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0/22

사라지는 지식인 - 공적 가치의 쇠퇴와 대학의 위기

사라지는 지식인 - 공적 가치의 쇠퇴와 대학의 위기


헨리 지루


  신자유주의의 도래와 함께 우리는 많은 나라에서 '경제적 다원주의 정치'라고 부를 수 있는 현상이 나타나고, 광범위하게 채택되는 것을 보아왔다. 경제적 다원주의는 사회적 책임이나 사회적 비용이라는 담론에서 경제와 시장을 제외시킨다. 그 결과는 우리 주위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생태적 파괴와 광범한 경제적 빈곤화에서부터, 인종과 계급 때문에 변두리로 밀려난 사람들이 체포·투옥되는 비율이 갈수록 증가하고 있는 현상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지금 경제는 정치를 지배하고 있다. 시민은 소비자가 되고, 동정심은 경멸의 대상이 되었다. 광적인 개인주의와 가혹한 경쟁의 언어가 시장가치와 결부돼 있지 않은 모든 공공성과 연대의 관념을 해체하고 있다. 공공성에 대한 고려가 도덕적으로 공허한 사적 비전과 편협한 이기심의 늪으로 추락하면서,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 사이를 연결하는 교량이 붕괴되고 있다. 그 결과 개인적 고통이 보다 넓은 공적 문제와 어떻게 연관되는지 이해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지고 있다.
  이제 장기적인 투자는 단기적인 이윤으로 대체도고, 동정심과 타자에 대한 관심은 약점으로 간주되고 있다. 공적 관점이 망가짐에 따라 공공선이라는 개념은 뿌리가 뽑혔다. 민주적 공공가치는 그것이 시장 노리를 공공선에 종속시킨다는 이유로 경멸당하고 있다. 여기서 도덕은 간단히 해체돼버린다. 왜냐하면 인간이 서로서로에 대한 여하한 의무감도 느끼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민영화, 규제완화, 상품화 따위의 언어가 공공선이라는 담론을 대체함에 따라 공립학교, 도서관, 교통체계, 핵심적 인프라, 공공서비스 등 모든 공적인 것은 시장을 왜곡시키는 요소 혹은 병리현상으로 간주된다. 부패를 조장하는 금력과 집중화된 권력은 방위산업이라는 광정 폭력을 떠받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주권 개념을 변질시키고 있다. 이제 주권은 부유층과 대기업 그리고 방위산업을 보호하는 정책과 동일한 것이 되었다. 토마스 프랭크의 다음과 같은 주장은 정곡을 찌르고 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소수에게 집중된 금권은 전문직과 소규모 투자자들을 파괴하고, 국가의 규제기능을 무력화시키며, 입법자들의 집단적 부패를 초래하고, 반복적인 경제위기를 가져왔다. 이제 그것은 우리의 민주주의 자체를 노리고 있다."
  개인적 성공은 최고의 사회적 성취로 간주되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혁신을 추동하고 일자리를 창출하는 것으로 믿어지기 때문이다. 동시에, 소득이나 부의 격차는 적자생존 윤리를 정당화해주는 현상으로 오히려 칭송되고 있다. 사회국가에 의해 한때 보호를 받았던 취약계층은 이제는 골칫거리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소비자로서 결격자(缺格者)이거나, 백인 프로테스탄트 중심 미국을 고집하는 우익 기독교도의 시각에 위협이 되기 때문이다. 노인, 젊은이, 실업자, 이민자, 가난한 백인과 유색인종들은 일종의 인간쓰레기일 뿐이다. 따라서 그들은 미국 민주주의가 제공하는 권리, 혜택, 보호를 나누어 가질 자격이 없는, 일회용 소모품으로 취급된다. 이 새로운 차별정치와 문화적 잔인성은 경제 위기 이상의 것을 표상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것은 교육, 행동주체, 사회적 책임감에 관련된 뿌리 깊은 위기를 나타낸다.
  C. 라이트 밀스를 인용한다면,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지금 목격하고 있는 것은 민주주의의 붕괴, 비판적 지식인의 소멸 그리고 "비판적 주체와 사회적 상상력을 공급하는 공적 영역의 붕괴"이다. 1970년대 이래 시장근본주의 세력은 교육으로부터 공적 가치, 비판적 내용, 공민적 책임의식을 박탈해왔다. 이것은 소비주의, 리스크가 없는 관계 그리고 사회국가의 파괴와 결합된 새로운 주체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큰 목표의 일환이었다. 지금 많은 고등교육기관은 도구적인 목적과 계량적인 패러다임에 속박되어 거의 전적으로 경제적 목표에 매달려 있다. 그리하여 학생들은 단지 예비 노동력으로 취급받고 있을 뿐이다. 대학은 민주적 소명으로부터 일탈했을 뿐만 아니라 고실업이나 파멸적인 부채 등 닥쳐올 거친 새로운 미래에 직면해야 할 학생들의 곤경에 둔감한 것으로 보인다. 지식을 갖춘 능동적인 시민이 되기 위해서 학생들에게 어떤 교육이 필요한지에 대한 질문은 거의 제기되지 않는다.
  고등교육이나 보다 넓은 문화적 장치들에 의한 일반적 교육공간 전체에 걸쳐 지금 우리는 교육, 자유, 주체, 책임에 관련하여 하나의 강력하고 무자비한 시장주의 관념이 등장·지배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있다. 이러한 교육은 민주주의에 불가결한 '조직화된 책임감'을 배양할 수 없다. 그것은 오히려 조직화된 무책임을 조장한다.
