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8/08

제자백가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제자백가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제자백가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검색하러 가기
제자백가(諸子百家, 영어Hundred Schools of Thought) 또는 현상적 표현인 백가쟁명(百家爭鳴, 영어Contention of a Hundred Schools of Thought)은 춘추전국시대(기원전 770~221)의 여러 사상가와 그 학파를 말한다.
주나라(周)가 동으로 천도한 후의 동주(東周: 기원전 771~256) 시대에서는 종주권이 쇠약해짐에 따라 제후들이 세력을 추구하면서 거리낌이 없어져서 약육강식이 잇달아 일어나자 중국 천하는 소란하게 되었다. 이 시기를 춘추전국시대라고 한다.
춘추전국시대는 선진시대(先秦時代)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기원전 221년의 진나라에 의한 중국 통일 이전의 시기를 뜻한다. 이 시대는 중국사상의 개화결실의 시기였다. 이 시대의 사상가들을 제자(諸子)라 하며 그 학파들을 백가(百家)라 부른다.
춘추전국시대는 사회 · 경제 · 정치상의 일대 변혁기였다. 이는 씨족제적인 사회의 해체기이며, 주나라의 봉건 제도와 그에 따르는 질서가 붕괴하는 시기이며, 또한, 경제적 · 군사적 실력주의의 대두기였다. 구체적으로는  왕조의 권위 실추에 따르는 제후의 독립과 대립 항쟁의 시대였다. 이와 같은 배경 속에서 중국의 사상계는 최초로 활발해졌다.

전개[편집]

춘추 시대 (기원전 770~[편집]

;
그런데, 공자의 사상의 근원은 오래전의 은나라 · 주나라 시대의 민족 신앙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은나라 시대에는 자연적 인간에 있어서 모든 현상은 천명에 의해 정해져 있다고 믿어졌으며, 군주는 이 천명을 주술에 의해 예지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주나라 초기의 주공(周公)은 인간은 나면서부터 하늘에서 정해준 운명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불변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후천적인 수양 등에 의해 어느 정도 바뀔 수가 있다고 생각하여 독자적인 (禮)의 문화에 대한 기초를 만들었다. 공자는 이러한 (禮)의 문화의 전통을 수용하여 발전시켜 유교의 기초를 이룩했다.

전국 시대 (기원전 403~221)[편집]

전국 시대(戰國時代: 기원전 403~221) 중 기원전 260년의 전국 칠웅(燕) · (魏) · (齊) · (趙) · (秦) · (楚) · (韓)
전국시대에 들어가면서, 항쟁을 이겨내고 강자로 생존해 나가는 것을 우선하는 제후국들의 요청에 응하기 위하여, 또는 여러 가지로 면모를 바꾸고 있는 다양한 현실에 대처하기 위하여 여러 유파의 많은 사상가들이 나타났다.
이들은 크게 유가(儒家) · 묵가(墨家) · 도가(道家) · 음양가(陰陽家) · 명가(名家) · 종횡가(縱橫家) · 법가(法家) · 잡가(雜家) · 농가(農家)의 9유파(流派)로 나뉘었는데, 바야흐로 백가쟁명의 중국 사상의 황금시대를 맞이하였다.

초기[편집]

전국시대의 초기를 대표하는 사상가는 묵가(墨家)의 시조인 묵자(墨子)이다. 그는 철저한 혁신론 · 실리주의를 제창하여 유교의 (禮)와 그 번잡함을 비판하고 겸애(兼愛: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함) · 상현(尙賢: 문자 그대로는 "어진 사람을 존경함", 반귀족적 인재등용론[1]· 절용(節用: 절약하여 아껴 씀) 등을 가르쳤다.

