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0/10

알라딘: [전자책] 목민심서 : 마음으로 읽는 다산 정신 - 청소년 철학창고 07

알라딘: [전자책] 목민심서 : 마음으로 읽는 다산 정신 - 청소년 철학창고 07


[eBook] 목민심서 : 마음으로 읽는 다산 정신 - 청소년 철학창고 07 | 청소년 철학창고 7
정약용 (지은이),장승희풀빛2012-06-18 
원제 : 牧民心書



종이책의
미리보기
입니다.

전자책 미리 읽기

전자책정가
7,000원
판매가
7,000원
쿠폰할인가
6,300원
10% 할인쿠폰 받기
마일리지
350원(5%) + 멤버십(3~1%)
+ 5만원이상 구매시 2,000원
Sales Point : 126

9.7 100자평(3)리뷰(3)
이 책 어때요?
종이책
9,900원 (+550원)


[eBook] 청소년 철학창고
선택한 도서 총 1권 / 구매가 7,000원
종이책 페이지수 : 236쪽

책소개
조선 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다산 정약용이 지은 <목민심서>. 백성을 다스리는 목민관이 해야 할 임무와 자세를, 다산 자신의 생각을 다양한 역사책과 사례들을 참고해 정리한 책이다.

한문 원전으로 14권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에서 청소년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핵심적인 내용만 뽑았다. 이를 가상의 인물 '재용'과 다산 선생과의 대화체 방식으로 재구성한 것. 본문에 나오는 어려운 한자 단어는 최대한 현재 용어로 풀거나 뜻을 설명했고, 인명, 지명 등 풀어쓰기 어려운 용어는 괄호나 각주로 설명했다.


목차


'청소년 철학창고'를 펴내며
들어가는 말

1 다산 선생님과의 만남
2 목민관의 부임 길(부임 6조)
3 목민관의 자기 수양(율기 6조)
4 법과 도리에 기초한 공무 처리(봉공 6조)
5 목민관의 지극한 백성 사랑(애민 6조)
6 이전.호전.예전.병전.형전.공전 각 6조
7 흉년에 백성을 구제함(진황 6조)
8 사랑을 남기고 물러나는 길(해관 6조)
9 다산 선생과의 이별

마음으로 쓰는 목민의 길, <목민심서>
다산 정약용 연보


책속에서


군전과 군포는 훈련도감에서 항상 독촉하는 것이다. 여러 번 걷은 경우는 없는지 잘 살피고, 아전들이 제멋대로 물리치는 것을 금지해야만 원망이 없다.

'세금으로 내는 물건 가운데 돈이 가장 폐단이 없고 쌀도 살피기가 쉽다네. 그런데 무명베와 삼베는 올이 성글고 가는 차이가 너무 많고, 폭에 따라 값도 다르다네. 길이... 더보기



저자 및 역자소개
정약용 (지은이)



조선 말기의 실학자. 정조 때의 문신이며, 정치가이자 철학자, 공학자이다. 본관은 나주, 자는 미용(美庸), 호는 사암·탁옹·태수·자하도인(紫霞道人)·철마산인(鐵馬山人)·다산(茶山), 당호는 여유(與猶)이며, 천주교 교명은 요안, 시호는 문도(文度)이다.
1776년 정조 즉위 호조좌랑에 임명된 아버지를 따라 상경, 이듬해 이익의 유고를 얻어 보고 그 학문에 감동받았다. 1783년 회시에 합격, 경의진사가 되었고, 1789년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고 가주서를 거쳐 검열이 되었으나, 가톨릭 교인이라 하여 탄핵을 받고 해미에 유배되었.... 10일 만에 풀려나와 지평으로 등용되고 1792년 수찬으로 있으면서 서양식 축성법을 기초로 한 성제(城制)와 기중가설(起重架說)을 지어 올려 축조 중인 수원성 수축에 기여하였다.
1794년 경기도 암행어사로 나가 연천현감 서용보를 파직시키는 등 크게 활약하였고, 1799년 병조참의가 되었으나 다시 모함을 받아 사직하였다.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1801년 신유교난 때 장기에 유배, 뒤에 황사영 백서사건에 연루되어 강진으로 이배되었다.
다산 기슭에 있는 윤박의 산정을 중심으로 유배에서 풀려날 때까지 18년간 학문에 몰두, 정치기구의 전면적 개혁과 지방행정의 쇄신, 농민의 토지균점과 노동력에 의거한 수확의 공평한 분배, 노비제의 폐기 등을 주장하였다.
저서로 『목민심서』 『경세유표』 『정다산전서』 『아방강역고』 『마과회통』 『자찬묘지명』 『맹자요의』 『논어고금주』 『춘추고징』 『역학제언』 『상서지원록』 『주역심전』 『사례가식』 『상례사전』 『악서고존』 『상서고훈』 『매씨서평』 『모시강의』 『삼미자집』 등이 있다. 접기
최근작 : <목민심서>,<다산 정약용의 중용>,<간추린 목민심서> … 총 254종 (모두보기)

장승희
저자파일
신간알리미 신청

서울대학교 국민윤리교육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민족문화추진회 국역연수원에서 수학하면서 다산 정약용을 깊이 있게 연구했다. 현재 구일고등학교 교사로 재직 중이며, 서울대학교 강사로 출강하고 있다.

주요 논문으로 <퇴계와 다산의 교육사상 연구>, <전통윤리교육론 정립을 위한 시론적 연구>, <조선 후기 실학의 사회윤리적 성격>, <정약용의 중용론에 나타난 실천윤리적 연구>, <다산 정약용의 도덕적 자율성에 관한 연구> 등이 있다.

최근작 : <유교사상의 현재성과 윤리교육>,<유교와 도덕 교육의 만남>,<전통윤리교육론> … 총 6종 (모두보기)


평점 분포

9.7


구매자 (2)
전체 (3)
공감순





어려울 수 있는 내용을 쉽게 풀어쓴 책입니다. 중요한 건.. 관직은 봉사직이고 얼마나 맡은 백성을 사랑하며 다스리느냐겠지요.. 시대가 흘러도 변하지 않는 건 있나봅니다.
AlbGre 2013-03-25 공감 (0) 댓글 (0)
Thanks to
공감



중학생이 읽기는 좀 어려운것같지만 그래도 유익한 책입니다.
SUN s.h 2011-05-11 공감 (0) 댓글 (0)


마이리뷰
구매자 (0)
전체 (3)
리뷰쓰기
공감순




다산을 기리며... 

온 세상이 썩은 지 오래다 (天下腐已久). 부패하다 못해 썩어 문드러졌다 (腐爛).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주장하며 조선의 대변혁을 주도했던 실학의 집대성자 정약용.

그 사후 유구한 세월은 쉼 없이 흘러갔지만 그가 남긴 위대한 철학은 한치 앞을 못 보는

범인들에게 가슴 어린 한줄기의 빛으로 다가오고 있다.

1762년 정약용은 경기도 남양주에서 태어났다.

그는 가히 천재란 이름이 부족할 정도로 탄탄한 젊은 시절을 보낸다.

