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1/09

한국 퀘이커 이행우 - 미국 정치인 만나다 로비스트로 오해 받기도 - 오마이뉴스

 미국 정치인 만나다 로비스트로 오해 받기도 - 오마이뉴스

미국 정치인 만나다 로비스트로 오해 받기도

[인터뷰] 한겨레통일문화상 수상자, 이행우 선생

11.06.18 15:50l

최종 업데이트 11.06.18 16:27l

김성수(wadans)

 시상식에서 인사하는 이행우 선생
▲  시상식에서 인사하는 이행우 선생
ⓒ 곽봉수




번 돈 모두 한반도통일운동에 써



1985년 나는 함석헌 선생님을 쫒아서 서울퀘이커모임에 처음 나갔다. 나가고 얼마 안 되어서 한 중년의 재미동포가 서울퀘이커모임을 미국에서 방문했다. 이 중년의 재미동포가 모임에 나올 때는 건장한 사람들이 모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또 모임 집 전화도 잡음이 심했다. 전화도청을 하는 것 같았다.



서울퀘이커모임에 당시 재야인사 함석헌 선생님이 매주 나오시고 전두환 정권하이니 그러려니 했다. 그리고 이 중년의 재미동포는 한 번 서울퀘이커모임집에서 '북한방문기'를 이야기 해주었다. 달변은 아니었고 말씀은 어눌했지만 그 내용은 놀라웠다. 그 중년의 재미동포가 이행우 선생님이고 그와 나와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 후에도 이행우 선생님은 매년 한국을 방문해서 당시 '철없는' 나에게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이행우 선생님이 1968년부터 미국에 사셨으니 그가 미국에 산 지는 43년이 된다. 미국에서 컴퓨터전문가로 직장생활을 하셨고 65세가 정년인 미국 직장에서 2003년인 73세에야 현업에서 은퇴했으니 그 실력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지금 집 한 채 가진 것이 없다. 미국에서 34년간 컴퓨터전문가로 일한 그지만 가진 재산도 없다.



그는 34년간 컴퓨터전문가로 일하면서 모든 휴가와 돈을 한반도평화통일운동에 썼다. 휴가를 내서 단란하게 가족과 여행가는 대신 그는 자비를 털어 한반도문제를 분석한 보고서를 냈고, 한국의 민주화운동가를 도왔으며, 미국정치인들과 관리들을 수시로 방문했다. 또 중국, 북한, 유럽을 방문해서 조국의 평화통일과 긴장완화를 위해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설득했다. 문자 그대로 '공생애'를 산 것이다. 그래서 그를 잘 모르는 한 일본인은 이행우 선생이 '전업로비스트' 인 줄로 오해하기도 한다.



진주목걸이를 이어주는 실 같은 사람



이행우 선생님은 달변가가 아니다. 그러나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 분석력과 종합력, 거시적 미시적 시각에 감탄이 저절로 나온다. 보통 분석력이 뛰어난 사람은 종합력이 떨어지고, 큰 그림을 잘 보는 사람은 세밀한 것을 놓치기 쉽다. 그러나 이행우 선생은 이 둘을 다 잘한다. 그러나 그의 가장 큰 무기는 '진실함'이다. 지난 6월 17일 이행우 선생은 제17회 한겨레통일문화상을 받았다.



이 기사를 준비하면서 나는 지난 1주일간 이행우 선생님을 전보다 훨씬 긴 시간 동안, 자주, 수시로 만났다. 그를 만나면서 이행우 선생님이 아름다운 '진주목걸이를 이어주는 실' 같은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진주목걸이가 그 아름다움을 뽐내고 한 여인의 목에 당당하게 걸릴 수 있는 것은 그 진주 하나하나 속을 관통하여 이어주는 가느다란 '보이지 않는 실' 때문이다. 다음은 이행우 선생님과 지난 일주일간 만나며 나눈 대화를 정리한 것이다.



- 먼저 수상을 축하드린다. 그동안 한국 민주화운동, 남북한 긴장완화, 한반도 평화통일에 공헌하셨기에 이번 한겨레 통일문화상을 받았다. 1974년 한국민주화운동인사들의 가족을 돕기 위해 '한국수난자가족돕기회'를 결성하면서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에 뛰어들었는데 당시 구체적으로 어떻게 민주화운동인사들과 그 가족들을 도왔는가?

