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내천주의의 창도자 최제우 선생
<개벽> 제20호(1922.02.08)
[역자 주 - 오늘 4월 5일은 동학 창도 기념일이다.-[天日紀念日]- 1860년 경주 용담에서 수운 최제우 선생이 동학을 창도한 날을 기념하는, 천도교의 최대 기념일이다. 1922년 개벽 제20호에는, 동학을 창도한 수운 최제우 선생의 일대기와 그 사상적 의의를 밝힌 글이 게재되었다. 필자 '일기자'는 소춘 김기전으로 보인다. 이 글이 "十大 偉人 紹介의 其七"이라는 꼭지명 하에 게재된바, 훗날 소춘 선생이 '십대위인'을 단행본으로 발간하기 때문이다. 동학-천도교를 잘 아는 분들에게는 새로울 것이 없는 내용일 수 있으나, 100년 전에 수운에 대한 사적 정리가 오늘날과 비교하여 손색이 없이 치밀하고, 또 동학 창도의 역사적 의의에 대한 필자의 평가도 전혀 낡지 않음이 오히려 이채롭다 하겠다. 본래의 글을 현대문으로 읽기 쉽게 번역하였다.]
인내천주의(人乃天主義)의 창도자(唱導者) 최제우 선생
일기자(一記者)
처절(悽絶) 강개(慷慨)한 선생의 일생
선생의 성은 최(崔)요, 이름은 제우(濟愚, 처음 이름은 濟宣)요, 호(號)는 수운재(水雲齋)니 지금(1922)부터 98년 전 갑신(甲申, 조선 순조 24년, 청나라 宣宗 道光 4년) 10월 28일 조선 경주 가정리(柯亭里)에서 탄생하였다.
선생의 부친의 이름은 옥(鋈: 沃+玉)이니, 문장과 도덕으로 일도(一道=경상도)에 이름을 알렸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하루는 그의 부인(夫人) 한씨(韓氏)가 홀연히 기절[昏倒]하여 정신을 차리지 못할[莫省] 때에, 두 줄기 빛[兩曜]이 품안[懷中]에 들어오고 이상한 기운[異氣] 몸을 감싸[攝]더니 마침내 선생을 잉태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선생이 16세에 부친 상(喪)을 당한 이후로부터는 가산(家産)이 몰락[零落]하고, 글을 공부하여도 또한 만족치 아니한지라, 혹은 발걸음을 궁마(弓馬)에 옮기며, 혹은 사업[事]을 장사[販泉]에 종사하여, 그 우울강개(憂鬱慷慨)의 회포를 풀며, 일찍이 뜻을 선도(禪道)와 역수(易數)에 두었으나, 또한 그것을 쓰지 아니하고 항상 탄식[自歎]하기를
“최근 들어서 온 세상 사람이 각자위심(各自爲心)하여 천리(天理)를 따르지 아니하며, 천명(天命)을 돌아보지 아니하여 온 세상[天下]이 어지럽고 민심이 효박하니 마음이 항상 두려워서 어찌해야 할지를 알지 못하노라. 오호라. 이 세상은 공맹(孔孟)의 덕(德)으로도 충분히 논의하지 못할 지경이며, 요순(堯舜)의 다스림으로도 안정된다고 말하지 못할 상태이다. 반드시 상해(傷害)가 많고, 운명(運命)이 크게 변혁[大革]하리라.”
