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1/07

알라딘: 15 성소은. 경전 7첩 반상 - 인류 최고 스승 7명이 말하는 삶의 맛

알라딘: [전자책] 경전 7첩 반상
경전 7첩 반상 - 인류 최고 스승 7명이 말하는 삶의 맛
성소은 (지은이)판미동2015-06-09
































8.8
100자평(1)리뷰(16)

제공 파일 : ePub(22.15 MB)
TTS 여부 : 지원
종이책 페이지수 248쪽


책소개

다산정약용, 정조이산, 간디, 괴테, 링컨 등 시대를 넘나드는 위대한 인물들이 평생 경전을 옆에 두고 읽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인문고전은 자신을 바로 세우는 데 필요하다. 경전은 그러한 인문고전 중 최고의 고전으로 손꼽히는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지혜를 담아 놓은 책이다. 그곳에는 수천 년에 걸쳐 인간이 골몰해온 생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과 답이 함축되어 있다. 그러나 그 만큼 ‘경전’은 난해하고 복잡해 섣불리 다가서기가 쉽지 않은 책으로, 혹은 자신과는 동떨어져 있는 종교 서적으로 여겨져 오기도 했다.

이번에 판미동에서 나온 『경전 7첩 반상』은 인문 고전 중의 고전으로써 독자들이 좀 더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경전의 벽을 낮추고, 지금 우리에게 꼭 필요한 핵심적인 지혜를 맛깔스럽고 쉽게 정리하였다. 특히 우리가 이 험난한 시대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헤쳐갈 수 있도록 삶의 뿌리가 되어줄 깊고 단단한 명구들을 선별하여 방황하는 현대인들에게 생의 좌표를 재점검하고 안착하게 만드는 ‘지점’을 제공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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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P. 23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바로 앞에 있는 것을 깨달으십시오. 그러면 감추어졌던 것이 여러분에게 드러날 것입니다. 드러나지 않을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묻혀진 것으로서 올라오지 않을 것은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P. 65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도(道는) 사람에게서 멀리 있지 아니하다. 사람이 도를 실천한다 하면서 도가 사람에게서 멀리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면 그는 결코 도를 실천하지 못할 것이다.
P. 79~80 사방으로 돌아다니지 말고, 남을 헤치려 들지 말고, 무엇이든 얻은 것으로 만족하고, 온갖 고난을 이겨 두려움 없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탐내지 말고 속이지 말며, 갈망하지 말고 남의 덕을 가리지도 말며, 혼탁과 미혹을 버리고 세상의 온갖 집착에서 벗어나,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눈을 아래로 두고, 두리번거리거나 헤매지 말고, 모든 감각을 억제하여 마음을 기켜라. 번뇌에 휩쓸리지 말고, 번뇌에 불타지도 말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집착을 없애는 일에 게으르지 말고, 벙어리도 되지 말라. 학문을 닦고 마음을 안정시켜 이치를 분명히 알며, 자제하고 노력해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접기
P. 116 “순환은 원점으로의 회귀가 아니에요. 이중 나선의 형상을 떠올려 보세요. 융 심리학은 그런 나선형으로 전개됩니다. 여기서는 상승이 아닌 하강을 중요시하죠. ‘성장’보다는 ‘깊이’에 초점을 맞추는 겁니다. 땅 위의 나무는 아름다워요. 잎도 있고, 꽃도 피고, 새가 둥지도 틀고요. 하지만 땅 속은 캄캄합니다. 벌레도 많고, 바위투성이에 공기도 희박하죠. 그래도 뿌리는 아래로 내려가야 해요. 뿌리가 내려간 만큼 몸통도 자라는 거니까. 그래야 나무는 건강해집니다.” 접기
P. 116~117 훌륭하다는 사람 떠받들지 마십시오. 사람 사이에 다투는 일 없어질 것입니다.
귀하다는 것 귀히 여기지 마십시오. 사람 사이에 훔치는 일 없어질 것입니다.
탐날 만한 것 보이지 마십시오. 사람의 마음 산란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인이 다스리게 되면 사람들로 마음은 비우고 배는 든든하게 하며
뜻은 약하게 하고 뼈는 튼튼하게 합니다.
사람들로 지식도 없애고 욕망도 없애고
영리하다는 자들 함부로 하겠다는 짓도 못하게 합니다.
억지로 하는 함이 없으면 다스려지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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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성소은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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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출생. 일본 릿쿄 대학교 법학과에서 합리적인 사고를, 도쿄 대학교 대학원에서 화엄세계처럼 얽혀 있는 국제관계를 공부했으며, 이후 한일 양국 정부와 국제기구 등에서 공공선을 추구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하리라.”는 예수의 말씀을 찾아 순복음교회를 나왔고, 성공회를 지나, “붓다를 만나면 붓다를 죽이라.”고 하는 선불교의 칼끝 같은 가르침에 이끌려 3년간 출가수행을 했다. 이후 ‘나는 누구인가’를 참구하면서 선물처럼 “아하!”를 체험하고 기쁨으로 환속했다. 현재는 인문, 사회, 종교, 과학, 문학, 신화 등 학문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서로 배우는 지식협동조합 <경계너머 아하!>를 운영하고 있으며, 성공회 대학교 사회학과 박사과정에서 인간사회와 종교 관계를 관찰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그리스도교와 불교의 의미 있는 만남을 담은 구도적 고백서 『선방에서 만난 하나님』과 경계 너머의 무한한 가능성을 담아 엮은 『종교 너머, 아하!』(공저)가 있다.
『경전 7첩 반상』은 지금까지 접근하기 어려웠던 두꺼운 세계 경전들을 지혜의 근원으로써 가볍게 맛볼 수 있도록 풀어냈다. 특히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거나 이 시대에 꼭 읽어 봐야 할 7가지 경전들을 중심으로 감동적인 경구와 그곳에 함의된 의미를 맛깔스럽게 정리하고자 했다. 저자는 이를 통해 과거 현인들이 지녔던 소중한 삶의 지혜를 상기시키고 우리에게 인생의 바른 방향과 공부법을 다시금 되짚어 보게 만든다.