그분들을 위해 송금을 해 주는 것이 우리의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민주화운동인사들이 거의 수입이 없는 실업상태였기 때문에 재미동포들에게 모금활동을 하여 국내에 돈을 보냈다. 그러나 모금과정에 기부자 이름이 드러나면 동포들이 한국정부로부터 불이익을 받을 우려가 있었다. 그래서 동포들 중엔 이에 예민하게 반응한 사람도 있었다. 그래서 후원금 낸 분들의 신분을 노출하지 않으면서 장부나 재정보고서를 만들었다. 예를 들면 '시카고의 김00' 이런 식으로 처리했다.



- 박정희 정권의 견제가 있었을 텐데 송금은 어떻게 했나?

초대회장 김순경 박사가 가톨릭교도인 관계로 미국에 있는 가톨릭 메리놀 선교회를 이용했다. 한국에 그 지부가 있었다. 그래서 미국 메리놀 선교회에 돈을 기탁하면 거기서 한국 메리놀 선교회로 보냈고 한국 선교회에선 그 돈을 지학순 주교에게 전달했다. 그러면 지 주교가 수감자나 가족에게 돈을 전달했다. 그러다 보니 수혜자 중엔 가톨릭교도가 많았다. 그래서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그 다음번엔 메리놀 선교회를 통해 문익환 목사에게 보냈다. 그러면 이번에는 개신교 수혜자가 많았다.



나중엔 함석헌 선생에게 보냈고 함석헌 선생이 지인을 통해서 대체로 균형 있게 수감자나 가족에게 돈을 전달했다. 가정형편이 어려운 분들 중에서도 특히 감옥소 앞에서, 시골에서 면회 온 수감학생 가족들에게 직접 돈을 쥐어주는 경우가 더 많았다. 당시 수혜자 중엔 동아투위 기자나 해직교수 등도 있었다. 기부자와 수혜자 명단 등 기록을 후에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 기증했다.



- 보낸 액수는 얼마나 되나?

당시 한국에서 가구당 한 달 생활비가 약 100불 정도 필요했다. 최대 많이 보낸 것은 1년에 약 8천불정도였다.



- 북한은 반미감정이 팽배한 국가다. 그리고 AFSC는 미국의 NGO 단체로서는 최초로 북한을 방문한 단체다. 어떻게 이러한 예외적인 일이 가능했는지, AFSC는 어떤 단체인가?

AFSC는 American Friends Service Committee 의 약자로 미국퀘이커교 봉사단체다. 미국과 영국의 퀘이커들은 제2차 세계대전 때 전쟁터를 찾아다니며, 내 편 네 편을 가르지 않고 구호봉사 활동을 폈다. 이를 평가 받아 AFSC는 1947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아마도 그러한 경력이 북한의 신뢰를 얻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AFSC가 북한과 교섭하는 데 7-8년이 걸렸다. 처음에는 일본 동경에 있는 AFSC 지부가 조총련을 통해서 북한과 교섭하는 한편, 동시에 뉴욕에 있는 퀘이커유엔사무소(QUNO)가 북한유엔대표부를 통해서 북한과 교섭을 시도했다. 이러한 과정에 7-8년이 소요됐던 것이다.



- 1986년 한겨레미주홍보원을 설립, 영문 'Korea Report'를 발간하여 대미홍보와 국제연대 활동을 하셨고, 1987년엔 미국의 지인들과 한국지원연대(Korea Support Network)를 결성, 한국 민주화운동을 지원하고 홍보하셨다. 당시 미국사회나 의회의 반응은 어땠나?

우리가 이 보고서를 발간하기 전엔 한국문제를 분석한 영문 자료가 전혀 없는 상태였다. 그래서 미국 고위관리, 정치인, 학자들이 아주 흥미로워했다. 당연히 우리 보고서는 정말 미국에서 인기가 있었다. 수신자는 미국의 모든 국회의원, 고위관리, 연구소 연구원들이었다. 상황에 따라 일정하지는 않았지만 처음엔 계간으로, 다음엔 격월간으로, 월간으로 발행하기 위해 애를 썼다. 인문사회학을 공부한 한국 분 4-5명이 거의 전적으로 상근하다시피하면서 이 보고서 발간에 온 시간과 정열을 쏟아 부었다. 공병우 박사, 임창영 박사, 브루스 커밍스 교수, 정경모 선생 등이 고문으로 애써주셨다. 당시 한국 상황에 대한 영문분석 자료가 없는 풍토에서 우리가 발간한 보고서가 미국사회에 대단히 큰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 북한대표들은 미국 내 여행이 자유롭지 못하다고 들었다. 1988년에 당시 미국주재 북한유엔대표가 선생님 댁에서 머물렀다고 들었는데,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는가?