하며, 이에 세상사[世間]의 어지럽고 근심스러움[紛擾] 벗어버리[擺脫]며, 마음[胸海]에 맺힌 것[繃結]을 없이[責去]하고, 이곳 저곳[四方]에 주유(周遊)하여 대산심곡(大山深谷)을 두루 탐방[歷訪]하며, 유암거찰(幽庵巨刹)에 의탁[奇跡]하면서 천지자연의 오표한 정취[妙趣]와 우주아 인간[人生]의 진리[眞諦]를 명상(冥想)함으로써 그 뜻을 스스로 위안[自慰]하였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선생이 32세 되던 을유(乙卯, 1885) 2월에 조용히 [울산 여시바윗골에 있는] 초당(草堂)에서 책상에 기대어[臥] 있는데, 한 이인(異人)이 선생께 절하고 말하기를 ‘나는 금강산 유점사(楡岾寺)에서 백일기도를 마치고 우연히 탑 아래에서 잠깐 잠들었다[小眠]가 일어나보니 이상한 책[異書] 탑에 있는지라, 한번 본즉 그 자획서의(字劃書義)가 이 세상[塵世]에서 처음 보는[刱見] 바요 보통의 지혜[凡智]로는 이해치 못할 바라. 이에 이 책을 해독할 사람을 구하고자 하여 거의 전국을 두루 돌아다녔[萬地遍踏]는데, 선생[公]을 뵈오매 처음으로 이 책이 전해진[有傳] 뜻을 알겠사오니, 청컨대 선생은 그 진수[眞]를 영회(靈會)하시어 하늘이 주신 것[天賜]을 저버리지 마[勿負]소서.’ 선생이 거두어서[收] 살펴본[見]즉 유불선(儒佛仙) 제가(諸家) 중에 일찍이 보지 못하던 바로, 고무금무(古無今無: 今不聞 古不聞 今不比 古不比)의 이서(異書)라. 이인(異人에)게 말하기를 ‘아직 책상[案]에 놓아두[留置]라.’ 이인이 말하기를 ‘내가 3일 후에 반드시 다시 오리니, 선생은 의회(義會)하소서.’ 이인(異人)이 과연 그 시간[其期]에 왔거늘 선생이 말하기를 ‘의회(義會)하였노라.’ 이인이 절하고 고마워하며[拜謝] 말하기를 ‘선생은 실로 천인(天人)입니다.’ 하고 뒤이어 계단 아래로 내려섰는데 갑자기[因忽] 사라져 보이지 않거늘 선생이 처음으로 그가 신령(神靈)의 환상(幻像)임을 알았다. 이 책의 의의(意義)의 대략은 인내천(人乃天)의 의미이며, 책 가운데 49일 기천(祈天)의 의미가 있는지라. 책의 의미[書意]에 따라서 기도(祈禱)를 할 뜻을 결심하였다.” 한다.
이듬해 병진(丙辰, 1856) 여름에 선생이 한 수행자[衲子]와 함께 양산(梁山) 천성산(千聖山) 내원암(內院庵)에 들어가 기도를 시작하였다가 숙부(叔父)의 서거로 47일 만에 그 공부를 중지하고, 정사(丁巳, 1857) 가을에 다시 기천(祈天)의 공부를 계속[繼行]할 때, 한편[外]으로 철점(鐵店-철광석 제련소)을 개설하고, 한편[內]으로 기도[祈天]의 도구를 갖추어서 고난박지(苦難迫至)의 가운데 49일의 기도를 마쳤다.
기미(己未, 1859) 10월에 선생이 울산(蔚山)으로부터 경주 용담(龍潭)으로 돌아와 거처[還居]하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선생은 불출문외(不出門外) 맹서(盟誓)하고, 처음 이름(濟宣)을 고쳐서 제우(濟愚)라 하며, 문 앞[門楣]에 「도의 기운을 길이 보존하니 사(邪)ㅅ된 기운은 들어오지 못할 것이요, 허랑한 사람들과 어울리지 아니하니 쇠망하는 세상에 휩쓸리지 않을 것이다[道氣長存邪不入, 世間衆人不同歸]」라는 입춘시(立春詩) 한 수[一聯]을 게시하고 계곡[泉石]에 소요(逍遙)하며 실내(室內)에 묵좌(黙坐)하여, 오로지 침사명상(沈思冥想)으로써 묵양(黙養)하였다.
37세 되던 경신년(庚申年, 1860) 4월 5일이라. 선생은 늘 하던 대로 목욕제계(沐浴齊戒)하고 초당(草堂)에 정좌(靜坐)하고 있었는데 문득 심신(心身)이 떨리면서 한기가 느껴져[戰寒] 병[疾]을 진단[執症]치 못하고 말[言]로 형상(形狀)하기 어려울 즈음에 선어(仙語)가 있어서 문득 귀 속으로 들어오는데, 밖으로 접령(接靈)의 기운[氣]이 있고, 안으로 강화(降話)의 가르침이 있되, 보려고[視] 하여도 보지[見] 못하고 들으려[聽] 하여도 듣지[聞] 못할지라. 선생이 놀라 일어서[驚起] 캐어물은[探問]즉, (한울님이) 말씀하시기를
“두려워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라[勿懼勿恐]. 세상 사람이 나를 일컬어 상제(上帝)라고 하나니 너는 상제를 알지 못하느냐?”
선생이 그 까닭[所以然]을 물으니, (한울님이) 말씀하시기를,
“개벽 후 5만년에 네[汝]가 또한 처음이로다. 개벽 후 5만년에 내[余]가 또한 공(功)이 없었는지라. 이제 너를 세상에 태어나게 하여 모든 사람[人間]에게 이 법(法)을 가르치케 하나니 의심하지 말고 의심하지 말라[勿疑勿疑].”
선생이 말씀하시기를,
“그러면, 서도(西道, 天主敎)로써 다른 사람을 그리치리니까?”