지식협동조합 경계너머 아하! www.njn.kr 접기


최근작 : <인문학 특강>,<경전 7첩 반상>,<종교 너머, 아하!> … 총 5종 (모두보기)





흔히 경전이 주는 막연함과 이 책의 의도인 여러 경전을 한 데 보는데서 느끼는 경전간間의 분석이 매우 어려운 문제로 여길 수 있는 독자들에게 지속적으로 경전을 대하는 자세라는 `읽는 틀`을 제공해주며 코칭해 준다.
바람흙별 2016-07-03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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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와 신성은 동일하다-도마복음


쪽수가 많지 않음에도 내게 읽어나가기가 수월한 책은 아니었고, 또한 책이 도착하도 전에 가장 마음에 걸리는 부분은 도마복음과 동경대전이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도마복음과 동경대전, 두 경전은 내게 낮선 것들이었다. 성경은 접해본 적이 없는 것은 아니나 진지하게 읽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는 것이 문제였고, 동경대전은 부끄럽게도 관련 도서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하여 이번 기회에 관련 도서를 구입해 함께 읽었다.



이 책을 읽는 방법으로 내게 두 가지의 선택이 가능했다. 하나는 본 책을 먼저 읽은 후 초면의 도마복음과 동경대전을 따로이 읽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책을 접하기 전에 이 두 내용을 먼저 읽어보는 것이었다. 고민 끝에 후자를 선택하기로 하고, 먼저 「도마복음」을 읽었다. 이어서 「동학사상과 갑오농민혁명-신복룡, 선인」을 구입해 「경전 7첩 반상」과 함께 읽었고 아직 끝내지 못했다.



책을 받아 펼치니 추천사가 매우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저자는 기독교에서 시작하여 불교에 다가갔고, 나아가 또다른 경전들을 접했다. 이 모두가 자신의 서재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몸소 체험을 통한 것이라 한다. 따듯한 안방의 아랫목에서 글을 썼다 한들 독자인 내가 알게 무엇이고, 설사 안다 한들 어떠하리.., 그러나 저자는 머리공부만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과 마음으로 접했다고 한다.



추천사를 지나면 프롤로그를 만나게 된다. 나는 이런 프롤로그는 처음 읽어보았다. 내 독서의 바닥을 훤히 드러나 보이게 하는, 나를 되돌아보게 하는 글이 담겨있었다. 예리한 날이 가슴을 파고들듯 아프게, 그리고 다시 아름답게 다가온 대목은 다음과 같다.




‘인문은 고통과 위기에서 피어난 꽃이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두려움과 혼란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창조의 원동력이 아닌가. 지금 나의 삶이 위태롭고 아프다면 여태껏 잊고 살았던 ‘나’ 라고 하는 꽃망울이 터져 나오려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11쪽



나는 이토록 가슴을 울리는 프롤로그를 기억하지 못한다. 더불어 나의 독서가 그 얼마나 빈약한 것이었단 말인가... 경전에 들어가기도 전에 그만 저자의 정신에 경도되고 말았다.



7가지의 경전은 하나로 통한다, 바로 깨달음이다. 마치 자신을 낮춘 물이 흘러 큰 바다, 한 곳에 이르듯 말이다. 다만 그 표현이 다를 뿐이다. 깨달음이야말로 경전이 존재하는 이유이다.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는 것, 하여 스스로를 자유롭게 하는 것. 이 자유는 방종과는 절대적으로 구별되는 자유이다. 기독교에서의 깨들음은 ‘하늘나라’로 가는 것이요, 불교에서는 해탈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요가와 도덕경 역시 그러하다. 나를 아는 것이다. 탐욕과 욕망을 버리는 것, 나의 집착과 고통에서 자유로워지는 자유로움이다. 하여 우주에 닿는 것이다. 다만 각각의 경전들은 깨달음으로 가는 안내를 위해 각기 다른 방편을 사용했을 뿐이다.



인간이 깨달아야 한다는 것은 인간은 깨달음이 필요한 존재라는 의미이다. 지구상에 유일하게 깨달음이 있어야하는 존재가 바로 우리 인간인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인간만이 필요이상으로 욕망하고 탐욕 한다. 필요이상의 욕망과 탐욕은 나 자신은 물론 다른 모든 존재에게 유해하다. 그 다른 존재가, 다른 사람 다른 사회 그리고 다른 동물이든 식물이든 나아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모든 환경이든 말이다. 우리 사회가 늘 불균형으로 인해 아프고 병들어가는 이유이다.



'스스로 그러함’은 아무런 조건 없이, 그리고 아낌없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인간에게 내어준다. ‘스스로 그러함’은 본디 스스로 그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스스로 그러함’을 깨닫지 못하고 불교에서 말하는 탐진치(貪瞋癡)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탐진치’는 그칠 줄 모르는 탐욕, 끝없이 욕망하는 그 어리석음, 그 탐욕을 이루지 못할 때 오는 노여움이다. 한마디로 탐(貪)은 ‘스스로 그러함’의 대척점에 있는 인간의 모습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말이다.



깨달음은 나 자신에게는 물론 나 이외의, 우리 환경을 포함한 모든 존재에게 도움이 된다. 중용(中庸)의 표현을 빌자면, 만물을 생육하는(萬物育焉-만물육언) 존재가 되는 상태가 아닐까.



경전 중에서 가장 인상 깊은 부분은 도마복음이었다. 기독교의 경전으로 평소 알고 있던 기독교의 내용과는 거리가 너무 멀다는 느낌이 강했다. 이러한 편견은 기독교의 정신을 몰라도 너무나 몰랐던 나로 인한 것이었다. 하긴, 성경이 집에 있기는 하지만 제대로 읽어본 적은 없으니 말이다. 도마복음은 우리에게 말한다.




가난한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31쪽, 도마복음

진정한 자아를 아는 것이 곧 하느님을 아는 것이며, 자아와 신성은 동일하다.

