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0/12

李昇燁 전시하의 '대량 학살' 언설에 대한 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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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jin P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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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昇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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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하의 '대량 학살' 언설에 대한 의문 (장문 주의)
(1) 누군가의 링크를 통해 우연히 아래의 페이스북 페이지를 보게 되었다.
https://www.facebook.com/ingstudy/posts/697836207019232
(같은 내용의 블로그도 있다)
https://www.vingle.net/posts/1182683
요약하면, 평양의 군용 비행장 공사가 완료되자, 군사 기밀을 지키기 위해, 공사에 동원된 조선인 800명을 학살했다는 내용이다. 

현장 감독 '다나카 선생'이라든가 하는 거야 현장감을 살리기 위해 각색되었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아무튼 대단히 충격적인 내용이다. 감상을 적은 댓글이 쌍욕으로 도배되어 있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만 하다.

이 포스팅이 전거로 들고 있는 『한국사편지』는 읽어 본 적은 없으나(앞으로도 읽을 일은 없으리라 생각되나), 제목만은 여러번 들어 본 적이 있다. 역사전문 저술가가 집필한 어린이 도서로서, 상당히 많이 팔린 데다, 제법 평판이 좋은 듯 하다.
문제는 여기서 서술된 이 사건이 실제로 있었던 사건인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소생의 공부가 부족한 탓인지도 모르겠지만, '평양 미림비행장 800명 학살'에 관한 연구논문은 한편도 본 적이 없으며, 오랜 기간 전시하 노무동원의 문제를 다루어 온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및 그 후신의 위원회, 부산의 강제동원 역사관 등)의 조사보고서에서도 이같은 내용을 다룬 것을 본 적이 없다.
세간에서 흔히 말하듯, '역사학자들이 도대체 공부를 안해서'일 수도 있고,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된 '강제동원...위원회'가 일을 제대로 안해서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정도의 큰 사건이 제대로 조명을 받아 본 적이 없다는 것에 대해서는 한번쯤 의문을 가질 필요가 있지 않을까.
--
백년이 다 되도록 두고두고 까이는 '일제의 만행' 제암리 학살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은 28명이다. 그 열배를 훌쩍 넘어 30배 가까운 희생자를 낸 일제의 만행이다. 눈을 까뒤집고 '일제의 만행'을 찾아 다니는 연구자가 적지 않음에도, 여기에 주목하여 연구 성과를 낸 사람이 없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

(2) 앞서의 포스팅이 전거로 삼은 『한국사편지』의 저자 박은봉 선생은 무엇을 전거로 이 사건을 서술한 것일까? 상상해서 쓴 것이 아니라면, 뭔가 참고로 삼은 저작이나 논문이 있게 마련이다.
강만길『한국현대사』(초판 1984년)가 그것이라고 생각된다.
국내에서 출간된 것 중에서는 처음으로 '미림비행장 학살사건'이 서술된 서적이라 생각된다.

 【첨부화상】은 이후에 증보된 『고쳐 쓴 한국현대사』인데, 강만길 선생 스스로가 자서전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이 부분에 대한 수정이나 가필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강만길 선생은, 태평양전쟁 말기의 조선인 학살의 대표적인 사례로서 다음의 세가지를 들고 있다.
① 평양 미림비행장에서 조선인 노무자 800명 학살
② 치시마열도에서 조선인 노무자 5000명 학살
③ 오키나와에서 조선인 노무자 1700명을 미군 폭격에 방치

그리고 바로 이 구절이, 이후의 연구서 및 대중서에서 거의 그대로 재인용된다. 실증적 연구가 존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저자들이 이 내용을 아무런 의심 없이 인용하기에 이른 배경에는, 다름아닌 '강만길'이란 걸출한 역사학자가 가지는 권위와 신뢰감이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이미 현대의 고전이라고 해도 좋을 '강만길의 한국현대사'가 가지는 무게감은 결코 가볍지 않다.