한울님이 말슴하시기를,
“그렇지 아니하다. 내[吾] 마음이 곧 네[汝]의 마음이라. 사람이 어찌 이를 알리오. 천지(天地)는 알되 귀신(鬼神)은 알지 못하였나니 귀신(鬼神)이라 하는 것은 나[吾]이니라. 너에게 무궁무궁(無窮無窮)의 도를 주노니 닦고[修] 단련[煉]하여, 그 글을 지어서 사람을 가르치고, 그 법을 정하여 덕을 펴면, 너 또한 장생하여 천하에 빛나리라.
또 말씀하시기를,
“현재 세상[今世]의 운수[運]가 슬프도다[戚]. 사람의 욕심[人慾]이 하늘에 넘치고, 도덕(道德)이 땅에 버려져서 인륜[彛倫]이 이미 무너졌[已斁]는지라. 소위 아버지가 아버지답고, 자식이 자식답고, 임금이 입금답고, 신하가 신하다우며, 남편이 남편답고, 부인이 부인다운[父父, 子子, 君君, 臣臣, 夫夫, 婦婦]의 도(道)가 내[余]가 차례 매긴 바대로 어긋하고 수령[守牧]의 관청[官]이 백성을 해치고 정사를 어그러뜨려[虐民誤政] 다치고 해로움을 겪는[傷害] 것이 많을 것이니, 너는 가르쳐서 교화하여, 나의 대덕을 따르게 하라.”
또 말씀하시기를,
“네가 또한 사람이니 무엇을 알았으랴. 대운(大運)이 순환하여 세계의 억조 창생이 장차 동귀일체(同歸一體)하리니 너는 정심수도(正心修道)하여, 점차 수련하면 무궁조화(無窮造化) 다 던지고 포덕천하(布德天下)될 것이니 차제도법(次第道法)이 이 속에 있느니라.”
선생은 이에 수심정기(守心正氣)하여, 천도의 전체를 꿰뚫어 살피[透察]었으며 다시 1년의 수련(修煉)을 거치매 또한 자연(自然)한 이치가 없지 아니한지라. 이로써 능히 나라를 보필하고 백성을 편안하게[輔國安民] 하며 나아가, 세상[天下]의 모든 사람[蒼生]과 우주(宇宙) 만물[萬有]를 모두 구제[克濟]할 것을 확신하고 드디어 간단한 법문(法門)을 정하여 제자[徒弟]의 수련 절차를 가르쳤으니, 이것이 곧 조선 동학 발상의 처음이며, 오늘날의 천도교, 시천교, 기타 두세 개 교단은 이 동학(東學)의 후신이다.
선생이 대각(大覺) 후 2년 신유(辛酉, 1861)에 사방 어진 선비[賢士]가 소문[風]을 듣고 찾아오는 자가 많아서, 선생과 빈번한 문답이 있었다. 이제 그 문답 중 몇 절을 가려서 기록[摘記]하면 이러하다.
어떤 사람이 묻기를,
“지금 천령(天靈)이 선생께 강림하셨다 하오니 무슨 까닭이오니까?:
말씀하시기를,
“무왕불복(無往不復)의 이치를 받은 것이니라.”
(사람들이 또 묻기를)
“그러면 무든 도라고 부릅니까?”
수운 선생이 말씀하시기를
“천도(天道)이니라.”
(사람들이 또 묻기를)
“서도(西道)와 다른 것이 없습니까?”
수운 선생이 말씀하시기를
“(서도와 천도는) 운(運)은 하나[一]이요, 도(道)는 같으나 이치[理]인즉 아니니라.”
(또 묻기를_
“무슨 까닭입니까?”
수운 선생이 말씀하시기를
“우리 도[吾道]는 무위이화(無爲而化)니라. 그 마음을 지키고 그 기운을 바르게 하고 그 성품을 거느리고 그 가르침을 받으면[守其心 正其氣 率其性 受其敎] 자연한 가운데 나오는 것이니라.”
또 묻기를,
“도가 같다고 할진대 서학(西學)이라 부릅니까?”
수운 선생이 말씀하시기를
“그렇지 아니하다. 나는 동방[東]에서 태어나서 동방에서 공부하였으니, 도가 비록 천도이지만[道雖天道], 학(學)이라 하면 동학이라[學則東學] 할지니 서(西)를 어찌 동(東)이라 하며 동(東)을 어찌 서(西)라 하리오.”
물론 당시 문답의 내용[辭意] 이뿐이 아니나, 우선이 이로써도 능히 동학의 일부[一斑]를 엿보아 알[窺知] 수 있다. 선생은 이때에 용담사(龍潭詞=龍潭歌)와 교훈사(敎訓詞=敎訓歌)를 써서 제자[徒弟]에게 가르쳤으며 계속해서 수도(修道)의 절차를 정할 때 “청수(淸水)를 봉전(奉奠)하고 천주(天主)를 생각[念]하며 주문(呪文)을 외[誦]며 자거나 밥 먹을 때[寢食] 반드시 심고[必告]하며, 나고 들 때[出入] 반드시 고[必告]하며, 무악(無惡), 무탐(無貪), 무음(無淫)으로써 심잠[心箴]을 삼게 하라.” (하였다.)
