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8/30

비구와 대처승 | 백두 2012. 8. 24

 비구와 대처승 | 8 우리네 이야기/8 여유롭게 숨고르기

백두 2012. 8. 24.

http://blog.daum.net/ljh2004/7356803

 


비구.


비구는 <팔리어>로'탁발하는 이'라는 뜻이며

불교에서 출가해 구족계를 받은 남자 수행자.


원래는 힌두교에서 집과 가족을 버리고 다만

보시 만을 받아 생활하면서 편력하는 수행자


불교가 일어난 기원전 6세기경 다른 종교에도 적용

탁발하는 수행자를 가리키는 일반적인 명칭이 되었다.

불교에서는 출가해 구족계를 받은 남자 수행자만 지칭.


불교에서 구족계를 받은 여자 수행자는 '비구니'


출가생활을 시작하는 것은 만 7세 이상이면 가능

구족계를 받으려면 만 20세 이상이어야 가능하다.


그밖에 부모 허락이 있어야 하며 육체적으로 건강하고

빚을 지고 있지 않아야 하며, 건전한 정신이어야 한다.

'비구'는 '탁발하다'란 의미를 가진 동사 어근에서 파생


비구는 물질에 대한 무집착과 청빈한 삶을 살아야 한다.

초기 불교에서 비구는 가정을 버리고 세속적 추구를 포기

붓다의 가르침을 명상하며 매일 매일의 삶에서 그것을 실천


그들은 마을 근처 숲속 한적한 곳에 무리를 지어 머물렀으며,

음식을 공양받는 대신 종교적으로 바르게 사는 길을 가르쳤다.


불교 경전들에 따르면, 붓다는 처음에 남자만이 수도 공동체

나중에 제자 아난의 청으로 여자도 들어올 수 있도록 허락했다.

하지만 비구니 교단이 비구 교단만큼 규모가 커진 적은 없었다.


일상생활의 온갖 세부사항을 규정하고 있는 비구승 계율

모든 조항(상좌부 불교 227조, 북방 불교 250조)을 준수


비구니는 더 많은 조항의 계율을 준수해야 한다.

(상좌부 불교에는 311조, 북방 불교에서는 348조)



보름에 1번씩 열리는 비구들 모임 포살(布薩 uposatha)

계율을 위반했을 때에는 포살 모임에서 참회해야만 한다.

승가 계율 중 바라이(波羅夷 pr jika)를 어기면 종신 축출.


첫째는 성(性)관계를 갖는 것(邪淫),

둘째는 생명체를 죽이거나 교사(殺生),


셋째는 주지 않은 것을 자기 마음대로 자신의 소유로 하는 것(偸盜),

넷째는 깨달음의 정도에 대하여 참람(僭濫)한 주장을 하는 것(妄語) 등.


비구는 머리와 수염을 삭발한다.

옷으로는 겉가사(uttarsaga)·

아랫가사(antaravsaka)·

덧가사(sagh) 등의 3벌의 옷


원래 넝마를 짙은 황색으로 염색하여 기워 만든 옷.

오늘날에는 재가 신자들이 주는 선물일 경우가 많다.


비구는 최소한 소지품 소유.


앞에서 말한 3벌의 옷 외에는,

앉을 때에 까는 좌구(坐具 nidana),

탁발할 때 음식을 담는 발우(鉢盂 ptra),


마실 물속에 들어 있는 작은 벌레를

다치지 않게 걸러내는데 쓰는 녹수낭(水囊),

허리띠, 면도칼, 옷을 기울 때 쓰는 실과 바늘


또한 매일 탁발을 하여 자신의 식사를 해결하는데,

비구에게 공양하는 신자는 공덕을 얻게 된다고 한다


비구는 정오를 지나서 다음날 아침까지

액체로 된 것 이외에는 먹어서는 안된다.


성스러운 날을 제외하고는

비구도 고기를 먹을 수 있으나,

비구를 위한 요리가 아닐 경우 만


동남 아시아의 상좌부 불교 국가에서는

비구의 경제적 행위 및 육체노동은 금기.


동북 아시아의 중국·한국·일본에서는 다르다.

그곳에서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선(禪) 불교는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말라"는 규범을 확립.


또한 어떠한 고기도 먹는 것을 금하고 있으며,

승려가 부부생활을 하는 대처승(帶妻僧)도 등장.




대처승.


글자 그대로 처를 허리에 띤 승려란 뜻이다.