아무튼, 강만길 선생의 이같은 서술을 거의 그대로 인용 내지는 전거로 삼아 기술하고 있는 서적은 중요한 것만 들면, 다음과 같다.
ㅇ박세길,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1988년 초판 발행 이래, 90년대 초중반에 대학을 다닌 세대에게 엄청난 영향력을 미친, 별도의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의 베스트셀러. 90년대에 NL사관이 대중화되는 데 최대의 공헌을 한 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ㅇ한국사사전편찬회 편, 한국근현대사사전
→어린이 책 『한국사편지』를 집필한 바로 그 분이 근대편을 담당한 저작이다. 이 역사사전이 한국 내에서는 얼마나 이용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일본에서는 일본평론사에서 번역 출간되어, 한국근현대사 연구의 필수적인 공구서 중 하나로 자리잡고 있기에 영향력이 작지 않다고 하겠다.
일본어판에 기술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平壌美林飛行場建設に従事した労働者800名余、千島列島に強制徴用された労働者のうち5000名余が集団で虐殺されたのはその代表的な例である」(2012年版、183頁)。
ㅇ한국근현대사학회, 한국근현대사강의
→ 소생도 소속되어 있는 한국근현대사학회에서 주로 대학의 교양강의 교재로 이용하기 위해(더불어 학회의 재정 수입 확대를 위해) 간행한 책이다. 이 책에도 '미림비행장 800명 학살, 치시마열도 5000명 학살'이 서술되어 있다(206쪽).
ㅇ책은 아니지만, 대학의 강의에서도 이같은 내용이 등장하는 듯 하다. 【첨부화상】
→ 구글 검색에서 찾은 것인데, 아마도 K모 대학의 J모 교수의 강의 자료라고 생각된다.
http://contents.kocw.or.kr/.../2012/Korea/JungTaehern/15.pdf
그 밖에도 구글 서적 검색을 해 보면, '바로 보는 한국 근현대 100년사', '한국근대사의 이해', '한권으로 보는 한국사 100장면', '바로보는 한국근현대사' 등등 수많은 한국 근현대사 대중서에서, 약속이라도 한 듯 강만길『한국현대사』의 해당부분을, 빼거나 보태는 것 없이 그대로 가져다 쓰고 있다.
결과적으로는, '무슨무슨 학살'의 실증연구를 통한 검토 내지는 규명은 전혀 이루어지지 못한 채, (일부 '연구자'도 가세한) 대중서 저자들에 의해 '학살'의 구절이 되풀이되어 출간되고 독서시장에서 소비됨으로써, 반복을 통한 '기정사실화'라고나 할까, 마치 '자명한 역사적 사실'인 듯한 착시현상을 일으키게 된다.
(3) 전시체제하의 '대학살'을 언급한 여러 책들이 사실은 강만길 선생의 『한국현대사』의 클론에 지나지 않음을 확인했다. 그렇다면 강만길 선생은 대체 어디서 이런 정보를 입수했을까? 대체 무엇을 근거로 이같은 서술을 한 것이었을까?
앞서 정리한 세가지를 순서대로 살펴보기로 하자.
우선 ①'평양 미림비행장에서 800명 학살'에 관한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한국현대사』 권말의 참고문헌 목록에서도 명기하고 있는 바, 박경식 선생의 저작 (朴慶植『日本帝国主義の朝鮮支配(下)』、青木書店、1973年)을 근거로 하고 있음이 확인된다.
【첨부화상】 이 그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1980년대 중반에 한국에서도 번역본이 나오긴 했지만, 지금 당장 참조할 수 없는 관계로, 일본어 원저를 거칠게 번역해 보았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 * *
특히 전시하의 강제적 노동상황 아래에서는 가혹한 노동, 학대, 학살이 강요되었다. 예를 들면 평양 동쪽의 사동(寺洞) 부근에 있던 항공지하공장과 미쯔이(三井) 비행기회사에서의 노동자의 상황은 다음과 같다.
