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1/24

2001 조성환. 개벽의 외출 - 동학, 세계와 만나다 - Daum 카페

地中有山 | 개벽의 외출 - 동학, 세계와 만나다 - Daum 카페

개벽의 외출 - 동학, 세계와 만나다 | 리더십에세이外
혼돈나라|조회 23|추천 0|2020.01.24. 19:18

조성환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1. 서양과의 조우

지난 2019년 9월 30일부터 10월 1일까지 서울역사박물관에서 〈2019 한국생태문명회의: 생태문명을 향한 전환, 철학부터 정책까지〉가 열렸다. 한국의 생태문명을 주제로 한 이 국제회의는 올해로 세 번째를 맞이한다. 2017년에 캘리포니아주 클레어몬트시에서 〈한국사회의 생태적 전환을 위한 국제 컨퍼런스〉라는 이름으로 개최된 이래로, 2018년에는 경기도 파주시에서 〈생태문명 국제 컨퍼런스 2018: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생태적 전환〉으로 이어졌다. 이 야심찬 포럼을 기획한 인물은 클레어몬트 신학대학원 과정사상연구소 연구원이었던 한윤정(1967~) 박사다. 지금은 ‘한국생태문명 프로젝트 디렉터’라는 직함으로 활동하고 있는 한윤정 디렉터는 1991년부터 2016년까지 경향신문 사회부·경제부·문화부 기자와 문화부장을 역임하였고, 2018년에는 화이트헤드철학자인 죤 캅 교수의 생태신학철학을 번역하기도 하였다(󰡔지구를 구하는 열 가지 생각󰡕, 지구와 사람).

작년에 열린 세 번째 생태문명회의에는 영광스럽게 필자도 발표자로 참여할 기회를 얻었다. 첫날 첫 섹션의 주제는 “생태문명의 철학”이었는데, 내가 준비한 내용은 “해월 최시형의 생태철학”이었다. 이 섹션의 발표자와 발표주제는 다음과 같다.

「산업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 이재돈 신부, 가톨릭대 겸임교수

「생태문명, 고등교육, 아름다움의 생태학」 제이 맥다니엘 미국 헨드릭스대 교수·철학

「개벽파의 생명사상과 탈근대적 함의」 조성환 원광대 원불교사상연구원 책임연구원

「녹색국가론, 미완의 꿈? 여전히 유효한 질문」 정규호 한살림연합 정책기획본부장


이 중에서 나에게 가장 인상 깊었던 발표는 이재돈 교수의 ‘산업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였다. 이 발표에서 이재돈 교수는 토마스 베리(Thomas Berry, 1914~2009)의 생태철학을 소개하셨는데, 나에게는 그것이 미국의 개벽사상처럼 보였다. 그가 제시한 ‘지구공동체’(earth community)나 ‘종들의 연합’(The United Species) 개념은 나의 발표주제였던 최시형(1827~1898)의 “천지부모-만물동포” 사상이나 󰡔천도교회월보󰡕(1911)에 실린 정계완의 ‘천인공화(天人共和)’ 개념과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토마스 베리와 최시형은, 비록 1세기라는 시간차와 미국과 한국이라는 공간차는 있지만, ‘생태철학’ 또는 ‘생태신학’이라는 주제로 얼마든지 대화가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재돈 교수의 발표에 이어서, 제이 맥다니엘 교수는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을 미학적 관점에서 접근하는 발표를 하였고, 이어서 나는 최시형의 생태철학을 동학사상사의 흐름에서 소개하는 발표를 하였다. 마지막으로 한살림연합의 정규호 본부장은 풍부한 현장 경험을 살려 구체적인 생태정책을 제안하였다. 각 발표자에게 주어진 시간은 20분 정도였고, 통역은 동시통역으로 이루어졌다. 나는 발표는 한국어로 하였지만 미국인 학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PPT는 영문으로 작성하였다. 가령 ‘이천식천(以天食天)’은 “Heaven eats Heaven”과 같이 -.

제1섹션의 발표가 모두 끝나고 청중들의 질문을 받는 시간이 이어졌다. 그러나 누구 하나 동학에 관심을 갖는 이는 없었다. 토마스 베리나 화이트헤드와 같은 미국철학, 아니면 구체적인 생태정책에 대한 질문이 이어졌다. 그러다가 뜻밖에도 발표자였던 제이 맥다니엘 교수가 청중의 질문에 답변하는 도중에 나를 쳐다보면서 동학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

“저는 동학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이런 부분은 동학과 통하는 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실은 저도 동학을 공부한 적이 있습니다. 아까 동학에 대한 발표가 대단히 흥미로웠는데, 가능하면 조성환 박사님으로부터 동학을 배우고 싶습니다.”

