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0/17

한국인의 하늘철학 탁사 최병헌의 ‘같은 하늘’론

한국인의 하늘철학



한국인의 하늘철학

한국학, 어떻게 할 것인가 (9)

by소걸음Jul 08. 2019

[이 글은 <개벽신문>제85호(2019.6.15), 한국학 어떻게 할 것인가(9)에 게재된 글입니다.]



조성환 / 원불교사상연구원 책임연구원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탁사 최병헌의 ‘같은 하늘’론



구한말에 한국 신학의 기초를 닦았다고 평가받는 탁사 최병헌(1858~1927)은 1903년에 쓴 <기서(奇書)>라는 글에서 “서양의 하늘이 곧 동양의 하늘이다”는 유명한 ‘종교론’을 피력하였다.



서양의 기계만을 취하고 ‘종교’는 높일만한 것이 못 된다고 하는데 이는 (종교를) 이단으로 여겨서 참 ‘진리’를 모르기 때문이다. 나라의 형세를 개탄하는 자들이 매양 서양의 기계의 이로움을 말하면서 교도(종교)가 미풍이 아니라고 배척하며, 외국이 강하다고만 하고 부유하고 풍요롭게 된 ‘근원’은 살피지 않는 것이 참으로 한탄할 일이다. 대개 ‘대도(大道) ’는 방국[나라]에 국한되지 않고 진리는 중외에 통용 가능한 것이다. 서양의 ‘하늘’이 곧 동양의 하늘이고, 천하(세계)로 보면 모두가 일가(一家)이며, 사해가 형제라 할 수 있다. 상제를 공경하고 인민을 아낀 점에 이른다면 어느 누가 마땅한 ‘윤리’라고 하지 않겠는가! [<<황성신문>>, 1903.12.22.] 1



최병헌은 서양의 부국강병의 ‘근원’을 과학이 아닌 ‘종교’에서 찾고, 그것을 ‘참 진리’라고 하였으며, 그 내용은 결국 “세계가 일가이고 사해가 형제”인 일종의 ‘세계윤리’라고 말한다. 이러한 인식은 최병헌보다 한 세대 위인 일본의 후쿠자와 유키치가 “서양의 힘은 과학에 있고, 그 근원은 물리학이다”라며,2 이른바 ‘실학론’을 내놓은 것과는 좋은 대조를 이룬다. 최병헌의 입장에서는 서양의 과학(물리학)이 아닌 종교(기독교)야말로 실학이다.



최병헌이 ‘하늘’을 언급하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이다. 만약에 후쿠자와와 같은 입장을 취했다면 ‘하늘’이 아닌

‘리’를 언급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물리(物理)야말로 진리(眞理)이다”와 같은 식으로. 반면에 최병헌에게 ‘하늘’은, ‘물리’와 같은 과학 체계로는 설명되지 않는, 오히려 그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근원’적인 지평을 가리킨다. 그런 점에서 후쿠자와가 말하는 실학(實學)의 바탕에 있는 천학(天學)의 영역이다. 그것을 최병헌은 ‘종교’이자 ‘윤리’라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최병헌에게는 과학보다는 종교와 윤리가, 달리 말하면 종교와 윤리를 탐구하는 ‘천학’이 상위에 놓인다. 후쿠자와가 천학에 대한 과학의 우위를 말했다면, 동시대의 최병헌은 천학에 대한 과학의 우위를 말하는 것이다. 두 사람에게 나타난 이러한 서양 인식의 차이는 한국과 일본의 근대화 과정에 나타난 궁극적 관심의 차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 후쿠자와가 서양 과학의 우위를 기준으로 동서의 우열을 짓는다면, 최병헌은 하늘의 보편성을 바탕으로 동서의 같음을 말한다. 이 ‘하늘’ 아래에는 문명과 야만의 화이관도, 혈연 간의 구별도, 인종 간의 차별도 존재하지 않는다. 모두가 평등한 존재이다. 이러한 대도론, 세계주의, 사해동포사상은 최병헌 뿐만 아니라 개벽종교의 공통적인 세계관이자 인간관이었다.