항공지하공장에서는 조선인 노동자 약 90명에 일본인 중위 1명, 소위 3명, 반장인 병사 9명이 있어 조선인 7명에 1명씩 일본인 군인의 감독하에서 일했다. 여기는 군사기밀에 속한다고 하여, 간단한 기술적 작업은 일본인 노동자에게 맡기고, 조선인 노동자에게는 근육노동으로 잡역, 운반작업 등을 16시간 이상 강요하였다. 또 점심시간도 거의 없어서 일본 패전 전의 수개월 동안은 밤낮 없이 고통스러운 노역에 시달렸다. 또 임금은 일본인 노동자의 3분의 1 밖에 지불하지 않고, 일본인이 쌀을 배급받을 때, 조선인은 좁쌀이나 콩깻묵을 받으면 운이 좋은 줄 알라고 뻔뻔한 소리를 했다. 또 조선인은 같은 돈을 가지고도 구내 상점에서 물건을 살 수가 없었다. 이 지하공장은 일본인 자본가가 수천원의 돈으로 농민들에게서 수천정보의 전답을 평당 40전이라는 헐값에 사 들이곤, 농민 40여명을 보국대로 징발해서 약 4년간 공짜로 일을 시켜 지은 것이었다. 이 공장에는 40여명 수용 가능한 영창(營倉)이 있어서 손에 잡히는 대로 조선인 노동자를 끌고와 감금하고는, 기합을 불어 넣는답시고 마구 때려댔다. 이 때문에 불구자가 된 사람이 많다. 1943-45년에 '군사기밀'을 지키기 위해서, 또는 '불온사상'을 방지한다는 명분으로 개별적, 또는 집단적으로 800여명에 이르는 노동자를 타지에서 끌고 와 학살하거나, 또는 싱가폴, 제주도, 만주 등의 전선에 보내서 강제노동에 종사시켰다.
이 항공지하공장에 이웃하여 미쯔이비행기회사가 있었는데, 이에 못지 않은 죽음의 수용소였다. 한마디로 말하면, 이곳은 한편에서는 비행기를 조립하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죄 없는 사람을 잡아와 학살하는 곳이었다. 이 회사의 일본인 감독은 조선인 노동자에 대해, '군사기밀'을 지키고, 태만한 자를 용서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며칠인가 결근이라도 하면 잡아다가 갖은 악형을 가했다. 현재 미림(美林)의 협동농장에서 일하고 있는 チョンスンジョン(정순정?)은, 일주일 동안 결근했다고 헌병 두사람에게서 세시간동안 목검으로 두들겨 맞아, 지금도 허리를 똑바로 펼 수 없는 상태다. 또 평양탄광의 기계공장에서 일하고 있는 キムプンボン(김분봉?) 노인은 남동생이 결근했다고 하여 재판소에 끌려갔다고 한다. 또 당시 수리과에서 일하던 박 청년은 결근했다고 해서 형무소에 들어가 죽었다. 1944년 1년간에 결근을 이유로 학대당하고 죽은 사람이 13명에 이른다.
또한 일본인 감독들은 대중에게 신망이 있는 조선인 노동자를 모략으로 학살했다. 박 청년노동자는 모두에게 신임을 받았다. 일본인 감독은 그의 집에 사람들이 출입하는 것을 알고, 그가 '불온사상'을 가졌다고 헌병대에 끌고 갔는데, 고문으로 25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그의 처남(아내의 남동생)인 キムヒョンボ(김형보?) 노인은 "그 사람은 열흘동안이나 쉬지 않고 곤봉으로 두들겨 맞고, 쓰러지면 물을 뿌리고 구둣발로 가슴, 등, 허리 어디고 가릴 것 없이 걷어 차서, 눈도 뜨지 못할 상태가 되었다. 뭔가 말이라도 하려 치면 코와 입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지금도 생각하면 이가 갈리고 몸서리가 쳐 진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는 약 300명의 조선인을 잡아와 고문을 가했다. (주9) (170-172쪽)
* * *
인용한 기술 내용에서도 사실관계가 틀린 것, 현실적으로 있을 수 없는 것, 모순된 것이 곳곳에서 눈에 띈다.