장원급제, 암행어사, 좌, 우부승지, 정조를 위한 수원성 축조등

그런 그를 정조는 지극히도 아끼고 사랑했었다.

하지만 그의 입신양명과 그가 이룬 업적은 결국 그를 시기하는 벽파에게 화를 자초하게 된다. 시대는 너무도 많은 것들을 요구했던 것이다.

그는 신유박해와 황사영의 백서 사건으로 강진으로 유배를 간다.

바다 넘어 섬 하나면 다을것 같은 흑산도는 그의 형 정약전의 유배지다.

정조의 죽음과 세상에 대한 배신은 그에게 참기 어려운 고통을 주었을 것이며

천주교를 둘러싼 가족들의 피해는 그가 왜 정치를 해야만 했는가 라는 많은 의문을

남기게 된다.

조선 후기는 말 그대로 나라가 내리막을 걷는 시기다.

전쟁의 소용돌이는 미약한 정치세력들에게 새로운 권력을 추구하게끔 탐욕을 주었을 것이며

황폐해진 조선의 땅에서 백성들은 의지 할 곳 없는 고통을 당하게 된다.

정약용은 암행어사와 고을 현령 시절 이러한 피폐된 백성들의 고통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실사구시를 주장하던 그는 새로운 정치 인생에 돌아 갈수가 없었다.



19년 동안의 강진 유배는 그에게 새로운 삶의 지표를 열어준다.

그리고 그는 ‘여유당 전서’라는 조선의 보고를 남겨주었다.

저서 중 하나인 목민심서(牧民心書)는 그가 얼마나 백성을 위하고 사랑하는지를 보여준다.

목민(牧民)은 백성을 다스린다는 뜻이다.

무릇 벼슬을 하는 자는 임금의 명을 받아 백성들의 어리석음을 깨우치고 현명한 판단으로

백성을 다스려야 한다.

난세의 중심에서 세상을 올바로 바라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세상은 중심을 잃은 채 이리저리 표류하는 조각난 배와 같은데…

진정으로 나라를 위하는 선비는 목민하는 선비다.

다산의 정신 목민심서를 마음껏 호흡해 보자.

목민심서는 모두 12편으로 각 편을 6조로 나누어 72조로 되어있다.



그 첫번째가 부임의 길(부임 6조)이다.

부임은 제배(除拜), 치장(治裝), 사조(辭朝), 계행(啓行), 상관(上官), 이사(莅事)로 이루어져 있다. 임금의 명을 받들고 수령으로 떠나는 목민관이 임금에게 임명장을 받는 제배에서부터 부임지에서 일을 시작하는 이사까지의 과정을 다루고 있다.

‘벼슬은 구해도 좋으나 목민관은 구해서는 안된다’

정약용은 매점매석이 판치는 정치 풍토 속에서 백성을 직접 만나고 구휼하는 수령의 역할을 스스로 구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목적이 불분명한 수령의 역할은 결국 백성들의 고충만을 야기시킬 뿐 설령 임금의 허락도 능력이 부족하다면 자리를 물러나야 하지 않겠는가?

그만큼 수령의 역할은 목민에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는 것이다.

수령은 검소한 치장과 과묵한 계행으로 부임지로 향한다.



다음은 목민관의 자기수양을 다룬 율기6조다.

율기는 칙궁(飭躬), 청심(淸心), 제가(齊家), 병객(屛客), 절용(節用), 낙시(樂施)로 되어 있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란 고사성어를 풀이 한듯한 목민관이 갖추어야 할 자기수양의 길이다. 하지만 청심의 푸른 마음이 없다면 어찌 수신제가가 되겠는가?

청백리를 벼슬하는 선비의 최고의 우상이라 말만하지 않고 그릇된 사대부들의 관행을 바로 잡았더라면 조선은 결코 망하지 않았으리라.

또한 안에서 세는 바가지가 어찌 바깥에서 세지 않으리요?

권력을 힘으로 사적인 욕심을 가득 채운 위정자들의 말로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그들을 둘러싼 오욕이 어찌 찌꺼기라도 남아있으리요.

무릇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올곧은 마음으로 백성을 대한다면 백성들도 이를 겸허히 따를 것이며 권문세가에 대한 경계는 자신을 선택한 임금에게 크나큰 충성이 될 것이다.



봉공6조는 선화(宣化), 수법(守法), 예제(禮祭), 문보(文報), 공납(貢納), 왕역(往役) 이다.

수령으로서 법과 도리에 기초한 공무처리의 내용과 처리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수령은 하해와 같은 임금의 은총을 백성들에게 덕화시켜야 한다. 아무리 좋은 제도도 백성들에게 미치지 못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수령은 법을 지킴에 한치의 오차도 없어야 하며 서릿발 같은 공문서의 처리로 백성들에게 한치의 의심을 갖게 해서는 안 된다.

예나 지금이나 공직자 분들이 봉공 6조를 꽤 차고 있다면 무슨 걱정이겠는가?



다산의 지극한 백성 사랑은 애민 6조에 부족함이 없다.

양로(養老), 자유(慈幼), 진궁(振窮), 애상(哀喪), 관질(寬疾), 구재(救災)로 이루어진

애민 6조는 주례의 보식유정을 다듬어 그 부족함을 더했다.

노인이 문제가 되고 있는 시대에 양로를 말하는 게 너무 씁쓸하기만 하다.

한 시대를 이끌었던 전 세대에 대한 예우는 곧 나라의 아름다운 미풍을 남기는 일인데 우린

어찌하여 서구의 자본주의에 옛 정을 잃어가는가?

누구나 세월의 흐름을 비켜 갈수는 없다. 조그만 상 앞에서 훈시를 듣던 옛 정이 그립다.

전쟁 고아를 비롯한 버려진 아이들과 병들고 가난한 이들을 위한 구제 역시 수령의 막중한 역할이다. 결혼에 대한 관념이 지금과는 엄청나게 다른 시기이기에 남자 25세 여자 20세에

결혼을 하지 않으면 벌을 준다는 내용은 멋쩍은 미소를 짓게 한다.

이,호,예,병,형,공 6편은 수령을 도와 아전들이 행하는 업무에 관한 내용들이다.



다음은 진황이다.

진황은 비자(備資), 권분(勸分), 규모(規模), 설시(設施), 보력(補力), 준사(竣事)로 흉년에 가난한 백성을 구제하는 것을 말한다.

재난은 예고 없이 찾아온다. 수령은 물자를 미리 준비해 흉년과 재난에 대비해야 한다.

백성들이 가장 힘든 것이 재난의 피해에 대한 구휼일 것이다. 어려운 일에 닥칠수록 사람의 재능을 알수 있는법 수령의 재능은 곧 백성들의 생과 사를 책임진다. 특히 나라가 어려울 때 스스로 나누어 도와준다는 의미의 권분은 10년 전 IMF를 생각나게 한다. 우리 민족은 언제나 일심으로 나라를 구하고자 했다. 하지만 정치는 언제나 뒷북만을 친다.

