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진명가의 명실론(名實論)
0,명가(名家)에 속하는 인물은 보통 혜시(惠施) 공손룡(公孫龍) 묵변(묵경 후기 묵자)을 지칭한다. 그런데 혜시는 지금 남아 있는 자료가 없고 다만 장자(莊子)에 흩어져 있을 뿐이다. 그러나 명가(名家)의 성격을 규명하는 데서부터 문제는 제기 된다. 역대로 명가를 논급(論及)하면서 모두 공자(孔子)의 정명(正名)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러나 공자는 명가가 아니다. 또 노자에는 무명(無名)에 관한 언급이 있고 그 사상도 무명론에 가까운 일면이 있다. 장자는 혜시와 친구로 장자에서도 혜시와 비슷한 변론의 구절들을 찾아 볼 수 있다. 지금 여기서는 1)장자 추수편에 나오는 이야기를 살펴보고, 2)장자 천하 편에 있는 혜시의 역물(歷物)을 살펴보고, 3)이어서 언급되는 변자의 설을 살핀 다음 .4)공손룡을 조금 언급하고, 5)묵변을 조금 약간 논급(論及)한 뒤. 6)순자 정명론(正名論)의 명가 비판을 빌어 와서 전면적인 검토를 시도해 보려한다.
1, 장자 추수편(秋水篇)
가을철이 되면 물이 불어난 모든 냇물(百川)이 황하로 흘러든다. 그 물 흐름은 넓어서, 양편 물가의 거리가 맞은편에 있는 소나 말을 구별 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리하여 황하의 신(河伯)은 흔쾌히 기뻐하면서 천하의 모든 아름다움이 모두 자기에게 갖추어져 있다고 생각하면서. 흐름을 따라서 동쪽으로 가서 북해(北海)에 도착하였다. 그곳에서 동쪽을 바라보았으나 물가가 보이지 않았다. 이에 하백은 비로소 그의 얼굴을 돌려 북해의 신인 약(若)을 우러러보고 탄식하며 말하였다. "속담에 : 백가지 도리를 듣고 자기 만한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저 같은 사람을 두고 한 말인 것 같습니다. 또 저는 일찍이 중니(仲尼=공자)의 넓은 지식을 낮게 평가하고, 백이(伯夷)같은 절의(節義)를 가볍게 여겼습니다. 처음에 저는 믿지 않았습니다. 지금 저는 선생님의 끝을 알 수 없는 모습을 보고 제가 선생님의 문하로 찾아오지 않았으면 위태로웠을 것입니다. 저는 오랬동안 도를 터득한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받았을 것입니다.
북해의 약(若)이 말하였다. : 우물안 개구리에게 바다에 대해 말하여도 알지 못하는 것은 공간에 구속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여름 벌래에게 얼음(氷)에 관해 이야기해도 알지 못하는 것은 시간에 집착되어 있기 때문이다. 비뚤어진 선비에게 도를 이야기해도 알지 못하는 것은 가르침에 속박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금 당신은 물가를 벗어나 큰 바다를 보고서야 당신의 추함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당신에게 위대한 도리를 이야기해도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천하의 물은 바다보다 더 큰 것은 없다. 모든 물이 바다로 흘러들며 ,한 때도 멈추는 일이 없는 데도 차서 넘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이런 것으로서 스스로 뛰어 났다고 생각해 본적이 없다. 하늘과 땅으로부터 형체를 물려받고 음과 양으로 부터 기(氣)를 받았다. 나는 하늘과 땅 사이에 있어서 작은 돌이나 작은 나무가 큰산에 있는 것과 같이 작은 존재다. 바로 이렇게 나의 존재를 작게 보고 있거늘 어찌 스스로 뛰어났다고 생각할 리가 있겠는가? 사해(四海)가 천지(天地) 사이에 있는 것을 헤아려 보면 소라 구멍이 큰 연못가에 나 있는 정도와 비슷하지 않은가? 중국이 이 세상에 차지하는 크기를 헤아려 보면 큰 창고 속에 있는 곡식알 하나와 비슷하지 아니한가? 물건의 종류에는 몇 만이란 숫자가 붙는데 사람은 그 중 하나를 차지한다. 사람들은 이 세상 곡식이 생산되는 곳과 배와 수레가 통하는 곳에 널리 살고 있는데, 사람이란 그 중의 하나에 불과 하다. 이런 사람을 만물에 비겨 본다면 말의 몸에 있어서의 한 개의 가는 터럭과 같지 않은가? 오제(五帝)가 천자 자리를 서로 물려 준 것이나, 삼왕(三王)에 이르러 서로 다툰 것이나, 어진 사람이 근심하는 것이나, 세상을 다스리는 사람이 수고를 하는 것이나 모두가 이와 같은 작은 일이다. 백이(伯夷)는 왕위를 사양함으로써 명성을 얻었고, 공자(孔子)는 여러 가지 가르침을 얘기하여 박학하다고 여겨지고 있다. 이들은 스스로 남보다 뛰어났다고 여기고 있었지만, 당신이 조금 전까지 스스로 물 가운데에서는 뛰어났다고 생각하던 것과 비슷하지 아니한가?
황하의 신(神)이 말하였다. : 그렇습니다. 그러면 저로서는 하늘과 땅은 크다고 하고 터럭 끝은 작다고 해도 괜찮겠습니까?(河伯曰;然,則吾大天地而小毫末,可乎?)
