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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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의 거짓말  | 인문학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1  
박홍규 (지은이)인물과사상사2017-05-19

492쪽

책소개

인문의 출발과 고대의 인문에 대한 이야기다. 노예제를 인정한 과거의 계급적 문화인들, 가령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가 세운 인문에 대해 그 노예제를 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약소국 침략, 남녀 차별주의, 장애인 차별주의 등 모든 소수자에 대한 차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궁극적으로 모든 차별은 폭력으로서 폭력 자체와 함께 배제되어야 한다. 전쟁도, 국가폭력도, 국가주의도, 기타 모든 부당한 권력도 거부되어야 한다. 특히 진보는 자기 전공에 대해서는 보수 이상으로 굳은 신앙을 보여준다. 진보일수록 학벌이나 족벌이나 문벌 따위에 갇혀 산다. 그런 패거리 진보의 인문학에는 진보가 없다.

인문학이 필요한 이유는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해서다. 인문이 모든 인간의 문화를 뜻하는 이상 민주적이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인간이 인간을, 특히 소수 인간이 다수 인간을 지배하고 차별하고 배제하는 비민주적 사상을 인문이라고 할 수 없다. 인문학이 필요한 이유는 민주주의자를 가르기 위해서다. 지금 민주주의자 없는 민주주의가 개탄되고 있는 현실이기 때문에 민주주의를 문학으로, 역사로, 철학으로, 예술로 말하는 인문학을 우리는 고민해야 한다. 민주주의를 배신하는 인문학은 백해무익하다.


목차
책머리에 ․ 5

제1부 첫 인문 이야기
제1장 첫 이야기 ․ 13
제2장 첫 사람 이야기 ․ 29
제3장 첫 예술 이야기 ․ 45
제4장 첫 농사 이야기 ․ 61
제5장 첫 인문 이야기 ․ 77
제6장 첫 독재 이야기 ․ 93
제7장 첫 민주 이야기 ․ 109
제8장 첫 붓다 이야기 ․ 125
제9장 첫 제국 이야기 ․ 141
제10장 첫 평화주의자 이야기 ․ 157
제11장 첫 폴리페서, 공자 ․ 173
제12장 첫 권학 ․ 189
제13장 첫 민학 ․ 205
제14장 첫 권예와 민예 ․ 221

제2부 고대 인문 이야기
제1장 그리스 이야기 ․ 239
제2장 그리스의 문학과 신화 이야기 ․ 254
제3장 그리스, 페르시아, 헤로도토스 이야기 ․ 268
제4장 아테네 민주주의 이야기 ․ 284
제5장 소크라테스 이야기 ․ 300
제6장 플라톤 이야기 ․ 315
제7장 아리스토텔레스 이야기 ․ 332
제8장 디오게네스 이야기 ․ 348
제9장 고대 그리스 연극 이야기 ․ 364
제10장 에피쿠로스 이야기 ․ 379
제11장 로마 이야기 ․ 395
제12장 로마인 이야기 ․ 410
제13장 로마의 문학과 예술 이야기 ․ 425
제14장 모세와 유대교 이야기 ․ 442
제15장 예수와 기독교 이야기 ․ 458
제16장 우리의 고대 인문 이야기 ․ 470

참고문헌 ․ 486

접기
책속에서
P. 19~20 지금 세계는 그따위 황당무계한 국제법의 차원은 벗어났다고 하지만 국제법에는 여전히 문제가 많을 뿐 아니라,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그런 구분이 존재한다. 단적인 보기로 우리는 지난 1세기 동안 끊임없이 후진국, 빈곤국, 야만국 등이라는 콤플렉스에 젖어왔고, 서양을 닮고자 하는 욕망에 사로잡혀왔다. 5·16 군사쿠데타 이후 국시로 삼은 근대화라는 말이 그 대표적인 구호이고, 그 말이 다르게 변용되었어도 여전히 우리의 믿음으로 남아 있다. 심지어 얼굴까지 서양인처럼 뜯어고치는 풍조가 어떤 나라보다도 심하다. 그보다 문제인 것은 정신의 식민지화, 인문의 빈곤이다. 「첫 이야기」  접기

P. 92 서점과 도서관이 중심이어야 인문이 산다. 인문학이 발전되기 위해서는 그 인프라가 튼튼해야 한다. 즉, 학교, 서점, 도서관, 미술관, 박물관, 출판사 등이 튼튼해야 한다. 그러나 한국에는 그 모든 것이 약하다. 학교는 많지만 입시 준비만 하고 출판사도 많지만 수험서만 찍어내고, 외국에는 거의 없는 입시학원만이 모든 거리를 뒤덮고 있다. 그리고 서점, 도서관, 미술관, 박물관 등은 죽었다. 그러니 인문이 죽었다. 대학의 인문학과가 없어지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그렇다고 인문이 죽지 않는다. 학교나 대학이 죽는 것이 문제다. 도서관 중심의 교육이 아닌 것이 문제다. 도서관에 수험서만 암기하는 아이들만 있는 것이 문제다. 그런 교육을 교육이라고 하고 있는 정부와 교육자, 학생과 학부모가 문제다. 「첫 인문 이야기」  접기

P. 136 인문학, 특히 고대사나 종교나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 중에는 과학이나 기술을 종교나 사상과 대립시키는 사람이 많다. 그들은 인류가 역사상 종교를 믿지 않은 것은 극히 최근에 불과하고, 모든 종교는 모두 저세상을 믿고 죽음에 대해 말하는 것인데 과학은 그렇지 않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종교가 꼭 저세상을 믿고 죽음에 대해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불교나 기독교나 마찬가지다. 천국이나 지옥에 대한 신앙을 상실한다고 기독교가 영혼을 상실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저세상은 윤회에 의한 재생이 아니라 저세상이라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아가 저세상을 말하는 것과 죽음에 대해 말하는 것은 서로 다르다. 나는 저세상에 대해 말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죽음에 대해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또 과학과 종교가 무조건 대립되는 것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첫 붓다 이야기」  접기