전황은 아주 자세하게 복구 사업에 대한 기록을 담고 있다. 어려운 사람에게 몸과 마음을 잃은 슬픔을 되풀이 하지 않게 하기 위한 수령의 역할은 결코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권불 10년이라던가 아무리 막강한 권력도 결국은 내리막이 있다. 수령은 언제나 그때를 준비 해야 한다. 다음을 위해 권력이나 부를 남기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다산의 해관 6조는 사랑을 남기고 떠남을 말한다.

체대(遞代), 귀장(歸裝), 원류(願留), 걸유(乞宥), 은졸(隱卒), 유애(遺愛)으로 이루어진 해관6조는 재임기간 수령의 모습을 그대도 알수 있다. 흔히 떠나는자의 뒷 모습이 가장 아름다워야 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수령의 덕이 온 고을에 미치어 수령을 잊지 못함에 떠나고 나서도 그 아이의 이름을 수령의 성으로 짓는 것을 보면 얼마나 백성이 그 수령을 사랑했는지 짐작이나 하겠는가?

철새처럼 나타나 물 한모금 마시고 사라지는 요즘의 정치 풍토에 너무도 갈망적인 말이다.

한달 전 지자제 선거가 끝났지만 우린 아직까지 당선자의 이름도 모른다.

아마도 다음 선거 때까지 그럴 것 같다.



조선 후기는 난세였다.

세상의 모든 이들이 권력의 품에 파고들기 위해 갖은 술수를 썼지만 역사는 부와 권력에 결

코 달콤한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진정 나라를 위한다고 소리치던 수 많은 위정자들은 어디로 갔는가?

세상의 풍파를 등지고 오롯이 강진에서 백성을 사모했던 정약용,

그의 서릿발 같은 눈빛이 매섭게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위엄 있는 선배로서의 훌륭한 기상과 넘치는 선비로서의 풍모는 비단 정치인이나 공무원들뿐만 아닌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우리들에게 가슴 속 깊이

깊이 새겨져 있다.

나라가 잘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백성의 만족이 곧 나라의 만족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모든 사회에는 규칙이 있다. 넘치거나 부족하진 않는 규칙들..

우리가 다시금 다산의 목민에 마음을 더하는 것은 그가 남긴 위대한 철학이 사라지지 않을

고전이라는 것이다. 결코 변하지 않을….
- 접기
북로드 2006-08-08 공감(8) 댓글(0)
Thanks to
공감



쉽게 읽는 목민심서



* 임명된 직후에 재물을 함부로 써서는 안된다.
* 뇌물을 주고 받는 일을 누가 몰래 하지 않겠냐마는, 밤중에 한일도 아침이면 드러난다.
* 법으로 금지한 것과 형법에 실린 것은 매우 두려워해야 하며, 감히 어기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 폐해가 없는 법은 잘 지켜 바꾸지 말고, 합리적인 관례는 지켜서 없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 감사는 법을 집행하는 관리니, 감사와 오랜 친분이 있다 해도 그것을 믿고 의지해서는 안된다.


위와 같은 글귀가 어느 공무원의 사무실에 적혀있는 것을 본다고 가정해보자. 이상하거나 부자연스럽다고 생각되는 내용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200년 전, 다산 정약용이 목민심서에 썼던 말들은 바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것이다.

정치인와 행정가들로부터 추천할만한 책으로 단골로 꼽히고, 베트남의 호지민이 열심히 읽었다는 책, 목민심서. 한 때 나도 원문 번역본으로 부분적이나마 읽어보았던 적이 있으나 사실 크게 기억에 남지 않는다. 이번에 풀빛에서 청소년을 위해 쉽게 풀어쓴 목민심서를 보면서 다시 한번 무릎을 쳐가면서 재미있게 읽어내려갔다.

다산은 맹자가 가축을 기르는 것을 목민(牧民)에 비유한 것에 따라 백성들을 보호하는 지방관을 목민관이라 하고, 귀양살이를 하고 있는 자신이 몸소 실행할 수 없기에 심서(心書)라 이름 붙인 책을 썼다. 그 내용은 목민관의 부임 길(부임), 목민관의 자기 수양(율기), 법과 도리에 기초한 공무 처리(봉공), 목민관의 백성 사랑(애민), 지방 행정의 실무(이·호·예·병·형·공전), 흉년의 백성 구제(진황), 물러나는 길(해관) 등으로 구성하였다.

목민심서는 지방관이 애민 정신에 입각하여 지방행정의 정도(正道)를 걷도록 도움을 주는 지침서이다. 다산이 "다른 벼슬은 구해도 목민관만은 구해서는 안된다"고 한 것처럼, 수령으로 총칭되는 지방관의 자리는 백성들의 삶을 실질적으로 좌우하는 중요한 자리였다. 그러나 조선 전기부터 경관보다 외직은 양반들에게 외면을 받았고, 조선 후기에 이르면 대과에 급제한 문신보다 무과 출신의 무신이나 음직(음서)으로 관직에 들어선 자들이 주로 외관으로 부임하였다. 필연적으로 수령의 자질은 떨어질 수 밖에 없었고, 지방행정의 기강도 더욱 흐트러질 수 밖에 없었다.

지방관으로 임명되는 그 순간부터 부임지에 도착하여 그 임무를 마칠 때까지 지방관으로서의 정도를 걷는데 도움이 되는 아주 상세한 지침들을 다산은 이 책, 목민심서에서 제시하고 있다. 큰 지침의 성격에서부터 "도장의 글자는 흐리거나 닳지 않아야 하며, 화압(서명)은 조잡해서는 안된다"는 아주 구체적인 조언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한 지침들을 명시하고 있다.

특히 수령의 청렴에 대한 강조는 매우 강한 어조로 자주 언급하고 있다. "개인이 쓰는 비용을 절약하는 것은 보통 사람도 할 수 있지만, 관청 창고의 재정을 절약하는 이는 드물다. 공공물건을 개인 물건처럼 아껴야 현명한 수령이다"라는 지적은 매우 설득력이 있고, 또한 지금까지도 여전히 의미있는 조언이라고 생각된다. 공직자의 부정부패는 금전적인 문제와 관련되는 경우가 가장 많지 않은가. 이에 못지않게 빈번한 것이 도덕성 문제. 이에 대해서는 '수령의 자기 수양' 편을 참고할만하다.

수령이 해야 할 일 중에 노인을 잘 모시는 양로, 어린이를 보살피는 자유,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는 진궁, 상을 당한 사람을 도와주는 애상, 병자를 돌보는 관질, 이재민을 구하는 구재에 관한 부분도 인상적이다. 주례의 관련 내용을 다듬어 제시했다고 하는데, 오늘날의 복지 행정에 적용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나이가 차도록 혼인하지 못한 사람을 혼인시켜야 한다는 조목을 보면, 수령의 역할이 얼마나 광범위했는지 그리고 얼마나 세심한 정성을 기울여야 했는지 알 수 있다.

이 책은 청소년들도 쉽게 읽을 수 있는 구성이 돋보인다. 재용이라는 소년과 다산 선생이 서로 대화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이해를 도와준다. 