맥다니엘 교수의 코멘트가 끝나자 비로소 플로어에서도 나에게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런 상황은 별로 이상할 것도 없다. 어느 정도는 예견되어 있었다고 하는 편이 맞을지도 모른다. 내가 발표에 앞서 “한국철학을 하는 조성환입니다”라고 자기소개를 하는 순간 이미 객석에서는 낯선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난생 처음 접하는 미지의 것을 대하는 ‘어색함’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그렇다 치고, 나로서는 미국의 화이트헤디언이 동학을 공부한 적이 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국인조차 무관심한 동학을 미국의 철학과 교수가 관심을 가지고 있다니! 이번 컨퍼런스를 통해 내가 깨달은 사실은 동학이 현대 서양철학과도 얼마든지 대화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생태신학과 같은 주제라면 해월철학은 화이트헤드철학이나 토마스 베리 철학과도 충분히 접점을 찾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다.


2. 일본으로 가다

영미철학에 이어서 두 번째로 만난 것은 일본이었다. 한국생태문명회의가 있고 나서 두 달 뒤인 11월 23일과 24일, 난생 처음으로 일본의 대학에서 동학을 얘기할 기회를 얻었다. 그것도 오로지 동학사상만을 말하는 자리였다. 강연자도 원광대학의 박맹수 총장과 나, 단 두 명뿐이었다. 심포지움 제목은 “현대에 되살리는 한국사상”(現代に活かす韓国の思想).

일본에서 동학사상만으로 이런 자리가 마련되는 것은 아마도 교토포럼 이후로 처음일 것이다. 교토포럼이 전문 학자들만 참석하는 학술토론의 장이었다면 이번 심포지움은 일반인들과 함께하는 공개 강연의 형식을 띠었다. 이런 보기 드문 자리를 기획해 주신 분은 원광대학교와 오랫동안 학술교류를 하고 있고 동학사상에도 조예가 깊은 ‘토착적 근대론’의 주창자 기타지마 기신(北島義信. 1944~) 교수이다. 기타지마 선생은 개인적으로 주고받은 대화에서 “요즘과 같이 한일관계가 안 좋은 시기일수록 시민 차원의 교류는 더 활발해져야 한다”는 기획 의도를 피력한 적이 있다.

심포지움 장소는 일본의 한복판인 동경에 위치한 명문 동양대학(東洋大學)이었다. 동양대학은 “만학의 기초는 철학에 있다”는 건학이념을 내걸고 있는 종합대학으로, 130년 이상의 전통을 자랑하고 있다. 원광대학교 초대 총장인 숭산 박길진(1915~1986) 선생이 유학한 대학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그래서인지 양자 사이의 유사점도 눈에 띄었다. 동양대학 창립자인 이노우에 엔료(井上円了, 1858~1919)는 동경의 나카노구(中野区)에 철학당(哲學堂) 공원을 짓고 소크라테스, 칸트, 공자, 석가를 모신 사성당(四聖堂)을 세웠는데, 원광대학교 교정에도 소크라테스, 공자, 석가, 예수를 모신 사성상(四聖像)이 있다. 동양대학에 칸트가 들어 있는 반면에 원광대학에는 예수가 세워져 있는 것은 철학과 종교 중에서 어느 쪽을 더 중시하느냐의 차이를 반영하고 있다고 보인다. 뿐만 아니라 동양대학의 교육이념 중의 하나인 ‘지덕겸전(知德兼全)’은 원광대학의 건학이념인 ‘지덕겸수(知德兼修)’와 정확히 일치하고 있다. 이러한 점들은 박길진 총장이 원광대학을 디자인하는데 있어서 이노우에 엔료와 동양대학으로부터 일정 정도 영감을 받았음을 시사하는 것이리라.

