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1/09
18 김조년 - 일상생활에서 퀘이커 신비(주의)와 도가의 신비(주의)의 만남 - 새로운 종교를 찾기 위하여
Backhouse Lecture 2018
일상생활에서 퀘이커 신비(주의)와 도가의 신비(주의)의 만남
- 새로운 종교를 찾기 위하여 -
김 조 년(Cho-Nyon Kim)
* 왜 나는 이 강의를 맡았는가? 모든 것은 변하고 또 변한다. 물질세계와 정신세계에서 항상 경험하는 것이 변화다. 관점도 달라지고, 세계도 달라진다. 민족도 국가도 종교도 철학도 그 내용이 달라지면서, 그것을 보는 관점도 달라진다. 달라짐은 때때로 있던 것들이 사라짐이지만 동시에 새로 운 모습으로 확장되는 것이요 풍부하여짐이다. 그래서 동시에 사라질 것은 사라지고 새 로운 것은 덧붙여진다. 이러한 현상은 종교에서도 마찬가지다. 전통과 정체성의 문제이 면서 새롭게 첨가되는 깨달음의 문제이기도 하다.
나는 퀘이커를 만난 뒤부터 퀘이커의 정체성이 무엇인가를 찾으려고 노력했다. 이러한
노력은 어떤 것도 규정하거나 기준이나 신조를 만들려 하지 않는 퀘이커의 전통과는 아 주 먼 시도였다. 그러나 내가 퀘이커의 회원으로 정식 등록 된 뒤에도 이에 대한 노력을 끝없이 가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퀘이커 됨이란 무엇인가를 내 스스로 알고 있어야 하 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가 이미 형성된 퀘이커됨의 자리에 들어가기 위하여서가 아니라, 찾는 자(seeker)로서의 진지한 자세가 그렇게 나타난 것이라고 본다.
그렇게 노력할수록 퀘이커들이 주장하고 살아가는 것들이 내게 구체적으로 잡히기보다
는 모두 추상적이었다. 막연하였다.
예를 들면, ‘내면의 빛’ ‘내면의 소리’, ‘내 안에 계신 그 님’. 퀘이커들이 말하는 이런 것들은 어려서부터 불교와 유교와 도가와 한국 고유의 생활(민속)종교 속에서 살아왔던 우리 어른들에게서 들었던 ‘옥황상제’, ‘용왕’ ‘염라대왕’이나 ‘극락’ 또는 ‘서방정토’ 따위, 또는 기독교인이 된 뒤 수도 없이 많이 들어온 ‘하느님’, ‘성령’, ‘메시아’, ‘그리스도’, ‘구 원’, ‘해방’이나, 도가(道家)에서 말하는 ‘도’(Tao), ‘진인’(眞人), ‘자연’ 또는 불가(佛家)에 서 말하는 ‘내 안의 부처’나 ‘성불(成佛; 부처가 됨)’, 해탈 등이 모두 추상적으로 다가왔
다. 아무 것도 손에 잡히는 분명한 것이 없었다. 다만 이러한 추상개념들은 일상생활과 매우 접한 관계가 있을 것이란 생각은 분명하였다.
그래서 그런 개념들의 설명이나 이해보다는 좀 더 일상생활과 긴 한 관계가 있다는 퀘이커들의 생활태도에 대해서 더 끊임없이 궁금하였다. 다시 말해서 퀘이커가 매우 좋 아하고, 모두가 실천하려고 하는 말들, 즉 평화(Peace), 단순함(Simplicity), 평등 (Equality), 컴뮤니티(Community), 진리(Truth),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 진실 (Integrity) 등도 이해하기가 참으로 힘들었다. 이것들 역시 이해하고 실천하기에 매우 쉽지가 않다. 그 말들에 대해 매우 깊은 매력을 느끼지만, 그것들을 생활에 적용하여 실 천하려 할 때 매우 추상적인 것으로 다가왔다. 그것들은 상황과 관계 안에서 이루어진 것들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복잡해지고, 생활공동체는 깨지고, 평화보다는 다툼과 전쟁의 위험으로 가 득하고, 통합과 함께하는 삶보다는 분별, 분열이 가득하고, 점점 더 차등이 심화되며, 자 연파괴를 넘어 생명의 종말을 촉구하는 문명의 발달과 사건들이 많아지는 이 때에 이런 퀘이커의 전통처럼 내려온 삶을 실현할 길이 어디에 있는가? 특히 가장 단순하게 산다는 것이 곧 복잡하고 화려하게 살도록 규정된 현대문명사회에서 어떻게 그 삶의 전통을 지 키면서 살 것인가 하는 문제는 더욱 크게 다가왔다.
세계는 전과 같이 민족과 나라와 지역을 넘어 인류를 생각하고 전 지구를 하나로 보며 문화의 융합과 공존을 꾀하는 지금, 어느 한 종교의 종파성을 주장하고 추구하는 것은 이미 한계를 넘었다고 본다. 퀘이커는 어떤 종파성에 얽매는 것을 벗어나려는 노력을 끊 임없이 하여 왔기 때문에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옷을 입어야 함은 물론 중요하다. 이러한 때 동양의 고전 중에서 가장 평화롭고, 단순하며, 일반적이고 일상적인 것을 아 끼고 귀하게 보며, 형식과 규범을 넘어 자연(도)에 따라 살아가는 삶을 주장한 도가의 이론과 삶을 찾아보는 것은 퀘이커 종교성 확장에 의미가 있다고 본다. 그것들을 비교하 는 것이 아니라 퀘이커를 보충하거나 확장하기 위하여 도가의 영성, 또는 신비를 살피는 것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영성과 신비는 일상생활에서 만나는 사건들에서 들어나기 때 문이다.
그러기 위하여 우선 내가 낳고 자란 한국사람들의 일반적 종교생활, 종교성과 나의 성
장을 살펴보고, 한국사회를 오래도록 이끌어 온 유교, 불교, 민속종교들의 진화와 새로 들어온 기독교의 토착과정을 간단히 살핀 뒤, 퀘이커가 추구하는 것들과 도가에서 추구 하는 핵심점들의 만남을 살펴본다. 그런 다음에 이 두 가지를 조화롭게 살아간 한국의 초기 퀘이커 중 한 사람인 함석헌의 삶과 사상을 살핀다. 마지막으로 퀘이커로서의 내 삶의 방향설정에 대해 이야기를 해 본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주로 질문 형태로 정리 될 것이다. 그것은 바로 나의 주장이 아니라 내 궁금함의 표현이다. 이것은 나의 퀘이커 됨을 새롭게 정립하고자 하는 요구이다. 이것은 동시에 미래의 퀘이커를 걱정할 만큼 젊 은 퀘이커들이 현격하게 줄고, 퀘이커들의 노화현상은 바로 직면한 문제다. 이것은 퀘이 커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가 경험하는 현상이다. 그러한데도 많은 사람들은 바로 퀘이커 가 새로운 시대에 맞는 종교라는 것을 인식하고, 그것에서 어떤 새로운 길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그것은 바로 전통적 퀘이커를 선전하고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 자기가 가지고 있는 문화전통과 종교전통의 진수와 퀘이커의 진수를 접목시켜 확장된 종교성을 확보하기 위함이다. 이것이 새로운 시대를 바라보는 퀘이커의 길 중 하나이지 않을까 싶 다.
나는 퀘이커를 만난 것을 매우 큰 기쁨이요 다행한 일로 생각한다. 동시에 매우 큰 삶 의 부담으로 느낀다. 신앙과 그 믿음을 일상생활에서 실현하는 문제에서 퀘이커들이 모 범이 되어 그 흐름에 몸을 싣고 싶지만, 나 자신이 그러한 삶을 살고 있지 못하다는 점 에서 더욱 그러하다. 모든 것이 형식화한 세계에서 실제를 살고 싶은 맘에서는 내 자신 이 퀘이커를 만난 것을 고맙게 생각하지만, 그 믿음에 성실하지 못하는 것에서는 내가 퀘이커라고 누구에게 말하는 것을 매우 주저스럽게 한다. 특히 초기의 퀘이커 선배들, 조지 폭스의 일기를 읽으면서 나에게는 그런 감동과 떨림과 진리에 대한 헌신의 움직임 을 경험할 수 없는 것에서 더욱 그러하다. 그 당시는 지금보다는 훨씬 더 종교적인 분위기가 사회 전체에 흘 던 것같은 느낌이 다. 그러니까 종교개혁의 흐름과 기성종교의 전통을 고수하려는 노력 등에서 사회 전체 는 매우 종교적인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고 느낀다. 그러한 때이지만 조지 폭스 등 초 기의 친우들의 삶은 매우 곤고하였으며 이상한 것으로 취급을 받았다. 그러한 상황 속에 서도 믿음을 지키려는, 곧 진리를 따르려는 그 삶은 매우 감동스럽다. 그것은 마치 신약 성경의 사도행전을 읽을 때 느끼는 감동과 같다. 내 자신도 그런 삶 속에 있고 싶다. 그 러나 지금은 매우 비종교적 사회분위기, 종교없는 종교의 분위기 속에서 우리가 사는 느 낌이다. 물론 종교라는 조직과 교리 속에서 사는 사람들의 수는 매우 많지만, 형식화한 종교에서 내용에 충실한 종교생활을 실천하는 수는 매우 적다. 동시에 종교, 정치, 경제, 문화, 학문, 일상생활의 친분과 교류에서 비종교적 분위기가 주류를 이루는 듯하다. 이러 한 때 깊은 종교성을 띈 삶을 산다는 것은 쉽지가 않다.
다시 말하면 나에게는 초기의 퀘이커 친우들이 가졌던 철저한 진리추구와 그 삶을 실 현하려다가 겪은 고난의 경험이 없다. 매우 평범하고 평이한 종교의 삶을 살아왔다. 그 러므로 내 말 속에서 종교성이 매우 희박하며, 일상생활에서 거룩함을 찾기가 어렵다. 다시 말하면 형식적으로 성호를 긋거나 십자가를 몸에 달고 사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내 속에 살고 있는 살아 있는 그리스도의 말씀, 또는 내 속에 있는 빛의 작동을 따라서 내 일상생활을 이끌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생각할 때 나는 그렇다고 대답할 자신이 없다. 이것은 일종의 철저하지 못한 내 삶의 모습이다. 다시 말하면 오늘날의 퀘이커의 삶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한 나의 솔직한 대답을 던져 주기가 쉽지가 않다는 점이다. 그러면 서도 이 강좌를 하겠다고 대답한 것은 단순히 이런 내 자신의 고민을 함께 나누고 싶은 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비종교적 사회분위기, 문화체계 속에서 어떻게 종교와 비종교가 구별되지 않으면서도 진리를 실현하는 삶을 살 수 있는가를 질문하고 싶은 것 뿐이다. 그 질문을 던지기 위하여 우선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펼치겠다. 그러니까 이 말 은 나의 퀘이커 깨달음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 깨달음으로 가는 길이 어떤 것인가를 묻 는 것이다.
