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선 평화학교’를 세운 퀘이커 정지석: 퀘이커에는 교리가 없습니다. 모든 교리 대신 오직 평화를 존중합니다.
‘국경선 평화학교’를 세운 퀘이커 정지석: 퀘이커에는 교리가 없습니다. 모든 교리 대신 오직 평화를 존중합니다.
wy 0 2019.06.05 10:27
철원 가는 길은 그리 멀지 않았다.
포천으로 뚫린 새 길을 강남에서 자동차로 2시간을 달리니 도착했다.
개성보다 더 북쪽에 위치한 철원, DMZ의 봄은 이미 지났고 녹슨 기차 길에 녹음이 울창했다.
평화학교를 안내하기 위해 마중 나온 정지석박사가 온화한 미소로 필자를 반겼다.
그는 퀘이커 교도이고 국경선 평화학교 교장이며 목사님이다.
얼마 전 성공리에 마친 “4 27DMZ민+평화 손잡기 운동”을 주도하였다.
최: 우선 ‘4 27평화 손잡기’에 대해서 말씀을 좀 해 주시지요.
정: 공식 명칭은 “4 27DMZ민+평화 손잡기운동”입니다.
남북의 분단이 너무 길고 아파서 이제는 정치인들에게만 맡길 것이 아니라 우리 시민들이 남북 평화 통일의 열망과 의지를 전세계에 보여주는 행사를 기획하고 실행에 옮긴 운동입니다.
이 일은 시민들의 안전과 삶에 직결되는 일이기 때문에 우리들이 더 적극적으로 평화 통일에 대한 의사를 표현해야 하는데 어떻게 하느냐가 문제였습니다.
작년 4월 27일, 남북 정상들이 판문점에서 손을 잡은 지 1주년이 되는 날을 기념하여 DMZ 500Km의 국경선 마을에 시민들이 평화의 손잡기 운동을 하자는 마음들이 모아져서 이런 운동을 한 것이지요.
최: 상당히 감격적이고 성공적인 행사였습니다. 어려운 점도 많으셨지요?
정: 네, 저희들은 처음부터 확실히 잘 된다는 믿음으로 시작했는데 막상 시작하니까 많은 시민들이 어떻게 참여해야 하느냐고 질문을 하셨습니다.
이런 큰 관심과 행사 일정에 대한 세부적인 질문에 충분한 설명과 안내가 어려웠습니다.
우리가 조직적 단체가 아니고 순수히 시민들의 마음을 합쳐서 시작하다 보니까 그런 면에서 당황도 좀 했고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그보다 앞서 좀 더 근본적인 어려움은 이 일을 하자고 했을 때 주위의 반응이 별로 신통치 못했던 점입니다.
말하자면 이런 일을 하실 만한 분들, 주로 지식인들인데 이분들을 만나면 “뜻은 좋은데 과연 되겠느냐” 며 별로 관심이 없었어요.
이럴 때 힘이 좀 빠졌습니다.
최: 네 워낙 엄청난 일이라 그런 반응이 나올 수 있었겠지요.
반면에 이 일을 추진하는데 같이 동참한 분 들도 많이 계시지요?
정: 우선 이 일은 종교적인 체험으로 말씀 드리면 하나님이 원하시는일이라는 확신이 있었지요.
하지만 실질적인 행사를 기획하고 실행하는 과정에서 저도 어떤 때는 현실감이 좀 없었어요.
몇몇 목사님들과 같이 기도하면서 계속 이 일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안바나바 목사님이 이제부터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영상으로 기록하면서 더욱 적극적으로 해 나가자는 권유에 다시 활력을 얻었습니다.
왼쪽부터: 백용석 정동수 노정선 한정석 정지석 이환진 나핵집 안바나바 김찬수 (존칭생략)
최: 구불구불한 DMZ 500km를 시민들이 손을 잡아 연결하려면 50만명이 있어야 한다는데 그 정도는 아니지만 20만이 넘는 분들이 이 평화 손잡기에 동참하였습니다.
참 많이 오셨네요.