전체적으로 목민심서의 체제를 따라가면서도 주요 내용들은 파란색으로 돋보이게 제시하고 그에 대한 설명을 대화체로 보충해주는 형식이다. 형태만 대화체인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대화하듯이 편안하게 쉽게 설명되어 만족스럽다. 아쉬운 점은 이·호·예·병·형·공전이 어렵고 전문적이기 때문에 간단하게 목차만 언급하고 넘어간 것. 이 부분에 대한 개인적인 관심 때문에 생략이 아쉽게 느껴지는 것일 수도 있지만, 조금만 더 자세하게 혹은 부분적으로 주요 내용만이라도 소개했으면 어떨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수령은 자신이 관할하는 마을에 있어서 왕과 같은 존재였다 한다. 이것을 백성 위에 군림하는 지배자로서 이해하느냐, 백성의 삶을 보살펴주고 책임지는 자로서 이해하느냐에 따라 다른 결과를 낳았으리라. 다산의 충고는 200년이 흐른 21세기에도 여전히 유효하며, 반대로 200년전의 상황을 이해하고 복원함에 있어서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본다.
- 접기
도서관 2006-12-21 공감(1) 댓글(0)
Thanks to
공감



목민심서를 읽고서



다산 정약용은 목민심서를 통하여 수령이라는 자리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한 고을을 다스리는 수령은 나라를 다스리는 왕과 비슷한 일을 하는 것이기에 수령자리에서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에 관한 내용들이 이 책 속에 있다. 이 책은 수령이 처음 그 자리에 오르고 복귀하기까지의 거의 모든 이야기를 상세하게 담고있디. 처음 배정 밭은 고을로 향하는 중 어떤 마음가짐과 몸가짐을 가지고 있어야하는지, 그리고 나중에 임기가 끝나서 고을을 떠나는 방법까지를 책에 담았다는 것은 그만큼이나 수령 자리를 중요히 여겼던 정약용의 생각을 알 수 있었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다른 사람을 위해 산다는 것은 막중한 책임감이 따르고 그 부담을 이겨낼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단순히 하고 싶다는 마음 뿐만 아니라 이를 위한 능력이 뒷받침 되어야 함을 중요시 여겨야 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정약용이 쓴 목민심서는 세월이 지나도 이 책이 가지고 있는 뜻은 변하지 않는다.

조선시대를 넘어 현제까지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는 목민심서를 많은 사람들이 읽으면 좋겠다.
- 접기
ghdi0204 2021-05-09 공감(0) 댓글(0)
Thanks to
공감




마이페이퍼
전체 (2)
페이퍼 쓰기
좋아요순



2012년, 올해는 다산 탄생 250주년



<삶을 바꾼 만남> 정민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 자포자기해서는 안된다. 뜻을 지극히 하고 힘을 부지런히 쏟아 책을 읽고, 책을 베끼고, 글을 지어야 한다. 허투루 시간을 보내면 못 쓴다. 폐족(廢族)으로 글을 못 읽고 예법도 없다면 더더구나 어찌 견디겠니. 보통 사람도 다 백 배의 노력을 더해야 간신히 사람 축에 낄 수 있을 게다. 내 고생이 몹시 심하지만, 너희가 능히 책을 읽고 몸가짐을 삼간다는 말을 듣는다면 아무 근심이 없겠다. 큰아이는 4월 10일쯤 말을 사서 타고 오너라. 하지만 헤어질 생각을 하면 벌써부터 마음이 아려온다. 임술년(1802) 2월 7일.(27쪽)



...... 절대로 과거를 보지 못하게 되었다고 주저 물러앉지 말고, 부지런히 경전을 읽어야 한다. 독서하는 종자가 끊어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란다. 2월 17일(28쪽)

다산이 유배지에서 아들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로, 자식을 걱정하는 어버이의 마음이 잘 드러난다. 폐족이기에 더 열심히 공부해야 사람 축에 끼일 것이니 독서하는 종자가 끊어지지 않기를 당부하며, 아직 만나지도 않은 아들과의 헤어짐을 안타까워하는 아비의 마음이 뭉클하다. 다산은 1802년 4월에 아들 정학연이 강진을 다녀 간 뒤에 다시 또 편지를 보냈다.


나는 이처럼 욕스럽고 괴로운 가은데서도 예서(禮書)공부를 단 하루도 쉬어본 일이 없다. 의리의 정밀하고 미묘함은 파껍질을 벗기는 일과 같더구나. 네가 있을 적에 네게 한 말은 반 넘어 거친 껍질이었다. 대부분 버리는 것이 되고 말았다. 아마 연말까지는 실마리를 잡을 수 있을 것 같구나.

(중략)

궁함을 안 뒤라야 저서할 수 있음을 비로소 알겠더구나. 반드시 지극히 총명한 인사가 곤궁한 지경을 만나, 하루 종일 흙덩어리처럼 앉아서 사람 말소리나 수레나 발자국 소리가 시끄럽게 들리지 않게 한 뒤에야, 경전과 예학의 정밀한 뜻을 비로소 얻을 수 있는 법이다. 천하에 이 같은 공교로움이 있겠느냐? 대개 옛 경전을 검토하고서 정현과 가규의 주장을 살펴보니 거의 매번 잘못 풀이해놓았더구나. 독서의 어려움이 이와 같으니라. (29쪽)





다산은 유배지에서 오로지 공부에 몰두할 수 있음을 감사하는 듯하다. 편지에 거론한 대학자들이 공부하랴 술마시랴 마음이 나뉘어 학문에 몰두할 형편이 못 되었다며, 공부는 너희 같은 폐족이 하는 것이니 목숨을 걸고 공부만 하라고 아들에게 당부한다. 출사를 원천봉쇄 당한 아들에게 오로지 공부만 해야 된다고 거듭 당부했다. 세상 선비들이 공부를 못 하는 이유를 시험 준비 때문이라고 한 다산이, 입시를 목표로 한 줄 세우는 성적을 강요받는 오늘의 교육현실을 보면 뭐라 하실까?

다산을 알려면 정조시대를 알아야되니까 박시백의 <조선왕조 실록 16권 정조실록>과, 정조와 정약용이 같이 실린 <한국사傳>을 참고하면 좋을 듯.











































나는 다산 관련 책을 여러 권 사들였지만 필요한 부분만 들춰보고 꼼꼼하게 제대로 읽은 게 없다. 한승원 소설 <다산> <흑산도 하늘 길>과 어린이 책을 읽은 정도라, 새해 첫날부터 정민 선생이 쓴 <삶을 바꾼 만남>을 읽으며 올해는 다산을 집중탐구(?^^)해볼까 생각했다. 어머니독서회원과 다산 관련 책을 읽고 정민 교수를 초청하진 못하지만, 다산을 연구한 이웃 교수님 초청강연을 구상하고 전화를 했더니 흔쾌히 수락했다. 구청에 지원금 신청을 하지 않을거라면서 초청강연을 욕심내고 있으니 참....^^



이웃 교수님은 우리 독서회 고문이고 나와는 초등학교부터 같이 독서회 활동을 한 언니이기도 하다. 늦깍이로 고전문학을 공부하고 다산으로 박사논문을 썼는데, 올해는 다산(1762. 6. 16 ~1836) 탄생 250주년이라 여러 방면에서 다산이 화두라고 한다. 덕분에 다산 관련 강연 초청도 많다고 한다. 하긴 공직자들은 목민심서와 흠흠신서 등 필독도서 목록에 다산의 저서가 들어 있고... 어찌됐든 올해는 다산의 저서와 다산 관련도서가 많이 팔리고 읽히는 해가 될 듯하다.