중기[편집]

전국시대 중기를 대표하는 사상가는 유가(儒家)의 맹자(孟子)와 도가(道家)의 장자(莊子)이다.
이 당시의 학문과 예술의 중심지는 제나라(齊)의 서울이었던 임치(臨淄)의 직하(稷下)였다.
맹자는 직하에서 논리적인 변론술을 습득하고 묵가의 사상에 대해 반론을 폈으며, 유교를 되살려 패도를 배제하고 왕도를 가르쳤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의 본성을 추구하여 성선설(性善說)을 전개했다.
장자는 사색의 대상을 자연계에서 구해, 위대한 자연을 지배하고 규율하는 (道)는 인간의 인식을 초월하는 것이므로 그것을 깨닫기 위해서는 직관에 의하지 않고는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

후기[편집]

전국시대 후기에 진나라(秦)가 부국강병을 이루고 동쪽으로 정벌을 나설 본격적인 자세를 가다듬어갈 무렵, 학문과 사상에서도 객관성 · 실효성이 문제되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경향을 대표하는 사상가가 유가의 순자(筍子)와 법가의 한비자(韓非子)이다.
순자는 맹자의 성선설에 반대하여 성악설(性惡說)을 제창하고, 인간의 한 본성을 바르게 하고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禮)를 정할 필요가 있다고 했는데, 이 때의 (禮)는 (法)에 가깝다.
한비자는 순자의 (禮)를 법률로 바꾸어 놓았다. 그는 에 있어서 개념과 결과의 일치를 구하고 군주의 에 의한 국가의 통제 · 유지 방법을 논하여, 장차 성립될 중앙집권적 통일국가가 취할 통치 체제에 대한 이론적 근거를 주었다.

진·한 이후 (기원전 221~)[편집]

진나라(秦) · 한나라(漢) 제국의 성립기에는 법가의 사상이 중용되었다. 그러나 한나라(漢)의 성립 후인, 전한 무제 때에 유교가 관학이 되면서 그 이후로는 유가가 중국 사상계의 주류를 이루게 되고 이러한 경향은 청나라 말기까지 계속되었다.

구류십가[편집]

사기(史記)》에서는 제자백가를 음양가(陰陽家) · 유가(儒家) · 묵가(墨家) · 명가(名家) · 법가(法家) · 도가(道家)의 6가로 분류하였다.
반면, 《한서(漢書)》 〈예문지〉에서는 《사기》의 6가에 종횡가(縱橫家) · 잡가(雜家) · 농가(農家) · 시부가(詩賦家) · 병가(兵家) · 수술가(數術家) · 방기가(方技家)의 8가를 추가하여 14가를 언급하고 있다.
또한, 《한서》 〈예문지〉에서는 제자백가 중 대표적인 10개의 학파를 구류십가(九流十家)라고 부르고 있다. 구류십가는 유가(儒家) · 도가(道家) · 음양가(陰陽家) · 법가(法家) · 명가(名家) · 묵가(墨家) · 종횡가(縱橫家) · 잡가(雜家) · 농가(農家)의 구류(九流)에 소설가(小說家)를 더한 것이다. 즉, 소설가를 제외한 9학파는 "가(家)"와 "류(流)" 모두에 들어가지만 소설가는 "가(家)"에는 들어가지만 "류(流)"에는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다.
구류십가(九流十家)
  1. 유가(儒家) - 공자 · 맹자 · 순자
  2. 도가(道家) - 노자 · 열자 · 장자
  3. 음양가(陰陽家) - 추연 · 추석
  4. 법가(法家) - 관중 · 상앙 · 신불해 · 한비자
  5. 명가(名家) - 등석 · 혜시 · 공손룡
  6. 묵가(墨家) - 묵자 · 별묵
  7. 종횡가(縱橫家) - 귀곡자 · 소진 · 장의
  8. 잡가(雜家) - 여불위 · 유안
  9. 농가(農家) - 허행
  10. 소설가(小說家) - 육자 · 청사자

주요 학파의 사상[편집]

제자백가들은 모두 춘추전국시대의 위기를 구하려는 의도와 목적 아래서 일어난 것이며, 철학사상에 특히 기여한 것은 유가 · 도가 · 묵가 · 법가 · 명가이다.
이 밖에는, 강병책(强兵策)을 편 손무(孫武)와 오기(吳起)가 걸출하였고 손빈과 범려도 유명하였는데 이들은 병가에 속한다.