북한대표들은 미국 내에서 행동이 자유롭지 못하다. 뉴욕 콜럼비아 서클 밖 25마일 이상을 벗어날 경우 미 국무성의 허가가 필요하다. 이동의 제약이 많다. 그러나 아무래도 퀘이커들이 10여년 이상 북한과 미국 양국정부로부터 동시에 신뢰를 쌓아서인지 미국정부에서 허가해 주었다. 북한대표들은 우리 집에서 2박 3일을 지내며 여러 가지 대화도 나누었고 이곳저곳을 방문했다.



1989년 문규헌 신부와 함께 방북



- 1982년 AFSC 대표로 방북하셔서 한반도 통일문제, 조미관계 개선문제, 북조선대표단 초청문제 등을 협의하셨다. 그리고 1989년엔 방북한 임수경 학생이 문규헌 신부와 함께 군사분계선을 넘어온 일이 있었는데, 그 때 선생님께서도 문 신부와 함께 방북하신 것으로 안다. 그 때 상황을 좀 말씀해 달라.

문규현 신부 방북 이전에 개신교 문익환 목사가 방북했는데 여기에 대해서 가톨릭도 방북할 필요를 느꼈던 것 같다. 당시 문 신부는 미국에 유학중이었다. 그래서 한국 가톨릭에서는 미국에 있는 문 신부를 북에 보내고자 했다. 그래서 문 신부와 한국말이 유창한 미국인 조셉 베네로스 신부(한국이름 배종섭)가 가기로 했는데 초행길이라 북한에 한번 가본 경험이 있는 나에게 함께 가자는 요청이 왔다. 그래서 문 신부, 조셉 베네로스 신부,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이, 함께 방북했다. 미국으로 돌아온 직후, 가톨릭교인 임수경 학생의 판문점 귀환 일이 발생했고, 이 일로 문 신부가 다시 방북하여 임수경 학생을 데리고 판문점을 넘어 오게 되었다.



- 89년 당시 북한에 대한 인상이 어땠나?

82년 방북 땐 정말로 북한을 지상낙원으로 생각하는 북한 인민이 많았다. 그런데 89년엔 사회분위기가 많이 달라져 보였다. 북한을 지상낙원이라 말하는 이들이 많지 않았다.



- 1990년 1차 범민족대회로 세 번째 방북하셨고,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결성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하신 것으로 안다. 남한정부는 현재까지도 범민련을 이적단체로 여긴다. 남한정부의 이러한 조치에 대한 입장은?

87년에 문을 연 평화연구소의 조성우 소장이 세계평화대회를 개최하자고 제안한 데서 범민련이 시작되었다. 재야 평화세력은 88년 서울올림픽에 맞춰 세계평화대회를 조직, 성균관대에서 개최했다. 이런 흐름에 맞불을 놓으려고 노태우 정권도 올림픽 평화대회를 개최했다. 성균관대에서 열린 재야의 세계평화대회가 "범민족대회"를 제안했고, 89년에 남·북·해외(미주, 유럽, 일본) 등이 각각 추진본부를 결성해 서로 협력하는 가운데, 90년 6월에 제1차 실무회담이 베를린에서(해외와 북), 7월에 제2차 실무회담이 서울에서(해외와 남), 8월에 제3차 실무회담이 평양에서(해외와 북) 열렸으며, 드디어 8월 15일에 연세대(남)와 판문점(해외와 북)에서 각각 범민족대회를 개최했고, 여기서 "범민련"을 제안하고 합의하여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정부가 태도를 바꿔 범민련을 이적단체라고 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조치다.



- 노태우 정권이 퇴진하고 김영삼 문민정부가 들어서자 미국동포운동의 내용과 방향이 달라져야 한다는 인식에서 "미주동포전국협회"를 결성하여 미 의회 로비, 북과의 교류, 동포사회 홍보 등의 활동을 했는데, 이 협회의 결성목적과 당시 느낀 소회나 애로사항은?

미주동포전국협회는 미국 입법부와 행정부를 설득해 한반도 긴장완화에 도움을 주자는 것이 목적이었다. 과거 중국의 '죽(대나무)의 장막'을 개방, 포용할 때라든가 월남전 종식 때라든가 미국 퀘이커들이 중재자 역할을 했는데, 여기서 힌트를 얻어 남북문제에도 미국 퀘이커들이 중재자 역할을 해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남북 정책결정자들을 만났는데 양쪽의 의견이 같았다. 그 의견의 요점은 재미동포는 미국정부를 설득하는 활동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북한 측에서도 미국정부를 설득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양쪽의 의견이 이렇게 같았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미주동포전국협회였다. 협회 결성 시 네 가지 목표를 가지고 출발했다. 표면적인 순서로 보면 먼저 재미동포의 인권과 권리 신장, 미국 내 우리 문화의 보급, 미국 내 소수민족과의 연대와 평화 활동,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북통일 기여 등이었다. 미국정치인들에게 내용적으로는 로비를 했으나, 로비스트로 등록을 하면 비용이 많이 들어서 등록하지 않은 상태에서, 한국문제에 관한 교육과 홍보를 위해서 만나고 싶다고 하면서 만났는데, 의외로 미국 정치인들이 잘 호응해 주었다.