살림차리고 식구를 거느린 승려를 가리킨다


다른 말로 화택승이라 하며,

대처승의 반대말로는 비구승.

출가후 독신 수도자는 비구승.


선종을 중시하는 한국 불교계는 비구승이 주류.

이승만 대통령 유시 한달 후인 1954년 6월 24일,


대처승들에게 눌려 지내던 비구승

서울 선학원에 모여 대처승 추방결의

비구측을 종권도전으로 인식한 대처승


대처승 기성교단은 1954년 7월,

1945년 제정된 '조선불교 교헌'

'불교 조계종 종헌'으로 바꾸고

종단 직명을 종정(宗正)으로 환원


만암 스님을 종정에 추대


비구측은 두차례 전국 비구승 대회

대처승측에 환속과 종권 이양을 요구

그해 10월 태고사(太古寺)를 강제 접수

사찰 간판을 조계사(曹溪寺)로 바꿔 건다.


대처측은 11월 23일 조계사 탈환을 시도

조계사 접수 공방전은 1년동안 계속된다.


그해 비구측은 4차례 경무대를 방문

대처승 추방 협조를 거듭 호소하였다.


1955년 8월 11일 비구측은 전국승려대회를 개최

'조선불교 교헌'을 제정하고 독자적 집행부 구성.


이로써 조선불교는 두파로 갈라졌고

비구-대처의 대립은 본격화되기 시작


종단이 비구, 대처로 두 조각 나자

대처측은 승려대회를 무효라고 주장

서울 민사지법에 소송을 제기해 대응.


'사찰정화대책위원회 결의 무효확인 소송'


이승만 정권과 공생관계 종권의 탄생을 예고.

10 여개월후 법원판결은 대처승측의 승소판결

패소한 비구 측은 청담 총무원장을 인책 퇴진


1960년 4.19혁명으로 이승만이 물러나자

정부 비호를 받은 비구측이 조계사 장악.

1961년 3월 대법원 비구 측을 법적 인정


5.16군사 쿠테타로 권력을 잡은 박정희

1,2차 불교정화에 대한 담화를 발표하고

'불교재건위원회 조례안'을 양측에 제시


박정희 담화후 양측 대표들은 극적 합의

통합종단 명칭이 곧'대한불교 조계종'이다.

이로써 비구-대처의 종권분규는 일단락된다.


한때 대처측이 비구측과 다시 투쟁할 것을 선언

서울 민사지법에 조계종 종헌 무효확인 소송제기

정부당국은 대처측 반발에 강력한 억제 입장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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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종권 다툼은 일제가 한국 불교에 뿌린 씨앗

소위 內鮮一體라는 구호하에 한국 불교의 왜색화.

일본 불교는 승려의 결혼. 육식등에 대해서 관대


한국불교는 청정한 율행(律行)을 생명처럼 여겼다.

일제 치하에서 33本山 스님은 도쿄 유학을 떠났다.

그때 대부분은 대처승(帶妻僧)의 신분이 되어 귀국.


1945년 해방 이후부터 비구 대처의 갈등의 씨앗.

1945년 이승만 대통령의 불교에 대한 특별 유시

왜색 승려는 사찰에서 모두 물러나라는 내용이다.


당시 비구의 숫자는 전국을 통틀어 200 여명

하여, 비구가 전국 1천2백 사찰 관할은 불가능


당시 태고종(조계종) 종무원 (총무원) 중재안


전국 사찰을 궁극적으로는 비구승들에게 양도

하지만 대처승은 그 당대에만 사찰 거주 허용

그러나, 사찰을 내놓는 대처승이 거의 없었다.


양측은 서로 빼앗고 빼앗기는 공방전을 계속.

1960년 불국사 난투극은 이 갈등의 절정이었다.


드디어 대처 비구 양자는 결별을 선언

비구승통합 종단 대한 불교 조계종 탄생.

한편, 대처 계는 1962년 태고종으로 발족.


이 와중에 헤일수 없이 망실된 재산과 토지

결과적으로는 불교에 대한 정부 관권의 개입

5.16 직후 여러 종파들을 등록시킨 것도 문제


이 때를 전후 한국 불교에는 26개 종파가 난립

무자격한 승려들이 대거 조계종안으로 스며든다.

이들은 사찰 재산권 이득만 노리고 승복을 걸친다.


조계종단 안에서 폭력이 활개를 치게 된 것.


정화불사를 주도한 청담 스님은 이점을 늘 후회.