  자유시장 근본주의를 추동하고 있는 반민주적 가치는 지금 세계 전역에 걸쳐 다양한 수준의 고등교육 정책 속에 구현되고 있다. 그러한 정책은 이제 낯익은 것이 되고, 갈수록 당연시되고 있다. 특히 미국에서 그러하지만 캐나다도 점점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 공립교육과 고등교육을 신자유주의 노선으로 재편하는 것은 기업 중심 이데올로기이다. 이 이데올로기에 의해 커리큘럼의 표준화, 하향식 지배구조가 이루어지고, 기업가치 제고를 위한 강좌가 개설되며, 모든 교육이 직업훈련 장소로 바뀌고 있다. 예를 들어, 하이테크 회사를 설립하는 학생들에게 석사학위를 수여하는 대학이 있는가 하면, 전문직 경력자가 인문학 분야 고급 세미나를 지도하도록 허용하는 대학도 있다. 이런 수업에서 학생들은 '자신의 브랜드가치를 드러내는 30초짜리 상업광고'를 제작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이 신자유주의적 고등교육관에서 핵심적인 것은 시장주의 패러다임이다. 그 결과 종신교수직이 없어지고, 인문학이 취직준비용 서비스로 전환되며, 대부분의 교수가 파트타임 임시 노동자의 지위로 격하된다. 이 노예적인 교수신분은 몇몇 대학들이 교수 채용업무를 '임시적 고용 대행기관'에 맡기는 데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교수직은 그저 또하나의 값싼 노동예비군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리하여 대학은 학술노동자들의 욕구와 권리 그리고 학생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교육의 질은 도외시하면서 오로지 재정적 이익을 올리기 위해서 무력한 교수들을 착취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이다.
  고등교육을 이런 식으로 바라보는 시각 속에는 교수와 행정가들의 협치(協治)라는 개념도 없고, 잠재적인 월마트 피고용인이 아니라 비판적 시민으로서 학생들을 교육해야 한다는 생각도 없다. 교수들은 일정한 자율성과 힘을 보유한 학자나 공적 지식으로 보려는 노력도 없다. 그 대신 교수들은 점차 지식인이라기보다는 기술자나 보조금을 받는 작가로 규정된다. 이처럼 열화(劣化)된 교육 속에서 학생들의 처지도 나을 게 조금도 없다. 그들은 소비자로 취급되거나 혹은 자극적인 오락이 필요한 불안정한 아이들로 취급된다.
  고등교육의 정당성은 그것이 민주주의체제 유지에 필요한 주체를 길러내는 근원적인 공간이라는 점에 있다. 하지만 지금 대학은 그런 공간이 되고자 하는 노력을 보여주지 않는다. 실제로, 지금 대학의 민주주의에 대한 헌신은 괴멸상태이다. 그러한 헌신의 노력은 핵심적 중요성을 갖는 교육적 투자라기보다는 지식과 교육의 물질적·인적 자본의 생산에 연결시키는 데에 방해가 되는 것으로 간주된다.

  고등교육과 정당성의 위기

  미국에 있어서 고등교육의 문제는 대부분 재원 부족, 시장메커니즘의 지배, 영리 추구 대학의 부상, 안보국가의 침투, 교수 자치의 결여와 연결된다. 이 모든 것은 고등교육이라는 문화와 민주적 가치에 배치될 뿐만 아니라 민주적 공공영역으로서의 대학의 의미와 소명을 비웃는다. 고등교육에 대한 지원감소는 부유층을 위한 세제 혜택, 거대은행, 국방예산, 대기업에 대한 지원 증가와 극명하게 대조된다. 학생들의 도덕적 상상력과 비판적 능력을 키우기보다는 예비 헤지펀드 매니저를 기르면서 정치의식이 없는 학생들을 만들어내는 대학들이 너무나 많다. 그리하여 대학들은 ‘기술적으로 훈련된 유순함’을 장려하는 고육방식을 고안해내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대학총장은 지금 CEO(최고경영자)라고 불린다. 그들은 월스트리트나 기업 펀드매니저의 언어를 사용하면서, 사과하지도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기업과 학교 이사회 사이를 오가고 있다. 벤처기업가들은 특허계약, 지적재산권 관리, 대학 산하(傘下) 사업체에 대한 투자를 통해 큰돈을 벌기 위해서 부지런히 대학을 이용한다. 이 새로운 황금만능주의 시대에 학문의 가치는 거의 전적으로 시장에서의 교환가치에 의해 결정된다. 이 상황은 최근의 한 사례에서 확인되듯이 악화일로에 있다. 금융지주회사 BB&T코퍼레이션은 에인 랜드의 소설 ≪움츠린 아틀라스≫(자유방임경제와 이기적 이윤추구 논리를 극단적으로 합리화하는 유명한 소설 - 역주)를 정규과정에서 가르친다는 조건으로 마셜대학 경영대학원에 100만 달러를 기부했다. 돈을 주는 기업이나 부유한 후원자의 뜻에 따라 무엇을 가르치고 교과과정을 어떻게 구성할지를 정할 때, 대학의 진실성은 어떻게 되는 걸일까? 어떤 기업과 대학들은 이제 무엇을 가르칠 것인지는 학문적 결정 사항이 아니라 시장논리에 의거한 고려 사항이라고 믿고 있다.
