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0/01

현실 너머의 세계를 만들다…오로빌의 실험

현실 너머의 세계를 만들다…오로빌의 실험

서어리 기자
2016.09.07 08:28:01

[김민웅의 인문정신] 허혜정 오로빌 코리언 파빌리언 코디네이터 인터뷰 (상)

사드 배치 문제, 국회 개회사 파동, 세월호 단식 투쟁…. 오늘도 어김없이 온갖 종류의 사회적 갈등이 언론 지면을 뒤덮는다. 어지러운 현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정치나 종교 같은 차이들을 초월한 평화로운 공간을 꿈꾸게 마련이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현실 너머'는 저마다의 상상 속에 갇히곤 한다.

현실 너머의 세계가 과연 존재할까? 알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그런 공간을 만드는 실험은 지구 상 어딘가에서 진행되고 있다. 인도에 터를 잡은 대안 공동체 오로빌(Auroville)이 바로 그런 곳이다. 여기 모인 50여 개국 출신의 2500여 명은 국적, 종교, 인종, 문화, 정치, 경제적 배경과 같은 차이를 뛰어넘어 조화롭게 사는 삶을 실천하고 있다.

모든 대안적인 것들엔 의구심이 따른다. 오로빌 공동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정치적 차이가 극복이 되는가. 먹고 사는 문제는 어떻게 해결하는가. 오로빌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의심 혹은 호기심은 끊이지 않는다.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인터뷰에 응한 이는 허혜정 오로빌 허혜정 오로빌 코리언 파빌리언 코디네이터다. 다음은 지난달 24일 서울시 중구 서울 도서관 내 카페에서 김민웅 경희대학교 미래문명원 교수가 묻고 허혜정 씨가 답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김민웅 경희대학교 미래문명원 교수와 허혜정 오로빌 허혜정 오로빌 코리언 파빌리언 코디네이터. ⓒ프레시안(최형락)

'지구 상 어디 한 군데쯤은...' 오로빌의 실험에 참여하다

김민웅 : 남부 인도에 있는 '오로빌(Auroville)'은 대안 공동체의 미래를 꿈꾸는 이들이 주목하는 모델이다. 그러나 오로빌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이해는 아직 깊지 않다. 오로빌이 어떤 곳인지 우선 간단히 소개해달라.

허혜정 : 국적, 종교, 인종, 문화, 정치, 경제적 배경을 초월해 인류의 일체성을 실험해보기를 원하는 50여 개국 2500여 명이 살아가고 있는 국제 공동체다.

김민웅 : 개인적으로는 오로빌과 어떻게 해서 인연을 맺게 됐나.

허혜정 : 평소 공동체에 관심이 많았다. 우연히 오로빌에 관한 <A Dream>이라는 글을 읽었는데, '지구 상 어디 한 군데쯤은 정치, 종교와 같은 온갖 차이를 차이들을 넘어서서 함께 조화롭게 살아가는 실험을 하는 곳이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첫 문장이 가슴에 와 닿았다. 나도 참여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2002년 오로빌에 갔다.

김민웅 : 오로빌은 누가, 어떻게 만들게 되었나.

허혜정 : 인도의 시인이자 사상가였던 스리 오로빈도가 독립운동을 하던 중 감옥에 들어가게 됐다. 그런데, 거기서 독특한 영적 체험을 하면서 인류가 언젠가는 개체의식을 초월하여 일체의식을 지닌 존재로 진화해가리라는 것을 깨닫고 그 일체성을 실현한 세상을 꿈꾸게 되었다. 스리 오로빈도가 1950년에 돌아가시자, 그의 영적인 반려자였던 미라 알파사라는 분이 스리 오로빈도의 유지를 받들게 되었다. 인도에서는 여성 가운데 영적인 스승을 '마더'라고 부르는데, 미라 알파사가 마더가 되었고, 오로빌 공동체를 만들었다.

김민웅 : 미라 알파사는 누구인가?

허혜정 : 1878년 프랑스 태생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각기 터키와 이집트 출신의 유대인 혈통인데, 성장한 이후 인도와 일본에도 오래 머물렀고 거기서 타고르를 만나는 등 정신적 성숙의 깊은 과정을 거치게 된다. 아시아의 영적 깊이에 눈을 뜨게 되었고, 스리 오로빈도와의 만남은 그런 과정에서 이루어진 일이다.

김민웅 : 자칫 어떤 종교집단의 특별 공동체라는 인상을 주지는 않을까?

