모두 콥트어로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콥트어 문서란 고대 이집트 말을 그리스 문자에다가 이집트에서 전해오던 글자 중 일곱 글자를 더해서 기록한 문서입니다. 이집트에는 콥트어를 쓰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었고, 지금도 이집트 콥트 그리스도인들이 인구의 약 10% 정도라고 합니다. 이들 콥트어 문서는 본래 그리스어로 된 문서를 콥트어로 번역한 것들입니다. 이 문서들중 가장 잘 보존되고 가장 획기적인 내용을 포함한 것이 바로 󰡔도마복음서󰡕였습니다.  
 <도마복음>은 지금 성경에 포함된 공관복음서와 50% 정도가 평행을 이루는 내용이지만, 공관복음서와 달리 기적, 예언의 성취, 부활, 재림 등에 대한 언급은 없고 오로지 예수님의 어록 114개를 모아놓은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우리 속에 빛으로 계신 하느님을 아는 것, 이것을 깨닫는 ‘깨달음(gnōsis)’를 통해 내가 새사람이 되고 자유롭게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집트의 경주라 할 정도로 유명한 룩소르(Luxor)에서 이집트 최대의 신전 카르낙 신전, 왕가의 계곡, 그 중에서도 새롭게 개방된 이집트 신왕국 제18대 파라오(바로) 아케나톤 왕의 부인 네페르티티의 무덤 등을 돌아보고 다음 날 버스로 5시간 걸려 이집트의 대표 휴양지 후루가다로 가는 길, 룩소르에서 북쪽으로 약 100 Km 떨어진 나그 함마디를 지나가면서, 저는 <도마복음> 해설서를 쓴 저자로서, 거기를 방문하고 싶은 마음이 꿀둑 같았지만, 이번 여행이 단체 여행이라 그냥 지나칠 수 밖에 없어 섭섭함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그 대신 버스에서 마이크를 잠깐 빌려 같이 간 분들에게 나그 함마디와 <도마복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으로 섭섭함을 달랬습니다.
안광덕
이집트 사막수도원 순례와 룩소르 가서 도마복음서 예기로 흥분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다시 충전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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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ng-nam Oh
5 April at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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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여행기 ① - 이집트 피란

지난 2월 중순 이집트에 다녀왔습니다.  이집트에서 보고 느낀 것 중 페친들에게 흥미가 있을 것 같은 제목의 글을 몇 개 올리려고 합니다.
첫째 예수님의 피란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나시자마자 이집트로 피란한 적이 있습니다.  이번 여행 첫 날 예수님과 그 부모가 피란 가서 살았을 것이라는 동굴과 그 위에 지어진 ‘아기예수 피란교회’라 불리는 콥트 교회도 보았습니다. 이 이야기의 배경은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다시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성경 「마태복음」 첫머리에 나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예수님이 태어나셨을 때 동방에서 박사들이 그의 별을 보고 이스라엘로 찾아와 헤롯 왕에게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고 물었습니다.  왕은 대제사장과 서기관을 불러 문의한 결과 그곳이 베들레헴일 것이라 일러주었습니다.  
헤롯 왕은 박사들에게 가서 아기를 찾거든 돌아와 자기에게 말해주면 자기도 가서 경배하겠다고 했습니다.  박사들이 베들레헴으로 향해 나서자 동방에서 본 그 별이 문득 앞에 나타나 그들을 인도하여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렀습니다.  동방박사들은 아기가 있는 집에 들어가 (참고: 마태복음에는 아기가 말구유에 누워있었다는 이야기가 없습니다) 아기를 보고 엎드려 경배하고 보배함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습니다.  한편 동방박사들은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는 지시를 받고 다른 길로 해서 고국에 돌아갔습니다.
 동방박사들이 돌아간 후 주의 사자가 요셉의 꿈에 나타나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개역 성경에는 애굽이라 했습니다)로 피하여 다시 지시가 있을 때까지 거기 있으라 했습니다. 요셉은 그 밤에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떠나가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살았습니다.
 헤롯은 동방박사들이 자기에게 오지 않는 것을 보고 박사들에게 속은 줄 알고 대노하여 베들레헴과 그 주위에 있는 두 살 이하의 모든 사내아이를  다 죽이도록 했다고 합니다. (참고: 아기들을 죽였다는 이야기는 예수님과 모세를 등치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한 미드라시 서술기법이라고 합니다.)
 헤롯이 죽은 후에 주의 사자가 이집트에서 요셉의 꿈에 나나타 아기의 목숨을 찾던 자들이 죽었으니 아기와 어머니 마리아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돌아와 갈릴리에 있는 나사렛에 정착했습니다.
 물론 이 이야기가 역사적으로 사실일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하는 학자들이 많은 것이 사실이지만, 사실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이 이야기에서 몇 가지 재미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동방박사들이 가지고 왔다고 하는 선물 중 몰약이 뭔가 잘 몰랐는데, 이번 이집트 방문에서 몰약이 미라의 부패를 막는 항균제로 쓰이는 값비싼 물질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황금과 유향도 비싼 물건이었을 것입니다.
 20세기 미국에서 가장 사랑받는 사상가 중 한 분인 토마스 머튼은 이 이야기를 상징적으로 풀이합니다. 예수님의 식구들이 이집트에 몇 년을 살았는지 모르지만 거기 살 때 이 선물들을 팔아서 생활비로 충당했을 것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어서 기독교 초기에 동방에서부터의 선물이 이처럼 중요하였던 것같이 2천년이 지난 오늘 기독교가 다시 활기를 되찾으려면 동방으로부터의 선물이 필요한데, 그것은 노장 사상이나 선불교 같은 동양의 정신적 유산이라고 했습니다.
 이집트에서 예수님 식구들이 살았다는 곳에 가서 다시 떠오르는 생각의 한 토막이었습니다. (참고: 예수님 식구들이 살았다고 하는 곳은 이곳 말고도 여러 곳 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