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0/13

(18) SeongHan Kim 기독교민주동맹이 창립 김창준 허헌 한경직

(18) SeongHan Kim | Facebook



SeongHan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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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2월 24일 기독교민주동맹이 창립되었지만 창립식은 "모 청년단체 완장을 한 수백 명"의 방해로 장내는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모 청년단체란 서북청년단이었을 것이다.



김창준에 의하면, "기독교민주동맹이 결성되던 날 미제는 우익깡패 950명을 내몰아 회의가 진행되는 천교당을 들이치고 돌과 몽둥이로 창문을 들부시며 우리의 결성식을 방해하여 나섰다."



 그때 회의에 내빈으로 참가한 허헌은 축사를 하던 중에 깨어진 유리조각에 맞아 이마에 상처를 입었으며 결성식에 참가한 450여 명의 기독교 청년들이 끌려가 감금되었다. 이날 오후 김창준도 경찰서에 붙잡혀서 다음날까지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김흥수, "북으로 간 3,1 운동 민족대표, 김창준 목사" 

[3.1 운동과 기독교민족대표 16인] (서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19), 530.





"한목사 : 예, 그때 공산당들이 이남에 많지 않았시요? 그런데 그들이 [기독교연맹]을 서울에 조직하려고 했단 말이외다. 거기서 누구를 업었는고 하니 전에 신학교 감리교 교수로 있었고 33인 가운데 한분인 김순창 목사를 업고서 창립총회를 시천교당에서 한다고 했시요. 그런데 그걸 알고서 우리 교회 청년들이 문을 차고 쳐들어가서 모조리 흩허서 못하게 해 버린 일이 있시요.



... 전쟁 동안에는 그분이 만주에 가 있었는데 거저 술도 하고 담배도 했던가봐요. "술친구도 많이 만나다보니 담배를 피워서 한목사 앞에서 담대 안하고 못 견디갔소." 그러는 거요.



내 그래서 속으로 '이 양반이 신앙이 제대로 들어가 있지 못하구나' 생각했었시요. 그런데 기독교계에서는 그이 생활이 그런 줄 아니까 아무데에서도 오라는 데도 없고 또 다른 사회층에서도 인정을 안해주고 그랬는데, 공산당 녀석들이 보니까니 33인중에 하나니까 이용가치가 있거든.





그래서 찾아가서 인사도 하고 대접도 하고는 "아무래도 우리가 예수교를 바로 믿어야겠는데, 사회가 노동자 중심으로 해나가야 되고...하여 기독교 연맹을 조직해야 합니다" 이러면서 포섭을 한 거외다. 거 [기독교연맹]이란 거이 그런 성격이외다. 아 그래서 우리교회 청년들이 열렬한 반공청년들이라 가서 쳐부수고 해산시켰거든. 지금은 그 청년들이 다 장로됐수다... 그때 [서북청년회]라고 우리 영락교회 청년들이 중심되어 조직을 했시요. 그 청년들이 제주도 반란사건을 평정하기고 하고 그랬시요. 그러니까 우리 영락교회 청년들이 미움도 많이 사게 됐지요." 

김병희 엮음, [한경직 목사] (서울: 규장문화사, 1982), 54.





제주 4.3- 서북청년회-영락교회/한경직을 연결하는 고리에 대한 근거로 자주 등장하는 한경직 목사의 인터뷰 내용 바로 앞부분에는 3.1운동 당시 기독교 민족대표 33인중 하나인 김창준 목사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한경직의 착각인지, 아니면 녹취과정의 오류인지 '김창준'의 이름이 한경직의 회고에서는 '김순창'으로 등장한다. 하나의 사건에 대한 서로 다른 시선과 기억, 김창준의 흡연에 대한 한경직의 신앙적 평가가 흥미롭다. 김창준 목사가 금주금연에 철저했다면 다른 이야기의 전개가 가능했을까?



#오랜만에뵙는한목사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