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키시마호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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浮島丸事件
해상사고 요약도 | ||
일어난 날짜 | ||
유형 | 운항 중 침몰 | |
일어난 위치 | ||
탑승인원 | 공식 | 3,735명[1] |
비공식 | 8,000여 명 | |
사망자 | 공식 | |
비공식 | 5,000여 명 | |
실종자 | 미상 | |
구조자 | 비공식 | 3,000여 명 |
선종 |
1. 소개[편집]
1945년 8월 24일, 일본 교토 인근 마이즈루 항에서 일본 해군에 징발된 화물선 우키시마마루(浮島丸, Ukishima Maru, 4,730톤)가 갑작스런 폭발과 함께 침몰한 사건. 당시 일본의 관련 법령에 따라 상선 등 민간 선박은 배 이름을 지을 때 "丸(마루)" 자를 접미사로 쓰도록 강제하고 있어 모든 일본 민간 선박들은 ~마루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기에, 한국에선 이걸 그냥 민간 선박 뒤에 오는 호칭인 ~호로 임의로 바꿔 부르는 경우가 많다. 덕분에 우키시마마루 사건으로는 국내에선 거의 불리지 않고, 우키시마호 사건, 우키시마호 폭발사건, 부도호 사건 등으로 불린다.
2. 전개[편집]
2.1. 우키시마마루의 출항[편집]
우키시마마루의 실제 사진 | 모형 (일러스트) |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을 선언한 뒤 일본 정부는 강제징용된 조선인 노동자들이 전범재판 과정에서 폭동을 일으킬 것을 우려했다. 이에 이들은 "폭동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조선인 노동자들을 송환하라"는 극비 지시를 내리게 된다. 심지어 '이번 송환선에 오르지 못하면 영영 돌아가지 못한다'라는 전단까지 뿌렸을 뿐 아니라 "배에 승선하지 않으면 배급도 없다!"라고 협박까지 하면서 조선인들을 거의 강제로 승선시키다시피 했다고 한다.
해군에 징발되어 해군 승조원들이 몰고 있던 우키시마마루에게 내려진 본래 명령은 조선에 거주하고 있던 일본인들을 데려오는 것이었지만, 명령이 바뀌어 우키시마마루에도 일본 북부지방에 있던 조선인 노동자들을 부산으로 실어 보내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승조원들 중 일부 해군 하사관들은 이 명령에 항의했지만, 상부의 강력한 지시로 어쩔 수 없이 우키시마마루에 조선인 노동자들과 일부 가족들이 탑승하게 되었다.
약 7000여 명[3]의 조선인들이 8월 21일, 아오모리 현의 오미나토 항을 출발했다.
당시 일본 근해는 미 해군이 부설한 기뢰 천지였고, 미 해군과 소련 해군의 잠수함도 돌아다니는 상황이었다. 우키시마마루가 출발한 다음날에 국적불명의 잠수함[4]에 의해 3척의 함선이 침몰한 사건[5]이 일어나기도 했기 때문에 우키시마마루는 기뢰와 잠수함을 피해 부산으로 향했다.
2.2. 항로 변경과 침몰[편집]
침몰하는 우키시마마루 | 인양된 우키시마마루의 모습[6] |
3. 엇갈리는 침몰 원인[편집]
3.1. 일본의 시각[편집]
일본이 주장하는 사건의 원인은 미군이 부설한 기뢰에 우키시마마루가 접촉하면서 폭발이 일어났다는 것. 당시 마이즈루만에는 미군이 부설한 기뢰들이 깔려 있었는데, 자기기뢰에 대해서는 우키시마마루 자체의 장비로 탐색이 가능했지만, 음향기뢰는 소해정이 음향 발신기로 음향 기뢰의 위치를 파악하는 게 필요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키시마마루는 마이즈루항으로 들어가라는 상부의 지시를 받기는 했으나 갑작스런 명령 전달 과정에서 혼동이 있어 길을 안내해야 하는 소해정들이 제때 마중을 나오지 않았는데, 우키시마마루는 소해정들이 나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마이즈루만으로 그냥 들어갔다가 기뢰가 있는 수역으로 진입하여 음향 기뢰가 엔진음에 반응하여 폭발하게 되었다는 주장이다. 이 기뢰에 대해 일본에서는 "음향기뢰가 아닌 수압식 기뢰일 가능성도 크다"고 말한다.
