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1/24

05 상相과 중도 상에 집착하지 말고 중도를 걸으라



(9) 05 상相과 중도 상에 집착하지 말고 중도를 걸으라는 논의 시리즈 준비로 먼저... - Chang-Seong Hong










Chang-Seong Hong
18 January at 03:56 ·



05 상相과 중도

상에 집착하지 말고 중도를 걸으라는 논의 시리즈 준비로 먼저 아리스토텔레스의 중도론을 내 방식으로 소개해 보았다.

밑의 사진 하나는 경주 석굴암 부처님이신데, 몇 해 전 다시 경주에서 뵌 모습으로부터 천여 년 전에도 불상에 한류가 존재했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한국인들의 예술적 '끼'는 고대로부터 역시 대단했다. 그 옆 사진은 아리스토텔레스다. 그의 제자 알렉산더대왕이 정복한 인도 서북부 간다라 지방에서 그리이스 조각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불상 문화가 고대 한반도에까지 이르렀는데, 한 눈에 보아도 석굴암의 조각에 그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놀랍고 기쁜 인연이다.

https://www.dropbox.com/…/05%20%EC%83%81%EA%B3%BC%20%EC%A4%…

05 (2월 17일 원고 마감)
상相과 중도

우리를 극단으로 몰아가는 정치 이념이나 종교적 광신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비판적 자세를 유지해야 한다. 그래야만 이념과 미신으로 우리에게 상相을 씌워 이용하려는 집단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다. 안타깝게도 역사는 정치 종교적 상에 집착한 사람들이 스스로를 구속하며 극단으로 치달아 저지른 재앙으로 점철되어 왔다. 그런데, 머무르지 않고 자유로워야 할 불자들이라면 이런 상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극단을 피하는 지혜는 동서양을 불문하고 중도中道의 삶을 살라는 가르침으로 표현되어 왔다. 붓다의 중도와 비유되곤 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중도론은 그의 행복론을 뒷받침하기 위해 제시되었는데, 그는 행복을 위해서는 중도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통찰했다. 나는 우리가 상을 여의고 중도의 삶을 살기 위한 방법을 찾기 위해서 이 고대 희랍 철학자의 견해를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철학적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서는 정치 종교와 같이 큰 주제보다는 일상의 소소한 생각거리로부터 시작하는 편이 논의의 초점을 흐리지 않기 때문에, 평범한 사례들을 들어 그의 중도론을 소개하겠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의 모든 행위가 스스로의 행복을 지향하고 있다고 보는데, 이는 서양에서는 상식으로 받아들여져 온 견해다. 서양인들은 행복이 삶의 궁극적 목적이라고 보며, 행복을 수단으로 추구할 더 높은 목표가 없기 때문에 행복은 그 자체로 좋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렇게 좋다는 행복은 어떻게 이룰 수 있을까? 일부 극단적인 유물론자들을 제외하고는, 돈 많이 벌고 잘생기고 인기 얻어서 권력을 누리면 행복하다고 주장한 철학자는 없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가 가진 잠재력을 실현하는 삶이 행복한 삶이라고 생각했다. 위대한 철학자의 통찰이라고는 하지만 실은 상식적이고 평범한 진리다. 자신의 가능성을 계발하여 원하는 일을 하며 사는 삶이 행복하다는 데 반대할 사람은 없다. 반면에, 예술가의 자질을 타고나 창조적 작업을 하고 싶은 사람이 부모의 강요로 돈만 버는 비즈니스밖에 할 수 없다면 그가 결코 행복하다고 볼 수는 없다. 나는 미국에서 철학과 대학원에 새로 입학한 40대와 50대 전직 의사들을 여럿 보았다. 젊은 날부터 동경해 온 철학하는 삶을 살고 싶어서 미국에서 최고 수입을 누리는 직업을 그만두고 늦깎이 대학원생이 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대학원생 생활을 무척 행복해 했다.
그러면 잠재력을 실현하며 행복하게 사는 구체적인 방법은 무엇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덕德(virtue)을 가지고 덕스럽게 행위하며 사는 것이라고 답한다. 설득력 있는 이야기다. 서양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덕 있는 사람이 결국은 더 행복하게 살기 마련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나 또한 이 말이 최소한 확률적으로는 옳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덕이 반드시 우리가 생각하는 도덕적 덕목(moral virtue)은 아니었다.
희랍어로 ‘덕’에 해당하는 말(arete)은 원래 ‘탁월함(excellence)’을 의미했다. 트로이의 파리스 왕자가 (아폴론신의 보이지 않는 도움으로) 원거리에서 활을 쏘아 그리스의 영웅 아킬레스의 뒤꿈치를 맞힌 놀라운 궁술 같은 것이 희랍인들이 생각하던 덕이었다. 탁월한 능력, 탁월한 힘 같은 것이었다. 한자어 ‘德’도 원래 기능 또는 능력이란 뜻을 가지고 있었고, 영어에서도 현재 ‘in virtue of’ 같은 표현에 그런 의미가 남아있다. 도덕적 덕만 덕이었던 것이 아니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행복은 잠재력을 실현시켜 능력을 탁월하게 발휘하면서 얻게 된다.