허혜정 : 아니다. 도리어 특정 종교를 넘자는 것이다. 인간 내면의 영적 심연에 주목해서 인간의식의 성숙을 도모하려는 것이다. 오로빌을 잘 알기 위해서는 이러한 정신적 기반에 대해 이해하는 게 도움이 될 것이다.

"오로빌은 전체 인류의 것"

김민웅 : '오로빌'이라는 이름에 뜻이 있는가?

허혜정 : '동트는 새벽(프랑스어 aurore에서 따온 단어인 Auro)의 도시(ville)'라는 뜻이다. 스리 오로빈도의 오로를 떠올리기도 한다. 새로운 문명의 아침을 맞이하고 싶은 마음이 담긴 이름이라고 여기면 될 것이다.

김민웅 : 우리 식으로 하면 "아사달" 또는 "아사벌"인 셈이다. 단군이 아침 들판이나 벌판에 고조선의 도읍을 정한 역사와 겹친다. 갑자기 오로빌이라는 이름이 정겹다.

허혜정 : 듣고 보니 동감이 되고 재밌다. (웃음) 오로빌을 짓기 시작한 건 1968년이었다. 착공식 날 스리 오로빈도와 마더 미라 알파사의 뜻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각자의 나라에서 흙을 가져와 오로빌 땅에 묻었다. 우리나라를 포함해 124개국에서 모였는데, "오로빌은 전체 인류의 것이며 끝없는 교육과 지속적인 진보, 그리고 영원히 늙지 않는 젊음의 장이 될 것"이라는 오로빌 헌장을 선언했다.

오로빌이 세워지기까지 유네스코와 인도 정부의 지원이 큰 역할을 했다. 유네스코는 오로빌이 착공하기 전인 1966년 오로빌의 탄생을 지지하는 총회 결의문을 채택한 이후로 꾸준히 지지 입장을 보냈다. 인도 정부 또한 오로빌의 이상에 동의해, 오로빌이 특별자치구역으로서 권한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오로빌 재단법을 통과시켰다.

▲허혜정 오로빌 허혜정 오로빌 코리언 파빌리언 코디네이터. ⓒ프레시안(최형락)

김민웅 : 자치권이 주목된다. 개별 국가주의를 넘겠다는 뜻이 느껴진다. "오로빌은 전체 인류의 것"이라는 헌장도 인상적이다. 프랑스 68혁명 세대의 역할이 컸다고 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최근 오로빌 공동체 발전을 위해 유네스코 사무총장 이리나 보코바의 활약이 큰 것을 보았다. 로마클럽과 함께 인류의 미래에 대한 논의를 해온 부다페스트 클럽의 회장 어빈 라스로 박사도 오로빌 국제위원회 의장으로 오랫동안 활동했다. 인간의 의식혁명과 미래의 새로운 구성에 깊은 관심을 가진 이들은 오로빌 공동체의 실험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런 걸 보면, 우리는 세계적 관심사와 미래 비전에서 너무 동떨어져서 살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은 느낌이 든다.

허혜정 : 안타까운 일이다. 달라이 라마도 오로빌 공동체의 발전에 소중한 격려를 해왔다. 인류의 미래가 어떤 정신적 변화에 기초해서 이루어져야 하는가를 고민하는 사람들이 오로빌에 있다.

김민웅 : 한국 사람은 얼마나 있나.

허혜정 : 전체 약 2500명 정도인데, 참가국은 49개국이었다가 50국이 되기도 한다. 이동 인구도 있어서 늘었다 줄었다 한다. 한국인의 경우는 33명에서 34명 정도이다. 오로빌 주민을 오로빌리언이라고 하는데, 이들은 일반 국가의 국민과 같은 거주자 개념이 아니다. 오로빌을 건설하는 장기 거주 자원활동가 개념으로 이해하는 게 좋다. 여기 올 때도 볼런티어(자원봉사자) 비자를 받는다. 거주 자격이 자원봉사인 셈이다. 자원봉사자로 왔으니 오는 것도 떠나는 것도 자기 마음이다. 장기로 올 수도 있고 단기로 올 수도 있다.

"자본의 힘에서 벗어난 기본소득 체제"

김민웅 : 오로빌의 현실로 들어가 보자. 당장 먹고 사는 문제와 마주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집은 어떻게 구하는지, 직업은 어떻게 갖는지, 교육은 어떻게 하는지, 궁금하다.