신유(辛酉, 1861) 6월에 선생은 호남(湖南)을 향하여 산천풍토(山川風土)와 인심풍속(人心風俗)을 시찰(視察)하고 남원(南原) 은적암(隱寂庵)에 도착하여 더욱이 성품[性]을 수련[煉]하고 마음을 닦[修]으며 도수사(道修詞)와 권학사(權學詞=歌)를 써서 제자[徒弟]에게 보냈다.
선생의 도학(道學)이 날로 높아지고 선생의 제자가 다달이 증가함과 함께 세상의 지목(指目)이 더욱 심해져서 동학의 주장(主張)을 혹은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 하며 혹은 서학(西學)과 이명동곡(異名同曲)이라 하여, 당시 정부는 검(劒)으로써 선생을 압박[迫]코자 하므로 선생은 대각후 4년째 되던 계해(癸亥, 1863) 8월 14일 수심정기(守心正氣) 네 글자를 써서 이를 고제(高弟) 최해월(崔海月, 이름은 時亨이니 동학의 제2세 敎祖)에게 주며 일체 교단의 일[道事] 오로지 그에게 신탁(信托)하고 더욱 일심(一心)으로 도(道)를 전(傳)하며, 이치를 강(講)하여 닥쳐올 운명을 은연히 기다리는 것 같았다[興比歌, 不然其然歌, 前八節, 後八節, 嘆道儒心急 等의 글을 이 시기에 지었다).
이해[1863] 12월에 선생이 각지를 순방하며 가르치[巡諭]는데 어떤 사람이 급히 고하여 말하기를
“최근에 선생을 서학(西學)으로 지목하여, 조정에서 체포코자 하오니, 선생은 스스로 몸을 보전[自愛]하소서.”
선생이 웃으며 말하기를
“도가 나로부터 나왔으니, 내가 스스로 감당하리라. 어찌 도피하여 누를 여러분에게 미치게 하겠는가.”
하며 조금도 동요[動心]치 아니하였다. 이 달(12월) 10일에 이르러서는 선생이 최해월 외 10여 명의 제자[門徒]들에게 가르쳐 말슴하시기를
“오늘 밤에 내가 특히 어떤 일이 있으니 여러분은 각각 귀가하라.”
하고 홀로 촛불을 밝히고 밤새[明燭達夜] 약속한[相約] 사람을 기다리는 것과 같더니 그 새벽에 과연 전선관 정구룡[鄭龜龍=鄭雲龜]가 조정의 명으로 선생을 체포하였다.
이때 선생이 체포된 몸이 되어 정운구로 더불어 경성(京城)을 향해 갈 때, 일행( 一行)이 과천(果川)에 이르러 며칠을 머물더니, 하루는 선생이 북쪽 하늘[北天]을 향하여 통곡하거늘 일행이 그 이유를 묵으니 선생이 단지 말하기를 ‘머지 않아 알 수 있을 것’이라 하더니, 다음날 아침에 선전관이 조정의 명령을 전하되, 임금[今上=哲宗]이 붕어[崩]하였으니 동학선생(東學先生) 최제우(崔濟愚)를 대구영(大邱營)에 돌려보내[還囚] 조사하고 보고[考訊以報]하라 하였라.
갑자(甲子, 1864) 1월 6일에 선생이 대구에 이르니, 당시의 감사(監司) 서헌순(徐憲淳)이 심문(審問)하여 말하기를,
“네가 도당(徒黨)을 불러모아[嘯聚] 풍속[民俗]을 어지럽히니[淆亂] 장차 무엇을 하려고 하느냐?”
선생이 서헌순을 올려다보며[仰視] 말하기를
“내가 무극대도(旡極大道)를 온 세상에 펴고자 하니, 이 도가 세상에 나온 것은 하늘이 명한바요, 또 내가 일신(一身)으로써 도(道)에 순(殉)하여 덕(德)을 후천 5만년에 전포[布]케 함도 또한 하늘이 명한 바이니, 공은 오직 알아서[自爲] 하라.”
하고 다시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선생이 22차례의 지극히 혹독한 고문을 받았지만 신색(神色)을 변하지 않았으며, 신문을 받을 때에 곤장 때문에 벽력(霹靂) 소리가 일어나서 온 건물이 진동하는지라. 좌우(左右)가 크게 놀라[失色]고 서헌순이 또한 놀라서 형졸에게 물은즉
“이, 죄인의 무릎 뼈가 부러지는 소리[折脛聲]라.”
하므로, 이에 하옥을 명하엿다.
