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0

Myung-kwon Lee - 수피 신학의 정수, 사랑과 영혼의 춤

(1) Myung-kwon Lee - 라오스에서의 한달살이를 마치고 돌아왔다. 많은것을 보고 느끼며 배웠다. 이 부분은 차차... | Facebook

라오스에서의 한달살이를 마치고 돌아왔다.
많은것을 보고 느끼며 배웠다. 이 부분은 차차 페친여러분과 공유하고자 하며, 오랜만에 유튜브 강의를 다시 시작했다. 지난번 이슬람과 그리스도교의 대화적 관점에서 시작한 29회째 강의다.
그 가운데서도 이슬람 신비주의 수피즘에 관한 강좌로는 6번째다. 교재는 2008년에 저술했던 <무함마드와 예수 그리고 이슬람>(열린서원)을 토대로 했다. 이제 교재 전체를 유튜브에서 다 다룰수는 없지만 중요한 부분들은 거의 망라했다.
오늘의 주제와 내용은 다음과 같다.
수피 신학의 정수, 사랑과 영혼의 춤
(1) 내재와 초월, 그 참된 실재로 가는 길
수피라는 명칭이 앞에서는 ‘모직’과 관련된다는 뜻과 ‘모직을 입은 사람들’이라는 의미로 확대되어 고착되어 졌다는 점을 살펴 본바가 있다. 여기서는 수피의 본질적인 혹은 수피 신학의 정수를 살펴보고자 함으로 수피가 진정 어떤 의미를 띠게 되었는지의 그 고전적 정의를 살펴보는 것도 의미 있다고 생각 된다. ‘수피’라는 의미가 고전적 작품들 속에서 종종 ‘지식’이나 ‘인식’을 뜻하기도 하는데, 이때는 일반적인 지식을 뜻하기보다 인격적 전환을 통해 얻어질 수 있는 특별한 지식으로 소위, “영지(gnosis)”적 지식으로 불리기도 한다. 「하디스」(예언자의 언행록)에 따르면 이 지식은 자기와 신을 모두 동시에 아는 지식을 뜻한다. 이와 같은 신비적 직관으로서의 지식은 이미 앞에서 살펴 본 것이지만, 마음의 정화를 통해 얻게 되는 신과 자신에 대한 직관적 지식을 의미한다. 이러한 직관적 지식은 초월성과 현실성을 동시에 바라보는 직관이다.
수피가 꾸란의 메시지를 강조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신의 초월성도 중요하지만 현실성과 직접성 혹은 인간의 제 문제에 함께 하고 있는 현존으로서의 임재를 강조하기 위함이다. 알라의 전지성(全知性)과 현실성을 동시에 반영해 주는 꾸란의 본문은 여러 곳에 나타난다. “알라를 공경하라. 알라께서는 그대들을 가르치시며,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신다.(2:282)” 이러한 알라의 전지성(全知性)은 꾸란에 계속 반복 된다(49:13). “말하여 주어라. 너희들은 알라께 너희들의 종교를 가르쳐 드리겠다고 말하는 것이냐. 천지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아시는 알라께서 만사를 잘 알고 계시는 데도.(49:16).” 전지한 알라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는 꾸란의 본문을 읽어 보자.
“만사를 다 아는 분이다. 하늘과 땅을 엿새 동안에 창조하고, 옥좌 위에 오르신 분도 이분. 땅으로 들어가는 것, 땅에서 나오는 것, 하늘에서 내리는 것, 하늘로 올라가는 것, 그 모든 것을 아시는 분도 이분이다. 알라께서는 너희들이 하는 일을 잘 살펴보시는 분이시다.(57:4)”
이슬람 신학자들이 대체로 이러한 알라의 전지성에 대한 본문을 신적 초월성을 강조하는 은유로 해석하지만 , 수피의 경우는 신적 초월성과 동시에 신의 임재(臨在)성을 더욱 강조한다는 점이다. 위의 본문이 단순한 은유가 아니라, 오히려 실제적 상황으로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수피들은 이와 같이 초월과 내재를 동시에 강조하는데, 그 이유는 알라 하느님이 합리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지만 모든 것을 아시는 전지한 분으로써, 무(無)이기도 하고 ‘모든 것’이기도 하며, 멀기도 하지만 가깝기도 하며, 없는 듯하면서도 현존하고, 이것 같으면서도 이것이 아닌 그러한 측면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신을 이해하는 방식은 합리성이 아니라, 얼떨결에 알게 되는 ‘놀라움’ 또는 ‘당혹스러움’이라고 많은 수피들은 주장한다. 이러한 ‘놀라움’의 경험적 표현은 무함마드의 절친한 동료이자 초대 칼리프였던 아부 바크르(Abu Bakr)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인식 할 수 없기에 인식한다(Incapacity to perceive is perception).”수피들은 이러한 논리를 신의 인식에까지 적용하여, 우리가 신을 인식 할 수 없기에 분명한 인식으로 신을 인식한다는 것이다.