북해의 신(神) 약(若)이 말하였다. : 아니다. 물건이란 양이 무궁하여 한정할 수 없는 것이다. 시간은 멈추지 않고 흐르고, 각자의 분수는 일정하지 않고 변하는 것이며, 일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대로 있는 것이란 없다. 그러므로 위대한 지혜를 지닌 사람은 먼 것 가까운 것을 똑같이 본다. 그래서 작은 것이라 하더라도 무시하지 아니하고 큰 것이라 하더라도 뛰어난 것으로 보지 않는다. 물건의 양(量)이란 무궁하여 한정할 수 없는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는 또 옛날과 현재를 한가지 것으로 분명히 알고 있다. 그러므로 오래 산다 하더라도 고민하지 아니하고 생명이 짧다 하더라도 더 살기를 바라지 아니한다. 시간이란 멈추지 않고 흐르는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는 또 모든 것은 달(月)처럼 찼다 기울었다 하는 것을 살피어 알고 있다. 그러므로 물건을 얻어도 기뻐하지 아니하고, 물건을 잃어도 걱정하지 아니한다. 사람의 분수란 일정하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는 또 도(道)란 넓은 것임을 분명히 이해하고 있다. 그러므로 산다고 해서 기뻐하지 아니하고, 죽는다고 해서 불행으로 여기지 아니한다. 일이란 처음부터 끝까지 그대로 있을 수 없는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을 헤아려 보면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것에 비길 바가 못 된다. 그가 살아 있는 시간이란 그가 살아 있지 못한 시간에 비길 바가 못 된다. 그러한 지극히 작은 입장에서 지극히 큰 영역을 추궁하려 들므로, 미혹되고 혼란하여 스스로 안정되지 못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또한 터럭 끝(毫末)을 지극히 미세한 물건이라고 결정할 수 있음을 어떻게 알겠는가? 하늘과 땅이 지극히 큰 영역이라고 규정할 수 있음을 또 어찌 알겠는가?
황하의 신(河伯)이 말하였다. : 세상의 논자들은 모두 말하기를 지극히 정세(精細)한 것에는 형체가 없고, 지극히 큰 것은 포괄할 수가 없다고 하는데,(至精無形,至大不可圍) 이것은 진실입니까?
북해의 신 약(若)이 말하였다. : 작은 것에서 큰 것을 보면 그 전체를 다 보는수가 없고, 큰 것으로부터 작은 것을 본다면 분명히 보이지 않는다. 정세(精細)하다는 것은 작은 것 중에서도 미세하다는 뜻이다. 극대하다는 것은 큰 것 중에서도 아주 굉장하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각각 다 장점이 있는것은 자연의 형세가 그러한 것이다. 정세하다든가 굵다든가 하는 것은 형체가 있음으로써 결정되는 것이다. 형체가 없는 것은 수량으로 나눌 수가 없는 것이다. 포괄할 수 도 없이 큰 것은 숫자로서 크기를 추궁할 수 없는 것이다. 뜻으로서 인지할 수 있는 것은 물건으로서 정세한 것이다. 말로써 논할 수가 없고 뜻으로써 살피어 인지할 수 없는 것은 정세하고 크다는 것을 결정지을 수가 없는 것이다.
황하의 신이 말하였다. : 물건의 외형 또는 물건의 내면에 있어서 무엇을 기준으로 하여 귀하고 천한 분별이 생기며, 무엇을 기준으로 하여 작고 큰 분별이 생기는 것입니까?
북해의 신 약이 말하였다. : 도(道)의 입장에서 본다면 물건에는 귀하고 천한 게 없다. 물건 자체의 입장에서 본다면 자신은 귀하고 남은 천한 것이다. 세속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귀하고 천한 것은 자기에게 달려 있는 게 아니라 남이 정해 주는 것이다. 상대적인 관점에서 볼 때에 그것에 비하여 크다는 입장에서 말하면 만물에는 크지 않은 게 없게 되며, 그것에 비하여 작다는 입장에서 보면 만물에는 작지 않은 게 없게 된다. 하늘과 땅도 큰 것과 비교할 적에는 피(燓) 한 알 정도로 생각될 수 있고, 터럭 끝(毫末)도 작은 것과 비교할 적에는 큰 산정도로 생각될 수 있다는 것을 알면, 그것은 상대적인 구별에서 그렇게 됨을 알 것이다. 공용(功用)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 공용을 그대로 인정하는 입장에서 말하면 만물에는 쓸 곳이 없는 것이란 없게 되며, 그 공용을 없다고 부정하는 입장에서 말하면 만물은 쓸 곳 있는 것이란 없게 된다. 동쪽과 서쪽은 서로 반대가 되면 서도 서로 어느 한편이 없어서도 안되는 것임을 안다면 곧 공용의 규정도 상대적인 것임을 알 것이다. 취향(趣向)이란 관점에서 본다면, 그것이 그러함을 인정하는 입장에서 말하면 만물에는 옳지 않은 것이란 없게 된다. 그것이 그름을 비난하는 입장에서 말하면 만물에는 그릇되지 않은 게 없게 된다. 요(堯)임금이나 걸왕(桀王)이 모두 스스로는 시인하면서도 남이 비난하였다는 것을 안다면 취향이란 것도 상대적으로 결정됨을 알 것이다.
황하의 신이 말하였다. : 그렇다면 저는 무엇을 해야 됩니까? 무엇을 하지 않아야 됩니까? 제가 사양하거나 밟고 나아가거나 멈추는 데 있어서 저는 도대체 어떻게 하여야만 됩니까?