24쪽, 도마복음



내게 도마복음의 가난이란, 탐을 버린 가난으로 이해된다. 저자의 표현을 빌자면 ‘세상을 굶는 것’이다. 저자의 이 말은 인간의 탐욕에서 벗어나는 깨달음의 의미로 파악된다. 저자의 말대로 하늘나라는 공(空), 비어있는 곳이니 말이다. 탐을 버린 가난은 정신의 풍요를 뜻하며 깨달음으로 가는 방편임을 예수께서는 알려주시지 않았던가... 번뇌를 끊어내는 금강경의 말씀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대목이다. 또한 우파니샤드는, “매일 덜어내며 가는 매 순간의 완성”이라고 가르치고, 도덕경은 “하루하루 없애간다”고 말한다. 도마복음의 가난이란 물질적 빈곤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불교와 힌두교, 그리고 유교의 가르침과 정신의 풍요로움, 깨달음으로 가는 상통하는 방편이었던 것이다.



매우 인상적인 또다른 부분은 ‘자아와 신성은 동일하다’고 말하는 도마복음이다.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말이다 싶은데, 그 말은 ‘네가 곧 부처니라’ 였다. 기독교의 경전이나 불교의 경전은 서로 같은 말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불성이 우리 안에 있으니 깨달으면 곧 우리는 부처가 된다. 도마복음은 말한다. ‘인간은 누구나 하느님의 씨앗을 품고 있다’ 라고. 도마복음은 그 씨앗의 싹이 트도록 해주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고, 싹이 트는 순간 우리의 자아는 신성과 동일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신성을 가지게 되다니... 내게는 충격적인 도마복음이 아닐 수 없다. 그동안 기독교와 불교는 거리가 너무나 먼, 결코 가까이 할 수 없는 영원한 상극의 그 어떤 것으로 인식해왔던 것은 크나큰 나의 편견이었음을 또 한 번 깨닫는 순간이었다.



바가바드 기타는 말한다,


요가’라는 말은 신에게 닿는 것 178쪽

인간의 본성인 아트만과 우주의 브라만은 하나 179쪽



동경대전은 말한다,




인내천(人乃天), 사람이 곧 하늘이다

사인여천(思人如天), 사람을 하늘님처럼 섬기라 209쪽



경전들은 인간이 도달 불가능한 그 무엇을 전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우리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다. 인간이 두툼한 껍질을 벗어내고 맨 발로 걸어야 할 그 길을 안내하고 있다. 바로 깨달음이다. 당신은 나보다 더 행복하겠지만 나도 작지만 행복하노라고 말할 수 있는 사회로 가는 길이 이곳에 있다. 행복은 권리하고 말한다던지 추구의 대상이라고 말하기에는 왠지 석연찮은 구석이 있다. 마치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행복이라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알고보면 행복은 본디 나의 것, 스스로 가지고 태어난 인간의 것인데 말이다. 인간은 본래 자신이었던 것을 잃어버린 후 오래도록 그것을 되찾지 못했다. 스스로의 깨달음은 행복으로 가는 길이라고 바가바드 기타는 말한다.



경전들은 한입처럼 말한다. 인간 안에 신성이 있고, 네가 곧 부처이고, 아트만과 브라만은 하나이고, 사람이 곧 하늘이다 라고. 이 모두는 우리에게 한결같은 목소리로 깨달음을 전언하고 있다.



누군가는 말했다. 인간은 무지개를 보면 닿아보고 싶어 하고. 지평선을 보면 가보고 싶어진다고. 또 다른 누군가는 말했다. 인간은 맨 손을 쥐고 있어도 펴보고 싶어 한다고. 이는 인간의 본능이며 창조력의 원천이라고. 일면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이는 인간 탐욕의 원천이기도하다고 말해주고 싶다.



이 책은 경전의 의미를 전하며 그동안 가지고 있던 나의 편견을 산산이 깨트려준다. 그동안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문자와 사유(철학)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이런 나의 생각은 틀렸다. 문자가 있고 사유가 있다 한들 동물보다 못한 짖을 해온 것이 인류의 역사였다. 이 책을 읽은 지금은 생각한다. 인간에게는 경전이 있고 깨달음이 있기 때문에 동물과 구별되는 존재라고. 인간은 경전을 존중해왔지만 동시에 늘 경전을 배반해왔다. 기독교의 사랑, 불교의 자비, 유교의 인은 모두 같은 말이다. 원수마저 사랑하라 했지만 우리는 그 원수를 지독하게도 미워했다. 인지상정이라지만 이것은 깨달음이 없을 때의 이야기다.



믿음을 종교라 말한다면 모든 믿음은 종교랄 수 있다. 유일신과 그 교리만을 종교라 한다면 유불도는 종교라 할 수가 없다. 그런 점에서 유대와 기독교는 종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이 말하고자 본질은 종교에 관해서가 아니다. 종교를 초월하는, 스스로 그러한 인간의 자아로의 회귀이다. 흔히 말하는 종교라는 이름으로 이 경전들을 옭아매기에는 그 말씀이 너무나도 크고 위대하다. 그동안 갇혀있던 경전의 울타리를 걷어낼 때가 아닌가 한다. 우리가 자주 듣던 말, ‘진리’라는 말이 있다. 이 책은 독자로 하여금 그 진리로 가는 방편을 안내하는, 일종의 작은 깨달음을 주는 더없이 귀한 진리의 책이 되어줄 것이다. 이제 이곳에서 한 발 만 더 앞으로 나아가면, 경전의 세계로 뛰어들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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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판에서 새로이 살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하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40쪽, 아래 5줄, “더 큰 나라를 일구는 일깨움의...”에서 ‘나라를’은 ‘나를’의 오기가 아닌가 생각한다. 문맥상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지 꼭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2. 저자는 본 책에서 다석 류영모를 6회 이상 언급하고 있다. 29쪽과 115쪽에서는 유영모, 104, 114, 115, 125 쪽에서는 류영모라고 쓰고 있다 (115쪽 상단에 류영모, 하단에 유영모 두 번 등장함). 누군가가 다석께서는 자신의 성을 ‘유’가 아닌 ‘류’로 불리기를 원했다고 말해준 적이 있다. 어째 거나 독자로서는 ‘유’이든 ‘류’이든 하나로 통일해줄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 책은 출판사가 서평 희망자에게 제공해준 도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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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트랑 2015-03-27 공감(7)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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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은 '다시 읽고', 경전은 '매일 보고'...


'경전'이라고 하면 흔히 종교를 떠올리기 쉬운데,

'4서3경'을 생각해 보면 굳이 종교라고 확정할 필요는 없을 듯 싶다.

이 책에는 양반가 7첩반상에 빗대어 일곱 가지 경전을 해설하고 있다.



