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1/22

오철근 - 『기독교 교리에서 본 세계관』ㅡ 함석헌



오철근 - 『기독교 교리에서 본 세계관』ㅡ 함석헌 2. 믿음 어제는 기독교의 근본은 유일신 신앙이라 해서,...




오철근
22 January 2019 ·



『기독교 교리에서 본 세계관』ㅡ 함석헌

2. 믿음

어제는 기독교의 근본은 유일신 신앙이라 해서, 우주간에 신은 하나라는 말, 즉 하나님 이야기를 했습니다. 오늘은 그 하나님에 대한 신앙 곧 믿음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기로 합니다.

그런데 서로 진리의 이해에 이르려 하면 아무 거리끼는 것이 없이 극히 자유로운 심경에서 이야기를 해야 되는 것인데, 이렇게 여기다 마이크를 놓고 그 앞에 서서 이야기를 하려니, 대단히 부자유한 것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참이 아니고 무슨 가짜 놀음인 것 같은 느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이런 것이 다 진리에는 방해물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교회에서도 마이크를 놓고 설교를 하지 않느냐, 될수록 많은 사람을 듣게 하기 위한 것이 무엇이 나쁘냐고 반문을 하는 이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그것은 모르는 말입니다. 그렇기에 교회가 무력한 것입니다. 심령이니 신앙이니 하는 말은 역시 최대한 직접 육성으로 들을 만한 정도의 사람이 모여서 할 것이지 기계적이 되면 효과가 없는 것입니다. 인격적 접촉의 문제입니다. 말하는 것은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요 몸으로 하는 것이며, 듣는 것은 음파만을 듣는 것이 아니요 영파(靈波)에 아울러 음파를 듣는 것입니다.
같은 소리를 기계로 확대하여 동시에 여러 사람이 듣는 것이 좋지 않으냐 하는 이러한 장치는 다 모든 것을 물질적으로 환산을 하려는 현대심리의 그릇된 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옛날의 교육과 종교가 그 교리, 교재의 내용이나 교육방법에 있어서 현대보다 훨씬 빈약하면서도 퍽 효과적이었던 것은 까닭 없는 일이 아닙니다.



현대문명의 밑을 흐르고 있는 근본 경향은 ‘크게’ ‘빨리’ ‘줄곧’이라는 것인데 그것을 한 말로 통합해 표하면 ‘크게’라는 것입니다. 이 마이크란 것도 거기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생명과 진리는 여기서 멉니다. 이것은 전혀 기계적으로 말단적 결과만을 볼 뿐이요, 생명의 산 과정을 무시하는 말초신경 대상적인 생각입니다. ‘크게, 크게’ 하지만 큰 것은 참은 아닙니다. 물론 근본을 말하면 참이야말로 큰 것입니다. “하나님은 크십니다.” 그러나 현대인이 구하는 큰 것은 참 큰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big 이지, great 가 아닙니다. big은 양적으로 큰 것이요, great 는 질적으로 큰 것입니다. 양적으로 대란 것은 질적으로 대인 것 즉 참 큰 것의 표현의 한 끄트머리뿐입니다. 현대인이 양적으로 큰 것을 추구하는 것도 그 알지 못하는 밑에는 참 큰 것을 요구하는 본질적인 생명의 희구에서 나온 것임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깊은 자각에 이르지 못하고 한갓 피상적인 결과만을 보기 때문에 big 이 되어버렸습니다. 현대를 상징하는 것 중에 이것처럼 적절한 것은 없습니다. 대국, 대도시, 대교회, 대대학, 대중. 그러나 현대는 비만형이 되는 대신 두뇌를 잃어버렸습니다. 현대의 혼란은 정신과 심정의 빈곤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류가 나오기 전, 지구 위에 일시 횡행하다가 갑자기 멸망해버린 파충류의 역사는 비대한 체구에 빈약한 두뇌가 어떤 운명을 만난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크다는 이야기가 나왔으니 옛날 사람이 큰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나 하는 것을 하나 이야기 하겠습니다 중국 송대 육구연(陸九淵)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열 일곱 살 때에 ‘대인(大人)’이란 제목으로 지었다는
시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從來膽大胸膈寬(종래담대흉격관) 虎豹億萬虯龍千(호표억만규룡천)

從頭收拾一口呑(종두수습일구탄) 有時此輩未妥恬(유시차배미타념)

哮吼大爵無毫全(효후대작무호전)

朝飮渤海水(조음발해수) 暮宿崑崙顚(모숙곤륜전)

連山以爲琴(연산이위금) 長河爲之絃(장하위지현)

萬古不傳音(만고부전음) 吾當爲君宣(오당위군선)



