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1/22
박성용 - >활동속에서 에너지 얻기<
(9) 박성용 - >활동속에서 에너지 얻기< 우리에게 필요한 영성은 우리의 내적 자아 및 실상과 공명하는 방식으로,...
박성용 updated his status.
22 January 2017 ·
>활동속에서 에너지 얻기<
우리에게 필요한 영성은
우리의 내적 자아 및 실상과 공명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출생 시에 주신 생명력을 구현하는 방식으로,
위대한 정의와 평화와 사랑을 도모하는 방식으로
우리가 행동하도록 안내하는 그런 영성이다.
- 파커 파머, <일과 영성>중에서 -
내가 시민사회에서 평화활동가로 이제는 어쩔 수 없이 자기 소명(일,직업)으로 받아들이고자 할 때 가장 내적으로 방해가 된 것은 삶의 의미에서 파커 파머와 똑같이 경험한 활동가와 관상가의 양극에서 오는 분열로 오는 고통이었다.
내가 30대말, 40대 시절에 내 삶에 중요하고 삶의 귀감으로 바라보았던 인물들이 토마스 머튼, 틱낫한, 기독교 신비주의자들(예,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소화 데레사)이나 노자 등이었고, 사실상 내 영혼의 성향이 그들로부터 힘을 얻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시민사회에서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때가 2002년부터였으니까 50대초에 들어오면서 비폭력과 평화훈련영역에 대한 익숙함이 몸에 배이기 시작할 2000년대 중반이후부터는 그 갈등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즉 내가 잊거나 놓치고 있는 삶의 본질적인 측면으로서 관상에로의 이끌림이 활동에 대해 비판적이면서 내가 중요한 것을 놓치면서 살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실존적인 회의감과 불안의 내면의 목소리를 듣게 된 것이다.
이러한 목소리는 삶의 모호함과 거칠음, 구조적 폭력과 영혼의 폭력에 대한 밑이 보이지 않는 복잡성과 거대함, 그리고 자신이 선택하지 않고도 다가오는 불안과 두려움이라는 일상의 파도를 그대로 몸으로 맞는 경우에는, 하는 일이 낯설어지고 도망치고 싶어지며 회의감이 증폭되어 내 내면에서 속삭이면서 ‘이 영역에서 철수하라’는 강한 목소리를 내부로부터 직면하곤 하였다. 거기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라는 게 내가 하는 활동의 영역과 내 내면의 영역 중간에 담을 쌓고는 바깥의 영역이 얼마나 거칠든 간에 내면의 영역에 정원을 가꾸는 분리의 원칙을 통해 최소한 흔들리지 않는 내면의 성소를 가꾸는 데 노력을 다한 것이었다.
시민사회활동가들 중 적잖이 많은 사람들이 종교인들이고 실상 이들도 나와 비슷하게 자신의 일터는 에너지를 소비하는 곳으로 인식되고, 방전이 되는 지침과 피로감이 올라오면 거기서 물러서서 다른 공간으로 건너가서, 예를 들면, 여행, 자연에서의 치유, 명상 프로그램 등을 통하여 에너지를 얻어 자신의 일터로 다시 돌아오는 반복을 하곤 한다. 즉 일상에서는 일하는 장소와 나의 사적인 휴식장소가, 더 나아가 활동에 있어서는 직장/일터 그리고 교회나 절/명상의 집이 서로 대척점에 서 있어서 후자가 전자의 치유와 지원을 하고 궁극적인 장소 그리고 전자는 수단적 공간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그렇지만 오래전부터 내게 한 가지 지속적으로 올라오는 내면의 의문이 있었다. ‘초목이 햇빛으로 꽃과 열매를 맺지만, 또한 어둠으로 성장을 하는 것이라면, 삶의 어둠과 고통 또한 거룩함으로 가는 통로로 어떻게 바라볼 수 있는가?’ 시민사회 영역에 깊이 뿌리박고 고통어린 현장에 대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직면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50대 중반부터 나의 관심의 영역은 어떻게 ‘일터가 성소가 될 수 있는가?’의 문제에 매달리게 되었다.
이 질문은 미묘하지만 확연히 다른 더 철저한 질문으로 나가게 되었다. 흔히 말하는 기독교의 ‘십자가를 통한 부활’이라는 관습적인 이해에서 보는 것처럼 부활에 이르는 수단으로서 십자가의 필요성이라는 수단적/기능적 역할이 아니라, 십자가 그 자체는 더 힘과 역할을 못한다는 목적적 경험, 곧 ‘십자가 안의 부활’이라는 고통과 지침 그 안에 ‘이미 있는 그 뭔가의 생명있는 것’에 대한 돌파의 경험에 대한 추구를 하게 된 것이다.
