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1/09

2013 함석헌기념사업회 <씨알의 소리> 김조년 발행인

제21호 2013년 여름, 살림이야기


[ 길을 묻다, 길을 가다: 
함석헌기념사업회 <씨알의 소리> 김조년 발행인 ]

“모든 이의 내면에 빛이 있습니다”

진행 주요섭\사진 홍진훤








“참 조심하고 조심하자고 했다. ‘생각의 씨’ 하나 던져 뿌려 보자는 심정으로 나도 생각하고 그도 생각하는, 아니 우리 시대가 함께 깊이 생각하는 계기를 만들어보자는 맘으로 편지를 썼다. 무엇인가를 가르치려는 듯이 느껴지지 않도록 하자는 것이 매일의 다짐이었다.”


함석헌기념사업회의 <씨알의 소리> 김조년 발행인(67)은 2011년 한남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정년퇴임을 두어 달 앞두고, 제자 450여 명에게 매일 아침 써 보냈던 편지글을 모아 《청춘에게 안부를 묻다》라는 책을 펴낸다. 이 책의 머리말에 제자들에게 편지를 쓴 마음을 싣고 있다.
어른들은 자기보다 조금이라도 어린 이에게 자꾸 뭔가를 가르치고 이 길이 옳으니 따라오라고 다그치기 좋아하지 않던가. 그런데 김조년 선생은 어린 제자들을 ‘같이 생각하는 벗’으로 대우하며 조심스럽고 겸허한 태도를 보이니 다른 어른들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함석헌 선생의 가장 성실한 제자


씨알 함석헌 선생의 사상을 이어받은 가장 성실한 제자로 꼽히는 김조년 선생은 독일에서 사회학, 교육학, 정치학을 공부하고 돌아와 한남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로 26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다. 퇴임 후 문을 연 김조년 선생의 연구실 ‘옹달샘터’는 대전역에서 걸어서 30분 정도 걸리는 대흥동성당 맞은편에 자리하고 있다. 김조년 선생은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이하며 차를 직접 내려주었다.


살림이야기_ 한남대 교수직에서 퇴임하신 지 이 년이 되었는데, 요즘에는 주로 어떤 일에 주력하십니까?
김조년_ 지금도 일주일에 두 번씩 학교에서 강의를 합니다. 학기마다 대학원이나 학부 강의를 한 과목씩 맡아 왔는데, 이번 학기에는 학부생들을 가르치고 있어요. 퇴임하면서 연구실에 가득한 책을 보면서 저걸 다 어디에 두나 하다가 이곳 옹달샘터를 마련했어요. 마침 명상춤 수행공간을 찾던 아내가 옆방을 씁니다. 함석헌기념사업회 이사장을 맡고 있는데, 그전부터 하던 대로 <씨의 소리>를 격월간으로 계속 발간하면서, 올해는 《함석헌 전집》을 개정해서 펴내려 합니다. ‘정본을 만든다’는 마음가짐으로. 그게 일이 큽니다.


부인 이종희 선생은 명상춤 안내자로서 유명하다. 중세 유럽의 수도원 전통에서 비롯한 명상춤은 종교의 벽을 넘어 고요 속에서 평화와 행복을 찾는 영성훈련의 입문과정인데, 부부가 함께 독일에서 생활하면서 이종희 선생은 평화운동에 참여하고 명상춤을 배웠다. 일주일에 한 번씩 명상춤 수행모임을 연다. 또한 1970년 함석헌 선생이 창간한 <씨의 소리>는 1980년 7월 군부정권에 의해 강제로 폐간되었다. 1988년 12월에 복간하여 함석헌 선생이 돌아가신 뒤로는 함석헌기념사업회에서 맡아 격월간으로 내고 있다.








살림이야기_ 환경운동연합과 민들레의료생활협동조합에도 참여해 오시지 않았습니까? 퇴임하시고 새로 시작한 일들도 있으실 텐데요.
김조년_ 단체활동에서도 물러나서 지금은 고문을 맡고 있습니다. 그동안 해보고 싶던 일이, 하나는 자존감이 부족하여 방황하는 탈학교 청소년들, 또 하나는 성폭력 피해 여성들과 인문학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인문학을 통해서 치유하고 자기 자신을 되찾을 수 있도록. 그런데 용기를 내지 못하고 아직은 마음만 있어요. 지난해 3월부터 매주 화요일마다 고전공부 모임을 하고 있습니다. 30~40대 주부들이 자아정체감 때문에 방황을 많이 한다고 해요. 지인 한 분이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공부를 하고 싶다고 해서, 같이 고전을 읽는 모임이 자연스럽게 생겼습니다. 《에밀》과 《장자》를 읽었고 지금은 함석헌 선생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를 읽고 있는데, 아주 재미있습니다. 또, 격주마다 ‘옹달샘터 낭독회’를 열고 있습니다.