1. 나의 성장과 내 주변의 종교성 나는 무종교적이지만, 유교적 가정생활의 전통 속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내 가정은 유 교전통의 교육과 생활윤리 속에서 살았다. 그래서 형식상으로는 불교나 무속 또는 한국 적 샤마니즘의 생활풍속이 우리 가정에는 없었다. 우리 마을의 많은 사람들이 섬기는 무 속신앙의 전통을 우리 가정에서는 가지고 있지 않았고, 점을 치거나 절을 찾아 부처에게 기도하고 시주하는 일이 없었다. 그분들의 언어생활에서 신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
다. 그 대신 사람이 죽고 나면 혼(魂)과 백(魄)으로 나뉘어 혼은 하늘로 날아가고 백은 땅에 묻힌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이 때 사람이 살아 있 때는 하나였던 것이 어떻게 죽 은 다음에는 혼(魂)과 백(魄)으로 나뉘어 각각 자기들이 갈 곳으로 가는 것인지가 매우 궁금했다. 나는 그에 대하여 진지하게 묻지도 않았지만, 할아버지나 할머니들이 그에 대 하여 자세히 설명하여 주신 적도 없다. 그러나 혼이 하늘로 올라간다고 할 때, 그 하늘 이라는 곳이 어디일까가 몹시 궁금했고 그것을 알고 싶어 하였다. 그러나 모르는 채 그 냥 자랐다. 사람이 죽은 다음에 집안에 차려놓은 빈소에 상징으로 만들어 놓은 혼백함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예를 들면, 어른이 돌아가시면 집에는 빈소를 차렸다. 빈소에는 종 이상자로 만든 혼백함이 있었다. 그 안에는 청색실과 홍색실을 꼬아서 혼백을 상징하는 실무더기를 넣어두었다. 그러니까 빈소를 차리는 동안은 그 혼백상자가 죽은 사람을 상 징한다고 보는 것이었다. 그 빈소에 아침과 점심과 저녁 세 번의 상식(밥상)을 올렸다. 그 때는 언제나 혼백함을 열어서 죽은 혼령이 식사할 수 있도록 했다. 그것은 완전히 상 징을 통한 의식행위(儀式行爲)지만 아주 진지하게 그 일을 하였다. 그리고 삼년이나 일 년이 되어 탈상할 때는 그 혼백함 속에 있는 청실과 홍실을 꺼내어 땅에 묻거나 불에 태 웠다. 백을 상징하는 청실은 무덤 앞에 묻고, 혼을 상징하는 홍실은 불에 태워 날렸다. 이렇게 하여 죽은 사람은 혼과 백으로 분리되어 하늘과 땅으로 돌아가는 예식을 치 던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 집에서 하는 유일한 종교행위라고 하여야 할 것이다. 이것 은 엄 히 따지면 종교행위라기보다는 단순히 조상신을 섬기는 효도행위에 속하는 것이 었다. 그러니까 조선사회를 이끌어 왔던 유교, 그 중에서도 성리학계통의 신유교를 생활 윤리로 믿었던 가정 전통은 다른 종교행위에 대하여 배타적이라고 하여야 할 것이다. 신 유교와 성리학 전통과 위배되거나 배치되는 새로운 이데올로기는 매우 크게 배척을 받았 던 조선시대의 전통이 우리 가정에는 일상생활 문화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런데 작은 이변이 생겼다. 내 증조할머니의 큰아들의 가정에 문제가 발생하였다. 며
느리가 일찍 세상을 떠났고, 큰 손자가 죽었다. 이에 그녀는 매우 크게 상심하였다. 이 때 예수교전도사를 만나서 기독교의 복음을 듣게 된다. 그 뒤 그녀는 매우 열심히 교회 에 나갔고, 기도를 열심히 하였다. 그런데 그녀의 기도 방식은 한국 전통가정의 기도방 식과 같았다. 새벽 일찍 일어나서 장독대에 물을 떠놓고, 찬물로 세수를 하고, 두 손을 모으거나 비비면서 하나님께 기도를 올렸다. 젊어서 죽은 영혼을 위한 것이면서 동시에 살아 남은 큰 아들의 안녕된 삶을 비는 기도였다. 새벽에 정화수를 떠놓고 몸을 단장하 고 정성스럽게 기도하는 것은 바로 우리사회의 생활신앙전통과 일치하는 행위였다. 가정 에 무슨 일이 있거나 어떤 사람이 아프거나 멀리 떠난 가족을 위하여 빌 때는 언제나 그 와 비슷한 기도를 하는 것이 그 당시 우리 사회의 일상문화였다. 그렇게 빌고 난 뒤 일 상에서 일을 하면서 찬송가를 입에서 떼어놓지 않았다. 그 중 가장 많이 부른 것이 ‘예 수 사랑하심은 거룩하신 말일네’ 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전통은 그녀의 며느리에게 내려 졌고, 나중에는 손주며느리에게 전해졌다. 물론 그녀가 직접 그들에게 전도한 것은 아니 지만, 그런 가정의 영향이 주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내 할아버지는 이런 기독교 신앙이 우리 집에 들어오는 것을 몹시 싫어하셨다. 큰 갈등은 아니었지만, 유교전통의 가정분위 기와 기독교 신앙이란 새로운 흐름 사이에 묘한 갈등의 분위기가 느껴지기도 하였다. 물 론 내 증조할머니나 할머니는 철저한 기독교 신앙의 전통을 따르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 에, 유교식의 가정윤리나 조상에 대한 제사행위를 진행하는 데는 별다른 갈등이 없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중국에 가톨릭이 전달되었을 때, 그리고 조선왕조 때 한반도 에 전달된 가톨릭과 유교 사이에 매우 심각하게 대두되었던 제사갈등 같은 것이 우리 가 정에서는 없었다. 나는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자랐다. 그러나 그것이 나의 미래의 삶이 나 일상생활과는 어떤 연관이 있는지 생각하지 않았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내 고향 마을에는 불교사원도 없었고, 유교식 사당도 없었다. 향교나 서원이 있는 마 을이 아니었다. 내 고향마을은 한국 전통사회에서 지배계급에 속하는 양반들이 사는 곳 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조선사회의 철저한 유교식 예식이나 예법으로 마을이 살아가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연말에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 한 해를 시작하는 날 동네의 안녕을 비는 제사를 지내는 산제당이 있었고, 성황당이 있었으며, 마을 입구에는 마을수호신으 로 장승이 세워졌었다. 많은 사람들은 절기에 따라서, 각자 자기집의 전통에 따라서 자 기들이 믿는 신에게 빌었다. 때로는 부엌신에게, 때로는 장독대신에게, 때로는 우물신에 게, 때로는 나무신에게 빌었다. 묘하고 큰 바위나 몇 백년 묵은 큰 나무나 깊은 골짜기 나 우물은 또한 기도터가 되었고, 그것들을 숭배하기도 하였다. 일종의 애니미즘이라고 하여야 할 것이다. 이렇게 보면 그들에게 신은 일상생활 속에 있었다. 어느 집에나 그 집을 지키는 지킴이, 즉 업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한국의 전통사회에는 기독교에서 말하 는 것같은 유일신 개념이 없었다. 신은 매우 다양하였고, 많았으며, 각각 기능을 담당하 는 것으로 일반 사람들에게 각인되어 있었다. 옥황상제라는 최고신이 있었으나 그것은 개념상의 신이었을 뿐, 일상생활에서 만나는 기도의 대상은 아니었다. 물론 조상에 대한 숭배심은 매우 강했다. 조상이 돌아가신 날 그를 기억하고 추모하는 제사를 지냈다. 이 런 모든 제사와 비는 행사에는 언제나 음식이 마련돼 있었고, 그에 해당하는 상징물을 마련하였다. 거기에는 일정한 그에 맞는 의식행위가 있었다. 그러할 때는 언제나 전통으 로 내려오는 신의 이름들을 상정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은 모두가 다 개별적이지 체 계를 갖춘 조직이 아니었다. 아플 때나 깊은 병에 걸렸을 때, 가정이나 한 사람에게 어 려운 일이 있을 때는 그들은 그들이 믿는 신에게 간절히 빌었다. 대개의 사람들에게 이 것들은 조직되지 않은 일상생활의 종교적 예식행위였다.
나는 고등학교를 다닐 때 처음으로 기독교 교회에 나갔다. 매우 낯설었다. 찬송가를
부르고, 기도하고,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듣고, 목사의 축복기도를 받았다. 열심히 다녔지 만 의심스러운 것이 참으로 많았다. 그 중에 왜 기도할 때 꼭 ‘예수의 이름’으로 해야하 는 지 알 수가 없었다. 일반적으로는 자기가 빌고 기도하는 것이지, 꼭 누구를 대신 불 러서 그의 이름으로 내 기도를 올려야 한다는 것이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것과 연결돼 있는 것으로 예수가 나를 대신하여 죽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이름으로 비는 것이라 고 하였다. 내 죄를 그가 짊어지고 죽었기 때문에 나는 그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점 이었다. 이것이 곧 십자가 신앙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가 그렇게 나를 대신 해서 죽을 수가 있는가 하는 문제는 아무리 생각하여도 납득할 수가 없었다. 나는 나요 그는 그인데 그가 어떻게 나를 대신하여 죽을 수 있는 것인가? 그런 그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설교나 기도 또는 찬송가를 부를 때 피, 죄, 원죄, 죽음, 구원, 부활, 영생, 멸망, 지옥, 천당, 천사, 마귀, 싸움, 승리, 사랑, 평화 따위의 말들을 많이 들었다. 그 중에서 피와 죄라는 말이 들어간 찬송가를 부를 때는 매우 거북스럽고 이해할 수가 없었다. 더욱이 찬송가의 내용들이 매우 전투적인 것이 많아서 함께 부르기가 많이 불편하였다. 사랑과 저주나 멸망이 어떻게 공존할 수 있으며, 평화와 싸움이 어떻게 함께 할 수 있는가를 알 수가 없었다. 유교나 도가에서, 또는 일반 민속신앙에서는 원죄라는 개념을 사용하지 않 았기 때문에 기독교회에서 말하는 원죄를 이해하기는 매우 어려웠다.
더욱이 이해하기가 힘든 것은 믿음이라는 것이었다. 어려서부터 내가 받은 교육은 유
교식 윤리교육이었다. 그것은 성인을 모델로 하여 인의예지(仁義禮智)를 바탕으로 하는 끊임없이 자기를 갈고 닦아 가는 생활윤리를 매우 귀중한 것으로 알고 지냈다. 그러니까 일상생활에서 도덕적 흠결이 없이 사는 것을 매우 훌륭한 덕목으로 알고 지내기를 바랐
다. 인(仁)한 삶, 즉 자비와 사랑의 삶과 의(義)의 삶, 즉 정의로운 삶 사이에 나타나는 갈등과 모순을 어떻게 조화하면서 살 것인가를 배웠다. 오랜 논쟁의 유교전통인 사람의 본성은 선한 것이냐 아니면 악한 것이냐 라는 결론 없는 논의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 었지만, 인간에게는 원죄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지는 않았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무조건 모든 인간에게는 원죄가 있다는 것이었다.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인간은 죄인이라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것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는 것을 무수히 많이 설교하였지만, 그것을 들으면서도 시원하게 이해할 수가 없었다. 특히 2천 년 전 팔레스타인에 살았던 예수라는 사람이 모든 사람을 원죄로부터 해방하기 위하여 대신 피를 흘려 죽었다는 것 이었다. 그는 아무 죄가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는 것이다. 그가 세상 사람들의 죄를 없애기 위하여 이 땅에 내려와서 죄인들을 위하여 죄없이 피를 흘려 죽었다는 것이다. 그 사실을 믿으면 죄로부터 해방되어 구원된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의 이름을 듣기 전에 살았던 굉장히 많은 사람들은 구원이라는 것을 모르고 모두가 다 멸망의 구 텅이 에서 허덕이고 있다는 것인가? 아직 그의 이름을 듣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영원한 구원 은 없다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많이 들었다. 매우 심한 논리의 비약이 있는 것을 발견하 였다. 그것을 내가 따라 믿기가 참으로 어려웠다. 천당과 지옥이라는 이분법의 내세에 대한 이야기는 공포를 주기도 하지만 전혀 심각하게 다가오지가 않았다. 불교에서 말하 는 서방정토, 또는 극락이라는 것과 같은 것인가를 생각하기도 하였다. 물론 끊없는 윤 회를 말하는 불교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것같이 느껴졌다.
또 하나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있었다. 인간은 인격존재다. 인격이란 자기 자신을 결
정하는 아주 고유한 분야다. 그러니까 인격이란 남이 대신할 수 없는 것을 말한다. 어느 인간이든 남의 삶을 대신하여 살 수 없는 것처럼, 죽음도 대신할 수 없는 것이지 않던 가? 그런데 예수가 우리를 대신하여, 나를 대신하여 죽었다는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에 대하여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을 의심하는 사람으로부터 들으 면 크리스천들은 믿음이 없어서 그렇다고 하였다. 믿겨지지 않는 것을 믿지 못하는 데, 그것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믿겨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무조건 믿으라는 것이었다. 그 러나 믿어지지 않는 것을 어떻게 믿는단 말인가? 맴도는 논리였다. 여러 신학적인 글들 을 읽을 때도 이 부분에 대한 논리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것이 이해되지 않는 상태에 서 계속하여 교회에 나갔고, 기독교라는 틀 안에 있었다. 그러니까 인격을 가진 나라는 존재와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아는 과정이 곧 나의 기독교교회 생활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는 중에 하워드 브린턴(Howard H. Brinton)의 책 『퀘이커 300년』이 함석헌의 번
역으로 한국에 소개된 것은 새로운 눈을 뜨게 하였다. 형식과 내용에서 상당한 공감을 가졌다. 물론 처음에는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 또 함석헌의 다른 글을 읽으면서 퀘이 커에 대한 약간의 지식을 가지게 되었다. 서울의 퀘이커 모임에 가끔 참석하고, 독일에 서 머무는 동안 퀘이커모임에 참석하면서 차차 깊게 이해할 수 있었다. 한국으로 완전히 돌아가면서 퀘이커 회원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이르 다. 그래서 나와 아내는 함께 독 일 북서부 4계회에서 회원이 되었다. 물론 이 때 형식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면서 왜 내가 퀘이커가 되는 형식절차를 밟아야 하는가에 대하여 생각하기도 하였다. 독일에 계 속하여 있겠다면 회원이 되지 않아도 괜찮겠지만, 일단 한국으로 돌아가면 회원이 아닌 데 퀘이커모임을 주관하는 것은 이상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고백을 하였고 인 터뷰를 통하여 정식 독일연회의 회원이 되었다.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와서 대전에서 몇 친구들과 함께 퀘이커리즘에 대한 공부를 시작 하였다. 처음에는 매일요일마다 짧은 고요예배에 긴 공부를 하였다. 차차 고요예배 시간 을 늘려 한 시간의 고요예배를 마친 뒤에 한 시간 동안 공부를 하였다. 여러 참여자들이 정식으로 퀘이커 월회를 구성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 공부를 시작한 지 6년만에 대전 월회로 출발하고 FWCC에 등록하였다. 나는 종교경전을 다양하게 읽는다. 기독교의 성 경 신약과 구약을, 불교경전과 도가경전을 읽으며, 때때로 유교의 경전을 읽는다. 이러할 때 나의 기독교에 바탕을 둔 퀘이커 신앙에 더 깊은 이해에 도달하고, 폭넓은 종교성을 얻게 된다. 이미 내 성장배경을 말하면서 밝혔듯이 내 삶 속에는 한국의 유교, 불교, 도 가와 민속신앙의 전통이 삶의 양식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것들에 대한 체계있는 공부를 정식으로 하지는 않았지만 삶과 사회공기로서 내 속에 그것들이 들어와 있는 것을 느낀 다. 그것을 바탕으로 지금은 기독교와 퀘이커리즘의 삶이 나를 이끈다.