예를 들어 동학의 해월 최시형은 “만물은 하늘과 땅의 자식이다”는 천지부모론을 제창하였는데, 이것은 그의 인간평등, 인물(人物)평등, 만물공경 사상의 존재론적 원리가 되고 있다. 이후의 원불교에서도 “세계의 모든 종교의 근본되는 원리는 본래 하나”3라는 진리론, 종교론과 더불어, “세계는 곧 온 인류를 한 단위로 한 큰 집”4이라는 세계주의를 표방하고 있다. 천도교에서도 “이에 따른 세계주의의 필요가 생기게 된다. 세계를 한 집안(一家)으로 하고, 각 민족이 공통으로 공존공영의 생활을 도모한다”5고 말하고 있다.



최병헌과 같은 하늘론, 즉 “동서의 하늘이 같다”는 인식의 원형은 1860년에 동학을 창시한 수운 최제우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동학과 서학은 모두 같은 천도이다”『( 동경대전』)는 말이 그것이다. 최제우는 당시의 서학, 즉 천주교를 ‘서양의 개벽’으로 인식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에 대한 동방(한국)의 개벽으로 동학을 제창했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삼일독립운동 때 천도교와 기독교가 합작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최제우의 천도론은, 최병헌과 마찬가지로, 하늘을 중심으로 동학과 서학을 회통시킨다는 점에서 일종의 회통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최제우의 천도회통론은 이후에 이능화로 가면 “세상의 모든 종교는 하늘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는 백교회통론(1912)으로 이어진다.



한밝 변찬린의 ‘다른 하늘’론



한편 최병헌이 세상을 뜨고 얼마 안 있어 세상에 나온 한밝 변찬린(1934~1985)은 흥미롭게도 ‘다른 하늘’론을 말하고 있다.



"종교에서 말하는 하늘은 ‘마음의 열림’과 ‘자각의 차원’을 의미한다. 인간의 마음이 개명(開明)되는 정도에 따라 그 개천(開天)하는 하늘도 각각 다르다. (…) 모든 종교는 마음의 개명에 비례하여 하늘을 개천하였다. 인간의 마음을 닦는 정도에 따라 개천되는 하늘이 다르며, 하늘의 열림에 따라 응감되는 신들도 다른 것이다.

불교와 유교와 도교와 기독교가 개천한 하늘이 같은 하늘인 듯하면서 그 차원이 차이가 있음을 깊이 깨달아야 한다. 다신(多神)이 존재하는 하늘과 유일신이 존재하는 하늘이 같은 차원일 수 없다. 우리는 이 날까지 하늘이라면 다 같은 하늘로 동일시하는 하늘관에서 탈피하여 하늘의 실상을 깨달아야 한다." 6



여기에서 변찬린은 모든 종교는 (새로운) 하늘을 여는 개천(開天)이라는 점에서는 같지만, “마음이 열리는 정도에 따라 열리는 하늘[자각]의 차원도 다르다”는 점에서는 각각 다르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최병헌의 ‘같은 하늘론’(同天論)에 대해서 ‘다른 하늘론’(異天論)이라고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변찬린은 종래의 한국인의 하늘관이 ‘같은 하늘’에 치우쳤다고 비판하고 있다.



실제로 개벽종교에서도 ‘같은 하늘’을 강조하였는데, ‘한울’이라는 개념이 그것이다. 그러나 개벽종교에서 말하는 하늘과 변찬린이 말하는 하늘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개벽종교에서는, 가령 동학이나 원불교에서 말하는 이른바 ‘한울’은 우주론이나 존재론적인 성격이 강하다. 전통적인 개념으로 말하면 천지(天地)에 해당한다. 천지 아래에서는 만물이 하나라는 것이 ‘한울’ 개념의 핵심이다. 그런 점에서 ‘한울’에는 성리학에서 말하는 만물일체사상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반면에 변찬린이 말하는 하늘은 마음의 자각의 정도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세계’를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즉 깨달음의 정도에 따라 인식한 세계가 다르다는 것이다. 그래서 변찬린의 하늘은 다분히 인식론적이고 철학적이다.