허혜정 : 일단 직업의 경우, 각자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한다. 오로빌은 큰 도시의 축소판과도 같아서 모든 기능이 다 있다. 공무원에 해당하는 일을 하는 유닛(부서)도 있고 학교 병원 식당 공장 농장 가게 등과 그 밖의 상상하기 힘든 온갖 다양한 일터가 다 있다. 특별한 전문기술이 없어도 다양한 직업을 가질 수 있다. 저 같은 경우는 오로빌에 들어갈 때 인터뷰에서 유기농법을 배워서 농사를 해보고 싶다고 했다. 그렇다고 꼭 그 일을 해야 하는 건 아니다.

각 유닛에선 임금이 아닌 기본 생활을 할 수 있는 비용을 제공한다. 한국에서도 요즘 관심을 갖기 시작한 '기본소득' 체제가 운영되고 있는 거다. 현금 사용은 아주 적고, 기본적인 생활을 할 수 있는 물자나 복지 혜택을 준다. 점심을 제공해주고, 학교 교육도 무료로 해준다. 일을 한다고 해서 무조건 임금을 받는 게 아니다.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사람은 무료 봉사를 하기도 한다.

김민웅 : 기본소득에도 관심이 가고, 현금 사용의 최소화도 주목할 만하다.

허혜정 : 자본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사회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노력이다. 한국에서는 난리가 나는 부동산에 대한 태도도 다르다. 집은 아직까지 공동체에서 제공할 수 없어 각자 해결한다. 그런데 부동산 소유라는 개념이 없고, 집을 구입하거나 지은 후 공동체에 기부한 후 관리자가 된다. 본인이 지은 집에 자녀가 살 수는 있다. 그런데 팔 수는 없다. 대신 오로빌리언끼리 집을 교환하기도 하고, 공동체를 위해 많은 일을 하신 분들께는 무료로 주기도 한다. 집은 도시 개발 부서의 허락을 받아 지을 수 있다. 오로빌에는 건축계에서 오신 분들이 많은데, 소박하게 짓기도 있고 크게 멋지게 짓기도 한다. 원래 도시에 오면 그곳을 가장 잘 표현하는 게 건물이다. 오로빌에 오면 다양한 집들이 있는데 현장에 와보면 그런 부분이 특별히 눈에 띌 것이다.

김민웅 : 새로운 건축 미학의 시도가 가능한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은 아름다운 건물들이 들어섰지만, 오로빌이 처음엔 황무지라고 들었다. 인도 정부가 이왕 선심을 쓰는 김에 좀 살기 좋고 환경이 괜찮을 곳을 주었어야 했던 거 아닌가? (웃음) 물론 정색을 하고 한 말은 아니다.

허혜정 : 일반적으로 다른 공동체들은 좋은 환경을 찾아서 들어간다. 그런데 저희 같은 경우는 사막 같은 황무지에서 시작했다. 그런 것이 더 의미가 있지 않은가? 기존의 가치관이 뿌리내리지 않은 곳을 선택한 거다. 환경이나 생태적으로 새로운 실험이 가능한 현장이기도 했다. 인구 5만을 목표로 마을을 만들기로 했는데, 확보된 땅은 사람이 살 수 없을 만큼의 사막화가 진행된 불모지였다.

오로빌리언들은 생태에 관심이 많기 때문에, 그런 불모의 땅에서 자연을 치유하는 일부터 시작했다. 비만 오면 흙이 쓸려 내려가서 식물이 자랄 수 없는 박토이기에 댐을 만들고 저수를 할 수 있는 웅덩이를 만들었다. 언덕에 구덩이를 파고 나무를 심고 물을 주고, 나무를 키우고 그렇게 녹화 작업을 했다.

▲오로빌 주민 회의. ⓒ오로빌

"경찰 없는 사회...거짓말, 마약 금지 등 가이드라인만"

김민웅 : 오랜 시간과 피땀 나는 노력이 필요했겠다. 그런데 아무리 이상이 높아도, 사람이 사는 곳이면 갈등이 없을 수가 없다. 혹시 그런 걸 해결하는 내부 규율 같은 게 있는가?

허혜정 : 오로빌리언들은 어떤 정해진 가이드라인이나 정책에 의해 관리되는 데 대한 거부감이 많다. 그래서 처음 만들어질 때부터 가이드라인은 간단했다. '거짓말하지 말자', '하루 여섯 시간 공동체를 위해 일하라', '마약을 하지 마라'와 같은 것이다. 그 다음 것들은 안에서 합의를 통해 갈등을 풀어나간다.