P. 190~191 한국의 인문학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 학문 대부분이 그런 수준 이하의, 학문 아닌 무엇이 아닌지 의문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이니 국어연구원이니 국사편찬위원회니 하는 것은 물론이고 학술원이니 예술원이니 한국연구재단이니 하는 것들도 그런 수준과 관련되지만 궁극적으로 문제되는 것은 교과서, 특히 국정교과서라고 하는 학문적 요약본의 기준이다. 그것을 절대 진리처럼 국민 모두에게 교육하는 것이 한국의 교육이고 한국 문화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지 모른다. 그 교과서 집필 위원들이야말로 학문의 최고 권위자들로 받들어지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그들은 국가가 심사해 임명한다. 그들을 권력의 허수아비나 하인이나 시중꾼이나 노예에 불과하다고 하면 그들은 엄청난 화를 낼지 모르지만 그렇게 볼 수도 있을 정도로 수동적이다. 교과서에 실린 글을 최고의 글이라고 자랑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 글은 기본적으로 권력이 심사해 교과서에 싣기에 최고라고 결정한 것에 불과하다. 「첫 권학」  접기

P. 271~272 내가 니체를 반민주주의자라고 보는 책을 쓰자 니체를 전공한 어느 철학 교수가 반론을 썼지만, 굳이 답하지 않은 것은 그들의 그런 찬양 게임에 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니체 전공 철학자들에게 그런 비판은 쇠귀에 경 읽기에 불과하다. 게다가 그런 전공자들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일반인들은 나 같은 사람을 철저히 무시한다. 그러니 지금 생각하면 그런 책을 힘들게 쓸 필요가 있었을까 싶다. 물론 그래도 누군가 한 사람이라도 니체에게 불필요하게 현혹되어 반민주주의자가 되지 않는 계기가 된다면 다행이다. 아니 니체에게 반민주주의적인 요소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나는 우리의 민주주의가 그만큼 위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민주주의의 위기에 대한 책은 몇 권 나오지도 않았는데, 민주주의를 욕한 니체의 책은 그 수백 배를 능가하는 것이 못마땅하다. 사실 칸트나 헤겔도 비판해야 한다. 아도르노는 왜 그들을 비판하지 않았을까? 「그리스, 페르시아, 헤로도토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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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박홍규 (지은이) 

1952년 경북 구미에서 태어나 영남대학교 법학과와 같은 대학원을 졸업하고 일본 오사카시립대학에서 법학 박사학 위를 받았다. 
미국 하버드대학 법대·영국 노팅엄대학 법대·독일 프랑크푸르트대학에서 연구하고, 일본 오사카대학·고베대학·리쓰메이칸대학에서 강의했다. 
현재 영남대학교 명예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노동법을 전공한 진보적인 법학자로 전공뿐만 아니라 정보사회에서 절실히 필요한 인문·예술학의 부활을 꿈꾸며 왕성한 저술 활동을 펼치고 있다. 민주주의 법학연구회 회장을 지냈으며 전공인 노동법 외에 헌법과 사법 개혁에 관한 책을 썼다. 

1997년《법은 무죄인가》로 백상출판문화상을 수상했고, 2015년《독서독인》으로 한국출판평론상을 수상했다.
그동안 《저항하는 지성, 고야》, 《인문학의 거짓말》, 《인문학의 거짓말, 두 번째 이야기》, 《놈 촘스키》, 《내내 읽다가 늙었습니다》(공저), 《아돌프 히틀러》, 《누가 헤밍웨이를 죽였나》, 《카프카, 권력과 싸우다》 외 다수의 책을 집필했으며 《간디 자서전》, 《예술은 무엇인가》, 《존 스튜어트 밀 자서전》 외 다수의 책을 우리말로 옮겼다. 접기
최근작 : <혼돈의 시대, 리더의 길>,<인문학의 거짓말 두 번째 이야기>,<저항하는 지성, 고야> … 총 217종 (모두보기)
출판사 소개
인물과사상사 

최근작 : <싸가지 없는 정치>,<리터러시, 나쁜 뉴스 해독제>,<도시 인문학>등 총 314종
대표분야 : 한국사회비평/칼럼 4위 (브랜드 지수 122,552점), 역사 14위 (브랜드 지수 210,394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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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소개
탐욕과 배신의 인문학
“민주주의를 배신하는 인문학은 백해무익하다”

