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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포럼(142)/존엄성의 가치를 노년 철학에 적용하기(하)
기자명 동양일보
입력 2021.04.11 20:39
수정 2022.03.08
원혜영 충북대 윤리교육학과 강사
[동양일보]오오하시 겐지는 노년철학을 특별한 관점으로 이야기해서 주의를 끄는데, 그것은 현대 일본사회가 가진 단점을 보완하려는 의지에 따른 것이다.
노년철학에 대해 말하는 그는 슈펭클러, 마키의 말을 인용하면서 자신이 가진 생각을 나타낸다.
“식물은 우주와 일체로서 자기의 신체의 연장이 우주 그 자체인 것에 반해, 동물은 우주를 자기의 몸속으로 받아들여 버린다는 점에서 소우주적 존재라고 말한다. 식물은 우주와 일심동체이지만, 동물은 우주에 대해서 자폐적이다.”
침묵의 자세 안쪽에 완만하게 생동하는 영혼을 숨기고, 항상 하늘을 우러러 대지에 서며, 우주의 생체리듬에 조용히 몸을 맡겨 살아가는 식물의 모습에 주목한다. 그것은 직립의 모습으로 우주와 맞아떨어진다. 뇌의 폭주를 허용하지 않는다.
우주와 일심동체의 관계 속에 삶을 영위하려는 동물과는 다른 하나의 생명이다. 이러한 생명의 본연의 자세는 늙은 인간에게 어울린다고 한다.(오하시 겐지 위의 책, 192)
그는 또한 구마자와 반잔(態沢蕃山)의 팬이다. “나이 들어 가르치라”라고 하는 구마자와 반잔의 말을 좋아한다. “나이 들면 조용히 지갑을 열고 사라지라”는 한국인들의 말과는 역설적으로 다르다.
구마자와 반잔은 각 세대에 맞는 삶의 방식으로 “어릴 때는 배우고 청년일 때는 행동하고 나이 들면 가르쳐라”(<集義和書> 제1권)를 강조한다. 나이 든 사람이 가르쳐야 할 것은 단순히 지식에 머무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조화의 필연으로 생을 얻는 존재로서 사람들과 함께 만물을 만들고 길러야 한다. 즉 <하늘>의 조화의 움직임에 동조하고, <대지>의 삶을 영위하며 지속적인 관계를 갖고, 더 좋은 미래와 새로운 세계를 창출할 책임이 있다.
나이 든 인간이 삶과 이야기로 보여주고 가르쳐야 한다.(위의 책, 196) 한국사회는 노인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는 입장보다는 다음 세대로 자리를 양보하는 것에 방점을 둔다. 한국에서 나이 든다는 것은 자신의 위치와 지위에 미련을 두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일본의 노인이 사회적인 참여에 활발하게 여지를 남겨 두는 것과는 다른 인식적 차이로 대비된다. 공동체에서 배제되는가, 아니면 그대로 일원이 되어 있는가의 차이가 있다.
한국과 일본 모두 근대 세계가 요구해 온 인간 모델은 “무엇을 이루었는가? 어느 정도 위대하며, 얼마나 벌었는가?”라는 행동 가치, 성과가치를 중시하는 ‘human doing’형이다.
이것은 세속적인 보람이나 평생 현역, 1억 총활약, 혹은 생산성 등을 강조하는 것이다. 정관(靜觀)이나 관조(觀照)의 깨달음과 관련된 명상 형태는 정반대로 주어진 생명 자체를 존중하는 존재가치인 ‘human being’형의 마음 사용법이다.
그저 멍하니 눈앞에 펼쳐진 자연을 바라보며, 나뭇잎이 흔드는 바람의 시원함을 느끼고 온종일 느긋하게 마음을 놀게 해주는 ‘생명’을 맛본다. 생명이 출현하는 이런 ‘무위의 시간’에 마음을 놀게 해주는 즐거움만큼 오늘날 일본 사회가 잃어버린 것은 없다.(위의 책, 200)
김양식의 <나이듦, 가슴 뛰는 내일>에서도 이점을 강조하고 있어서, 한일 양국이 명상 수련이 노년기에 필요하다는 관점에는 이견이 없다. 한국은 기(氣) 철학의 생사관을 가지고 있다면, 일본 고유의 생사관은 풍부한 자연환경이 낳은 자연과의 일체감과 현세 긍정적 낙천주의로 통하는 곳에는 그들만의 ‘즐거움’이 있다.
이 책에서 특별한 점은 인간, 여기서는 이목이 총명한 남자만 해당한다는 조건의 서술이 있었다. 하늘과 땅, 양극의 왕래는 진정한 여행자 또는 지덕이 뛰어난 남성을 조건으로 한다.
“움직이는 자의 몸은 가로, 뿌리내리는 자의 몸은 세로, 사람은 제대로 가로로 되어야 하며 그 반대가 세로이다”<皇極經世書>
새와 짐승 등 모든 동물의 몸은 타고난 가로 방향이다. 몸이 땅에 평행하므로 활동적인 동(動)이다. 초목 등 모든 식물의 몸은 타고 난 세로 방향이다. 몸은 땅에 수직으로 세우기 때문에 부동(不動)이다. 동물인 인간의 몸은 본래 수평이지만 식물처럼 수직이다.
인간은 만물 가운데 가장 존귀하다. 동(動, 가로)으로 부동(不動, 세로)을 겸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자연을 거스르는 인간 본성의 이기성과는 다른 관점이다.