2. 한국의 종교다원성; 유교, 불교, 도교, 생활(민속)신앙 한국 사회는 역사적으로, 사회적으로 종교다원성을 가진다. 국가지배이데올로기와 생 활윤리로 유교, 불교가 오래도록 지배하였고, 도교와 민간신앙은 바로 이러한 외래 종교 들과 조화하면서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이끌어 왔다. 다시 말하면 학자들의 주장들이 서 로 다르긴 하지만, 한국의 재래종교로 도가 또는 도교가 있었다는 주장도 있고, 중국에 서 들어왔다는 주장도 있다. 그 주장이 어떠한 것과 상관 없이 도가사상과 도교신앙은 한국인의 정서 밑바닥에 넓고 깊게 깔려 있는 것은 사실이다. 물론 중국과는 달리 도가 사상이나 도교신앙이 한국 역사상의 어떤 왕조의 국가지배이데올로기로 작용한 적은 없
다. 그렇지만 근 1천년 가까이 국가 이데올로기로 역할한 불교나 그 뒤를 이어 유교가 역할하던 시대에도 이것들은 일반 사람들의 신앙과 생활 속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시대적으로 볼 때 체계를 잡거나 거대한 세력으로 힘을 발휘하지 못하던 민간신앙 위 에 중국을 통하여 유입된 불교가 지배한 뒤, 새로운 지배이데올로기인 유교가 유입되었 다. 이 두 이데올로기는 정치와 문화계에서 서로 충돌하면서도 공존하였다. 때로는 박해 를 받은 적도 있지만, 그러한 과정 속에서도 완전히 사라지거나 소멸된 적은 없다. 그러 니까 왕조가 바뀌거나 사회 질서가 기존 이데올로기로 지탱할 수 없이 되었을 때는 언제 나 새로운 이데올로기나 종교가 들어와 새로운 기운을 사회에 불어 넣었다. 고대국가들 이 기틀을 잡기 시작할 때 민간신앙으로는 국가제도를 이끌거나 새로운 국민정신을 집합 시킬 능력이 없었다. 이 때 필요한 것은 새로운 종교의 힘이었다. 한국에 불교가 유입된 것은 고대국가 형성과 틀을 같이 한다. 한반도에 있었던 왕조들을 이끈 종교와 국가의 지배이데올로기는 불교였다. 그러나 달라진 사회와 국제간의 교류는 새로운 종교와 지배 이데올로기를 필요로 하였다. 이 때 들어온 것이 신유교였다. 신유교는 조선 왕조의 굳 건한 지배이데올로기로 작용하였다. 그러나 지나치게 편협한 유교유일체제는 정신세계뿐 만 아니라 일상생활과 경제, 정치생활에 매우 좁은 한계를 가지게 했다. 이 때 중국을 거쳐서 새로운 종교와 철학이 도입되었다. 그것이 바로 18세기 후반에 들어온 가톨릭이 었다. 아주 철저한 신분체계와 현실중심의 유교윤리에서 인간 이하의 대우를 받던 이들 은 기독교의 평등사상에 큰 매력을 느꼈다. 그것은 잠자던 영혼들을 깨우는 데 매우 큰 역할을 하였다. 모든 인간은 신 앞에 평등하다는 소식은 신분사회에 살던 그들에게 복음 이었다. 그러한 사상과 믿음은 지배계층에게는 기존질서를 파괴할 수 있는 위기상황으로 인식되었다. 이 때 개혁성향을 가지거나 현실정치에 직접 참여하지 못하는 엘리트집단들 이 새로운 사상에 관심을 많이 가지게 되었고, 이들은 곧 일반 시민들의 삶을 향상시킴 에 새로운 종교이데올로기를 도입하기에 이르 다. 위기의식을 가지게 된 지배계층은 아 주 강력하게 새로 유입된 기독교를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중국에서도 논란이 된 제식논쟁과 직결된다.
그 뒤 백년이 지나서 개신교가 새로 유입되었다. 가톨릭은 당시의 국가이데올로기인 유교사상과 정면으로 배치된다고 하여 매우 큰 저항에 부딪혀 상당히 많은 희생자를 낸 반면, 그 뒤 들어온 개신교는 전교의 어려움은 없었다. 의료와 교육과 자연과학기술을 가지고 들어온 개신교는 많은 일반 사람들과 왕조와 지배엘리트들에게 깊은 관심의 대상 이 됐다. 특히 왕조가 힘을 잃고 일본에 의한 강제 통합과 통치가 시작되면서 한국민의 민족의식과 개신교는 일치하는 활동을 하였다. 국권을 상실하여 발생한 민족의식과 새로 들어온 개신교는 공통의 관심사항을 가지게 됐다. 개신교가 들어오면서 한국은 미국과 유럽에 문을 열게 되었고, 그들의 과학과 민주주의와 교육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 러한 것들은 민족주의와 함께 성장하였다. 민족주의를 등에 업은 개신교의 선교전략은 한국인의 심성에 깊이 파고들었다. 이 때 전파되기 시작한 기독교의 사상은 이제까지 한 국을 지배했던 유교나 불교의 생활관습과 많은 차이를 보였다. 이 때에는 한국 사회의 전통과 역사상에 있었던 종교체계들을 다시 정리하여 새로운 형태의 종교를 형성하려는 운동이 있었으나 크게 성공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 중 동학(東學)은 려오는 서양의 문물에 대응하는 새로운 정신운동으로 민간에 깊이 파고들었으나 양반지배계층을 중심으 로 정치를 이끌던 세력에 의하여 철저하게 박해를 받았다. 그들이 주장하는 사상의 핵심 은 기존의 유교나 불교에서 주장하던 것과는 매우 달랐다. 그래서 박해를 받으면서도 민 간신앙으로 깊게 자리를 잡았고 널리 퍼졌다. 이 동학은 일본의 통치에 항거할 때 개신 교와 함께 민족 독립의 입장에서 공동활동을 전개하였으나, 일본정부의 강력한 박해로 공개활동을 금지당했으며, 조직적으로 박해를 받아 그 힘을 잃게 되었다. 이들 사이에는 상호 경쟁과 공존의 과정을 겪는다. 동학, 천도교 등으로 이름이 바뀐 이 신흥종교는 한 국의 전통사상과 기독교의 신과 인간에 대한 사상을 통합한 내용이 많이 들어 있었다.
결국 한국사회에는 역사적으로 불교, 유교, 재래종교와 기독교가 차례로 유입되어 사 회에 매우 중요한 정신활동과 일상생활에 큰 역할을 한다. 새로운 종교나 사상체계가 들 어왔을 때는 언제나 기존의 종교나 사상체계와 갈등관계가 형성된다. 그러나 시간이 지 나면서 새로운 사상체계는 과거로부터 전통으로 내려오는 기존의 정신세계와 사상체계, 그리고 생활습관과 타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말은 곧 신유교는 불교의 것을 흡수하 였고, 불교는 새로 들어온 유교를 흡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동시에 역사적으로 맨 뒤에 들어온 기독교 역시 이미 이 땅에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었던 불교와 유교 그리고 민간 신앙의 이데올로기와 생활습관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논리와 교리 상으로는 서로 배치되는 점이 많았지만, 그것을 실천하는 일상생활에서는 서로 혼용하고 용인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말하면 기존의 사상체계는 새로 들어온 사상체계를 부분적으로 받 아들여 자신의 것을 개선하였고, 새로 들어온 사상체계는 기존의 사상과 생활습관을 받 아들여 토착화하거나 정착하는 데 활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곧 갈등과 공존을 가능 하게 한 현실로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혼용, 또는 혼합은 곧 다른 종교들이나 사상체계 들 속에서 자기 종교나 사상체계의 핵심사상의 일부분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니까 완전 히 배제할 수밖에 없는 완전히 다른 것이 아니라, 수용할 가능성이 큰 유사성이나 같은 점을 발견한다는 것이다. 이점이 바로 갈등과 공존의 이율배반적 상황을 가져오게 한다. 자신의 종교나 사상체계를 확정하고 유지하기 위하여는 다른 종교나 사상체계와 다르다 는 것을 주장하면서 동시에 다른 것들 속에 있는 핵심요소들을 활용하거나 차용할 수밖 에 없다. 그것은 곧 현실 종교의 모순과 딜레마를 나타낸다. 이것은 한국과 같은 다원종 교 사회에서 자기 자신의 고유한 종교를 가지고 다른 종교와 교섭하는 현실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항이라고 할 수 있다. 종교의 순수성을 주장하면서 동시에 다른 것을 수용하 여 진화하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 자리에서 극단적 진보론자들은 ‘모든 종교는 하나다’ 라는 것을 주장한다. 다시 말하면 종교다원성은 곧 종교일원성에서 만난다. 즉 개별 종교들의 다양한 차이들을 깊이 파고 들어갔을 때 궁극에서 만나는 것은 한 점이라 는 것이다. 바로 궁극의 그 한 점을 찾기 위하여 모든 종교는 각각 자기의 자리에서 자 기의 방식으로 출발하지만 궁극에서 만난다는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한국 사회에서는 종교의 다원성을 주장하고 인정하게 되는 데, 그것의 이면에는 종교는 하나라는 종교일 원성에 도달하게 된다는 확신이 뒷받침한다. 바로 이 점이 종교의 진화와 다른 종교와의 대화나 만남을 가능하게 한다. 종교나 사상 그리고 일상생활에서 한국의 것들은 중국의 것들과 매우 비슷한 점이 많
다. 중국으로부터 왔거나 중국을 통하여 왔기 때문이다. 유교와 도교는 중국에서 왔지만, 불교와 가톨릭은 중국을 통하여 들어왔다. 그것들은 이미 중국에서 많이 진화된 모습이 거나 토착화와 전교의 갈등을 경험한 뒤에 들어왔다. 그 대신 개신교는 부분적으로 중국 을 통하여 왔고, 큰흐름은 미국과 서양의 선교사를 통하여 들어왔다. 일찍 들어온 것들 은 민속종교와 갈등하면서 융화하였고, 뒤에 들어온 것들은 앞에 들어온 외래종교와 민 속종교와 갈등하면서 융화하였다. 그러므로 지금 존재하는 큰 종교들, 유교, 불교, 도교, 기독교는 고유한 민속종교와 다른 외래종교들과 부딪치면서 융합된 복합성을 띈다. 그렇 게 하여 한국화한 것들이라고 보아야 한다. 내 개인 자신은 어려서부터 어른들이 옛날이 야기나 선조들의 이야기 또는 생활이야기를 통하여 유교, 도교, 불교와 민속신앙이 혼합 된 삶의 지혜, 체험, 학문, 도덕과 종교의 체험담을 정신적 양식으로 삼고 자랐다. 체계 있는 교육이나 종교행위로서가 아니라, 비공식 일반 삶의 이야기와 생활을 통하여 여러 종교들이 녹은 생활문화 속에서 자랐다. 그러므로 내가 기독교를 만나기 전에 이미 내 속에는 한국사회의 오랜 종교전통들이 녹아서 흘러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고대국가가 형성되기 전에는 국가형성을 위한 정신적 기반으로 삼기 위하여 민속종교와 유, 불, 도 교의 사상을 제대로 받아들이고 펼쳐야 한다는 주장이 많았다. 그 영향은 그 뒤 국가가 형성되고, 견고하게 국가의 지배이데올로기가 있었을 때에도 다른 사상들과 어느 정도의 갈등은 있었지만, 대개의 흐름은 서로 용납하는 분위기가 지배했던 결과라고 생각한다.