  신자유주의는 공민교육과 공적 가치를 훼손시키고 교육과 훈련을 혼동할 뿐만 아니라, 학교를 쇼핑몰로, 학생을 소비자로 보는 논리를 강화하여 지식을 하나의 상품으로 취급한다. 상황은 악화일로이다. 스탠리 아러노위츠가 지적하듯이, 공원이나 해변에서부터 고속도로에 이르기까지 모든 공공재에 대해 사용자들이 값을 지불해야 된다는 신자유주의적 논리는 극단적으로 교육에 영향을 미쳤다. 그리하여 갈수록 많은 학생들이 치솟는 등록금으로 인해 대학을 포기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수많은 학생들이 지금 빚에 얽매여 있는데, 이것은 장래에 그들의 삶을 파산시킬 것이다.
  불행하게도, 고등교육에 대한 투자 감퇴가 어느 정도인가는 캘리포니아를 비롯한 많은 주(州)에서 고등교육보다 감옥에 더 많은 돈을 쓰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저소득 소수집단들을 위한 교육은 징벌국가의 대두와 더불어 법과 질서를 강조하는 보수세력, 민간 감옥회사 그리고 간수(看守)노조로 이루어진 비신성동맹(非神聖同盟)에 의해 훼손되어 왔다. 이들은 가급적 많은 사람들, 특히 가난한 소수집단 젊은이들을 교육시키기보다는 감옥에 넣어두어야 더 큰 이득을 취할 수 있는 것이다. 미국(정도는 덜하지만 캐나다도)이 민주주의의 토대를 이루는 기관에 대해서는 투자를 줄이면서 감옥산업을 늘리고 국가의 징벌 및 감시 기능을 강화하는 데 투자를 늘려온 것은 우연이 아니다.
  교육보다는 처벌을 중시하는 데 따른 사회적 비용은 최근의 한 연구가 보여주는 충격적인 통계에 명확히 드러난다. “23세에 이를 무렵이면, 미국인 전체 중 거의 3분의 1, 즉 30.2%가 범죄 혐의로 체포당한 경험을 갖고 있다. … 이것은 일상생활에서 형사사법제도에 대한 노출이 갈수록 커져가고 있음을 가리키고 있다.”(<뉴욕타임즈>, 2011년 12월 19일)
  어떻게 하면 학생들이 예민한 예언자적 정의감을 가지고, 비판적인 분석기술을 활용하고, 타자의 권리를 존중하는 윤리적 감성을 계발하도록 할 것인가라는 질문은 시장논리에 지배된 대학에서 갈수록 무의미한 것으로 되고 있다. 인문학과 자유교양 과목이 축소되고, 민영화·상업화가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고등교육은 학생들에게 지적·공민적·도덕적 발판을 제공하지 못하면서도 젊은이들의 미래를 위해 투자하고 있다고 주장하지 않을 수 없는 역설적 처지에 놓여있다.
  기업화된 대학의 타산적 논리는 생명력 있는 민주주의와 주체적 사회 참여의 지속에 필요한 도덕적·정치적 비전과 실천을 감퇴시키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이의 제기나 비판적 대화, 사회적 책임감과 정의감은 학생들이 나라와 지구가 직면한 문제에 대처하기 위한 지식과 기술을 연마하는 데 불가결한 자질들이지만, 오늘의 대학은 이러한 자질이 존중받는 공적 공간의 학대를 막고 있다. 민주적 공적 공간은 지금 어느 때보다도 중요하다. 왜냐하면 지금은 “기성의 제도들을 근본적으로 의심할 수 있는 비판적 사상가들”을 육성하기 위한 공간이, 강력한 경제적·정치적 기득권층에 의해 억눌려 있기 때문이다.
  진리가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든, 고등교육은 진리를 탐구해야 할 책임이 있다. 그리고 학생들은 교육을 통해서 권력이란 마땅히 정치적으로, 도덕적으로 책임을 지는 것과 동시에 ‘공적 문화의 이상과 희망’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을 배워야 한다. 대학이 사적 이익보다 공적 이익을 위해 봉사해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은 이제 과거에 그랬던 것만큼의 무게를 지니지 못한다. 하지만 그 질문은 고등교육의 목적을 말할 때, 그리고 민주적 가치의 옹호자로서 대학이 공적 생활에 참여한다는 게 무슨 뜻인지를 생각할 때, 여전히 매우 중요하다.
  주목해야 할 것은, 오늘날 고등교육은 공적 가치와 비판적 희망, 그리고  실질적 민주주의를 배양하는 교육적 가능성이 남아있는 매우 드문 공적 영역의 하나라는 점이다. 일상생활이 갈수록 시장원리를 중심으로 조직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시장 주도 사회와 민주주의를 혼동하는 것은 고등교육의 전통을 무의미하게 만든다. 고등교육의 가장 깊은 뿌리는 도덕적인 것이지 상업적인 게 아니다. 이 성찰은 오늘의 상황에서 특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지금은 자유로운 사상의 교환이 점차로 주류 미디어에 의해 밀려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비판적 아이디어들은, 설령 반동적이라는 이유로 배척당하지 않는다 해도, 대개는 진부한 것으로 간주되어 무시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명망가 중심 문화 및 문화의 상업화는 심각한 대중적 문맹화를 초래한다. 그리고 이 현상은 교육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문화제도 전반에 걸쳐 확산되고 있다. 그러나 대중적 문맹화는 사람들의 정치의식을 마비시키는 것에만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EH한 반대의견을 억누르는 세력에 협력하게 된다. 그리하여 이의를 제기하며 “공적 문화의 이상과 희망을 살리고자 하는” 지식인들은 흔히 불필요한 존재, 극단주의자 혹은 비(非)미국적 인물로 취급·무시당한다. 더욱이 지금은 반(反)공적 지식인들이 문화적 풍경을 지배하고 있다. 이들은 모두 반대자들에게 모욕적인 언사를 퍼붓고, 거기에 대한 보답을 획득하는 데 기꺼이 나선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강력한 경제력을 보유한 기득권층의 하인으로 전락하고 있다. 다른 한편, 살아있는 비판적 민주주의가 번성할 수 있는 문화적 토양을 기르는 고등교육의 역할을 옹호하기 위해서 기꺼이 나서는 대학인들은 너무나 적다.