유가[편집]

공자 초상: 당나라의 오도자 작
유가는 유교 · 유학 · 공교(孔敎)라고도 불린다. 유가는 공자(孔子)를 시조로 중국의 전통적인 정교일치(政敎一致) 사상을 받들고, (仁)의 도덕을 최고 이념으로 하여 수신(修身) · 제가(齊家) · 치국(治國) · 평천하(平天下)를 목적으로 하는 윤리학 · 정치학으로서, 동양 철학사상의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공자의 (仁)은 인간심정에 고유한 자애(慈愛)의 마음을 확충하는 것, 즉 극기복례(克己復禮)로 완전한 인격을 이룬 경지이다. (仁)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愛人 · 애인)으로, 그 발단은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인 자애(慈愛)로부터 시작하며, 나아가서는 형제 · 가정 · 사회 · 국가 · 인류에게까지 미치는 인도(人道: 사람의 길)이며, 이것은 사람의 본성에 선천적으로 주어진 것이라 한다. 공자는 인도(人道)를 닦아서 천도(天道)에까지 이르는 천인합일(天人合一)의 경지를 강조하였다.
공자의 (仁)은 부처의 자비(慈悲)나 예수의 박애(博愛)와 비슷한 내용을 갖고 있는 (德)이지만, 어디까지나 윤리로서의 인도(人道)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즉 공자는 종교인과는 달리 현생(現生)의 삶에만 관심을 갖고 있었다.
공자와 자사(子思)를 이은 맹자(孟子)는 공자의 를 근본으로 하여 그 의의를 재서술하고 보충하였다. 그는 성선설(性善說)에 의한 4덕(四德)과 4단(四端)을 강조하였다. 즉, 그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  ·  · (仁義禮智)의 고유한 이 있다고 하였다. 또 선천적 양지양능설(良知良能說)을 주장하고, 또 인의의 정치 즉 왕도(王道)로써 치국 · 평천하를 이룰 것을 강조하였다.
전국시대 말기에는 순자(荀子)가 나와 역시 공자를 이었으며, 그는 특히 (禮)로써 혼란한 천하를 질서있게 바로잡으려 하여 성악설(性惡說)을 주장했다.
맹자와 순자는 도덕뿐만 아니라 경세사상을 부르짖음으로써 왕도정치에 있어 인민의 경제적 생활기반을 마련해 줄 것을 주장하였다.
유가의 경전(經傳)으로 《대학(大學)》·중용(中庸)》·논어(論語)》·맹자(孟子)》의 4서와 《시경(詩經)》·서경(書經)》·역경(易經)》·예기(禮記)》·춘추(春秋)》의 5경이 있다.

도가[편집]

전설에 따르면 노자는 물소를 타고 주나라를 떠났다[2]
장자의 나비의 꿈
도가는 황로학(黃老學) 또는 노장학(老莊學)이라고도 한다. 도가의 시조인 노자(老子)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을 주장함으로써 유가의 (禮樂: 예법과 음악), 형정(刑政: 정치와 형벌, 정치와 행정)의 형식주의를 반대하고 어린 아이의 천진성으로 복귀하여 무위자연의 사회를 이룰 것을 주장했다.
노자의 이른바 도덕(道德)은 보통 말하는 도덕(Virtue)이 아니고, 유가의 이른바 인의(仁義)라는 도덕의 상위개념으로서 (道, Tao)를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노자의 는 형이상학적 본체임과 동시에 인성론(人性論)의 중심이 되는 것이다.
뒤이어 전국시대에서는 장자(莊子)가 나와 도가철학의 인식론적 이론을 전개함으로써 만물제관(萬物齊觀) · 시비양행론(是非兩行論)을 주창하고 가치의 전환을 부르짖음으로써 평등 · 자유 · 무욕을 강조했다.
열자(列子)는 노자를 이어 형이상학적으로 기화(氣化)를 상세히 논하고, 허무청정(虛無淸淨) · 전성보전(全性保眞)을 주장함으로써 신비적 · 은둔주의적 철학 사상으로 기울어졌으며, 이 계통에 있는 양주(楊朱)는 위아설(爲我說)을 주장하여 이기쾌락주의(利己快樂主義)적인 독선에 빠졌다.
유가가 중국 고래의 전통적인 적극적인 면을 계승하여 형성된 것과 반대로 도가는 그 소극적인 면을 이어 무위자연의 사상체계를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후세의 도교(道敎, Taoism)는 후한(後漢) 때 노자를 천존(天尊)으로 받들어 조직한 종교이지만, 도가 자체는 종교가 아니다.

