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0/13

알라딘: 역사 속의 성리학 Neo-Confucianism in History

알라딘: 역사 속의 성리학


역사 속의 성리학  성리총서 13
피터 K. 볼 (지은이),김영민 (옮긴이)예문서원2010-10-30

원제 : Neo-Confucianism in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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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양장본
488쪽
책소개
신유학은 곧 성리학이다. 한당유학의 실천성 상실을 반성하면서 개인의 도덕적 노력을 강조하는 유학. 다만 한국에서는 신유학이라는 용어가 현대의 초입에 제시된 일련의 유학 재해석의 흐름을 가리키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에 제목에서만큼은 성리학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다.

신유학을 일종의 정치이데올로기에 불과한 것으로 치부하던 초기의 경향과, 그에 대한 반동으로 나타난, 신유학이 가진 인문학적·철학적 함의를 밝히는 데 주목하는 경향, 그 둘 사이의 접점에 이 책이 있다. 신유학의 철학적 내용을 진지하게 검토한다는 점에서 신유학을 일종의 정치이데올로기로 치부하는 이들과 구별되고, 동시에 그 철학의 내용이 역사적 배경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본다는 점에서 신유학의 철학적 연구에만 집중하는 학자들과도 구별된다.


목차


서론: 역사 속의 신유학

제1장 11세기의 신세계: 750년도와 1050년도의 비교
1. 대외관계 / 2. 남과 북 / 3. 상업과 도시화 / 4. 사회적 변화

제2장 새로운 기초를 찾아서: 11세기
1. 사들의 생각, 그리고 과거시험 / 2. 당나라 고대모델의 해체 / 3. 신법: 체계의 법제화

제3장 신유학자들
1. 신유학자들과 유학자들 / 2. 내부적 역사를 외부적으로 읽기 / 3. 접근 방법과 질문 / 부록

제4장 정치
1. 전제의 문제 / 2. 제국의 수사학 / 3. 신유학과 정치 / 4. 신유학의 사명과 ‘사’ / 5. 후기제국국가와 신유학: 명대 초기의 중요성

제5장 학
1. 이론과 실천으로서의 신유학적 학 / 2. 천지, 문명, 그리고 인간의 조건 / 3. 해결책으로서의 ‘학’, 문제로서의 ‘학’ / 4. 명대에 일어난 강학의 부흥

제6장 믿음
1. 판단과 동기의 문제 / 2. 믿음으로서의 통일성

제7장 사회
1. 송원시기 사들의 학을 위해 선택지를 제공하다 / 2. 송원시기 가족에 대한 대안 / 3. ‘사’의 자발주의, 그리고 송원시대의 공동체 / 4. 자발주의에서 입법으로: 명나라의 건국 / 5. 대규모의 중흥과 자발주의의 복귀

결론: 중국의 역사와 신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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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추천한 다른 분들 :
중앙일보
- 중앙일보(조인스닷컴) 2010년 11월 13일자



저자 및 역자소개
피터 K. 볼 (지은이)

미국 하버드대학교 중국사상사 담당교수. 대표 저술인 This Culture of Ours: Intellectual Transitions in T'ang and Sung China가 『중국 지식인들과 정체성』이란 제목으로 국내에 번역 소개되어 있다.

최근작 : <역사 속의 성리학>

김영민 (옮긴이)
저자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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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것을 연구나 사유의 대상으로 삼아 오며 세상에 대한 관점을 촌철살인의 필력으로 풀어내 온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산문과 연구서를 통해 인생과 세상을 관조하고 사유하는 글을 써오며 탄탄한 독자층을 확보하고 있다. 2018년 한국인의 명절을 고찰하며 쓴 칼럼 ‘추석이란 무엇인가’는 소셜미디어를 통해 급속도로 퍼지며 ‘김영민’이라는 이름을 대중에게 각인시켰고 다양한 질문을 통해 본질에 닿으려는 시도를 해왔다. 첫 산문집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를 비롯, 《공부란 무엇인가》, 《인간으로 사는 일은 하나의 문제... 더보기

최근작 :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서울리뷰오브북스 9호>,<인생의 허무를 보다> … 총 25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단순한 신유학철학사 기술을 넘어선 또 하나의 시도, “역사 속의 성리학”
세계 혹은 역사와의 관련 속에서……