  이 문제는 고등교육의 목적과 의미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로서는 간과해서는 안될 정치적·교육적 현안이다. 민주주의는 시민들에게 공민적 의무를 이행할 것을 요구한다. 여기에는 의미 있는 공민적 가치, 자치활동에의 참여, 민주적 리더십을 뒷받침하는 넓은 토대의 비판적 교육의 필요성이 포함된다. 오직 그러한 교육문화를 통해서만 학생들은 단순한 방관자가 아닌 개인적·사회적 주체가 되는 방법을 배울 수 있다.

  불가능한 것을 꿈꾸기

  민주적 공적 공간으로서의 고등교육을 재생시키자면 무엇보다 시장근본주의자, 종교적 극단주의자, 완고한 이데올로그들에게 맞서야 한다. 이들은 비판적 사유와 건강한 회의주의에 대해 깊은 경멸감을 품고 있으며, 학생들이 글과 세상을 비판적으로 읽도록 가르치는 교육을 불쾌하게 생각하는 자들이다. 비판적 상상력은 권력자들에게는 위험스러운 위협이다. 노골적인 예는 최근에 전 상원의원 릭 센토럼에 의해서 표명되었다. 그는 공화당에는 지식인이 필요없다고 말한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교육이란 노동과 경제문제뿐만 아니라 정의, 사회적 자유, 민주적 주체와 실천 및 변화의 역량 그리고 권력, 포용, 시민권에 관계된 문제들을 포괄한다. 이들은 교육적이며 정치적인 문제들이다. 그리고 이들 문제는 사회적 정의와 민주주의를 위한 전 지구적 투쟁에 힘을 불어넣는 광범한 노력의 일환으로 다뤄져야 한다.
  고등교육이 비판적 사유, 집단적 작업, 공적 서비스를 함양하는 장소가 되려면 교육자들과 학생들은 현재의 대학에서 중시되는 지식, 기술, 연구, 지적 관습을 재검토해야 할 것이다. 그러한 검토작업에서 핵심적인 것은, 지적 실천을 “도덕성, 엄격함, 책임감으로 구성된 정교한 그물망의 일부분”으로서 자리매김하는 일이다. 그렇게 해야 학자들은 확신을 가지고 발언하고, 중요한 사회문제에 대응하고, 고등교육과 보다 넓은 사회 사이를 연결시켜주는 대안적 모델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관건은 ‘연결’ 혹은 ‘관계’를 맺어주는 실천이다. 경쟁적 관계가 아니라 동지적 관계에 토대를 둔 지적 실천을 발전시키고, 대학의 도구화와 특권적 고립화를 거부하고, 비판적인 사유와 현상(現狀) 거부를 연결시키며, 인간의 주체성을 사회적 책임과 가능성의 정치라는 개념과 결부시켜야 한다.
  대학은 갈수록 공포의 문화에 지배되고 있다. 이의 제기는 배신 혹은 반역 행위와 동일시되고 있고, 객관성·중립성을 지킨다는 것은 흔히 조지 오웰이 말한 공식적 진실 혹은 기성체제의 입장을 반영하고 있다. 민주적 정치라는 초점을 결여한 교원들은 대개 형식적 절차에 매달린 기술자나 기능인으로 지낼 뿐이다. 이들은 보다 넓은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긴급한 문제들이나 자신들의 교육적 실천과 연구행위가 낳는 결과에 대해서 무관심하다. 정치적 중립성이라는 기만적인 개념에 충실한 이런 모델과는 정반대로, 나는 대학은 비판적인 교육자와 능동적인 시민을 상호 의존적인 관계로 결합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다.
  이를 위해서는 교실에서의 수업이 보다 큰 사회에서의 권력행사와 무관한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대학은 학생들이 비판적 주체가 되어 권력자들에게 스스로의 행동에 책임을 지도록 요구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출 조건을 제공해야 한다. 학생들은 그저 일자리를 얻기 위한 훈련만을 받아서는 안된다. 그들은 자신의 삶과 타자와의 관계 그리고 보다 넓은 세상과의 수많은 관계들을 규정하는 제도, 정책, 가치들을 비판적으로 묻도록 교육을 받지 않으면 안된다.
  유토피아적 기획으로서의 교육은 단순히 비판적 의식을 조장하는 것만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개인적인 것이든, 정치적인 것이든, 혹은 세계적인 것이든, 책임질 문제에 대해서 책임을 지도록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이다. 학생들은 불필요한 고통을 가중시키는 이데올로기적·구조적 힘들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문제해결을 위해서는 단지 문제를 인식하는 것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지그문트 바우만이 말하는 “우리의 책임에 대해 책임을 지는” 지적 실천 - 타자의 고통과 욕구에 주의를 기울이는 행동이다.