3. 한국의 종교들과 기독교의 만남 어떤 종교가 되었든 새로운 지역에 전파 되어 그곳에 뿌리를 내리려면 순수하게 자기 자신만이 가지는 것을 주장하고 유지할 수가 없다. 종교가 어느 곳에 자리를 잡는 것은 그곳의 긴 역사과정에서 형성된 문화 속에 정착되는 것을 말한다. 한 종교가 새로운 사 회로 들어갔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또 다른 면에서는 한 사회가 새로운 종교를 유입하 였다고 할 수도 있다. 그래서 그 때까지 그 지역에서 살아왔던 삶의 자세들, 생각들, 의 식(儀式)들을 무시할 수가 없다. 또한 그들이 사용하였던 언어(개념) 속으로 들어가지 않 으면 안 된다. 여기에서 전래되는 종교들의 변이가 일어나며, 그것을 받아들이는 측에서 는 굉장히 심한 갈등에 부딪치게 된다. 때로는 대화라는 상황으로, 때로는 박해라는 양 상으로, 때로는 무관심이란 자세로 나타난다. 어떠한 상황으로 전개된다고 할지라도 이 미 그 땅에 자리를 잡고 있던 것들과 관련을 짓지 않고는 안 되는 것이 새로운 종교의 전파다. 이런 과정에서 종교들은 새롭게 진화한다.
앞에서도 이야기하였지만, 한국은 다종교 사회다. 역사과정을 거치면서 여러 종교들이 국가의 지배이데올로기가 됐고, 생활문화를 이끄는 역할을 했다. 새로운 종교가 국가의 지배이데올로기가 되었을 때에도 과거에 있었던 종교와 생활문화는 주류의 자리에서 곁 가지로 려 났을 뿐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대로 삶과 생각과 제도와 의식 속 이나 밑바닥에 남아서 기능한다. 새로운 체제에서 살아남는 것과 새로운 지역에서 널리 퍼지는 것은 바로 그것들 사이에는 어떤 접촉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 접촉점이 바로 공 존의 가능성을 열어 주는 것이면서, 동시에 종교들의 대화가능성과 토착화의 가능성을 제공한다. 그것은 바로 인류라는 것이 가지는 어떤 보편성인지 모른다. 그러니까 인류라 는 존재가 어떤 상황, 어디에 있든지 꼭 가지게 되는 공통의 종교성이 있다는 것을 말한
다. 이것이 서로 다른 종교가 공존하는 근거가 되며, 모든 종교들이 다른 종교에 의하여 진화하는 길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한국에 있었던 많은 종교들과 기독교를 비교해 볼 이유가 생긴다. 한국에 고유하게 오래도록 전통으로 내려오는 종교들과 기독교를 직접 비교하는 것은 불 가능하고 의미가 없다.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들과 개념들이나 이미지들이 끊임없이 변화 되었으며, 같은 존재를 두고 각각 다르게 이름을 붙이고 있기도 하지만, 같은 이름을 쓰 는 같은 종교 안에서도 시대의 변화와 상황의 변화에 따라서 이미지가 달라지기 때문이 다. 때로는 신, 하늘, 도, 절대자 따위로 각각 불리지만 그것들은 궁극존재 즉, 최초, 최 후, 지고하고 심오하며, 개인 안에 실재하는 존재라는 데서는 일치한다. 신앙의 대상으로 서 그것들은 그렇게 사용되어 왔다. 동시에 인간 삶의 실천에서도 역시 용어와 이미지가 각각 달랐다. 죄로부터 벗어나며, 고통을 넘어서 해탈의 세계로 들어가며,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로 넘어가기 위한 노력을 어떻게 하는가 하는 문제도 역시 같은 노력이었
다. 그러니까 믿음과 실천의 부분에서 어떤 차이점과 공통점이 있는가를 간단히 살피는 것이 의미가 있을 것이다. 다른 점과 비슷한 점 또는 같은 점을 간단히 살피는 것이 의 미가 있을 것이다.
유교와 도가 또는 도교는 중국에서 수입되었다. 불교는 중국을 거쳐서 한반도에 들어
왔다. 물론 중국에서도 많은 변화를 거치고, 새로 들어온 종교들과 공존하고 다투면서 변화된 것이었지만, 한반도에 들어온 각 종교들은 또 한 번 굴절 내지는 변화의 과정을 거친다. 그렇기 때문에 같은 이름을 쓰지만 내용은 매우 다르다고 보아야 한다.
유교와 불교, 도교나 도가에서는 직접 신을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과 같은 인격존재로서의 신개념이 그들에게는 없지만, 신과 같은 기능과 역할을 하는 궁극존재는 있다. 그것이 바로 그것들의 종교성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인격신이라고 하지만 만남은 비인격적이고, 비인격신이라고 하지만 만남은 또 인격적이 다. 그러니까 신이 어떠하다는 것은 어떤 논리나 교리가 아니라 만남의 체험이라고 보아 야 한다. 비록 개념 설명에서는 인격과 비인격이라는 것이 구별 될 수 있는 것이지만, 만남은 모든 곳에서 인격적이라는 점이다. 그런 인격적 만남이 아니고는 결코 삶의 변화 를 가져올 수 없기 때문이다. 종교란 궁극존재와 직접 만남을 통하여 자신과 그가 하나 가 되는 체험으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유교에서는 죄를 말하지 않는다. 물론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각종 신들에게 빌고 기도 를 하지만, 그것은 죄로부터 해방되기를 바라서가 아니라, 인간집단인 국가와 민족(종족) 의 안녕을 위한 것이며, 현세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것에 국한되어 있었다. 그래서 인간과 집단이 할 일의 핵심은 하늘의 뜻을 알아차리고 그것을 따라서 생활하는 것이었
다. 하늘의 뜻을 따르기 위하여 필요한 것은 끊임없는 자기수양, 곧 성인에 이르는 자기 닦음의 길을 끊임없이 수행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인생의 일이었다. 그 중 하나가 인 (仁)을 행하는 것이면서 조상을 숭배하는 일이었다. 이 부분에서 기독교와 큰 갈등을 일 으켰다. 조상에 대한 숭배는 종교행위는 아니지만 가족전통의 예식행위였다. 그 문제는 온갖 가족행사에서 항상 부딪치는 문제였다. 이 문제는 중국에서도 크게 부각된 것이었 고, 한국에서도 꼭같은 일이 일어났다. 이 문제에 대한 가톨릭과의 갈등은 지금은 해소 되었으나 개신교와는 아직까지도 해결해야할 문제로 남았다. 기독교인도 물론 조상에 대 한 생각을 깊이 하지만, 예식의 문제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으면서 동시에 상당한 유연성 을 가진다. 즉 상당한 부분 타협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외의 다른 사회윤리문제에 서는 크게 부딪칠 문제가 아니다.
민속종교와 기독교의 관계: 샤마니즘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무교와 민속종교는 한국사 회에 매우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그것은 서양식의 종교라기보다는 하나의 생활신앙이 었다. 옥황상제라는 최고 신이 있었지만 그는 기도의 대상은 아니었다. 오히려 지역, 종 족, 가족, 시대에 따라서 기도의 대상이 되는 신은 매우 다양하였으며 변하였다. 이 경우 모든 신들은 일종의 기능상의 신이었다. 다신인데 어떤 우열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기 능상의 문제로만 일상생활에 대두되었다. 이 민속신앙은 유교 불교 기독교의 예식과 생 활에도 그 바탕을 이루는 것이 되었다. 그런 의미로 보면 민속종교 즉 무교는 지금도 살 아서 계속하여 생성되는 현대종교라고 하여야 할 것이다. 한국인의 일상생활과 정서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지금 유교는 생활윤리로 작용할 뿐, 어떤 종교적 교육이나 체계있는 조직으로 존재하
지는 않는다. 사원이나 학교가 있는 것도 아니다. 권위 있는 유교교사나 학파의 흐름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한국이 유교사회라고 서양에서는 흔히 말하지만, 그것은 그냥 오랜 전통으로 내려오는 생활화된 문화들이 있기 때문만으로 그렇게 주장하는 것이 정당 한 것인지는 매우 궁금하다. 유교는 인간과 사회관계를 규정하는 윤리를 강조하였기에, 그것이 곧 일상생활로 크게 자리잡고 있다. 교리를 깊이 연구하고 그것을 숭상하는 입장 에서가 아니라, 전통으로 내려오는 생활을 살아간다는 의미에서 유교사회라고 할 때는 의미 있는 평가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맹자와 순자로 나뉘는 인간의 본 성이 선하냐 악하냐는 논쟁을 통하여 인간은 온전함에 다다를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상 정한다. 그래서 끊임없이 자기수양을 추구한다. 이것은 그리스도교에서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교리를 받아들임에도 계속된 자기성장과 성찰을 추구하는 것이 매우 자 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불교는 많은 사원이 있고 승려를 양성하는 학교가 많았다. 여러 해 전부터 학생수가 줄고 승려지망생들이 많이 줄어든 것은 사실이지만, 일반 신도들에게서 불교신앙은 크게 줄어들지는 않고 있다. 불교계에서 운영하는 대학, 고등학교가 있고, 장례식을 치르는 기 관이 많다. 죽은 이를 위로하고 극락에 이르는 길을 찾고, 살아 있는 사람을 위로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일상에서 힘든 이들이 고요함을 찾고 평안을 누리기 위한 프로그램 을 절에서 많이 진행한다. 모든 사람에게 불성이 있고, 성불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메시지는 매우 강력한 희망을 일반 사람들에게 제공한다. 돈오(頓悟)나 점수(漸修)를 주 장하는 파가 있지만, 어느 것을 주장하든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 있다. 상대 안에 절대가 있고, 삼라 안에 열반이 있으며, 속된 것 안에 성스러움이 있음을 인정하는 대승 불교의 입장이 한국불교에서는 강하다. 불교 내 종파들끼리의 차이는 그렇게 크지 않지 만, 불교와 민속종교인 무교와의 결합은 특이하다. 이것은 불교가 한국사회에 적응하고, 전파하는 전술의 결과였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조상숭배의 예식이 불교식으로 정착되기 도 하였다. 열반과 해탈의 전통과 서방정토나 극락을 그리워하는 정서는 구원과 천당을 말하는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데 큰 거부감이 없게 한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한국에서 도교는 별로 큰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사당도 없고, 교사도 없다. 다만
일을 마친 사람들, 사회생활의 일선에서 물러난 사람들, 고단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도 교나 도가적 삶을 흠모하여 추구하는 것이 전부일 수 있다. 그러나 매우 힘있게 삶을 영 위하는 사람들의 마지막 삶은 자연에 순응하는 도가스러운 삶을 사는 것임을 천명하기도 한다. 이러한 상황은 바닥의 정서로 깔려 있기는 하지만, 지배이데올로기로 작용하지는 않는다. 특히 문명비판적 관점을 많이 가지고 있는 도가철학은 현대인들의 쉼없는 삶, 끊임없이 급하게 변화하는 사회의 무의미성을 체험할 때 도가에서 강조하는 관조와 놓음 의 삶은 새로운 숨통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한국의 기독교는 일반 교육기관을 많이 운영한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를 운영하며 특히 기독교지도자를 양성하는 신학교육기관을 많이 운영한다. 병원과 각종 사회서비스기관을 운영하면서 어렵고 힘든 사람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사회전반에 서 비스를 제공한다. 특히 현실에 깊이 관여하는 사회운동을 벌여 정치와 경제계에 깊이 관 여한다. 진보경향이 있는 기독교는 다른 종교들에 대한 관심도 많이 가지지만, 보수경향 의 기독교는 개종과 선교에 더욱 많은 관심을 가진다. 종교간 갈등은 이러한 분파에서 많이 심화돼 있다. 각 종교를 신봉하는 지식인들 사이에서 토착화를 생각하는 이들은 서로 교류가 많다. 에큐메니칼 차원의 기독인들은 다른 종교의 성직자나 신도들과 교류를 많이 한다. 그들 사이에서는 개종을 전제로 하는 논쟁은 지금은 별로 없다. 다만 자기 종교 속에 타종교 의 교리나 윤리를 어떻게 수용하고 인정하고 생활방법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들을 많이 한다. 진보 경향이나 보수 경향의 종교인들은 각각 자기들이 관심을 가지 는 부분들에 대한 공동대응을 많이 한다. 이것은 종교적인 모임이 아니라 정치나 경제 또는 사회문제에 대한 공동대응에서 공통점을 찾기도 한다. 그러나 같은 종교 안에서 진 보와 보수 경향의 흐름들이 서로 교류하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니다. 오히려 보수와 보수 끼리, 진보와 진보끼리는 풀어야 할 문제들을 놓고 다른 종교들과 함께 할 때가 많다.