선생이 수형이 그 형을 받을 때에 피부가 크게 상하여, 다시 완치될 가망이 없되, 옥에 이르러서는 아무 상처가 없고, 거의 완치된 사람과 같은지라. 옥리가 모두 그 신이(神異)함을 경탄(驚嘆)하였다 한다.
선생이 감옥에 있을 때, 비밀리에 최해월(崔海月) 고제(高弟)를 접견하고, “등불이 물위에 밝으니 틈이 없고, 기둥이 마른 것 같으나 힘이 남아 있도다[燈明水上無嫌隙 柱似枯形力有餘]”라는 시 한구[一聯]와 “높이 날고 멀리 뛰라[高飛遠走]”는 네 글자를 써서, 심지(心紙)를 만들어서 담뱃대[烟管]에 넣어서 해월 고제에게 주면서, 대도의 장래를 절절(切切)히 부탁하였다.
3월 10일에 선생이 소위 ‘자도난정률(左道亂正律)’의 죄로 형을 대구 장영(將營)에서 받을 때, 여러 번[再三] 칼[劒]을 내리치되 조금도 칼 자국[劒痕]이 없는지라, 감사 이하 모두가 놀라서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더니, 선생이 태연히 형졸에게 말하기를
“너는 청수 한 그릇[淸水一器]을 내 앞에 가지고 오라.”
형졸이 청수를 가지고 오거늘, 선생이 청수를 대하고 한참 동안 묵념[黙念良久]하고 나서 다시 말하기를,
“청수를 물리라.”
하고 곧 형을 받았다.
(청수를 봉전하고 묵념하는 것은 선생이 정한 동학 의식의 하나이다)
이때에 제자[門徒] 김경필(金敬弼), 김경숙(金敬叔), 정용서(鄭龍瑞), 곽덕원(郭德元), 임익서(林益瑞), 전덕원(全德元) 등이 선생의 시체를 수습하여 자인현(慈仁縣) 서후연점(西後淵店)에 이르렀는데, 시체가 여전히 온기가 있고, 머리와 몸이 서로 이어지는 곳[身首相續處]에 홍백선(紅白線)이 있는지라 제자들이 시체를 지킨 지 3일째 아침에 무지개[彩虹]가 연못에 생기며 서운(瑞雲)이 집을 둘러싸더니 무지개가 사라지고 구름이 걷히며 시즙(尸汁)이 나오기 시작하는지라. 이에 (龜尾山) 아래 용담 앞쪽 기슭에 매장하니, 선생의 나이 41세였다.
선생의 궐기와 그 환경
선생이 인내천의 진리를 대각한 경신년(庚申年)은 서기 1860년이니 당시 동양 천지(天地)는 실로 동요(動橈)가 극에 달했다. 이에 앞서 영국은 1839년에 아편전쟁을 일으켜 소위 「남경조약」을 체결하면서 청나라 홍콩[香港]을 취한 이외에 2,100만 불의 배상금을 징수하였으며, 그 후 1856년에 영불(英佛) 양국은 다시 군대를 연합하여, 천진을 점령하고 북경에 육박하여 소위 「북경조약」을 체결하여, 청나라의 토지와 배상금을 아울러 나누어 가지매 동서의 대지는 문득 서양 사람의 위력[威壓] 아래 놓이게 되었으며, 조선으로 말하면 순조 31년 신묘(辛卯, 1831)에 영국의 선함(船艦)이 홍주군 고대도(洪州郡 古代島)에 나타나 관민(官民) 모두 놀라움을 일으키던 중 혜종(惠宗) 11년 을사(乙巳, 1845)에 영국인이 통상을 억지로 청[固請]하였고, 혜종 12년 병오(丙午, 1846)에는 프랑스의 군암(軍艦)이 홍주군 외연도(外烟島)에 와서 그 위세를 드러냈으며, 일찍이 정조 때부터 성행할 기세를 나타내던 기독구교(基督舊敎) 즉 당시의 소위 말하는 천주학(天主學)은 헌종 때 들어와서 서양인의 내왕이 빈번해짐과 함께 시세(時勢)가 갈수록 융성[益隆]하야 조정이 엄금이 있었음에 불구하고, 그 예배당[堂]을 세우고 그 도(道)를 행하여, 온 나라의 인심이 장차 그쪽으로 쏠려갈[趨向] 염려가 있었다.
그런 중 당시 조선의 내정을 회상하면 백여 년에 글친 당쟁의 여독으로 정치와 교화[政敎]가 땅에 떨어져 순조 대에 들어서는 극도의 쇠약에 이르렀으며 용강인(龍岡人) 홍경래의 혁명(순조 11년, 신미)이 실패된 이후로 정부의 세력을 배경으로 한 지방의 탐관오리의 포학(혁명의 반동)은 더욱 심하여, 생민(生民)의 고난[困苦]이 극에 달하였다.