김민웅 : 그래도 공동체 생활이 안정이 되는 과정에서 권력 관계가 생길 수도 있지 않나.

허혜정 : 오로빌 안에서는 어떤 일을 하든지 똑같은 생활비를 받는다. 내가 농장에서 풀을 뽑고 흙을 만진다고 돈을 덜 버는 게 아니다. 행정 부서에서 일을 한다고 해서 권한이 더 있는 것도 아니다. 일에 귀천이 없기 때문에 권력이 생기지도 않는다.

김민웅 : 경찰은 없나? 추방하는 경우는 없나?

허혜정 : 경찰은 없다. 갈등이 생길 때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지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키워질 것 아닌가. 그래서 우선 내부에서 해결하려고 노력하는데, 강도나 살인 같은 큰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도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을 경우는 추방할 수 있다는 원칙은 있다.

김민웅 : 종교로 인한 갈등은 없나.

허혜정 : 앞서 말했듯이 이곳에서는 특정한 종교가 따로 없다. 오로빌은 종교 공동체가 아닌 영성 공동체이다. 두 개념의 차이가 쉽게 이해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교회나 절 같은 종교적인 장소가 없다. 각자 자신의 영적 성장을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이에 따른 아무런 종교적 의무가 없다. 그렇다고 이미 가지고 있는 종교를 부인하고 억압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서로의 길을 존중하고 자유롭기에 갈등은 없다.

"오로빌의 교육에는 경쟁과 시험이 없다"

김민웅 : 교육은 어떤 방식으로 이뤄지나.

허혜정 : 기본적으로 무상교육 시스템이다. 일단 유아원과 유치원이 있고, 초등학교와 중학교가 결합된 학교가 있고, 고등학교가 있다. 초등‧중등학교의 경우, 전체적으로 대안학교인데 저마다 커리큘럼이 조금씩 다르다. 학문적인 부분을 강조하는 학교가 있고, 부모가 직접 교사로 참여하는 홈스쿨링 학교가 있고, 다양한 체험 교육을 위주로 하는 학교가 있다. 고등학교의 경우, 외부 대학 진학을 원하는 아이들을 위한 학교가 있고, 대학 진학을 원하지 않는 아이들은 본인이 원하는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곳도 있다.

김민웅 : 여러 유형의 제도적 실험을 한다는 인상이다. 오로빌 교육의 특징을 설명하자면?

허혜정 : 시험이 없다. 경쟁이 없다. 그게 가장 큰 특징이다.

김민웅 : 그럼 학업 성취 평가는 어떤 식으로 하나?

허혜정 : 평가라는 게 사실은 우리 어른들의 낡은 개념인 것 같다. 시험 같은 평가는 없고, 대신 한 학기가 끝날 무렵, 학교에 공동체 사람들을 초대해서 그동안 공부한 것을 발표하고 나누는 자리가 있다.

김민웅 : 그런 방식으로 공부했을 때 외부 상급 학교 진학에는 어려움이 없나.

허혜정 : 신기한 게, 대학을 진학하는 아이들의 경우, 굉장히 공부를 잘한다. 이름만 대면 알 만한 해외 대학에 많이 입학하고 원하는 과목을 전공한다. 외부에서 그렇게 공부를 한 후 돌아오는 경우도 많다.

김민웅 : 다시 돌아오는 아이들은, 바깥 세상에 적응이 안 돼 그런 것 아닌가 하는 오해도 있을 수 있을 것 같다.

허혜정 : 공부를 마치고 다시 오로빌에 오느냐 마냐는 본인의 선택에 달려있다. 돌아오는 아이들에게는 감사할 따름이다. 돌아오는 아이들 대부분은 정말로 오로빌에 살고 싶어서 온다.

김민웅 : 여러 나라 출신들이 섞여 있으니 소통에 어려움은 없는가? 언어 문제는 어떻게 해결하나.

허혜정 : 언어는 대개 기본적으로 서너 개는 하는 것 같다. 모국어를 하고, 영어는 기본 공용어라서 하고, 타밀 나두주에 살기 때문에 타밀어를 한다. 학교에서는 불어 교육도 많이 하는 편이다. 인도 고대어인 산스크리트어도 많이 한다.

김민웅 : 다국적 문화권답다. 한국 사람이 30여 명 정도라고 했다. 일본이나 중국 사람은 어느 정도 있나?