북해의 신 약이 말하였다. : 도(道)의 입장에서 볼 때 무엇을 귀히 여기고, 무엇을 천히 여기겠는가? 이런 경지를 혼돈하게 통일된 상태라고 말하는 것이다. 자기 뜻에 구속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면 도(道)에 크게 어긋나게 된다. 도(道)의 입장에서 볼 때 무엇을 적다 하고 무엇을 많다 하겠는가? 이런 경지를 구별 없이 연결되는 상태라고 말하는 것이다. 한 편에만 치우치는 행동을 하여서는 안 된다. 그러면 도(道)에 어긋나게 된다. 엄격하기가 나라의 임금과 같아서 사사로운 은덕을 베푸는 일이 없어야 한다. 유유자득하기가 제사를 받는 사(社)와 같아서 사사로이 복을 내려 주는 일이 없어야만 한다. 대범하기가 사방이 끝없는 것 같아서 아무런 한계도 없어야만 한다. 만물을 다 같이 아울러 감싸서 그 어떤 사람만을 아껴 주거나 도와주는 일이 없으면 이것을 두고 일정한 넓이가 없는 사람이라 말하는 것이다. 만물은 한결같이 평등한 것이니, 어느 것이 못하고 어느 것이 더 나은가? 도(道)에는 시작도 끝도 없지만, 물건에는 삶과 죽음이 있다. 그래서 물건의 공용이란 믿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어떤 때는 비었다가도 어떤 때는 차게 마련이어서 그 형세에는 일정한 위치가 없다. 늙어 가는 나이는 막을 수가 없고, 흘러가는 시간은 멈추게 할 수가 없다. 생성소멸과 찼다가는 비는 일을 반복하여 그치면 또 시작을 한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위대한 도(道)의 뜻을 얘기하고 만물의 이치를 논하는 까닭인 것이다. 물건의 생성은 말(馬)이 뛰는 것도 같고 달리는 것도 같이 변화한다. 조금도 변하지 않고 있는 것이란 없고, 잠시도 바뀌지 않는 것이란 없는 것이다. 그런데 무엇을 하겠는가? 무엇을 하지 않겠는가? 그대로 스스로 변화하게 버려두면 그뿐인 것이다.
황하의 신이 말하였다. : 그렇다면 어찌하여 도(道)가 귀하다는 것입니까?
북해의 신 약이 말하였다. : 도(道)를 아는 사람은 반드시 이(理)에도 통달해 있고, 이(理)에 통달한 사람은 반드시 물건의 변화에 대한 적응에 밝다. 물건의 변화에 대한 적응에 밝은 사람은 사물에 의하여 자신이 해(害)를 받는 일이 없다. 지극한 덕(德)을 지닌 사람은 불도 그를 뜨겁게 하지 못하며, 물도 그를 빠져 죽게 하지 못하며, 추위와 더위도 그를 해치는 수가 없고, 새나 짐승들도 그를 상케 하는 수가 없다. 그렇다고 그것들을 가벼이 여긴다는 말도 아니다. 편안과 위험을 살피고 화(禍)와 복(福) 어느 것에나 안주하여, 자기의 거취를 신중히 함으로써 아무것도 그를 해칠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자연을 그의 내부에 존재케 하고, 인위적인 것은 밖으로 내보내어, 그의 덕(德)이 자연에 있게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자연과 사람의 행위에 대하여 알고 자연을 근본으로 삼는다면, 그의 올바른 위치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러면 나아가고 물러나고 굽히고 뻗치고 자유자재롭게 되며, 도(道)로 되돌아가 진리의 극치를 얘기할 수 있게 될 것이다.
: 무엇을 자연이라 하고, 무엇을 인위라 하는 것입니까?
북해의 신 약이 말하였다. : 소나 말이 네 발을 갖고 있는 것을 자연(自然)이라고
말하고, 말 머리에 고삐를 매거나 소의 코를 뚫는 것을 인위(人爲)라고 말하는 것
이다. 그러므로 인위로써 자연을 손상시키면 안 되고 지혜로써 천명을 손상시키면 안 되고, 자기의 덕(德)을 명성을 위하여 희생시키면 안 된다고 한 것이다. 자연을 삼가 지키어 잃지 않는 것을 그의 진실로 되돌아가는 것이라 말한다.
2. 惠施의 역물십사(歷物十事) (合同異)
혜시의 歷物十事는 《莊子·天下篇》에 나오는데, 다만 결론뿐이고 논거되는 前提가 없다. 十事는 다음과 같다.
1) 지극히 커서 더이상 그 밖이 없는 것을 「大一」이라 한다. 지극히 작아서 더 이상 그 안이 없는 것을 「小一」이라 한다. (至大無外 謂之大一, 至小無內 謂之小一)
2) 두께가 없어 쌓아 올릴 수 없는 것도 (이 小一에서 보면) 천리의 크기가 된다. (無厚不可積也 其大千里)
3) 大一의 입장에서 보면 천지의 높낮이도 동등하게 보이고 산과 못도 평탄하게 보인다. (天與地卑 山與澤平)
4) 해가 하늘 한 가운데 있다해도 서쪽이나 동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것이다. 사물이 생겨난다는 것도 오히려 죽는 것이다. (日方中方欠,物方生方死)
〔해설〕 : 이것은 태양이 떠 있는 곳이라는 것도 공간의 한 점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은 마치 달이 사람을 따라가는 것 같이 보이더라도 아득히 먼 동쪽이나 서쪽에서 본다면 이것은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5) 큰 입장에서 보면 같은 것도 이것을 구분해서 작은 단위로 비교하면 각기 달라진다. 이것을 작은 분별이라고 한다. 만물은 서로 대립되는 것도 입장에 따라서 모두 같으며, 같다고 생각되는 것도 입장에 따라 모두 다르다. (大同而與小同異 此之謂小同異 萬物畢同畢異 此之謂大同異)
6) 남쪽은 끝이 없다고 하지만 북쪽과의 한계를 생각하면 거기에 남쪽의 극한이 있다. (南方無窮而有窮)
7) 오늘 월나라로 떠났다고 해도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어제 월나라에 도착했다고 할 수가 있다. (今日適越而昔來)
8) 이어진 고리는 풀 수가 없다고 하지만 풀려나 있다고 할 수가 있다. (連環可解也)
〔해설〕 : 고리들이 서로 물렸다는 것은 고리의 빈틈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유로이 움직일 수 있으므로 고리의 입장에서는 풀려 있는 것이다.
