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13

Philo Kalia “시무언 이용도 목사의 한국적 사랑의 예수 신비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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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o Kalia

세 번째 글이다. 두 쪽의 분량이어야 하는데 편집자에게 간곡히 양해를 구해 네 쪽의 글을 싣게 되었다. 이 글을 자르지 마시고 꼭 전부 실어 달라고..... 

"한국적 예수 사랑의 신비주의" 혹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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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신학의 별 ③
“시무언 이용도 목사의 한국적 사랑의 예수 신비주의”

이용도 목사(1901~1934)의 일기와 서간집은 심안(心眼)으로 읽어야 한다. 지(知)가 아니라 감(感)으로, 육안이 아니라 영안으로 읽어야 한다. 그러면 곧 그의 예수 체험과 예수 사랑에 감염되어 짧은 활동과 생애에 대한 안타까움과 동시에 외경과 감사가 퐁퐁퐁 솟아오를 것이다.
 
1. 예수

시무언 이용도는 ‘그리스도’라는 말을 여간해서 쓰지 않는다. 신앙의 초점은 ‘그리스도’라기보다는 ‘예수’다.
“예수다! 우리의 신앙의 초점은 예수다!
소망에도 예수요 인내에도 예수요
기도에도 예수요 찬송에도 예수다.
떠들어도 예수요 잠잠하여도 그저 예수뿐이다.
생시에도 예수! 꿈에도 예수! 그리고 잠꼬대에도 예수다!
먹어도 예수요 입어도 예수다!
그저 우리 생활의 중심 초점은 예수 뿐이다.
오~ 예수는 곧 우리 모든 것의 모든 것이요 또 우리의 생명이다.”(『서간집』, 118)

시무언은 왜 ‘그리스도’보다 ‘예수’를 불렀을까? ‘그리스도’는 예수에 대한 고백의 표현으로서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아들로서 교리화되고 추상화되어 인간이 감히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머리속에 교리와 신조만이 생명 없는 고목같이 앙상하게 뼈만 남았고, 저희들의 심령은 생명을 잃어 화석이 되었으니 저희 교리가 어찌 저희를 구원하며, 저희 몸이 교회를 출입한다고 하여 그 영이 어찌 무슨 힘과 기쁨을 얻을 수 있사오리까.”(『일기』, 1932. 12월 초)
1931년 3월 친애하는 자매에게 보낸 편지에서 시무언은 예수에게 미친 자매를 칭찬한다. “그대는 예수에게 미쳐 그를 웃고 그를 울며 그를 먹고 그를 마시며 마침내 현세의 사람이 아닐세라”(『서간집』, 40) 여기서 현세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현세의 삶을 부정하고 내세의 삶을 산다는 뜻이 아니라 육의 삶을 떠나 영적 삶을 산다는 것이다. 영만이 생명을 살리는 힘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 배울 바는 성경의 문자나 교리적 지식이 아니라 외적으로 보아 아주 단순한 “예수의 생활 그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삶의 내적 내용은 아주 깊고 높다. 그리스도인은 예수의 내적 움직임, 영의 약동과 접해야 한다. “그 영과 나의 영광의 접촉으로부터 일어나는 사랑의 전광”이 나의 생활 전체에 영향을 주어야 한다.(『서간집』, 112) 시무언은 당시 교회의 영향력 없이 요란하게 쏟아놓는 빈말에 대하여 탄식하며 자신의 태도를 말한다. “나는 말하지 않고 그냥 살렵니다. ... 진리는 말할 바 아니요 살 바 장소임을 나는 압니다. 종교는 설교에 있지 않고 삶에 있지 않습니까.”(『서간집』, 81)

