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1/12

기독교 최대의 적은 공산주의?




기독교 최대의 적은 공산주의?




기독교 최대의 적은 공산주의?
공산주의의 원론은 초대교회 공동체를 모방했다

유성오 (kierkeka@chol.com)
승인 2006.01.11 11:36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에 몰두하며, 서로 사귀는 일과 빵을 떼는 일과 기도에 힘썼다. 모든 사람에게 두려운 마음이 생겼다. 사도들을 통하여 놀라운 일과 표징이 많이 일어났던 것이다.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들은 재산과 소유물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대로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날마다 한 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집집이 돌아가면서 빵을 떼며, 순전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사람에게서 호감을 샀다. 주님께서는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여 주셨다. (행 2:42~45)

한국사회의 레드컴플렉스


동국대학교의 사회학 교수가 '6·25전쟁은 북한의 지도부가 시도한 통일전쟁' 이라고 말하자 대한민국에 난리가 벌어졌습니다. '빨갱이를 몰아내자'는 구호로 상징되는 극도의 분노와 증오가 일간 신문과 인터넷을 통해 들불처럼 번졌습니다.






▲ 사진설명 넣고 ⓒ뉴스앤조이 자료사진

한국의 중고등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북한이 적화통일 야욕을 버리지 않고 있다고 가르쳐 왔습니다. 적화통일을 다른 말로 하면 공산화 통일입니다. 이 공산화는 북한 지도부의 목표입니다. 그렇다면 북한 지도부에 의한 통일은 곧 공산화 통일이요, 이는 곧 적화통일이라는 말이 됩니다.



6·25전쟁은 적화통일을 목표로 한 전쟁이었습니다. 다른 말로 바꾸면, 공산화 통일전쟁이었습니다. 또 다른 말로 바꾸면, 북한 지도부가 시도한 통일전쟁이었습니다. 북한 지도부의 시도는 곧 공산화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적화(혹은 공산화)'를 '북한 지도부가 시도한'으로 바꾸었다는 사실에 그토록 흥분한 이유는 뭘까요.

'기독교의 최대 적은 바로 공산주의'라는 외침을 한국교회에서 종종 듣습니다. 그 이유 중 우선은 무신론 사상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부정하는 무신론 공산주의를 결코 인정할 수 없다는 논리입니다.

무신론이 문제라면 과학은 어떻습니까. 과학이야말로 현대사회 무신론의 뿌리가 아니었던가요. 하나님이 우주와 그 법칙을 창조하시고 더 이상 개입하지 않으신다고 외쳤던 이신론자의 주장으로부터 이미 과학은 무신론의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과학으로부터 비롯된 무신론은 학문영역 전체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더 이상 신뢰하기 힘든 신화가 되었고, 이성과 과학(경험)이 모든 것을 판단하는 절대 기준이 되었습니다.

사실 공산주의(사회주의)가 반드시 무신론일 이유는 없었습니다. 문제는 근대라는 사회가 과학이라는 기치 아래 '하나님의 존재와 개입'을 외면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이에 발맞추어 생물학은 창조 대신 진화를 선택하였고, 사회주의는 하나님의 개입 대신에 (경제관계가 우선시 되는) 역사의 법칙을 선택하였습니다. 현대신학의 화두였던 '비신화화'는 바로 과학의 공격에 대응해보려는 기독교 나름의 발버둥이었습니다. 대세는 이미 과학에 기울어 있었고, 과학이 부정하는 기적(하나님의 개입)에 대한 성경의 언급을 어떻게든 변명해보려는 노력이 '비신화화'라는 신학적 방법을 낳았던 것입니다.

공산주의자들의 종교탄압은 정치적 행위일 뿐

한국 기독교인들이 내세우는 또 하나의 이유는 공산주의자들이 저지른 종교에 대한 탄압입니다. 기독교인들을 수용소를 보내고 심지어는 처형해버린다는 것입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종교탄압이 공산주의의 전유물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자본주의도 필요하면 종교를 탄압합니다. 영화로도 만들어졌던 로메로 주교의 살해 사건 이면에는 자본주의 체제가 있었습니다. 자본가 집단의 이익에 반하는 입장에 동조하고 나섰기에 로메로 주교와 사제들은 살해되었습니다.

일본 제국주의도 기독교를 탄압했습니다. 독립운동에 가담한 교회에 불을 질러 기독교인들을 죽이거나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박정희 정권도 기독교를 탄압했습니다. 물론 박정희 정권을 비판하는 기독교인들에 한해서 말입니다. 항상 그들의 탄압에는 빨갱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다녔습니다.

이런 정황들을 종합해볼 때, 종교탄압은 대개의 경우 종교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그 종교인들이 정권에 순종적이냐 비판적이냐에 따라 이루어진 정치적 행위였다고 봐야 합니다. 그래서 일본 제국주의에 순응했던 기독교인들과 박정희 체제에 순응했던 기독교인들은 행복한(?)시절을 보냈지만, 일본 제국주의에 항거하거나 박정희 독재체제에 이의를 제기했던 기독교인들은 불행(?)을 면치 못했던 것입니다. 이런 현상은 자본주의 사회나 공산주의 사회나 마찬가지였습니다.