허혜정 : 점점 늘어나고 있는데, 중국, 일본이 각각 12명이고 대만이 3명이다. 동북아 인구를 통틀면 70명 정도 되는 것 같다. (다음에 계속)

서어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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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조선에서도 오로빌의 실험, 가능할까? : 네이버 뉴스
기사입력 2016-09-08 08:25  0  4

[김민웅의 인문정신] 허혜정 오로빌 코리언 파빌리언 코디네이터 인터뷰 (하)

 [서어리 기자]

오로빌에 '남한 문화관' 아닌 '코리안 문화관' 설립하는 이유

김민웅 : 동북아 센터라는 곳을 만들 계획이라고 들었다. 무얼 하고자 하는 곳인가?

허혜정 : 오로빌은 기본적으로 산업. 문화. 주거. 국제 네 구역으로 나뉜다. 이 가운데 국제 구역은 오로빌과 오로빌 바깥에 있는 나라들을 연결하는 곳으로, 오로빌의 이상과 맞닿아 있는 곳이다. 오로빌이 인류 공동체를 지향하기 때문에 전 세계가 평화롭게 살려면 각 국의 문화와 민족혼을 서로 이해하고 배우면서 조화를 이뤄야 한다. 그래서 각 민족혼의 진수를 꽃피울 수 있는 각국의 문화관을 세우고 있다. 현재는 인도 문화관과 티베트 문화관이 완공되어 있고, 우리나라를 포함, 나머지 나라들도 열심히 준비를 하고 있다.

김민웅 : 그런 센터나 각국 문화관 공간을 만들 수 있는 땅은 어떻게 주어지는가?

허혜정 : 지난 2월에 부지 신청을 해서 2만2000제곱미터 정도 승인을 받아서 배당돼있다. 동북아시아 전체 부지이다. 이제 프로젝트가 시작된다. 우리나라는 아시아 지역 중 중국, 대만, 일본, 몽골 등과 함께 동북아 클러스터에 소속되어 있고, 한 구역에다 다섯 나라의 문화관을 각각 짓도록 계획되어 있다. 우리나라는 정치적으로는 남한과 북한으로 나뉘어 있지만 우리는 남한 파빌리온(문화관)을 짓는 것이 아니라 통일을 염원하는 뜻을 담은 코리안 파빌리온을 짓고자 한다. 일종의 한국 평화관의 성격도 갖는 셈이다. 한국관은 1200제곱미터 규모다. 동북아 센터는 아시아 5개국이 함께 사용할 공동시설이 된다. 여기에는 동북아의 문화를 함께 소개할 박물관과 멀티미디어 센터와 도서관을 만들고 공동 행사를 치를 이벤트 홀도 마련할 계획이다. 동북아 센터의 경우는 다섯 나라가 공동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되어 있다.

숙소 문제 해결을 위해서도 이러한 작업은 절실하다. 현재 오로빌을 방문하는 방문객은 하루 3000명 정도 된다. 많을 때는 7000명이 오기도 한다. 오로빌 인구가 2500명인데 그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전 세계에서 자원봉사자나 게스트로 방문하는 것이다. 그래서 오로빌 안에서 다 머물 수 없고 밖에서 머물러야 하기도 한다.

지금도 한국에서 학생들이 현장학습을 위해 많이 온다. 동북아 센터가 지어지면 거기에는 단기 방문객을 받고 각국의 파빌리온은 리서치를 하거나 오로빌 공동체를 견학하러 오는 분들과 학생들이 묵으면서 각국의 문화도 서로 교류하며 배울 수 있도록 문화관과 교육관의 역할을 겸하게 될 것이다.

김민웅 : 엄청난 프로젝트로 들린다. 어느 정도 실현 단계에 있는가, 아니면 이제 시작하는 단계인가?

허혜정 : 이제 시작이라고 보면 된다. 사실 따지고 보면, 코리안 파빌리온을 짓기 위한 노력은 2004년부터 시작해서 조금씩 꿈을 키우고 구체화해온 셈이다. 오로빌에서 매년 한국 문화를 소개하는 행사를 하는 가운데 건물을 짓기 위한 종잣돈도 많지는 않지만 적립해왔다. 작년부터는 설계도면 작업도 하고, 한국에서도 펀딩과 지원을 해줄 그룹을 조직하기 위한 활동 등을 점차 본격화해가고 있다.