예를 들면 민간 군수회사가 멋대로 사람을 납치해 와서 강제노동을 시킨다거나, 매점에서 물건조차 팔지 않았다거나 하는 등의 이야기는 아무리 '일제 암흑기'라 해도 있기 어려운 이야기이다.
또한 근로보국대는 연간 30일이 원칙으로 다소의 연장은 있을 수 있지만, 연이어 4년이나 잡아 놓고 일을 시켰다는 것 역시 믿기 어렵다. 만에 하나 4년 동안 잡아 놓았다고 해도, '농사꾼' 40명을 잡아다가 '지하 비밀 공장'을 건설하는 게 타당하기는 한 걸까.
한편, 1940년대에 25세의 젊은 나이로 고문의 희생이 된 청년의 손아래 처남이, (후술하지만) 이 진술이 이루어진 1962년에는 기껏해야 40대 초중반일텐데, 어쩌다 '노인'이 되어 버렸을까... 등등등 지적하자면 끝이 없다.
그런데, 박경식 선생은 무엇을 근거로 이같은 서술을 한 것이었을까.
스스로 밝히고 있듯, (주9)로 제시된 전거는 다름아닌 《로동신문》1962년 12월 24일자에 실린 기사이다. 조선로동당의 기관지라 해서 무조건 배척하는 것도 온당하지 않지만, 백보를 양보해도 엄밀한 학술연구의 결과로 보기는 어렵다. 부분적으로 진실이 있을 수도 있으나, 기본적으로는 '반제국주의'의 정치적 프로파간다로서 보는 편이 타당하지 않을까 싶다.
다시 백보를 양보해서, 《로동신문》을 '사료'로 삼은 박경식 선생의 서술이 백퍼센트 사실에 부합한다고 치자. 그런데, 박경식 선생의 서술에는 '미림비행장'이란 말도, '비행장 공사 후에 학살했다'는 말도 없다.
확실히 '800명'이란 기술이 있기는 하지만, 강만길 선생이 서술하듯 비행장 공사 종료 후에 살해당한 인원수가 아니라, 수수께끼의 '지하 비행기공장'이 여기저기서 끌어와서 혹사시키고, 죽이고, 전쟁터에 보내고 한 조선인 '강제연행자'의 총수로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로동신문》의 프로파간다 기사가 박경식 선생에 의해 '사료'로서 인용, 서술되고, 다시 그 서술을 강만길 선생이 옮겨 적는 과정에서 다소의 윤색과 상상이 덧붙여져 '미림비행장 800명 학살'이라는 가공의 '역사적 사실'이 최종적으로 확립되기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겠다.
'업계'의 선배들에 대해 최대한 이해하는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확실히 '시대적 한계'를 무시한 혹독한 비판은 도에 지나친 것일 수도 있다. 1970년대의 박경식 선생은 조선대학교 교원으로 근무하는 한편으로 조선총련의 활동가로 활약 중이었던 데서 그 스탠스가 가지는 한계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더불어 그 당시의 '조선근대사' 연구 수준과 자료 수준의 한계도 함께 고려해 볼 수 있다.
강만길 선생 역시 마찬가지로, 선행연구가 일천한 상황에서 그 스스로가 미답의 영역을 개척해 나가며 개설서를 집필하지 않으면 안될 형편이었으니, 근대사-현대사에 걸친 넓은 영역에서 1차 자료를 꼼꼼하게 검토하면서 '사실(史實)'을 확정해 나가는 것은, 개인의 노력 수준에서는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과도한 요구였는지도 모른다.