▲ 2004년 한기총 주체 시청앞집회에서 김정일의 얼굴과 인공기를 불태우고 있다. ⓒ뉴스앤조이 이승규

자본주의의 모토는 '능력에 따른 분배'입니다. 사회주의의 모토는 '필요에 따른 분배'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자기 재산을 내놓고 이를 필요에 따라 나누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런 식의 발상은 자본주의의 입장에서 보면, 지극히 불온하고도 위험한 행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찌 남의 사유재산을 함부로 공동체가 빼앗아 나눌 수 있다는 말인가요. 각자의 필요에 따라 나누어주었다는 사실은 '필요에 따른 분배'에 해당합니다. 이는 자본주의보다는 사회주의적 발상에 더 가깝습니다.

이상적 공동체였던 초대교회 돌아보기

물론 초대교회의 나눔은 지극히 자발적인 행동으로서, 오순절 성령 체험에 기원하고 있었으니, 강제로 균등분배하려는 공산주의의 방식과는 다르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자발성 여부를 떠나 어쨌든 그 정책이 지향하는 바는, 초대교회가 추구한 이상적 공동체의 모습에 맞추어져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톨스토이가 자신의 토지를 농노들에게 나누어주었을 때, 그의 가족들이 보인 반응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그리스도의 정신을 참 잘 실천했다는 칭찬이었을까요. 아니면 빨갱이 사상에 물들어 제 정신이 아니라는 비난이었을까요.

기독교인에게 있어 재물은 사유의 대상이 아닙니다. 소유의 대상일 뿐입니다. 사유와 소유를 구분하는 핵심적 요인은 배타성 여부에 있습니다. '사유'라는 것은 오직 '나만의 권리'라는 배타성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사용 권리가 없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소유'라 함은 단지 재물이 내게 있다는 장소적 의미입니다. 이것이 언제 다른 사람에게 옮겨갈지 모르는 일입니다. 아니 있기는 내게 있지만, 그것을 누릴 권리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즉 재물 사용에 대한 배타적 권리가 인정되지 않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이 것이라면 그리고 우리가 다 하나님의 자녀라면, 나의 모든 재물이 다 우리의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비록 내 곳간에 있다 할지라도 언제든지 배고픈 이웃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제공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청지기 사명이 아니겠습니까. 이를 거부하는 사람은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귀 통과하기보다 어렵다는 예수의 말씀을 깊이깊이 심중에 새겨가며 곱씹고 생각해볼 일입니다.


성경은 예루살렘에서 제자들이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사람들로 하여금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호감을 갖게 하였을까요. 종종 언론 보도를 통해 자기 재산을 털어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사람들의 얘기를 접할 때면 자신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세상은 살만한 것이구나' 하는 감동을 느끼곤 합니다. 2000년 전 예루살렘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던 것이 아닐까요. 자신의 재산과 소유물을 팔아 서로 나누어주고 살아가는 제자 공동체의 모습(하나님의 나라)이 그 당시 사람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주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

이러한 행동은 이스라엘 백성이 이미 예전부터 들어왔던 하나님의 명령이기도 했습니다. 우리 민족도 예전부터 남을 돕는 것이야말로 행복하고 아름다운 삶이라고 귀가 아프도록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인간의 욕심은 올바른 길을 가기보다는 눈앞의 사욕에 따라 움직이기 십상입니다. 그래서 서로 조금이라도 더 갖겠다고 아옹다옹 싸우며 살아갑니다. 이러한 자신들의 모습에 한탄하면서도 자기 스스로 먼저 그 행태를 벗어버릴 엄두는 못 내고 그저 서로 다른 사람들 탓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2000년 전 예루살렘 사람들도 그러했으리라 여겨집니다.

'매 삼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분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우거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로 와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신명기에 나타난 십일조는 하나님이 주신 재물을 소외당한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행사였습니다. 이 명령을 제대로 온전히 따르고 지키지 못하는 자신들을 보며 '세상은 말세야'라고 한탄했을 예루살렘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그러던 차에 이상한 집단(?)이 나타난 것입니다. 자신의 재산을 팔아 서로의 필요에 따라 나누는 삶을 솔선하는 사람들의 집단 말입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긴가민가하면서도 그들의 진실한 삶의 모습을 보며 감동 받았을 것입니다.

공산주의 어원은 '나눔'과 ‘사귐'

공산주의(communism)의 어원은 'commune' 입니다. 이는 '다른 사람과의 나눔 혹은 사귐'을 뜻하는 라틴어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의 공동체는 나눔과 사귐의 공동체였습니다. 또한 모든 재물에 대한 권리를 하나님께 두는 성경의 정신은 재물의 공유라는 사회주의 이념에 그대로 녹아 있습니다. 그리고 인류 역사상 가장 완벽한 공산주의 사회는 수도원이었습니다. 거기서는 심지어 자신의 몸까지도 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정황을 비추어볼 때, 사회주의의 이념적 뿌리는 사실 초대교회 공동체의 모델에서 기원하고 있다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러니 공산주의라고 무턱대고 흥분하며 저주할 일만은 아닌 듯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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