 미주연합 회원들과 함께. 가운데가 이행우 선생▲  미주연합 회원들과 함께. 가운데가 이행우 선생ⓒ 이행우




 미주연합 회원들과 함께. 가운데가 이행우 선생

▲  미주연합 회원들과 함께. 가운데가 이행우 선생

ⓒ 이행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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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5년 미주평화통일연구소를 설립했고, 1998년에는 자주민주통일미주연합을 설립했는데, 이 기구들의 설립이유, 주요역할, 성과가 무엇이었나?

미국운동의 중심과제가 통일문제로 옮아가자 이론의 개발이 절실했다. 이에 따라 1995년에 미주평화통일연구소(98년 통일학연구소<한호석 소장>로 개편)를 설립했다. 또 북미주조국통일동포회의(1998년 자주민주통일미주연합으로 확대)를 결성했다. 말한 대로, 이론적 뒷받침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남북 및 해외 동포들 사이에서 좋은 반응들을 얻고 있다. 자주민주통일미주연합은 주로 남북의 통일운동단체들과 연대활동을 하고 있다.



- AFSC가 노벨평화상을 받은 바 있고, 그래서 한국인 노벨평화상 후보자로 김대중 전 대통령을 추천했다는 것이 사실인가?

아니다. 추천하지 않았다. 퀘이커들은 정치인을 노벨평화상후보로 추천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갖고 있다. 그러나 1979년과 85년엔 함석헌 선생을, 1992년엔 문익환 목사를 추천한 바 있다.



- AFSC 아시아지역위원회, 국제실행위원회, 예산위원회 위원으로 24년간 활동 하였고, 또한 앞에서 말한 단체 등을 통해 미국 사회의 행정부, 입법부에 대화통로를 마련하신 바 있다. 한반도 통일문제, 북한문제, 북미관계 개선을 위해 꾸준히 일해 오면서 대북관계에 대해 미국정치인들과 고위관료들의 대응방안이나 태도를 보셨는데 어떻게 평가하는가?

공화당에도 강경파와 온건파가 있고 민주당에도 강경파와 온건파가 있다. 이들은 다 한반도 문제를 잘 아는 전문가들이다. 공부를 많이 한다. 이들은 표면적으로는 남북의 평화통일을 원한다고 한다. 그러나 냉철한 국익 우선주의자들이다. 똑바로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한국의 미래는 이들 손에 놀아날 것이다. 나는 이들에게 한국이 잘되는 길이 미국이 잘되는 길이고 미국 이익에 도움이 된다고 설득했다.



"미 한반도전문가들 자국이익 우선...정신 차려야"



- 선생님의 노력과 주도로 2004년 미 의회에서 1차 남북미 3개국 의원포럼을 개최했고, 그 후 2009년과 2010년에도 2, 3차 남북미 3개국 의원포럼을 개최했는데 그 주요내용은 무엇이고 포럼의 성과를 평가한다면?

미 의회의 협조 또는 상원 외교위원장 초청 형식으로 한반도 문제에 관한 포럼을 여러 차례 조직하여 성과를 거두었다. 2004년 7월 20일 미 의회에서 처음 열린 3개국 의원포럼에는 남측에서 이창복, 장영달, 강혜숙, 김재윤, 서병열 의원, 북측에서는 박길연 대사, 한성렬 부대표, 미국 측에서는 Joe Biden(현 부통령), Curt Weldon 의원, 민간전문가로서는 Donald Gregg(전 주한 미대사), Don Oberdorfer, Marcus Nolans, Jack Prichard, Richard Solomon, Jon Wolfsthal, 박한식 등이 참여했다.



2009년 9월 14일과 2010년 7월 27일의 포럼에는 한국 측에서 백낙청, 오재식, 박원순, 이문숙, 김상근, 정현백, 김연철 등이, 미국 측에서는 Eni Faleomavaega, Joel Wit, John Feffer, Frank Jannuzi, Keith Luse, Scott Snyder, Karin Lee, J.J. Ong, John Park, Dennis Halpin, 오인동 등이 참여했다.