이같은 사정을 전부 감안하면서도, 결과적으로는
당초 1962년에 발표된 《로동신문》의 프로파간다가, 박경식과 강만길이라는 걸출한 역사가 두사람을 통해 '학술'의 영역에 자리잡게 되고, 그것이 다시금 그들의 학문적 권위와 신뢰에 힘입어 각종 대중서 및 교과서, 공구서 등에 전재되고, 마침내는 반세기가 훨씬 지난 지금에 '남조선'의 어린이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기에 이르렀으니, '학자'로서의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4) 이어서, 강만길 『한국현대사』의 ②의 서술, 즉 '쿠릴열도 5000명 학살'의 근거에 대해 살펴보자.
이 부분에 대해서는 소생의 공부 범위를 훨씬 벗어나는 사항이기에 사실관계의 검증은 능력 밖의 일이다. 관련 분야를 전문으로 하시는 분들께서 검토해 주시면 감사하겠다.
여기서는 이 기술의 전거가 어디였는가를 확인해 보는 정도로 해 두고자 한다.
이 기술은, 역시 박경식의 저서인 『朝鮮人強制連行の記録』에 등장하는 것이다.
이는 애초 북조선의 '조선민주법률가협회'가 한일국교정상화(1965년)를 앞두고, '남조선괴뢰'와 일본의 국교정상화를 비난하며, 일본제국주의의 악행을 고발한다는 취지에서 발표한 성명 '조선에 대한 일본제국주의의 죄악행위에 대하여'(1964년 3월 20일)로서, 상기 박경식 저작에 '자료편'으로 수록되어 있다. 【첨부화상】
화상에 빨간색으로 네모를 쳐 표시한 부분만 한국어로 번역해 보면 다음과 같다.
"일본제국주의는 공장, 기업소에서 노동시간의 규정 조차 폐지하고, 특별한 전시 규율이라고 하여 헌병, 군대 또는 감독의 엄격한 감시 하에 노예노동을 강요했다. 군수공장 건설에 끌려간 조선인 노동자에 대해서는 '군사비밀의 보호'라는 구실로 공사가 완료됨과 함께 집단적으로 학살한 사례도 적지 않다" (274쪽)
"일본제국주의는, 치시마열도의 카지마쿠미에 동원된 5000여명의 조선인 노동자를 참살하고, 우루프섬에서도 2500명의 조선인을 무참히 살해했다"(287쪽)
아무런 사료적 전거 없이 진술된 이 두줄이, 지금껏 여러 대중서 등에서 되풀이하여 기술된 '치시마 5000명 학살'의 근거였다. 거듭 말하지만, 소생의 공부가 부족한 탓인지는 몰라도, 이같은 학살사건에 관해 전문적인 연구자가 실증적인 연구를 하거나, 관련된 자료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없다.
박경식 선생은 상기의 '성명'을 자신의 책에 '자료편'으로 넣으면서도, 이같은 기술 자체는 좀 신뢰하기 어렵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자신이 집필한 본문에서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어, 북조선측의 프로파간다와는 다소 거리를 두고 있음이 느껴진다. 【첨부화상】
"이상과 같은 것 외에, 전시중에 치시마열도나 카라후토의 군요지(軍要地/ 軍用地의 오기인가?), 비행장 건설을 위해 수만의 동포가 연행되어, 수많은 희생자를 내었다. 치시마열도에서 5000여명, 우루프섬에서 2500여명이나 사망했다고 한다."(188쪽)
'학살'에서 한걸음 물러나, '사망'이라고 적는 한편으로, '하였다'가 아니라 '했다고 한다'는 전언으로 서술한 데에서, 박경식 선생의 주저와 고민의 일단을 엿볼 수 있을 것 같다.
(5) 마지막으로 ③의 부분에 대해 생각해 보자.
"류우뀨우섬에 끌려간 조선인 노동자 약 1700명은 배에 태워진 채 미군의 폭격 앞에 내던져져 전원 사망했다"는 기술인데, 이 문면만 보면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알기가 어렵다.
