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0/08

홍창성 “현상세계는 집착할 것 없는 환(幻)” 2016

미디어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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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세계는 집착할 것 없는 환(幻)”

[홍창성 철학 에세이] 6. 非有非無妙有(비유비무묘유의 서양철학적 분석
“空에 어떤 實在로서의 위상을 부여하는 순간 수많은 철학적 문제에 직면”

2016-02-29 (월) 11:54

홍창성 | cshongmnstate@hotmail.com


 

 홍창성 교수(미네소타주립대 철학과 교수)의 2월 두 번째 에세이는 매우 진지한 글쓰기의 산물이다. 그러다보니 원고량이 110매(200자 원고지 기준)나 되었다. 그러나 <미디어붓다>는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그 전문을 게재한다. 홍 교수는 <미디어붓다>의 독자들 가운데는 학문적으로 진지한 글에 대한 기대를 가지신 분들이 많은 것 같아 이번 글에서는 조금 더 깊은 논의를 했다고 밝혔다. 또한 독자들이 원하신다면 다음에는 더 깊은 논의로 글을 만들어 볼 용의도 있다는 점을 알려왔다. 홍 교수는 난해한 논의가 되었지만 <미디어붓다>의 독자들께서 글을 끝까지 읽어주실 것을 당부했다. 불교의 본질적인 면을 구명(究明)하는 홍창성 교수의 기고에 대해 미디어붓다 독자들의 변함없는 호응을 기대한다. 편집자

 

非有非無妙有(비유비무묘유)의 서양철학적 분석

 

대승에서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고 묘하게 있다’는 의미의 “非有非無妙有”라는 문장은 동아시아 불교에서는 아마도 천여 년 이상 가장 많이 회자되어 온 구절의 하나일 것이다. 불과 여섯 자로 이루어져 외우기 쉽고 또 시적 표현의 묘미까지 있어서 읊조리는 이들에게 신비로운 감마저 준다. 본고는 “非有非無妙有”라는 짧은 구절 속에 담겨 있는 대승의 진리를 현대 서양철학적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논의하여 그 이해를 돕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새로운 이해를 제시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非有非無妙有”라는 표현의 논리적 문제
 
본고의 주제와 관련된 철학적 논의를 진행하기에 앞서, 겉으로 드러나는 이 구절의 신비감 속에 숨겨져 있는 논리적 결점부터 간단히 지적하겠다. 非有非無妙有란 (1) 非有: 세상의 사물이 자성(본질)을 가지고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체로서 常主(상주)하지 않으며, (2) 非無: 그렇다고 해서 세상에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어서 (斷滅(단멸)도 아니고), (3) 妙有: 사물은 이 상주와 단멸이라는 두 극단 사이 가운데 (中道(중도)에)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경험하는 연기로 그 모습이 드러나는 現象(현상, phenomenon, 幻(환))으로 존재한다는 뜻이다. 밑에서 더 자세히 논의하겠지만, 묘하게 있다는 妙有란 이렇게 우리가 경험하는 현상 세계(俗諦 속제 the conventional truth)이며 그것은 동시에 본질이 없이 空(공)한 세계 (眞諦 진제 the ultimate truth)를 말한다.
 