동북아 센터에는 아시아 키친과 수공예관도 마련할 예정인데, 여기서 동북아의 음식 문화를 소개할 것이다. 최근에 한국 스님이 오셔서 전시회도 했는데, 한국 음식을 함께 나누면 음식을 만드는 자세, 먹는 자세. 감사하는 마음, 이런 사찰 음식 문화를 함께 나누었다. 지금 인스턴트 음식이 굉장히 난무하는데 이런 활동을 통해 건강한 음식 문화를 이어가고 싶다. 자수나 매듭 같은 동북아의 수공예품도 인기가 많다. 몇몇 오로빌리언들이 한국에 와서 담양 대나무 축제를 구경한 적이 있는데 담양의 대나무로 만든 수공예품을 보면서 많이들 놀랐다. 우리의 문화도 오로빌에 제공할 수 있는 소중한 인류적 자산이라는 걸 느끼게 된다.


김민웅 : 프로젝트를 추진해나가면서 어려움은 없는가?

허혜정 : 대만과 중국, 그리고 한국과 일본, 중국 사이에는 역사적 갈등과 적대감이 존재한다. 저도 일본 사람을 보면 왠지 모를 껄끄러움이 있다. 동북아시아 센터를 짓기 위해 동북아의 사람들이 함께 모여 일하다 보면 갈등을 겪기도 했지만 지금은 동료애가 쌓여서 훨씬 더 조화롭게 일할 수 있게 되어가고 있다. 이런 경험을 하면서 나라와 나라 사이의 정치적인 갈등을 우리 세대에서는 어떻게든 해결하고, 함께 평화롭게 지낼 수 있도록 계속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생각이 확고해진다. 한국에 와서 뉴스를 보니, 어느 나라가 더 강한 무기 갖고 있나 무기 경쟁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데. 그런 점에서라도 우리가 추진하고자 하는 프로젝트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건물만 짓는 건 의미 없다"

김민웅 : 평화와 화해의 세계적 거점이 있게 된다는 점에서 중요한 가치를 가지리라 본다. 이게 실제로 이루어지려면 재정이 현실적으로 관건이겠다. 한국 문화관을 짓는 데 비용은 얼마나 드나. 펀딩은 어떻게 하나.

허혜정 : 저희가 구상하는 건 5억 정도의 기금이다. 청년, 학생들, 시민 단체 참여가 있으면 한다. 정부가 적극적으로 지원해서 함께 한다면 그 또한 좋겠다. 물론 지원하나 간섭해서는 안 된다. 한국 문화관이 국가 또는 관의 홍보기관은 아니기 때문이다. 인류적 이상에 기여하는 자세가 전제가 된다. 인도 정부의 정책과 태도가 참고가 될 것이다. 이런 이상에 동의하는 기업도 환영한다. 물론 큰 기부가 들어오면 건물을 금방 지을 순 있겠지만, 액수가 크든 작든 함께 펀딩에 참여해서 한국 문화관을 짓는 게 '우리의 일'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런 과정에서 의식이 성장한다. 건물만 짓는 것은 의미 없다. 그 안에서 일어날 활동을 함께 하기 위해선 우선 의식의 성장 과정 자체가 소중하다. 가치의 공유로 함께 자라나는 것이다. 건물의 설계도 그런 차원에서 이미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의식의 진화와 함께 새로운 설계가 가능하도록 논의가 열려 있다.

김민웅 : 그간 어느 정도 논의와 협력관계가 만들어졌는가?

허혜정 : 우리 안에서의 논의와 노력은 오래됐다. 그러나 모든 일이 다 시기적 성숙의 과정이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아직은 이 프로젝트를 알리고, 협력할 수 있는 분들을 찾아 나서는 단계이다.

김민웅 : 그걸 하기 위한 상황이 이제는 과거보다는 나아졌다고 본다. 간간이기는 하지만, 오로빌이 한국 사회에 알려진 것도 이제 한 10년 정도 된 것 같다. 그동안 우리 안에서도 대안 공동체 운동이 꽤 성장한 편이다. 잘만하면 서로 매우 유익한 관계가 만들어질 수 있다는 기대를 갖게 된다.

허혜정 : 그렇지 않아도 서울시 공동체 사업 담당자께서 오로빌과 함께 할 수 있는 일이 있는지 문의해 온 적이 있다. 마을 만들기를 비롯해서 한국에서의 대안 공동체 실험이 여러 어려움에 부딪히고 있다는 것도 들었다. 저희 같은 경우 48년간 실험을 계속했기 때문에, 교류하면서 서로 배울 수 있는 부분이 있다고 본다. 생태 마을에 관심이 많은 NGO나 대안학교들, 현재 지방 자치정부 주도로 일어나는 마을 공동체 사업과 연계할 수 있게 된다면 좋을 것 같다. 교류 프로그램, 교육 프로그램이 왕성하게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있다. 그런 토대 위에서 동북아 센터나 한국 문화관이 세워질 수 있지 않을까 희망하는 바이다.