묵가[편집]

묵가는 묵자(墨子)를 시조로 하며, 겸애(兼愛)를 주장하여 유가의 형식주의와 계급제도를 타파하고, 하늘(天)이 만민을 겸애(兼愛: 박애의 뜻)하는 것과 같이 사람들도 서로 겸애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사리사욕을 타파할 것을 주장하였으며, 절검(節儉)과 근로(勤勞)를 내세웠다.
묵가는 천귀사상(天鬼思想)을 중심으로 종교적 색채를 띠었으며, 또 삼표(三表)의 논리로써 경험을 중시하는 실증주의의 입장을 취한다. 이 경향은 후세 별묵(別墨)이라 불리며, 논리학파인 사공파(事功派)로 분파되었고, 사공파는 다시 전도파(傳道派) · 실행파(實行派) 및 기타로 나뉘었다. 실행파는 묵자의 역행주의(力行主義)를 이어 허행(許行) · 진상(陳相) 등의 철저한 무정부주의 · 사회주의 · 무위자연의 사상으로 흘렀다.

법가[편집]

상앙(商鞅) 상
법가는 관자(管子)를 시조로 하는 학파로, 신불해(申不害)와 상앙(商鞅)을 거쳐 한비자(韓非子)에 이르러 집대성되었다. 법가는 정치철학을 세우고 그것을 실천함으로써 부국강병을 이루어 천하통일을 도모하려는 학파였다.
천하를 다스리는 원리에 대해, 법가는 엄격한 법치주의가 근본이라고 주장하였다.[3] 법가는 천하를 다스리는 원리는 (法)과 (術)이라고 주장하였다.[3] 법가에서 말하는 (法)은 군주가 정하는 규범을 뜻하며 (術)은 을 행하는 수단을 뜻한다.[3]
관자는 공리(功利)와 법치(法治)를 겸한 사상가이며 또 실행가였다. 신불해는 패도(覇道)의 (術)에 밝고, 상앙(商鞅)은 패도의 (法)에 뛰어났으며, 이 (術)과 (法)은 한비자(韓非子)에 이르러 종합되어 형명법술(刑名法術)의 학으로 완성되었다. 한비자의 학은 유가 · 도가 · 법가의 사상을 종합으로써 이루어졌다.

명가[편집]

명가는 논리학파이며, 주요 사상가로는 등석(鄧析) · 혜시(惠施) · 공손룡 · 윤문(尹文) · 별묵(別墨) 등이 있다.
명가는 (名)과 (實), 즉 개념과 대상의 불일치를 교정하려는 데 목적을 두었다.
등석은 양가지설(兩可之說), 즉 이율배반율(二律背反律)과 무궁의 사(無窮之辭)로써 유명하며, 혜시는 변설(辯說)로써 만물평등을 주장했으며, 공손룡은 백마비마론(白馬非馬論)으로 유명하다.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1.  세계사 > 인류 문화의 시작 > 도시국가와 춘추전국시대 > 전국시대의 제자백가 > 묵가,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2.  Renard, (2002), p.16
  3. ↑ 이동:   세계사 > 인류 문화의 시작 > 도시국가와 춘추전국시대 > 전국시대의 제자백가 > 법가,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제자백가

최근 수정 시각: 

분류

 
파일:Semi_protect1.png  로그인 후 편집 가능한 문서입니다.
諸子百家

1. 개요2. 제자백가 일람3. 관련 서적

1. 개요[편집]

동주시대, 특히 시기적으로는 기원전 5세기 이후에 중국에서 생겨난 다수의 사상가들을 일컫는다. 제자백가(諸子百家)란, 여러 선생(~자)들이 백여명이나 된다는 뜻으로, 실제 전적에 남아있는 제자백가의 사상가 수는 무려 200명에 육박한다. 사실 원래 이 쪽 단어에선 '백'이나 '천', '만' 등의 숫자를 그냥 막연하게 많다는 뜻으로 쓰는 경향이 많긴 하지만.