또한 일본 측에서는 "마이즈루에 입항한 것은 배의 연료가 떨어졌기 때문이며,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승조원과 탑승자들 대부분을 함선의 데크(갑판)로 유도했기 때문에 오히려 피해가 적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일본이 기뢰 폭발에 의한 사고라고 주장하는 직접적 근거로는 침몰한 우키시마마루의 상태가 상부 구조물이 파괴된 것이 아닌 배 밑바닥 등의 하부 구조물에만 폭발한 흔적이 있다는 것, 선체 부품이 흩어져 날아가거나 선체에 큰 폭발로 생긴 구멍이 없다는 점, 폭발 이후 해저의 흙이 부상해 해면이 탁해진 점, 사망자들의 사체가 화상을 입었거나 신체가 산산히 흩어지지 않은 점 등을 들고 있다.
또한 일본은 "미군이 이 사건을 수중에 부설한 기뢰에 의한 전과로 기록하고 있는 점도 증거"라고 주장한다.
일본 위키피디아에는 해당 사건에 대해서 GHQ 측에서 8월 25일 0시 이후로 100톤 이상의 배의 출항을 금지시켜[7] 해당되는 항해 중인 선박을 가장 가까운 항구로 입항할 것을 명령하였고, 8월 24일 오후 6시까지 목적지에 도착할 수 없을 것 같은 배는 전부 가까운 항구로 회항하라는 명령을 듣고 위치, 승선자의 수, 기뢰의 소해에 의한 안전성, 잠수함의 활동 등을 고려하여 마이즈루 항으로 입항하기로 결정했다고 서술되어 있다.
그런데 우키시마마루는 마이즈루항으로 들어가라는 상부의 지시를 받기는 했으나 갑작스런 명령 전달 과정에서 혼동이 있어 길을 안내해야 하는 소해정들이 제때 마중을 나오지 않았는데, 우키시마마루는 소해정들이 나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마이즈루만으로 그냥 들어갔다가 기뢰가 있는 수역으로 진입하여 음향 기뢰가 엔진음에 반응하여 폭발하게 되었다는 주장이다. 이 기뢰에 대해 일본에서는 "음향기뢰가 아닌 수압식 기뢰일 가능성도 크다"고 말한다.
또한 일본 측에서는 "마이즈루에 입항한 것은 배의 연료가 떨어졌기 때문이며,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승조원과 탑승자들 대부분을 함선의 데크(갑판)로 유도했기 때문에 오히려 피해가 적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일본이 기뢰 폭발에 의한 사고라고 주장하는 직접적 근거로는 침몰한 우키시마마루의 상태가 상부 구조물이 파괴된 것이 아닌 배 밑바닥 등의 하부 구조물에만 폭발한 흔적이 있다는 것, 선체 부품이 흩어져 날아가거나 선체에 큰 폭발로 생긴 구멍이 없다는 점, 폭발 이후 해저의 흙이 부상해 해면이 탁해진 점, 사망자들의 사체가 화상을 입었거나 신체가 산산히 흩어지지 않은 점 등을 들고 있다.
또한 일본은 "미군이 이 사건을 수중에 부설한 기뢰에 의한 전과로 기록하고 있는 점도 증거"라고 주장한다.