일본군이 조선인 노동자를 죽이기 위해 일부러 배에 태워 미군이 폭격하게끔 유도했다는 것인지(조선인이 떼죽음당하는 건 괜찮다 해도, 그럼 일본군 수송선은?), 뭔가의 이유로 배에 태웠지만 필요한 보호를 받지 못해 무방비로 미군의 폭격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는 건지, 애초에 일을 시켜야 할 조선인 1700명을 무엇 때문에 배에 태운건지... 등등 수수께기 같은 문장이다.
그리고 아쉽지만, 이 서술에 대해서는 전거에 해당하는 문헌을 찾을 수 없었다.
(혹시라도 짐작 가시는 문헌이 있으면 교시 바랍니다)
전거가 확인되지 않기에, 이번에는 틀려서 단단히 망신당할 각오를 하고 감히 추측해 본다.
'오키나와', '1700명', '배(수송선)', '미군 폭격', '전원 사망'... 이 다섯개의 키워드를 가지고 생각해 보니, 짐작 가는 사건이 있다. 쯔시마마루(対馬丸) 사건이다.
https://ja.wikipedia.org/wiki/%E5%AF%BE%E9%A6%AC%E4%B8%B8
곧 전화가 덮쳐올 오키나와에서 어린이들을 안전한 곳으로 소개(疎開)하기 위해, 육군에 징발된 쯔시마마루에 학동 등 1500명을 태워 본토(큐우슈우) 방면으로 항행하던 중, 미군 잠수함의 공격을 받아 침몰, 거의 전원이 사망한 사건이다.
선학에게 큰 실례를 범할 위험을 무릅쓰고 추측해 볼 때, 강만길 선생의 '오키나와 노동자 1700명 폭침 사망' 운운은, 이 쯔시마마루 사건에 민족수난사를 투영하여 창조한 이야기가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본다.
(6) 대단히 긴 글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이런저런 역사와 관련된 문장을 보며, 의심가는 것을 '팩트체크' 하는 것은 스스로의 공부에도 도움이 되기에, 선학에 대한 무례를 무릅쓰고 집요하게 전거를 검토해 보았다.
그런데, 어린이책에 이런 '가공의 일본 죄악사'가 기술되어 있다는 게 못내 마음에 걸린다. 이런 기술을 통해 분노와 증오를 마음에 안고 성장한 아이 중에서 매스미디어 관계자가 나오고, 교사가 나오고, 연구자가 나오고, 법조인이 나와 한국 사회의 '역사'와 '일본'에 대한 인식과 언설을 형성해 나가게 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면, 뭔가 우울한 느낌이 든다(그렇다고 이 책 읽은 애새끼들 절대 출세 못하고 전부 망해라, 하고 저주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게다가 그 '가공의 역사'의 원천이, 좀 정신나간 연구자나 매문가(買文家) 따위였다면 차라리 나았을 것을, 반세기도 더 지난 옛날 북조선측의 프로파간다였다는 것을 확인하면서, 여러가지 복잡한 생각이 들었다. 이 기분을 좀 '냉전적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은 문장이 될까.
"수령님, 당신이 이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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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ypubys
November 06, 201510,000+ Views

"일제의 만행 - 평양 미림 비행장의 학살"



































역사
교육



keypub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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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zhcher0624
지겹다 인간도아니네
November 07, 2015Rep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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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01063042068
멸종시켜야할 쪽발이들 핵폭탄 하나더 깔끔하게 ㅋ
November 08, 2015Reply
1


lzhcher0624
@zero2643 네???
November 07, 2015Rep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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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d4hero4
족발이들은 안돼 이래서..
November 07, 2015Rep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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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ero2643
아베바를 발고 싶네. .
November 07, 2015Rep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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