프랑스 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인간의 이러한 강직한 수직 몸을 나쁜 것으로 생각한다. 이것이 인간 고유의 경직된 자아, 이기주의가 원인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이기주의가 순수 자연에서 분리된다. 그것은 지면에서 위쪽 수직으로 향한 인간의 신체가 높은 곳으로 향하는 방향을 정해졌기 때문이다” 높이로 향하는 방향은 착각이 아니라 존재론적인 생기(生起)이며, 지워 없앨 수 없는 증언이다. “나는 할 수 있다”라는 말은 이 높이에서 나오는 것이다.(<전체성과 무한>, 김도형, 문성원, 손영창 옮김, 그린비, 2018; 위의 책, 302-303)
하늘로 향하는 식물 축과 대지에 귀속하는 동물 축을 겸비한 양극적인 인간 신체가 천지를 왕래한다. 이런 견해로 인해서, 인간이라는 존재가 소우주를 대우주에 한없이 개방하는 거룩한 실천을 하는 존재로 귀결하고 있다.
오오하시 겐지가 논하는 이 지점은 훌륭하지만, 총명한 남성에 해당한다는 부분에서는 노년 철학이 늙어가는 남성에게만 특권적 의식을 주어서 국한된 것은 아닌지 의심이 된다. 또는 지덕이 뛰어난 남자만 거론하고 있어서, 인간의 범주에 다른 인종들(여자, 아이, 지덕이 없는 노인 등등)을 포함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런 불만족스러운 부분을 제외하고는 상당한 식견을 주고 있어 흥미로움을 떨어뜨리지는 않았다.
특히 노년의 시간은 속세에서 떨어져 나와서 나와 마음을 넓게 함으로써 자연을 무한히 받아들이는 ‘무위의 시간’에서 생기는 즐거움이라고 소개한다.
고대 유교의 천인합일 사상을 받들어 ‘천지 뜻에 순종하는’ 정관(靜觀)을 강조한다.
“한가함은 항상 즐거움이 많다. 바쁜 사람도 가끔 여유를 찾아 마음을 기르는 것이 좋다. 한가하고 조용한 마음이 아니면 재미를 얻기 어렵기 때문이라며(<낙훈> 上) 정관과 한가함에서 생기는 재미를 말한다.
그것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인 피타고라스, 아낙사고라스, 아리스토텔레스 등이 말한 관조(觀照)를 상기시킨다. 하늘의 관조야말로 인간 삶의 목적이라고 생각한 그들처럼, 자연의 모습과 변화가 눈 앞에 펼쳐진다. 생생히 약동하는 천지를 바라보는 것이 인생의 큰 즐거움이라고 본다.(위의 책, 198-199)
한국에서는 코로나로 인하여 노년기의 보내는 정관 및 관조의 즐거움을 젊은 층도 누리고 있다. 일명 ‘불멍’이라고 하여 불을 피워놓고 멍하니 바라보는 시간을 즐기거나, ‘물멍’이라고 하여 수족관에 물고기를 기르면서 ‘멍!’ 때리며 바라보는 시간을 즐긴다.
노년기의 생활인 한가롭고 조용한 마음을 젊은이들도 누린다. 코로나를 겪은 세대는 예전의 일상으로 돌아가기는 어렵다. 비대면의 생활에 익숙해지고, 느긋하고 평온한 삶에 관심을 더 기울인다.
노년기에만 즐길 수 있는 시간이 코로나로 인해 젊은 사람들의 시간에서도 경험할 수 있다. 이런 확대된 양상은 예측하지 못한 것들이다.
인생 100세 시대를 맞이하여 스웨덴학자 랄스 토르스탐(Lars Tornstam)이 제창한 “노년이 되면 인간은 자기중심적인 합리적 세계관, 즉 물질만능주의, 개인주의, 역할기대, 사회적 평가, 사회적 배려로부터 이탈한다. 물건이나 사회적인 것에 연연하지 않는 집착 초월과 자기중심성이 감소하는 자아 초월을 거쳐, 일원론적 세계를 벗어난다.
‘우주적 초월’로 이행하여 최종적으로 깊은 행복감을 맛본다고 한다. 일명 ‘노년적 초월’이라는 노인론이다. 이런 세계관은 동양권에서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도교의 생사일여(生死一如), 천인합일(天人合一), 천지만물일체설이 그것이다. 우주적 차원으로 향하면서 지상적인 자타 일체감에 심신을 맡겨 인식한다.(오하시 겐지, 위의 책, 196)
‘속세에서 떨어져 나와 오감을 작동하여 달맞이꽃을 음미하고 산수를 감상하고 바람을 노래로 읊는’(오오하시 겐지, 위의 책, 198) 여유로운 생활이 노년의 시기가 아니라, 지금 전 인류에게 요구되고 있다.
젊은 사람들은 코로나로 인하여 노년의 시기를 역지사지(易地思之)로 알게 되었다. 고립감, 소외, 거기에 관련된 인권 및 존엄성의 가치를 알아가는 노력을 하기도 전에, 노년기의 입장에 자연스럽게 젊은이들이 자리 잡아서 이해하게 되었다.
인류는 코로나의 불행한 시기에 많은 것들을 다시 생각해보고 얻어가는 경험을 하게 될 줄 알았을까? 그리고 노년기에 관련된 글을 쓴 양국의 한·일 학자들은 이렇게 젊은 세대들이 노년기에 접어들지 않아도 충분하게 ‘무위의 시간’을 경험하게 될 줄 알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