“이 책은 11세기에서 17세기에 걸친, 송?원?명 시기에 이루어진 신유학과 사회적·정치적 엘리트로서의 사士 계급과의 교섭, 신유학과 지방사회와의 교섭, 신유학과 제국 국가와의 교섭에 대한 해석적인, 때로는 논쟁적인 탐구이다.…… 나는 이미 많은 나라 언어로 서술된 바 있는 신유학철학사보다는 신유학자들과 세계와의 교섭에 대하여 탐구하고자 시도하였다.”
저자의 말이다. 저자는 이 책의 특징을 “신유학자들과 세계와의 교섭”을 탐구한 데 있다고 밝히고 있다. 신유학을 일종의 정치이데올로기에 불과한 것으로 치부하던, 신유학에 대한 현대적 연구가 시작된 초기의 경향과, 그에 대한 반동으로 나타난, 신유학이 가진 인문학적·철학적 함의를 밝히는 데 주목하는 경향, 그 둘 사이의 접점에 이 책이 있다. 신유학의 철학적 내용을 진지하게 .  검토한다는 점에서 신유학을 일종의 정치이데올로기로 치부하는 이들과 구별되고, 동시에 그 철학의 내용이 역사적 배경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본다는 점에서 신유학의 철학적 연구에만 집중하는 학자들과도 구별되는 것이다. 책의 제목이 담고 있는 ‘역사 속의’(in history)라는 표현은, 그간 신유학에 대한 연구가 탈역사적이었다는 비판을 함축하면서, 보다 나은 연구는 신유학이 처해 있던 역사적 맥락을 고려할 때 가능함을 암시하고 있다.

이 책에서 말하는 신유학은 곧 성리학이다. 한당유학의 실천성 상실을 반성하면서 개인의 도덕적 노력을 강조하는 유학. 다만 한국에서는 신유학이라는 용어가 현대의 초입에 제시된 일련의 유학 재해석의 흐름을 가리키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에 제목에서만큼은 성리학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다.
송대에 신유학이 일어나 낡은 유학을 일신시키고 불교와 도교를 압도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시대상의 변화에 힘입은 바 크다. 사士 계층의 약진, 중앙정부권력의 약화와 지방주의의 대두, 경제 패러다임 및 국제관계의 변화 등, 각종 사회·경제·정치적 여건들이 요동치기 시작하면서 신유학의 터전이 조성되어 갔던 것이다. 이 책에서는 중국 송·원·명대에 걸친 기간 동안 신유학이 그런 여건들과 맞물려서 어떻게 전개되어 나갔는지를 살펴보고 있다.
기존의 정치이데올로기가 적실성을 상실하고 중앙정부가 힘을 잃어갈 때, 개인의 세계질서에의 참여가 늘고 사적인 부가 더욱 증가해 갈 때, 그 사상적 공백을 채우며 새로운 사회주도층의 이데올로기로 등장한 것이 신유학이었다. 이런 상황을 현대와 비교하면서 저자는, ‘유학’은 과연 어떤 방식으로 이데올로기로서, 사회적 실천으로서 현재적 의미를 지니게 될 것인가 하는 물음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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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점 분포

8.5





성리학 분야의 현대판 고전이라는 말을 듣고 구입
밭고랑 2013-09-07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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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


역사 속의 성리학 / 피터 K. 볼



송나라는 한당漢唐 제국과 달리 강성한 부족들 사이에 위치한 "동등자 속의 중국(China among equals)"으로 전락한 상태였다. 11세기에 등장한 사士들은 "앎, 의미, 행위에 진정한 기초가 있어야만 한다"는 믿음을 공유하면서, 과거의 절대적 보편주의의 모습을 바꾸어 존속시키고자 했다.(29) 그 중 하나는 '문화적 보편주의'로서, "문명이란 모든 이가 배우고 공유할 수 있는 어떤 것"이며, 모든 이가 "학學에 의해 사士가 될 수 있음을 인정"하는 태도였다. 다른 하나는 "모든 존재가 같은 도덕적 본성을 부여받았다는 것"으로서, 신유학자들은 "도덕이란 모든 이에 의해 공유"될 수 있기에, 여진족이나 몽고족도 "학學의 전통을 존중해야 한다고 선언하였다."(39-40)




1050년 즈음의 이상주의적인 사士들은 왕안석의 신법新法이 전 세계에 질서를 가져올 것이라는 "송나라 건국의 신념에 충실"한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금나라가 북부를 정복하여 안정적인 국가를 건설하자 상업이 발전하고, 생산력이 높은 남부 지방에서는 "정부 역할의 축소를 요구"하는 사유가 흥성하였다. 국가 행정기구는 실질적으로도 두 배 정도 늘어난 인구를 따라잡지 못하여 지방사회의 통제력을 상실해가고 있었다. 이들은 "국가의 부에 대한 정부의 몫을 줄이고 화폐공급을 유지하며 민영 부문이 주도하는 경제성장을 촉진할 것을 요구"하였고, 지방 사士들이 "공공선을 증진시키기 위해 관료체제 밖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를 물었다."(50)