하필이면 왜 이 시기에 이러한 사람들이 많이 배출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으나, 대체로 주나라의 종법제적 규범이 완전히 무너지고, 기존의 지배층들이 대거 몰락하면서, 그 몰락한 지배층들의 일파가 자신이 익힌 지식을 활용하여 교육과 후학 양성에 힘쓴 결과로 풀이된다. 쉽게 말해 이토록 혼란스러운 시대를 도대체 어떻게 멈출 것인가에 대한 수많은 사상들이 쏟아져 나왔고 그 중에서 유력한 능력을 보였던 사람들이 제자백가인 것이다.

사실 동주 당시에는 유가와 묵가의 명칭밖에 없었으나, 사마천의 아버지 사마담, 그리고 《칠략》을 지은 유향과 같은 서한시대의 사람들에 의해 오늘날 보는 "~가"의 명칭이 생기고 분류되었다. 아래의 표에 나온 분류 역시 후세인들의 편의를 위해서 생긴 분류이기 때문에, 유가 정도를 제외하면 아래에서 "~가"로 묶인 사람들의 사상이 전부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본래 구류(九流)라 하여 '소설가'를 제외했으나, 훗날 소설가의 중요성이 인식되어 '십가(十家)'라고도 부른다. 흔히 '삼교구류(三敎九流)'라 하여  삼교를 포함한 중국 철학의 대표로 꼽힌다.

물론 유가와 도가를 포함한 다른 제자백가의 사상들도 약 2500년이 지난 현대 동아시아인들에 의해서 엄연히 사용되고 있다.

통일신라 시대 독서삼품과는 유학 경전의 이해 수준을 시험하여 관리로 채용하기 위한 제도였으며 비록 골품제로 인해 실패하였으나, 5경 3사 및 제자백가에 능통한 자는 순서를 뛰어넘어 특품으로 등용 한다는 내용이 있을정도 였다.

2. 제자백가 일람[편집]

3. 관련 서적[편집]

[1] 오늘날 편의상 도가로 분류하지만, 실제로는 도가 측에 위아론이라고 비판받은 인물이다. 장자의 기록에도 등장하여 공자처럼 허구로 장자와 대화하다가 (말발에) 쳐발리고 까이던 인물로 묘사될 정도라 도가에서는 무시당하는 입장이다.[2] 본명은 전양저(田穰苴)로 사마는 그가 한 벼슬 이름이었다.[3] 증자, 자사 계열 유가[4] 자하 계열 유가[5] 주나라의 사관으로 이름은 정확히 알 수 없고, 대대례의 보부편에서 그의 기록을 인용하였다는 것만 짧게 있다.

Hundred Schools of Thought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Jump to navigationJump to search
Hundred Schools of Thought
Traditional Chinese諸子百家
Simplified Chinese诸子百家
Birth places of notable Chinese philosophers from Hundred Schools of Thought in the Zhou dynasty.
The Hundred Schools of Thought (Chinese諸子百家pinyinzhūzǐ bǎijiā) were philosophies and schools that flourished from the 6th century to 221 B.C. during the Spring and Autumn period and the Warring States period of ancient China.[1]
An era of great cultural and intellectual expansion in China,[2] it was fraught with chaos and bloody battles, but it was also known as the Golden Age of Chinese philosophy because a broad range of thoughts and ideas were developed and discussed freely. This phenomenon has been called the Contention of a Hundred Schools of Thought (百家爭鳴/百家争鸣; bǎijiā zhēngmíngpai-chia cheng-ming; "hundred schools contend"). The thoughts and ideas discussed and refined during this period have profoundly influenced lifestyles and social consciousness up to the present day in East Asian countries and the East Asian diaspora around the world. The intellectual society of this era was characterized by itinerant scholars, who were often employed by various state rulers as advisers on the methods of government, war, and diplomacy.
This period ended with the rise of the imperial Qin dynasty and the subsequent purge of dissent.