우리는 인문학의 빈곤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의 CEO 상업 인문학이 이를 말해준다. 소수의 힘센 사람들이 CEO 교양이니 인문이니 고전이니 하는 것을 만들어 유행을 선도한다. 그야말로 귀족 인문, 강자 인문, 사치 인문이다. 반인간적인 물질주의가 판을 치고 있음에도 물질과 반대인 정신이나 인간을 중시한다는 인문 혹은 인문학이 유행하고 있으니 더욱더 기이하다. 그들은 힘과 돈에다가 글과 문화까지 갖겠다는 것이다. 얼마 전까지는 부자가 권력자가 되고 거기다 명예박사까지 되더니 이제는 아예 인문학까지 하겠다는 것이다. 누구나 민주주의를 말하는데도 사실은 반민주주의가 판을 치듯이 말이다.
가짜 인문학이 성업 중인 세상에서 민주주의는 도저히 성립할 수 없다. 인문학은 타락했고, 인문학은 탐욕과 배신과 욕망에 물들었다. 대학에서 인문학과가 폐지되는 소동을 보면 우리의 인문이 얼마나 낮은 수준인지, 우리의 교양이 얼마나 천박한지 알 수 있다. 이는 집단적 유행에 휩쓸리지 않는 자기주장, 독선의 지양, 권력의 불의와 부정에 대한 사회적 분노, 약자에 대한 공감과 지원을 본질로 삼아야 할 인문학에 대한 배신이다. 특히 동서양의 지배문화에 대해 비판적인 관점 없이 무조건 찬양하는 인문학은 인문학이 아니다. 그렇다면 타락한 인문학의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인문학을 읽을 것인가?
『인문학의 거짓말』은 인문의 출발과 고대의 인문에 대한 이야기다. 노예제를 인정한 과거의 계급적 문화인들, 가령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가 세운 인문에 대해 그 노예제를 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약소국 침략, 남녀 차별주의, 장애인 차별주의 등 모든 소수자에 대한 차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궁극적으로 모든 차별은 폭력으로서 폭력 자체와 함께 배제되어야 한다. 

전쟁도, 국가폭력도, 국가주의도, 기타 모든 부당한 권력도 거부되어야 한다. 특히 진보는 자기 전공에 대해서는 보수 이상으로 굳은 신앙을 보여준다. 진보일수록 학벌이나 족벌이나 문벌 따위에 갇혀 산다. 그런 패거리 진보의 인문학에는 진보가 없다.
인문학이 필요한 이유는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해서다. 인문이 모든 인간의 문화를 뜻하는 이상 민주적이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인간이 인간을, 특히 소수 인간이 다수 인간을 지배하고 차별하고 배제하는 비민주적 사상을 인문이라고 할 수 없다. 인문학이 필요한 이유는 민주주의자를 가르기 위해서다. 지금 민주주의자 없는 민주주의가 개탄되고 있는 현실이기 때문에 민주주의를 문학으로, 역사로, 철학으로, 예술로 말하는 인문학을 우리는 고민해야 한다. 민주주의를 배신하는 인문학은 백해무익하다.

타락한 인문학, 빈곤한 인문학

인문학은 문사철, 즉 문학·사학·철학을 뜻한다. 문학과 사학은 서양인들이 문명이나 문화를 판단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였고, 철학은 그러한 문명을 반문명과 구별하는 기준을 제공했다. 그런 요소나 기준에는 종교, 미술, 음악 등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것들도 각각 기독교, 프랑스 미술, 독일 음악을 최고로 여기는 가치의 차별화로 이루어진다. 도덕, 법, 기술 등도 문화나 문명에 포함된다면 인문에도 포함된다. 그렇게 보면 인문의 범위는 참으로 넓어지는데, 이에 대해 문사철은 학문의 기초라거나 왕자라는 지위를 주장하기도 하고, 그래선지 더욱 고답적이고 신비하며 난해하게 변하기도 한다. 가장 황당한 것은 외국어와 외국 문헌으로 치장해 읽는 사람들을 지극히 소수에 한정하여 자기들끼리의 은밀한 놀이로 타락시키고 극소수 전공자 이외의 개입을 철저히 막는 것이다. 그런 인문학의 반민주적인 비밀주의나 고급주의는 CEO의 사치로 타락한 인문학보다 더욱 타락한 것이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부터 프리드리히 니체나 마이클 샌델에 이르는 반민주주의의 전통은 제국주의적 사고에 근거한 것으로 그것들이 선진국 인문학이라면 이는 참으로 잘못된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그런 것이 인문학이라는 이름 아래 아직도 통용된다. 그 단적인 보기가 서양이 비서양을 지배하기 위해 조작한 오리엔탈리즘인데, 더욱 심각한 점은 우리와 같은 비서양에서도 그런 오리엔탈리즘을 훌륭한 인문학으로 믿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 인문학이야말로 물질주의의 학문이다. 그런 인문학이 물질의 만능 시대에 유행하고 이를 CEO 등이 주도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이보다 반인문적인 행위가 있겠는가?

또 대기업이 대학을 지배하고 소유하는 것도 이상하기는커녕 바람직하다고 보는 지경이니 기업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현상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산학협동이 아니라 산학일체, 더 정확하게는 산업에 대학이 철저히 종속되어 있다. 자본주의의 최첨단에 대학이 있다. 자본은 최고의 권력이다. 지금 학문은 그런 자본의 권력에 봉사하는 권력학문이다. 우리의 학문, 특히 인문학의 악폐는 이러한 권력성에서 비롯된다. 그것을 벗어나지 못하는 한, 학문 특히 인문학은 존재할 수 없다.

유가가 독점적인 권력학문이자 권력종교가 되는 것은 공자에서 시작되었고, 맹자를 거쳐 동중서에 의해서 확립되었다. 미셸 푸코는 ‘지식은 권력적’이라고 했지만, 동아시아의 전통에서 유가와 유학은 권력 자체였다. 유가나 유학이 제대로 된 역할을 하려면 그러한 권력성에서 탈피해야 한다. 국가나 종교에서 탈피해야 한다. 그리하여 민학적인 인문학의 풍토를 만들어야 한다. 인문학은 인민학이자 인간학이 되어야 한다. 비판은 없고 찬양뿐인 사대 인문학을 참된 인문학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인문학은 서양 제국주의와 동양 제국주의를 비판할 줄 알아야 한다. 미국만이 아니라 그리스·로마부터 영국이나 프랑스의 제국주의까지 비판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런 제국주의를 찬양하고 부추기며 선동하는 인문학을 비판할 줄 알아야 한다.