"1050년에 이르면 과거시험은 관료제에 들어갈 수 있는 주된 수단이자 고위관직에 오르는 유일한 수단이 되었다."(68) 관직 등용의 문이 좁아지자, 신유학자들은 "사士가 되기 위한 필수조건이 더 이상 관직봉직이 아니라 과거시험이 테스트하는 종류의 교육을 획득하였느냐의 여부"라고 규정지었다. 이들은 "지도적 지방사족과 통혼"하여 고향에서의 입지를 다졌고, 정부의 지원 없이 "출판 지원, 사당과 서원의 건립, 의창義倉(charitable granary)에 대한 기부, 종법체계의 확립"을 이루어냈다.(60) "남송대 그리고 그 이후의 신유학자들은 사적인 부의 독립성을 옹호하였으나, 다른 한편으로 이익이나 정치적 파워가 도덕과 동등할 수는 없다고 주장하였다."(59)




당대의 사士들은 당나라 스타일의 "시를 짓는 기술을 습득했다고 해서 그것이 곧 문文에 담긴 이상을 이해한다거나 문文에 담긴 이상에 헌신하는 것"이 아니라는 비판을 제기하였다. 이들은 과거시험 공부를 대체할 수 있는 '고문古文'을 진흥시켰는데, "고대의 문文이란 (하夏·은殷·주周라는) 이상적인 세계로의 접근 통로를 제공하는 텍스트(경전), 그리고 그러한 텍스트들의 스타일, 둘 다를 의미하였다." 그러므로 "고문古文을 공부한다는 것은 곧 성인들의 가치를 배우는 일인 동시에 그 가치들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일"이었다.(95-6) 사士의 관점에 따르면, 송나라는 "한당 제국의 역사와 단절되어야만 고대의 성취에 다가갈 수 있었다."(98)




사士는 "개인이 자기 안에 어떤 실질적인 것을 함유하고 있고, 그것이 개인으로 하여금 사물을 새롭게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는 생각"을 발전시켜 나갔다. 학學은 이제 "통치자가 교화敎化를 행하는 것을 돕거나 아랫사람들의 느끼는 바를 소통하게 하는 수단이라기보다는, 통치자에게 무엇을 해야할지를 알려주는 수단"이 되었다.(119-120) 정이程頤는 유학자가 여타 지식인들과 다른 핵심적 요소가 바로 '도道의 추구'라고 보았다. 그는 과거의 유학자들이 도 자체보다는 도에 대한 지식에 다가서는 매체(경전, 글쓰기)에 더 관심이 많았다고 비판하면서, "도덕적 학學은 ‘진정한 유학儒學’ 스승과의 실제 대면"을 통해서만 기를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142)




"도덕적 앎을 위해서는 사물의 본래적 질서와 리理를 알아서 그것을 행동의 기초로 삼을 것이 요청된다."(188) 그러한 앎은 "사물의 의존 관계(本末)와 순서(終始)에 대한 이해에 기초"하며, "사물의 리理에 대한 이해라는 근본적인 작업으로부터 시작해야 평천하平天下에 이르는 각 단계로의 이행이 가능"하다.(188-9) 신유학자들이 보기에, 통치자는 "피라미드의 정점이라기보다는 아치의 쐐기돌 같은 존재, 즉 그가 제자리에 있음으로 해서 그를 포함한 전체 구조물이 성공적인 작동을 이룰 수 있게 되는 그러한 존재였다."(205) 정부는 '신민新民'을 행해야 하는데, "신민이란, 각자가 스스로 가지고 있는 도덕적 본성을 재활성화시킬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을 의미하였다."(209)




신유학자들은 리理를 "사물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묘사하는 용어로 사용하는 동시에, 사물이 어떻게 작용해야만 하는지를 판별해 내는 규범적 용어로 사용"한다. 이는 리理에 따르는 사물이 "보다 큰, 자족적이고 유기적인 전체의 일부로서 조화롭게 기능할 수 있게끔 작동함을 의미한다."(262-3) 기氣는 사람마다 다르며, "욕망의 충족에 기초한 사회에서는 각자가 목전의 욕망을 달래기 위한 것만 움켜쥐려 들기 때문에, 그 사회는 곧 자기만족을 위한 난폭한 경쟁으로 빠져들게 된다."(275) 따라서 모든 인간은 "나면서부터 가지고 있는 리理의 통일성을 자각"해야 하며, "자아 외부에 있는 사물의 리理를 깨닫는 일을 실천하는 것"이 학學이 추구하는 바이다.(277)