4. 기독교 또는 퀘이커에서 주의할 도가사상의 핵심
도가에서 궁극적 실재(ultimate reality)라고 할 수 있는 도(道, Dao)는 유한한 우리 인 간의 생각, 연구, 언어, 느낌으로 적절히 표현할 수 없는 존재다. 모든 것이 그것으로부 터 나왔다는 도는 무한히 신비롭고 오묘하다. 모양이 없고 이미지가 없다. 이름도 없고 성질도 없다. 그러므로 객관적 인식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성적 사유나 추 리로서 인식할 수가 없다. 다만 상징으로만 이야기 될 뿐이다. 이미 도라고 말한 도는 도가 아니기 때문이며, 그것이라고 이름한 순간 그것이 이름과 실재가 일치하는 것이 아 니기 때문이다. 결국 부정을 통하여 실재를 인식하고 경험하고 느껴야 하는 존재다. 다 시 말하면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으로는 인식되지 않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 모든 것들을 거부함으로 도의 세계에 진입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프로그램이 없는 퀘이커에서 예배나 일상생활에서 하는 고요히 함은 불교에서 하 는 참선을 참고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선은 혼탁해진 인간의 마음을 정화하는 수행방법 이다. 마음을 오로지하여 궁극적 진리를 깨닫는 것이 목적이다. 맘을 깨끗이 하는 것이 첫째 길이다. 그 다음에 모든 집착을 버리고 무심의 상태로 접어드는 일이다. 그렇게 하 여 모든 상대적인 것들을 초월한 궁극의 실재로서의 무의 진리를 깨달아 해탈의 경지에 도달하려고 한다. 내면의 세계를 직관하므로 그 속에 있는 불성을 만나는 일이다. 이것 은 기독교 수행자들이 드린 기도, 즉 마음을 비워 생각과 마음이 없는 상태에서 자신을 하나님께 오로지 내맡기는 것과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고요한 중에 찾고 말씀 을 기다리는 퀘이커의 예배와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전적으로 자기부정을 통한 새로운 만남을 의미한다. 부정을 통한 절대긍정에 도달하려는 도가의 사상체계는 퀘이커 리즘을 확장하는 데 의미가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도가의 사상체계를 세 가지로 크게 나누어 정리하고 생각해 보는 것이 의미
가 있다고 본다. 관계 또는 사회윤리의 실천으로서의 무위, 박(樸; 소박, 단순), 도 그리 고 근본으로 돌아감을 간단히 살펴본다.
도덕경을 읽을 때 일반 사람들이 가지는 자신감, 위로감은 무엇일까? 거기에서 말하는 최고의 경지, 지극한 경지까지 갈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다 자기의 자리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만큼만 진실되게 하면 다 이룬 것이 된다는 느낌을 가지게 한다. 다 시 말하면 사람이 도달해야 할 고정된 단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각자 자기의 능력 상황 처지에 따른 진실된 과정을 중요하게 본다는 말이다. 어린아이와 청장년과 노인이 도달 할 기준을 일정하게 설정할 수가 없다. 각자 그들에게는 각각 다른 기준이 제시된다. 다 양한 기준은 곧 다양한 사람들의 그들 나름의 기준과 같은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도가철학의 새로운 가능성이다.
도가의 신비체험은 황홀한 것이 아니라, 어둡고 중립적이며 불확실하다. 그래서 믿음 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신에 대한 직접 체험에 근거한다. 여기서 말하는 직접체험 이란 단순한 생활에서 자연스럽게 만나는 삶의 신비라고 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간단 히 도가철학을 원칙과 역동적 힘과 행위 또는 삶의 실천자세를 나누어 생각하여 본다. 우선 도(道, Dao)에 대한 이해다. 도는 궁극적 절대실재로서 초월적이면서 내재적이다. 모든 것이 그것으로부터 나왔다. 그러므로 그것은 모든 것의 어머니다. 자애롭고 생산하는 실재다. 그러나 이렇게 저렇게 이미지를 그릴 수 없는 무의 존재다. 부정으로서만 설명이 되는 없음의 존재다. 들어도 들을 수 없고, 보아도 볼 수 없으며, 잡으려 해도 잡을 수 없다. 이름을 붙일 수가 없다. 그냥 작용만 볼 수 있고, 설명할 수 있을 뿐이다. 생명의 원천은 그런 의미에서 아주 까 맣고 까만 카오스다. 무한의 가능성을 가진 것이 그것이다. 그래서 아주 묘한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꼭 설명이 필요하다면 텅 비어서 모든 것을 수용하는 깊은 골짜기, 가장 낮은 넓고 깊은 바다, 어머니 또는 낮은 곳으로만 흘러드는 물을 들어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계시성과 구원성을 가진다. 그래서 영생의 개념을 가진다. 구원과 영생은 자기의 힘으로 이루어진다고 보고 있다. 도는 어떤 특정한 상층계급에 속한 것이 아니라, 민중의 삶과 직결되어 있다. 도의 나타남과 실현은 말로 표현할 수는 없는 것이 지만 언제나 일상성이다. 그것은 일종의 로고스이면서 길이다. 길은 곧 길을 가는 것이
다. 원칙과 삶이라는 양면성을 가진다. 그 원칙이 실제 생활에 적용되는 것은 상대성과 평등성이다. 균형을 잡기 위한 작용은 언제나 상대세계를 이용하면서 그것을 넘는 절대 적 평등성이다. 그래서 거기에는 어떤 귀함이나 천함이 없고, 높고 낮음이 없으며 빠르 고 느림이 가치를 가지지 않는다.
이러한 도(道)가 작용하거나 인간들이 그 도를 따라 올바르게 활동하고 생활하는 자세
는 바로 무위다.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앞뒤의 문맥이나 흐름을 보면 ‘하지 않음으로 함’이란 모순스런 해석이 된다. 도는 하지 않음으로 모든 것을 한다는 뜻이다. 그것은 마치 그릇이나 연못에 물이 차면 넘쳐흐르듯 이, 길이 기울면 물이 아래로 흘러내리듯이, 봄이 되어 날씨가 따뜻하면 새싹이 돋아나 듯이, 더위가 극에 달하면 차차 기온이 내려가고, 추위가 극에 달하면 기온이 올라가듯 이 그렇게 자연스럽게 되는 것을 말한다. 억지로 인간의 힘을 더하여 작용하지 않게 하 는 일이다. 이것은 때를 기다리는 일이요, 기다릴 것이 무엇인지를 찾는 일이다. 지나치 게 문명과 제도를 통하여 인간의 삶을 규제하거나 이끌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무위는 도덕과 예법과 형식을 떠나는 삶을 추구한다. 아나키스트적 삶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부드럽고, 자비롭고, 겸손하며, 약하고 비우는 삶의 자세는 무위의 한 가 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될 때 다툼과 폭력의 사회양상이 극복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이것은 모순스런 용어, 즉 적극적 수동성이라고 보아야 할까?
이러한 삶은 원초적 상태, 즉 박(樸, natural disposition)으로 돌아가야 가능하다. 박의 상태는 쉽게 설명이 되지는 않는다. 다만 소박 단순한 것이다. 그것은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상태, 물이 들여지지 않은 상태, 타고난 그 모습 그대로의 상태, 영아와 같은 상태, 뿌리로 돌아간 상태와 같은 것이다. 그래서 노자는 다섯 가지 색은 눈을 멀게 하고, 다 섯 가지 소리는 귀를 어둡게 하며, 다섯 가지 맛은 입을 더럽힌다. 이러한 꾸밈들은 사 람의 마음을 미치게 하여 탐심에 가득한 삶으로 이끈다. 그것이 잘못된 문명과 삶을 유 발하는 시작이다. 그래서 도가에서는 언제나 투박하지만 갈고 닦이지 않은 원시상태를 희구한다. 그것은 인간이 타고난 생명본질인 자유를 추구하는 삶이다. 이제까지의 논의를 이미지로 표시하고 설명해보자. 도가의 신비주의와 궤이커 신비주
의가 일상생활에서 만나는 것을 다음과 같은 이미지로 표현할 수 있다.
일상생활에서 퀘이커 신비주의와 도가의 신비주의의 만남에 대한 설명을 위의 이미지
를 통하여 할 수 있다. 퀘이커를 상징하는 Q자는 퀘이커의 믿음과 실천을 의미한다. Q글 자의 O부분은 믿음, 원칙을 의미한다면 ~는 생활실천을 의미한다. Q자 중 O에 해당하 는 것은 신, 퀘이커식 표현으로는 내면의 빛, 내면의 소리, 내면의 스승을 의미한다. 그 것은 도가에서 말하는 도(道; Tao)와 같다. 이것이 어떻게 생활에 작용하는가? 퀘이커들 은 기다리고 찾는다. 그 행위는 일상이나 예배시간이나 깊은 침묵으로 연결된다. 고요히 함으로 말씀을 기다리고, 내면의 소리를 듣기를 바란다. 어떤 행동이나 활동이 아니다. 그것을 도가식으로 말하면 무위(Wuwei; 無爲)다. 하지않음의 함이다. 이것은 사도행전의 말로 하면 성령이 내려질 때까지 간절히 기도하면서 기다리는 일이다. 그렇게 하여 신, 내면의 빛, 또는 도에 다다르는 깨달음이 있다고 한다면 그 때 활동이 일어난다. 이 활 동이 작동하는 방법은 단순성, 단순함이다. 그것을 도가에서는 박(樸; Po´)이라고 한다. 박은 전혀 작업을 하지 않은, 깎지 않은 그냥 통나무다. 그것을 의역한다면 단순함이다. 순수함이다. 있는 그대로, 태어난 그대로의 모습이다. 마치 어린아이와 같이 순수한 모습 이다. 그러니까 도가 일상생활에서 실현되고 실천되려면 무위, 즉 하지않음의 함으로서 도를 체득해야 한다. 그것을 체득한 다음에는 아주 순수하고 단순하게 살아야 한다. 어 떤 문화나 교양이나 기교를 섞지 않은, 받은 그대로 살아가는 일이다. 퀘이커의 삶의 증 언이란 바로 단순함, 순수함에서 시작된다. 퀘이커의 증언이 되는 Peace, Equality, Integrity, Community는 바로 Simplicity를 기반으로 한다. 이것이 곧 퀘이커와 도가의 만남의 핵심이면서, 두 체계가 만나는 지점이다. 바로 그 점에서 두 사상체계와 삶의 체 계는 만난다. 이렇게 볼 때 퀘이커가 동양사상에 상당히 접근해 있다는 말을 이해할 수 가 있다. 이렇게 하여 퀘이커가 확장되고 진화할 수 있다고 본다. 모든 종교는 그래서 끊임없이 확장되고 자란다. 완성된 교리가 없다. 그것이 살아있는 종교의 핵심이다. 이러 한 종합된 삶을 살고자 한 사람이 함석헌이다. 함석헌이 주장하는 씨의 자세와 삶이 바 로 그것이다. 그렇다면 함석헌은 이러한 도가적 사상체계를 어떻게 기독교적 체계와 합 하여 자기의 삶으로 이끌었는가?
5. 함석헌(Ham Sok Hon)의 삶과 사상; 종교적 신비와 일상생활 한국의 초기 퀘이커요 현대사상가인 함석헌의 종교사상과 삶에 대한 간단한 고찰이 필 요하겠다. 그는 어려서부터 기독교를 접촉하고 평생 기독교인으로 살았다. 그러나 그 길 은 다양하게 바뀌었다. 처음 장로교인으로 시작하고 성장하였고, 일본에서 유학할 때 우 찌무라 간조로부터 ‘무교회신앙’을 배우고 상당한 기간 그 안에서 살았다. 그러다가 원숙 기에 퀘이커가 되었다. 한국의 퀘이커는 함석헌의 영향이 크고, 나 자신도 그에게서 받 은 영향이 크다고 믿는다.