  교육은 자크 데리다가 말하는 ‘다가올 민주주의’와 떼어놓을 수 없다. ‘다가올 민주주의’란 언제나 “비판을 받을 가능성에 대하여, 그리고 스스로를 비판하고 끊임없이 자신을 향상시킬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하여 열려 있는 민주주의이다. 이러한 가능성과 불가능성의 기획 속에서 교육은 밝은 지식 기반 위에서 행해지는 정치적·도덕적인 실천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올바른 교육은 교조적이거나 도구화된 교육이어서는 안된다. 뿐만 아니라 비판적 교육논리가 모든 수준의 학교교육에서 작동해야 한다. 이 비판적 교육학은 또한 대학을 마치고 학교와 교회, 시너고그, 혹은 일터로 돌아갈 학생들 때문에 활력을 얻는다. 그들은 장차 대학을 떠나서 자신의 일상생활 속에서 새로운 아이디어와 개념을 생산하고, 남녀노소가 함께 살아 있는 세계에 대한 비판적인 이해방식을 발전시킬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지적 실천과 책임은 지나치게 실용적이며 섬처럼 고립되어 특권을 누리는 대학상(大學像)을 거부한다. 또한 중요한 것은 학습에 대한 보다 폭넓은 비전이다. 그리하여 지식은 자신을 발견하고 설명하는 능력과 민주적 자유의 범위를 확대하고, 교육·정치·사회적 위기에 대응할 수 있는 학생들의 능력에 연결돼야 한다.
  비판적 교육, 대화, 사유가 실질적 효과를 가지려면, 모든 시민은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를 만들어가는 데 동등한 자격 - 동등한 능력은 아닐지라도 - 이 있다는 메시지가 제창돼야 한다. 캐나다의 퀘백과 ‘월스트리트 점령운동’에서 등록금 인상과 시민적 자유 및 복지서비스의 후퇴에 대항하여 싸우는 용감한 학생들에게서 우리가 듣는 게 바로 이 메시지이다. 만일 교육자들이 공적 지식인이 되고자 한다면, 세계 전역에서 투쟁하는 젊은이들에게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들은 지금 지식과 권력의 관계는 해방적이어야 하고, 그들의 역사와 경험이 중요하며, 특권을 해체하고 인간관계를 생산적으로 재구축하고, 세상을 변혁시키고자 하는 투쟁에서 그들 자신의 말과 행동이 중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간단히 말하면, 교육자들은 대학과 일상생활 사이의 간격을 좁히는 교육이론을 천명해야 한다. 커리큘럼은 지역사회와 문화 및 전통에 대한 지식을 중심으로 조직되어 학생들에게 역사, 아이덴티티, 장소, 가능성에 대한 감각을 부여해야 한다. 더 중요한 것은, 대학 안팎에서의 사회운동 형성에 직접 연관되는 새롭고 급진적인 교육을 통해서 학생들과 함께 자유의 실천에 참여하는 일이다.
  아직 노엄 촘스키, 안젤라 데이비스, 스탠리 아러노위츠, 슬라보예 지젝, 러셀 자비코, 코넬 웨스트 등 공적 지식인이 상당히 있지만, 이들은 흔히 주류 미디어에서 배제되어 있다. 혹은 주변적 인물, 심지어는 체제 파괴적인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동시에 많은 대학인들은 끔찍한 노동조건 밑에서 혹사당하고 있다. 그들은 대중을 위한 글쓰기를 할 시간적 여유가 없다. 거의 노예처럼 취급당하는 시간강사들뿐만 아니라 점차로 전임교원들도 마찬가지이다. 이 상황에서 이들은 학문적 능력을 평가하는 공식 기준을 맞추기 위해서 극소수밖에 이해하지 못하는 고도로 전문화된 직업적 언어의 세계로 갇혀버린다.
  이러한 지식인은 흔히 일반 대중과 중요한 사회적 이슈로부터 절연된 은둔처에서 서식하고 있다. 그들은 대학이 기업과 군사권력의 부속물로 변형되는 데에 적잖게 공모해왔다. 이런 학자들은 공공영역으로서의 고등교육을 옹호할 능력을 상실해왔고, 비판적 사유와 복잡한 아이디어 그리고 대중을 위한 진지한 글쓰기를 불가능하게 하고, 그 결과 대중적 문맹화를 초래하는 방화벽 - 전문용어 과잉- 을 제거하려는 의지가 있다.
  때이른 나이에 죽은 에드워드 사이드는 모범적인 공적 지식인이었다. 죽음에 앞서서 그는 대학의 동료들에게 현대사회를 더럽히고, 민주주의에 심각한 위협을 제기하는 사회적 어려움들을 직시할 것을 촉구했다. 그는 그들이 공적 지식인이 되어 인간의 고통에 대해서 깨어있는 의식으로 책임을 다할 것을 촉구했다. 그리고 학생들을 자율적이고 자기성찰적이며 사회적으로 책임감 있는 인간으로 교육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해낼 것을 원했다. 사이드는 시장논리에 지배되는 교육개념을 거부했다. 그것은 유쾌한 로봇을 만들어내고, 조직화된 무사려(無思慮)와 불법적인 합법성을 옹호하는 논리일 뿐이다. 그러한 교육에 반대하여, 사이드는 ‘깨어 있음의 교육학’과 비판적 참여정치를 제창했다.