송대의 신유학자들이 "우주, 인간사회, 학설, 마음의 통일성을 예외스러울 정도로 집요하게 주장"하긴 했지만, 이것이 "차이에 대한 부정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정주학에서 말하는 ‘리일분수理一分殊'는 "모든 사물이 하나의 리라는 통일성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각 사물은 또한 자기 나름의 리에 의해 작동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모든 사람이 똑같이 리의 통일성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각자 특정한 관계망 속에서 특정한 역할을 가지고 있으며 그에 따라 대우받아야 함을 의미한다."(322) 신유학자들이 추구한 유기적 통일성은 역사적 주장이나 철학적 명제가 아니라 "믿음(에 대한 의식적인 헌신)을 천명한 것"에 불과하다.(313)




지역공동체를 장악한 "신유학자들은 혈연에 기초한 전례단위로서의 가족에 초점을 맞추었다."(378) 예禮를 실천하는 가족家族과 씨족氏族은 "사회적 맥락에서 작동하는 도덕적 실체"였으며, 족보에 기반한 씨족은 "세대를 넘어서까지 가家들 간의 연속성을 유지해 갈 수 있는 방법이었다."(390) 신유학자들에게 예禮는 단순한 예식이 아니라 리理에 사회적 표현을 부여하는 수단으로 기능한다. 예禮는 "질서 있고 조화로운 세계를 위한 모델이었고, 삶의 모든 측면을 조화시키는데 사용될 수 있는 실천의 총체였으며, 오랫동안 도교와 불교에 물든 주민들을 그 영향으로부터 떼어놓을 수 있는 비강제적 수단이었다."(379)




"신유학자들은 문학적 성취나 배움보다는 윤리적 행동이 개인의 가치를 측정하는 중요한 지표라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역사를 초월하는 진리를 추구하였으므로, 역사의 교훈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430) 이들은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묻기보다는 인간으로서 관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물었다."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정치의 인격화와 도덕화였다."(434) 지배 이데올로기로 고착된 신유학은 고증학에 이르러서야 중요한 단절을 맞는다. 고증학은 "사물에 필연적인 리理가 존재한다는 전제를 회피"하며 고대를 "성인됨을 추구하는 이들의 도덕적 앎의 근원"이 아니라, "누적적 연구의 대상이자 학의 방법론의 가장 중요한 실험장"으로 간주하였다.(4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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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na35 2016-10-24 공감(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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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유교사상에 대한 책

"2011년도 대한민국학술원 선정 우수학술도서"라고 하는데, 학술서다보니, 내용이 비전공자에게는 어렵고, 페이지 수도 400페이지를 넘는다. 물론 가격도 어마어마하다.

그래도 이 책을 읽으며 흥미로웠던 것은, 그동안 단순히 공자왈 맹자왈로 이해되었던 성리학이 등장하게 된 배경을 그야말로 "역사 속"에서 발견했다는 것이다. 당나라가 쇠퇴하고, 송나라가 등장하면서, 중국은 더이상 세계제국이 아니라, 요와 서하에 압박당하는 국가가 되었다. 동시에 강남 지방을 중심으로 화폐경제와 상업이 발달하였고, 그에 걸맞는 새로운 이데올로기가 요구되었다. 그때 등장한 것이 왕안석의 신법이었다.

그러나 왕안석의 신법은 곧 큰 반대에 부딪혔고, 특히 남송대에 정호, 정이형제, 주희가 소위 성리학이라 불리는 이데올로기를 발명했다. 명대에 이르며, 주희가 주석을 달고, 오경에서 분리해 낸 사서가 과거시험의 기초가 되는 텍스트가 되면서 그 확고한 위치를 자리잡게 되었다. 명대 후기에는 왕수인(왕양명)이 경험과 실천을 중시하는 양명학을 주장하며, 주자학과 대립하기도 했다. (이 책에서는 성리학과 양명학 모두 신유교의 일종으로 다루고 있다.)

성리학, 더 정확하게는 신유교가 중국 사대부들의 정통으로 자리잡으며, 정치와 사회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신유교는 고대의 정전제와 봉건제의 이상을 부활시키려 했고, 공동체보다는 개인의 윤리를 중시했다. 구체적으로는 서원과 향약을 만들었고, 사물의 리를 탐구하는 학문을 발전시켰다. 성리학이 어느 날 갑자기 주자가 만든 것이 아니라, 역사적 요구로 인해 만들어졌음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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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짱짱맨 2014-01-28 공감(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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