목민(牧民)이란 비록 덕망을 갖추었다 하더라도 위엄이 없으면 하기 어렵고, 비록 하고 싶은 뜻이 있다 하더라도 밝지 못하면 하지 못한다.



사람으로서 두려워할 것이 세 가지가 있으니, 백성과 하늘과 자기의 마음이다. 뜻에 정성스럽지 못한 것이 있고 마음에 바르지 못한 것이 있어서, 상급 관청을 속이고 나라를 속이고, 구차스레 형벌을 피하고, 이익과 녹(祿)을 꾀하기를 도모하고, 스스로 천하의 제일가는 재주꾼인양 여기지만 터럭만한 거짓도 백성들은 모르는 것이 없다. 자기의 죄를 알려면 모름지기 백성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상사와 임금은 속일 수 있어도 백성은 속일 수 없고, 천지신명이 빽빽하게 늘어서 환히 보고 있으니 하늘을 속일 수 없고, 애써 태연한 척 해도 맥이 빠져 우러러보아도 굽어보아도 부끄러우니 마음은 속일 수 없다.












































흠~ 흠흠신서는 검색해도 많지 않은데 목민심서와 정약용 관련서는 어른과 청소년 및 어린이를 위한 책으로 출판사마다 한 권씩은 다 낸듯, 엄청 많군요. 나는 어려운 책을 읽기 싫어해서 천소년이나 어린이용으로 보면 이해도 잘되고 좋던데... ^^































지난 여름 유홍준 선생님과 함께 한 완도 보길도 답사에서, 정약용을 연구한 다산연구소장 박석무 씨도 함께 동행했다. 내게는 학자보다 지역 국회의원으로 더 낯이 익어 시댁이 목포라고 인사했지만... 다산 탄생 250주년을 맞아 이 양반의 저서도 읽어볼 참이다. 다산연구소(http://www.edasan.org/index.html)에서는 '다산 목민 대상자'를 찾는다. 다산 목민대상은 지방 자치 단체장이 갖추어야 할 자질로 율기(律己), 봉공(奉公), 애민(愛民) 세 가지를 들고 있다~













































단발머리님, 다산 관련 좋은 책 추천 부탁하셨는데, 제가 읽은 게 많지 않아서... 여기 담긴 책 중에 맘에 드는 걸 고르시면 되지 않을까요.^^

그의 생애를 보려면 한승원의 <다산>을 읽어도 좋을 듯, 소설이지만 완전 허구는 아니니까요. 정약전을 중심으로 한 한승원의 <흑산도 하늘 길>과 김훈의 <흑산>도 당시의 천주교 박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듯.











광주에 사는 덕에 다산 초당은 세 번을 가보았다. 광주의 학부모독서회라면 강진의 영랑생가와 다산초당은 빼놓지 않는 순례코스다. 봄, 여름, 가을의 다산초당은 가보아서, 앞으로 눈쌓인 다산초당을 가보고 싶은데 아직.... 다산초당도 좋지만 선생이 흑산도에 유배된 형님을 생각하며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던 천일각(다산 유배시에는 천일각 건물이 없었다(나의 문화유산답사기1권, 69쪽)에 서보는 것도 좋다. 바다 건너 형님을 생각하는 그 마음을 헤아려보면서... 다산초당을 비롯한 남도를 여행하려면 유홍준 선생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1-남도답사 1번지>를 참고하시라. 나도 문학기행이나 답사를 갈 때는 꼭 챙겨보는 교과서다. 유홍준 선생은 다산을 알기 위한 몇 권의 필독서를 소개하는데, 오래전에 출판되어 대부분 절판이라 이후에 출판된 책을 찾아보면 될 듯.








7~8년 전인가, 초등동창들과 미사리 찻집에 간다고 나섰는데 일행을 헤아리던 친구가 찻값만 해도 20만원이 넘겠다며 찻집에 들어가지는 말자고 했다. 더 웃기는 건 머슴아 친구가 "야, 이런데는 남의 거(?)랑 와야지, 동창들과 올데가 아니야!" 그러는 거다. 남의 거랑 와야 비싼 찻값도 아까운 줄 모르고 펑펑 쓰는 거라며... ㅋㅋ



모처럼 맘먹고 나섰는데 그냥 돌아올 수가 없어,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 정약용 유적지에 갔다. 복원한 다산생가와 언덕에 모신 선생의 묘소에 올라가 인사를 드리고 왔었다. 그 덕분에 흑산에서 묘사하는 두물머리 전경을 알 것 같았다.



남양주시에서는 다산문화제도 열고 다산을 알리기 위해 여러가지 행사도 한다. 초등 고학년이면 다산유적지에 들러 다산기념관과 실학박물관에서 공부도 하고 전시된 모형 거중기 등 살펴볼 것이 많다. 무엇보다 선생의 묘소에 올라 선생이 들려주실 말씀을 헤아려보면 체험학습으로 유익할 것 같다.





덧붙이자면, 정약전의 현산어보는 오래전 초등학교에서 학부모도서를 구입할 때, 회원들의 추천도서라서 샀는데

특별한 관심이 없으면 읽기는 만만치 않아... 한동안 끼고 있으면서 쬐금만 보고 도로 반납했더랬다. ㅠㅠ













그래서 청소년/어린이 대상으로 나왔을 때 반가웠다.^^




















- 접기
순오기 2012-01-11 공감 (36) 댓글 (24)
Thanks to
공감
찜하기


성리학의 이단아, 그리고 공산당 다산 정약용



여유당도 사실은 어쩔 수 없는 조선의 유학자였다. 성리학을 통해 배운 학문이 곧 여유당의 학문인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조선을 지배 해온 성리학자적 면모들과는 또 다른 사상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을 관과 할 수 없는 분이 여유당이기도 하다. 이는 여유당의 생애가 주는 특징이라 할 수 있다. 흔히 경세치용 학파를 유형원, 이익과 더불어 정약용을 꼽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유학자이면서도 그들의 길과는 다른 길을 걷고자 했던 사람이 여유당이었던 것이다.