“나는 학교에서 전공하는 것이 역사, 윤리, 교육이었으므로 그 방면의 책을 읽어감에 따라 종교를 차차 과학적인 자리에서 보게 되었다. 그럼에 따라 기독교는 결코 유일의 종교가 아니요, 종교 중의 하나라는 것을 부인하지 못하게 되었다. 동경에 있는 동안 처 음에는 『기탄잘리』를 읽은 것이 시초가 되어 타고르의 책을 계속해 읽었다. 범신적이라 하지만, 나는 그것이 내 신앙하여 가는 데 아무 지장이 되는 것을 느끼지 않고 좋았다. 타고르를 읽다가 간디를 읽게 되었다. (…) 우찌무라 선생의 영향으로 칼라일을 읽었다. 『옷의 철학』은 몇 번 읽었다. 그도 교회에 갇힌 이는 아니었다. 학교에서 쓰는 교과서 에서 알게 되어 러스킨을 읽었다. 그도 교회주의는 아니지. 톨스토이는 전부터 읽는데 그는 물론 교회에서 파문을 맞았으니 말할 것도 없다. 우찌무라 선생도 십자가 신앙을 고조하느니만큼 톨스토이는 참 신앙이 아니라 했지만, 나는 우찌무라 선생을 전적으로 존경하면서도 그 점만은 불복이다. 또 선생의 소개로 쉬바이쩌를 알고 읽게 됐는데 쉬바 이쩌는 결코 정통 신자는 아니다. 오산에 교사 노릇을 하는 동안에 동경서 받은 영향으 로 무교회적인 독립 신앙의 입장에서 성경을 원문에 따라 연구해 보자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역사는 줄곧 웰즈(H. G. Wels)의 문화적인 자리에서 보아왔고 과학에 충실하면서 옛 신앙을 건질 수 있는 데까지 건져보자는 고등비평학자의 정신을 따랐다. 그렇게 성경 을 보았다. 역사에서는, 그 때 한창 성한 공산주의의 유물사관을 전혀 눈감고 아니라 할 수는 없어 알대로 알아보려 애썼다. 그 결과 근본에서 틀린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현 실적인 면에서 어느 부분의 진리를 가진 것으로 단정했다. 《성서조선》 사건으로 서울 감 옥에 있는 동안 불교 경전을 조금 읽었다. (…) 그러는 동안에 불교와 기독교와는 근본에 서 다를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 돌아온 후 늘 공부하면서도 감히 손을 못 대 던 『노자』를 읽기 시작했다. (…) 피난 중에 해를 두고 이름만 듣고 보지 못한 『바가밧 기타』를 우연히 헌책집에서 발견했을 때 기쁘던 생각, 인도교에 대해 처음으로 알게 됐 고 읽을수록 종교는 하나라는 생각이 분명해졌다. 『장자』를 읽기 시작했다. 점점 껍질 이 좀 떨어지는 듯함을 느꼈다. (…) 이렇게 오는 동안 역사적 예수를 믿느냐 하는 것, 속죄는 어떻게 해서 되느냐 하는 것, 하나님은 정말 인격신이냐 하는 것, 영원한 생명, 하늘나라는 무어냐 하는 의심이 새롭게 일어났다. (…) 나는 지금 종교는 하나다 하는 생 각이다. (…) 이단이니 정통이니 하는 생각은 켸켸묵은 생각이다. 허공에 길이 어디 따로 있을까? 끝없이 나아감, 한없이 올라감이 곧 길이지. 상대적인 존재인 이상 어차피 어느 한 길을 갈 터이요, 그것은 무한한 길의 한 길밖에 아니 될 것이다. 나는 내 가는 길을 갈 뿐이지, 그 자체를 규정할 자격은 없다. 이단은 없다. 누구를 이단이라고 하는 맘이 바로 이단이람 유일의 이단일 것이다.”[1] 이런 선언 뒤에 그는 자기의 독자적 신앙노선을 걷는다.
무교회와 헤어지는 데는 우선 자신보다는 인생 전체를 보자는 것, 앞에 올 것을 보자
는 것, 무엇에 들어붙지 말고 자유하자는 것, 남의 것이 아니라 자기 것이 되어 보자는 맘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보니 나만이 아버지 품에 있는 것도 아니며, 진리의 산에 오르는 길은 매우 많은 것이 눈에 보였다. 걷는 그 자신에겐 이 길 외엔 딴 길이 없단 말이지 객관적으로 그 길만이다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얼마든지 많은 사람 이 얼마든지 기어오르는 길이 있다. 절대의 자리에서 하면 길은 유일의 길이다. 하지만 상대의 자리에서 하면 무한한 길이다.(9, 예: 314) 상대의 세계에 있는 ‘종교’, 기독교는 이제 그에게 여러 종교 중의 한 종교일 뿐이다. 그러니깐 기독교가 유일의 참 종교라는 것은 상대계의 좁은 생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종교는 겸손해야 한다. 개별종교는 하느님을 담을 만큼 크지가 않기 때문이다. 예수가 제자를 삼고, 사도를 뽑은 것은 최소 한의 껍질을 가지는 상징행위였다. 그래서 함석헌도 가능한 한 상징으로 시작된 ‘엉터리’ 를 붙잡지 말고 자유의 영으로 살자는 것이었다.(9, 예: 315)
그래서 그에게 참 길은 너도 나도 기독교도도 이교도도 다 같이 더듬어가는 길이다. 나만이 아들이 아니다. 그래서 “옛날은 동물희생을 했지만, 이제 네 신조희생을 해야 할 것”(9, 예; 317)이라는 것이다. 정통이냐 미신이냐는 나와 하느님 사이에서만 알 뿐이다. 획일이 아니라 내 소리를 내자는 것이 참찾아 나가는 길이다.(9, 예;318) 나만을 위하여 믿는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해 믿고 세계가 구원되어야 한다. 장차 오는 세대를 위해 믿는 믿음이 정말 구원하는 믿음이다. 나(진리)는 지나간 모든 인류 속에 있고, 장차 올 인류 속에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멸망할 자는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9, 예; 318-9) 만인 구원론이다.
함석헌은 새시대에 맞는 종교가 나타나기를 기다린다. 지금의 종교들은 새 시대에 맞 지 않는 낡은 것이라고 본다. 그 이유로: 1) 기독교 교리의 완성, 2) 점점 제도적으로 되 어 가는 점, 3) 공세적이 되지 못하고 수세적이라는 점, 4) 점점 더 피안적이 되어가는 점, 5) 내분이 심하다는 것이 바로 새 종교를 필요로 하는 징표라는 것이다.(3, 새종: 221-222) 낡은 것은 새 것을 예견하고 주문한다. 썩음이 지극하거나 충격이 강력할 때 새로운 흐름은 솟아오른다.
이 시대가 새로운 종교를 낳을 ‘그때’가 멀지 않다는 표시의 두서너 가지 징표가 있다.
1) 현대의 전쟁의 성질이 과거와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2) 원자학의 발달이다. 3) 세계관 문제다. 4) 생명공학의 발달이요, 5) 전 세계가 하나의 연결망 속에 있다는 점이다.(3, 새 종: 223-228) 이러한 상황에서 나타나게 될 새종교는 어떤 모습일까?
그 새 종교의 모습을 그려보면 대강 이렇게 나타날 것이라 한다. 모습을 그러보는 것
은 기다리는 것이다. 기다리는 맘에서 새 종교는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1) “그 얼굴의 테두리를 말한다면 둥글 것이다. 하나란 말이다. (....) 모든 종교는 하나다 하는 것을 거 부하는 종교는 앞으로 몰락할 것이다. (....) 세계를 온통 한 집안으로 만드는 말씀을 주실 것이다. (....) 앞으로 세계는 하나 될 터이요, 그것을 위해서 한 종교가 있을 것이다.” 2) “그 담 그 얼굴의 빛깔을 말하면 무색일 것이다. 더 합리적이 되어간단 말이다. (....) 이 이성의 문제는 과학에 대한 문제다. (....) 과학도 종교도 다 생명의 자라가는 일면인데 이 날까지 반대방향에서 서로 욕을 하며 파 들어간 셈이다. (....) 이기고 지고의 감정에 붙잡 혀 있는 사람은 하늘나라에 못 간다. 과학이 이긴 것도 종교가 진 것도 아니다. 영원무 한의 세계에 들어갈 때까지의 종교요 과학이지, 들어가면 이도 아니요, 저도 아니다.” 3) “이것은 인간관에 관한 문제다. 사람이 그 자신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문제다. (....) 하나님에 대해 어떻게 하느냐, 자연세계에 대해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은 사람이 제 자신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지느냐 하는 데 가서 맺힌다. (....) 미래의 종교는 이 지친 인생을 다시 일으키는 종교여야 할 터인데, 그렇기 위하여서는 그 분열된 인격을 재통일 하는 새 인간관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것을 뚫려 비친다고 하였다. 육이 영의 거침이 되는 것도 아니요, 영이 육을 배척하는 것도 아닌 인간이다.”(3, 새종: 229-235) “미래의 종교는 인격의 종교, 논리의 종교기 때문에 맘의 종교요, 맘의 종교기 때문에 깨달음의 종교다.”(3, 새종: 239) 그것은 언제나 ‘시재(時在, now-here)’, 이 지금-여기에 산다.(3, 말 씀: 143) 지금-여기가 바로 현실이다. “종교는 현실을 잊어버림이 아니다. 현실을 건지는 것이다. 현실을 건지기 위해 가장 작은 정도의 조직이 필요하다.”(3, 말씀: 145) 거대조직 이 아니라, 최소한의 조직과 형식이 필요할 뿐이다. 미래의 종교는 시재의 종교이기에 지금-여기를 놓고 하늘나라를 말하는 것은 구원이 될 수 없고, 회개가 될 수도 없다. 잠 꼬대에 지나지 않는다.(3, 말씀: 146) 물론 목적은 하늘에 있다. 하늘에 오르잠이 종교의 길이다. 그러나 땅을 박차지 않고 날아오르는 새는 없다.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 도 이루어지이다’ 한 것은 바로 시재를 귀히 여긴다는 뜻이다.(3, 말씀: 146)
그래서 현실의 종교라면 현실을 사는 민중, 밑을 중하게 여긴다. “정말 종교는 민중을
취하고 잠들게 하는 것이 아니오, 불러일으켜 싸우게 하는 것이다.(....) 아무도 악과 싸우 지 않고 선한 영이 될 수 없는 한, 현실에 눈을 감을 수는 없다. 죄악은 곧 현실적 사실, 현실은 곧 죄악적 존재, 죄악은 사회적 현상인 것이므로, 산 종교는 사회악과 죽어도 마 지않는 싸움을 싸우는 민중의 조직적 활동이다. (....) 현실의 죄악과 싸워 이김으로 나타 나는 하나님, 그것이 곧 그리스도다. 우리 종교는 현실적 과학적이어야 한다.”(3, 말씀:
146-7) 그렇다면 어떻게 현실과 싸울 것인가?
싸울 목표는 둘이다. “하나님과 민중. 둘이 하나다. 하나님이 머리라면 그의 발은 민중
에 와 있다. 거룩한 하나님의 발이 땅을 디디고 흙이 묻은 것, 그것이 곧 민중이다. (....) 하나님 섬김은 민중 섬김에 있다. 가장 높음이 가장 낮음에, 가장 거룩함이 가장 속됨에, 가장 큼이 가장 작음에 와 있다. 진리는 민중에 있다. 민중이 하나님의 발이라 하는 말 은 민중은 보이는 전체란 말이다. (....) 발을 씻음은 민중을 씻음이다. 절대 거룩한 하나 님, 그에게는 문제가 있을 것 없고, 더러워진 발인 민중을 깨끗이 하면 된다. 그래서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 하신 것이다. 지극히 작은 자는 민중이다. 작지만 크다. 작다는 것은 낮단 말이다. 하늘에 비하면 말할 수 없 이 낮지만 땅에서는 이보다 더 큰 것이 없다. 교회요, 나라요, 문화요, 세계요, 그것은 다 이 밑바닥 위에 세운 건축에 지나지 않는다.”(3, 말씀: 147-8) 이 민중, 이 씨을 일으키는 하나되는 믿음으로 지극히 작은 조직이 필요하다.(3, 말씀: 149) 그래서 그는 이미 퀘이커 를 만나기 이전에 퀘이커가 돼 있었고, 그래서 만나서 서로 같다는 것을 확인하였을 뿐 이다.
6. 항상 자라는 종교와 인생; 절대구원에 이르기까지 함석헌은 한국에 기독교가 전래된 것은 뜻이 있는 것이긴 하지만, 기독교국가나 기독 교사회를 만드는 것이 의미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이 민족에게 부여된 사명을 완 수하는데 그 책임을 맡겨 준 것이라고 판단한다. 불교가 못한 것 유교에게, 그것이 못한 것 기독교에게 책임을 맡겨 주었다는 것이다. 그 책임을 기독교가 다하지 못할 때는 다 른 것에게 그 자리를 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는 하나의 목적이 아 니라 수단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수단은 우리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주어진 것이다. 단순히 자기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도구로 선택한 것과는 다르다. 모든 종교는 하느님 앞 에 평등하다. 다만 그가 노는 역할이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다를 뿐이다.