그러면 이렇게 ‘탁월함’이라는 의미의 덕은 어떻게 얻고 또 따를 수 있을까? 이 물음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답변이 바로 그 유명한 중도론中道論이다. 예를 들어 ‘용기’의 덕은 만용과 비겁이라는 두 악덕의 중간에 있다. 용기를 결여하면 비겁하고 이것이 지나치면 만용인데, 덕으로서의 용기는 모자라거나 지나친 양극단을 피하는 중도에 있다는 것이다. 지혜로운 통찰이다. 손님대접에 ‘관대하다(generous)’는 덕은 접대를 아끼거나 낭비하지 않고 그 중도에서 모자라거나 넘치지 않게 행하는 덕이다. 이런 중도가 ‘탁월하다’는 의미에서의 덕이다. 동서양에 모두 중도의 가르침이 전해오는데, 그 이유는 분명 이 가르침에 삶을 행복으로 이끌어 주는 지혜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이런 중도의 길이 옳다고 인정한다고 해서 우리가 중도의 덕을 곧바로 얻게 될까? 그렇지 않다. 덕은 머리로 이해한다고 해서 저절로 얻는 것이 아니라 오랜 기간 동안 덕스러운 행위를 반복해서 그것이 습관으로 굳어져야 형성된다. 덕은 이해가 아니라 체득된 성향(disposition)이다. ‘제비 한 마리가 날아왔다고 해서 여름이 오는 것은 아니’듯이, 누가 한두 번 자선단체에 기부했다고 그가 덕 있는 사람이 되지는 못한다.
붓다의 중도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중도에 공통된 지혜가 담겨있다고 많이 논의되어 왔다. 우리는 왕자시절의 안락했던 생활이 싯다르타 태자에게 깨달음을 가져다주지 못했다고 들어왔다. 출가 후 6년 고행苦行도 그를 깨닫게 하지 못했다. 오직 이 두 극단을 피한 중도의 수행으로 그는 성도할 수 있었다. 악기의 줄이 너무 팽팽하면 끊어지기 쉽고, 그 반대로 너무 느슨하면 소리가 제대로 나지 않는다. 줄이 적당한 정도의 장력을 유지해야 제대로 된 악기 구실을 할 수 있다. 깨달음을 향한 수행도 지나치거나 모자라지 않게 적절히, 중도를 택해야 한다는 것이 붓다의 가르침이다.
그런데 붓다의 중도론은 서양 중도론의 영역을 초월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통찰이 삶과 관련된 지혜에 국한되어 있는데 비해, 붓다는 만물이 존재하는 실제의 모습(實相) 또한 중도에 있다고 가르친다. 붓다는 사물에 영원히 불변불멸하는 아뜨만(또는 自性)이 있다고 보는 상주론常住論을 배격하지만 동시에 사물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단멸론斷滅論 또한 거부한다. 그래서 아무 것도 상주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단멸되어 있지도 않아서 그 양극단을 피해 묘妙하게 존재한다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다. 붓다의 중도론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중도론보다 더 포괄적인 가르침이다.

홍창성
미네소타주립대학교 철학과 교수




77조현, 孫永坤 and 75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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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onki Lee 감사합니다. 공유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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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규 중도가 세상을 살리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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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기현 철학적질의에앞서,교수님본인이지혜라는덕을갖추고계시다고생각십니까? 또한제가생각키로부처의중도는환상과같은현실에서나라하고하는몸뚱아리를지탱하기위한것이지즉환상속에서진제를끌고가기위한것이라고생각합니다 자세한비교는철학자의몫일것같고요토론은환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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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g-Seong Hong 스스로 훌륭한 연주자여야 음악비평가가 될 자격이 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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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기현 홍창성 우문현답입십니다 다만 악기와 곡조 정도는 알고 있어야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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