마치 “이 세계는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는 장자적인 입장을 연상시킨다.7 이처럼 변찬린의 ‘하늘’ 개념은 종교 간의 같음보다는 다름을 지적하면서, 그 다름을 직시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변찬린의 하늘은, 종교 간의 같음을 강조하는 개벽종교의 ‘한울’ 개념이나 최병헌의 ‘하늘’과는 정반대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최병헌과 변찬린의 하늘론은 오늘날과 같이 한편으로는 원자화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다원화된 사회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최병헌의 하늘론은 원자화된 파편들을 묶어주는 힘이 있고, 변찬린의 하늘론은 획일주의로 빠질 수 있는 위험성을 경계하고 있다. 그렇다면 ‘개벽의 하늘’은 이 두 하늘을 아우르는 양행(兩行)의 하늘이 되어야 할 것이다. 만물이 존재론적으로 하나라는 ‘한울’의 우주론과 각자가 보는 세계가 다르다는 차이의 인식론을 동시에 겸하는 현명(玄明)의 하늘이 곧 개벽의 하늘이다.



 <주석>

1 이혜경, <천하에서 국가로>에서 재인용, <<근대 전환 공간의 인문학, 문화의 메타모포시스(Metamorphosis)>> 발표문, 2019년 6월 13일, 숭실대학교.

2 사사키 슌스케, 가타오카 류, <일본과 한국에서의 ‘실학’의 근대화>>,  <<한국종교>> 43, 2018 참조.

3 <<정전>>, 제1 총서편, 제2장 교법의 총설.

4 <<정산종사법어>> 제1부 세전(世典), 제7장 세계(世界), 1. 세계에 대하여.

5 김병제, 이돈화,  <<천도교의 정치이념>>, 제2부 <당지>, 모시는사람들, 2015, 107쪽.

6 변찬린, <성경의 원리>, 332쪽; 이호재, <한국종교사상가 한밝 변찬린>, 문사철, 2017, 246쪽에서 재인용.

7 Brook Ziporyn, Zhuangzi: The Essential Writings: With Selections from Traditional Commentaries, Hackett , 2009 서문 참조.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생명평화로 열어가는 다른 한국

- 제1회 개벽포럼을 마치고 | 조 성 환 원광대 원불교사상연구원 책임연구원 1. 생명평화운동의 시작 지금으로부터 약 15년 전, 일본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평화’라는 말을 자주 들었던 기억이 난다. 대표적인 것이 ‘평화헌법’으로, 평화주의를 담은 헌법9조를 일본 사람들은 ‘평화헌법’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 조항을 개정하려는 움직임에 반대하는 ‘9조 모임’이 있다는 이야기도 들

brunch.co.kr/@sichunju/590







개벽의 눈으로 새로운 세상을 전망한다

- <개벽포럼>에서 <개벽학>까지 | 조성환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책임연구원 [이 글은 <개벽신문>제82호(2019.2/3합병)의 '개벽의 창'에 게재된 글입니다.]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과 >원불교 은덕문화원>이 장차 21세기 한국학을 이끌어갈 '개벽학'을 정립하고자 기획하였다. 이 포럼에서는 한국 사회의 각 분야에서 개벽의 이념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해 오신 분들을 모셔서

brunch.co.kr/@sichunju/569







개벽하는 마음 : 개벽의 수양학을 준비하며

- 최근의 개벽파와 개벽학의 흐름들 속에서 | <개벽신문>과 ‘개벽파’가 촉발한 “개벽+(다시개벽 부흥)”은 “개벽학, 개벽학당, 개벽포럼, 개벽종교, 개벽저널, 개벽뉴스레터, 개벽2.0, 개벽대학, 개벽마을, 개벽살림(살림개벽), 개벽문명론(문명개벽), 3.1개벽” 등으로 분화와 집산을 거듭하며 확대 재생산 일로를 걷고 있다. 한시가 다르게 새로운 생각이 보태지고,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담론이 생겨나

brunch.co.kr/@sichunju/588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모시는책방

-동학책방/책방모시는사람들

brunch.co.kr/@sichunju/668







개벽집강소

-개벽통문 | 개벽통문 모음입니다!! - 개벽신문편집위원회 (for 86)

brunch.co.kr/@sichunju/689







개벽학 라키비움(준)

