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1/12

기독교는 사회주의, 공산주의에 가까운가? : 교회일반 : 기독일보



기독교는 사회주의, 공산주의에 가까운가? : 교회일반 : 기독일보

기독교는 사회주의, 공산주의에 가까운가?
기독일보 노승현 기자 (shnoh@cdaily.co.kr)

입력 2019. 05. 22


기독교의 복음을 사회주의, 공산주의의 이념과 비슷하거나 동일하게 보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공산주의는 말만 꺼내도 알레르기 반응을 보일테니, 일단 사회주의에 대해서만 보자. 사전적 정의로 보면, 사회주의란 인간 개개인의 의사와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기 보다는 사회 전체의 이익을 중시여기는 이데올로기이다. 또 사회사상으로서 볼 때 자본주의의 경제적 원리인 개인주의를 사회주의로 대치함으로써 사회를 개조하려는 사상 또는 운동이다. 사전만 좀 뒤져봐도 쉽게 정리가 되지 않는가? 그런데 여기 저기서 주워 들은 이상하고 잡다한 지식들로 머리 속을 채워 놓고 있으니 더 복잡해지기만 하고, 더 문제만 만들게 된다. 그러니 너무 복잡해지지 말자.

이렇게 정리하면 간단하다. 성경은, 기독교의 복음은 개인을 강조하느냐? 사회를 강조하느냐? 정답은 무엇일까? 개인도 강조하고 사회도 강조한다. 바로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개인만 강조하면 문제가 간단할텐데, 아니면 사회만 강조해도 문제가 간단할텐데, 개인도 강조하고, 사회도 강조하니 문제다. 그러니 개인만 강조하는 이들도 복음적, 성경적이지 않은 것이고, 사회만 강조하는 이들도 복음적, 성경적이지 않은 것이다. 극단으로 치우치면 항상 문제가 된다. 개인주의이든, 자유주의이든, 사회주의이든, 공산주의이든, 극단적인 '이즘(ism)'으로 빠지면 지옥 문이 열리는 것이다.



기독교는 개인에 대한 강조에서 출발한다. 기독교의 신앙 자체가 철저하게 개인적인 것이다. 이스라엘의 문제는 개인적 신앙을 잃어버리고 집단적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자신이 이스라엘로, 유대인으로 태어났다는 것으로 자신이 이미 구원 받은 선민이라고 여겼다. 그런 사고가 구약의 긴 시간을 지나며 아주 무쇠처럼 굳어졌다. 세례 요한이 깨뜨렸던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광야의 외치는 목소리인 그는 유대인들을 향해 "네가 유대인의 혈통에서 태어났다고,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구원 받은 선민이라고 여기지 말라"고 했다. 특정 집단에 소속되었다고, 특정 교회에 소속되었다고, 부모가 장로 권사라고 내가 구원 받은 것이 아니다. 구원은 내가 하나님 앞에서 인격적인 믿음으로, 결단으로 개인적으로 받아야 한다. 개인이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니고, 개인이 없는 기독교는 기독교가 아니다. 그러니 기독교는 분명히 사회주의, 공산주의와는 거리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기독교는 사회에 대해서도 강조한다는 것이다. 개인은 개인으로 끝나지 않고, 공동체를 이루고, 집단을 이루고, 사회를 이루고, 국가를 이룬다. 공동체 안에 있는 나, 집단 안에 있는 나, 사회 안에 있는 나, 국가 안에 있는 나다. 특히 구약의 이스라엘은 공동체 사회였고, 공동체를 강조했다. 그들이 이방인이나 이방국가와 다른 것도 바로 유별난 공동체성이었다. 우리가 흔히 예수 공동체라는 말을 쓰는데, 예수님과 제자들도 공동체를 이루어서 살았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공부하면, 공동체라는 말과 익숙해질 수 밖에 없다. 교회도 각각의 지체들이 하나로 연결된 그리스도의 몸, 공동체다. 예수님이 원하셨던 것도 영혼 구원과 함께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이었다. 개인의 구원만 아니라 사회의 구원, 역사의 구원, 우주의 구원까지 원하셨던 것이다. 구원론에 대한 책이라 할 수 있는 로마서에서도 바울은 개인의 구원과 함께 우주의 구원을 논하고 있다. 그래서 진정한 기독교인은 결코 개인에 매몰될 수 없다.

하지만 성경을, 복음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한 면만 보는 이들은 극단적인 개인주의나 자유주의에 빠질 수도 있고, 극단적인 사회주의, 공산주의에 빠질 수도 있다. 이들이 지금 한국교회를 혼란과 분열과 갈등과 싸움으로 내몰고 있고, 오늘날 한국 사회의 혼란에도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기독교의 시작은 인간은 죄인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모든 문제의 시발점이고 뿌리다. 인간이 죄인이기에, 아무리 완벽한 체제나 시스템이 있다 해도 문제가 발생한다. 그래서 진정한 기독교는 체제나 시스템 이전에 인간의 변화에 초점을 둔다.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에 우호적인 기독교인들은 인간의 죄성에 대해 법과 제도로 강제하려 하지만, 그것은 구약적인 것이고 율법적인 것이다. 신약은, 복음은, 예수께서는 이 문제에 대해 철저하게 개인의 자유에 맡기셨고 사랑에 호소하셨다. 강제로, 강압으로, 완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으셨다. 법과 제도를 강조하는 이들은 신약에서 구약으로, 성령에서 율법으로, 자유에서 멍에로, 사슬로 돌아가는 것이다. 성령으로 시작해서 육체로 마치겠는가? 우리는 지금 신약의 시대, 새 시대에 살고 있으니 어렵고 힘들어도 복음으로, 성령으로, 자유로 문제를 풀어야 한다. 그것이 예수께서 십자가에 피 흘리심으로 열어낸 세계, 새 시대 아닌가? 예수의 피 흘림을, 죽음으로 열어내신 새로운 세계를 헛되게 할 것인가?