그 뜻을 대략 말한다면 이렇습니다. 본래 속이 크고 넓어서 호랑이요 용이요 하는 것이 억도 만도 들어갈 수 있다. 그런 것을 머리에서부터 꼬리까지 통으로 삼킨대도 시원할 것이 없고, 훌떡 삼켜 터럭도 남길 것이 없다. 차라리 아침에 발해수를 마시고, 저녁엔 곤륜산 꼭대기에 턱 누워, 그 곤륜산에서 동해까지 치닿는 산맥을 거문고로 삼고, 황하, 양자강을 그 거문고 줄로 삼아 만고에 전하지 못한 소리를 한번 아뢰어볼까 하는 것입니다. 호표요 규룡이요, 하는 것은 소위 세상에서 크다는 큰 것 즉 국토를 개척하느니, 천하를 통일하느니, 하는 영웅사업을 가리킨 것입니다. 그러나 소년 육구연의 생각에 그것이 위대할 것이 없다 생각됐습니다. 발해수, 곤륜산은 천지 전체, 우주 전체를 가리킨 것이요, 만고에 전하지 못한 소리란 정신적인 진리를 가리킨 것입니다. 정말 위대한 것은 우주 전체에 참여함이요, 더구나도 보이는 현상 속에서 보이지 않는 진리를 읽어내는 그 일이란 말입니다. 이것은 마이크를 만들어가지고 세계 사람을 다 내 청중으로 만들어보자는 것과 비할 때 어떠합니까? 훨씬 더 크지 않습니까? 만고부전음(萬古不傳音)을 오당위군선(吾當爲君宣)이라,
그 얼마나 큽니까? 큰 것은 양에 있지않습니다. 만고에 전하지 못한 우주 근본 진리는 악기 아닌 악기로써, 음파 아닌 음파 곧 영파를 타고 전해질 것입니다. 정신의 활동입니다. 인격적 접촉입니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다 물질주의에서 오는 이 부자유한 구속을 조금이라도 깨치고 여러분의 심혼에 직입하는 접촉을 할까 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마이크니, 속기반이니 하는 것을 놓고 하는 피상적인 교육주의에서 오는 강의니, 강연이니 하는 것을 집어치우고, 여러분이 나와 무릎을 겯고 앉아서, 말을 한다면 “너 믿어야 된다, 참 생명을 가지려거든 믿는 것 외에 없다” 할 것입니다. 말로 그런 말을 하자는 말이 아니라, 내 믿음으로 한단 말입니다. 이심전심이라, 맘으로 맘에 전한다는 말이 있지만, 이신전신(以信傳信)입니다. 믿음은 믿음으로만 전해질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부득이 말로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신전신이란 믿음은 심정, heart의 일이란 말입니다. 맨 첨에 여러분더러 따뜻한 심정을 가지란 것도 이래서 한 말입니다. 심정이란 말은 다른 말 아니고 전인격(全人格)이란 말입니다. 『중용』에서 말하는 ‘중’(中) ‘성’(誠)의 자리입니다. 지정의미분(知情意分), 즉 분열이
생기지 않은 근본아(根本我)입니다. 믿음의 대상은
하나님인데, 절대자인데, 하나님은 그 근본아로써
“맘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해서 주 너희 하나님을 섬기라” 했고, 맹자도 “맘을 다하는 자는 그 성을 알고, 성을 알면 하늘을 안다” 고 했습니다.



종교는 믿는 일입니다. 일반으로 “종교 믿는다”하는 그대로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중에서도 특히 믿음을 강조하는 종교입니다. 좀더 엄정히 말하면 ‘신앙만’이라 해서, 신앙을 위하여 다른 모든 것을 거부배척까지 하려는 종교입니다. 이 점은 유교, 불교와 비교해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절대자에 대하는 같은 지경을 말하면서도 유교에선 그것을 ‘학’(學)으로 표시하고, 불교에선 그것을 ‘각’(覺)으로 표시합니다. 같다면 같은것이지만 또 다른 것이 있습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이란 것이 어디까지나 심정적인 대신에, 학이나 각은 근본에서 전인격적인 것은 같으면서도, 아무래도 다분히 지적인 태도가 들어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유교는 말할 것도 없고, 불교까지도, 그 깊은 신봉자 자신들이 이따금 불교는 종교가 아니고 철학이라고 말하는 이가 있는 것이 무리가 아닙니다. 기독교에서는 2천년간 그 역사의 주요한 일이 주지주의나 행동주의와 싸워온 것입니다. 그만큼 신앙을 강조합니다.