그 해설은 깊이가 적당하여 초심자도 핵심에 쉽사리 다다를 수 있을 정도로 잘 쓰여져 있다.
비교종교학자 오강남 선생과 함께한 경전읽기 모임의 결과라 하니
경전 읽기에 낯설던 사람들에게도 좋은 지침이 될 것 같다.



강유원이 '고전'을 일컬어 '나 요즘 일리아드를 다시 읽고 있어.' 이렇게 말하면 뽀대가 난다고 했던가.

그렇게 치자면 '경전'은 매일 읽고 또 읽어 마음을 다스리는 그런 글들이 아닌가 싶다.

나는 책상 위에 임제 스님의 '수처작주 입처개진'이라든지, 금강경의 '응무소주 이생기심' 같은 것들을

몇 자 끄적여 붙여두곤 하는데,

가끔 '반야심경'을 사경하는 것 등으로 마음의 번잡함을 다스리려 이용한다.



이 책의 경전들 역시 부담없이,

마음을 다스리는 도구들로 접하면 좋겠다.

로마의 치하에서 벗어나는 유대인들의 이야기인 '성경'이나,

봉건의 계급사회에서 벗어나려는 조선의 이야기 '동경대전' 같은 것들은 시대를 벗어날 수 없다.

마찬가지로 노자의 도덕경도 전쟁터의 지도자가 가져야할 정치 언설일 게고,

중용 역시 혼란통 안에서 군자가 가져야할 삶의 자세를 다루는 것이다.



경전들은 결국 전쟁터와 같은 삶의 공간에서,

인간의 고뇌를 해소하기 위한 지난한 투쟁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공통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經을 鏡삼아 輕하게 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경전을 거울삼아 삶을 가볍게 해보자는 의도다.

주제는 무겁지만 책은 의외로 가볍다.



성경에서 왜 하필이면 '도마복음'인지는, 오강남의 '또다른 예수'를 읽어봐야 알 것이다.



나를 추종하지 말고 나처럼 되라.

왜냐하면 인간은 누구나 하느님의 씨앗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자아를 아는 것이 곧 하느님을 아는 것이며,

자아와 신성은 동일하다.(24)



불교 경전을 읽는 듯 하다.



'나그네가 되십시오.'

나그나게 되라는 것은 물리적으로 장소를 옮겨 다니는 떠돌이가 되라는 말이 아니다.

이 세상에 안주하지 말라는 것이다.

인습적이고 관습적인 사고에 빠져있지 말고

새로운 차원의 열림과 깨달음을 향해 길을 떠나라는 말씀이다.(29)



모든 것을 다 아는 사람도 자기를 모르면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입니다.(43)



여느 성경과는 다르게 스스로 깨어남을 가르치고,

예수를 따라 살지 말고, 니 스스로 예수임을 알아라~! 마치 불교의 한마디와 상통하는 글이다.

그러니 교회에서는 싫어할 수도 있겠다.



삶의 마디마디에서 천명인 性을 알아차릴 수 있다면 현실은 중용으로 발현할 것이다.

큰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나 홀로 먼저 조화를 이루어내야 한다. 신독이다.(57)



돌~ 선생의 중용도 읽었지만, 또 기억에서 가물가물한데,

이 책을 읽으면서 천명인 성을 '도'라 하고 그 길을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마음에 새기게 된다.



변하지 않는 사랑은 없다. 지속되는 사랑이 있을 뿐.(58)

존재한다는 것은 변화한다는 것이고,

변화한다는 것은 성숙한다는 것이며,

성숙해진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창조한다는 것.(72)



그렇다. 세상 만물은 변하는 것이 진리다.

그래서 인간의 자세, 태도가 문제시 되는 것이다. 신독만이 중용을 이룰 수 있다.

인간은 늘 경전을 읽으며 지속시키기 위하여 수시로 자신의 변화율을 측정해 내야 한다.

계속 움직이지 않으면 줄광대는 줄에서 떨어진다.



힘 중에서 가장 센 힘이 '홀로 있을 수 있는 힘'이다.

홀로 있는 시간이 자유롭고 풍성한 이는 남도 자유롭게 하고 풍성하게 한다.

혼자를 견디지 못하고 이내 헛헛해져 술친구를 찾고, 성급하게 결혼해 결국 삐걱대고,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사이버 세상에서 존재아닌존재로 사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외로움을 면하고자 하는 일들이 오히려 나를 잃고, 시간을 잃고 덩달아 삶의 생명력까지 고갈시켜

낭패가 된다면 차라리 혼자 있는 것에 비할 바 아니다.(82)



그래서 숫타니파타에서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말이 그토록 많이 나온다.



집에 불이 난 것을 물로 꺼 버리듯이,

지혜로운 사람들은 걱정이 생기면 이내 지워버린다.

마치 바람에 솜털을 날려 버리듯이.(95)



인간에게 '걱정'은 날마다 생기지 않는가?

걱정 인형에게 맡기고 편안하게 살 수는 없다.

솜털을 바람에 날려버리듯, 살려면, 경전을 읽고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



나는 누구인가?

오직 모를 뿐.(104)



경전을 이해하기는 참 쉽다.

허나, 마음에 끄달려 사는 중생에게 그것을 실천하고 마음을 툭, 털어버리는 일은 참 어렵다.



기타에서 '요가'라는 말의 풀이가 읽을만 하다.



'요가'라는 말은

신에게 닿는 것, 우주를 주관하는 힘에 자신을 잡아 매는 것, 절대자와 인간의 접촉을 의미한다.

요가란 더욱 심원한 본체와 하나가 되려는 인간의 실천적 노력이다.(172)



보통 요가를 기묘한 동작으로 이해하기 쉽지만,

그것은 모두 인간의 본질에 다가서기 위한 실천이라는 것이다.



요가의 힘으로 모든 행위를 놓아버린 이,

지혜로써 의심을 끊어버린 이,

참나에 머무르는 이, 그는 어떤 행위도 속박될 수가 없다.

오 부를 차지하는 이여.(178)



명상은 특별한 날에 먹는 외식이 아니다.

정신을 맑게 하고 마음을 살찌우기 위해 매일 먹어야 하는 정신의 밥이다.(189)



경전이란 것이 그런 것이다.