옹달샘터 낭독회는 매월 둘째, 넷째 화요일 저녁 두 시간 남짓 열리는데, 낭독자가 한 시간 가량 낭독하고, 그 뒤에 사람들이 음료수를 마시며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낭독하는 동안 음악가가 연주를 하기도 한다. 지난 5월 15일로 꼭 1년이 되었다. 6월에는 서울에서도 낭독회가 열릴 예정이다.

김조년_ 가을쯤에는 함석헌 사상 강좌를 열 예정입니다. 그리고 퇴직 교수들과 함께 ‘거리의 사회학’ 강좌를 만들어 보자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한 강좌에서 물어보았는데, ‘함석헌’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 없다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어요. 함석헌 선생은 폭력과 권위에 굴복하지 않는 생명평화주의자였기 때문에 군사독재시절 많은 탄압을 받았지요. 1980년대에는 글을 쓰거나 발언할 기회도 모두 차단당했어요. 그래서 세상과 단절될 수밖에 없었지요. 이제는 제자로서 선생의 생각을 좀 더 널리 알리도록 노력하려합니다. 선생의 글들은 교과서에 실리기에도 손색이 없는데, 지금까지 그렇게 못해왔지요.


김조년 선생이 함석헌 선생과 인연을 맺은 것은 고등학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1965년 굴욕적인 한일협정에 반대하여 14일 동안 삭발 단식하던 함석헌 선생에게, 고등학생 김조년이 편지를 보낸 것이다. 함석헌 선생은 이 고등학생에게 진지하게 답장했다. 편지 교류는 고등학생이 대학생이 되고 유학생이 되어서도 계속 이어졌고, 그 소년은 스승이 창간한 잡지를 다시 내고 사상 연구와 평화 실천 면에서 스승을 이어가고 있다.






살림이야기_ 20여 년 동안 내온 <표주박통신>은 요즘 안 하십니까?
김조년_ 퇴임 후에 이제까지 한 번도 못냈어요. 최근에 자꾸 묻는 사람들이 생겨요. 이제 안 하느냐, 오래도록 못 받았다 이런 얘기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해야겠다 하는 마음이 들어요. 사실 다른 것들은 내게 맡겨진 일이고, 내 일은 <표주박통신>인데요. 제가 하고 싶어서 해온 일이거든요.


<표주박통신>은 제자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시작했다. 1984년 독일에서 귀국하여 사회사상사 수업을 맡았는데, 당시는 대학생들이 수업에만 열중할 사회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래서 마지막 수업 때 30명의 학생들에게 주소를 받아 못 다한 강의 내용을 보내주기로 약속했다. 이듬해 ‘막스 호르크하이머’에 대한 내용을 편지로 보내며 <표주박통신>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두 달에 한 번씩, 홀수 달 마지막 날 편지를 썼다. 친구, 친지, 동료 등 편지를 받아보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전자우편으로도 보내며 2쪽짜리 편지가 36쪽 책자가 되었고 독자도 30명에서 2,500명으로 늘었다.


권위와 형식에 굴복하지 않는 퀘이커


함석헌 선생은 한국에서 많지 않은 ‘퀘이커’로서도 유명하다. 김조년 선생 역시 부인과 함께 퀘이커로, 매주 일요일 아침 옹달샘터에서 퀘이커 예배를 한다. 스승이 퀘이커라고 그대로 따른 것은 아니다. 독일에 유학하던 때 함석헌 선생이 베를린을 방문하면 동포들과 퀘이커들을 꼭 찾는 것을 보고 관심을 가졌지만, 함석헌 선생이 세상을 뜬 뒤에야 지역 모임에 나가보았고 한국에 돌아와서 대전에서 퀘이커 공부 모임을 하면서도 또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에야 퀘이커가 되었다.