그래 한마디로 하면 “너 믿어야 된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것은 어떤 신앙개조(信仰箇條)를 강요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께서 ‘믿어라’ 할 때는 그런 의미로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신앙을 결코 개조적으로 고정화하지 않았고 사람에게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 비유, 우화를 교묘하게 많이 쓴 것은 일반이 잘 아는 일이지만, 그것이 바로 이 신앙의 개조적 경화를 피하기 위해서 하신 것이요 흔히 “듣는 귀를 가진 자는 들으라” 하는 말귀를 쓰셨지만, 이것은 신앙이 어디까지나 자유로운 생명의 운동이요, 강제로 되는 기계적 수입이 아님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정통적인 기독교회에서는 어떻게 말하는지 몰라도, 적어도 내가 아는 예수는 그렇습니다. 정통주의자가 너의 그것은 기독교는 아니다 해도 별 수가 없고, 또 관계가 없습니다. 교회요, 교파요, 신조요, 하는 것은 다 믿는 심령이 믿어서 살고 난 껍질입니다. 생명의 차가 지나간 바퀴 자리입니다. 껍질에서 생명을 찾고, 바퀴 자리에서 운동을 찾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신조니, 교리니, 외적 발표에 관한 한, 나는, “너 믿는 종교에 철저해라” 합니다. 반드시 나와 같은 교도되기를 강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로 인하여 내가 아는 하나님은 정신 영(靈)에 있고 참에 있지, 맘에 있지, 어느 종교나 어느 교회에 있지 않습니다. 인종의 색이나 형이 인간본질에 아무 관계가 없는 것처럼, 교회제도와 교리 신조가 신앙의 본질에 하등관계가 없습니다. 물론 교회 없이, 신조 없이 종교가 있을 수 있단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득어망전(得魚忘筌)이요, 득의망어(得意忘語)라고, 고기 잡기
위한 통발이요, 뜻 알기 위한 말이지, 수단과 목적을 바꾸어서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런데 세상에 고기 대신 통발을 놓고, 뜻 대신 말을 지키는 종교가 어찌나 많은지!



그러기 때문에 내가 “너 믿어야 된다”하면서, 곧 첨부하고 싶은 말은 “그러나 교회에는 가지 말라”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기성교회 안에는 초심자가 판별하기에는 어려울이 만큼, 곡식 밖에 잡초가 더 섞여 있기
때문입니다. 기성교회 안에 물론 진리가 깃들여 있습니다. 그러나 거짓은 더 많이 있습니다. 거기 미혹되지 않기 위해 교회에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교회가 하나님은 아닙니다. 하나님보다 교회가 앞설 때 교회는 하나님 계신 곳이 아니고, 우상이 있는 곳입니다.



첫째 붙들 것은 내 맘입니다. 하나님을 찾아 알 수 있는 능력은 교회제도의 유무에 불구하고, 선천적으로 본질적으로 우리 맘에 있습니다. 그것을 스스로 밝힐 것입니다. 인위적 모든 침해로 많은 상처를 입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본래의 면목을 유지하는 것은 인간성입니다. 밝아진 인간성이야말로 모든 종교제도의 건물이 서는 반석(베드로)입니다.

그러나 그 인간의 본성은 저절로는 밝아지지 않습니다. 표준이 있어야 합니다. 비치는 빛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개개인의 본성 위에 엄연히 서는 것이어야 합니다. 위에서부터 내려오는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성경이 그것입니다. 고로 바른 신앙은 성경에 의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교회는 그때에 곧, 교회 안에야말로 성경은 있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속아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를 낳는 것이지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낳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이날껏 교회 때문에 유지되어온 것이 아니고, 교회와 싸워 살아온 것입니다. 성경의 참 적은 교회 밖에 있지 않고, 교회 안에 있었습니다. 외적은 책을 없애려 했지만 교회내의 적은 그것을 썩히고, 더럽히고, 꾸부리고, 변질시키려 했습니다. 성경이야말로 만신창이의 승리자입니다. 따뜻한 심정과, 덮어 죽이려고 물건을 던지면 던질수록 점점 더 불길이 일어나는 산 불길 같은 성경, 그 둘 사이에서 신앙의 불꽃은 일어나는 것입니다.



믿으라 할 때, 현대인에게 가장 장애가 되는 것은 현실문제인 듯합니다. 신앙생활이 좋은 줄은 알지만 현실 문제를 어찌 합니까, 하는 질문은 비교적 양심적인 사람에게서 반드시 듣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그리 만든 것도 경화된 기성 교회지 예수가 아닙니다. 예수만 아니라 본래 모든 종교는 현실에 고뇌하는 인간을 보고 거기 해결을 주려고 나온 것이지, 문제를 회피시키거나 잊어버리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길을 잃어버린 양떼같이 헤매는 사람들을 보고 그냥 있지 못해 일어나신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을 파견하면서 사마리아로 가지도 말고, 이방 길로 가지도 말고, 이스라엘 집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한 것은 그가 얼마나 현실에 관심을 가졌나 하는 증거입니다. 현실에 참혹한 것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관념화한 내세주의에 도피하려는 것은 생명을 잃고 고형화한 제도교회의 특징입니다. 산 신앙을 가져 현실에서 유리될까 걱정할 것 없습니다. 도리어 신앙 이외의 다른 것을 가지고 현실문제를 해결할 길이 없습니다. 그것은 현재 북구의 소국들과 인도가 좋은 실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장 현실주의인 미국의 여론이 세계적인 위인을 뽑는데 간디와 슈바이처를 꼽는 것은 현실문제의 해결이 산 신앙 이외에 있을 수 없다는 증언입니다. 그리고 그 둘은 다 교파적인 신자가 아닙니다.