행사를 일부러 의회에서 하고 정치인들을 초대했는데 우리 의도는 한반도 문제가 언론의 관심과 주목을 받게 하는 것이었다. 이런 우리 계산은 적중했다. 정치인들이 국회에서 참여하는 포럼이라 미국, 한국, 중국, 일본의 언론인 40명 정도가 와서 취재경쟁을 했다. 그리고 워싱턴포스트 등 주요언론에서 우리 포럼을 크게 다루었다.



또 다른 우리의 목적은 미국 입법부를 통해 대북강경 정책을 취하고 있던 행정부를 견제하고 압력을 넣는 것이었다. 그 덕인지 당시 경색되어 있던 북미관계가 완화되고 북미 간 대화창구 개통에 도움을 준 것으로 생각한다.



- 한반도 문제를 풀기 위해 적극적으로 미 의회와 정책담당자에게 로비활동을 하면서 느꼈던 어려움과 또 보람은 무엇이었나?

미국 관리와 정치인들을 만나기가 어려웠다. 정치인들은 '돈'이나 '표'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인데, 나는 이 둘 다 없기 때문이다. 내가 취한 방법은 그들을 수시로 방문하는 것이었다. 1년에 20회 이상 의회를 방문한 적도 있다. 그러다보면 그들과도 친해진다. 휴대폰 번호, 나중엔 집전화번호도 준다. 그것은 언제든지 심지어 주말에 연락해도 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되려면 몇 년 걸린다. 아마 내 나이가 자기 아버지 나이라 인간적으로 미안해서 그런 것 같다. 하여간 나중에 친해지고 맘도 통해서 남북문제 이야기를 하면 진지하게 경청한다. 보람은 바로 그들에게 남북문제를 이해시키는 것이고 그들이 내 말에 동의할 때다.



- 선생님 좌우명은? 남북한의 평화통일을 지향하기 위해 한국 정부에 주고 싶은 조언은?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절대로 미국이나 주변 나라들이 남북을 위해 나서지도 않고 해결해 주지도 않는다.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를 규정해온 어설픈 국제관계론이나 한미혈맹론의 망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는 지난 100년간 외세의 영향을 받아왔다. 이제는 우리 스스로 나서서 우리 문제를 풀어야 한다. 나는 우리 민족이 반드시 풀 수 있다고 확신한다.



우리는 지난 김대중, 노무현 정부 10년 동안에 우리의 힘과 능력을 확인했다. 우리도 우리 힘으로 우리 문제를 풀어갈 수 있다는 것을 경험했다. 이 위대한 힘과 의지를 다시 찾아 발휘해야 한다. 다가오는 총선과 대통령 선거가 중요한 까닭이다. 보수특권정당의 집권은 그들의 본색을 확연히 드러냈다. 평화와 통일지향적인 세력이 다시 집권하여 10년 동안 발전시켜온 역량과 성과를 되찾아 확실하게 구조적으로 매듭을 지어야 한다.



나의 좌우명은 역행(力行)이다. 힘써 행하라! '지금 여기서'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계획을 세우는 것도 필요하다. 하지만 동시에 지금 당장 여기서 필요한 일을 성심성의껏 부족한 대로라도 온힘을 다 해 하는 것이 중요하다.



* 이행우 선생의 미주민족운동의 오랜 동지이며 시사평론가인 은호기 선생의 말로서 이 기사를 맺는다.



"이행우는 검소하고 성실하며, 옳은 일에 대한 주장을 확실히 하면서도 타협점을 찾는데 인색하지 않다. 앞에 나서기보다는 뒤에서 일하는 편이며, 일의 성과를 나타내는 데에는 매우 절제적이다. 그의 성품이기도 하지만 퀘이커 교인의 정신이기도 하다."



** 이행우 선생: 1931년 1월 3일 전북익산 생. 1955년 서울대 물리과대학 수학과 졸업, 그 해에 해군장교에 임관, 해군사관학교에서 수학 교수. 1957년 군복무를 마치고 이리 남성고등학교, 서울 동북고등학교, 숭문고등학교에서 수학 교사, 한양대학교 출강. 종교는 퀘이커교. 1968년 미국퀘이커교단 초청으로 유학, 퀘이커교육기관인 펜들힐(Pendle Hill)에서 일 년간 퀘이커교에 대하여 공부. 공부를 마치고 미국 필라델피아에 정착, American Bank(1969-1979), Burroughs Corp.(1979-1980), Polymer Corp.(1980-1986), Delaware Investments(1986-2003) 등에서 Systems Analyst로 근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