  나는 사이드의 ‘깨어있음의 교육학’과 그것이 공적 지식인으로서의 대학인에 대한 그의 견해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논함에 있어서 그가 쓴 글 한 대목을 먼저 인용하고 싶다. 이 대목은 내 생각에 사이드의 글 전체의 윤리적·정치적 힘을 이해하는 데 관건이 된다. 그의 회고록 ≪제자리를 벗어나서≫에 나오는 대목인데, 여기서 그의 어머니가 뉴욕의 한 병원에서 보낸 생애 마지막 몇 달간이 묘사되어 있다. 그의 어머니는 암으로 몸이 완전히 망가진 채 몹시 힘든 불면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 잊을 수 없는 아픈 경험을 회상하는 사이드의 마음은 현실과 반역, 개인적 고통과 현실참여, ‘견고한 자아’와 모순적이고 불안정한 아이덴티티 감각 사이를 오간다. 사이드는 다음과 같이 쓴다.

  “잠을 잘 수 있게 도와다오, 에드워드.” 한번은 어머니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애처로운 음성은 이것을 쓰고 있는 지금도 들린다. 그러나 그 때 암은 이미 어머니의 뇌까지 퍼져 있었다. 지난 6주간 그녀는 내내 잠만 잤다. 내 불면증은 어머니가 남겨준 마지막 유산인지도 모른다. 잠들기 위한 어머니의 몸부림의 대가로서 말이다. 내게 잠이란 가급적 빨리 해치워야 할 어떤 것이다. 나는 매우 늦은 시간이 돼서야 잠들 수 있지만, 그러고서도 실제로 새벽에 일어난다.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내게는 오래 잘 수 있는 비결이 없다.  그러나 어머니와 달리 나는 잠을 원치 않는 지점까지 와버렸다. 내게 잠은, 여하한 축소된 의식상태와 마찬가지로 죽음의 상태이다. … 불면은 내가 어떤 비용을 치르든 작고 싶은 바람직한 상태이다. 이른 아침에 전날 밤 동안의 몽롱한 반(半)의식상태를 즉각 떨쳐버리고, 몇 시간 전에 완전히 잃어버렸던 것을 다시 탈환하는 것만큼 내게 기분 좋은 일은 없다. 나는 이따금 나 자신이 여러 흐름들의 묶음인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나는 견고한 자아라는 것 -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 중요성을 부여하는 유일무이한 정체성 - 보다는 이게 좋다. 이 흐름들은 내 삶의 주제곡처럼 깨어있는 동안 계속 흐르지만, 그것들은 최고의 순간에도 어떠한 화해도, 조화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이탈’하고, 제자리를 벗어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그것들은 언제나 움직임, 시간, 장소 속에 있다. 그리고 온갖 종류의 기묘한 조합을 형성한 채, 반드시 전진하는 것도 아니고 때로는 상호 충돌하면서, 대위법적으로 그러나 중심주제도 없이 끊임없이 움직인다. 나는 이게 자유의 한 형태라고 생각하고 싶지만, 확신이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런 회의(懷疑) 또한 내가 각별히 아끼고 싶은 주제의 하나이다. 내 삶의 수많은 불협화음과 더불어, 나는 반드시 올바른 것은 아닌 상태, 제자리를 벗어난 상태를 선호하는 것을 배웠다.

  이처럼 깨어있고, 이탈된 채, 다양한 상황들 속에 몸을 맡기고 있다는 감각은 코스모폴리턴적이며 상상력이 풍부한 교육의 필요성을 강화한다. 윤리적·정치적 실천으로서의 깨어있는 공적 교육은 정치적이거나 사회적인 관심사, 역사와 인간고통, 사회적 정의와 유리된 교육형태를 거부한다. 사이드의 깨어있는 교육이라는 생각 속에는 “복합적인 아이디어들을 공적 공간으로 들어올리는 일”이 포함되어 있다. 즉, 대학 안팎에서 고통을 겪는 인간의 현실을 인지하고,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이론을 비평의 형태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논쟁을 두려워하지 않는 교육이고, 개인적 이슈보다 넓은 사회적 이슈 사이의 연관을 명확히 하는 것을 겁내지 않는 교육이다.
  사이드에게 깨어있음이란 공적 지식으로서의 대학인의 역할을 드러내는 중심적 비유가 되었다. 이 비유로써 그는 핵심적인 공공영역으로서의 대학을 옹호하고, 문화가 어떻게 권력을 전개하는가를 지켜보며, 인간의 상호의존성이라는 개념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그러면서 그는 늘 경계선상에서, 즉 한 발은 안쪽에 다른 발은 바깥쪽에 둔 채 망명객이자 동시에 내부자로서 살았다. 그런 그에게 집이란 언제나 집 없음의 형태를 취했다.
  망설임 없이 경계를 넘나드는 인간으로서 사이드는 참여적 지식인을 가리키는 중요한 비유로 ‘여행자’라는 개념을 사용했다. 스티븐 하우가 사이드를 언급하며 말하듯이, “그것(여행자)은 권력이 아니라 움직임에 의존하는 이미지이다. 그 이미지는 여러 다른 세계들로 용감하게 들어가며, 다른 언어들을 사용하고, ‘다양한 위장(僞裝), 가면, 레토릭을 이해하는’ 움직임을 가리키고 있다. 여행자는 새로운 리듬과 의식(儀式) 가운데 살기 위해서 판에 박은 관습을 유보해야 한다. … 여행자는 경계를 넘어가서 영토를 횡단하고, 항상 고정된 자리를 포기한다.” 사이드는 경계선에 선 지식인이자 여행자로서 언제나 ‘반드시 올바르지 않은 상태’를 체현했다. 그것은 모든 고정관념과 도그마를 비판하고, 세계 곳곳에서 인간이 겪는 고통의 현실에 직면하여 침묵을 거부한 그의 원칙에서 뚜렷이 드러난다.