9) 나는 천하의 중앙을 알고 있다. 그곳은 연나라 북쪽이고 월나라 남쪽이다. (我知天下之中央 燕之北 越之南)
〔해설〕 : 동서남북의 중앙은 어디나 다 중앙이며 또 천하의 중앙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10) 두루 만물을 사랑하면 사물의 차별이 없어지고 하늘도 땅도 하나가 된다. (汎愛萬物天地一體也)
이상 十事에서(모종삼(牟宗三)교수는 八事로봄 ) 볼 수 있는 것은 모두 단편적인 명제뿐이고 推論의 과정은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전부를 볼 때 앞의 九事는 전제라고 할 수 있고 第十事는 전체의 결론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十事를 볼 때에 혜시는 만물의 유동성과 변화무상에 근거하여 각기 다른 관점에서 볼 때는 상이한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日方中方欠 物方生方死」이다. 그러므로 상대적으로 나누어서 말하면 모두 불확정의 말이 되나 절대적이고 정체적으로 볼 때는 「大小同異」가 참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중에서 第 二事는 「無厚」(두께가 없음)와 「千里」가 다르지 않다는 것이며, 第 三事는 「高」와 「低」가 다르지 않다는 것이며 第 四事는 시간의 「현재」와 「과거」가 다르지 않다는 것이며, 第 六事는 「無窮」과 「有窮」이 다르지 않다는 것이며, 第 八事는 「連」(연결됨)과 「不連」이 다르지 않다는 것이며, 第 九事는 「南北」과 「中央」이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 第 一事와 第 五事가 비교적으로 斷案을 잘 나타내주는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第 一事에서는 일반적인 大小는 모두 밖도 없고 안도 있다. 이것은 상대적인 대소이며 지극히 크거나 작은 것은 밖도 없고 안도 없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第 五事에서는 일반적인 同異는 어떤 특정한 각도에 기준한 상대적인 同異이고, 절대적이고 전체에서 보면 「모두 같거나(同) 또는 다른 것(異)」이 아니다.
장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 다르게 볼때는 간이요 담이며 초나라요 월나라지만 같다고 볼때는 만물이 모두 한 가지이다" 혜시의 관점은 확실히 같다는 입장에서 보는 것이며 만물의「大小」와 「同異」가 모두 없어지고 모두 같거나 「大一」 한가운데에 넣어버린다. 그러므로 一事에서는 九事까지의 상대적인 구분은 「合」의 관점에서 모두 그 차이가 없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第 十事에서는 「하늘과 땅이 하나가 된다」는 결론이 혜시가 말하는 「合同異」의 說이다.
혜시는 명제분석을 통해 지식의 상대성을 증명하고 아울러 「天地一體」의 우주관으로 이끌어 간다. 이것에 기초하여 다시 「만물을 널리 사랑한다」는 인생관을 열어놓았다. 이 결론은 장자와 비슷하나 서로 다른 점이 있다면 장자는 생명의 실증과 그 이치를 功夫의 경지를 통하여 열어보이고 있으나 혜시는 오히려 명제분석을 통해 얻게 된다. 모종삼(牟宗三) 교수는 장자의 합동이(合同異)는 현리(玄理)이고, 혜시의 합동이(合同異)는 명리(名理)라고 하였다.
3, 변자(辯者)들의 변론 (21事)
(장자 천하편에서는, 혜시의 역물십사 이야기를 이어 혜시는 이런 것이 위대한 것이라 생각하고 천하에 제시하여 변사(辯士)들을 가르셵다. 천하의 변사들은 그래서 서로 즐거워 하였다.)
1), 계란에도 깃털이 있다.(卵有毛) : 계란과 닭을 연속선상에 두고 보면 가능한 언급이다. 《莊子》<寓言篇>에는 "萬物皆種也,不同形相禪"(만물음 모두 종자이다. 서로 다른 형상으로 물려준다)는 말이 있다.
2), 닭에는 세 개의 다리가 있다.(鷄三足): 닭 다리 두 개와 닭다리라는 명(名=개념)을 합하여 셋이다.(공손룡의 통변론(通變論)에는 다른 의미로 논증하고 있으니 닭발1,세어서2, 그래서3. 우양족(牛羊足)1, 세어서4, 그래서5라는 말이 있다. )
3), 영에 천하가 있다.(櫾有天下) : 영(櫾)은 당시 초 나라의 수도이다. 영은 천하보다 작고 영은 천하의 일부분이다. 그러나 공간의 불가분할에서 본다면 영에 천하가 있다고 말 할 수 있다. 이것은 '필동'(畢同)의 관점에서 피어난(發) 것이다.