가끔 기분전환으로 먹는 외식처럼 섭취할 것이 아니라,

매일 먹는 정신의 밥.



형체도 모양도 없는 그 마음을 닦아야만

한울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준 은덕을 알 수 있는 것이요,

한울님 덕을 밝히는 것이 바로 도이다.(222)



동경대전은 동학의 경전이다.

조선의 천민, 여성들에게 동학은 그대로 예수였다.

마음을 닦으면 스스로가 한울님이 되는 지경을 한번 경험한 자에게 두려울 것은 없었다.

그래서 절두산에서 머리잘리기를 두려워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무릎 꿇고 비루하게 천민으로 사느니 한울님의 자녀가 되어,

스스로 한울님이 되어 사는 것이 꿈이었을지니...



차를 마실 때는,

천천히 그리고 경건한 마음으로

마치 차가 온 지구가 될고 있는 축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렇게 천천히 한결같은 속도로 미래를 향해 서두름 없이 마시기를 바랍니다.

실제적인 순간을 사십시오.

그런 실제적인 순간만이 생명입니다.(225, 틱 낫한)



살아 숨쉰다고 모두 생명이 숨쉬는 것은 아니라는 말은 두렵다.

실제적인 순간만이 생명이라는 말에서,

터무니없이 불필요한 속도를 내는 스스로를 돌아본다.





이 책은 제목이 참 맛깔스럽게 잘 지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책을 한번 읽은 지금은, 생각이 좀 다르다.

어차피 잘 차린 칠첩 반상이랬자,

그 하나하나는 반찬이고, 한끼 먹으면 후딱 치워버릴 밥상이다.

여기 소개하는 경전들은 칠첩 반상 류가 아니다.

매일 꼭꼭 씹어 먹으며 음미해야할 영혼의 밥상이라 해야 더 비근한 예가 아닐까 싶다.





19. 오심즉여심의 한자를 '나 오'가 아닌 '나라 오 吳'로 쓰는 곳이 여러 군데다. 204, 205쪽에서도 틀려있다. 205쪽의 제목에서는 또 맞게 적고 있고... 편집자여, 한자 공부 쫌 하시라... 125쪽의 오상아 에서도 마찬가지 실수를...



145.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의 '즉'자는 '卽 곧 즉'이다. '則'이 아니다. '則'은 접속사로 쓰일 때 then, thus 이런 이어짐의 시간 관계를 나타내는 글자이고, 卽은 곧바로, 즉시...를 나타내는 한자다. 무릇 상이 있는 것은 모두 허망하다. 모든 형상이 형상 아님을 보면 <바로> 여래를 만난다...는 의미지, 이리하여... 여래를 만난다는 뜻은 아니다. 이런 한자는 중요한 한자이므로 '경전'이란 책에서 틀리면 안 된다. 그리고 같은 페이지의 '아상'과 '인상'에서 '인상'을 '나는 사람이다'라는 생각으로 풀고 있는데, '아상'과 상반된 '타인'을 의미하는 '남'이라는 의미가 더 큰 것이다. 나는 소중하고 남은 가벼이 여기는 잘못을 저지르지 말라는 의미가 아닐까?


글샘 2015-03-30 공감(6) 댓글(0)


일곱 경전을 통해 자신을 발견하는 시간 <경전 7첩 반상>


직장 생활은 분주함을 넘어선 '바쁨'이다. 그렇게 정신없이 보낸 하루하루가 쌓여, 더 이상 미망(迷妄)의 더께를 감당할 수 없을 때 '내가 지금 뭐하고 있지?" 자문하게 되더라. 이어 내 자신을 위한 이런저런 투자(공부를 더 한다거나 마라톤 등등)의 시기마저 지나니 그 다음은 보다 자유로운, 걸림이 없는 나만의 삶을 지향하게 되더만.(물론 뜻대로 다 되는 건 아니고...) 당연히 인간 본연의 존재 의미에 대한 성찰의 시간이 찾아오고, 자연스레 고전(古典) 사상서나 종교의 경전(經典) 속에서 그 해답의 단초를 찾으려고 뒤적거리게 되더라. 묘하게도 젊은 시절엔 별다른 감흥이나 느낌이 없던 문장이나 가르침이 세상사 경험의 깊이만큼 선명하게 각성되는 이건 또 뭐람. 대략 서양의 정신 속엔 건조한 묵시적 신비주의가 보였고, 동양의 정신 속엔 정해진 틀이 없는 '마음'이란 게 있더만. 종교라는 것도 그 이름을 들어내고 보니 뿌리와 줄기는 거의 비슷하고 크고 작은 가지만 달라보였다. 그 무엇이든 결국은 인간의 삶, 그 중에서도 고(苦)로 귀결되더라는 거지. 이 고(苦)란 것이 어디 단순한 괴로움이겠는가. 시대의 결함과 불만족에 맞닿아 있는 아픔이 아니겠는가. 그 아픔을 보담는게 종교 아니겠는가. 에고~ 개똥철학 집어치우라 해도 뭐~ 할 말 없지만 나는 그렇게 느꼈다.



<경전 7첩 반상>. 처음 이 책의 표지를 봤을 때 '경전'이란 큰 제목보다 '7첩 반상'이란 글의 의미가 더 빨리 와 닿더라. 그래서 요리 관련 책인가 싶었다.(아마도 최근 들어 요리에 조금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이겠지). 그런데 요리 책이 아니더만. 인류가 낳은 정신적 유산 중에서도 그 최고봉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 가히 지혜와 사상의 진수라 할 수 있는 일곱 권의 경전을 통해 우리의 삶을 깊게 들여다보게 만드는 책이더라. 책에 뒷면에 요약되어있는 일곱 가지 경전의 카피를 보니, 불교의 수많은 경전 가운데서 가장 초기에 모아진 <숫타니파타>, 동양 문헌 가운데 가장 먼저 읽어야 할 책으로 간주되고 있는 <도덕경>, 양 극단으로 치달은 우리 사회에 무엇보다 간절한 정신이기도 한 <중용>, 나뿐 아닌 너와 우리 모두의 대 자유를 추구하는 대승의 중추 <금강경>, 인도를 넘어 세계의 고전이 된 <바가바드기타>, 그리스도교를 새로운 차원으로 이끄는 선두 마차 <도마복음>, 우리 정신과 우리 철학을 담고 있는 <동경대전>이 소개되어 있었다. 물질만으론 해소할 수 없는 풍요 속의 허기와 깊은 목마름을 채워줄 수 있는 지혜가 경전 속에 있다는데, 이 일곱 중 다섯의 원전을 어쨌든 나름의 느낌으로 읽은 적이 있는지라 나는 저자가 어떻게 그 오의(奧義)를 풀어내는지, 그 깨달음의 경지가 어디에 닿아있는지 정말 궁금했다.



