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8/30

Namgok Lee 팔정도(八正道)의 다섯 번 째는 정명(正命;바른 삶)이다.

 Namgok Lee

어떻게 하다 보니까, 팔정도를 다 써보게 된다.

우선 내 생각을 정돈해보기 위해서다.

팔정도(八正道)의 다섯 번 째는 정명(正命;바른 삶)이다.



라즈니쉬의 해설이다.

<삶은 필요에 의한 것이지 복잡해서는 안된다고 붓다는 말한다.
삶은 필요에 의한 것이지 욕망에 의한 것은 아니다. 
필요성은 전적으로 좋은 것이다. 
그대는 음식을 필요로 하고, 의복을 필요로 하고, 거처를 필요로 한다. 
그대는 사랑을 필요로 하고, 관계를 필요로 한다. 전적으로 좋다. 거기에 잘못된 것은 없다. 
필요는 채워져야 한다.

그러나 욕망은 근본적으로 채워지지 않는 것이다. 욕망들이 일을 복잡하게 만든다.

인간은 좀 더 민감해져야 한다. 돈이 전부가 아니다. 돈을 모으느라 자신의 인생을 파괴해서는 안된다. 가난은 정말로 아름다운 것이 될 수 있다. 단지 필요성에 따라 산다면 가난은 정말로 충만이 될 수 있다. 실제로 그대는 충족을 느끼는 부자를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대체로 동감한다.

다만 단어에 어떤 의미를 두느냐에 차이가 있겠지만, 필요와 욕망을 칼로 자르듯이 구별할 수 있을까에 생각이 미친다.

예를 들어 거처를 필요로 하는데, 보다 ‘쾌적한’ 거처는 필요인가? 욕망인가?

관계를 필요로 하는데, 보다 ‘우아한’ 관계는 필요인가? 욕망인가?

채워질 수 없는 욕망 즉 탐욕이 아니라, 욕망의 진화도 있지 않을까?

인간은 동물에서 출발한 1차적 본능에만 그치는 존재가 아니고, 인간에게 특유한 2차적 본능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네 번째에서 이야기한 에크하르트의 ‘거룩함’ 같은 것은 2차 본능에 속하는 것이 아닐까?

이것을 더욱 신장시키는 것을 욕망 또는 욕구의 진화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사랑이나 나눔 같은 정신적 가치의 기쁨을 확대하고 자연이나 인간에 대한 예술적 감성을 열어간다면, 물질적 욕망은 자연스럽게 감소할 것이다.

이른바 ‘쾌적한’이나, ‘우아한’은 화려하고 과시적이거나 번잡하고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라, 단순소박한 것을 내용으로 갖게 될 것이다.

내가 빈이락(貧而樂)과 부이호례(富而好禮)를 자주 거론하는 것은 물질적으로 부유해진 사람들도 많아졌고, 추위와 굶주림에서는 대부분 벗어나 있는(기본적 필요는 충족되고 있는) 현실에서 어떤 당위나 의무 사명감보다 기쁨의 질, 욕구의 질이 바뀌는 것이 문명 전환의 동력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정명(正命)을 위한 객관적 환경은 과거에 비해 대단히 좋아졌다고 생각한다.

구체적 삶 속에서 단순 소박한 삶의 기쁨을 누리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이 문명 전환의 과정이 될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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