4), 개는 양이 될 수 있다.( 犬可以爲羊) : 개나 양은 모두 네 발 동물, 이것은 共相에서 온것이다.
5), 말에도 알이 있다.(馬有卵) :이 명제도 위의 명제와 같은 종류의 궤변이다. 상식에서 볼때는 말(馬)은 태생 동물로서, 조류의 난생과 다르다. 그러나 태생도 난생도 모두 동물에 속한다. 만물 필동(畢同)에서 보면 말에도 알이 있다. 장자 즉양(則陽)편에 "合異以爲同"(다른 것을 합하여 같다고 한다.)라는 말이 있고,덕충부(德充符)에는 "自其同者視之,萬物皆一也"(그 같은 것에서 보자면 만물은 모두 하나이다.)라는 말이있다.
6), 두꺼비에도 꼬리가 있다.(丁子有尾) :두꺼비 (丁=초(楚)나라 에서는 하막(蝦徳)즉 두꺼비) 는 올챙이가 자란 것이므로,꼬리가 있었다.
7), 불은 뜨겁지 않다.(火不熱) : 뜨겁다고 하는 것은 사람의 주관 감각이다. 돌과 부디치면 아픈 것은 사람이고 돌이 아니다.
8), 산에도 입이 있다.(山出口) : 여러 가지 다른 해석이 많음.
9), 수래 바퀴는 땅에 닿지(땅을 밟지) 않는다.(輪不焅地) : 땅에 닿는 바퀴는 바퀴의 일부분이다. 바퀴 전체는 동시에 땅에 닿을 수 없다. 여러 가지 다른 해석이 많음. (어떤이는 공손룡의 학설이라하고 어떤이는 혜시의 학설이라함)
10), 눈은 보지 못한다,(目不見): 본래 의미가 분명하지 않다. 일반적인 해석은 다만 눈 만으로는 보지 못한다. 빛도 있어야하고,정신 작용도 있어야 한다. 공손룡에 이 말이 있다.(堅白論)
11), 어떤 것을 가리킬 때 그 가리키는 대상에는 도달하지 못한다. 만약 도달한다하여도 절대에 는 도달 할 수 없다.(指不至,至不絶) : 가리키다(指)의 해석에 의미가 판명된다. 공손룡의 지물론(指物論)에는 많은 지(指)의 의미가 있다. 여기서는 대상물의 드러남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대상믈을 안다고 할 때 다만 색(色)과 형(形)을 알 뿐 그 본체에는 도달하지 못한다.
12), 거북이가 뱀보다 길다.(龜長於蛇) : 이것은 장자 제물론 의 "천하에서 추호 끝 보다 더 큰 것은 없으며, 태산은 작고, 일찍죽은 어린이는 장수 하였고 (장수 했다고 알려진)팽조는 일찍 죽었다."는 것과 같은 논변이다. 의미는 장단 대소는 상대적이고, 절대성이 없다는 것이다.
13),굽자(矩)로는 네모꼴을 만들지 못한다.그림쇠(規)로는 원을 만들지 못한다.(矩不方,規不可以爲圓) : 절대의 네모는 네모의 공상(共相)이다. 절대의 원(圓)은 원의 공상이다. 사실상 개채의 네모진 것이나 둥근 것은 절대의 네모나 원이 아니다. (馮芝生의 說)
14), 구멍에 넣는 쇄기는 구멍이 포위하지 못한다.(鑿不圍欕) : 개채의 독특성으로부터 말하자면 세상에는 두 개채가 완전히 부합하는 것은 없다. (쇄기와 구멍 사이에 틈이 있다.)
15), 나는 새의 그림자는 움직이지 않는다.(飛鳥之景未嘗動也) :
16), 빨리 나는 화살에도 가지도 않고(不行) 멈추지도 않는(不止) 순간이 있다.(鏃矢之疾而有不行不止之時):
17), 개(狗)는 개(犬)가 아니다.(狗非犬): 보통큰개는 견(犬)이라하고 작은 개는 구(狗)라한다. 묵자(묵경하)에서는 이것을 중동(重同)이라 하였다.(二名一實)
18), 누런 말과 검은 소는 세 마리 이다.(黃馬驪牛三):누런 말(馬)과 검은 소는 다만 둘(2)이다. 거기에 개념을 더하면 셋(3)이다. 이것은 앞의 鷄三足과 같은 종류.
19), 흰 개도 검은 것과 같다.(白狗黑): 이것은 대동이(大同異)를 가지고 소동이(小同異)를 보는 착오판단이다. 즉 개는 흰개 검은 개로 그 색갈의 구별이 있으나 모양으로 보면 같은 개이고 색갈이라는 점에서 보면 흰것 검은것은 다만 색갈일 뿐이다.
20), 외로운 망아지에는 어미가 없다. (孤駒未嘗有母): 이것은 이름(名號)의 문제이다. 외로운 망아지의 의미는 본래 어미가 없는 망아지 이다. 이 명제에서는 '외로운'(孤)와 '어미가 없음'(未嘗有母)는 이명동의(異名同義)이다.