저자는 다양한 종교의 경전을 만나고 이해하는 것이 인문학의 바탕을 다지는 일이요, 나아가 '참된 나'를 체득하는 뛰어난 방편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이런 책이 나온 것이고... 사실 '내 경전'만 챙기는 종교적 편협성이나 극단주의는 갈등의 심화 또는 전쟁 등의 고통으로 이어져 온 것이 역사 아닌가. 독선은 편견과 무지를 낳고 이는 '너의 것만 아니라 나의 것'조차 올바르게 알 수 없음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눈 감은 신앙으로는 경전에 숨은 속뜻을 알아차릴 수 없으며 새로운 깨달음을 얻을 수도 없기 때문이라는 저자의 개념이 곧 내 마음이다. 저자는 그래서 어느 한 쪽에 편향되지 않도록 여러 종교의 경전을 읽고 묵상해 보자는 의도에서 2013년 늦가을 '종교 너머, 아하! 경계 너머, 아하!'를 지향하는 '일요경모임'이란 지식협동조합을 설립하였는가 본데, 이 책은 그 결과물인 듯하다. 경을 소리 내어 읽고, 가다듬고, 잠시 명상을 통해 이들이 얻은 '황홀한 기쁨, 은혜와 가피'를 더 많은 이들과 나누고 싶었단다. 그래서 독자들에게 '한번 들어보시라', '냄새라도 맡아보시라'고 권하는 생각 밥상이요 마음 밥상이라는 의미에서 책의 제목을 <경전 7첩 반상>이라고 했다한다.(그런데 난 경전을 음식에 빗대는 타이틀이 조금 마음에 들지 않구먼)



처음에 소개되는 경전이 <도마복음>이다. 1945년에 발견된 이 도마 복음서는 4복음서의 형식과 달리 예수의 일생에 대한 전기적 내용 보다는 예수의 어록을 주로 담고 있다. 신성을 중시하는 기독인들은 이단서로 치부해 버리기도 하나, 정신과 영혼을 탐구하는 이에겐 참으로 경이롭고 놀라운 경서다.(나는 오강남 교수 책과 도올 선생 책을 읽었다.) 공관복음에서 많이 언급되는 여러 기적이나 부활, 재림, 최후 심판 등등 유일신을 향한 믿음보다는 자신의 진면목 즉, 자아를 찾는 '깨달음'을 강조하니 어찌 놀랍다 하지 않겠는가. "나를 추종하지 말고 나처럼 되라. 왜냐하면 인간은 누구나 하느님의 씨앗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고통을 겪는 것은 죄 때문이 아니라 무지 때문이다. 진정한 자아를 아는 것이 곧 하느님을 아는 것이며, 자아와 신성은 동일하다."는 말은 정말 지금의 성경과는 많이 다르다. 도마복음은 "이 말씀의 뜻을 올바르게 풀이하는 사람은 결코 죽음을 맛보지 아니할 것입니다."라고 비밀의 문을 연다. 달마의 가르침인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見性成佛)과 너무나 닮아있지 않은가. 결국 마음속에 있는 신성(神性, 하느님)을 깨닫고 그것이 인성(人性) 그 자체가 될 때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걸로 이해하고 만다. 한마디로 불이(不二)다. 불교와 기독교의 교리가 완전히 다른 것 같으나 그 사이에 도마복음을 놓으면 서로가 통하는 진리의 말씀이라는 느낌을 들더라.



저자가 일곱 경전을 통해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은 결국 인간의 '홀로 있음'에서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자는 거다. 그래서 참된 자아를 발견하고 행복으로 나아가자는 거지. 도마 복음의 67절 "모든 것을 다 아는 사람도 자기를 모르면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입니다."를 보면 어째 섬뜩하다. 이건 부처님의 마지막 가르침인 자등명 법등명(自燈明法燈明)과 통할 뿐 아니라, 도덕경의 지인자지 자지자명(知人者智自知者明)과 통하고 중용의 신독(愼獨)과도 통하며, 법구경의 무소의 뿔과도 연결되고 바가바드기타의 지혜의 요가와도 그 깨달음이 하나가 된다. 한마디로 "존재 자체로 빛을 발하는 너 자신을 알고 있는가?"라는 물음이 일곱 경전의 전반을 관통한다. 행복은 자신의 깨달음 즉, 자아를 찾아 다시 시작점으로 회귀하였을 때 시작되는 거라고 말하는 듯하다. 끝이 어떻게 임할 것인가를 묻는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는 "시작을 찾았는가?"라고 되묻는다. 나는 여기서 본성을 찾는 단계를 소 찾는 것에 비유한 심우도(尋牛圖)가 떠오르더라. 도마복음이 말하는 행복한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시작에 서 있는 사람이며, 있기 전에 있는 사람이며, 가난한 사람이고, 홀로 있는 사람이고, 박해받는 사람, 길 잃은 사람이다."라고 했다. 어째 고(苦)의 향기가 나지 않는가! 결국 '삶의 답'은 자신을 어떻게 알고 구하느냐에 달려 있음을 이 책은 말하고자 하는 듯하다.