왜 현실문제가 믿음 아니고는 해결 될 수 없는가? 그것은 다름 아니고 믿음이란 곧 윤리적인 세계질서를 세우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세계에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여러 가지 문제가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각 부문의 전문가더러 그 해결책을 말하라면 실로 이루 헬 수 없는 여러 가지 설명과 안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졸이고 졸여 실천에 옮기게 된다면,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바르게 한다는 한마디에 돌아갈 것밖에 없을 것입니다. 문제는 사람이 사람을 인격적으로 대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즉 윤리문제입니다. 이 의미에서 모든 것을 기술적으로 방법론적으로 심리적으로 생각하려 하는 현대인보다는 너무 소박한 듯하지만 “네 자신을 알라” 한 희랍 옛 철인의 말이라든지, “일일극기복례(一日克己復禮)면
천하귀인언(天下歸仁蔫)”이라 한 동양 옜 성인의
말이 훨씬 더 옳은, 변할 수 없는 진리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현대어로 한 것이 곧 아프리카 밀림의 성자 슈바이처의 말입니다. 그는 부르짖습니다 ⎯⎯ 윤리적인 세계관을 세우지 않으면 안된다고. 서양문명의 중심지대에 나서 면밀한 관찰과 성실한 실천을 한 그는 철학자, 신학자, 예술가로서의 지위를 내 버리고 40년 생애를 인도주의를 위해 바치는 그는 과학적인 세계관도 심미적인 세계관도 형이상학적인 세계관도 세계를 구할 수는 없고, 다만 그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함같이 너희도 온전해라” “네 이웃을 사랑해라” 하는 단순한 갈릴리인이 죽음으로써 주장했던 그 사랑의 윤리로써 세계질서를 세우는 것으로만 가능한 것을 체험해 얻은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의 말은 허다한 학자의 말보다도, 종파적인 종교가의 말보다도 천만 근의
무게가 있는 것입니다.



물자의 생산 분배가 균일히 못되는 것이 근본 문제가 아닙니다. 세력의 균형이 잘 되지 못한 것이 근본 문제가 아닙니다. 취미의 서로 다른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사람의 맘과 맘이 통치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통치 못하는 것은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믿지 못하는 것은 인격관념이 없기 때문입니다. 인격관념이 없는 것은 이웃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인격은 홀로서는 생기지 못합니다. ‘나’에 대하는 ‘너’가 있고서야 됩니다. 그러나 나와 너가 그저 대립만 하는 것으로는 안됩니다. 대립하면서도 서로 하나인 것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대립하면서도 하나인줄을 아는 것은 통일입니다. 윤리적 세계관이란 인격적 세계관입니다. 우주인생을 한 개 산 인격적인 생명으로 자각하는 일입니다. 문제는 이 우주를 산 것으로 보느냐, 또는 죽은 기계로 보느냐 하는 데서 갈립니다. 고래로 혼란에 빠진 시대에 새 통일을 준 것은 언제나 고등한 윤리를 가진 종교였습니다. 썩어지고 침체한 사회를 일변해 청신한 창작적인 생명력을 주는 것은 고등한 윤리입니다. 그리고 이 윤리의 정도는 그 통일하는 세계의 크고 작음에 따라 측정이 됩니다. 씨족사회를 통일하던 효(孝)보다는 국가를 통일하던 충(忠)이 보다 높이 놓였고, 국가주의의 충효윤리보다는 세계주의의 사해동포윤리가 한층 더 높았습니다. 이 의미에서 ‘하늘나라와 그 의’를 고조하는 예수의 종교는 궁극 최고의 윤리를 주는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믿음이란 절대자와 인격적 관계에 들어감에 의하여 우주에 산 통일을 주는 일입니다.

지금까지 인류가 세계문제를 해결하려 할 때, 가장 많이 취한 방법이 전쟁이란 것입니다. 그것은 폭력으로서 서로 반대되는 편을 없애버림으로 문제를 해결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가장 졸렬한 방법입니다. 수천 년 전부터 모든 어진 교사들은 그것이 아니란 것을 부르짖어왔습니다. 그리고 서로 하나 되는 길을 취해서만 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왔습니다. 그것이 종교입니다. 그중에도 가장 분명히 가장 힘있게 .가르쳐준 이가 예수입니다. 믿음이란 하나인 생명에 하나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