자유-자치-자연의 인문학

인문의 원리는 자유, 자치, 자연이다. 첫째, 신이나 권력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각자의 모든 것을 자유롭게 결정한다는 것이다. 자유에 전제되는 평등 역시 모두가 기계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가운데 그 모든 다양성이 중요성을 갖는다는 것에서 평등하다는 것을 뜻한다. 둘째, 인간들이 함께 사는 사회를 스스로 만든다고 하는 자치의 원리다. ‘나’라는 자유로운 인간들이 자발적으로 이루는 작은 자치사회, 서로 지배하거나 종속하는 관계가 아니라 함께 다스리는 자치를 원칙으로 하는 소규모의 사회생활을 이루는 것이다. 셋째, 모든 인간이 인류로 자연이라는 환경에 속한다는 원칙이다. 자연은 사회를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생물이 사는 세계로 확대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결국 개인의 자유나 사회의 자치라는 것이 자연 속에서 자연과 조화되어야 한다.
그런 자유-자치-자연이 지금 죽어가고 있다. 여기서 자유란 자발, 자율, 자주로 타율과 반대다. 또한 개별, 개성, 단수로서 집단, 획일, 복수와 반대다. 나아가 자치는 통치의 반대이고, 자연은 기계와 반대다. 반면 구속과 방종, 타율과 억압, 인공과 제도만이 판을 친다. 바로 물질주의의 승리다. 생존을 위한 물질은 최소한으로 필요하지만, 오로지 물질적 가치에만 도취하는 물질지상주의는 문제다. 그런 물질주의의 승자만이 살 수 있는 곳이 한국이다. 그런 물질주의에 패하거나 그것이 인간의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해 스스로 물러서는 사람은 도저히 살 수 없는 곳이 아닌가 하고 물을 정도로 우리의 물질주의 중독 상태는 심각하다. 그러니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자유-자치-자연이라는 입장에서 판단해야 한다. 즉, 자유-자치-자연에 입각한 인문은 높이 평가되고, 그와 반대인 자유억압-권력통치-자연정복에 입각한 인문은 가차 없이 비판되어야 한다.
이러한 원칙은 ‘나’의 자유, ‘우리’의 자치, ‘세계’의 자연이라고 하는 3가지로 인류 문화인 인문이 구성됨을 뜻한다. 그런데 자유와 자치와 자연은 그 어느 것이든 간에 언제 어디서든 하나가 아니라 다양하되 보편성을 갖는 것이다. 이는 자유와 자치와 자연이 각각 대응하는 인간과 사회와 세계가 균질성이나 획일성이 아니라, 보편주의와 다원주의에 의해 항상 움직이는 것임을 뜻한다. 보편주의는 그것이 그 탐구의 ‘출발’점에서 미리 주장되어 타인에게 강요되거나 그 ‘최종’의 목표로 미리 결정되어 그 속에 매몰되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서로 이해하기 위해 공통의 공간을 탐구하는 ‘과정’의 보편주의이기 때문에 언제나 다양하게 나타난다. 간단히 말해 이는 상호의 ‘차이’를 인정하면서 서로의 ‘보편’을 찾아 대화를 계속하는 것이다.