조선의 성리학은 대중을 지배하는 도구로서의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했고, 국시로서 매우 성공적인 역사를 가진 학문이라 하겠다. 조선은 사농공상의 계층을 뚜렷하게 구분하고자 했고 그에 수반하는 노비라는 특수한 계층을 가지고 있었다. 중세의 서양에서도 노비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한 국가의 노비가 대중의 40%에 육박하는 비율의 나라는 거의 없었다. 특히 조선의 수도였던 한양의 노비인구가 자치하는 비율은 50%를 웃도는 지경이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농업의 나라 조선, 그리고 노비



국가의 재정을 전적으로 농업에 의존하다시피 한 조선은 노비라는 특수한 계층을 필연적으로 요구할 수밖에 없었다. 신라와 고려가 회회인(아라비아인)들과 무역을 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경제체제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하여 간단하게 조선의 노비에 대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노비는 남종을 뜻하는 노와 여종을 뜻하는 비를 일컫는 말이다. 노비의 형태도 무착 다양했는데 '관노비'와 '사노비'가 있었다. 관노비는 대궐이나 관아에서 일하는 노비이고, 사노비는 양반집에서 일하는 노비을 일컫는다. 사노비는 ‘솔거노비'라 부르는 신역 노비와 의거노비, 납공노비가 있었다. 신역노비는 상전의 집에서 거주하며 노동을 제공하는 노비로 청지기, 상노, 안잠자기, 상지기, 식모, 찬모등을 뜻한다. 의거노비는 상전과 따로 살면서 토지를 경작해주는 노비이고, 납공노비는 상전의 집에서 살거나 일을 해주지는 않지만 매년 정해진 액수의 물품을 바치는 노비의 형태이다.





1398년 태조 때 노비의 가격은 무명 150필 정도였고, 말(馬)로 교환하자면 노비 셋을 주어야 말 한 마리를 구입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노비의 가격이 폭락하여 노비 10명을 주어야 말 한 마리와 바꾸었다고 한다. 임진왜란에 참전했던 명나라 군사가 두 달의 월급을 저축하면 조선의 노비 1명을 구매할 수 있는 가격이었다. 그러하던 노비의 가격이 동학농민운동이 전개되던 조선 말기에는 노비 5명과 미모의 여성 노비 한사람을 주면 소 한 마리와 바꿀 수 있었다고 한다. 사람은 사람이기에 '사람'이라하고 말은 짐승이기에 '마리, 혹은 필'라고 하는 것인데.... 시대가 그랬다는 것이다.



이러한 조선의 노비가 18세기에는 전 인구의 40%에 육박했다고 한다. 어떤 학자들은 조선 후기에 이르러 노비의 비율이 50%에 달했다고도 주장하기도 라는데, 조선 실록에 서얼 차별의 강력한 주장에 앞장선 인물로 기록되어 있는 퇴계 이황의 가문이 가지고 있던 노예의 수는 367명이었고 전답을 합치면 요즘의 기준으로 34만 평이었다. 노비와 전답의 규모를 생각하면 대단한 부호였음을 알 수 있는 수치라 하겠다. 요즘으로 치면 트랙터가 여러대 필요할만한 규모의 부농가였던 셈이다. '안빈'이라는 말이 왜 허공의 메아리로 들리는 지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사농공상이라는 뚜렷한 계층구조와 엄청난 인구비율의 노비는 주로 농산물에 의해 국가의 재정을 조달했던 조선의 경제시스템에서는 불가피한 구조일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이는 지배계층의 관점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무역과 상공업을 장려할 수 없었던 성리학의 이념은 조선을 주로 토지에서 산출되는 잉여가치를 국가 재정에 편입시킬 수밖에 없는 철저한 농업 국가로 만들 수 밖에 없었다. 성리학은 상공업을 군자가 할 일이 아니라고 가르쳤고 이를 천시했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 아니던가... 오죽했으면 엽전을 ‘좌전’이라고 했을까... ‘좌전’이란 오른손이 아닌 '왼손으로 취급하는 돈' 이라는 뜻으로 왼손은 우리 조선에서 홀대를 받았던 손이다.







흔히 선비라 일컫는 조선의 지배세력들은 노동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들을 위해 대신 노동을 해줄 인구(노비와 소작농)가 필요했고 국가의 재정을 조달 하는데 다수의 대중들을 지배하여 동원시킬 수밖에 없었다. 하여 조선은 엄격한 신분구조를 필요로 했고, 그렇게 조선은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뚜렷하게 구별된 사회로 나아갈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구조의 국가에서 대중에 대한 사랑(애민)을 기대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대중에게 복지정책을 펼쳐야 대중들의 삶이 더 편안하겠지만, 조선의 계급구조와 경제구조는 조선에 그럴 여유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조선시대를 살아온 대중들의 애환과 고달픔은 바로 이러한 구조적 제도에 기인한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여유당은 이러한 조선 성리학의 이념 하에서 여타의 기득권자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과는 전혀 다른 사고를 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조선 성리학의 이단아'라 할 수 있다. 그런 여유당은 목민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목민심서(牧民心書)’라는 책을 저술하게 된다. 성리학의 이단아라 할 만한 여유당에게 목민이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목민에 관하여...



우리는 여유당의 저서인 ‘목민심서’라는 책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 대다수 국민들이 이 목민심서를 직접 읽지는 않지만 그 존재를 모르는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백과사전에는 다음과 같이 써있다..



목민심서(牧民心書): 조선 후기의 실학자 정약용(丁若鏞)이 목민관, 즉 수령이 지켜야 할 지침(指針)을 밝히면서 관리들의 폭정을 비판한 저서. 48권 16책. 필사본. 부임(赴任)·율기(律己 : 자기 자신을 다스림)·봉공(奉公)·애민(愛民)·이전(吏典)·호전(戶典)·예전(禮典)·병전(兵典)·형전(刑典)·공전(工典)·진황(賑荒)·해관(解官 : 관원을 면직함)의 12편으로 나누었다. 각 편은 다시 6조로 나누어 모두 72조로 편제되어 있다. 부패의 극에 달한 조선 후기 지방의 사회 상태와 정치의 실제를 민생 문제 및 수령의 본무(本務)와 결부시켜 소상하게 밝히고 있는 명저이다.







목민(牧民)라는 말은 어디에서 기원하는 것인가...





제나라의 학술과 사상의 보고라도 일컫는 管子(관자)라는 책에는 牧民篇(목민편)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 牧民篇에는 “곳간이 가득 차 있어야 백성들이 예절을 안다(倉廩實則知禮節 창름실즉지예절).”이라는 구절이 있다고 한다. 관자 역시 목민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었던 것이다. 관자는 공자보다 140년 먼저 세상에 태어난 인물로 제나라를 최초의 패국으로 이끈 명재상이었으며 그 이름이 드높다. 사실상 공자가 활동하던 시대에 관자는 권력을 장악하고자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우상이었다고 한다. 목민이라는 말은 그렇게 관자에서 출발하여 조선이 개국하면서 목민이라는 명칭을 정식으로 사용한다. 조선은 지방을 다스리는 수령을 목민관이라 했고 최초 임기를 30개월로 정한다는 규정을 가지고 있었다. (능력이 모자라 고려시대에도 목민이라는 말을 사용했는지 여부는 찾아낼 수가 없었음) 이렇게 하여 목민(牧民)이라는 말은 여유당의 저술한 책의 이름에까지 등장하게 된 것이다.







여유당의 목민(牧民)은 관중의 그것과 같지 않다...