“퀘이커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글쎄 저도 그게 무엇인지 굉장히 궁금합니다”라며 웃었다. 퀘이커는 350여 년 전 기독교 개혁운동이 일어나던 시대에 생겨났다. 특히 영국 국교의 형식성, 성경이 가르치는 진리와 삶이 떨어져 있는 것에 대한 반성으로 조지 폭스가 중심이 되어 시작한 종파이다. 퀘이커들은 미국으로 많이 건너갔는데, 그 가운데 유명한 이가 윌리엄 펜이다. 펜은 북아메리카 델라웨어 강 서쪽, 지금의 펜실베니아에 자리를 잡았다. 당시 영국의 개척자들은 인디언을 학살하고 몰아내며 땅을 차지했는데, 펜은 인디언 공동체와 최초로 평화협정을 맺고 공존하기로 했다.


김조년_ 퀘이커는 “오직 진리에만 복종하고, 형식과 권위에는 복종하지 않는다”는 신념을 갖고 있습니다. 그 시절에는 신분이 높은 사람 앞에서 모자를 벗고 무릎을 꿇는 관습이 있었다는데, 퀘이커들은 “너나 나나 같은 권위의 사람이다. 그러니 무릎을 꿇지 않는다. 우리는 진리에만 복종한다” 이랬다고 해요. 그러니 미움을 사서 감옥에 많이 갔겠지요. 감옥 중에서도 가장 환경이 나쁜 곳에 갇히곤 했답니다. 퀘이커들이 감옥에서 나와서 한 것이 감옥개선운동입니다. ‘감옥은 지옥이 아니라 사람이 살아야 할 곳이다’라고 적극적인 운동을 벌입니다. 본인들이 고생을 해봤으니까요.


퀘이커는 ‘신과 나 사이에 중간자가 필요없다’고 믿는다. 따라서 다른 종교와 달리 성직자나 예언자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믿음이 앞서가는 사람이 있어도 그것이 직책이 되거나 영속적인 직업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다. 그러다 보니 같은 크리스트교 사이에서도 한때 이단으로 취급받았다.


김조년_ 퀘이커는 종교 박해를 많이 받았지만,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끝까지 이겨내고 남았습니다. 그러면서 평화운동을 열심히 해서 지금은 평화종교라고 불릴 정도이지요. 평화운동의 핵심은 두 가지입니다. 방법은 반드시 비폭력으로, 그리고 ‘원수는 없다’는 것이에요. 국가적으로 적대적인 존재라고 해도, 생명은 국가를 초월하는 것입니다. 국가란 한시적인 보호 조직일 뿐 영속적이지 않아요. 그러니 인간의 생명은 국경을 초월하지요. 적대국의 사람도 나의 형제이므로 싸움을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병역거부’입니다.