일본 위키피디아에는 해당 사건에 대해서 GHQ 측에서 8월 25일 0시 이후로 100톤 이상의 배의 출항을 금지시켜[7] 해당되는 항해 중인 선박을 가장 가까운 항구로 입항할 것을 명령하였고, 8월 24일 오후 6시까지 목적지에 도착할 수 없을 것 같은 배는 전부 가까운 항구로 회항하라는 명령을 듣고 위치, 승선자의 수, 기뢰의 소해에 의한 안전성, 잠수함의 활동 등을 고려하여 마이즈루 항으로 입항하기로 결정했다고 서술되어 있다.
3.2. 한국의 시각[편집]
한국에서는 "우키시마마루가 폭발한 것은 일본 해군의 계획적인 범죄"라고 주장한다. 우키시마마루의 승조원들은 배가 부산에 도착할 경우에 분노한 조선인들에게 보복을 당할 것을 두려워해서 우키시마마루에 조선인을 탑승시키라는 명령에 강하게 항의하고 항명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본 해군이 우키시마마루에 폭탄을 설치한 뒤 이를 폭파시켰다는 이른바 자폭설이 한국의 시각이다.
당시 탑승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일본 해군이 "우키시마마루를 타지 않으면 배급을 받을 수 없다", "이 배가 조선으로 가는 마지막 기회"라는 식으로 말했다고 한다. 일부 조선인들 중에는 가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이런 사람들까지 강제로 태웠다는 것. 다만 이는 학살의 확실한 근거라고 보기는 조금 미흡하다. 조선인들을 얼른 내보낼 마음에 한 이야기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우키시마마루가 조선인들을 태우고 부산항으로 향했지만, 갑자기 24일 영문을 알 수 없게도 마이즈루항 쪽으로 배의 방향을 돌렸다.
또한 침몰시의 정황에 대해서도 양측의 견해가 다르다. 일본측은 승조원들이 탑승자들을 갑판으로 유도했다고 하는데, 사건 바로 다음해인 1946년에 남긴 생존자 채길영 씨의 증언은 정반대다. "승조원들이 탑승한 조선들을 갑자기 배 밑으로 내려가도록 채근하는 사이에, 승조원들은 우키시마마루의 소함[8]을 타고 배를 빠져나갔으며 그 뒤에 배가 폭발했다"는 것이다. 또다른 생존자 강이순 씨 역시 "당시 배에 있던 승조원들이 사라지는 일들이 있었고, 배가 폭발하기 직전에는 승조원들이 기관실로 몰려갔다"고 증언했다. # 다만 강이순 씨의 위 증언에서는 승조원들이 강제로 조선인들을 선창에 밀어넣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없고, "나는 선상 제일 꼭대기에 타고 있었다"고 분명히 하고 있다. 또한 증언상 승조원들이 배가 폭발할 걸 미리 알았다면, 승조원들이 침몰시 생존 가능성이 제일 낮은 기관부에 몰려갈 이유가 없다는 반박이 가능하다.
우키시마마루가 기뢰에 의한 폭발이 아닌 내부에 설치된 폭발물에 의한 폭발이라는 근거는 생존자들의 증언에서 나오고 있다. 생존자들은 하나같이 "폭발음이 3~4회 들렸다"고 증언하고 있다. 만약 기뢰에 의한 폭발이라면 폭발음이 서너 차례 들린다는 것은 이상하다는 것. 게다가 기뢰에 의한 폭발일 때 나타나는 수십 m의 물기둥도 나타나야 하는데, 그런 것 또한 없었다는 것이다. 설사 기뢰였다고 해도, 기뢰가 존재하는 걸 알고 있는 일본이 출항을 시도했다는 것부터가 의심스럽다.