‘흥에 취한 수피즘’과 ‘멀쩡한 정신의 수피즘’을 대조적으로 이해하기도 하지만 오히려 실재에 이르는 3단계의 과정으로 설명하는 경우가 있다.
그 첫 번째 단계가 실제로 취해 있으면서도 멀쩡해 보이는 상태다. 이 상태는 가장 비난받을 만한 상태로서 사회적 체면과 일상의 덫 때문에 환영(幻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영혼이 치명적으로 위기를 맞고 있는 상태다. 이 상태에서는 신을 잃고 자신도 모르는 방황 하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 단계는 수피의 길에 입문한 자로서 제자의 길과 자기 정화의 단계를 거쳐 신의 사랑과 자비 그리고 신의 지식 속에 흠뻑 젖어 있는 상태다. 이때는 그 황홀함이 너무 커서 합리적인 분별력이 없어지게 되고 망아(忘我)적 상태에서 역설적인 언어를 사용하게 된다.
이 때는 바르게 ‘취한상태’라고 할 수 있지만 완전한 단계에 이른 것은 아니다. 세 번째의 마지막 단계는 ‘취한 그 이후의 멀쩡한 상태(sobriety after drunkenness)’이다. 이는 신에게 이른 이후 완전한 변형을 겪고 이 세상에 도움의 손길로 다시 돌아오는 것이다. 그들은 보석과 같은 존재가 되어 신적인 빛을 온 세상에 조명하게 된다. 여기서 상위의 두 단계는 “흥에 취한 상태”와 “취한 이후의 멀쩡한 상태로서” 이는 각각 파나(fana’, 無)와 바카(baqa’, 存在 혹은 實在)라는 유명한 개념들과 관련이 있다. 마치 선불교(禪佛敎)에서 처음단계의 긍정과 두 번째의 부정의 단계, 그리고 세 번째 부정을 통한 긍정의 단계를 설명하는 원리와도 유사하다. 그러나 그것도 구조적으로 유사하다는 것이지, 본질상 동일한 것은 아님은 자명하다.
파나와 바카, 즉 무와 존재(실재)의 실현은 처음에 기도로 시작 된다. 페르시아의 위대한 수피 시인 하피즈(Hafiz, 1389년 사망)가 “늘 기도하는 사람은 얼마나 행복한가?”라고 노래했듯이, 수피들은 양적으로 길게 늘어뜨리는 기도가 아니라, 질적인 수직의 기도를 한다. 그것은 디크르(念誦)의 탄원(歎願)적 기도문을 통해서 신으로부터의 일체의 ‘분리’는 제거되고 ‘연합’(타휘드, tawhid)이 이루어진다. 디크르의 도움으로 적절한 명상(fikr)의 과정을 거쳐 순금처럼 정화된 영혼은 디크르 속에서 지고한 형태의 희생적 제의로서 그의 영혼을 신에게 바치고, 마침내 무(無, 파나)와 실재(實在,바카) 속에서 그 자신이 처음부터 신과 분리 된 자가 아니었음을 깨닫게 된다.
꾸란 112장에서, “이분이시야말로 알라이시며, 유일한 분. 알라이시자 영원한 분. 낳지 않고 태어나지 않고, 오직 한분으로 그 분에 견줄 자 없다.”고 한 그 알라와의 연합을 이루는 것이다. 파나와 바카의 개념이 다음의 꾸란 본문에서 차용한 것임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땅위에 있는 것은 모두 멸망한다. 그러나 지고(至高)하시고 거룩한 분이신 당신의 주님의 모습만은 영원히 계시리라.(55:26-27)”여기서 우리는 파나 즉, 무(無)를 ‘비움’이라는 말로, 바카 즉, 존재(存在)를 ‘충만’이라는 말로 각각 바꾸어 써도 무방할 것이다. 이른바 ‘텅 빈 충만’의 상태에서 인간은 신과의 무한하고도 영원한 연합을 이루는 것이다. 여기서 자신을 무화(無化, annihilation) 시키는 것은 오직 신만이 참된 실재임을 말하는 것이며, 우상과 거짓된 자아의 옷을 벗고 참된 실재를 직면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앞서 말한 할라즈의 독특하고 신비적인 발언, 즉 “내가 실재다”라는 말을 되새기게 해 주는 것이다. 이것은 디크르의 알파요 오메가라고 할 수 있는 사하다(Shahadah) 즉, 위대한 신앙고백인 “다른 신은 없고, 오직 알라만 있다”는 전자의 부정(否定)과 후자의 절대긍정(肯定)을 다른 측면에서 보여주는 고백이기도 하다. 전자의 부정은 모든 거짓된 실재의 부정(無, annihilation)이며, 후자의 긍정은 참된 실재의 긍정(存在, affirmation)이다.
All reactions:
Philo Kalia, 우희종 and 98 others
11 comments
Like
Comment
Share
Most relevant

이승종
이 박사님,
먼 순례의 여정을 건강하게 마치고 오셔서 너무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