살림이야기_ 학교일뿐 아니라 여러 시민단체의 활동을 해왔고, 물론 지금도 앞으로도 왕성하게 활동하시겠지만, 퇴직한 뒤 돌아보는 시간이 생겼을 것 같습니다.
김조년_ 살면서 순간순간 계속 돌아보아야 되리라고 생각해요. 지금은 개인보다는 공동으로 함께하는 운동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혼자 고요히 생각도 하지만 공동의 불이 비추도록 함께 기원하거든요. 촛불 하나보다는 둘셋 겹치면 더 밝게 비추듯이, 어차피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하니까요. 개인으로서는 이상대로 살아왔지만, 작은 공동체로 함께 살면서 실천해보지 못한 것이 아쉽습니다. 두 번째 아쉬움은 제가 좀더 적극적이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것입니다. 제가 남에게 막 강요를 못해요. 모든 사람은 다 내면에 스승이 있듯이 누구나가 똑같이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데, 그래서 그게 열리면 스스로 하게 되어 있는데, 막 다그쳐야 할까? 아니라는 거예요. 우리 사회의 큰 약점 중 하나는 사람들의 자발성이 부족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맘으로는 사람들과 함께 해보고 싶은 것들이 있지만, 스스로 마음에서 막 솟아올라서 하는 것이 진짜지 하며 망설이곤 합니다. 젊다면, 해 보는 게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살림이야기_ 사회학을 전공하고 사회복지학과에서 오랜동안 학생들을 가르치셨는데, 그 학문이나 학과가 사회활동과도 밀접하게 연결이 되지 않습니까?
김조년_ 저는 두 가지 희망이 있었어요. 첫 번째는 좋은 학자가 되면 좋겠다. 두 번째는 좋은 교사가 되면 좋겠다. 처음에는 좋은 학자면 족할 것 같았는데, 한국에서 강단에 서고 학생들과 접해 보니 학문만으로는 안 되더라고요. 대학생들도 학문으로 만나는 것보다는 선생과 제자로 만나는 게 더 많은 거예요. 그런데 돌아보면 두 가지가 다 실패야. 학문적으로 그렇게 업적을 쌓지도 못했고, 이론을 개발하거나 탁월한 연구를 내놓지 못했으니까요. 그래도 공부할 때 ‘내 것’이 무엇인가를 찾는게 중요하다는 것만은 깨달았지요. 독일에서 유학하는 동안, 내가 왜 여기에 사회학을 공부하러 왔나 하는 갈등을 많이 느꼈어요. 사회학이란 사회에 대해 공부하는 건데, 나는 한국에 속해 있단 말이에요. 그런데 독일에서는 어느 강좌에서도 한국사회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아요. 독일의 사회학은 독일사회라는 재료를 가지고 독일의 학문적인 칼로 그 사회에 맞는 이론을 만드는 거예요. 나의 재료와 칼은 모두 한국에 있다, 여기에서 다만 그 칼을 어떻게 만드는지는 금속공학을 배우듯이 방법을 배워가야겠다고 생각했지요. 또한 한국에 돌아와서 학생들에게 지식을 전달하기보다는 사회를 자기 눈으로 보고 자기 판단력으로 판단하는 계기를 만들어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얘기하잖아요? 고기를 잡아 주는 것보다 고기를 잡는 방법을 가르쳐야 한다고. 거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고기의 생리, 즉 어디에 살고 무엇을 먹는지 알게 해 주어야 해요. 그 자세를 유지하려고 해 봤는데, 뭐 좀, 실패했나 싶기도 하고.



매일매일 시간을 정해두고 고전을 한두 줄씩 읽자


살림이야기_ 한국사회에서 최근 청년들이 공동체나 공유문화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고 생활에서도 공동주거나 공유경제를 실천하는 움직임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과거의 전통적인 공동체와는 많이 다릅니다.
김조년_ 달라지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달라지는 게 좋으냐 나쁘냐를 이야기하는 건 사실 의미가 없어요. 뭐라고 하든 달라지는 건 달라지게 되어 있어요. 수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판단은 우리의 몫일 텐데 함께 사는 것, 그것이 단순히 나 개인의 확장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다시 말하면, “내가 똑바로 혼자 살면 되지, 사회가 어떻게 되든 간에”라는 생각이 확장되어 “우리들끼리만 멋지게 살면 되지” 라는 생각은 아니었으면 하죠. 삶은 빛이 되어 주변에 확산되어 나가야 합니다. 함께 산다는 것은 사회적 책임이 있다는 거예요. 어떤 삶을 살든 간에. 내가 옳은 삶을 살면 사회에도 옮음이 펼쳐져야 합니다. 이것이 함석헌 사상의 하나이지 싶은데. 함석헌 선생은 개인과 전체는 하나, 시간과 영원도 하나, 생과 사도 하나라고 하는데, 그런 이야기입니다. 개인의 정당한 삶은 사회개혁적 요소를 갖고 있다고 봅니다.


살림이야기_ 가장 작은 공동체라고 하면 가족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데, 가족공동체에서 꼭 지키는 원칙 같은 게 있을까요?
김조년_ 아이가 둘 있는데, 딸이 결혼하여 외손녀가 있고, 아들은 결혼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남에게 간섭하지 않고 스스로 하기를 희망한다는 원칙을 갖고 있는데 그것은 가족과 아이들에게도 적용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바깥에서 남들에게는 그렇게 말하면서 아이들에게는 이래라저래라 하면 안 되겠죠. 제가 보기에 우리 아이들은 나에게 압력을 받은 것 같지는 않은데…. 집 안팎으로도, 속과 겉이 일치하는 삶이면 참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참 힘든데요.