인문학과 민주주의에 대하여

누구나 민주주의를 말하지만 사실은 독재자나 강력한 지도자를 선호하는 유교 사상에 수백 년 이상 길들여진 탓으로 반민주주의적인 타율적 통치 사고와 불평등에 젖어 있다. 민족주의 사관이니 신자유주의 사관이니 하고 떠들지만, 사실은 영웅 사관이 유일한 사관이다. 백인-황인-흑인이라는 인종차별 구조의 서열은 언제부턴가 한국인의 세계관이 되어 선진이라는 백인에 대한 열등감과 후진이나 야만이라는 흑인 혹은 준흑인에 대한 우월감을 낳았다.
가장 심각한 문제가 서양 중심의 세계 역사관이고 이를 서양은 물론 비서양도 그대로 따랐다는 점이다. 오랫동안 세계를 지배한 서양이 서양 중심의 세계사관을 갖는 것이야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이를 비서양, 특히 서양의 식민지 지배를 받은 시대는 물론이고 그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을 이룩한 나라들이 지금까지도 그대로 따르고 있다. 그러나 비서양인은 서양 중심의 세계사관을 타파하고 비서양 중심의 세계사관을 수립해 그것을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특히 마하트마 간디는 서양 문명을 근본적으로 부정하고 인도의 비폭력 전통을 존중했다.
인문에 반하는 것 중에서도 가장 나쁜 것은 인간의 자유와 자율성을 부인하고 인간을 이념이나 집단으로 파악하고 차별하는 전체주의, 국가주의, 집단주의, 지역주의, 혈통주의, 파벌주의, 차별주의 등이다. 인종과 계급이나 반공과 자본을 인간의 결정 요인으로 보는 파시즘, 제국주의, 공산주의, 자본주의, 상업주의 따위는 그 변태들이다. 이는 인간 행위의 목적을 개인이 아니라 인종과 민족의 승리나 순결, 또는 계급이나 물질이나 소비의 승리와 독재로 보고 이를 위한 개인의 희생을 당연하게 본다. 또한 이는 인간 집단을 선악으로 구별해 백인이나 프롤레타리아는 선하고 비백인이나 부르주아는 악하다는 식으로, 또는 그 반대의 흑백논리에 의해 구분한다.
모든 학문과 예술이 목표로 삼아야 할 인간의 자율성 확보, 즉 자기표현 가치 증대는 무엇보다도 물질주의와 엘리트주의에 대한 도전이고 정신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과 실천이어야 한다. 자본주의, 산업주의, 국가주의에 대한 도전이자 엘리트 중심의 개인주의와 과학주의에 대한 철저한 도전이어야 한다. 이것이 인문의 핵심이다. 잘못 돌아가는 세상을 비판하고 바로잡기 위한 자기표현 가치의 증대를 위해 인문이 필요한 것이지 요즘 유행하는 것처럼 입시 논술이나 취업 준비, CEO 조찬 교양이나 유한부인의 명품 교양을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이는 도리어 인문을 죽이는 행위다. 여기서 필요한 것은 비판적 인문과 인문 비판이다. 그리고 주류 인문에 대항하는 비주류 인문의 수립이다. 그것이 인문의 봄을 되찾는 르네상스다.
인문이란 삶의 질을 높이자는 것이다. 한국은 지나치게 물질 중심적이고, 사회적 관계의 질이 낮다. 이는 한국의 낮은 행복도와 밀접하게 관련된다. 즉, 한국은 인문의 절대적 빈곤국이다. 과거로 상징되는 사회적 지위나 경쟁에 집착하지 말고 내면의 인문적 추구라는 즐거움에 더욱 관심을 가져야 그런 정신적 빈곤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다. 우리의 인문이 추구해야 할 목표는 자유로운 인간들이 자치하는 사회를 자연스러운 환경에서 추구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평화와 협력과 연대가 필요하고, 권위(국가)주의나 투쟁(경쟁)주의나 갈등(계급)주의나 패거리(집단)주의나 전체(획일)주의는 없어져야 한다. 인문은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개인이 중심이어야 한다. 그래서 인문은 휴머니즘이어야 한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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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차별적 신분제에서 성립한 동서양 인문학에 대한 저자의 비판적 접근은 오늘날 민주주의에 기반해야 할 인문학적 성찰을 담고있다. 플라톤과 공자도 독재와 차별을 편들면 인문이 아니다. '자유-자치-자연'의 '3자주의'에 근접한 사상가로 부처, 묵자, 디오니게스, 예수다. 고전의 탈권위 지향.  구매
현정 2017-05-28 공감 (3)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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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 잘못 구입한 책..도대체가 인문학을 어떻게 공부하고 사색했기에 저자가 세상을 보는 눈과 뇌는 그렇게 이상하게 근시안적으로 삐딱하게 뒤틀려버렸을까? 이미 몇권의 책에서 저자에게 실망해버려서 이제 그의 책은 그만~~저자가 거짓말같다.  구매
알라딘(최란)은 댓글농단을 멈춰라 2019-05-26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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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의 지성사와 이의 무분별한 수용에 대한 신랄한 비판.  구매
우리들 2017-08-08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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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의 거짓말 새창으로 보기
저자 박홍규를 처음으로 알게 해 준 책은 <왜 다시 마키아벨리인가>였다. 다양한 저자들의 책을 읽었지만 박홍규 교수의 책만큼 명쾌하면서도 술술 읽을 수 있는 책은 거의 없었다. 그 후 저자의 책이라고 하면 관심을 가지고 읽으려고 했다.

 

저자가 집필한 책들의 특징 중 하나는 시대를 정확하게 판단하고 분석한 후 이를 날카롭게 비판한 저자 특유의 시각이다. 이 책에서도 그런 특징이 상당히 두드러진다.

 

먼저 인문학 열풍이라는 말이 몇 년 동안 대한민국을 뒤흔들고 있는 시대, 인문학이라면 모든 것을 제쳐두고서라도 읽어야한다고 하는 주장하는 시대에 마치 인문학에 무언가 문제가 있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는 <인문학의 거짓말>이라는 제목의 책이라면 일단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제목만으로 끝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겠지만 저자가 1부 첫 인문 이야기, 2부 고대 인문 이야기에 걸쳐 설명한 인문학의 폐해 혹은 진실은 상당 부분 공감할 수 있는 내용들이다. 물론 보통의 사람들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들 정도의 주장도 있지만.

 

저자가 인문학을 비판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책표지에서부터 주장하듯이, 인문학은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즉, 다수를 위한 인문학이 아니라 특권층의 권력, 이익을 위한 차별적이고, 비민주적인 인문학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인문학이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한 것이라는 저자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니 가장 깊이 다가온 내용도 첫 민주 이야기였다.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우리가 생각과는 다르게 세계 역사에서 최초의 민주국은 인도라고 한다. 카스트 제도 등 여러 가지를 고려하면 이해가 되지 않는 듯한 주장이지만 네루의 <세계사 편력>을 보면 인도가 민주 사상, 민주 전통, 토론 전통 등에서 첫 번째임을 알 수 있다.

 

책머리에서 설명하듯이 이 책은 신분 위에 성립한 인문이 여전히 사람들의 생각을 지배하고 그 위에 군림하고 있는 현실에 대해 비판한다. 인문이라는 이름하에 행해지는 비인문적인 행태를 신랄하게 꼬집기도 한다. 이런 저자의 비평 앞에서 다시 한 번 인문학의 본질을 생각해본다. 지금 우리가 열광하는 인문학이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인지 깊이 곱씹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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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tato4 2017-06-12 공감(1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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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의 거짓말 새창으로 보기
'이 책은 인문의 출발과 고대의 인문에 대한 이야기다'로 저자는 말문을 열고 있다. 동서양의 지배문화에 대한 비판없는 찬양에 대한 역겨움과 최근의 대중적 인문학의 유행에 대한 우려가 이어지며 '인문학이 필요한 이유는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해서'라고 '민주주의를 배신하는 인문학은 백해무익'하다 말하고 있다.