여유당과 관중이 민(民)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에서는 같다고 볼 수 있다. 특히 民에 대한 복지정책을 강력하게 주장했다는 점에서는 더더욱 일치하는 정치적 입장을 보여주고 있다. 민의 경제력을 매우 중시했다는 점은 2500년 전의 관중이나 200여 년 전의 여유당이나 같은 생각이었던 것이다. 이는 실학파인 여유당을 ‘경세치용학파’라고 칭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관중이 민을 중시하고 경제 복지정책을 중요하다고 판단한 이유는 여유당의 그것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관중 역시 시대적 상황을 피해 갈 수 없는 사상가였다. 춘추전국 시대라는 불확실성의 정세는 대륙의 모든 민을 물론이고 지배세력들을 늘 불안에 떨게 했다. 전쟁은 일상이 되었고 약자는 강자에게 철저하게 빼앗기고 도륙 당하던 시대였다. 오직 승자만이 생존할 수 있는 특권을 누리던 시대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국지적 힘을 중심으로 산재하던 군주들의 바람은 오직 하나, 바로 패자가 되겠다는 염원 뿐이 었다. 공자가 그토록 신봉하던 테제, ‘극기복례’가 전혀 먹혀들지 않은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강력한 힘을 필요로 했던 군주들에게 공자의 복례는 패국을 이루는데 오히려 방해가 되었던 것이다. 하여 공자는 14년이라는 세월을 떠돌았지만 아깝게 세월만 죽인 채 허무하게도 빈손으로 돌아와야 했던 것이다. 관중이 재상으로 있던 제나라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관중은 여타의 군주들이 생각하지 못했던 민(民)을 패국으로 가는 키워드라고 생각했다. 즉, 경제력과 군사력의 사실상 근거가 民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당연한 생각이 아니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지만 당시의 시대적 정치적 상황으로 보아 민을 패국의 원동력으로 바라본 것은 매우 획기적인 발상이었던 것이다.








하여 관중은 민의 힘을 이용하기로 계획한 것이다. 관중은 민을 조직적으로 움직임으로서 경제적, 군사적으로 그 힘을 극대화하여 패국을 이루는데 활용하기 위해 민이 필요로하는 것(need)을 충족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민중의 삶이 요구하는 조건을 들어줌으로서 자발적인 복종과 충성을 얻어내자는 속셈이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민에게 복지정책을 펼쳐야 민을 이용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이러한 개념이 바로 관중의 목민(牧民)이었다.




이렇게 패국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서 민을 활용하는 방법론적 정책으로서의 목민의 개념이 관중의 것이라면 여유당의 그것은 백성을 이용한다는 개념이 아니었다. 여유당은 근본적으로 애민의 정신에 입각한 순수한 사유의 사상가였던 것이다. 여유당은 암행어사로 나갔을 때 백성들의 처절한 아픔을 목도했다. 그들의 애환을 몸소 체험했으며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민과 고락을 함께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었던 인물이었다. 암행어사로 나갔다고 다 여유당과 같은 인물이 되는 것은 아니다. 여유당은 애초에 가엾은 한 사람의 민을 연민할 줄 알았던 인물이었던 것이다.




여유당의 경세치용은 백성을 굶주림에서 벗어나게 하고 싶었던 안타까운 마음이 배어있었다. 여유당의 저술 ‘경세유표’는 당시 빈부 격차의 심화 정도가 심각하다는 점, 백성들의 삶이 너무나 굶주리고 고단하다는 점, 관료들의 학정이 극에 달했다는 점, 제도적인 문제가 있다는 점 등을 지적하면서 토지의 개혁은 물론 사회, 정치, 경제의 전반적인 문제들 개혁하자고 주장했다. 이를 저술로 남겼는데 관중과 근본적으로 다른 사유를 하고 있었음을 방증해준다 하겠다.




물론 두 인물의 시대적 상황이 같지 않았던 점을 고려한다면 충분히 이해할 만한 차이점이라 하겠다. 그러나 역사는 그야말로 역사이다. 시대적 정치적 상황을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는 것이 역사이면서도 그 차이를 인정하지 않을 수도 없는 것이 또한 역사인 것이다. 더구나 이토록 순수한 의미의 민을 위한 사유는 조선의 역사를 통해 볼 때 조선 중기 대미수공법을 창안했던 율곡 이이와 목숨을 걸고 대동법을 강력하게 펼친 잠곡 김육, 그리고 골수 유학에서 벗어나 진정한 위민을 주장했던 백호 윤휴가 있을 뿐이다.




물론 여유당은 성호 이익과 반계 유형원의 영향을 받은 바 크다 하겠다. 결국 조선의 진정한 위민 정신은 후기에 이르러서야 입으로만이 아닌 실질적 주장을 했던 것이다. 이는 시기적으로 조선이 성리학을 국시로 선포하며 개국한 후 400년 이상 흐른 뒤였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단아, 공산당 여유당





이렇게 쓰고 보니 공산당과 여유당이 무슨 당처럼 들리지만 영어의 당(party)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여유당의 생각을 살펴보면 그는 분명 공산주의자인 셈이다. 여유당은 특히 토지제도에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백성을 굶주리게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여전제와 정전제라는 새로운 방식의 토지제도를 생각해냈다. 여전제는 한 마을에서 공동으로 농사를 지어 똑같이 배분하는 방식인데,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판단하여 보완 장치로 정전제를 통하여 땅을 똑같이 정확하게 나누어 경작하고 공동 관리하는 부분을 두어 세금으로 내자는 주장이었다. 이는 당시의 성리학적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기가 찰 노릇의 주장이었다. 지배 체제를 뒤흔드는, 사회 전반적인 질서를 무너뜨리는 충격적인 주장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여전제는 특히 공동농장의 형태가 아니던가... 여전제에 대한 생각은 이미 여유당께서 공산당에서나 가능한 제도를 구상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어쩌면 세계 최초의 공산당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과연 이러한 여유당의 위험한 발상과 주장을 집권 세력들은 가만히 두고만 볼 것인가??




이상적인 사회로 노자는 소국과민을 주장했고, 그 이름도 아름다운 존 스튜어트 밀과 성스러운 토머스 모어도 여유당과 같은 이단아였다. 또한 플라톤은 현대에 고전으로 일컫는 그의 저서 ‘국가론’에서 공동생활의 견해를 피력했지만 이는 단지 국가를 통치하는 철인들에 제한된 생각이었으므로 보편적인 사회적 제도로 적용시키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현대적 개념으로 볼 때, 여유당은 독창적인 공산의 개념을 제창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존 스튜어트 밀



스승인 벤담의 공리주의의 한계를 뛰어 넘으려 노력했고 그에 걸맞는 성과를 내 놓았다. 밀은 단순한 행복에 집착했던 스승 벤담의 사유마저 움직였다. 말년에 벤담은 밀의 민주주의 개념을 이해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밀은 인간다운 품위를 가진 질적 행복을 사유했다. 밀을 ‘질적 공리주의자’라고 칭하는 이유이다. 밀은 또한 당시로서는 꿈도 꾸지 못할 남녀평등을 강력하게 부르짖었고 여성에게 투표권을 주자는 제안을 하여 영국을 경악케 했다. 또한 노동자 계층의 권리와 평등을 당당하게 주장했는데 이는 그의 저서 ‘자유론’이 민주주의의 입문서라고 평가받는 이유이다. 그의 주장은 영국의 지배자들에게는 치명적인 발언이었다. '밀' 역시 여유당처럼 이단아였던 것이다.