이상을 요약하여 말하면 순조 대부터 철종 대에 이르는 시기[年間]의 조선은 안으로 정교(政敎)의 폐단과 해이함[廢弛] 극에 달하고 밖으로 서양인[西人]의 출편이 빈번하매 조야(朝野)의 인심은 분란하여 그 향할 바를 알지 못하였다. 다시 말하면 내우외환[內危外患]이 번갈아 도래하였다.
그런 중 선생은 일찍이 16세 시(헌종 5년, 己亥)로부터 당시의 세상 인심[世道 人心]을 개탄하면서, “이 세상은 공맹(孔孟)의 덕(德)으로도 足히 論치 못할 것이요 요순(堯舜)의 정치[治]로도 족히 말하지 못하리라” 하여 자기 부친[先考]이 평생 공부[攻究]하던 유가(儒家)의 서류를 하루아침에 소진(燒盡)하고 혹은 궁마(弓馬) 판천(販泉)에, 혹은 고산장곡(高山長谷)에 그 심지(心志)를 스스로 고단케 [自苦] 하며 그 육신[筋骨]을 스스로 힘쓰게[自勞] 하여, 우울불락(憂鬱不樂)하던 중 동양의 풍운(風雲)은 날로 급하여 조선과 순치(脣齒)의 세(勢)를 가진 중국이 먼저 서양사람[西人]의 유린 하에 들어가고자 하며, 그 여세(餘勢)는 문득 조선에 침윤(侵潤)하여 상하가 진동[震駭]하며 그중 기독구교(基督舊敎)의 전포(傳布)는 당시 조선인의 정신을 일거에 정복할 형세가 있으매, 선생은 써하되 “국내의 정교가 이와같이 폐이(廢弛)하고 국외의 대세가 이처럼 변전(變轉)하는 이때에 있어서 우리가 대책이 없으면 조선 아니 동양의 장래를 어찌하며, 천하의 세도(世道)를 어찌할꼬” 하여, 이에 불출문외(不出門外) 맹서하고 단단일념으로써 대세의 만회에 고심하던 중 경신 4월에 드디어 물물천 사사천(物物天 事事天)의 진리를 각득(覺得)하고 동귀일체(同歸一體)의 대이상을 가지고 전승공취(戰勝攻取=침략과 약탈)로써 유일한 인생관을 삼은 서양인의 오류를 근본적으로 교정하고 허위와 게이름[虛僞怠惰]으로써 제2의 심성을 삼는 동양인의 쇠약[萎靡=시듦]을 일거에 부활케 하여 그 덕을 천하에 펴는 동시에, 널리 세상의 민중[蒼生]을 광제(廣濟)하리라 하였다.
이것은 기자의 고찰이 아니라 선생의 친필(親筆)에 의한 여러 글에 역력히 그와 같은 뜻[辭意]을 기술[述盡]하였나니, 그 「포덕문(布德文)」 중의 1절에는 말하기를 “최근 들어 온 세상 사람이 각자위심하여 천리를 따르지 않고 천명을 돌아보지 않아서 마음이 항상 두려워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였다[挽近以來 一世之人 各自爲心 不順天命 不顧天理 心常悚然 莫知所向]”고 하고, 국내 인심의 폐이(廢弛)를 통탄하고 다시 “서양 사람은 싸우면 이기고 치면 빼앗아 이루지 못하는 바가 없으니 천하가 모두 망하면 또한 순망치한의 탄식이 없지 않을 것이니, 보국안민의 계책이 장차 어디에서 나올 것인가. 지금 세상 사람은 시운을 알지 못하여…[西洋 戰勝攻取 無事不成 而天下盡滅 亦不無 脣亡之嘆 輔國安民 計將安出 惜哉 於今世人 未知時運…]”를 말하여, 정치적, 물질적으로 압박해 오는하는 외환(外患)이 이처럼 절박함을 논하고, 「논학문(論學文)」에서는 다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서양 사람은 도성입덕하여 그 조화에 미쳐서 이루지 못하는 일이 없고 무기로써 공격함에는 당할 사람이 없다고 하지 중국이 소멸하면 어찌 순망치한의 우환이 없겠는가. 도무지 다른 까닭이 아니라 이 사람들은 도를 서도(西道)라고 하고 학을 천주(天主)하고 교를 성교(聖敎)라고 하니 이것은 천시(天時)를 알고 천명(天命)을 받은 것이 아니겠는가. 이와 같이 거론하기를 일일이 다할 수 없을 즈음에 나는 또한 마음으로 두렵고 단지 늦게 태어남을 한스러워할 때에…[西洋之人 道成德立 及其造化 無事不成 攻鬪干戈 無人在前 中國消滅 豈可無脣亡之患耶 都緣無他 斯人 道稱西道學稱天主 敎則聖敎 此非知天時而受天命耶 擧此 一一不已故 吾亦悚然 只有恨生晩之際…]”라고 말하여, 서양인의 세력은 그 근거가 그 나라 민심의 건전함 있고, 그 표방이 경천애인(敬天愛人, 금일로 말하면 正義人道)에 있어서, 그 세력이 무시하시 못할 것은 물론이요, 단순한 정치의 세력만으로 이에 대치하지 못할 것을 지적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우리 도는 무위이화라. 그 마음을 지키고 그 기운을 바르게 하고 그 성품을 거느리고 그 가르침을 받으면 자연한 가운데 화해 하오는 것이다[吾道 無爲而化矣 守其心 正其氣 率其性 受其敎 化出於自然之中].”라고 하여, 어디까지나 표방적(標榜的)이오 구분적(區分的)이요, 점유적(占有的)인 서양 문교(文敎)와 그 자체가 다름[自別]이 있음을 표명(表明)하였다.