강연장에 들어가자 대형 강의실에 100여명 가까운 청중들이 모였다. 박맹수 총장의 통역자로 온 원불교사상연구원의 야규 마코토 교수의 말에 의하면 적어도 80명 이상은 모인 것 같다고 한다.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은 박맹수 총장과 14년 동안 ‘한일시민동학기행’을 이끌어 온 90세의 나카츠카 아키라 교수를 비롯한 기행에 참여한 일본시민들이었다. 그 중에는 재작년부터 동학기행에 참여한 《아사히신문》의 죠마루 요이치 기자의 모습도 보였다. 뿐만 아니라 김태창 선생과 같이 한일을 오가며 노년철학을 정립하고 있는 《미래공창신문》의 야마모토 교시 대표, 와세다대학에서 같이 유학한 민애선 박사, 멀리 토호쿠대학에서까지 와준 최다울 군 등, 오랜 지인들을 한자리에서 만나는 느낌이었다. 그 외에도 기타지마 기신 선생이 몸담고 있는 지역문화학회 소속 학자들과 동양대학 학생들이 참여하였다.

심포지움은 기타지마 기신 교수의 진행 하에, 박맹수 총장과 내가 전봉준과 최시형의 생명평화사상에 대해서 각각 얘기하고, 이어서 청중들의 질문을 받는 형식으로 3시간에 걸쳐 진행되었다. 개인적으로는 재작년부터 동학을 주제로 시민강좌를 여러 번 해본 경험이 많이 도움이 되었다. 다만 대상이 일본인으로 바뀌어서 일본어로 말해야 한다는 부담감에 긴장은 두 배로 증폭되었다. 아니 그보다는 동학사상을 처음 접하는 외국인들에게 짧은 시간 안에 동학의 정수를 요령 있게 전달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더 컸던 것 같다. 다행히 밤을 새워가며 만든 ‘일본어 PPT’ 덕분에 전달력이 나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강연이 끝나고 쉬는 시간에 복도에 나갔더니 나카츠카 아키라 교수님이 계셨다. “덕분에 그동안 잘 이해되지 않았던 문제들이 풀렸다”며 고맙다는 말을 해주셨다. 강연장에 돌아오니 외교관을 지냈다는 어느 원로께서도 “아주 이해하기 쉬웠다”며 칭찬을 해주셨다. 뿐만 아니라 심포지움이 다 끝나자 어느 시민이 다가와서 동학연구에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며 귀한 정보를 제공해 주셨다.

동양대학 심포지움이 끝난 다음날, 박맹수 총장은 한국으로 귀국했고 나는 다음 강연을 위해 기타지마 기신 교수, 최다울 군과 함께 욧카이치로 향했다. 기타지마 기신 교수가 자신의 거주지인 토미다(富田)에서 시민강좌의 자리를 마련해 주었기 때문이다. 이번 제목은 “동학의 생명사상과 현대”였다. 청중은 10여명 정도에 불과했지만, 이번에는 또 다른 부담이 가중되었다. 기타지마 기신 교수를 비롯하여 동양대학 심포지움에 참석한 분들이 4명이나 있었기 때문이다. 그중에는 최다울 군을 비롯하여 지역문화학회 회원인 나카오(中屋) 교수 부부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원불교사상연구원에서 같이 생활한 적이 있는 󰡔참된 문명은 사람을 죽이지 아니하고󰡕의 역자인 오니시 히데나오 박사님(1943~), 교토포럼 시절부터 알고 지내는 󰡔노년철학의 권유󰡕의 저자 오오하시 켄지 교수님, 그리고 재일교포라고 자신을 소개하신 욧카이치대학에서 서양경제학을 가르치는 이수이(李修二) 교수님도 계셨다. 두세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교수들인 셈이다.

그래서 나의 부담은 동양대학 때보다 배로 가중되었다. 전날 얘기를 그대로 반복하자니 이미 들었던 사람이 반이나 되고, 그렇다고 그것을 생략하자니 처음 듣는 사람도 반이나 되기 때문이다. 다행히 강연 시간이 동양대학의 두 배인 1시간 반이 주어졌다. 그래서 심화된 내용을 배로 추가하였다. 최시형의 법설을 일본어로 번역해서 넣은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이번에도 밤을 새워야 했고, 한국에서 짊어지고 온 몸살감기는 완쾌되기는커녕 더 악화되기만 하였다.

강연이 끝나자 이번에는 정말 전문적인 질문과 코멘트들이 쏟아졌다.

유학과 동학의 관계, 
최시형 사상과 초기 맑시즘과의 유사성, 
최시형 사상과 이슬람 사상과의 유사점 등등.