또한 1954년, 일본 기업이 선체를 인양했을 당시 배의 선체가 모두 바깥쪽을 향해 구부러져 있었다는 것도 자폭설의 근거로 제기된다. 만약 수뢰에 접촉해서 폭발한 것이라면 안쪽으로 구부러져야 마땅하겠지만, 우키시마마루의 선체는 모두 바깥쪽을 향해 구부러져 있었다는 것. 이는 선체 내부에서 폭발이 일어났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당시 탑승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일본 해군이 "우키시마마루를 타지 않으면 배급을 받을 수 없다", "이 배가 조선으로 가는 마지막 기회"라는 식으로 말했다고 한다. 일부 조선인들 중에는 가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이런 사람들까지 강제로 태웠다는 것. 다만 이는 학살의 확실한 근거라고 보기는 조금 미흡하다. 조선인들을 얼른 내보낼 마음에 한 이야기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우키시마마루가 조선인들을 태우고 부산항으로 향했지만, 갑자기 24일 영문을 알 수 없게도 마이즈루항 쪽으로 배의 방향을 돌렸다.
또한 침몰시의 정황에 대해서도 양측의 견해가 다르다. 일본측은 승조원들이 탑승자들을 갑판으로 유도했다고 하는데, 사건 바로 다음해인 1946년에 남긴 생존자 채길영 씨의 증언은 정반대다. "승조원들이 탑승한 조선들을 갑자기 배 밑으로 내려가도록 채근하는 사이에, 승조원들은 우키시마마루의 소함[8]을 타고 배를 빠져나갔으며 그 뒤에 배가 폭발했다"는 것이다. 또다른 생존자 강이순 씨 역시 "당시 배에 있던 승조원들이 사라지는 일들이 있었고, 배가 폭발하기 직전에는 승조원들이 기관실로 몰려갔다"고 증언했다. # 다만 강이순 씨의 위 증언에서는 승조원들이 강제로 조선인들을 선창에 밀어넣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없고, "나는 선상 제일 꼭대기에 타고 있었다"고 분명히 하고 있다. 또한 증언상 승조원들이 배가 폭발할 걸 미리 알았다면, 승조원들이 침몰시 생존 가능성이 제일 낮은 기관부에 몰려갈 이유가 없다는 반박이 가능하다.
우키시마마루가 기뢰에 의한 폭발이 아닌 내부에 설치된 폭발물에 의한 폭발이라는 근거는 생존자들의 증언에서 나오고 있다. 생존자들은 하나같이 "폭발음이 3~4회 들렸다"고 증언하고 있다. 만약 기뢰에 의한 폭발이라면 폭발음이 서너 차례 들린다는 것은 이상하다는 것. 게다가 기뢰에 의한 폭발일 때 나타나는 수십 m의 물기둥도 나타나야 하는데, 그런 것 또한 없었다는 것이다. 설사 기뢰였다고 해도, 기뢰가 존재하는 걸 알고 있는 일본이 출항을 시도했다는 것부터가 의심스럽다.
또한 1954년, 일본 기업이 선체를 인양했을 당시 배의 선체가 모두 바깥쪽을 향해 구부러져 있었다는 것도 자폭설의 근거로 제기된다. 만약 수뢰에 접촉해서 폭발한 것이라면 안쪽으로 구부러져야 마땅하겠지만, 우키시마마루의 선체는 모두 바깥쪽을 향해 구부러져 있었다는 것. 이는 선체 내부에서 폭발이 일어났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4. 각종 의혹들[편집]
4.1. 우키시마마루의 의문스러운 항로[편집]
우키시마마루는 일본 북부의 아오모리 현의 오미나토 항을 출발해 부산으로 향했다. 상식적으로 일본 북부에서 부산으로 가는 가장 빠른 항로는 동해를 횡단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우키시마마루는 일본 열도의 연안을 따라 내려갔다.
이는 일본의 연안에 기뢰가 부설되어 있다는 점을 감안해도 이해할 수 없는 대목. 오히려 기뢰를 피하려고 했다면 상식적인 동해를 횡단하는 항로를 택하는 것이 빠르고 안전했을 텐데도 우키시마마루는 일본열도 연안을 따라 내려갔다. 일본은 "기뢰와 잠수함 활동 등을 피해 그런 항로를 택했다"고 주장하지만, 한국에서는 "애당초 부산으로 갈 의도가 있었나"라고 의심하고 있다.