이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저자의 머릿말을 인용해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사실 책을 다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딱히 전적으로 타락한 인문학, 빈곤한 인문학이라는 말에 동의하게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인문학'이라는 제목이 붙어있지만 전체적인 느낌은 교양에세이를 읽은 느낌과 비슷하다. 물론 이건 어쩌면 내가 철학자들과 사상에 대해, 인문사회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저자의 말을 흘려 읽었기 때문일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의 내 기준에서는 그리 새로울 것도 없지만, 새롭게 알게 되는 부분 역시 잘 알지 못하면서 부정적인 측면만을 받아들일 수는 없기때문에 어떤 판단을 내리기가 쉽지 않다.

솔직히 말한다면 오래전에 저자가 쓴 책을 읽어보고 - 환경 관련이었다고 기억하고 있는데, 그 이야기가 너무 와 닿아서 그 후에 또 저자의 다른 글을 기대하며 읽었다가 뭔가 좀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 글 읽기를 중단했던 기억이 있다. 구체적인 기억이 떠오르지 않아 처음 '인문학의 거짓말'이라는 책이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잠시 망설여졌다. 그냥 편하게 내 기준에서 이 책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강했는데 아직까지는 '교양'인문학이라는 관점에서 한번 읽고 넘기는 글로 남을 것 같다.

 

'인문학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대한 물음과 그에 대한 방향을 제시한다는 측면에서는 우리가 생각해볼만한 이야기는 많이 담겨있다. 그런데 첫 인문 이야기중 한꼭지인 첫 붓다 이야기에서 '미사용 라틴어를 한국어로 옮기는 신부가 있으면 존경하겠다'라는 표현에서 더 이상 이 책을 읽는 흥미를 잃어버렸다. 2차바티칸 공의회가 언제적 이야기이고, 미사 경문을 우리말로 한 것이 언제적 이야기인데...

그 이후부터는 왠지 저자의 이야기가 사실에 근거한 자신의 주장이라기보다는 조금은 자신의 아집을 보여주는 느낌이 들기 시작해 더욱더 술렁술렁 읽게 되어버렸다.  철학 사상에 대해서는 잘 모르기때문에 다른 관점의 이야기를 할수도 있겠구나 싶기는 했지만 내가 알고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선뜻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이 많은 것도 사실이고. 그리고 결정적으로 가부장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아버지의 이야기를 하며 자신의 사상과 맞지 않는 부모에게 효도하는 이들을 이해할 수가 없다는 말에서 저자에 대한 선입견이 확고히 생겨버렸기 때문에 그 이후의 글들은 말 그대로 저자의 의견일뿐이구나, 라는 생각으로만 읽게 되어버렸다. 나 역시 그런 부모님에게서 자랐고 마찰도 많았지만 지속적인 설득 과정에서 사상의식의 변화가 이루어지기전에 부모에게 지극정성을 다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생각을 하지는 않는다. 저자의 의도는 그런것이 아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내게는 왠지 자신의 사상과 다르다고 척을 지는 것은 이슬람 근본주의자들과 무엇이 다를까 싶은 것이다.

 

'교양'이라고 하는데 어쩌면 내게 그만한 교양이 없어서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적절한 비유가 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내게는 이 책이 그런 느낌이다. 성경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성경을 읽어보고 성경의 다양한 해석을 읽은 후 성경이 쓰여진 시대적 상황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도 하고 난 후 비판적인 관점에서 이야기를 꺼내야 하는데 이건 마치 성경은 읽어보지도 않고 다른 사람의 비판만 드는 느낌?

그래서 더욱더 인문학에 대해 관심을 갖고 제대로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고보니 이 책이 바로 그런 의미에서 쓰여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내가 책을 제대로 읽은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까...? ;;;;;;;;

한가지 덧붙이자면 우리가 너무 교조주의적 사상에 빠져있어 제대로 비판을 못한다거나 유대인 선민사상에 대한 비판, 팔레스타인과 이슬람에 대해 잘 알 수 없고 그에 대한 자료도 많이 볼 수 없다고 하는데 적어도 나는 번역된 책을 통해서 그에 대한 것들을 많이 접해왔고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된 것도 사실이다. 너무 오래전 이야기만 예로 들지 말고 최근의 자료와 접근해볼만한 인문학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다면 좀 더 좋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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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ika 2017-06-14 공감(7)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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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인문학의 거짓말 : 인문학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타락한 인문학, 빈곤한 인문학 새창으로 보기






유독 한국 사회는 인문학에서도 편중된 시각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이는 교과서로부터 이어져 고착된 듯 싶다. 지배계층의 역사만을 추종하며 다른 시각과 관점을 배재하면서 기계적으로 답을 외우는 방식이기 때문에 넓고 다양하게 역사를 바라보지 못했다. 그걸 깨우쳤던 것이 <책의 정신>이었는데 이 책에서도 유사한 선상에서 우리가 숭상해 온 인문학을 낱낱이 비판하고 있는 책이다. 사람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 하지만 이제껏 우리가 믿어 온 진실들이 사실은 잘못 알고 있는 것일 수 있다는 의문을 왜 품지 못하고 있었을까? 그리스 철학자 중 우리들에게 잘 알려진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아리스톤텔레스는 노예제를 주장하며 민주주의를 반대해 온 인물들이다. 그럼에도 시중에는 이들을 다룬 책들이 왜 그렇게 많은걸까?