내가 매우 오랜 기간동안 관상가에 대한 그리움이 있었지만, 결국은 최근에 나의 정체성과 관련하여 뜻밖에 알게 된 것은 나는 연구자, 훈련가이기도 했지만 또한 조직가이자 활동가라는 내 능력에 대한 발견이었다. 그리고 고통의 현장에서 싸우거나 그 현장을 지켜내는 무명의 활동가들에 대해 내 눈길이 가고 마음이 움직이기 때문에 내가 그들과 함께 나눈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저항과 대안에로의 활동이 지침과 소진이 아니라 거룩함에로 이르는 다른 ‘좁은 문’임을 어떻게 자각하고 일어서서 나가도록 도울 수 있는가에 대한 거부할 수 없는 부름을 지속적으로 듣는다.
나는 수많은 모임과 회의 속에서 대화, 문제해결, 갈등전환, 공동체형성, 미래기획 등과 관련된 활동들 한 가운데서 다양한 서클진행을 통해 무엇이 결핍하고 필요한지 보다는 이미 자신과 우리 안에 ‘충분함’이 존재하고, 접근할 수 있는 자원(resources)이 무엇인지 분별하고, 도전적인 이슈나 문제가 ‘거부하거나 저항할’ 문제(a problem)이 아니라 그동안 보지 못하고 놓친 의미 영역의 출현으로서의 새로운 탐구의 기회(an opportunity)로 보는 시야를 얻게 되었다.
만일 우리가 서클의 일반 작동원리나 조직학습 이론가인 오토 샤머의 ‘U이론’처럼 다가오는 도전, 위기, 과제,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 있을 때, 환대와 연결로 맞이하고, 대화와 참여로 함께 작업하며, 공동지성과 원하는 미래에 대한 초점어린 주목과 마음의 일치를 통한 선택을 하게 되면, 서클이 말하듯이 ‘거칠고 힘든 것으로 시작하여 아름답고 선한 것으로 나온다’는 이치가 작동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요한기자가 말했듯이 ‘생명을 주되 더욱 풍성하게’(요10:10)하는 활동적인 영성의 방식을 이해하게 된 것이다. 주는 데 있어 파괴나 죽임이 아니라 회복이나 생명을 주는 데 주목하고(being attentive) 또한 결과가 풍성함으로 나타는 기여(giving)의 방식으로 서비스를 하면 활동이 영성 그 자체가 되고, 일터가 그대로 성소가 된다는 깨달음이 일어난 것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스트레스의 핵심은 바로 불안과 두려움에서 기인한다. 그것들은 바로 ‘자극-반응’의 사이클에서 <자극>을 무엇으로 인식하고 <반응>을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 일과 내면의 심리적 상태가 달라져 경험된다. 즉, 자극을 두려움의 한 변형으로 보면 그것은 일이 ‘부담’과 ‘짐’으로 보이며, 반응이 옳고 그름의 무자각적인 자동 반응에서 나오면 그것은 적절한 선택이 아닌 대응(reaction)의 상태로 격발되기 때문에 그 결과는 풍성함이 아닌 분리, 고통, 좌절의 상태로 추락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 안에 설정된 ‘자극-반응’의 무의식적인 사이클을 ‘자극’과 ‘반응’사이에 틈을 만들어, 멈춤을 통해 여기에 다른 형태의 ‘알아차림-선택’의 의식적 사이클을 리셋(reset)하는 것이 그 핵심이 되는 것이다(사실 이 문제는 이미 로고테라피의 빅터 플랭클이 제시한 화두이기도 하다).
‘알아차림-선택’의 사이클을 리셋한다는 것은 바로 서클의 작동원리가 보여주듯이 다가오는 것에 대한 저항보다는 환대와 연결로 맞이하고(inputing), 생명을 주는 방식으로 상호작용하면서(programming), 결과가 풍성함과 전체성이 보여지는 방식으로 나아가기(outputing)를 의식적으로 자기 내면과 타자/그룹과의 관계 속에서 작동시킬 때 가능해진다. 나는 지난 몇 년 동안 1:1 개인상담, 학교폭력 등의 갈등사례를 다루기, 단체 내에서의 긴장어린 문제의 해결 등과 관련된 일련의 활동작업을 통해 그리고 내 자신이 급격히 스트레스가 없어진 원인에 대한 이해를 통해 이러한 원리가 실제적이고 효과가 있다는 확신을 하게 되었다.