이는 일본의 연안에 기뢰가 부설되어 있다는 점을 감안해도 이해할 수 없는 대목. 오히려 기뢰를 피하려고 했다면 상식적인 동해를 횡단하는 항로를 택하는 것이 빠르고 안전했을 텐데도 우키시마마루는 일본열도 연안을 따라 내려갔다. 일본은 "기뢰와 잠수함 활동 등을 피해 그런 항로를 택했다"고 주장하지만, 한국에서는 "애당초 부산으로 갈 의도가 있었나"라고 의심하고 있다.
4.2. 우키시마마루는 왜 마이즈루로 방향을 바꿨나?[편집]
우키시마마루의 항해 지도[9] |
우키시마마루가 갑자기 마이즈루항으로 방향을 바꾼 것도 의혹으로 제기된다. 부산을 향하던 우키시마마루는 8월 24일, 마이즈루항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여기에 대해서 일본은 해군운수본부에서 오미나토 경비부와 우키시마마루의 함장에게 "8월 24일 오후 6시까지 부산에 들어가는 것은 무리인 듯 하니 근처 항구에 입항하라"라는 명령을 내렸고, 우키시마마루는 이 명령에 따라 마이즈루로 방향을 돌렸다고 주장한다. 또한 기뢰 및 잠수함의 위협 등 여러 요소를 감안해 일정을 짰다고 한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마이즈루로 방향을 바꾼 이유가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일본군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마이즈루 쪽으로 방향을 돌린 게 아닌가 의구심을 가지고 있다. 실제 어떤 생존자는 "배가 부산항으로 가는 게 아니라 원산항으로 간다고 듣기도 했다"고 한다.
4.3. 정확한 탑승자와 사망자의 숫자는?[편집]
일본은 "우키시마마루에 타고 있던 조선인 송환자는 3,725명, 해군 장병은 255명이었으며 이 가운데 조선인 524명과 승조원 25명이 사망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하지만 승선명부를 일본이 작성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정확히 몇 명이 승선하고 사망한지도는 모른다. 간단히 말해 일본이 공식 발표한 승선자 수와 사망자 수는 많이 다르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생존자들은 "일본이 공식 발표한 숫자보다 더 많은 조선인들이 우키시마마루에 타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라 확실치는 않지만, 대략 7,000명에서 7,500여명의 조선인들이 우키시마마루에 타고 있었다고 한다. 채길영 씨는 무려 12,000여명이 탑승하고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사망자들의 숫자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생존자들과 당시 현지 주민들의 증언을 취합하면 최소한 1,000여명 이상이며 3,000~4,000여명, 심지어는 5,000여명이 사망했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라 확실치는 않지만, 대략 7,000명에서 7,500여명의 조선인들이 우키시마마루에 타고 있었다고 한다. 채길영 씨는 무려 12,000여명이 탑승하고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사망자들의 숫자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생존자들과 당시 현지 주민들의 증언을 취합하면 최소한 1,000여명 이상이며 3,000~4,000여명, 심지어는 5,000여명이 사망했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4.4. 일본 정부의 이해할 수 없는 사건 처리[편집]
일본 정부는 사건이 일어난 뒤, 연합군 사령부에 이 사건을 보고하면서 사망자 숫자가 256명이라고 축소보고했다. 공식 발표에서 언급한 524명보다도 더 줄어든 숫자다. 다시 한 번 적지만 승선명부를 일본이 작성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정확히 몇 명이 승선하고 사망한지는 모른다.
게다가 일본은 1954년, 우키시마마루의 선체를 민간기업에게 인양하게 하면서 재일 조선인들의 사건 진상조사 요구를 묵살했다. 그리고 인양된 선체는 아무런 조사도 없이 민간기업에 고철로 팔아 넘겼다.