선생 사상의 진수
“시천주조화정영세불망만사지(侍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 선생의 사상의 진체는 오로지 이 13자에 포괄되었으며, 13자 중에도 시천주(侍天主)라는 3자가 가장 오묘한 뜻을 소유하였다. 선생은 자기가 읊은 가사에서 “13자 지극하면 만권시서)萬卷詩書) 무엇하랴”라고 하였으며, 선생의 제자[高弟] 최해월은 그 문도(門徒)를 대하면 늘 ‘시천주’의 뜻을 요해(了解)하느냐고 질문한 것을 볼지라도 그 13자- 중에도 시천주의 3자가 얼마나 필요한지를 알 것이다.
그러면 선생의 소위 시천주라 함은 무엇이냐.
선생의 설명에 의하면 당시의 사람은 천주(天主)라는 그 ‘천(天)’에 대한 관념이 전혀 그 마땅함을 얻지 못하였다. 즉 ‘천(天)’이라 하면 자기를 제외하고 천지(天地) 만유(萬有)를 제외하고 풍우상설(風雨霜雪)을 제외하고 그 이상에 초월하여 있는 별개의 무슨 주재자(主宰者)와 신(神)이라고 사유(思惟)하였다. 그래서 세간(世間)의 사람들[人人]은 계절[四時]의 변천과 비와 이슬[雨露]의 강하(降下)로써 천주(天主)가 베풀어 주는[施與]하는 은혜[恩典]라 하였으며, 천지간의 모든 생명[羣生]은 천주가 조화로 낳은[造出]한 일종의 별물(別物)이라 인식(認識)하였다. 그리하여 세상에 존재하는 사물[物]과 사물[物] 사이에는 하등의 맥락(脉絡)이 있음을 인정하지 아니[不認]하며, 따라서 해와 달[日月]의 운행, 비와 이슬[雨露]의 강하(降下)와 같은 자연계의 현상에 대하여, 어떠한 영감(靈感)을 인정하지 않았다. 아아[於時乎]! 온 세상[一世]의 사람은 각자위심(各自爲心)하여 천리를 따르지 않고 천명을 돌아보지 않고 서로 침략하고 학대하며, 모함[讒誣]하고 중상(中傷)하며, 자연(自然)적이지 않은 계급과 허위의 언행을 날조하여, 효박조폭(淆薄粗暴)한 세상을 만들어[化作]간다.
그러나 실제의 천주라 함은 그와 같은 우주 만유(萬有)를 초월한 별개의 것이 아니다. 자연(自然)의 편으로 말하면 봄 가을[春秋]의 갈마듦[秩代]과 계절[四時]의 성쇠가 모두 천주(天主)의 자취[跡]요, 인사(人事)의 편으로 말하면 일동일정(一動一靜), 일성일패(一盛一敗가) 역시 천주의 자취[跡]이며, 그리고 위로 대천성진(大天星辰), 아래로 조수곤충(鳥獸昆蟲) 어느 것이 천주의 나타남[顯現] 아님이 없는지라. 고로 우리는 누구든지 천주를 모시지 아니한 자(者)가 없으며, 자기가 모신 천주를 자기 각자가 체인(體認)하는 동시에, 우리는 곧 만유가 모신 천주, 즉 전체로서의 천주를 체인(體認)하게 될 것이며, 전체로서의 천주를 체인하는 때에 비로서 인간의 모두[億兆]는 동귀일체(同歸一體)할 것이며, 인간의 모두가 동귀일체하는 때에 우주의 생명[生]은 완전히 구제하리라 하였다.
그 대체의 사상이 이러한지라. 그 결과는 당연히 이러한 해석을 취하게 된다.
