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8/08

김원기 성추행범과 그의 친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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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기


22ti JuSlypo hmnsalrddt teoare1dlf2hd:uis4f7 ·




제가 제일 열받은 게 뭔지 간단하게 말을 하자면요, "잘못한 건 알겠지만 그래도 고인의 마지막을 추모하는 기분으로 놔두면 안 되겠냐."는 심정이 드는 그 내면의 구조랄까 기제입니다. 

사람은 일단 감정으로 판단을 내리고 그 다음에 논리를 가져다 끼워맞추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위의 심정이 작동한다는 건, 애초에 성추행을 포함하는 성폭력에 대해서 구체적 공감이 전혀 작동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나중에 무슨 근거와 논리를 찾아 덧붙이건 간에) 이 분들에게는 처음부터 박원순의 성추행이라는 게 전혀 실질적인 무게감을 갖지 않았다는 거죠. 그걸 스스로 모르면 알라고 글을 쓰기 시작한 건데, 여전히 모르는 분들이 왜 이렇게 기세등등해요 이 씨발넘들아.
 
역사적인 영웅을 하나 떠올려 보세요. 이순신이어도 좋고 김좌진이어도 좋고. 전쟁 중에 무고한 백성들이 끼어 있는 작은 마을을 학살하라는 명령을 내려 한 십여 명이 죽었다고 상상해 봅시다. 별 느낌 없죠? 인종청소가 벌어지는 내전 지역에서 일가족이 끌려나와 모두 목이 잘려 죽는 일이 벌어졌다고 들어도, 대부분 별 느낌 없을 겁니다. 왜냐면 대부분 사람들에겐 그 사건이 (혹은 그 사건을 설명하는 언어가) 구체적인 공포, 절망, 분노의 감정을 전혀 건드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건 어쩔 수 없어요. (경험이 아니라면) 학습과 훈련을 통해서 구체적인 공감과 함께 작동하는 실질적인 인류애를 증대시키는 과정이 필요하니까요.
그런데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무수한 성폭력 사건들은 그렇게 먼 이야기일 수가 없어요. 그건 그럴 수 있지 하고 양해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거든요. 무슨 알렉산더가 술에 만취해서 충동적으로 죄 없는 부하의 목을 잘라 버렸다는 이야기 들으며 "영웅이 그럴 수도 있지, 안 그런 정복자가 어디 있냐." 이렇게 대꾸하듯 생각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데 아무리 앞에 (페미니즘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하는 양) 단서를 붙이고 알리바이를 늘어놓아도, 솔직히 자기는 알잖아요. 처음에 이 사건에 대해 들었을 때, 자기 안에서 일어난 감정적 반응이 그렇게 작동했다는 걸. 그런데 왜 사기를 쳐요 이 씨발새끼들아.
충분히 괴로워하고 참담하게 느꼈다는 게 전혀 티가 나지 않는데, 남들이 좋아요 눌러주니까 신나서 2절, 3절, 뇌절하고 있는 페북 명사들, 그런 이유에서 너네들 진짜 쓰레기거든요. 너네 안에는 삶이 지옥이 된 사람들의 고통도 없고, 그의 삶을 지옥으로 만드는 이 끔찍한 파렴치함에 대한 죄책감도 없어요. 그건 그냥 공허한 단어들로만 존재하고, '내 친구 박원순' 하나만 있죠. 그러니 그만 닥쳐요. 진짜.
PS
구체적 공감이 전혀 작동하지 않지만, 그래도 이해해 보려고 노력하는 분들을 위해 몇 자 추가함.
새끼발가락 찧었을 때를 상상해 보세요. 생생하죠? 길에서 어떤 인간이 갑자기 뛰어오더니 구둣발로 새끼발가락을 콱 찍고는 그냥 도망갔어요. 뛰어가서 잡았더니 그냥 장난 친 거고 그렇게 아프고 불쾌할 지 몰랐다, 그러면서 건성으로 실실 웃으며 미안미안, 이러고 그냥 가려고 해요. 굉장히 짜증나겠죠? 여전히 걸을 수도 없을 만큼 발가락이 아파 죽겠는데 말예요. 그런데 옆에 있는 사람들이 "사과 받았으면 됐지, 뭘 난리냐. 이제 그만 해라." 이러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저 사람, 당신만 모르지 이 동네에서는 좋은 일 많이 하는 훌륭한 사람"이라며 씨발씨발 거리는 당신에게 "아픈 건 알겠지만, 그렇다고 그런 심한 욕을 해서 모욕하는 건 지나치지 않냐."고 훈계질을 하는 겁니다. 그리고는 "솔직히 발 일부러 밟는 건 못 봤고, 당신이 욕하는 건 봤다. 발가락 좀 보여 봐라." 이러는 인간까지 나오질 않나, 뭐 그런 상황이 됩니다. 사람들이 다 그러니까 더 말도 못하고 그냥 미친 놈한테 걸린 게 운이 나빴던 거라고 그냥 절뚝거리며 물러났습니다. 그런데 그날부터 그 동네를 지날 때마다 사람들이 "저기, 발 찧었다고 상욕을 해대던 그 인간이네"하고 쑥덕쑥덕 거립니다. "유세 떠나? 언제적 일인데 아직도 쩔뚝거려?"하고 비아냥거리는 소리도 들리구요. 미치고 환장하겠죠?
이 말도 안되는 상황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고통스럽고 억울해서 절망적이기까지 한 게 성폭력 사건입니다. 그러니 자기 발가락의 고통에 대해 보이는 태도보다는 더 진지하라고요. 이렇게까지 말해도 못 알아먹으면 넌 사람 새끼가 아냐.