21),한자 길이의 회초리를 매일 그 반(半)을 부려뜨려도 만년토록 없어지지 않는다.(一尺之癦,日取其半,萬世不竭):한자 길이의 회초리를 오늘 그 반을 부러뜨리고 내일 그 반을 부러뜨리고, 그 다음에 또 그 반을 부러뜨려 그 반을 그 반을부러뜨려도 결국에 그 반은 남는다. 그래서 만세(萬世)토록 다함이 없다. 한 자의 회초리는 유한한 물체이다. 그러나 무한히 작은 단위로 구분 되어 있다. 그러므로 무한분열이다. (馮說)
장자의 평론: 장자 천하편 에서는 변사의 二十一事를 소개한 뒤 변사들은 이런 것으로써 혜시와 응답하여 평생토록 그침이 없었다. 환단(桓團) 공손룡이 바로 이러한 변사의 무리이다. 그들은 사람의 마음을 꾸미기도하고 사람의 뜻을 바꾸기도 하였다. 그들은 사람들의 이론은 이겨낼 수 있었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굴복 시키지 못하였다. 이것이 변사들의 한계인 것이다. 혜시는 매일처럼 그의 지혜를 사용하여 사람들과 변론을 함으로써 특히 천하의 변사들과 더불어 괴이한 이론을 이룩하였다. 이것이 그의 학설의 대략(大略)이다. 그러나 혜시는 자기의 구변을 가장 현명한 것이라 생각 하였다. 그는 천지만이 내 변론보다 위대하다고 하였다. 혜시는 천하에 자기를 드러내려고만 하였지 아무런 도술(道術)도 없었다.
풍우란(馮友蘭)은 장자 천하편의 二十一事를 혜시의 합동이(合同異)와 공손룡의 리견백(離堅白)에 비추어 다음과 같이 분류하고 있다.
합동이 조(組): (1)卵有毛 (2)櫾有天下 (3)犬可以爲羊 (4)馬有卵 (5)丁子有尾
(6)山出口 (7)龜長於蛇 (8)白狗黑
리견백 조(組): (1)계삼족 (2)火不熱 (3)輪不焅地 (4)目不見 (5)指不至,至不絶(指不至,物不絶 (6)矩不方,規不可以圓 (7)鑿不圍欕 (8)飛鳥之景未嘗動也 (9)鏃矢之疾,而有不行不止之時 (10)一尺之癦,日取其半,萬世不竭. (11)狗非犬 (12)黃馬驪牛三 (13)孤駒未嘗有母.
4. 公孫龍의 離堅白
혜시의 名學(논리학)은 萬物合一의 관점이지만 공손룡은 그렇지 않다. 공손룡은 만물이 서로 다르다는 입장에서 자신의 논설을 전개하고 있다. 공손룡의 「白馬非馬論」(흰 말은 말이 아니다)은 오늘의 논리학적 관점에서 보면 고차원적인 논리는 아니지만 그의 「非」라는 것은 동일한 관계를 가리키고, 내포관계를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으로 이 학설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밝혀지는 셈이다.
문제는 공손룡의 학설은 직접적으로 「名」(이름)을 구별하므로써 그가 가리키는 바의 「實」(실재)를 명백히 하려는 것으로서, 여기는 반드시 구별이 필요하였다. 말이라는 이름은 말의 모양을 나타낼 뿐이며 白馬의 「白」은 말의 색을 나타낼 뿐이기에, 하나는 그 모양을 일컫고 다른 하나는 그 색을 일컫기 때문에 白馬와 馬는 그 가리키는 실재내용이 서로 다르다. 백마가 가리키는 실재는 흰색의 말에만 제한되고 말이 가리키는 실재는 제한조건이 하나도 없는 모든 말에 미친다. 말이라는 이름〔名〕과 백마라는 이름이 가리키는 실재〔實〕는 같지 않으므로 「白馬非馬」라고 한 것이다.
공손룡의 또 다른 주장 중의 하나는 「堅白論」인데 公孫龍은 堅·白·石〔단단함. 흰것. 돌〕에서 단단함과 흰 것은 서로 떨어지는 것이요 서로 내포되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다음을 보자. "「단단함, 흰것, 돌」 세 가지는 함께 말할 수 있는가? 없다. 두 가지는 함께 말할 수 있는가? 있다. 어떻게 있는가? 눈으로 돌을 보았을 때 돌의 흰것만 보고 단단함은 볼 수 없기에 눈은 단단한 것을 알지 못하고 다만 「흰 돌」이라고 할 뿐이며, 그래서 두 가지는 말할 수 있고 또 손으로 만졌을 때 돌의 단단한 감촉만 있고 흰 것은 알지 못하기에 다만 「단단한 돌」이라고 할 뿐이다. 그래서 두 가지를 말할 수 있다."이것은 돌은 단단하다고 하는 것과 희다고 하는 것을 동시에 떠날 수는 없으나 단단함과 희다는 것은 서로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堅과 白이 서로 떨어질 수 있음은 다음의 말에 근거한다. "볼때는 단단한 것이 보이는 것이 아니고 흰 것이 보이며 만질 때는 흰것이 만져지는 것이 아니고 단단한 것이 만져진다."
공손룡은 여기서 인간의 감각에 근거하여, 즉 시각에서는 돌의 흰것만 볼 수 있고 단단하다는 판단을 할 수 없으며 촉감으로 만졌을 때는 돌의 단단함을 만질 수 있고 희다는 것을 감지할 수 없다. 이것은 단단함과 희다는 것이 같은 성질이 아니며 또 다른 감각기관의 감지능력이다. 그러므로 堅과 白이 필연적으로 동시에 우리의 감각에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堅과 白은 서로 떨어지는 것이며 함축관계에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것으로서 공손룡은 서로 다른 이름에는 서로 다른 내용이 있다는 것이다. 그는 천하만물은 각각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그리고 천하만물은 그 내용이나 범위가 각각 독립해 있다는 것이다. 다만 堅과 白이 서로 떨어져서 두 개념으로 구별되어 질 뿐 아니라 堅과 白이 또한 돌과도 구별되어 셋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공손룡은 <指物論>에서 "물은 추상개념 아님이 없으나 보편은 구체적인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는데 역시「物」과 「指」를 구별하고 있다. 그 뜻은 物이라는 것은 문자부호가 가리키는 物 아닌 것이 없다. 그래서 문자부호가 가리키는 사물이 반드시 그 문자부호가 가리키는 효능을 가리키는 것은 더욱 아니다. 사물을 가리키는 부호는 假名으로 약속일 뿐이고 다르게 가르쳐도 같은 사물을 표현한다면 중요한 것은 가르킴을 받는 物 자체의 내용이다.