파커 파머가 말했듯이 활동적인 삶은 축복이자 저주의 양 측면을 가지고 있다. 축복은 일을 통해 창조와 보살핌을 통해 생명과 풍성함의 기회를 맛보는 즐거움과 생생함의 누림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반대로 나의 내면의 지옥, 폭력, 무미건조함, 지침을 타자에게 동료에게 그리고 심지어는 사랑하는 이에게 전염시킨다는 것이다. 특히 과거 세대가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스마트폰의 초연결의 시대에 살면서 그 축복과 저주의 전염력은 실 시각으로 빠르게 전파된다. 나의 활동이 죽음과 정지 그리고 낮은 에너지라는 엔트로피의 법칙을 작동시키지 않고 열린 시스템으로써 계속적인 생생함의 활력과 신성한 에너지를 발현시키려면 무엇이 가능해져야 하는가? 나는 파머의 짧은 다음 글에서 통찰을 얻는다.
우리에게 필요한 영성은
우리의 내적 자아 및 실상과 공명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출생 시에 주신 생명력을 구현하는 방식으로,
위대한 정의와 평화와 사랑을 도모하는 방식으로
우리가 행동하도록 안내하는 그런 영성이다.
첫째 선택, 내적 자아와 실상과 공명하는 방식을 택하기
이것은 매우 중요한 접근 방식이다. 외부의 끊임없는 폭력, 갈등, 혼란의 침입의 파도 속에서 내가 나의 안전(security)를 확보하는 성채(castle)로서의 안전함은 불가능하다. 내 안전의 영역을 확보하고 이를 확대하는 성채개념이 아니라 폭력, 갈등, 혼란의 파도를 타고 앞으로 나아가는 윈드서핑(windsurfing)의 방식으로 우리는 안전이 아니라 생생함을 즐길 수 있다. 그리고 그 생생함에서 안전을 얻는다. 이 윈드서핑은 나의 정체성이라는 서핑보드에 대한 인식과 다가오는 사물, 사건의 실재에 연결하는 방식을 통해 갈등과 혼란의 침입의 파도를 타면서 그것으로부터 에너지를 얻는 방식으로 ‘일(work)’을 해 나간다. 즉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파도의 거칠음과 위협이 아니라 그 파도에 직면하고 환대함속에서 주의를 자기내면의 영혼의 진정한 목소리와 상황의 요청에 연결하는 –공명시키는- 방식으로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뫼비우스고리 메타포가 말하는 ‘내면의 빛’이 세상에 비추고, ‘세상의 빛’이 내면에 비추는 상호 비추는(co-reflecting) 방식이다. 자극은 입자(particle)이 아니라, 전체 에너지의 일부 패턴화된 모습이다. 따라서 그 자극을 에너지의 특정화된 패턴으로 이해된다면 다시 그것을 에너지로 풀어 파장(wave)으로 흐르게 한다. 다가오는 것을 거부할 수는 없지만, 그 파도라는 실상과 공명하여 앞으로 나아가는 생생함을 얻을 수 있다.
둘째 선택, 본래 생명력을 구현시키는 방식이다.
나의 활동하기는 나의 본성으로서 존재(esse)와 관계속에서 역할(roles 혹은 masks)이 서로 엮어 짬으로 구성된다. 나의 역할은 삶의 무대라는 곳에서의 연기자이며 연기자는 경험자(esse)와 구별된다. 연기자(role-takers; scrip-players)는 다양한 역할을 펼쳐낸다. 시민사회 활동가, 아빠, 남편, 단체의 대표, 목사, 평화교육자, 다양한 서클모델 진행자, 기획자, 조직가, 한국사람...등등의 연기자로서 역할을 한다. 그리고 그 역할은 구체성 곧 특정한 상황과 시간 및 특정한 관계의 매듭속에서 일어나는 적절한 행위의 표현이다. 그러나 그러한 특정한 행위가 그의 고정된 정체성으로 이해될 때 생명을 소진하며 시비/호불호의 기준에 의해 성취와 상실, 얻음과 잃음, 희망과 낙담이 교차되며 에너지를 소진하게 된다.