후에 우키시마마루 사망자의 유골이라면서 300여 구의 유골을 반환했지만, 조사 결과 여러 사람의 유골이 뒤섞인 것으로 밝혀지기도 했다.
게다가 일본은 1954년, 우키시마마루의 선체를 민간기업에게 인양하게 하면서 재일 조선인들의 사건 진상조사 요구를 묵살했다. 그리고 인양된 선체는 아무런 조사도 없이 민간기업에 고철로 팔아 넘겼다.
후에 우키시마마루 사망자의 유골이라면서 300여 구의 유골을 반환했지만, 조사 결과 여러 사람의 유골이 뒤섞인 것으로 밝혀지기도 했다.
5. 사건 이후[편집]
1977년에 일본의 공영방송 NHK에서 다큐멘터리 <폭침>이 방영되면서 우키시마마루 사건이 다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후 1992년 생존자와 유족들은 일본 법원에 일본 정부에 이 사건에 대해서 피해보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2001년 8월 23일, 교토지방재판소에서는 일본 정부의 안전 배려 의무 위반을 이유로 생존자 15명에게 1인당 300만 엔의 위로금 지급 판결을 내렸으나,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 요청은 기각했다. 그러나 이 판결마저 2003년, 오사카 고등재판소에서 번복되어 원고패소판결을 내렸다. 참고로 이때 일본 법원의 기각 사유 중 하나가 한일기본조약이었다. 설령 일본 정부의 책임이 있다 하더라도 한일기본조약에 의해 보상은 끝났다는 것이다.
하지만 설령 일본이 주장하는 대로 사고가 맞다 하더라도, 일본 정부가 이 사건에 대한 책임을 회피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그럼에도 한국 정부는 이 사건의 진상조사 요구나 피해 보상에 대해서 입도 뻥끗하지 않고 있다.
한편 번역가 이윤기 씨가 이 사건으로 희생된 사람들의 위령비를 탐사한 적이 있다. 당일 밤 희생자들을 생각하며 많이 마시고 많이 울었다고 한다.
현재 한국과 일본 양국에 사건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조형물이 있다. 한국에는 부산 중앙동 수미르공원에 희생자 위령비(2005)가 있고, 일본에는 우키시마마루가 침몰한 해안 근처의 섬에 '순난의 비'가 있다.
2016년 김문길 한일문화연구소장 등이 배에 폭발물이 실려 있었다고 추정되는 일본 방위청 문서를 입수해 공개했다. #
2019년에 사고 넉 달 뒤 연합군 요청으로 작성한 조사 보고서에서 출항 전 일본 승조원들이 조선인 때문에 생명을 바칠 수 없다며, 위험한 구역 항해는 절대 반대한다는 규탄시위를 했다고 적혀 있으며, 그러자 일본 해군 참모장이 의무를 수행해 깨끗이 목숨을 바치라고 '폭탄적인 선언'을 했다는 내용이 담겨있어 고의성 의혹이 커진 상황이다.#
2001년 8월 23일, 교토지방재판소에서는 일본 정부의 안전 배려 의무 위반을 이유로 생존자 15명에게 1인당 300만 엔의 위로금 지급 판결을 내렸으나,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 요청은 기각했다. 그러나 이 판결마저 2003년, 오사카 고등재판소에서 번복되어 원고패소판결을 내렸다. 참고로 이때 일본 법원의 기각 사유 중 하나가 한일기본조약이었다. 설령 일본 정부의 책임이 있다 하더라도 한일기본조약에 의해 보상은 끝났다는 것이다.
하지만 설령 일본이 주장하는 대로 사고가 맞다 하더라도, 일본 정부가 이 사건에 대한 책임을 회피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그럼에도 한국 정부는 이 사건의 진상조사 요구나 피해 보상에 대해서 입도 뻥끗하지 않고 있다.