토머스 모어



그야말로 새하얀 눈보다 더 순결한 인간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토머스 모어'이다. 에라스무스는 그를 지상 최고의 인문주의자라 했다. 시대는 1500년, 당시 플랑드르의 모직공업이 잘 되어가자 양모의 가격이 폭등했다. 영국의 귀족들은 밀밭을 초지로 바꾸어 양 떼를 키우기 시작했다. 대대로 그 땅에서 생계를 유지해오던 농민들을 몰아내기 시작한 것이다. 쉽게 말해 영주에게 노동과 생산물을 바치며 살아오던 공동체를 양모를 생산하기 위하여 추방했던 것이다. 흔히 ‘엔클로저 운동’이라는 바로 그것이다. 터전을 잃은 농민들은 부랑자기 되었다. 헨리 8세의 통치하에 사형당한 부랑자는 7만 2000명이라고 한다. 그 이름도 유명한 엘리자베스는 해마다 300여명의 절도범을 교수대위에 올렸다. 토머스 모어는 이렇게 외쳤다, “절도범을 죽일 것이 아니라 절도범을 양산하는 원인 제공자들을 사형에 처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모어는 절도범이 영국의 경제 시스템의 결과물임을 지적했던 것이다.






“사람들로 하여금 도둑질을 하게 하는 요인이 따로 있다. 바로 ‘양’이다. 예전에는 얌전하고 유순하며 조금씩 먹던 양들이 이제는 사람까지 먹어치우고 있다.” 모어는 농민들을 추방하는 것은 바로 영국의 귀족임을 지적했다. 교회도 왕도 모두 공범이라고 일갈했던 것이다. 개인의 불행을 개인의 문제로 떠넘기지 않고 사회적 문제에서 찾으려 했다. 결국 모어는 이단아로 몰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아...아름답고 지극히 아름다운 토머스 모어여.... 여유당은 토지, 경제, 시회 제도의 개혁을 부르짖으며 모어와 같은 생각을 했던 것이다.











플라톤의 철인



플라톤은 사회의 구성원을 타고난 능력에 따라 철저하게 분류했다. 플라톤은 각자 직분에 맞는 일에 충실히 해야 한다는 점에서 공자의 군군신신 부부자자(君君臣臣 夫夫子子)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공자는 인간이 수신을 통하여 군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진 반면 플라톤은 인간의 자질이 태어나면서 이미 결정되므로 그들의 삶도 그에 맞게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한 점에서 차이는 있다. 한마디로 선천적 신분의 분류를 철저하게 했던 사람이다. 또한 그는 국가를 철인이 통치해야 하는데 그 철인들은 사유재산을 가져서도 안되고 가족을 가져서도 안된다. 다만 우생학적으로 뛰어난 사람을 많이 양산하기 위해서 심지어 부인들을 철인들이 서로 공유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더더욱 충격적인 플라톤의 생각은 장애를 가진 사람과 허약한 사람은 국가적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죽여야 한다고 주장하게조차 했다는 사실이다. 정말 이성의 이데아야 말로 자비란 없는 것이던가... 화이트 헤드는 서양 철학은 플라톤의 주석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고 한다. 플라톤이 서구의 사상에 끼친 영향력을 감지할만한 대목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여유당은 사실상 조선을 지배해온 유학자들에게는 지극히 위험한 인물이자 사상범이었다. 여유당에게는 대 선배인 백호 윤휴가 사사된 이유도 마찬가지였다. 기존의 사회질서를 유지하고자 하는 기득권의 이익에 반하는 주장은 모두 사문난적이었고 처단의 대상이었다. 윤휴 역시 기득권에 감히 도전장을 내민 반항아였던 것이다. 윤휴는 민을 보살피는 다양한 제도의 개혁을 죽는 그 순간까지, 사약을 마시는 그 순간까지 부르짖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토머스 모어처럼 말이다.

이렇게 조선의 언론은 확실하게 통제되고 있었는데 마치 현대의 강력한 검열제도와 다를 바가 없었다고 볼 수 있다. 걸려들면 목숨을 앗아버리던 조선에서 여유당은 자신의 저술 ‘논어고금주’를 통하여 주희의 집주와 달리 생각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강력한 태클을 걸었다. ‘중용강의보’라는 저술 역시 이와 마찬가지의 성격을 지닌 저술이라고 하는데 번역이 아직 되지 않은 이유는 짐작이 간다(하지 않는 것이다). 주희보다 훨씬 더 자세한 설명을 곁들였으며 교주 주희와 생각이 일치하지 않는 장구에 대해서 거침없이 자신의 생각을 피력했다. 당시 집권세력이던 노론 측에는 눈에 가시같은 존재가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여유당은 그렇게 사유의 방식에 있어서나 애민의 방식에 있어서 철저한 유학의 이단아 였던 셈이다.










그런 만큼 그의 고초는 컸다. 목숨이 위태로운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토머스 모어의 목숨을 기어이 뻬앗았아야 했던 영국의 귀족들 처럼, 조선에서도 여유당의 강력한 스폰서나 다름없던 정조가 급서하자 그의 형제와 동료들은 가차없이 제거되었다. 여유당을 비롯한 그 일당들은 조선의 귀족들에게는 용서할 수 업는 일망 타진의 대상이자, 이단아였던 것이다.

공자의 드높은 학문을 계승하고 유학을 국시로 했던 조선의 선비들은 공자의 말씀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했던 것 같다. 지행합일의 양명학이 그리운 이유도 그것이다. 이덕일의 최근 저술인 '내인생의 논어 그사람 공자'라는 책을 읽어보면 공자를 그토록 높이 떠받들며 신의 경지에까지 지극히 모시던 공자님의 말씀을 조선의 선비들에게서 찾아 볼 수 없다고 저자는 개탄하고 있다. 물론 저자가 공자를 너무 아름답게만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 절반밖에 읽지 못해 단정하기에는 이른 감이 있다.





여하튼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서도 여유당은 그나마 운이 좋았던지 유배를 반복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 덕분에 여유당의 수많은 저술들을 통해서 여유당이 그 얼마나 순수한 정신으로 애민을 마음속에 품고 있었는지 알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여유당도 노비제의 폐지를 적극 반대한 인물 중 하나였다. 사회의 질서가 무너진다는 것이 반대의 이유였다. 이것을 여유당의 허물이라고 한다면 허물이 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이라는 나라의 시대상황을 감안할 때 여유당보다 지극히 애민을 가슴속에 간직한 인물을 찾아보기란 쉬운 일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하겠다..


- 접기
차트랑 2012-05-14 공감 (34) 댓글 (5)
Thanks to
공감
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