동양대학 심포지엄에서는 “주체사상과 동학의 연관성”을 묻는 질문이 어려웠는데, 이번에도 거의 답변을 하지 못했다. 동아시아사상과의 관련성을 묻는 질문 이외에는 - . 향후의 과제로 남았지만 앞으로의 전망을 제시해 준 것이기도 하였다.
한국생태문명회의에 이어서 동학과 세계철학과의 대화가능성을 또 한 번 확인했기 때문이다.

이번의 동학 기획은 기타지마 기신 교수와 원광대학교가 7년 간에 걸쳐 학술교류를 축적해 온 성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축적이 있었기에 한국사상을, 그것도 동학사상을 일본에서 말할 수 있는 장이 마련될 수 있었던 것이다. 노자 식으로 말하면 한일학술교류의 ‘길(道)’을 7년간 닦았더니 그것이 마침내 ‘힘(德)’으로 드러난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동학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지 어언 10년의 세월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날로 기록될 것이다. 동학에 대한 이토록 뜨거운 반응은 한국에서도 경험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3. 북경에서의 대화

일본에서 돌아온 지 한 달이 채 안 된 12월 14일, 나는 다시 북경으로 떠났다. 이번에는 중국학자들과 대화하는 자리이다. 주제는 “중국의 향촌건설과 한국의 동학사상.”

󰡔백년의 급진󰡕의 저자이자 중국 향촌건설운동의 리더인 원테쥔(溫鐵軍, 1951~) 교수가 2018년에 원광대학교를 방문한 것에 대해 화답하는 형식으로 기획된 일종의 ‘한중생태포럼’이다. 당시에 원교수는 공주에서 있었던 한일시민동학기행에 참여하고, 다음날 원광대학교에서 강연을 하였다. 그 때 강연에서 한 말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저는 지금까지 한국의 근대화가 서양의 영향으로 된 줄만 알았는데, 어제 동학기행을 다녀오고 나서 그 바탕에 동학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가??]

과연 대가다운 말이었다. 잠깐 동학전적지를 둘러본 것이 다인데 저런 통찰을 갖다니! 물론 이번 초청의 기획자인 이병한 선생과 통역자인 김유익 선생이 친절하게 배경설명을 해 준 것도 크게 작용했다고 생각되지만 -.

이번에 참가한 우리측 학자는 포럼의 제안자이자 기획자이기도 한

  1. 개벽학당의 이병한 당장을 비롯하여 
  2. 원광대학교 박맹수 총장, 
  3. PaTI의 안상수 교수, 
  4. 원광대학교 동북아시아인문사회연구소의 정혜정 교수, 
  5. 원광대학교 종교문제연구소의 김재익 연구원, 
  6. 그리고 나, 이렇게 여섯명이었다. 


중국측 참가자는

  1. 원테쥔 교수를 비롯하여 
  2. 원테쥔 선생과 함께 원광대학교를 방문했던 짱란잉 교수, 
  3. 중국사회과학원 문학연구소의 쑨거(孫歌) 교수, 
  4. 그리고 중국의 향촌운동을 연구하는 국내학자들과 해외에서 온 중국학 연구자들이다.


이 외에도 영국 슈마허칼리지의 창립자이자 Resurgence & Ecology의 편집자이기도 한 󰡔그대가 있어 내가 있다󰡕의 저자 사티쉬 쿠마르(Satish Kumar) 선생도 특별히 강연자로 참석하였다.


기조강연을 맡은 원테쥔 선생은 뜻밖에도 ‘탈서구중심주의’를 화두로 꺼냈다. 내가 ‘개벽’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 중의 하나도 이것 때문이었는데, 중국에서도 이 문제가 부각되고 있다니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동시에 왜 원테쥔 선생 쪽에서 ‘동학’에 관심을 표명하는지에 대한 의문도 풀리게 되었다. 동학은 자생적 근대화 운동임과 동시에 한살림으로 계승된 생태철학인데, 이 두 요소야말로 원테쥔 선생의 가장 큰 관심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측 발표는 기조강연을 맡은 박맹수 총장이 동학을 연구하게 된 계기와 한살림운동에 동참한 경험을 풀어놓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이어서 개별발표가 시작되었는데 각자에게 주어진 시간은 15분이었다. 나는 지난번 동경에서와 같이 전날 밤 늦게까지 중국어로 PPT를 만들었다. 양은 많지 않았지만 오랜만에 입력하는 중국어 자판이라서 작업은 더디게 진행되었다. 내가 발표한 주제는 “최시형의 생태공화주의”였다. 해월의 “천지부모-만물동포” 사상을 포럼의 전체 주제에 맞게 ‘생태공화’라는 개념으로 표현해 본 것이다. 이어서 정혜정 교수님은 󰡔개벽󰡕지의 중국 특파원을 역임한 천도교인 이동곡에 대해서 발표하였고, 김재익 연구원은 장일순의 한살림철학과 운동을 소개하였다. 이병한 박사는 동학에서 개벽학당에 이르는 동학 150년사를 동학 1.0에서 동학 4.0으로 정리하였고, 마지막으로 PaTI의 안상수 선생님은 자신이 디자인한 생명평화문양의 의미와 천도교의 궁을장에 담긴 디자인적 의의를 알기 쉽게 설명하였다.