지나친 개인주의, 자유주의에 빠진 이들도 문제지만, 오늘날 사회주의를 선호하는 기독교인들의 문제는, 사회주의 이념과 방법론을 복음과 동일선상에 두는 것이다. 복음으로, 성령으로 개인을 회심시켜 세상의 변화를 가져오려 하기 보다, 법과 제도로, 시스템으로 강제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과 제자들은 어떠했는가? 당대의 자본가였던, 오늘날의 친일파 같은 친로마파였던, 동족의 돈을 착취하던 악마 같은 삭개오에게 찾아가셨던 예수님처럼, 자본가들에게 찾아가서 복음을 전하라. 그래서 그들의 마음에 예수의 피를 심고, 십자가를 심고, 복음을 심고, 사랑을 심어 그들을 변화시키라. 삭개오처럼 자유로, 자발적으로 내어놓게 하라. 그리고 자신의 모든 것을 비우고 나누고 섬기며 살아가는 예수의 밥상공동체의 일원이 되게 하라. 그것이 바로 예수께서, 제자들이, 예수공동체가 갔던 길이었다. 결국은 그 자유의 복음이 당시 적폐의 온상인 황실까지 침투해들어갔다. 그리고 왕족이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났다.

미국에서 최근 흑인 중에 가장 부호인 억만장자가 졸업식 연사로 등장해 졸업생들의 대출금을 자신이 다 내주겠다고 해 화제가 되고 있다. 억만장자의 돈을 억지로, 강제로 빼앗아서 졸업생들에게 나누어주었다면 무슨 감동이 있겠는가? 그것을 아름답다고 하겠는가? 자신이 스스로 내놓으니 감동이 있다. 자유로, 자유의지로, 자발적으로, 성령으로, 복음으로 해야 아름답고 감동이 있다. 그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친 것이고, 예수의 길이었다. 교회가 이 흑인 부호가 하는 일만 못해서야 되겠는가? 예수께서는 세상을 위해 돈만, 소유만이 아니라 자신의 생명까지 내어주지 않으셨는가?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법과 제도로 강제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자발적으로.

물론 구약에서 율법과 제도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강제함이 있었지만, 그것은 세속 공동체가 아닌 신앙 공동체, 종교 공동체인 이스라엘 안에서 가능했던 것이다. 불신자들로 가득한 세상 안에서 그러한 구약의 종교적 율법을 강제한다면, 오히려 개인의 신앙과 양심을 존중한다는 헌법의 기본정신에 위배되는 것이다. 사회주의를 주장하는 이들 중에는 기독교 학교에서도 채플에 참석하지 않을 자유를 존중해야 한다고 하는 이들이 많은데, 정작 불신자들에게 구약에 나오는 기독교적 법과 제도는 얼마든 강요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이다. 주장에, 논리에 일관성이 있어야 설득력이 있다. 또 우리가 계속 법과 제도를 강조하는 것은, 인간의 변화에 있어서 구원의 능력인 복음에 대한 자신이 없다고 고백하는 것과 같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예수님의 피로 우리에게 충분하지 않다고 하는 것이다.

복음을, 예수의 십자가의 능력을, 예수의 피의 능력을 모르는 불신자들이라면 모르겠지만, 그 능력을 이미 알고 직접 맛보고 체험까지 해본 기독교인들이 자유와 성령과 사랑의 복음이 아니라 법과 제도로 세상을 바꾸려고 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물론 법과 제도로 강제하는 일은 아주 빠르고 쉽지만, 문제는 그것으로는 결코 인간의 마음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세상도 변화되지 않는다. 그래서 어렵고 힘들더라도 사랑으로 설득하고, 자유로, 자발적으로 변화되게 하는 길을 가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교회 안에서부터 변화를 만들어 세상을 바꾸는 길로 가야 한다. 기독교인들이 있는 교회에서 되지 않는 것을 불신자들로 가득한 세상에서 가능하게 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구원 역사도 아브라함 이후 6천 년이라는 세월이 흐르고 있다. 하나님도 쉽게 이루지 못하는 것을 인간이 쉽게 이룰 수 없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순리대로 가야 한다. 개인의, 그리고 교회의 변화가 먼저다. 불신자들을 변화시켜 교회의 일원이 되게 하고, 내 안에, 교회 안에 이루어진 하나님 나라가 온 세상으로 확장되게 해야 한다. 자신도, 교회도 이루지 못한 것을 불신자에게, 세상에 법과 제도로 강제하지 말라. 그리고 이 시대의 기독교인은, 교회는 신약의 시대를 확장시키기 위해 존재하지, 구약으로 회귀하려고 존재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