70Insu Bae, 希修 and 68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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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기

22ti JuSlypo hmnsalrddt teoare0dlf8hd:uis0f3 ·



남의 독해력을 조롱하는 분의 글을 봤는데, 누구나 자기 지적 능력에 만족하며 사는 경향이 있다지만 그래도 객관적인 기준 정도는 있는 게 아닐까?
"불심검문에 걸려 연쇄살인의 종료와 함께 인생도 끝난 사람"이라고 해보자. '만약 ~이 아니었다면(if not)'의 논리를 가지고 생각하면, 불심검문에 걸린 게 이 사람 인생 종치게 된 원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게도 볼 수 있겠지 하고 생각하는 순간 이거 웃기는 이야기. 불심검문이 문제였네, 그렇게 말하고 나면 애초에 연쇄살인은 문제가 아니었다는 얘기처럼 들리니까. 궁극적으로는 사람을 죽인 놈이라서 인생이 망한 거지, 보통 사람들은 불심검문 걸려도 아무 일 없다.
그래서 '미투에 걸려 인생 조지는 남자들'이라는 식의 표현을 쓰는 것부터가 말이 안된다는 거다(표현보다, 그런 표현이 튀어나오는 마인드의 문제겠지만). 안 걸리는 게 핵심은 아니잖아? 미투 할 여자 안 할 여자 잘 고르는 법이 중요해? 뭐 이렇게 말하면 읽는 쪽의 독해력을 문제 삼겠지만, 진짜 문제는 글도 사고력도 엉망인 쓰는 쪽에 있을 거다. 미투가 문제가 아니라 애초에 성추행, 성희롱, 성폭력이 문제인 것처럼.
학교 교육 이전에 당연히 상식처럼 알고 있어야 할 기본적인 얘기를 쓰고 있으니 아침부터 기운이 빠지긴 하는데, 보통 그 상식이 없는 사람은 명랑하고 신나게 잘 살더라고. 그러니 나도 기운내서 하루를 시작해야지. 말 되는 소리를 할 수 없으면 좀 닥쳐요들.

33Insu Bae, 希修 and 31 others

< 성추행범과 그의 친구들 >

자신의 부하직원을,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을 성추행한 자들이 조사가 개시되면 조사처리담당자에게 제출하는 전형적 자료 유형이 있다.
교수-성추행범은 온갖 자료를 모으고 모아서 제출한다. 지난 수년간 (때로는 10년치) 학술지에 게재한 논문 목록, 학생들로부터 받은 감사 편지 혹은 문자메시지, 학생들과 함께 찍은 사진 등이다. 그가 이런 자료를 제출하는 이유는 딱 두 가지다.
 
첫째, 나는 이렇게 훌륭한 교수/연구자다. 이렇게 훌륭한 내가 그런 짓을 할 리가 없다.
둘째, 나는 이렇게 훌륭한 교수/연구자다. 그 어마어마한 업적을 보라. 성추행은 사소한 ‘실수’에 불과하다.
 