<名實論>에서는 오히려 「物」이라고 지칭하는 것은 일체 객관세계의 존재를 가리키는 것이며 「實」은 이 존재의 내용도 함께 가리킨다고 본다. 즉 「物」의 대상은 「物」일 따름이며 그 내용을 포함하는 것은 아니다. 「名」은 「實」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래서 "무릇 이름이라고 하는 것은 實을 말함이다. 이것은 안다하고 이것이 아니다라고 하며 이것은 아는데 여기 있는 것은 아니라하면 이것은 말하여 지적하는 것이 아니다. 저것은 안다하고 저것이 아니다라고 하며 저것은 아는데 여기에 있는 것은 저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이것은 말하여 지적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名」은 물의 내용의 實을 가리킴이다. 그러므로 名·實의 관계는 指·物의 관계와 다르다. 서로 다른 이름으로 같은 내용을 가리킴을 용인하지 않는다. 즉 한 특정한 이름은 한 특정한 내용을 가리킬 따름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白馬와 馬, 堅石과 白石이 그 이름이 다르기 때문에 그 가리키는 내용 역시 서로 달라야 한다는 것이다.
공손룡은 이것으로서 그의 정치적 응용원칙을 추출하고 있으니 "지극하구나! 옛날 현명한 임금은 名과 實을 잘 구분하였으며 그 일컬음은 신중하였다."하고 하였다. 또 <通變論>에서 "포악함이 있다는 것은 임금과 신하가 다투어 두개의 밝음을 주장하기 때문이다. 두 밝음은 어두워 밝지 못함이니 바로 표현하지 못함이다. 바로 표현하지 못함은 곧 명과 실이 마땅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두개의 밝음(두 명제의 충돌)으로 인해 道는 잃게 되고 바른 것은 없게 되었다."라고 하였으니 바른 「名」과 그 「實」을 바르게 한다는 이론이다. 공손룡은 정치상에서도 그 名實의 이론을 적용하여 임금과 신하의 자리〔위〕를 잘 지키고 각각 그 직분을 다하면 전국시대의 혼란을 해소시켜 보려는 것이었다.
이상을 종합해볼때 혜시의 「合同異」의 名學은 만물을 널리 사랑하는 인생관을 확립했으며 공손룡은 「離堅白」의 명학으로 이름으로 실재를 책임지울 수 있는 정치를 운용하려고 하였다. 이로 보아서 中國名家의 추상개념 분석자들도 역시 정치철학, 인생철학의 궁극목적에서 떠난 것은 아니다.
5. 墨辯의 別同異와 盈堅白
《장자·천하편》에 말하기를 別墨은 "견백동이의 궤변을 써서 서로 헐뜯으며 혹은 모여서 두서없는 수작을 서로 주고 받고"라고 하는 것을 볼때 「堅白同異」 등의 이론이 《墨經》의 주요내용임을 알 수 있다.
묵경, 경상(經上)에서 논한 「同異之說」에는 "同에는 重·體·合·類가 있다. 異에는 二·不體·不合·不類가 있다."라고 하며 이어서 經說에서 해석하기를 "同에는 이름은 달라도 실제로는 같은 것이 重同이다. 전체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 體同이다. 한 장소에 있는 것이 合同이다. 공통성이 있는 것이 類同이다. 異에는 둘이 전혀 다른 것이 이(二)다. 연속되지 않는 것이 不體다. 장소를 같이하지 않는 것이 不合이다. 공통점이 없는 것이 不類이다."하고 하였다. 여기서 異라고 하는 것은 「同」의 조건이 결핍된 것을 말하며 새로운 의의는 별로 없다. 그러므로 同만을 말하면 될 것 같다.
묵변의 同은 重同, 體同, 合同 그리고 類同으로 나눈다. 두 이름이 다르지만 實은 同인것 예를 들면 殷紂와 商辛은 두개의 다른 이름이지만 함께 하나의 실체를 가르킨다. 이것을 「重同」이라 한다. 여러 것이 다 각기 다르지만 서로 연속된 것, 예를 들면 백마나 흑마가 모두 말에 같이 속하는 것이다 이렇게 같은 것에 속하는 것을 일러 「體同」이라고 한다. 같은 범위에 함께 있을 때 예를 들면 소와 양을 한 우리에 있을 때 이를 「合同」이라 한다. 어떤 두개의 사물이 어떤 조건이 같을 때 예를 들면 소와 양이 다 같이 뿔이 있다고 할때 이런 것을 「類同」이라 한다.
이것으로 보아 同과 異는 다 확정적인 의미가 있기 때문에 同과 異는 구별된다. 혜시가 「萬物畢同畢異」(즉 결국에는 같다는 것)의 「合同異」로서 「天地一體」의 설을 끄집어 낸 것은 類同과 體同을 오해한 것이다.