Schools listed in the Shiji[edit]

A traditional source for this period is the Shiji, or Records of the Grand Historian by Sima Qian. The autobiographical section of the Shiji, the "Taishigong Zixu" (太史公自序), refers to the schools of thought described below.

Confucianism[edit]

Confucianism (儒家; RújiāJu-chia; "School of scholars") is the body of thought that arguably had the most enduring effects on Chinese life. Its written legacy lies in the Confucian Classics, which later became the foundation of traditional society. Confucius (551–479 BC), or Kongzi ("Master Kong"), looked back to the early days of the Zhou dynasty for an ideal socio-political order. He believed that the only effective system of government necessitated prescribed relationships for each individual: "Let the ruler be a ruler and the subject a subject". Furthermore, he contended that a king must be virtuous in order to rule the state properly. To Confucius, the functions of government and social stratification were facts of life to be sustained by ethical values; thus his ideal human was the junzi, which is translated as "gentleman" or "superior person".
Mencius (371–289 BC), or Mengzi, formulated his teachings directly in response to Confucius.
The effect of the combined work of Confucius, the codifier and interpreter of a system of relationships based on ethical behavior, and Mencius, the synthesizer and developer of applied Confucianist thought, was to provide traditional Chinese society with a comprehensive framework by which to order virtually every aspect of life.
There were many accretions to the body of Confucian thought, both immediately and over the millennia, from within and without the Confucian school. Interpretations adapted to contemporary society allowed for flexibility within Confucianism, while the fundamental system of modeled behavior from ancient texts formed its philosophical core.
Diametrically opposed to Mencius, in regards to human nature (性), was the interpretation of Xunzi (c. 300–237 BC), another Confucian follower. Xunzi preached that man is not innately good; he asserted that goodness is attainable only through training one's desires and conduct.

Legalism[edit]

The School of Law or Legalism (法家; FǎjiāFa-chia; "School of law") doctrine was formulated by Li KuiShang Yang (d. 338 BC), Han Feizi (d. 233 BC), and Li Si (d. 208 BC), who maintained that human nature was incorrigibly selfish; accordingly, the only way to preserve the social order was to impose discipline from above, and to see to a strict enforcement of laws. The Legalists exalted the state above all, seeking its prosperity and martial prowess over the welfare of the common people.
Legalism greatly influenced the philosophical basis for the imperial form of government. During the Han Dynasty, the most practical elements of Confucianism and Legalism were taken to form a sort of synthesis, marking the creation of a new form of government that would remain largely intact until the late 19th century.

Taoism[edit]

Philosophical Taoism or Daoism (道家; DàojiāTao-chia; "School of the Way") developed into the second most significant stream of Chinese thought. Its formulation is often attributed to the legendary sage Laozi ("Old Master"), who is said to predate Confucius, and Zhuangzi (369–286 BC). The focus of Taoism is on the individual within the natural realm rather than the individual within society; accordingly, the goal of life for each individual is seeking to adjust oneself and adapting to the rhythm of the natural (and the supernatural) world, to follow the Way (tao) of the universe, and to live in harmony. In many ways the opposite of rigid Confucian morality, Taoism was for many of its adherents a complement to their ordered daily lives. A scholar serving as an official would usually follow Confucian teachings, but at leisure or in retirement might seek harmony with nature as a Taoist recluse. Politically, Taoism advocates for rule through inaction, and avoiding excessive interference.