그는 선생에게서 해방되고, 남의 종교로부터 벗어나서 자기 자신이 되고 싶었고, 자기 종교를 가지고 싶었다. 즉 ‘내 생각, 내 믿음’을 가지기에 맘을 모았다. 이렇게 되어 그는 서대문감옥에 있는 동안 크게 달라졌다. “고난의 역사라는 근본 생각은 변할 리가 없지 만 내게는 이제는 기독교가 유일의 참 종교도 아니요, 성경만 완전한 진리도 아니다. 모 든 종교는 따지고 들어가면 하나요, 역사철학은 성경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 여기에 곁들여서 내 태도를 결정하게 한 것이 세계주의와 과학주의다. 세계는 한 나라가 되어야 한다는 것, 그래서 국가주의를 내쫓아야 한다는 것이요, 독단적인 태도를 내버리고 어디 까지 이성을 존중하는 자리에 서서 과학과 종교가 충돌되는 듯한 때는 과학 편을 들어 그것을 살려 주고 신앙은 그 과학 위에 서서도 성립이 될 수 있는 보다 높은 것을 찾아
야 한다는 것이다.”(1, 뜻: 17-18) “성한 혼에 모든 종교는 다 하나님 말씀”(죽, 열: 280)인 것처럼 문제는 ‘하나님의 입’이요, 그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었다.
오직 제 종교만을 가지자는 한 사람의 노력에서 세상의 구원을 본다. ‘제 종교’란 하
느님과 맞대결하는 종교, 그래서 신도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신자 즉 중간자 없이 하느님과 마주 서는 한 신자만을 요구한다. “그리스도는 누구를 대신 시키지 않는 다. 누구를 대신 내세우지도 않고 누구의 대신 노릇을 하지도 않고 하나님 앞에 바로 서 는 인격, 그것이 그리스도다.”(죽, 열: 285) 하느님 앞에 직접 서고자 하는 그는 기독교인 으로서 노자와 장자를 좋아하고(끝: 56), 생명을 바쳐서라도 지켜야 할 진리가 있다면 그 것은 ‘모든 인간은 다 같이 살아야 한다’는 말을 하였다는 간디를 좋아하였다.(끝: 62) 동 시에 모든 것을 부정하는 것을 통하여 궁극적 긍정인 영원한 긍정에 도달한다는 칼라일 을 통하여 절대긍정주의자가 된다.(끝: 58) 한 번 만들어 놓으면 ‘네가 이제 알아서 살다 가! 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대로 해 봐’ 하고 하느님이 준 자유를 사랑한다.(끝: 68) 이 렇게 그는 자유인이 된 것이다. 그것으로 무엇을 하자는 것인가? 그 자유하는 개인은 독 불장군이 아니라, 전체를 나타내는 개인이다. 그래서 그러한 개인과 전체의 융합이 중요 하다. 현실 속에 나타나는 하느님은 바로 개인의 삶 속에서 전체를 하나의 흐름으로 나 타낸다.(끝: 역, 150)
하나라는 것은 “‘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고, 그 다 음 것도 그와 같으니 이웃 사람을 네 몸과 같이 하라’는 것을 실현하는 것이다. 그걸 받 아가지고 베드로와 바울이 ‘머리는 예수요, 우리는 다 몸이다’ 라고 말한다. 머리는 제일 높고 몸은 낮다는 것이 아니고, ‘우린 다 하나다’ 하는 걸 말하는 거다.”(끝: 고, 192-3) 개인과 전체는 함석헌에게서 분리된 것이 아니다. 한 개인 속에 다른 개인이 들어 있고, 다른 개인 속에 들어있는 내가 전체를 이룬다. 개인은 전체의 표현이면서 전체는 개개인 을 모아 놓은 것 이상의 역동성이다. 개인이면서 전체, 전체를 중심에 두면서 개인을 자 유롭게 하는 영성공동체를 함석헌은 새로운 종교의 모습으로 본다. 그것을 그는 퀘이커 에서 느낀다.
가능하다면 평화주의자 예수의 삶을 따르자는 것이다. 폭력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
이 퀘이커의 성경읽기기 때문에 전쟁을 반대하는 일에 투신한다.”(3, 퀘: 154) 그런 퀘이 커는 동양사상에 가장 가깝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함석헌은 언제나 노장사상과 불교의 선에 관심을 많이 가졌고, 특히 노장사상을 일상생활에서 활용하는데 크게 공헌하기도 하였다.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벌이는 행동은 목숨을 걸고 하는 수밖에 없다. 양심을 때리는
데는 자기희생을 각오하고 내 몸으로 폭탄이 되는 거다. 특히 평화주의자의 구령은 ‘자 기희생’이다. 죽자는 것이 아니라 부족하지만 정성으로 기도하고 노력하면 하느님이 역
사하실 것을 믿는 것이다.(3, 퀘: 165-6)
타종교와 대화를 좋게 보고, 노장사상이나 불교를 통해서도 하느님은 자기를 계시한다 고 본다. 함석헌은 타골과 간디를 읽으면서 보편주의적 입장에 서게 되었다. 꼭 기독교 에만 진리가 있다는 입장이 아니라는 말이다. 누구든지 자기 종교를 절대화해서는 안 된 다. 적어도 도덕적인 종교라면 진리는 하나이고 같은 거라고 주장할 수밖에 없다. 즉 종
교의 본질은 하나라는 입장이다.(3, 퀘: 155)
그는 언제부터 노장을 생각하게 되었을까? 그것도 그리스도교와 같은 차원의 진리를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것일까? 이 두 사이에 충돌은 없는 것일까? 제2차 세계대전이 가까 워 오면서부터 동양사상에 관심을 가졌다. 전쟁이 끝나고 나면 인간의 사회 살림이 근본 에서부터 크게 달라질 거라고 생각했다. 어떤 증거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경계가 달라지 는 정도가 아니라 생활방식과 사회구조 자체가 근본적으로 달라질 거라고 생각했다. 달 라지면 어떻게 달라질까? 종교의 역할이 무엇일까? 종교는 새로운 문명이 나오려고 할 때 앞장을 서서 지도하려고 할까? 문명에 앞장서서 인류를 건진다고 하는 성현들이 말한 것처럼, 과연 기존 종교들이 그 사명을 다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다가 그는 40세 때 그 대답을 부정적으로 결정하게 되었다. 현존하는 종교는 못할 거라고 보았다. 종교 들이 정치에 착되어 있기 때문이다. 제2차 대전이란 것이, 지금까지 있던 대국주의, 대 국가주의, 혹은 국가지상주의, 정부주의, 지배주의의 소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가관 이 새로워져야 된다고 생각했다. 정말 민중을 위해 있는 국가라야지 민중이 국가를 위해 서 존재해야 된다는 그따위 국가는 없어져야 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이런 뜻이라면 이를 위해서 동양사상을 알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3, 퀘: 156-7)
그렇게 하여 그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과 불교의 해탈도 이름은 다르지만 같은 것 으로 본다. 기독교에서는 죄, 인도식으로 표현하면 무지라고 표현하지만, 인간으로서 하 는 자리는 한 자리라고 본다. 이렇게 볼 때 그들 사이에는 충돌될 요소가 아무 것도 없
다. 아마 기독교에서 찾는 하느님이라고 하는 자리를 노자 장자가 말한다면 도라 하지 않겠느냐 생각한다. 그걸 관념적으로 분석하지 말고, 실제로 믿는 사람의 생각으로 보면
그 자리가 그 자리 아니겠느냐고 본다.(3, 퀘: 158)
함석헌은 내세에 대하여 ‘있다’거나 ‘없다’는 것으로 부정한다거나 긍정하는데 관심이
없다. 그것보다 궁극 목적은 사람이 영원 무한에 도달하는 거라고 본다. 죽어가지고 부 활한다는 것보다 ‘예수는 부활해 가지고 죽었다’고 함석헌은 본다. 죽어도 죽지 않는 생 명을 찾는 것이다. 즉 부활이란 나긴 물질적인 것으로, 육적인 것으로 났지만 생명이 인 간에게 와서는 소위 정신적이라고 하는 데까지 갔다. 아직도 물질적인 것을 완전히 벗어 나지 못하지만, 몸이라는 것은 죽은 후에 무슨 형식으로 되겠는지 그 때 가봐야 알 것이 니까 모르지만, 믿음으로 인해서 그 어느 세계에 올라갈 수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예수 와 소크라테스 같은 이가 나왔다는 것은 정신계가 있다는 증거다.(3, 퀘: 159-160) 그러니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내세라는 것은 오늘의 세계를 시간적으로 연장해서 죽은 후에도 영원히 호화로운 생활을 가지기를 열망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죽어서 하늘나라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정신이 높은 데 올라가는 것, 그것이 하늘나 라 가는 것이다.(3, 퀘: 160) 그래서 명상과 기도를 통하여, 하나는 비우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채우는 것을 통하여 진리의 자리에 선다.(3, 퀘: 169) 이것에서 기독교와 선이 만 나게 된다.
“미국의 어느 신학교에 갔더니 노장사상을 모르고서는 신학을 할 수 없다는 사람이 있 더군. (…) 하나님이란 형체도 없고 이름도 없다는 그것 얼마나 높은 사상이야요? (…) 이보다 더 강조하고 싶은 것은 다원의 세계입니다. 이 우주의 본의가 무엇인고 하니, 온 갖 꽃과 수만 가지 식물이나 곤충들만 보더라도, 다원의 세계이지요. 왜 이처럼 다원적 이냐는 샤르뎅이 다 지적했지만, 우주의 근본원리가 다(多)이면서 하나, 하나이면서 여럿 입니다. (....) 이 단계에서 인류가 생각할 것은 다원적으로 하면서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겠나 하는 것이 우리의 하나님이 원하는 바일 거요. 생명의 목표가 그런 거니까.”(3, 퀘: 172) 다원, 전체, 하나, 동양과 서양, 기독교, 불교, 선, 노장 따위를 구별하는 것을 그 는 싫어한다. 관념으로는 나눔이 될는지 모르지만, 삶으로는 모든 것이 하나 속에 포섭 된다는 것이다. 모두가 다 하느님의 한 자녀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종교는 완전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에게 종교는 완성된 것이 없다. 계속하여 변하고 흐르며 새롭게 달라진다. 그래서 과정의 종교, 길 위에 있는 믿음이요 자라나는 것만이 있다. 그것은 생 활종교라야 그 길을 따를 수 있다. 신도 미완성이요 자라는 것으로 보는 그에게 현실종 교와 믿음이 완성되어 나타날 수는 없다. 끊임없이 되어갈 뿐이다.
7. 함석헌의 기독교이해와 다른 사상체계 함석헌의 기독교이해는 동양사상과 긴 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특히 그의 예수 이해 와 동양철학의 관계를 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그가 말년에 심혈을 기울여 정 리하고 주장한 씨이란 것은 ‘맨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맨사람의 좋은 예가 예수다. “어린아이와 같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사람이 없다.” 예수에게서 맨사람은 ‘어린아이’ 였다. 어린아이가 되는 그 방법은 다시 태어나는 것이라고 하였다. 다시 태어남은 어머 니 탯집으로 다시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설령 그렇게 할 수 있다고 할 지라도 그것은 다시남이 아니다. 꼭같이 육으로 낳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다시남은 영으 로 낳는 것이다. 다시남은 곧 그렇게 낳는 것을 통하여 다시 어린아이가 되는 것을 의미 하는 것은 아닐까? 개인으로도 다시 나고,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으로서도 다시 나고, 모 든 것에서 다시 낳는 것이 곧 어린아이로 돌아가는 길이다.
이것을 동양에서도 함께 말하였다. 특히 노장사상에서는 동심론(童心Q)에서 이것에 깊이 관여하였다. 어린아이로 상징되는 그는 현덕(玄德)한 사람이다. 노자 28장을 보자. 지기웅 수기자 위천하계, 위천하계 상덕불리 복귀어영아(知其雄 受其雌 爲天下谿, 爲天下谿 上德不離 復歸於嬰兒). 수컷(하늘, 양)을 알고 암컷(땅, 음)을 수호하면 천하의 생명수 인 골짜기의 물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상덕인 자연을 잃지 않고, 영아의 동심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함덕지후 비어적자(含德之厚 比於赤子). 덕을 돈후하게 품게 되면 마치 영아와 같이 된다. 벌이나 독충이 쏘지 않고, 맹수나 새들도 덤비거나 쪼지 않는다. 이것이 노자가 보는 맨사람이다. 혹시 함석헌은 씨을 이 지경의 사람들로 본 것일까? 지극히 부드러우면서도 어린아이의 손아귀와 같이 단단하게 잡고, 부드럽기 한이 없어서 물컹한 듯 하지만, 모든 것을 다 함유하는 영아. 부드럽고 약함으로 주변을 다 정리하는 어린아이. 동심(童心)은 진심(眞心)이요, 진심은 최초부터 있었던 맘, 곧 흠이 없는 동심 이라는 것이지 않을까? 그 진심을 잃으면 참 사람, 즉 맨사람으로서의 씨을 잃는 것이 다. 이것이 씨의 맘이지 않을까? 함석헌은 기독교에서나 노자가 추구하는 진실된 사람 을 그것으로 본 듯하다. 조금 더 노장사상을 어떻게 보았는가 살펴보자. 함석헌은 노장이해, 아니 노장의 삶의 자세를 이렇게 이해했다.