經上에 "堅과 白은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고 했는데 經說上에서 "견과 백이 따로 되어 서로 포괄하지 못하고 서로 배격하는 것 이것이 떨어져 있다는 것이다."고 해석하였다. 堅과 白과 石에서 堅은 質이며 白은 色이다. 堅과 白은 모두 돌에 있다. 堅 가운데에 白이 있고 白 가운데에 堅이 있기 때문에 둘은 본래 서로 내포관계에 있는 것이고 견이 백의 밖에 있는 것이 아니며 백 역시 견의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 堅과 白이 따로 떨어져 있다면 서로 배격하고 떨어져서 상대방을 배척할 것이다. 그러나 堅白은 하나의 돌위에 「體同」이다. 그러므로 堅白은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經上에 "한쪽을 떼어내서 돌로는 하지 못한다. 이유는 보이는 것과 안보이는 것, 一과 二, 넓이와 길이에 있다."고 하였다. 經說下에서 해석하기를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혼연일체가 되어 있는데도 이를 분리하고 一과 二는 서로 융합되어 있는데도 서로 가르며 넓이와 길이는 서로 의존하는 관계건만 이를 돌의 굳은 성질과 흰 빛깔을 별개의 것인 양 보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였다.
공손룡의: 시각은 백색을 얻고 촉각은 단단함을 얻는다는 설에서 하나는 보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보이지 않는 것이지만 堅白은 一石위에 같이 존재한다. 돌이 있으면 단단함과 흰 것이 함께 있는 것이다. 이 두가지는 비록 보이고 보이지 않는 다는 차이가 있다해도 서로 떨어질 수 없으며 또 한쪽을 떼어서 둘로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마치 한 면(面)에 길이도 있고 넓이도 있는 것과 같이 또 넓이와 길이가 서로 의존하는 것과 같이 단단함과 흰것도 같은 것이다. 堅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白도 있고 白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堅도 있다. 堅·白이 비록 둘이나 피차에 서로 의존관계에 있는 것이다.
즉 감각을 통해 볼때는 단단함과 흼이 서로 떨어지나 이는 다만 지각능력의 분리효력이 있을 뿐이요, 堅·白 분리의 효력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盈堅白」의 설이 「離堅白」의 설을 깨뜨린 것이다.
6, 순자의 비판
순자(荀子)는 「正名論」에서 이상에서 말한 묵변,혜시,공손룡을 비판하고 있다.
"남에게 모욕을 받아도욕될것이 없다."(見侮不辱)고 하거나, "성인은 (남을 사랑하고) 자기는 사랑하지 않는다."(聖人不愛己)라고 하거나, "도둑을 죽인 것은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니다."(殺盜非殺人也)라는 말은 모두 명(名)을 사용하는데 미혹(惑) 되어서 바른 명(名)을 혼란 시키는 것이다.(此惑於用名以亂名者也).이것은 명(名)이 어떻게 있고 또 어떻게 사용되는가를 따져보면(驗) 곧 그러한 것을 금(禁) 할 수 있을 것이다. "산은 연못과 같은 평면이다"(山淵平) "인정으로써는 욕망이 적다."(情欲寡) "쇠고기 돼지고기도 맛을 더하지 못하고,좋은 음악(大鍾)도 즐거움을더하지 못한다."(芻簗不可甘,大鐘不可樂) 라고 말하는 것은 실(實)을 사용하는데 미혹 되어서 바른 명을 혼란 시킨 것이다.(此惑於用實以亂名者也) 이것은 명(名)이 연유하는 것의 같음과 다름을 따라 따져보고 또 적당하게 사용되는 가를 보면 곧 그러한 것을 금 할 수 있을 것이다. "백마는 말이 아니다."(白馬非馬)라는 언급은 명(名)을 사용하는데 미혹되어 실(實)을 혼란 시킨 것이다.(此惑於用名以亂實者也)이다. 이것은 명의 준칙을 따져 그 수용되는 것을 보고 또 그 말(辭)의 패역(悖)을 보면 그러한 것을 금 할 수 있을 것이다. 무릇 정도를 벗어나서 제 마음대로 사설(邪說)을 지어내는 자들은 이 세가지 과오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밝은 군주는 그것을 구분(分)하여 그로한 말을 하는 자들의 변론은 듣지 않는다.
당군의(唐君毅)선생은: 1)묵자는 '명으로 명을 혼란 시킨다.'(以名亂名)고 해석하면서, '공명(共名)으로 하여금 별명(別名)을 가리워 그 하나의 명을 사용하여 다른 명을 패기시켜 명을 어지렵혔다.'고 하였다. 묵변에 '도둑은 사람이다. 도둑을 미워하는 것은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아니다. 도둑을 죽이는 것은 사람을 죽이는 것은 아니다' (盜,人也.惡盜非惡人,殺盜非殺人.) '그 동생은 어여쁜 사람이다. 동생을 사랑하는 것은 어여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아니다.'(其弟,美人也.愛弟非愛美人也) 2)혜시는 '실로 명을 혼란시킨다.'(以實亂名) 라하고 해석하면서 실(實)의 하나를 보고 명의 많음을 민멸(泯滅)시킨다.(由觀實之一而欲泯除名之多)고 하였다. 3)공손룡은 '명으로 실을 혼란시킨다.'( 以名亂實)고 해석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순수논리의 추론의 기술이 아니고 당군의(唐君毅) 선생의 말처럼 모두 말의 의미(語義)를 서로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는 문제이며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 교통하여 귀결시키느냐가 문제이기 때문에 이는 참으로 하나의 윤리정신의 표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