정: 저는 처음에는 100만이 오실 것으로 기대했었습니다 ㅎㅎ
다만 이분들이 왔을 때 어떻게 안전하고 즐거운 행사가 되게 하느냐가 걱정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참여 인원의 윤곽이 잡히면서 그 정도까지는 아니라는 것을 알았지요.
이러한 과정에서 마을 주민들의 헌신적 봉사가 이번 행사에 크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오시는 분들을 위해 철원에서는 영접 준비위원회를 만들었고 또 어디서 어떻게 손을 잡고 서야 할지거리 곳곳에서 실측을 해주셨어요.
이런 시민들의 자발적 도움이 이번 행사 성공의 큰 힘이었지요.
최: 이번 일로 DMZ 주위 시민들이 이런 행사에 동참할 의지가 있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내년 4 27에도 계속 이러한 행사를 하실 건가요?
정: 저는 그런 생각이 없고요…그때가 되면 또 그런 뜻을 가진 분들이 하실 수 있겠지요.
다만 이 손잡기 운동이 평화의 불길 운동이라면 이 불길이 생각지 못한 다른 곳으로 번지고 있습니다.
이번에 우리가 평화 컨퍼런스도 열었는데 여기에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학교 선생님들이 참석하였지요.
이 분들이 4 27행사를 보시고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며 이 운동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국경지대에서도 같이 하자는 제안을 했고 모두 박수를 쳤습니다.
파키스탄에서 오신 어느 신부님은 인도와 파키스탄 국경에서도 이런 운동을 하자는 제안에 내년 9월에 하기로 뜻을 모았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HC6Ydb2Uvk0&t=256s
최: 네 한국의 평화 손잡기 운동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인도와 파키스탄의 국경으로 퍼지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정박사님이 교장으로 계시는 국경선 평화학교에 대한 질문을 하겠습니다.
이 학교는 어떤 학교인가요?
정: 국경선 평화학교는 ‘피스메이커’, 남북한의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을 길러내기 위한 학교로서 2013년 3월 1일 개교를 했습니다.
그 전에는 제가 학교에서 강의를 하면서 이러한 피스 메이커를 길러야 한다고 말만 해왔는데, 어느 순간 내가 직접 해야겠다는 각성이 들면서 미국에서 철원으로 2011년에 이사를 왔습니다.
지금 이 학교는 아직까지 한국의 교육 제도에는 없는 학교입니다.
대안학교도 아니고요.. 제 개인적으로는 신앙 운동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간혹 고마운 분들이 학교 재정에 보탬이 되라고 얼마씩을 주시는데 현 제도상으로는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 분들이 자발적으로 기여한 돈도 나중에 문제가 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얼마 전에 통일부에 사단법인으로 등록을 했습니다.
다음 단계로는 평생교육기관으로 등록을 해서 정식으로 교육부의 산하 기관이 되려고 합니다.
최: 국경선 평화학교의 뜻에 동참하여 강의를 하시는 분들 중 저명인사도 많이 있으시지요?
정: 네, 석좌교수 중에 한완상박사님, 서광선목사님, 박경서박사님 등이 있으시고요, 해외의 평화학자들도 여러분 계십니다.
최: 다음 질문을 하겠습니다.
정박사님은 퀘이커 교도로 알고 있는데 퀘이커들이 스스로를 부르는 공식명칭은 ‘Religious society of friends’ 입니다. 어떤 의미인가요?
정: 네, 이사람들은 교단이라는 개념이 없습니다.
우리가 익숙한 개신교는 독일의 루터로부터 시작 되었지만 퀘이커는 영국의 청교도 혁명에 그 뿌리가 있습니다.
말하자면 영국 퓨리탄으로 시작 되었는데 퀘이커는 퓨리탄의 spiritual 좌파입니다.
최: spiritual 좌파가 무슨 뜻인가요?
정: 여기서 좌파라는 것은 종교적 의미이고, 제도권을 싫어하는 성향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떤 제도에 종속되는 순간 영적인 자유가 손상된다는 생각을 하는 겁니다.
최: 전통적 기독교로서는 생소한 개념인데요…교리도 일종의 제도라고 보는 건가요?
정: 네 그렇습니다. 우리는교리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교리라는 것은 어떤 신앙단체의 방향이나 믿음의 근간을 규정하는 것이고 이것을 지키지 않으면 안되지요.