저자의 모든 주장에 다 동의할 수는 없어도(특히 종교에 관해서는) 인문학을 지배층에서 잘못 인용할 경우 하나의 논리로 피지배계층을 권력의 도구로 쓸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일례로 플라톤의 <국가>라는 책으로부터 파생된 우생학이 대표적인데 한창 제국주의가 지배했던 시대에 통했던 논리다. 나치스는 이 우생학으로 유대인을 비롯한 유색인종에 대해 대대적인 학살을 감행한 바 있다. 고전은 무조건 진리일거라는 맹신보다는 그 고전이 주장하는 바를 명확히 알고 있으면 사실은 사람을 계층으로 구분하여 차별과 배제한 인문이었다. 저자가 주장한 것은 명확하게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해서는 인문학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반민주적인 모든 것은 인문이라고 지칭할 수 없다.



꽤나 두꺼운 책이지만 각 꼭지별로 읽게 되면 그 나름대로 집중하면서 읽게 되는 책이다. 우리가 모르고 있거나 잘못 알고 있던 사실에 대한 깨우침을 얻을 때는 호기심이 왕성하게 일어서 내가 믿어왔던 것에 의문을 품게 한다. 인문학은 어렵고 고리타분하다고 느낄 지도 모르겠다. 워낙 시중에는 인문학을 바로 알자는 책들이 무수히 유행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으니 식상하다고 느낄만도 하다. 그럼에도 이 책은 인문학을 새로운 시각에서 바로 알자는 취지로 저자가 쓴 책이다. 한국 사회의 학문은 너무 한 쪽으로 편중된 경향이 없잖아 있다. 프로이트가 잠식했던 심리학 분야에서 기시미 이치로를 통해 아들러 심리학이 알려졌듯 이 책을 통해 인문학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던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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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지기 2017-06-13 공감(1) 댓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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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의 거짓말 새창으로 보기
지금의 대한민국 국민들중에는 한 인간으로서의 행복이란 무엇이며, 그 기준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이들이 거의 없을 것이라고 본다.

아니 고민할 여유 자체가 없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런 형이상학적인 것을 고민하기엔 현재를 살아가야 하는 하루하루의 순간이 너무나 힘들기 때문일 것이라 생각한다. 점점 물질만능, 물질우선에 눌려 오직 돈만을, 그리고 위쪽만을 바라보며 어떻게든 경쟁에서 승리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현실속에서, 행복이니 가치니 하는 것들의 의미를 찾는 말이나 행동 자체가 여유있는 자들의 말장난처럼 보여질 뿐이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이런 현실이 우리를 더욱 처절한 정신적, 육체적 빈곤의 악순환속으로 몰아넣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힘들고 어려울수록 인간으로서의 의미와 삶의 가치를 찾아서 나아가야만 이 구렁속에서 나올 수 있음에도, 우리는 애써 외면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인문이란 삶의 질을 높이자는 것이다. 한국은 지나치게 물질 중심적이고, 사회적 관계의 질이 낮다. 이는 한국의 낮은 행복도와 밀접하게 관련된다.... 즉, 한국은 인문의 절대적 빈곤국이라는 것이다. 과거로 상징되는 사회적 지위나 경쟁에 집착하지 말고 내면의 인문적 추구라는 즐거움에 더욱 관심을 가져야 그런 정신적 빈곤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이다.... 인문은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개인이 중심이어야 한다. 그래서 인문은 휴머니즘이어야 한다.” - P. 485.

 

인문학의 열풍은 한참 때보다는 식었지만 그래도 아직까지 인문학에 대한 강의와 책들은 꾸준히 나오고 있다.

그 방향이 맞는지 어떤지는 별도로 하고, 우리 개개인은 이런 인문학에 대한 이해를 어떻게 해야 할까? 과연 인문학에 대한 이해에 정답이란 것이 있을까? 에 대한 각자의 고민은 또 없는 것 같다. 그냥 방송이나 책에서 보여주고 들려주는 대로 아무런 비판없이 스펀지처럼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종교는 물론 모든 학문과 예술이 목표로 삼아야 할 인간의 자율성 확보, 즉 자기표현 가치 증대는 무엇보다도 물질주의와 엘리트주의에 대한 도전이고 정신주의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과 실천이어야 한다. 자본주의, 산업주의, 국가주의에 대한 도전이자 엘리트 중심의 개인주의와 과학주의에 대한 철저한 도전이어야 한다. 이것이 지금부터 이 책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인문의 핵심이다.” - P. 27~28.

 

<인문학의 거짓말 € 인문학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는 저자가 2013년 8월부터 2015년 11월까지 ‘월간 인물과 사상’에 연재한 것을 수정, 보완한 책으로 기존 인문학이라고 포장되어 나오고 있는 다양한 이론과 관점, 내용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총 2부로 구성된 이 책에서, 저자는 우리나라를 포함한 전세계에서의 인문학에 대한 접근과 이해가 백인우월주의와 제국주의라는 서구의 관점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으며, 우리가 그것을 진실인양 맹목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비판한다.

인문학은 인간 개개인의 자유와 그들이 모여사는 사회, 그리고 인간과 함께 공존하고 있는 자연과의 조합과 공존의 관점에서 이해해야만 하며, 그렇게 이해하게 실천하게 될 때 진정한 민주주의가 이루어질 수 있음을 저자는 설명한다.

 

“인문학이 필요한 이유는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해서다. 인문이 모든 인간의 문화를 뜻하는 이상 민주적이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인간이 인간을, 특히 소수 인간이 다수 인간을 지배하고 차별하고 배제하는 비민주적 사상을 인문이라고 할 수 없다. 특권층의 대두를 합리화하거나 그 권력을 미화하기 위한 인문은 있을 수 없다. 비민주적 인문이란 말 자체가 모순이다. 인문학이 필요한 이유는 민주주의자를 가르기 위해서다. 지금 민주주의자 없는 민주주의가 개탄되고 있는 현실이기 때문에 민주주의를 문학으로, 역사로, 철학으로, 예술로 말하는 인문학을 우리는 고민해야 한다. 민주주의를 배신하는 인문학은 백해무익하다.” - P. 6.