2. 신비주의

“이렇게 주님은 나에게 끌리시고, 나는 주님에게 끌리어, 하나를 이루는 것이었습니다(一化). 나는 주님의 사랑에 삼키운 바 되고, 주는 나의 신앙에 삼키운 바 되어, 결국 나는 주의 사랑 안에 있고, 주는 나의 신앙 안에 있게 되는 것이다. 아! 오묘하도소이다. 합일의 원리여! 오! 나의 눈아, 주를 바라보자, 일심(一心)으로 주만 바라보자.”(『일기』, 1931. 1. 27)
“그리스도의 마음이 내 마음이 되고 그 신이 나의 신이 되는”『서간집』, 67) 주님과 나의 일화(一化)의 원리, 나와 주님의 합일의 원리가 곧 신비주의의 핵심이다. 그러나 이 합일은 나의 신앙과 주님의 사랑이 상응하고 관통하여, 너와 나의 마음이 일심이 되고 어머니가 어린아이를 품에 안듯 주님의 품에 안기는 합일의 원리이다. 이용도의 신비주의는 십자가 신비주의와 사랑의 신비주의이다. 그는 십자가의 아름다움에 매료된다. “예수의 모든 아름다운 성격은 그의 십자가에 모두 집중되었습니다. 그 피에 모였습니다. 그것을 바라볼 때 그 신의 성품을 바라볼 때에 우리는 내 죄를 깨닫습니다.”『일기』, 1929. 11. 10) 십자가 사랑은 가난한 사람들과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강한 자비, 그 표현인 눈물과 피(淚血)로 나타난다. 이용도의 신앙은 누혈(淚血)의 신앙이다. “눈물을 주소서. 피를 주소서”(『일기』, 1927. 12. 6) 다른 한편 이용도의 신비주의는 요한복음과 함께 아가서의 신랑과 신부의 사랑의 신비주의로 표현된다. “나는 주님의 신부요, 주는 나의 신랑이시다. 나는 나의 주님 외에 다른 사람이 있는 것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주의 말씀이 제일 좋고, 주의 얼굴이 가장 좋아요. ... 나는 주님의 품으로 들어가겠어요”(『일기』, 1930. 1. 19)
이용도의 신비주의는 자신이 지은 별명 “시무언(是無言)”속에서도 잘 나타난다. 시무언은 “말없이 옳다는 의미와 메시아 오시기를 기다려 일생을 성전에서 지내다가 마침내 만나 즐겨 하던 시므온을 그리워” 지었다고 설명한다.(『서간집』, 107) “예수는 신비적이요, 또 구체적이다.”(『일기』, 1929. 12. 3) 따라서 예수의 구원의 사랑을 표현하는 그의 문체 또한 문학적이며 시적이고 무엇보다 감각적이다. 이용도는 오감이 작용하는 귀, 눈, 입, 코, 손, 발이 다 주님의 것이 되길 원한다. “주의 눈이 나의 눈이요, 주의 귀가 나의 귀였느니라. 나의 눈은 내 자체에 있지 않고 주에게 있느니라. 그런고로 나는 주를 통해서만 보고, 주를 통하여서만 듣고, 주를 통하여서만 걷고, 동작하는 것이었습니다.”(『일기』, 1931. 1. 24). 성전의 시므온은 영적 오감, 특히 촉감을 통해 아기 예수를 성모로부터 자기 팔로 받아서 품에 안고 “내 눈이 주님의 구원을 보았습니다”하고 찬양한다. 신비주의란 얼마나 구체적이고 감각적인가! 영원한 생명 곧 하나님과 예수를 아는 것은 머리의 지(知)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감(感)하여 얻는 것이다. “感하여 知하는 일이 가장 만물을 잘 아는 법이다. ... 영계를 아는 일, 하나님을 아는 일, 이는 두뇌의 연구로서 하는 것이 아니라 靈의 感으로 하는 것이다.”『일기』, 1931. 2.
“주의 사랑의 손이 그대를 만지시나니
주의 사랑의 입술이 그대를 접문(接吻, 입맞춤) 하시나니
오 자매여 즐거워하고 기뻐하라”(『서간집』, 302)

3. 하늘 사랑

“그대는 주야로 염염사지(念念思之)하여 주님의 사랑을 찾고 찾으라! 그리하여 저 깊은 사랑의 내전에까지 찾아 들어가라. 그곳은 한번 들어간 자 나올래야 나올 수 없는 애(愛“)의 지성소니라. 거기서 그대는 주의 정체를 포옹하리라.” “오직 주님의 사랑! 자기가 버림을 당하며 자기편의 불리를 보면서도 그래도 긍휼히 여기며 사랑할 수 있는 그 천적애(天的愛) 그 무한애(無限愛) 그 성애(聖愛)에 목욕하여서만 가련한 인간의 심령은 생기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용도의 이 “순전한 사랑, 티도 없고 흠도 없는 예수의 완전한 사랑! 완전할 자! 하늘의 사랑!”(『서간집』, 158, 164, 167)은 가난과 폐병과 식민지 생활에서 어릴 적부터 익힌 몸•마음의 자기비움(케노시스)에서 터득한 체험이다. “나는 또한 극빈한 가정에서 태어나서 기한(飢寒)의 고(苦)도 맛보았고 이 시대를 만나 감옥살이도 하여 보는 동안에 갖은 고생을 맛보았습니다.”(『서간집』, 166) “오! 주여 나는 무(無)요 공(空)이로소이다.”(『일기』, 1932. 1. 25)
시무언은 1930년과 31년 새해에 “고(苦)는 나의 선생, 빈(貧)은 나의 애처, 비(卑)는 나의 궁전, 자연은 나의 애인의 집으로 하고 거기서 주님으로 더불어 살리로다”라는 삶의 좌우명을 세운다. 이용도의 예수 사랑은 예수를 태우고 예루살렘을 입성했던 작은 나귀 새끼가 되는 것이며(『서간집』, 40) 임자이신 예수께서 놀리는 대로 노는 연(紙鳶)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임자가 “오르게 하면 오르고, 내리게 하면 내리고, 좌로하면 좌로, 우로하면 우로, 퇴금 주는대로, 줄을 풀면 나가고, 감으면 오르고 하는 연이로소이다”(『일기』, 1931. 1. 24)라고 고백한다. 신앙이란 나의 생명이 예수의 생명으로 바꿈질이 일어나는 “생명의 역환(易換)”(『서간집』, 85)이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내가 남을 사랑한다는 의식조차 없이 사랑하라. 내가 선을 행한다 의를 행한다 하는 계획조차 없이 사랑“(『서간집』, 168)하는 것이다. 마치 봄이 오면 없는 듯이 묻힌 잡풀들이 대지를 뚫고 자연스럽게, 그러나 활기차게 일어나는 생명들처럼 말이다. ”오! 생명이여 생명이여! 없는 듯이 묻히어 있는 작은 생명들이여!“(『일기』, 1927. 3. 9)