그런데 퀘이커는 이런 제도적 교리들을 일체 거부합니다.
퀘이커가 가장 철저히 지키는 것이 하나 있다면 그 것은 평화입니다.
최: ‘4 27 평화손잡기’나 국경선 평화학교가 모두 평화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정박사님이 하는 일들은 이런 퀘이커리즘의 평화 정신과 직결 된 것 같습니다.
퀘이커 자체는 기독교이지만 교리가 없고 폭이 넓기 때문에 다른 종교인들도 퀘이커 모임에 참석하더군요.
정: 네, 사실 퀘이커만큼 포용적인 기독교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처음에는 퀘이커들을 보면서 좀 어색하고 이상했는데 이들의 포용력에 감명을 받았습니다.
이 사람들에게는 이단이라는 생각, 그런 개념조차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거꾸로 제도권 기독교에서 퀘이커를 약간 이단시 하고 있지요 ㅎㅎ
최: 지금 한국 전통 교회에서는 퀘이커를 이단으로 보고 있나요?
정: 감리교나 통합 측에서는 이단으로 보고 있지 않습니다.
그 외에 근본주의 보수교회에서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겁니다.
퀘이커 창시자 조지 폭스
최: 정박사님이 쓰신 ‘퀘이커리즘으로의초대’ 라는 책을 읽어보았습니다.
여기서 박사님은 ‘퀘이커리즘은 오랫동안 잃어버린 기독교의 원형과 본질을상기 시켜준다’ 라고 하셨는데 어떤 의미인가요?
정: 퀘이커들의 가르침은 단순합니다.
Faith and practice 입니다.
믿음만 있고 실천이 없는 것은 미신이고 실천만 있고 믿음이 없는 것은 단순한 행동주의겠지요.
그래서 믿음과 실천의 일치를 끊임없이 추구하는데 저는 거기서 예수님을 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진리라고 믿었던 그 일을 세상 속에 들어와서 실천하신 분이니까요.
최: 그렇게 좋은 퀘이커를 믿는 사람이 별로 많지 않습니다.
정: 네, 퀘이커 교도는아직 극소수인데 거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들에게는 ‘전도’ 라는개념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퀘이커는 모든 사람 안에 하나님, 신성이 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누가 누구에게 전도를 하지는 않지만 동시에 모든 지구촌이 교회라고 봅니다.
최: 한국에 퀘이커가 들어온 지는 얼마 안되지요?
정: 퀘이커는 6 25가 나고 1953년에 한국에 처음 들어 왔습니다.
주로 개인적으로 와서 구호 봉사와 함께 병원을 했습니다.
군산에 있는 군산 의료원이 바로 퀘이커 개인 의사들이 처음 와서 시작한 겁니다.
이후 함석헌선생이 무교회주의 신앙을 거쳐 퀘이커가 되신 분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요.
또 퀘이커는 상당히 개인주의 같으나 동시에 공동체의 영성을 추구합니다.
좀 역설적이지만, 조직이 아닌 공동체에서 개인의 자유로운 영성을 보장하면서같이 성장하는 것이지요.
최: 퀘이커가 역사적으로 이룩한 최초가 참 많더군요.
노예제도 반대부터 시작해서 전쟁 반대, 여성 투표권 보장 등 어느사회 단체 보다 이런 운동을 제일 먼저 했습니다.
군대에 가지 않는 것도 여호와의 증인보다 먼저지요?
정: 네, 그래서 처음에는영국 사회에서 퀘이커들에 대한 비난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퀘이커들은 전투에는 참여 안 하지만 전쟁터에는 나갑니다.
나가서 전투 못지 않게 위험한 일들을 하는 데 전쟁터에서 부상 당하여 쓰러진 사람들을 나르는 작업 등이지요.
자신을 방어할 무기인 총도 들지 않은 채 말이지요.
독일 폭격기가 런던에 폭탄을 퍼부을 때도 퀘이커들은 방공호에 들어가지 않고 시내 곳곳에서 폭탄의 잔해에 깔려있는 사람들을 병원으로 운반하는 일을 했지요.