이 책에서 언급한 일곱 경전 중 내가 정식으로 읽은 적이 없는 경전은 <바가바드기타>와 <동경대전>이었다. 힌두교의 <우파니샤드>는 어찌어찌 요가 아사나를 배우면서 읽었는데 바가바드기타는 처음으로 간략 내용을 알게 되었다. <동경대전>을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부끄러움(?)일 수도 있겠다는 느낌이 들더라. 동학에 대해 조금은 알고 있고, 인내천이나 21자의 주문(지기금지원위대강, 시천주조화정만세불망만사지) 염송 정도는 알고 있었으나 그 근본을 알지 못했는데, 이번 기회에 동경대전이나 한번 제대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 성직자들의 전유물이었던 경전이 오늘날에는 그저 '열린 보물창고'처럼 언제든지 자기 것으로 할 수 있는 시대이다. 종교학의 창시자 막스 뮐러는 "하나의 종교만 아는 사람은 아무 종교도 모른다."고 했다. 마음 한 자락만 열면 편협에서 벗어나 다른 종교의 진수를 수용할 수가 있지 않겠는가. 종교적 경계의 걸림에서 벗어나 그 종교가 가진 '황금 지혜'를 슬기롭게 받아들인다면, ‘참된 나’를 찾아가는 과정이 보다 더 가까워지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이즈음에서 생각의 흐름이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一歸何處)로 이어지더라. ‘참된 나’로 맞이하는 삶은 그저 행복이란 이름으로만 존재하는 걸까? 진리로 통하는 비밀의 문은 어쩌면 이제부터가 시작이지 않나싶다. 내가 어리석어 이 책에서 특별한 견성(見性)의 경지를 엿보지는 못했지만, 제법 읽을 만 했다는 건 알겠다. 나름 괜찮은 책읽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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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맥(漂麥) 2015-03-27 공감(6)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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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 7첩 반상]생각 밥상, 새콤 달콤 매콤한 양념은 없지만 단백하고 정갈한 맛이야!

차려진 밥상이지만 낯익은 밥상은 아니다. 7첩의 경전 밥상이다. 분명 먹기만 하면 되는, 잘 차려진 밥상이지만 경전이 주는 무게 때문일까. 덥석 집어먹기엔 격식이 필요한 밥상 같아서 자꾸 멈칫하게 된다. 그럴 땐 일단 손이 가는대로 한 입 두 입 먹어보는 수밖에.

경전은 문자가 없던 시절, 종교 창시자의 계시나 그 행실을 기록한 책이다. 종교 서적이기도 하고 고전 중의 고전이기도 하다.



『도마복음』은 1945년 이집트의 나그함마디에서 발견된 ‘나그함마디 문서’ 가운데 하나다. 4복음서인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의 내용과 같은 부분도 있고 다른 부분도 있다고 한다. 예수의 행적이나 죽음, 부활에 대한 언급 없이 오직 예수의 말씀으로만 이루어져 있고 맹목적인 믿음이 아니라 깨달음을 강조하는 점이 4복음서와 차이점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추구하는 사람은 찾을 수 있을 때까지 계속해야 합니다. 찾으면 혼란스러워지고, 혼란스러워지면 놀랄 것입니다. 그런 후에야 그는 모든 것을 다스릴 수 있습니다.” (25쪽)

구하는 사람은 찾을 것입니다. 열릴 것입니다.(26쪽)

가난한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하늘나라가 여러분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 마음속에서 박해받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들은 아버지를 진정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배고픈 사람은 행복합니다. 원하는 사람마다 그 때가 채워질 것이기 때문입니다.(51쪽)



행복을 찾는 과정이 더 행복하고, 약간의 결핍이 있는 삶이 감사와 행복을 누리게 한다. 파키스탄 같은 빈국이 행복지수가 높은 이유도 그런 결핍이 주는 감사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설렘과 기대감, 호기심으로 가득한 1%가 부족한 상태에서도 인간은 행복할 수 있겠지. 행복은 다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기에.



『숫타니파타』는 초기 불교 경전으로 팔리어로 ‘경의 모음’이라는 뜻이다. 인도 마우리야 왕조의 3대 아소카왕 이전에 지어진 인간 붓다의 행적과 육성이 담긴 경전이다.



묶여 있지 않는 사슴이 숲속에서 먹이를 찾아 여기저기 다니듯이, 지혜로운 이는 독립과 자유를 찾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사방으로 돌아다니지 말고, 남을 해치려 들지 말고, 무엇이든 얻은 것으로 만족하고, 온갖 고난을 이겨 두려움 없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중략)

집착을 없애는 일에 게으르지 말고, 벙어리도 되지 말라. 학문을 닦고 마음을 안정시켜 이치를 분명히 알며, 자제하고 노력해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78~80쪽)



무소의 코 위에 우뚝 솟은 뿔은 출가수행자의 獨覺을 상징한다고 한다. 수행자의 흔들림 없이 정진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한다.

흔들림 없이 용맹정진하기가 쉽지 않지만 혼자서 해내야 하는 인생살이기에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고 싶다. 오늘도 흔들림 없이 씩씩하게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자.



인도 고전인 『바가바드기타』는 『베다』, 『우파니샤드』와 함께 힌두교 3대 경전의 하나다. 산스크리트어로 ‘지극히 높은 사람’, ‘거룩한 자의 노래’라는 뜻이다. 궁극적 실재인 브라만에 대한 가르침이자 요가(신에게 닿는 것)를 설하는 경전이다. 『베다』와 『우파니샤드』와 달리 모든 계층의 해탈 가능성을 인정하는 경전으로 마하트마 간디의 영적 지침서‘이었다.



그대에게 부여된 의무의 행위를 행하라.

행동은 행동이 없는 것보다 낫기 때문이다.

행동이 없이는 그대 자신의 육신조차 부지하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집착함 없이 있으면서 언제나 행해야 될 행위를 하라.

집착 없이 행동을 함으로써 그는 가장 높은 것에 이르느니라. (170쪽)



집착 없는 행동, 오늘 부여된 의무를 다하는 행동, 거침없이 당당하게 행동하는 오늘 하루가 되기를......


이 책은 불교 경전 가운데 가장 초기의 『숫타니파타』, 노자의 『도덕경』, 새로운 기독교 경전 『도마복음』, 『중용』, 한국불교의 소의 경전인 『금강경』, 인도 고전인 『바가바드기타』, 동학 천도교의 경전인 『동경대전』 등 모두 7개의 경전으로 이루어진 경전 밥상이요, 생각밥상이다.