Mohism[edit]

Mohism or Moism (墨家; Mòjiā; Mo-chia; "School of Mo") was developed by followers of Mozi (also referred to as Mo Di; 470–c.391 BC). Though the school did not survive through the Qin dynasty, Mohism was seen as a major rival of Confucianism in the period of the Hundred Schools of Thought. Its philosophy rested on the idea of impartial care (Chinese: 兼愛; pinyin: Jian Ai; lit.: 'inclusive love/care'): Mozi believed that "everyone is equal before heaven", and that people should seek to imitate heaven by engaging in the practice of collective love. This is often translated and popularized as "universal love", which is misleading as Mozi believed that the essential problem of human ethics was an excess of partiality in compassion, not a deficit in compassion as such. His aim was to re-evaluate behavior, not emotions or attitudes.[3] His epistemology can be regarded as primitive materialist empiricism; he believed that human cognition ought to be based on one's perceptions – one's sensory experiences, such as sight and hearing – instead of imagination or internal logic, elements founded on the human capacity for abstraction.
Mozi advocated frugality, condemning the Confucian emphasis on ritual and music, which he denounced as extravagant. He regarded offensive warfare as wasteful and advocated pacifism or at the most, defensive fortification. The achievement of social goals, according to Mozi, necessitated the unity of thought and action. His political philosophy bears a resemblance to divine-rule monarchy: the population ought always to obey its leaders, as its leaders ought always to follow the will of heaven. Mohism might be argued to have elements of meritocracy: Mozi contended that rulers should appoint officials by virtue of their ability instead of their family connections. Although popular faith in Mohism had declined by the end of the Qin Dynasty, its views are said to be strongly echoed in Legalist thought.

School of Yin-yang[edit]

The School of Naturalists or Yin-yang (陰陽家/阴阳家; YīnyángjiāYin-yang-chia; "School of Yin-Yang") was a philosophy that synthesized the concepts of yin-yang and the Five ElementsZou Yan is considered the founder of this school.[4] His theory attempted to explain the universe in terms of basic forces in nature: the complementary agents of yin (dark, cold, female, negative) and yang (light, hot, male, positive) and the Five Elements or Five Phases (water, fire, wood, metal, and earth). In its early days, this theory was most strongly associated with the states of Yan and Qi. In later periods, these epistemological theories came to hold significance in both philosophy and popular belief. This school was absorbed into Taoism's alchemic and magical dimensions as well as into the Chinese medical framework. The earliest surviving recordings of this are in the Ma Wang Dui texts and Huangdi Neijing.

Logicians[edit]

The School of Names or Logicians (名家; MíngjiāMing-chia; "School of names") grew out of Mohism, with a philosophy that focused on definition and logic. It is said to have parallels with that of the Ancient Greek sophists or dialecticians. The most notable Logician was Gongsun Longzi.

Schools listed in the Hanshu[edit]

In addition to the above six major philosophical schools within the Hundred Schools of Thought, the "Yiwenzhi" of the Book of Han adds four more into the Ten Schools (十家; Shijia).

School of Diplomacy[edit]

The School of Diplomacy or School of Vertical and Horizontal [Alliances] (纵横家縱橫家Zonghengjia) specialized in diplomatic politics; Zhang Yi and Su Qin were representative thinkers. This school focused on practical matters instead of any moral principle, so it stressed political and diplomatic tactics, and debate and lobbying skill. Scholars from this school were good oratorsdebaters and tacticians.

Agriculturalism[edit]

Agriculturalism (农家農家Nongjia) was an early agrarian social and political philosophy that advocated peasant utopian communalism and egalitarianism.[5] The philosophy is founded on the notion that human society originates with the development of agriculture, and societies are based upon "people's natural propensity to farm."[6]
The Agriculturalists believed that the ideal government, modeled after the semi-mythical governance of Shennong, is led by a benevolent king, one who works alongside the people in tilling the fields. The Agriculturalist king is not paid by the government through its treasuries; his livelihood is derived from the profits he earns working in the fields, not his leadership.[7]
Unlike the Confucians, the Agriculturalists did not believe in the division of labour, arguing instead that the economic policies of a country need to be based upon an egalitarian self sufficiency. The Agriculturalists supported the fixing of prices, in which all similar goods, regardless of differences in quality and demand, are set at exactly the same, unchanging price.[7]
For example, Mencius once criticized its chief proponent Xu Xing for advocating that rulers should work in the fields with their subjects. One of Xu's students is quoted as having criticized the duke of Teng in a conversation with Mencius by saying:
"A worthy ruler feeds himself by ploughing side by side with the people, and rules while cooking his own meals. Now Teng on the contrary possesses granaries and treasuries, so the ruler is supporting himself by oppressing the people."