2차 세계대전 중에 이러한 일들을 하는 퀘이커를 보고 당시 영국 사회의여론이 퀘이커들을 인정하기 시작했고 점차 그들에 대한 인식이 좋아졌습니다.
그 결과, 단체로는 최초로 1947년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영국에서 국교인 성공회는 줄어들고 있는데 퀘이커는 2만 명을넘어서는 성장을 하고 있지요.
주로 젊은이들이 퀘이커에 관심이 많습니다.
최: 왜 젊은이들이 그런가요?
정: 우선 그들은 퀘이커에서 자유로움을 느낀다고 합니다.
우리 모임은 한 시간 동안 침묵 기도만 하니까 누가 나와서 이것을 따르라거나 무엇을 회개하라등의 지시가 없는 겁니다.
목사 없이 침묵 기도 후 원하는 사람은 느낀 바를 말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종교성을 체험할 수 있으니 젊은이들이 모이는 듯합니다.
다음에는 Peace , 사실 토니 블레어가 미국 클린턴의 요청으로 이락을 폭격 할 때에도 퀘이커들은 격렬하게 반대했습니다.
이렇게 퀘이커의 유일한 교리랄 수 있는 평화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면서 젊은이들이 모이는 것 같습니다.
사실 영국만 아니라 미국 북동부, 청교도의 후예들이 많은 곳에서도 퀘이커에 대한 인식이 좋은데 한국에서는 아직 좀 이상한 이단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ㅎㅎ
최: 퀘이커의 침묵기도도 특이하지만 한국교회의 통성기도도 특이합니다.
정: 네, 형식으로는 정반대지요.
퀘이커 침묵의 핵심은 체험입니다.
무엇을 체험 하느냐 하면 신적 체험, 신과의 만남을 침묵 속에서 하는것입니다.
이를 위해 침묵 속에서 공통적으로 하는 일은 waiting, 기다림입니다.
무엇을?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지기를…
퀘이커의 침묵은 그래서 적극적 침묵입니다.
이 것의 핵심은 mystic. 신비입니다.
통성기도 하는 분들은 오순절 파인데 형식은 다르지만 내적인 신비체험은 같다고 할 수 있겠지요.
최: 퀘이커는 이 세상을 어떤 관점에서 보나요?
정: 이 사람들은 상당히 현실적입니다.
이 세상이 곧 죄로 멸망하고, 이 땅은 마귀가 공중 권세 잡았다는 그런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을 Original sin이 아니라 Original goodness로 보는 것이지요.
말하자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곳이라는 아주 낙관적인 생각을 합니다.
최: 정박사님이 미국에서 아무 연고 없는 철원으로 오신지 8년이 되었습니다.
그 동안 여기서 지내온 느낌과 앞으로의 방향에 대해 말씀 해주시지요.
정: 50이 넘어서 기도 중에 인생의 후반을 어떻게 살아야 할 지 생각하면서 그 길을 찾은 게 여기 였는데.. 저는 하나님께 행복하게 그리고 허무하지 않게 살고 싶다고 기도 했습니다.
최: 그 동안에는 좀 허무하게 사셨나 봅니다. ㅎㅎ
정: ㅎㅎ 네 사실 그런 느낌이 많았습니다.
목사로 일하면서도 그러한 허무감이 점점 진하게 나타났습니다.
이 때 하나님이 보여주신 길이 여기 철원인데 처음에는 너무 엉뚱했지만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지요.
제가 2011년 9월에 철원에 왔는데 그 후에는 허무한 적이 한번도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약속을 지켜 주셨고 저도 이 곳에서 지금처럼 학교일과 평화운동을 계속 하려 합니다.
철원이 공기도 좋고 먹거리도 참 건강식입니다.
모든 면에서 분에 넘치게 만족하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최: 네, 정지석박사님. 오늘 인터뷰 고맙습니다.
퀘이커를 한마디로 표현 한다면 ‘좋은 사람’ 동시에 ‘좋은 기독교인’ 이란 말이 있던데 이 말이 맞는 것 같네요.
오늘의 만남을 퀘이커의 침묵 기도로 끝냈으면 합니다.
정: 네, 좋은 대화 감사합니다.
잠깐 침묵하고 마치겠습니다.
파주 '온생명교회' 에서 2019 5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