대개 증거가 없다고 생각하면 첫 번째, 증거가 드러나면 두 번째 메시지로 갈아탄다.
직장 내 성추행범 역시 마찬가지다. 조사가 개시되면 가해자는 자신이 얼마나 조직에 필요한 인재인지, 그리고 부하직원이 얼마나 자신을 따르는지 보여주고자 관련 자료를 수집하여 제출한다. 그 과정에서 그런 자료를 제출하도록 부하직원들을 종용, 협박하기도 하지만, 때로 부하직원들은 스스로 알아서 그런 자료를 만들어 바친다. 가해자를 위해서 탄원서를 돌리고, 피해자를 비난하는 여론을 조성하고, 사건에 대한 그릇된 정보를 유포하고, 조사과정에서 허위 진술을 하거나 진술을 거부하기도 한다. 평소에 그다지 ‘모시기 경쟁’에 열의를 보이지 않았던 직원들조차 ‘이때다’ 싶어서 가해자에게 열혈 충성을 다한다.
가해자의 ‘우월적 지위’가 대단할수록, ‘집권 기간’이 길수록, 가해자 측근들의 2차 가해 양상은 더 광범위하게, 장기간, 더 지독하게 계속된다. 그런 광경을 지켜본 한 피해자는 이렇게 표현했다. 그들이 ‘너무너무 징그러웠다’고. 어떤 피해자는 그런 직장에 출근해야 하는 심경을 이렇게 표현했다. ‘끔찍한 살인 사건을 목격했는데, 그 범죄 현장에 매일 출근해야 하는 심경’이라고.
사람들이 어떤 위치에서 상황을 인식하는가에 따라 정의로운 시민이 되기도 하고, 또 다른 폭력의 행위자가 되기도 한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거대한 폭력은 사건을 바라보는 다음 두 가지 위치성 스펙트럼과 관련이 있다. 하나는 적극적으로 가해자의 편에서는 사람들이 있고, 다른 하나는 객관성을 핑계로 가해자와 같은 기득권의 위치에 서 있는 사람들이 있다. 다음 세 가지 글들은 지금까지 가장 큰 파장을 일으킨 글들 중 대표적인 문제적 발화들이다. 할 말은 많지만 이 글들의 문제점 및 해악에 대해서 간단히 짚고자 한다.
1. 1) 한겨레신문에 실린 조희연 서울특별시교육감의 “40년 친구 박원순을 기억한다”
2) 페이스북에 게시된 성공회대학교 김동춘 교수의 “100조원” 발언
2. 페이스북에 게시된 강남순 교수의 “한 사람의 죽음 앞에서, 열광적 ‘순결주의’와 테러리즘”과 이 글에 대한 아무개 교수의 “교수님, 감사합니다” 발언

첫째, ,조희연 교육감의 글, 김동춘 교수의 “100조원” 발언과 관련하여,
정의의 가치를 추구하는 사회라면, 지금 이 시점에서 가해자에 대한 애도는 ‘사적’으로, 철저한 진상규명은 ‘공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시민의 세금으로 공식적 애도 행사를 치른 것은 부적절할 뿐만 아니라 또 다른 폭력이다. 우월적 지위에 의한 성희롱, 성폭력이 얼마나 사소하게 취급될 수 있고, 쉽게 침묵될 수 있는지 보여주는 공식적 발화행위라는 점에서 그렇다.
조희연 교육감의 경우, 그 해악은 더욱 심각하다. 교육현장은 무엇보다도 안전한 곳이어야 한다. 그는 학교의 안전과 교육환경을 보호해야 할 책임이 있는 중요한 자리에 있는 공직자다. 그는 학교현장에서 우월적 지위에 있는 교육자가 학생을 성희롱했을 때, ‘엄정한 처리’를 통해 학생의 학습권 및 학습환경을 지켜내야 한다. 그러나 그런 자리에 있는 교육감이 어마어마한 지위를 이용해서 오랫동안 성희롱을 자행한 ‘친구’의 업적을 기리며 공식적 애도를 했다. 그것은 어떤 메시지인가? 학교에서 우월적 지위에 있는 교장, 교감, 교사가 성희롱을 하면 그들의 편에 설 수 있다는 메시지다. 시민으로서 나는 교육환경에 대한 보호책임 있는 교육감 조희연과 박 아무개씨의 40년 친구 개인 조희연이 구분되지 않는다.
(그리고 한겨레신문사는 그 글에 지면을 할당함으로써 이 거대한 폭력에 가담했고, 폭력의 흐름을 만들어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언론사로서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
 