한편 번역가 이윤기 씨가 이 사건으로 희생된 사람들의 위령비를 탐사한 적이 있다. 당일 밤 희생자들을 생각하며 많이 마시고 많이 울었다고 한다.
현재 한국과 일본 양국에 사건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조형물이 있다. 한국에는 부산 중앙동 수미르공원에 희생자 위령비(2005)가 있고, 일본에는 우키시마마루가 침몰한 해안 근처의 섬에 '순난의 비'가 있다.
2016년 김문길 한일문화연구소장 등이 배에 폭발물이 실려 있었다고 추정되는 일본 방위청 문서를 입수해 공개했다. #
2019년에 사고 넉 달 뒤 연합군 요청으로 작성한 조사 보고서에서 출항 전 일본 승조원들이 조선인 때문에 생명을 바칠 수 없다며, 위험한 구역 항해는 절대 반대한다는 규탄시위를 했다고 적혀 있으며, 그러자 일본 해군 참모장이 의무를 수행해 깨끗이 목숨을 바치라고 '폭탄적인 선언'을 했다는 내용이 담겨있어 고의성 의혹이 커진 상황이다.#
6. 문화에서[편집]
영화에서는 1995년 이토오 마사아키(伊藤正昭)가 제작한 일본 영화 <아시안 블루 우키시마마루사콘[10]>(エイジアン・ブルー 浮島丸サコン)가 최초로 이 사건을 다뤘다. 전쟁을 모르고 자란 일본인 자매가 재일동포 2세인 대학교수와 함께 사라진 아버지의 행방을 쫓으며 우키시마마루 사건에 대해 알아간다는 것이 영화의 줄거리다. 이런 내용으로 인하여 이 영화는 일본 우익의 공격을 받았지만, 그럼에도 상영되어 30만 명 이상이 관람하였다. 한국에서는 일본 문화개방이 제대로 안 된 데다 돈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수입이 되고 있지 않다가 2001년에야 시민단체 '광주시민연대'에 의해 처음으로 상영됐다. 예고편 본편
한편 이 사건을 모티브로 한 가장 유명한 작품은 북한 영화 <살아있는 령혼들>(2002)이다. 물론 북한 영화인만큼 화질이나 CG가 조악하지만 이 사건을 피해자 입장에서 다룬 최초의 서사 영화라는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
참고로 우측 포스터의 침몰하는 배는 도색과 선미 형태, 굴뚝의 모양으로 보아서 RMS 타이타닉의 자매선 HMHS 브리타닉이다. 원래 브리타닉을 다룬 영화 'Britannic'에서 사용한 브리타닉 호의 CG를 북한에서 짜깁기(...)해 쓴 것이다. 브리타닉 호의 굴뚝 뒤로 구명정을 내리는 ‘대빗(davit)’이 보이는 점[11], 선미의 도색 바탕이 하얀데 초록색 줄무늬가 보이는 점[12] 등에 의하여 확실시된다.
2010년 7월 18일,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424회에서 이를 다루었다. 보기. 그런데 이미 예전에 빌헬름 구스틀로프를 타이타닉 이후 사상 최대의 해상 사고로 하였는데, 다시금 이 사건을 사상 최대의 해상 사고로 표현하여 시청자들을 헷갈리게 하였다. 사실 타이타닉 이후에 이보다 많은 희생자들을 낸 해상 사고가 많이 있다.립서비스
2014년에는 광복 69주년 기념문화제에서 이 사건을 다룬 창작뮤지컬 <우키시마마루>가 공연됐다.