익숙한 경구도 있고 낯선 경구도 있는 잘 차려진 밥상이다. 소화불량에 걸리지 않게 꼭 씹어 소화시켜야 할 밥상이다. 새콤 달콤 매콤한 양념은 없지만 단백하고 정갈하다. 그렇게 경전의 맛을 음미하라는 마음밥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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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덕 2015-03-30 공감(5) 댓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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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으로 맛보는 인생의 참맛




경전으로 맛보는 인생의 참맛



책의 서문에 적힌 추천사의 말처럼 정갈한 경전 한 상을 받은 느낌이었다. 그 상에는 다양한 종교의 핵심을 이루는 경전들이 푸짐하게 놓여 있었다. 그 경전들은 <도마복음>, <중용>, <수타니파타>, <도덕경>, <금강경>, <바가바드 기타>, <동경대전>이다. 이러한 경전들은 기독교, 도교, 힌두교, 불교, 천도교 등 종교의 핵심 사상을 다루고 있는 책들이었다.



특히, 작가의 이력이 특이했다. 일본 릿쿄 대학교 법학과에서 합리적인 사고를, 도쿄 대학교 대학원에서 화엄세계처럼 얽혀 있는 국제관계를 공부했단다. 이것보다 더 특이한 것은 저자 성소은의 다양한 종교 이력이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하리라."는 예수의 말씀을 찾아 순복음교회를 나왔고, 성공회를 지나, "붓다를 만나면 붓다를 죽이라."고 하는 선불교의 칼끝 같은 가르침에 이끌려 3년간 출가수행을 했다고 한다. 현재는 성공회 대학교 사회학과 박사과정에서 인간사회와 종교 관계를 관찰하고 있단다. 다양한 학문을 섭렵한 것과 더 다양한 종교를 공부하면서 이제는 인간세계와 종교의 관계를 연구하고 있다니, 저자의 지식에 대한 무한한 욕구가 조금이나마 느껴졌다.



이 책의 목차에는 각각의 경전들의 핵심을 이루는 내용들을 멋진 글자로 적어 놓고 있어서 그 경전들을 이해하는 걸 돕고 있었다.



<도마복음>은 "나그네가 되십시오",

<중용>은 "간절함으로 스스로를 이루다",

<숫타니파타>는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도덕경>은 "머물지 말고 흘러라",

<금강경>은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 마음으로",

<바가바드 기타>는 "나는 누구인가",

<동경대전>은 "사람이 곧 하늘이다"



목차만 훑어봐도 마음이 충실하게 채워지는 기분이 드는 것 같았다. 특히, 캘리그래피 글씨체로 적힌 말들이 너무나 멋져서 더 좋게 느껴졌다. 이러한 캘리그래피도 저자가 직접 적었다고 하니 더욱 신비롭게 다가왔다. 그리고 이 책의 핵심은 바로 책 중간 중간에 적힌 경전의 좋은 말들을 접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저 많은 경전을 하나 하나 찾아서 읽는다는 것은 경전 공부를 따로 하는 게 아니라면 바쁜 현대인에게는 아주 먼 이야기일 것이다. 그렇다고 경전을 멀리하고 있기에는 최근 복잡해진 사회 구조 때문에 정신적으로 척박함을 느끼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좋은 경전 구절로 우리의 마음을 풍요롭게 만드는 것이 더욱 중요해졌다.



경전 구절들은 하나 하나가 빛을 발하고 있었다. 정말 우리 삶의 정수를 모아 놓았기 때문에 수 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살아 남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경전의 구절들은 하나도 버릴 게 없는 우주의 신비를 이루는 진리요, 지혜라고 할 수 있었다. '나무아미타불'만 외우면 득도하여 해탈할 수 있다고 하는 것처럼 경전 구절을 계속 읽으면 세상을 바라보는 내가 바뀔 수 있을 것 같았다.



예수님의 말씀만으로 이루어진 <도마복음> 속에 이런 구절이 있다.




나를 추종하지 말고 나처럼 되라. 왜냐하면 인간은 누구나 하느님의 씨앗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고통을 겪는 것은 죄 때문이 아니라 무지 때문이다. 진정한 자아를 아는 것이 곧 하느님을 아는 것이며, 자아와 신성은 동일하다."

어디서 많이 보던 말이 아니던가? 누구나 하느님의 씨앗을 품고 있단다. 불교에서 누구나 도를 닦으면 도를 깨달아 해탈한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한 말과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세상의 모든 종교들이 표현하는 말만 다를 뿐이지 결국은 하나의 진리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종교관이 다르다고 서로 죽고 죽이는 종교 전쟁이 인간의 가장 어리석은 짓이며 신을 위한 행동이 아니라 인간의 욕망때문에 일어난 것뿐이라고 생각한다. 몇 명의 지도자, 부를 가진 권력자에 의해 얼마나 많은 민중들은 힘없이 죽어 나가게 되는 건지,,, 전쟁은 이 세상에서 결코 일어나지 말아야 할 비극이라 할 수 있다. <도덕경>에서는 "둘 다 근원은 같은 것, 이름이 다를 뿐 둘 다 신비스러운 것, 신비 중의 신비요, 모든 신비의 문입니다"라고 한다.



책 속에서 물었다. "너는 누구인가?" 이름과 주민등록번호, 주소를 댔지만 그런 분류 방식을 묻고 있는 게 아니라고 한다. 다시 너는 누구냐고 묻는다. 난 누구의 자식이고 누군가의 어머니이다고 말하지만 그걸 묻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자 어떤 직업을 가졌고 어디에 소속되어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직업이나 소속을 묻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멍한 눈으로 묻는다. 내가 누구인지... 나 또한 저런 질문을 받으면 위에 열거한 내용들을 말하며 나를 표현할 것 같다. 그것 외에 내가 누구냐고 물어 본다면 대체 뭐라고 대답해야 하는 걸까? 쉬우면서도 어려운 질문이었다.



* 알라딘 판미동의 서평단으로서 해당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불교에서는 `문자를 세워 말하지 말고, 곧바로 사람의 마음을 가리키라`고 한다. 경전은 도구일 따름이다. 손가락을 달로 집착해, 읽는 정성스러움을 헛된 노력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부디 경전의 보고에서 한 층, 두 층 깊어지고 넓어지는 삶을 체험하기를. 그맇여 오랫동안 내 속에 갇혀 있던 `위대한 사람`과 조우할 수 있기를. (2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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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향 2015-03-31 공감(4)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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