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4/14

Namgok Lee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못해도) 마음에 부자유가 없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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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ok Lee
1tgSphoSnsosread  · 
‘인부지이불온불역군자호(人不知而不慍不亦君子乎)’
논어 첫 편 첫 장에 나오는 말이다.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못해도) 마음에 부자유가 없는 것, 그것이 바람직한 인간이 아니겠는가?’
대강 그런 뜻일 것이다.
 그 책의 편집이야 제자들이 한 것이지만, 그래도 이 말이 첫 장에 나오는 것은 아마도 공자가 그만큼 스스로도 벗어나기 쉽지 않은 테마였을 것으로 짐작되기도 한다.
아마도 그는 스스로 이해받지 못한다는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을 것이다.
공자가 한참 활동할 때, 많은 제자들이 함께 했지만, 안회(顔回) 정도가 지기(知己)로 표현되는 그의 지적 정신적 외로움이 논어 곳곳에 나타나곤 한다.

사후(死後)에 유학 또는 유교라는 큰 흐름이 조성되었지만, 그것은 공자의 사상이나 뜻과는 많이 달라진 것이어서 판타지 드라마에서 보듯 그가 어디선가 살아있다면 그의 외로움은 여전할 것이다.

이 말의 앞에는 잘 알려진 두 문구(文句)가 있다.
‘학이시습지불역열호(學而時習之不亦說乎)’
학(學)과 습(習)이 기쁜 것이다.
‘무지의 자각’에서 출발해야 맛볼 수 있는 것이 이 기쁨이다.
‘유붕자원방래불역낙호(有朋自遠方來不亦樂乎)’

벗과의 사귐, 지기와의 교류가 얼마나 큰 즐거움인지를 긍정적으로 표현한 다음에
 ‘인부지이불온’이라는 부정적인 표현이 나오는 것이 나에게 다가오는 면이 있다.

그 기쁨과 즐거움에 어둡게 그림자를 드리우는 뿌리 깊은 함정을 경계하는 심정이다.
진정한 자립과 인정받고 싶어하는 욕구 사이의 틈이다.

특히 사상 이론 철학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들이 있다.

어떤 틀로 단정하거나 고정하는 것의 폐단을 지적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알게 모르게 자신의 다른  틀로 단정하고 고정하며 재단하는 경우가 많이 생긴다.

인류는 저 축(軸)의 시대의 선각자들의 깨달음에 아직도 많이 의존하고 있다.

그 깨달음의 바탕은 나에게는 하나로 보인다.

 어떤 틀로 고정해서 종교 내지는 학파로 되어 서로 공격 비방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이 선각자들의 깨달음과 실천으로부터 어긋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인부지이불온불역군자호(人不知而不慍不亦君子乎)
알게 모르게 어떤 공감대 (특히 무엇에 반대하는 것으로 형성되는 것이 쉽다)를 형성하고 서로를 알아주는 패거리 속에서 안주하려는 함정을 경계하는 말로 들린다. 

그것은 진정한 기쁨이나 즐거움과는 다른 세계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인간의 관념은 어떤 틀로 고정되기가 정말로 쉽다.
항상 스스로를 돌아보게 한다.

어제 문득 어떤 철학자가 자신의 틀로 다른 틀(사실은 틀이 아닐지도 모르는)을 비난하는 것을 읽고 마음이 불편했는데, 이 불편한 마음이 어디서 나오는가를 돌아보는 새벽 단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