1. 선생의 사상하에는 일체의 차별[區分]을 인정[認]하지 못하게 된다. 즉 종래에는 하늘[天]과 사람[人]을 구분하고, 사람과 사물[物]을 구분하고 사람과 사람을 구분하여, 그 사이의 직접 교통을 금하고 혹은 갈앙(渴仰)하며 或은 원수처럼 여기며[仇讎視], 혹은 학대함을 스스로 ‘그럴 수 있다[可]’고 하였으나, 이 우주 만유는 하늘의 현현(顯現)이라 인정[認]한 선생의 사상에서는 이러한 구분을 인정하지 않고 상호간의 부조(扶助)와 감격(感激)뿐으로써 그 생명[生]을 크게 할 것이니, 선생의 소위 「동귀일체(同歸一體)」가 곧 이것이다.
2. 우주 진화의 무궁(無窮)을 인정[認]하는 동시에 인생 자체의 진화의 무궁을 인정하게 된다. 즉 종래에는 하늘과 사람[天人]을 구분해서 봄으로써, 하늘은 이미 이루어진 권능(權能)의 자(者)라 하고 ㅅ람은 하늘의 조출(造出)에 관련된 일종의 영물(靈物)이라 하여, 인간의 영장(靈長)을 인정하는 한편으로 인간의 진로(進路)를 스스로 제한한 관념[觀]이 있으나 선생의 하늘과 사물[天與物]을 순전한 일체(一體)로 보는 동시에 이는 오히려 무궁히[尙又無窮] 진화할 도중에 있는 미성(未成)의 자(者)라 하였나니, 무극대도(無極大道)라 하며, 무궁무궁 만사지(無窮無窮 萬事知)라 함이 즉 이것이다.
3. 모든 향상과 모든 해결을 자아(自我)로부터 구하게 된다. 하늘과 사물[天與物]을 순전히 한 몸[一軆]으로 보는 결과[=하늘은 사람에 의하여 그 뜻을 폄-역자주]는 당연히 모든 문제를 자아로부터 처변(處辨)하게 되나니 자아를 제외[餘]하고 다시 더듬을 곳이 없는 까닭이다. 말하기를 “밝음이 있는 바를 알지 못하거든 멀리서 구하지 말고 나를 닦으라[不知明之所在 遠不求而修我]. 덕이 있는 바를 알지 못하거든 내 몸이 화해 난 바를 헤아리라[不知德之所在 料吾身之化生]. 명이 있는 바를 알지 못하거든 내 몸의 밝고 밝음을 헤아리라[不知命之所在 顧吾心之明明]. 도가 있는 바를 알지 못하거든 믿음이 한결같은가를 헤아리라[不知道之所在 度吾信之一如].”라 하는 것은 이 편(便)의 소식을 말하는 것이다.
선생의 사상을 말[演述]하고자 하면 한이 없다. 그런데 이는 「인내천의 연구」라 하여 본지에 누차 발표된 것이 있으므로 중복의 혐(嫌)을 피하여, 이로써 약술한다.
선생의 출현과 그 파문
근대 또는 현대의 조선, 아니, 동양에 있어서 선생의 출현이 과연 어떠한 영향을 미쳤으며 또 미치는 중에 있는가 함은 우리가 군담[贅言]을 할 필요 없이[不待] 일반 사람이 잘 아는 바이어니와 선생이 지금부터 60여 년 전 조선이 혼몽(昏夢)이 한창[正酣]이던 당시에 일찍이 조선의 장래- 아니 세상[世間]의 장래를 우려하고 유독(唯獨)히 회의(懷疑)하며 번민하며, 크게 깨달[大悟]아서 사람마다 한울이요 사물마다 한울[人人天物物天]의 진리를 파지하고, 보국안민, 포덕천하, 광제창생의 대기치를 내걸다가, 때가 돕지 아니[非]하고 일[事]이 어그러지[違]는 하루아침에 그 일생[一命]을 대구장대(大邱將臺)에 내던져 진리의 최후 승리를 영원에 구한 것과 같은 것은 우리가 그 평가할 바를 알지 못하도다.
선생이 한 번 가신 이후 선생의 사상과 주의는 날로 세상에 선전(宣傳)하여, 금일에 이르러서는 선생의 주의에 순(徇)한 자뿐으로 약 40만(東學亂 이후)을 헤아리며, 선생을 대신사로 신앙하는 자는 그 수가 몇 백만임을 알 수 없게 되었으며, 이뿐 아니라 선생의 사상은 인내천주의(人乃天主義)의 칭호(稱號) 아래에서 조선은 물론, 온 인류[人間]의 심령(心靈)에 스며들고자 하는 오늘날이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선생은 근대 조선의 태양이며 인문개벽(人文開闢)의 횃불[炬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