문제는 뇌과학과 심신면역의학에서 보듯이 ‘정당한’ 감정이나 실재가 아닌 상상력에 의한 것도 아드레날인과 코티솔이라는 스트레스호르몬을 분출한다는 점이다. 호르몬은 실재와 ‘허상’을 분간하지 않고 똑같이 작동한다는 점에서 정당성은 이해가 가지만 몸과 정서의 손상과 탈진은 막아내지를 못한다. 무대의 연기자를 그대로 인식하면서 자신이 자신의 역할을 무대에 내려와 관객으로 자기 연기를 보고 있는 ‘경험자’로 있을 때, 연기자의 얻음과 손실, 기쁨과 슬픔, 필요와 얽힌 관계라는 구체적인 연기들에 목도하는 본래의 자아는 그러한 성취나 손상없이 본래 생명력대로 있는다. 이것은 관찰을 하면서 연기자와 다른 경험자로서 전체적으로 무엇이 일어나는지를 이해하면서 말과 행동으로 변하지 않는 본래의 본성이 융통성있게 현존해 있는다. 여기서 계속적으로 샘처럼 발현하는 창조성과 변화가능성이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세 번째 선택은 위대한 정의와 평화와 사랑을 도모하는 방식이다.
우리의 활동성이 생명을 주되 더욱 풍성케 하는 방식으로 주고받는 행위가 되려면 먼저는 자기안의 자원으로써 내적인 자기 정체성과 성실성에 대한 감각으로부터 분출해 나오는 것을 느끼는 것이 필요하다. 그 다음이 바로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미래에 대한 강렬한 열망/비전이다. 이것이 세상의 거칠은 파도에 주목하여 ‘두려움’을 생성하지 않고 그 거친 파도위를 걷는 방식이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한 길을 연다. 거칠은 파도에 있을 때 자신이 간절히 염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상상하기’를 절실히 하는 방식이다.
신뢰의 서클 진행자모임에서 들은 한 ‘이야기’가 있다. 원주민이 바다에서 작은 돛단배를 타고 항해를 할 때, 만일 폭풍우를 만나 주변이 캄캄하여 길이 안보일 때, ‘길잡이(wayfinder)’역할을 하는 자가 그 폭풍우속에서 선수에 앉아 침묵하며 온정신을 쏟아 도착할 목적지를 상상하며 그린다. 눈에 실제로 보는 것처럼 간절히 도착할 곳을 구체적으로 그리며 앉아있으면 홀연 듯 길이 어디인지를 확연히 심증에 잡히게 된다. 그건 말로 설명하거나 증거가 있는 것이 아니지만, 명백히 알게 되는 그 무엇과 같다. 그럴 때, 그 길잡이는 동료들에게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를 알려주고 그들은 목적지에 신비스럽게도 도착하게 된다. 내가 여기서 깊은 영감을 받는 것은 바로 풍랑의 거셈과 그 강도에 대한 이해가 아니라 목적지에 대한 간절한 염원이 길을 낸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가야 할 목적지보다는 무엇이 안 되고 무엇이 장애인지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한다. 즉, 주로 우리는 안 되고 못하고 힘든 것에 대해 많이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충족예언의 법칙이 작동된다. 비폭력 평화에 대한 활동은 이미 수많은 폭력의 현상과 국가의 제도적 지원, 사회문화적인 경향성으로 인해 그 변화의 가능성은 ‘안 되고 못하고 힘든 것’ 투성이요, 국가폭력의 경우는 대부분 이겨본 적이 없는 이미 진 싸움의 연속이었다. 사람, 재정, 그리고 시스템과 문화가 뒷받침은커녕, 억압과 지배의 힘으로 다가온다. 그럴 때, 두렵게 느껴야할 유일한 장애는 무엇이 안 되고 할 수 없는 이유인가가 아니라 가고 싶어하는 목적지인 ‘위대한 정의와 평화와 사랑’의 신대륙에 대한 꿈꾸지 못함인 것이다.
활동적인 삶은 그 자체로는 사람을 만나고, 회의하고, 작업하고, 땀흘리고, 감정을 표현하고, 기획하고, 사고 팔며, 모이고 헤어지는 일상적이고 세속적인 것처럼 별로 거룩함을 느낄 수 없는 현실로 보인다. 그러나 공감하고, 연결하며, 함께 마음의 일치를 통해 창조하고, 앞으로 나가는 그 속에서 내적 자아의 기쁨과 세상의 실상과 굶주림이 서로 공명하거나, 수많은 역할의 연기속에서 경험자 자신의 본원적 생명력에 관찰로 주목하거나 또는 정의와 평화와 사랑을 도모하는 돌봄의 방식을 길잡이 삼아 나아갈 때는 활동 그 자체는 ‘익명의’ 거룩한 길이 된다. 그 속에서 ‘깊이’와 타자에로의 ‘초월’이 일어나거나, 전체성(wholeness)에 대한 민감한 감각이 솟구치게 되는 것이다. 그럴 때 엔트로피의 법칙이 아니라 내면에서 창조적 에너지의 파동이 느껴지게 된다.
(2017.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