2019년 9월 우키시마마루 폭파 침몰 사건에 대한 진실규명 영화 <우키시마호>가 개봉 예정이다. 네이버 우키시마호, 다음 우키시마호 티저예고편, 메인예고편
한편 이 사건을 모티브로 한 가장 유명한 작품은 북한 영화 <살아있는 령혼들>(2002)이다. 물론 북한 영화인만큼 화질이나 CG가 조악하지만 이 사건을 피해자 입장에서 다룬 최초의 서사 영화라는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
참고로 우측 포스터의 침몰하는 배는 도색과 선미 형태, 굴뚝의 모양으로 보아서 RMS 타이타닉의 자매선 HMHS 브리타닉이다. 원래 브리타닉을 다룬 영화 'Britannic'에서 사용한 브리타닉 호의 CG를 북한에서 짜깁기(...)해 쓴 것이다. 브리타닉 호의 굴뚝 뒤로 구명정을 내리는 ‘대빗(davit)’이 보이는 점[11], 선미의 도색 바탕이 하얀데 초록색 줄무늬가 보이는 점[12] 등에 의하여 확실시된다.
2010년 7월 18일,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424회에서 이를 다루었다. 보기. 그런데 이미 예전에 빌헬름 구스틀로프를 타이타닉 이후 사상 최대의 해상 사고로 하였는데, 다시금 이 사건을 사상 최대의 해상 사고로 표현하여 시청자들을 헷갈리게 하였다. 사실 타이타닉 이후에 이보다 많은 희생자들을 낸 해상 사고가 많이 있다.
2014년에는 광복 69주년 기념문화제에서 이 사건을 다룬 창작뮤지컬 <우키시마마루>가 공연됐다.
2019년 9월 우키시마마루 폭파 침몰 사건에 대한 진실규명 영화 <우키시마호>가 개봉 예정이다. 네이버 우키시마호, 다음 우키시마호 티저예고편, 메인예고편
[1] 일본 정부의 사고처리문서에 기록된 수이다. 그러나 실제 관련자들의 증언을 종합해보면 실제 탑승인원은 8,000여 명에 달했을 것으로 보인다. 애초에 일본은 탑승자 명부조차 제대로 작성하지 않아서, 사건 이후 27년 만에 밝혀진 사망자 명부에는 고작 549명(조선인 524명, 일본인 승무원 25명)밖에 적혀져 있지 않았다.[2] 우키시마마루는 원래 화물선으로 1937년 건조되어 1941년부터 군수 물자를 실어날랐었다.[3] 일본은 3,725명의 탑승을 주장하는데, 7000여 명이라는 숫자는 사고 당시의 현지 주민의 증언과 우키시마마루 생존자의 증언에 따른 수치이다.[4] 소련 해군의 잠수함으로 추정되지만 러시아 정부는 부정하고 있다.[5] 삼선 조난사건이라고 한다.[6] 대순진리회 대순회보 90호의 '우키시마호, 그 잊혀진 비극을 찾아서'에 실린 내용에 의하면 1954년 10월 9일자 오사카 발행 <국제신문>에 실린 것이다. 우측에는 부식된 시계와 한글이 새겨진 탑승자의 유품 사진이고, 좌측은 찢겨진 배 밑바닥 사진이다. 신문은 이를 보도하며 폭발이 배 내부에서 일어났을 가능성에 대하여 언급하였다.[7] 1975년에 나온 재일조선인 처우의 추이와 현상(在日朝鮮人処遇の推移と現状) 53페이지를 출처로 명시하고 있다.[8] 아마도 구명보트 같은 걸로 추정된다.[9] 이 자료는 대순진리회 대순회보 90호의 '우키시마호, 그 잊혀진 비극을 찾아서'에 실린 사진이다.[10] "사콘"은 한국어 단어 "사건"을 카타카나로 옮긴 것이다.[11] 대빗은 여러 개의 구명보트를 효과적으로 내리기 위해 선사가 설치한 것으로, 타이타닉 호 침몰 이후에 급히 설치한 것이다.[12] 당시 브리타닉은 영국 해군 병원선으로 차출되어 적십자 마크와 초록 줄무늬를 도색하고 지중해 전장에 투입되었다가 침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