이번 포럼에서 나에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영국에서 온 사티쉬 쿠마르 선생의 발표였다. 쿠마르 선생은 마이크를 잡자마자 ‘영성’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영성은 흔히 생각하듯이 신비적이거나 관념적인 어떤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땅을 경작하고 밭을 일구는 과정에서 체험되는 것입니다.” 중국측 발표자들에게서는 전혀 들을 수 없었던 이야기다. 한국에서도 영성이란 말이 많이 회자되고 있지만, 이렇게 체화된 언어는 처음이었다. 순간 불교가 중국에 전래되었을 때에도 이런 느낌이었겠구나 싶었다. 쿠마르 선생이 죤 캅 교수와 더불어 중국의 향촌건설운동의 고문을 맡고 있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운동이나 정책은 정부 차원에서 추진할 수 있어도 ‘영성’은 바깥에서 빌려올 수밖에 없는 것이 중국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마치 전통시대에 중국 유교의 부족함을 인도의 불교로 채웠듯이 말이다.

우리 쪽 발표에 대한 중국학자들의 반응은 약간 의외였다. 동학의 사상적 개성을 찾으려하기보다는 중국적인 ‘천인합일’이나 ‘유교’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하는 것이다. 15분 안에 중국적인 천인합일과 해월의 천인상의(天人相依)나 천인상여(天人相與)와의 차이를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미국학자들이나 일본학자들이 보여준 반응과는 사뭇 달랐다. 아마 정부에서 후원하는 공적인 자리여서 더더욱 그러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놀라웠던 점은 중국학자들 입에서 단 한 번도 ‘평화’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우리측 발표자들이 하나같이 동학을 ‘생명평화’와 결부지은 것과는 큰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이 차이는 동학 이래로 한국이 걸어온 길이 동아시아 안에서도 특수한 길이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리라. 생각해 보면 홍콩문제나 티벳문제를 안고 있는 중국 입장에서 ‘평화’를 말하는 것은 자칫 자기모순에 빠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4. 향후의 과제

세 차례에 걸쳐 미국, 일본, 중국학자들과 동학을 매개로 교류하는 체험을 하고서 느낀 점은 앞으로의 동학연구는 동학사상과 세계철학과의 대화를 준비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겠다는 것이다. 남미에 가면 해방신학으로 동학과 대화하고, 미국에 가면 생태신학이나 생태철학으로 동학과 대화를 시도하는 것이다. 동학을 해방신학적 관점에서 해석하는 작업은 이미 1974년에 윤노빈이 󰡔신생철학󰡕에서 시도한 적이 있다. 일본과의 대화는 고마쓰 히로시, 박맹수, 오니시 히데나오 등이 다나카 쇼조와 전봉준‧최제우를 비교하는 작업을 시도한 적이 있다. 맑시즘이나 주체사상, 모택동사상과의 접점을 찾는 작업도 필요하다. 인간과 만물의 존재론적 평등성을 주장하는 서양의 신유물론(New Materialism)은 최시형의 만물시천주 사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

2019년 개벽학 원년에는 개벽학을 한국근대사나 세계근대사에 자리매김하는 작업에 중점을 두었다. 개벽학 1년부터는 개벽학과 세계사상 사이의 접점을 찾아서 서로 대화를 모색하는 작업을 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이런 과제를 자각하게 해 주신 한윤정 디렉터, 기타지마 기신 교수, 이병한 당장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

출전: 《개벽신문》 91호. 2020년 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