라이브러리 아바이브 뮤지엄 | [필자주] 개벽/학/파/학당/포럼/대학/종교/저널에 대한 논의들이 본격화되고 있다. 이를 위한 아카이빙을 시작한다. 이것은 곧 개벽라키비움으로 발전해 갈 것이다. '라키비움(larchiveum)'이란 '라이브러리(도서관) + 아카이브(아키브) + 뮤지엄'의 합성어이다. 이원진 선생님으로부터 아이디어를 얻었다. [일러두기] 관련기사는 최신순으로 수록한다. [

brunch.co.kr/@sichunju/540







하늘철학

하늘

한국종교

 댓글

소걸음편집장



도서출판 모시는사람들 대표, 개벽신문 주간, 개벽하는사람들 사무국장



구독자 110제안하기 구독하기

어머님의 사랑 덕에 냉장고는 행복 모드어머님 감사합니다.^^ "반찬 뭐 있지?" 냉장고를 열었다. 왜 이렇게 썰렁할까... 한동안 맛있는 반찬으로 꽉 차 있었던 냉장고에 지금은 반찬 몇 가지와 유제품만 보인다. 가끔은 눈을 감았다 뜨면 마술처럼 맛있는 반찬으로 가득 채워지길 바란 적이 있었다. 매번 어머님이 월초에 니엘이가 좋아하는 반찬을 만들어주시곤 했는데 9월은 어머님이 많이 바쁘셨다. 나름 내가 유튜브 보면서by 하니작가

딸의 카톡을 메모장으로 쓰는 엄마심쿵 엄마는 5년 전 위암 3기 말 판정을 받고 위를 전 절제하셨다. 웬만한 음식은 다 잘 드시고 건강도 많이 회복되셨지만 위에서 생성되는 비타민 B12 부족으로 기억력 감퇴 증상이 있으셨다. 위 전절제 환자는 2달에 한 번은 비타민 B12주사를 맞아야 한다는 글을 읽었다. 그동안 엄마에게 너무 무심했던 건 아닌지 반성해 보았다. 성격이 무뚝뚝하셔서 어렸을by 애용이

프라이팬용 뚜껑을 따로 판매하는 이유뚜껑을 덮어야 하는 요리, 덮지 않아야 하는 요리 지름신이 온 어느 날 인터넷 쇼핑으로 쿡웨어 세트의 구성을 확인하다가 순간적으로 의아했던 적이 있다. 냄비류 등의 쿡웨어에는 뚜껑이 같이 구성돼서 나오는데 프라이팬의 넓은 면적의 기물은 뚜껑이 따로 구성돼서 나오지 않기 때문이었다. 같이 구성해놓으면 좋을 것 같은데 왜 굳이 프라이팬용 뚜껑을 구성하지 않는 것일까? 그 이유를 알아보려면 뚜껑을 덮는 이유와by 강상욱

배추 밖은 위험해!배추 밖은 위험해!by 이용한

퇴사할 수 없는 10가지 장점외항사는요 몇 달간의 안전훈련을 받고 승객들의 안전을 위해 일을 하는 우리들의 경우, 자칫 개인의 방심 한순간으로 엄청난 큰 사고를 초래할 수 있기에, 매 브리핑 때마다 항상 안전 관련 공지 숙지, 응급 설비 암기 등을 외운다. 그만큼 승무원이라는 직업은 안전이 제 우선이고 안전이 보장된 상황에서 손님들께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우리의 직업이자 소명이다. 내가by 아홉수 승무원

아이들과 주택에서 살아보니집 짓기와 주택 생활 후기 집을 지어 주택에서 살게 되리라고는 결혼 후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했습니다. 아마 아들 쌍둥이들을 낳지 않았다면, 그럴 일이 없었을지도 모르겠네요. 에너지 넘치는 아들 쌍둥이들을 집에서 데리고 있기 힘들어 바깥으로 여기 저기 돌아다니는 것도 지칠무렵, 교외에 주택을 지어 이사를 가게 되었습니다. 그 전에 살고 있던 곳은 주상복합 아파트였는데 건물 바깥으로 나by 책읽는 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