"미래의 주역들, 오로빌에서 미래의 길을 만들기를"

김민웅 : 청소년이나 대학생이 오로빌 공동체를 견학한다면 어떤 점에서 의미가 있을까.

허혜정 : 프로그램에 따라 다르겠지만, 오로빌을 함께 만들어나가는 일에 동참한다는 마음으로 온다면 가장 기분 좋은 경험을 할 수 있다. 예술인 마을, 유기 농장, 개척 마을, 심신 치유 센터, 대체 에너지 공방, 재활용 공예 스튜디오, 원주민 마을을 돕는 자원단체 등등, 아주 다양한 색깔의 커뮤니티와 일터가 산재해 있다. 거기서 함께 어울려 지내며 체험하면 상상을 뛰어넘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동북아 파빌리온 건축 프로젝트에는 우리나라의 젊은 학생들이 많이 참여해서 함께 일하면 좋겠다. 개념 논의에서부터 시작하는 거다. 결론이 이미 내려진 것이 아니라, 열려 있다. 우리가 하는 일은 미래의 길을 만들어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미래의 주인이 될 주역들이 와서 이것을 함께 만들었으면 좋겠다. 학생들이나 청년들이 와서 다른 국가의 사람들과 함께 부딪히고 공부하면서 어떻게 함께 살아야 하는지를 배우면 평화가 올 거라고 생각한다.

김민웅 : 그렇지 않아도 경희대가 추진하고 있는 미래창조 스쿨의 대안 공동체 영역에서 오로빌 프로젝트를 해보자는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아직은 초기 단계지만, 좀 더 발전시켜나가면서 여러 대학들이 연대해 함께 해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

허혜정 : 오로빌은 그런 점에서 최적이다.

김민웅 : 초등학교나 중고등 학생들이 가면 학교에는 다닐 수 있나.

허혜정 : 3개월 이상이면 오로빌 학교에서 생활하면서 공부하는 게 가능하다. 미성년자의 경우 혼자 올 수는 없고, 부모님과 같이 와야 한다.

김민웅 : 언제 가면 제일 좋을까.

허혜정 : 더운 지방이라서 5월, 6월은 피하는 게 좋다. 그때가 되면 기온이 42도 정도로 올라간다.

김민웅 : 너무 걱정 안 해도 될 거 같다. 요즘 같으면 우리도 폭염으로 좀 훈련이 돼서 잘 감당할 듯하다.

허혜정 : (웃음) 10월, 11월이 우기다. 몬순 기후이기 때문에 비가 많이 온다. 폭서기와 몬순기만 피하면 전반적으로 날씨가 좋은데, 12월부터 2월, 3월까지 오면 초가을 날씨라 좋다.

▲허혜정 오로빌 코리언 파빌리언 코디네이터. ⓒ프레시안(최형락)

"돈의 힘이 없는 사회 안의 유기성에 주목해달라"

김민웅 : 정리해보자. 새로운 미래를 꿈꾸던 프랑스 68혁명 세대의 일부가 인도의 정신적 풍토와 만나게 되었고, 불모지였던 곳이 40년간의 노력으로 새로운 형태의 도시로 만들어졌다. 인도 정부의 자치권 부여와 유네스코의 지원이 큰 힘이 되었고 일종의 지구적 공동체가 만들어졌다. 국제구역에서는 동북아 센터와 코리안 파빌리온을 통해 각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끌어안으며 인류 평화를 지향하고자 한다. 이게 다행스럽게 최근 한국 사회의 생태 공동체에 대한 관심과 맞물리고, 개개인에 있어선 창조적인 삶을 추구하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흐름과 만날 가능성이 커졌다. 우리의 입장에서 오로빌을 이렇게 이야기해도 되겠는가?