 

촛불혁명을 통해 정권이 바뀌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대로다.

앞으로 얼마나 기대만큼 변화할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상과 현실의 괴리는 여전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희망을 생각한다. 인간이기에.

희망을 현실로 만드는 것은 정치인들이 아니라 생각한다. 주체는 바로 우리들이다.

실제 대통령 한명 바뀌었다고 세상이 바뀐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국민 한사람 한사람이 더 철저하게 검증하고 요구하고, 투표로 자신의 의사를 정확히 표현할 때 우리가 꿈꾸는 세상이 현실로 한발 더 다가가지 않을까 싶다.

 

“민주주의에는 논리적인 설득에 근거한 쌍방적 의사소통이 필요한 반면 비민주적 권위주의에는 명령을 주로 하는 상명하달식의 일방적인 의사 전달이 필요하다.” - P. 4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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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똥배 2017-06-12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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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의 거짓말을 읽고 새창으로 보기
<인문학의 거짓말>을 읽고

 

박홍규 선생님의 글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선생님의 주장에 찬성하는가 반대하는가가 아니라 나는 그 주제에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를 고민하게 한다. 인문학을 공부하는 이유가 다른 사람의 생각을 깊이 공부하고 자기 생각을 세우라는 데 있다면, 박홍규 선생님의 책은 참으로 읽어볼 만하다고 생각한다.

 

한 번도 뵌 적은 없고 아마도 앞으로도 뵐 기회는 없을 듯하지만, 박홍규 선생님은 적지 않은 나이로 기성세대의 고집과 젊은이의 반항을 동시에 담고 있는 듯한 글을 쓰신다. (본인이 생각하기에) 어리석은 사람들에게 격렬하게 화를 내고, 진지하게 사유하고 고민한 뒤에 간결하고 명료한 말투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한다. 가독성도 문체도 모두 좋다. 진지한 학자이자 글을 잘 쓰는 작가이다.

 

박홍규 선생님은 어떠한 지식인도 권위자라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복종하지 않으며, 어떠한 책도 고전이라는 이유만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선생님의 사유 속에서는 소크라테스도, 플라톤도, 루소도, 시오노 나나미도 제국주의자, 반민주주의자가 된다. 나도 비슷한 생각을 품고 있었고, 상당 부분 많은 의견에 동의하지만, 어, 이렇게까지 생각해도 되는 걸까를 고민하게 되는 부분도 많다. 바로 그런 고민을 할 수 있고, 나름대로 반박을 하면서 독서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이 책의 큰 장점이다.

 

일례로 왕은 모두 군주이고, 군주는 모두 반민주적이라 나쁘다고 한 부분도 그렇다. 광개토대왕의 침략주의와 반민주적인 부분은 선생님 의견에 동의한다. 하지만 세종대왕은 오히려 군주이기 때문에, 당연히 반민주적인 위치에 있기 때문에 오히려 해낸 일이 더 놀랍고도 대단하지 않은가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반대에 반대만 있다면 책 읽기가 많이 힘들 텐데, <인문학의 거짓말>은 일단 박홍규 선생님의 시각일지언정 인물의 사상을 소개하고 그에 대한 반론을 제기해 가기 때문에 인문학 지식을 쌓을 지식서로서도 충분히 가치가 읽는 책이다.

 

학자를 비웃고 철학자를 비웃고 종교를 비웃고 정치인을 비웃는 일관된 태도를 유지하는 박홍규 선생님의 글은 정말로 ‘반식민주의’적이고 ‘반제국주의’적이며 ‘반지배주의’적인 글이다. 수많은 지식인을 비웃는 박홍규 선생님이니 아주 멋진 고전으로 꼽은 작품이 <걸리버 여행기>라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된다.

 

한 지식인의 번지르르한 글이 아니라 그 사람이 살았던 삶이 실천이 일상이 박홍규 선생님에게는 중요하다. 아무리 평정과 중용을 외치면 뭐하는가? 세네카는 다른 사람에게만 절제하며 살라고 했던 고리대금업자일뿐이고 공자는 출세지상주의자라는 일침에는 촛불 혁명이 시작되면서부터 절절하게 목격했던 우리 시대 지식인의 민낯이 계속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선생님에게 인문은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이다. <인문학의 거짓말>은 결국 삶의 질을 높이려고 우리가 해야 할 일들, 고민해야 할 문제들을 제시하는 책이다. 민중 집회의 권한을 법이 인정하지 않는 한국 이야기를 고민하고 유베날리우스를 읽고 네루의 <세계사 편력>을, 디오게네스를 진지하게 읽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인문학의 거짓말>을 읽으면서 봐야 할 책이 늘었다. 네루의 책, 러셀의 책, 버즈비의 책, 묵자. 배우고 익혀야 할 과정은 너무나도 지난하다. 하지만 계속 새로운 공부를 할 수 있게 해 주는 <인문학의 거짓말> 같은 책이 좋다.

 

<인문학의 거짓말>은 글을 대하는 태도를 알려주는 책이다. 책을 읽고 곱씹자. 저자와 대화를 하고 내 생각을 정립해 나가자. 어떤 권위자의 말이 아니라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가 무엇인지가 중요함을 알려주는 책이다. 박홍규 선생님의 글을 모두 다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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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새 2017-06-07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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