살림이야기_ <표주박통신>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삶과 사회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오셨습니다. 우리 《살림이야기》 독자들에게 한 말씀 나누어 주세요.
김조년_ 가장 핵심은 ‘스스로 하는 것’입니다. 살림은 생명의 표현이지 않습니까? 생명은 누가 하라고 하고, 하지 말라고 안 하는 게 아닙니다. 속에 생명의 힘이 차면 폭발하듯 나오는 것처럼, 한살림에 참여하는 모든 개개인이 건실한 생명력을 확보하면 좋겠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좋은 먹을거리를 갖는 것이 물론 중요하지만, 그것이 역사와 생태 등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스스로 철학하는 힘을 갖도록 성장하면 좋겠다는 뜻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개별로 자기 건강을 챙기는 먹을거리 운동일 뿐이지, 우리 생활 전체, 사회 전체를 변화시키는 것은 아니게 됩니다. 또 하나, 세상을 바꾸고 싶은 사람들이 모여 조직을 이루는데 자꾸 내부가 복잡해집니다. 전부 좋은 일을 하려 모였는데 왜 그럴까? 요사이 사람들이 많이 말하는 “영성이 부족하다”라는 게 그 이야기지요. 영성이란 말이 어려운데, 옛부터 조상들이 쓴 말로 바꾸면 ‘덕’이겠다 싶습니다. 우리에게 덕이 부족한 거예요. 남을 날카롭게 지적할 줄은 아는데 이게 상대에게 상처를 주어 오히려 더 큰 것을 해친다는 걸 모르는 겁니다. 그래서 뭉뚝해져야겠다고 생각해요. 노자의 이야기로 밝음이 너무 강하면 눈을 해치듯이, 우리의 일상생활이 다 그렇지요. 그럼 ‘저놈은 안 하는데 나 혼자 하면 손해 안 보나?’ 누구나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데, 글쎄요, 손해를 보면 얼마나 보겠어요?


살림이야기_ 공부하는 이들이나 사회운동가들 외에 평범한 생활인들은 매일매일 무엇을 하며 살아가야 좋은 삶일까도 큰 고민입니다.
김조년_ 우리 학생들에게도 추천하는데, 가정에서 모든 일을 하기 전에 시간을 정해 두고, 부부나 또 같이 시간을 낼 수 있는 사람들과 고전 한두 구절씩을 함께 읽어 보세요. 많이 말고 한두 구절만. 그러고 나서 해설하거나 토론하지 말고 명상을 합니다. 우리 부부도 일요일마다 함께 명상하고 평소에도 무엇을 읽었는지 알려주곤 합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이렇게 살자고 합의하여 지금과 같은 삶을 살게 된 건 아니에요. 살다 보니까 둘이 비슷하게 되었습니다. 한살림 조합원이라면 의식이 더 높겠지요. 또한 조합원을 받아들일 때 기초교육을 중요하게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삶은 각자 자기의 몫이지만, 삶이 더 재미있어지는 공부를 할 기회를 주면 좋지요.








김조년 선생은 고전을 현대 고전과 과거의 고전 등 두 가지로 나누어 추천한다. 현대 고전이란 신문과 잡지를 말한다. 기자들이 가장 최근의 관심사를 쓰기 때문에 그에 비하면 책이나 교과서는 이미 낡은 것이다. “4년 동안 신문만 열심히 읽어도 대학공부보다 나을 것”이라고 강조한다. 과거의 고전으로는 《까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함석헌 선생의 책 《뜻으로 본 한국역사》와 《씨에게 보내는 편지》을 함께 추천했다. 특히 <씨의 소리>의 권두언을 모아 엮은 《씨에게 보내는 편지》에는 “생의 마감을 앞두고 우리 모두에게 주는 유언 비슷한 간절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생각이 깊은 어른을 만나면 자꾸 이것저것 삶의 고민에 대한 답을 묻고 싶어진다. 그러나 김조년 선생은 한발 물러서서 씨를 뿌리는 사람이다. “저도 궁금하니 함께 생각해 봅시다”라고 천천히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며 상대의 의견을 구한다. 모든 이의 마음속에는 빛이 있으니, 답은 우리 스스로 찾아야 한다. 그러나 또한 함께 살아가는 존재이므로 서로 모여 함께 각자의 빛을 찾으면 더 좋을 것이다.



↘ 주요섭 님은 모심과살림연구소 소장으로 생명사상(모심)과 협동운동(살림)에 대한 연구와 교류활동을 펴나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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