  ‘깨어있음’이란 엄격한 지적·이론적 작업 없이 조잡한 선동을 하거나 누군가를 매도하는 - 오늘날 인기 스포츠가 돼 있는 - 행위를 거부하는 것이기도 하다. 오히려 그것은 엄격성과 명료함의 결합을 뜻하며, 동시에 시민적 용기와 정치적 참여를 뜻한다. 그리하여 비판적 독해력이라는 것이 그저 하나의 능력이 아니라 세계에의 개입 가능성을 열어주는 하나의 해석행위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경계인의 입장에서 세계의 복수성(複數性)을 해독하는 행위, 즉 저마다 다른 주체의 다양한 입장에서 읽고 쓰는 것을 배우는 교육인 것이다. 이러한 교육관은 한나 아렌트의 다음과 같은 말에 드러나 있는 인식에 빚지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즉, “정치적으로 보장된 공적 영역 없이는 자유가 모습을 드러낼 현실적 공간은 없다.”
  사이드, 촘스키, 부르디외, 안젤라 데이비스 그리고 그 밖의 지식인들에게 있어서, 공적 지식이란 권력을 불편하게 하고, 합의사항을 문제 삼고, 상식에 도전할 책임이 있는 인간을 뜻한다. 참여하는 공적 지식인이라는 개념 자체는 학자로서의 존재를 침해하는 개념도 아니고, 학자라는 존재에 낯선 개념도 아니다. 그것은 학자란 무엇인가를 정의(定義)할 때 중심적인 의미를 가진 개념이다. 사이드에 의하면, 대학인은 공적 공간으로 들어가 두려움 없이 입장을 취하고 논쟁을 유발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리하여 그들은 도덕적 증인이 되고, 정치적 의식을 제고시키며, 흔히 대중이 보지 못하는 권력이나 정치적 이슈들 간의 연관성을 밝혀 “공적 토의의 소음 속에 가려진 도덕적 질문들을 대중에게 상기시켜야” 하는 것이다.
  동시에 사이드는 ‘공평무사한 전문가’ 라는 새로운 교조주의(敎條主義) 속으로 물러난 학자들을 비판했다. 그는 그들이 “공공영역뿐만 아니라 동일한 전문용어를 구사하지 않는 다른 전문가들로부터도 절연되고” 있음을 지적했다. 이 현상을 그가 특히 우려한 것은, 복합적 언어와 비판적 사유에 대한 반민주적 세력들로부터의 공격이 온갖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는 오늘날의 상황 때문이다.
  민주적 공공영역으로서의 고등교육이라는 개념은 지난 30년간 빈사상태였다. 이 상황에서 교수들이 학생들을 비판적으로 사유하도록 가르칠 책임을 이행하고자 할 때는, 그들은 흔히 직업적 성실의무를 저버리고 교실을 정치투쟁의 장으로 만든다는 비난을 받거나 혹은 심지어 비애국자라는 낙인까지 찍힌다. 심한 경우에는 일자리를 잃어버릴 위험에 처하기도 한다. 특히 그들이 권력의 작동방식이나 사회적 부정의, 인간적 비참을 명확히 드러내고, 사회질서란 변경 가능한 것이라는 사실을 밝힐 때 그러하다. 교양교육이나 인문학이 자유의 실천을 학생들에게 가르치지 않는다면, 그것들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스스로에 대해서 묻기를 꺼리거나 물음을 던질 능력이 없는 사회, 시민보다 소비자를 더 중시하는 사회, 그리하여 기업의 이해관계라는 좁은 가치에 전적으로 매달린 사회일수록 비판적 사유와 대화의 공간으로서의 대학의 중요성은 그만큼 더 절실해진다.
  시장근본주의가 국가, 자본, 다국적기업의 동맹관계를 조장해왔다는 점증하는 대중적 인식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동맹이 고등교육기관과 주류 미디어 문화를 통해서 구축되고 강화돼왔다는 사실에 대해서 이해를 보여주는 사람은 별로 없다. 지난 30년간의 경제적 다원주의의 결과는 금융과 신용의 위기만이 아니다. 그것은 비판적 주체와 이성 그리고 의미 있는 반론을 지지하는 모든 사회적 기관들을 공격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온 세계가 겪고 있는 금융붕괴를 교육의 위기현상으로 보는 눈의 거의 없다. 실제로 그동안 공교육 및 고등교육은 민주적 가치를 파괴하는 전쟁에 동원돼왔다. 그러한 교육기관은 무자비한 자본주의 질서를 정당화하는 시장 중심적 신념, 사회관계, 정체성, 이해방식을 재생산하는 데에 지대한 - 뻔뻔스럽다고는 할 없을지라도 - 공헌을 해왔다. 윌리엄 블랙은 그러한 기관들을 ‘범죄 유발 환경’ 공급자라고 부르고 있다. 즉, 그것들은 속임수, 규제철폐, 그 밖의 시장 주도형 제도와 관습을 장려하고 정당화해온 기관이라는 것이다. 블랙에 의하면, 가장 극단적인 경우는 경영대학원에서 볼 수 있다. 그는 경영대학원을 ‘협잡꾼 양성 공장’이라고 부른다.