“노자ㆍ장자는 한마디로 이 현상세계를 초월해 살자는 것이다. 초월한다는 말은 결코 내버린다는 말이 아니다. 이 현상계는 어떤 사람들이 생각하는 모양으로 꿈도 아니요, 허망한 것도 아니요, 내버려야 하는 악한 것도 아니다. 노자ㆍ장자는 그렇게 생각하지도 않았고 그렇게 살지도 않았다. 이 현상의 세계는, 그 안에 태어난 우리의 삶은, 우리의 선택으로 되는 것도 아니요, 피해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스스로 그런 것, 자연적인 것이다. 자연이므로 필연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2]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대하느냐 그 태도가 문제다. 사람은 생각하는 존재기 때문이다. 생각하므로 알게 되고(知), 좋고 나쁘고가 판가름되며(情), 그에 따라서 선택하고 버리고가 나타난다(意). “그럴 때 이 생각하는 나와 나를 둘러싸는 세계 또는 그 안에 있는 나와 마찬가지로 생 각하는 사람과의 사이에 복잡한 문제가 생긴다.”
“상대에서 절대를 보아 절대에서 상대가 나왔음을 안다. 그렇게 함이 현실을 초월함이 다. 절대도 영원 무한, 상대도 영원 무한, 상대에 살면서 절대에 하나 되기 때문에 ‘현지 우현’(玄之又玄)이라 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상대 속에서 그대로 절대와 하나 되기 때문 에 ‘중묘지문’(衆妙之門)이다. 노자ㆍ장자의 삶은 도에서 시작되고 도에서 끝난다. 끝이 시작이요, 시작이 끝이다.”[3]
도는 “모든 것의 근본이기 때문에 그것은 원인 없는 원인이다. 스스로 그런 것, 곧 자 연이라고 하기도 하고 아무것도 없음, 곧 무라고 하기도 한다.”[4] 그 도를 깨달으려면 어 떻게 하면 될까? 노자는 지적으로는 허무(虛無), 적막(寂寞), 염담(염淡)을 강조했고, 실 행으로는 무위(無爲), 유약(柔弱), 부쟁(不爭), 복귀(復歸)를 말했다.[5]
이렇게 주장한 노자를 평화주의자로 이해한다. “노자처럼 시종일관 순수한 평화주의를
부르짖은 사람은 없다. 더구나 살벌한 부국강병주의의 춘추전국시대였다.”[6] 노자는 무위 로 하자는 것, 정치로는 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것을 실제 삶에서 실현한 이가 장자다. 무치의 정치가 그것이다. 이것은 모든 생명의 삶의 원리에 적용된다. 즉 모든 생 명존중과 생명의 자기통치능력을 믿는 믿음이라고 하여야 할 것이다.
장자는 가난했지만, 벼슬을 싫어했고, 제삿집 돼지로 사느니 차라리 시궁창에서 뒹구
는 돼지가 좋다고 했다. 높은 관직을 주어 모시려는 왕이 보낸 사자에게 그것을 강조해 말한다. 그렇게 높은 자리에 앉는 대신 포악한 지배자의 착취 아래 사는 씨을 건져주기 위하여 불같은 믿음으로 살아간 사람이다. 임금, 학자, 호걸, 영웅이라는 존재들이 그의 붓끝에서는 한갓 지푸라기도 되지 못해 한다. 이러한 전통은 예수의 삶과도 통한다. 함 석헌은 이러한 삶의 자세를 그의 유명한 논설 ‘들사람 얼’(야인정신)에서 잘 표현한다. 이러한 정신은 구약성경에서는 이사야와 예레미아와 아모스 같은 선지자의 삶에서 그 모 범을 본다. 함석헌의 국가주의비판은 이러한 노ㆍ장의 무치의 정치와 예수의 하늘나라 개념에서 따온 것임이 분명하다. 현실세계에 살면서, 그것을 무시하거나 버리지 않으면 서 새로운 참의 세계와 나라를 꿈꾸는 것은 바로 이러한 사상들의 융합이라 할 수 있다.
8 퀘이커로서의 나의 삶 나는 퀘이커에서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삶을 일상생활에서 실천할 수 있을까? 믿음과 실천을 꼭같이 중요하게 여기는, 아니 하나로 보는 퀘이커로서 그러한 전통을 내 자신이 지킬 수 있을까? 그에 대한 깊은 회의가 온다. 특히 옛날에 비하여 사치스럽게 살 수밖 에 없는 오늘과 같이 고도로 문명화된 사회에서 과연 단순하고 소박하게 사는 것이 무엇 일까? 태어남 자체가 환경파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는 나로서 과연 자연 생태계를 파괴 하지 않고 사는 길이 무엇일까? 처음부터 끝까지가 오로지 경쟁과 다툼을 부추기는 삶의 패턴에서 함께 살고 평화롭게 살아가는 길이 무엇인가? 지나치게 체계화하고 조직화한 사회에서 과연 자연스럽고 바람과 같은 영의 인도를 받아서 살 수 있을까? 점점 국가주 의가 굳어져 가는 현대 사회에서 인류는 하나의 생명체계 속에 있다는 믿음과 철학을 어 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 맹세를 하지 않고, 서약하지 않는 것을 전통으로 삼아왔던 퀘이 커의 삶을 모든 것이 서류와 사인으로 이루어지는 디지털화한 사회에서 어떻게 자기 양 심을 주장하면서 살 수 있을까? 이와 같은 것을 생각할 때는 내 숨이 막히는 듯하다. 그 러나 그러한 답답하고 꽉 막힌 듯한 현실에서 작은 활로를 찾아 나가는 것이 또 퀘이커 가 찾아나갈 길이 될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현실에서 느낌으로 잡는 실천 가능한 좁 은 길을 찾는 것이 계시를 기다리는 삶이요, 일상생활에서 경험하는 신비로움이 되지 않 을까? 그러니까 신비함이 없는 듯한 삶에서 신비체험을 할 수 있는 날카로운 기다림이 필요한 시기다. 그래서 적어도 나는 다음과 같은 삶의 자세로 내 삶을 이끌고 싶다.
한반도는 한 민족은 하나의 나라를 이루고 살아야 한다는 이데올로기와 두 나라로 갈 라져서 다투는 현실 속에 있다. 나는 전 인류는 민족과 개별국가를 초월해야 한다는 철 학과 믿음 속에서 현상태에서 어떻게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 수 있을까에 깊 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러기 위하여 일단 내 개인이 먼저 평화가 되고, 화평한 맘으로 살아갈 것을 노력할 일이다. 그것과 동시에 주변의 사람들과 화평한 삶을 나눌 필요가 있다. 그것을 위하여 일단 나는 내 얼굴과 맘 속에서 미소를 잃지 말아야 함을 실천하려고 한다. 나와 다른 것을 그대로 인정하고 관용하는 훈련을 쌓아야 함과 동시에 획일화하려는 전통과 사회흐름과 대결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런 것과 동시에 한반도에서 어떤 전쟁도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캠페인을 벌이려 한다. 그것은 좌우의 이 념이나 노선의 차이와는 상관없이, 어떤 전쟁도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뜻을 가진 늙은이들과 함께 전 국토를 순례하면서, 갈등이 심화되었던 지역을 찾아서 평화의 기운 을 불어 넣는 일을 할 것이다. 우리 모두는 다르다. 동시에 하나다. 그래서 우리는 친구 들이다. 이것을 실현하는 순례의 길을 걷고자 한다.
평화의 기운은 개개인들이 가지고 있는 폭력성을 창의적으로 비폭력과 평화의 상태로
바꾸는 훈련이 필요함을 느낀다. 내 자신이 AVP(Alternatives to Violence Project) 활동 가로 참여하면서 직접 경험한 결과다. 누구에게나 자기 자신을 인정하고 존중하며, 다른 사람을 존중하며 돌보고, 모든 문제를 비폭력 평화의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신념과 빠르게 반응하고 행동하기 전에 깊게 생각하여야 하고, 최선에 대한 기대를 하는 것을 자신의 개인 생활과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훈련하고 실천하여야 한다. 그것은 내 자 신이 AVP훈련가로 여러 번에 걸친 워크숍을 진행하면서 확신하게 된 일이다. 그러므로 이 워크숍은 할 수 있는 데까지 내 중요한 생의 과제로 삼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다.
끊임없이 일반 시민과 비폭력 평화사상에 대한 연구와 강좌와 포럼을 통한 평화분위기 의 확산이다. 원수를 사랑하고, 적대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신뢰가 없는 자도 그것이 있 는 자처럼 신뢰하는 부드럽고 유연한 삶을 일상에서 훈련하는 일이다. 그것은 부드러움 이 강력함을 포섭하고, 유연함이 경직된 것을 녹인다는 도가철학의 일상화라고 하여야 할 것이다. 특수한 사람만이 그러한 훈련이 가능한 것이 아니라, 모든 일반 사람이 다 그러한 경지에 들어갈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믿음에서 시작한다. 그것이 곧 사람들에게 내면의 빛이 있다는 것, 내면의 스승이 있다는 것, 불성을 가지며 도와 접촉 할 수 있는 길을 가지고 있다는 공통의 믿음에서 시작된다. 이것이 바로 일상의 신비체 험이라고 할 수 있다. 신비는 곧 지극한 정상생활이다.
그러나 현대생활, 특히 문명한 현대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특히 한국인들에게는 일상의 쉼이 부족하고 깊은 숨쉼이 부족하다. 그래서 언제나 무거운 짐을 지고 스스로 자기 자신의 삶을 결정하고 이끄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압력과 분위기에 끌려가면서 힘 들어 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어느 철학자가 분석했듯이 현대사회는 피로사회다. 나 에게는 피로를 느끼는 그들을 이끌고 평안한 곳으로 안내할 능력과 비전이 없지만, 그분 들과 친구처럼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고 싶다. 물론 나는 특별 상담사도 아니고, 갈등해결사도 아니며, 그와 같은 훈련을 쌓은 사람도 아니다. 그러나 스스로 자기 자신을 정립하지 못하고 갈등하는, 방황하는 사람의 친구가 되고 싶은 맘이 참으로 많다. 그것이 내 나름으로 진리와 함께 살아가는 길이라고 느낀다. 그런 접촉, 만 남은 일대일의 개별만남도 가능하지만, 어떤 프로그램을 통한 소그룹으로 만날 수도 있 다고 확신한다. 아주 지극히 당연한 진리 안에서 살고 싶다. 즉 모든 것은 각각 다르다는 것을 인정한
다. 말도 다르고, 문화도 다르고, 관습도 다르고, 옷도 다르며, 생활하는 모습도 다르다. 그 다름은 하나의 큰 희망이다. 그러나 그것이 모든 것이 하나의 근원에서 나와서 종국 에는 하나의 근원으로 돌아간다는 진리를 거부할 수는 없다. 다시 말해서 내가 살고 있 는 지역의 시냇물은 가까운 산골짝에서 발원하여 흐른다. 그것은 곧 내 농토와 내 집의 마시고 사용하는 물을 제공한다. 나는 그 물 때문에 산다. 그러나 그 물은 흐르고 흘러 서 거대한 바다에 이른다. 바다는 한없이 넓지만 하나의 바다다. 거기에서 하나가 된다. 결국 모든 실개천과 강을 거쳐서 바다로 흘러든 물은 한 물로 친하게 지낸다. 모든 물은 곧 친구들이다. 이런 비유를 우리의 논의인 종교와 생활, 신앙과 실천에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종교의 핵심들은 각각 문화와 시대에 따라서 각각 다르게 출발하고 다르게 실천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추구하는 궁극은 하나에서 만난다. 그러므로 모든 종교는 결 국 친구다. 유대교 불교 유교 도교 기독교 민속종교가 곧 한 물에서 친한 친구로 살되 자기의 고유한 전통과 삶의 길을 유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나는 평화의 다리를 놓는 일을 하는 것이 내 과제 중 하나가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다리의 종류는 각종 분야별로 다양할 것이다. 나는 적어도 3 가지의 참여를 통하여 다리를 놓을 수 있을 것이다. AVP(Alternatives to Violence Project), Quaker 그리고 Amnesty International의 적극활동가로서 국경 없는 삶으로 다리를 놓은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하여는 다른 문화 종교, 사람(인종), 문명, 관습 따위를 직접 간접으로 경험하 고, 그 속에서 알짬을 찾아서 새롭게 배우는 일이 있어야 할 것이다. 열린 자세에서 항 상 찾아가는 자의 삶을 이끄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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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함석헌; 이단자가 되기까지, in: 함석헌,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함석헌 전집 4, 1983, 한길사. 195-7
[2] 함석헌: 함석헌 저작집 24, 『씨의 옛글 풀이』, 한길사 2009, 34쪽)
[3] 위의 책, 36쪽
[4] 위의 책, 37쪽
[5] 위의 책, 37쪽
[6] 위의 책, 3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