다음으로 조계종 문제는 총무원의 재정적인 독립

총무원에 자금이 없어 사찰마다 분담금 제도 실시


특히 전국 명찰이 국립공원 지정으로 입장료 수입

일부는 문화재 보수등을 위해 지방 단체장이 관리

그러나 일부는 사찰 운영금으로 쓰이며 잡음과 마찰.


그래서, 조계종 총무원장 자리는 늘 단명


18년 동안 24명이 총무원장직을 거처 갔다.

총무원장 평균수명이 8개월 밖에 안되는 것.


본사 주지의 임명권을 총무원장이 장악하지만,

돈은 본사 주지가 쥐고 있어 피할 수 없는 마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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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세기 이전 일본 불교는 수행자의 결혼을 불허.

그후 정토종 승려만 공개적으로 결혼할 수 있었다.

메이지유신 이전엔 여성과 동침한 승려는 형사처벌


1872년 3월부터 개신교 영향으로 승려 결혼을 허용.

한용운(1879~1944) 같은 항일불교자도 대처를 주장.

욕망이 인간의 본능이라면 그 자체를 긍정하자는 뜻.


불교에 의해 조금씩 벗어나는 것이 더 적합하다는 뜻

불교가 중생을 구제하려면 태생도 인정해야 한다는 뜻.

결혼은 승려 스스로 자기 욕망을 점검해 결정해야 할 일.


붓다와 제자들 상당수가 기혼자 출신들이었다.

일본 정토종 이외 동아시아의 모든 대승 교단

19세기 중반까지 대처를 허용하지 않았던 전통.


남녀 간의 사랑을 수행의 장애로 보지 않았던 것.

비구 측이 대처를 비난한 1963년 당시 조지훈 시인.

동아일보를 통해 대처승에 대한 지나친 배척을 반대


.......<삼국유사>의 광덕 이야기를 논거...........

신발 만들기를 업으로 삼았던 하급 승려인 광덕

역시 승려인 아내와 함께 경주의 분황사에 거주.

밤마다 섹스 대신 부부가 함께 염불에 매진했다.


서로 보살핌과 챙김, 정신을 공유했던 결혼생활.

7세기 두 천민 승려를 신라인들은 무척 존경했다.

광덕의 부인을 관세음보살 환신으로 불렀을 만큼.


밤마다 목욕시켜 준 낭자에게 무심했던 노힐부득

자신을 유혹한다며 예쁜 낭자를 쫓아낸 달달박박

노힐브득이 먼저 미륵보살로 성불할 수 있었단다.


전북 부안군 월명암 소장의 <부설전>에 의하면,

결혼을 안해주면 죽겠다는 여인의 간청을 받아

환속해 거사가 되어 아들 딸을 낳았다는 부설.


계속 수행을 해온 그의 도력은 동료에 비해 월등

속인이건 승려이건 도만 깨우칠 수 있다면 구도자.

대처승에게도 '사랑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논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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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판 사판'...................

흔히 사생결단이란 뜻으로 널리 쓰이고 있다.

"이판" 이란 수도하는 스님을 말하는 것이고

"사판" 이란 살림하는 스님을 말하는 것이다


이조시대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는 억제한 정책

그당시 승려들이 두 가지 방향에서 활로를 모색


첫째 사찰을 존속시키는 노력

둘째 불법의 맥을 이으려는 노력


그때 사찰 살림을 담당했던 승려가 '사판승'

속세를 떠나 불법을 이어온 승려가 '이판승'


해방후 비구승과 대처승의 다툼이 생겼을때

서로를 이판승과 사판승에 비유해 비판했다


이조 오백년 동안 불교가 살아남은 것은

이판 사판 두 승려집단의 공이 있었지만

이판 사판의 다툼은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묘안이 없는 자포자기 상태 = 이판 사판.'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반야심경 구절 중에서 '사바하' = '성취'란 뜻.

이조 때 불교의 활로모색 '성취'를 위한 '이판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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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종파간의 다툼을 상징하는 형제봉 전설.

비구계와 대처계 종파 다툼을 상징하고 있는듯.

형제봉 전설은 불교졸파 비구계에서 유래된 전설.


'형제봉 전설은 시대적 배경에 따라 변화.'


천왕성모가 마야부인 위숙왕후로 변하듯.

노고단의 노고할미가 선도성모로 변하듯.

형제봉의 형제신도 형제 돌부처로 변한듯.


연하천 요정으로 환생한, 옥녀 자매.

원래, 옥황상제 시녀인 하늘나라 선녀.

결국, 옥녀 자매는 연하천을 떠도는 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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