  현재의 금융붕괴 현상과 지난 수십 년 동안 시장 주도 사회에서 교육을 받아온 세대가 지금 행동에 나설 것을 호소하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괴리가 있는 것으로 보인가. 분명한 것은, 이 세대가 지금의 위기를 기업 및 전쟁국가의 하인으로 전락한 교육시스템과 관련해서 파악하지 못한다면 위기의 극복은 불가능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고등교육은 민주주의를 위한 가장 중요한 전투 현장의 하나이다. 그 곳은 보다 넓은 해방담론의 일환으로서 희망, 주체, 정치, 도덕적 책임을 결합시키는 비전과 교육적 실천으로부터 더 나은 미래에의 약속이 생겨나는 장소이다. 물론 학자들은 자신의 연구를 엄격한 학술적 방법이나 전 문화의 규율에 맞도록 해야 할 의무가 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민주주의를 지속시키는 데 핵심적인 주체들을 위하여 지식과 정열, 가치와 희망을 불어넣어주는 일이다. 민주주의는 하나의 생활양식이며, 인간을 성장·교육시키는 문화를 절대적으로 필요로 한다. 그렇다면 교육자들은 젊은이들이 비판적으로 사유하고, 판단력을 행사하며, 활기 있는 논쟁에 참가하여, ‘정치적 삶의 정수(精髓)’를 이루는 공적 공간을 창조하도록 하는 데 중심적 역할을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민주적 미래를 상상하는 게 더 어려워지긴 했지만, 지금 세계 전역에서 젊은이들이 신자유주의와 그 ‘쓰고 버리기 식’ 교육 및 정치에 항거하는 시대로 우리가 접어들었다는 사실이다. 젊은이들은 자신들의 미래를 결정하는 데에 무력한 존재로 남아있기를 거부하고 있다. 그들은 정치가 전쟁 수행의 도구로 사용되고, 시장이 민주주의의 척도가 되는 사회를 거부하고, 새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집단적인 조직화를 행하고 있다. 그들은 위대한 노예폐지론자였던 프레드릭 더글러스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더글러스는 행동하지 않는다면 자유란 공허한 개념일 뿐이라고, 그리하여 “투쟁이 없으면 진보가 없다”고 용기 있게 말했던 것이다.
  젊은이들의 투쟁은 단순히 상위 1%만이 아니라 99%까지 겨냥하고 있다. 그들은 대중들이 파편적인 현상들의 상호관계를 인식하고, 스스로를 교육하며, 민주주의 재생을 위한 사회운동으로 나아가도록 힘쓰고 있다. 다음과 같은 스탠리 아러노위츠의 말은 옳다. “이 체제가 지속되고 있는 것은 급진적 상상력의 쇠퇴, 일반대중 속에 뿌리를 둔 활기찬 정치적 반대세력의 부재 그리고 상아탑의 안락한 공간에 길들여진 지식인들의 순응주의 때문이다. 수십 년에 걸친 퇴각, 패배, 침묵이 하룻밤 새에 역전될 수 있으리라고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필요한 것은 자본주의 중심을 구성하는 기관, 작업장, 거리를 통한 ‘대장정(大長征)’이다.”
  지금 미국, 캐나다, 그리스, 스페인에서의 항의운동은, 이것이 오로지 단기적 개혁을 위한 기획이 아니고 그럴 수도 없다는 것을 명확히 하고 있다. 그것은 하나의 정치운동이며, 이 운동을 위해서는 공적 공간의 재생과 더불어 디지털기술의 진보적 활용, 공공영역의 확대, 새로운 교육의 창조, 민주적 표현과 정체성과 집단적 희망이 조성될 수 있는 장소의 확보 등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교회와 공교육 및 고등교육에서부터 지식과 욕망과 가치의 유통에 관여하는 모든 문화적 제도와 장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영역에 걸쳐, 민주적 인간 형성을 위한 문화가 교육적으로, 제도적으로 자리 잡아야 한다. 말할 것도 없이, 이러한 노력은 점진적인 자유주의적 개혁이 아니라 민주적 혁명을 필요로 한다. 그리하여 단순히 최저 임금과 일자리(특히 젊은이들을 위한), 권력의 민주화, 경제적 평등 그리고 군사조직과 거대은행에 대한 자금투입의 철회 등을 요구하는 것에 그쳐서는 안될 것이다. 그것은 또한 비판만이 아니라 실제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조직화를 통해서 희망을 진정한 가능성으로 만드는 사회운동이어야 한다. 지금은 실패할 여유가 없다. 만약 실패한다면 우리는 다시 권위주의의 손아귀 속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계급, 인종, 연령, 성적(性的) 지향 때문에 변두리로 밀려난 사람들의 절박한 현실을 고려할 때, 나는 다음과 같은 데리다의 도발적 발언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불가능한 것을 행하고 사유해야 한다. 만약 가능한 것만 일어난다면, 그 이상의 것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단지 내가 할 수 있는 일만 한다면,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과 다름없다. 한나 아렌트의, 말처럼, 우리는 지금 ‘암흑시대’에 살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역사는 열려 있고, 가능성의 공간은 눈에 보이는 것보다 더 넓다. (이승렬 옮김, 녹색평론(2013년 5-6월), pp.120~1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