둘째, 강남순 교수의 글과 관련하여,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며 페미니즘 책을 여러 권 낸 분이다. 그 글의 특징을 요약하자면 ‘무지에 의한 폭력’, 젠더 무감성(gender blindness), 성인지 감수성의 결핍이다. 성인지 감수성이라는 센서는 ‘주류 집단에 속하는 성인 남성의 언어와 경험에서 벗어나 여성 및 소수자의 경험과 관점을 존중하고 그것에 귀를 기울일 때’ 비로소 작동한다.
강남순 교수는 그 어느 때보다도 피해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할 시점에서, 저 높고 높은 곳에서 한 수 가르치는 태도를 견지하며, 공식적 애도를 문제삼는 사람들을 싸잡아 ‘테러리스트’로 매도했다. 그의 글은 피해자의 목소리, 경험이 전혀 들리지 않고 상상조차 되지 않는 위치, 즉 ‘무지’의 자리에서 만들어졌다. 그리고 젠더 폭력은 이와 같은 무지에 의해서 발생한다.
‘주류 기득권이 아니라 소수자의 경험과 관점을 존중하고 그것에 귀를 기울이는 것’
이것은 인간으로서의 위치를 국민-국가의 시민, 지구 시민(global citizenship), 그리고 우주적 시민(cosmopolitan citizenship), 어느 층위에서 설정하건, 현대 사회에서 요구되는 인간다움의 덕목 중의 기본이다. 그 글에서 나타난 태도는 강남순 교수가 평소 여러 저서에서 언급한 코스모폴리터니즘의 가치를 스스로 배반한 행위다.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상황에 따라 우선적으로 강조되고 실현되어야 하는 민주주의 가치가 있다. 어떤 대단한 권력을 가진 사람이 성희롱을 했다는 부인할 수 없는 정황이 드러났다면, 이 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정의’다. 그리고 사회 정의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시민들은 2018년 대법원 판결문에서 언급된 바, "피해자와 같은 처지에 있는 평균적인 사람의 입장"에서 비판적 시각을 견지해야 한다.
우리가 민주주의 사회의 ‘동료 시민’으로서 해야 할 첫 번째 과제는 ‘피해자와 같은 처지에서’ 피해자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것이다. 온갖 미사여구로 객관성으로 포장된 폭력의 언어를 쏟아낼 것이 아니라, ‘증거를 내 놓으라’고 피해자를 겁박하면서 가해자 편에 설 것이 아니라, 사건이 정의롭게 해결됨으로써 피해자의 노동권 및 노동환경이 정상화되는지 제대로 감시해야 한다.
그리고 그 출발점은 ‘성희롱 가해자’의 편, ‘가해자’와 같은 기득권이 아니라, 피해자가 서 있는 소수자의 자리, 그 자리로 이동하거나 그 위치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민주주의 가치인 ‘정의’는 그런 시민들로 이뤄진 사회에서 가능하다.



김원기

21t SpJoduuliheanys tosaSt ctrfrh13:eS3dhn7d ·

아래 글의 연장선상에서, 피해자 중심주의도 어렵게 이해할 필요가 없다. 이미 (가부장적) 세상은 (남성) 가해자 중심으로 성폭력 사건을 보고 있다는 걸 아는 것에서 시작하면 된다. 이 사회에서 피해자의 고발/고소는 진위를 따져야 하는, 사물화된 진술-증거의 더미로 환원되고, 가해자의 사정은 (그 엿같은) '인지상정'에 의해서 이미 충분히 헤아려지는 '사람의 이야기'로 존재한다. 추문과 처벌에 의해 가해자가 어떻게 될지에 대해서는 '사람이 사람의 일을 헤아리고 공감함'의 태도로 생각하는 사람이, 피해자의 '증언-증거'에 대해서는 법정의 판사와 같은 태도로 유보적 거리두기를 하는 게, 이 남성 중심 사회의 디폴트 루트. 이게 박원순 성추행 사건에 적용되고 있는 거다. 아주 극적으로. 역겹게.
피해자 중심주의란, 쉽게 생각해 사람이 사람을 온전하게 대하는 태도를, 피해자에게 제대로 적용하는 거다. 당연히 위에서 내려다보는 법관의 태도 같은 건 버리고 이 사건의 실체를 이해해보겠다는 태도로 그의 이야기를 듣는 것(당신의 자리가 팔짱끼고 '흐음?'하는 태도로 따지는 심문관의 자리가 아니란 걸 명심해라). 그와 함께 이 고발/고소가 진실이라면 그로 인한 책임을 피할 수 없는 가해자를 추상적인 범죄 행위 그 자체, 아니면 적어도 익명의 X로 환원시켜 유보적 거리두기를 해보라. 그러면 사건을 보는 시각이 전면적으로 달라지는 걸 경험하게 될 거다.




15Insu Bae, 希修 and 13 othe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