허혜정 : 한 가지만 덧붙이겠다. 여기선 모든 게 유기적으로 움직인다. 오로빌에서는 친환경을 일부러 내세워서 외치지 않는다. 그런데도 대체 에너지를 통한 에너지 자립이 가능하게 돼 오로빌리언들은 무상으로 전기를 받아쓰고 있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자본이 지배하지 않는 다른 사회를 만들기 위한 시도들을 다양하게 해왔기 때문이다. 친환경 문제는 그런 사유와 틀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하나이다. 에너지가 무상으로 공급되는 사회. 음식이 무상으로 공급되는 사회. 가장 필요한 것들이 무상으로 공급돼 돈의 가치가 힘을 발휘할 수 없는 사회. 그런 비전 아래서 나머지 친환경, 대안 교육 등이 삶의 내용으로, 실천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전체적인 유기성을 주목해주기를 바란다.

김민웅 : 오로빌 공동체의 정신적 가치 전체를 놓고 이해해달라는 이야기로 받아들이겠다. 한중일간 화해를 추구한다고 했다. 그런데 사실 따지고 보면 화해를 하려면 치열한 역사 논쟁이 필요하기도 하다. 좋은 게 마냥 좋다고만 볼 수 없지 않나. 이런 의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허혜정 : 공동체 안에 가라앉아있던 문제들은 공동의 프로젝트를 위해 함께 일하다 보면 어느 시점에서 드러나게 되는 것 같다. 그런데 목표가 중요한 것 같다. 잘잘못을 따지고 가르치는 데 있느냐, 아니면 치유를 하면서 다음 세대에게 함께 화합해서 함께 사는 법을 가르치는 데 있느냐. 우리는 후자 쪽에 많은 비중을 두고 생각한다.

김민웅 : 그런 생각으로 정치 논쟁을 하면 괜찮을 것 같다. 화해를 내세워 민감한 정치논쟁을 적당히 피하는 방식으로 치유를 하는 것은 아무래도 한계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짚어봤다. 마지막으로, 오로빌에서 10여 년 살았다고 했는데 그동안 "오로빌은 이게 크게 달라졌다" 또는 "나는 오로빌로 이렇게 변화되었다"라고 느낀 게 있나.

허혜정 : 오로빌이 달라졌다고 하기보단 공동체를 보는 내 자세가 달라졌다고 할 수 있다. 처음엔 마더 미라 알파사가 이야기했던 꿈, 변화에 대한 희망을 실현하는 프로젝트에 동참하고 싶어 오로빌에 갔다. 나뿐 아니라 많은 분들이 그런 생각으로 왔다. 그런데 사는 데 어려움도 많았다. 한국에서만 살다가 동서양의 문화가 뒤섞여있고 언어도 다르게 쓰는 곳에 와 보니 여러 가지 일들이 생겼다. 그러다 보니 '무슨 공동체가 이래' 라고 생각하면서 회의가 들기도 했다.

사실 싸울 때도 있다. 그런데 이런 생활이 10년이 되니까, 공동체 안에서 부딪히는 일이 있어도 돌아서면 형제 같고 자매같다. 우리가 싸우는 건 견해의 차이이지 사람이 미워서 그러는 경우는 별로 없는 것 같다. 가치에 대한 공유가 확실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에 대한 믿음이 생긴 것 같다. 다들 부족하지만 같은 꿈을 가지고 와서 부족한 것들을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서로에게 위안이 되는 것 같다. 그런 걸 깨달으면서 '내가 공동체에 살고 있구나', '같은 꿈을 꾸면서 인류 화합이라는 굉장히 큰 꿈을 꾸고 있구나', '부족하나마 하나가 되어 같이 살 수 있다는 게 행복하다' 이런 생각을 한다.

김민웅 : 한국 사회를 요즘 '헬조선'이라고들 한다. 아까도 말했지만 여기가 사실 원조 오로빌, 아사달이었는데, 이야기를 듣다 보니 비무장지대를 무슨 국제 평화공원 정도가 아니라 오로빌 같은 지구적 공동체의 현장으로 자치권을 주었으면 싶다. 그곳을 인류의 미래를 위한 현장으로 가동할 수 있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해진다. 아사달 프로젝트와 오로빌 프로젝트, 형제 공동체로 말이다.

허혜정 : (웃음) 그럴 날이 언젠가 꼭 왔으면 싶다.

김민웅 : 오로빌 프로젝트가 현실적인 성과를 거둘 수 있기를 바란다. 응원하겠다. 우리에게도 오늘의 이야기가 대안 공동체 논의에 크게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긴 시간 고맙다.

오로빌 공동체에 대한 소개는 www.auroville.org를 통해 보다 자세히 알아볼 수 있다.

서어리 기자 (naeori@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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