Syncretism[edit]

Syncretism, or the School of Miscellany (杂家雜家Zajia) integrated teachings from different schools; for instance, Lü Buwei found scholars from different schools to write a book called Lüshi Chunqiu cooperatively. This school tried to integrate the merits of various schools and avoid their perceived flaws. The (c. 330 BC) Shizi is the earliest textual example of the Syncretic School.

School of "Minor-talks"[edit]

The School of "Minor-talks" (小说家小說家Xiaoshuojia) was not a unique school of thought. Indeed, all the thoughts which were discussed by and originated from non-famous people on the street were included in this school. At that time, there were some government officials responsible for collecting ideas from non-famous people on the street and report to their senior. These thoughts formed the origin of this school. This also explains its Chinese name, which literally means "school of minor-talks".

Unlisted schools[edit]

These schools were not listed in the Hanshu but did have substantial influence.

School of the Military[edit]

Another group is the School of the Military (兵家Bingjia) that often studied and discussed about what westerners called Philosophy of war. Some of them studied warfare and strategy, others focused on kinds and skills of weapons. Sun Tzu and Sun Bin were influential leaders. Some of their famous works are Sun Tzu's The Art of War and Sun Bin's Art of War. Their theories influenced the later China and even the East Asia greatly. They work well in many ways in the modern day.

Yangism[edit]

Yangism was a form of ethical egoism founded by Yang Zhu. It was once widespread but fell to obscurity before the Han dynasty. Due to its stress on individualism, it influenced later generations of Taoists.

School of the Medical Skills[edit]

School of the Medical Skills (方技家Fangjijia) is a school which studied Medicine and health. Bian Que and Qibo were well-known scholars. Two of the earliest and existing Chinese medical works are Huangdi Neijing and Shanghan Lun.

History and origins[edit]

The "Yiwenzhi" of the Hanshu claims that the officials working for the government during the early Zhou Dynasty lost their position when the authority of the Zhou rulers began to break down in the Eastern Zhou period. In this way, the officials spread all over the country and started to teach their own field of knowledge as private teachers. In this way the schools of philosophy were born. In particular, the School of Scholars (i.e. the Confucian School) was born from the officials of the Ministry of Education; the Taoists from the historians; the Yin-yang School from the astronomers; the Legalist School from the Ministry of Justice; the School of Names from the Ministry of Rituals; the Mohist School from the Guardians of the Temple; the School of Diplomacy from the Ministry of Embassies; the School of Miscellany from the government counselors; the School of Agriculture from the Ministry of the Soil and Wheat; the School of Minor Talks from the minor officials. Although the details are unclear, the burning of books and burying of scholars during the Qin was the end of the period of open discussion.
It should be stressed that only the Ru, or Confucians and the Mohists were actual organized schools of teachers and disciples during this period. All the other schools were invented later to describe groups of texts that expressed similar ideas. There was never an organized group of people describing themselves as "Legalists," for example, and the term "Daoist" was only coined in the Eastern Han after having succeeded the Western Han's Huang-Lao movement.

See also[edit]

References[edit]

  1. ^ "Chinese philosophy", Encyclopædia Britannica, accessed 4/6/2014
  2. ^ Graham, A.C., Disputers of the Tao: Philosophical Argument in Ancient China (Open Court 1993). ISBN 0-8126-9087-7
  3. ^ The Shorter Routledge Encyclopedia of Philosophy. Edited by Edward Craig. Routledge Publishing. 2005.
  4. ^ "Zou Yan". Encyclopædia Britannica. Retrieved 1 March 2011.
  5. ^ Deutsch, Eliot; Ronald Bontekoei (1999). A companion to world philosophies. Wiley Blackwell. p. 183.
  6. ^ Sellmann, James Daryl (2010). Timing and rulership in Master Lü's Spring and Autumn annals. SUNY Press. p. 76.
  7. Jump up to:a b Denecke, Wiebke (2011). The Dynamics of Masters Literature: Early Chinese Thought from Confucius to Han Feizi. Harvard University Press. p. 38.

External links[edi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