4. K-기독교. K-신학

이용도는 하나님과 인간과 관계를 어머니와 자녀의 모습으로 자주 묘사한다. 그의 영성은 여성의 마음과 동양적 영성에 물들어 있다. ”주님의 사랑의 유방을 잡으라“『일기』, 1932. 4. 18) ”나의 오늘이 있음은 오로지 나의 어머니의 기도와 염덕(念德)에 인함이다.“(『일기』, 1930. 5. 17) 어린 시절 아버지의 폭력성에 반해 어머니의 신앙으로 자란 영향도 깊을 것이다. 그의 장년 주일 공과에는 여성들이 주인공이다. 또한 우주만유의 본성으로서의 “유한 골짜기 물”은 이용도의 마음 속에 내재한 동양적 영성의 반영이다.
이러한 한국적 영성의 깊음으로부터 이용도는 핍절한 조선교회의 영들이 되살아나길 간절히 기도한다. ”아 이 조선교회의 영들을 살펴주소서....“(『서간집』, 183) 일찍이 이용도는 새 시대의 존재론의 핵심을 파악하고 있었다. ”19세기는 존재의 범주를 성생(成生)의 범주로, 절대 개념을 상대의 개념으로, 부동의 개념을 동(動)의 개념으로 바꾼 시대다.“ 21세기의 한국 기독교도 잘 수용하지 못하는 범주들이다. 이용도는 1929년 성탄절을 앞두고 조선 땅에 오시는 주님을 간절히 사모한다. 그 주님은 지구 정복에 굶주린 구라파의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의 전쟁욕, 권세욕, 소유욕이라는 삼마녀(三魔女)에 쩌든 기독교가 아니다. 거기에는 아기 예수가 태어날 한 칸의 작은 초라한 집도 없다. ”저 구라파 천지에는 당신이 유하실 곳이라고는 일간두옥(一間斗屋)도 남지 않았습니다. 오시옵소서, 그리스도여 발길을 돌려 이리로 오시옵소서, 아세아에서 당신의 처소를 잡으십시오.“(『일기』, 1929. 12. 21) 선교 50년도 안 되는 시점에서 이용도는 어떻게 서양의 기독교와 동양의 기독교를 확연히 구분할 수 있었을까, 정말 놀랍다. ”서양의 기독교는 동적(動的), 동양의 기독교는 정적(靜的), 서양의 기독교는 물(物,) 현세적, 형식적, 동양의 기독교는 영적, 내세적, 신비적, 내적, ... 서양인은 공관복음적, 동양인은 요한복음적, ... 동양이란 요한 발견적인 것이다.“(『저술집』, 209)

마지막으로 이용도에게 신앙인의 삶이란 ”참된 예술에 사는 것“(『저술집』, 231)이다. 유동식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시무언 이용도는 예수 안에서 초월적인 하나님과 자신이 창조적으로 만나는 신앙의 예술가였다. 그곳에서 멋을 창조하고 멋을 살아갔다.“ 이용도의 문체는 문학적이고 시적이다. 그래서 감동을 준다. 그는 우리의 악기인 가야금을 사랑했다. 그는 많은 성극을 창작했으며 주일 학생을 위한 놀이의 대본도 창작했다. 신앙의 예술가 이용도에게는 인간만이 아니라 자연까지도 친구이다. “자연은 나의 친구, ... 하늘, 산, 흐르는 물, 공중의 별, 밤의 산과 들, 초목, 곤충, 새들 이는 다 자연에 속한 것으로 나의 친구가 되나니 나는 늘 이 친구를 보려 자연 속으로 들어 갑니다.”(『서간집』, 73)
“요란한 대로변 가시밭에 한송이 백합화, 고독한 야화”가 된 시무언 이용도 목사의 생애와 사상에 대한 글이 많지만 “한국적 사랑의 예수 신비주의”로 다시 떠올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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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덕수

아. 시무언 이용도 목사님 감동입니다. 이런 훌륭한 목사님이 계셨다니.. 자랑스럽습니다. 많이 배우고 따라야할 분이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