눈 밝은 독자라면 벌써 내가 지적하고자 하는 논리적 문제를 간파했을 것이다. “非有”에서의 “有”는 상주론에서 말하는 자성을 가지고 영원히 있다는 존재자(恒有)를 의미한다. 그런데 “妙有”란 이 세상 사물이 연기로 인해 자성을 결여(空)한 채 현상으로서만 존재한다는 의미다. 그래서 결국 “非有非無妙有”에서 첫째 “有”는 상주하는 존재자라는 뜻이고 둘째 “有”는 “妙”라는 서술어를 가지고 연기로 인해 空한 현상으로서의 존재자라는 뜻이다. 한 문장에서 “有”라는 같은 글자가 두 개의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고 사용되고 있는데, 이것은 논리학에서 경고하는 모호한 표현의 오류(the fallacy of equivocation)에 해당된다. 의미의 섬세한 차이를 구분하지 않고 또 존재론적 특성의 차이를 무시한 채 대승의 가장 중요한 논제의 하나를 “非有非無妙有”와 같이 엄밀하지 못한 표현으로 이해해 왔음이 당황스럽다. 이 구절은 천 년도 더 전에 만들어졌던 것이니, 이제 우리는 비판적 논의를 통해 보다 엄밀한 표현으로 바꾸는 것이 좋겠다. 외우기 쉽도록 짧게 표현하려고 진리를 왜곡시키면 안 되겠기 때문이다.

 

논의를 위한 방법론
 
대승의 여러 종파에 따라 “非有非無妙有”라는 구절에 대한 이해가 다소 다르겠는데, 나는 가급적 龍樹(용수 Nagarjuna)의 『근본중송(Mulamadhyamakakarika)』의 내용에 충실하게 이 논제를 이해하고 논의를 전개해 보겠다. 非有非無妙有라는 논제는 천여 년도 더 전에 완성되었는데, 그 동안 서양에서는 이와 유사한 주제들과 관련해 신학적 또 철학적으로 많은 이론적 발전이 있어 왔다. 그래서 나는 서양철학의 가장 최근의 경향인 분석철학의 관점에서 非有非無妙有 논제를 조명하고 비판하며 내 나름대로 그 이해를 향상시켜 보겠다.

 

논의를 위해 필요한 몇 가지 개념 정리
 
성철스님은 불교를 위해 진리를 찾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찾다보니 불교를 공부한다고 했다. 구도자로서 가장 훌륭하고 정직한 자세라고 생각한다. 철학을 연구하고 가르치면서 방법론적으로 달리 진리에 접근하려 해 온 나 또한 서양현대분석철학을 아무리 공부해 보아도 결국은 언제나 불교의 견해가 옳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어서 불교(철학)를 계속 공부한다. 불교의 철학적 논의는 학문하는 사람들을 쉽게 지적 황홀경에 빠뜨릴 정도로 정말 깊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어느 중요한 철학적 논의도 극히 진지하게 진행할 수밖에 없다. 또 보다 생산적인 논의를 위해서는 불필요한 논쟁을 피해야 하겠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경우 명확한 개념 정리가 요구된다. 그래서 본고에서도 몇 가지 개념을 분명히 이해하는 것으로 논의를 시작하고자 한다.

 

1. 實在(실재 reality).
“實在한다”라는 한자어는 ‘실제로(actually) 존재한다(exist)’라는 의미로 읽힌다. 그리고 ‘실재하는’이라는 형용사는 영어로는 ‘real’에 가깝다. 그런데 동서양을 막론하고 오랫동안 이 ‘real’이라는 말이 그 뜻이 분명치 않게 쓰여 왔다. 아비달마론 계통에서는 ‘real’에 대한 분명한 정의(definition)를 하지 않은 채, 다르마(dharma 法)에 대해 ‘impartite(부분이 없는, 복합체가 아닌)’이라고 하며 다르마들만이 실재한다(real)면서 ‘real’과 ‘impartite’를 의미는 다르나 그 적용 대상은 같은 동연적(同延的 coextensive)인 두 개념으로 보고 있다. 디나가(Dinnaga)와 다르마키르티(Dharmakirti)를 중심으로 하는 Yogacara-Sautrantica 학파에 와서는 ‘real’이 ‘causally efficacious (인과적으로 능력이 있는)’이라는 뜻으로 정의되고 이해된다. 중관의 空(공)사상과 불필요한 충돌을 피하기 위해 ‘인과적으로 능력이 있는’이라는 구절을 ‘연기의 그물망 안에 존재하는’이라고 이해하면 무리가 없겠다. 한편 내가 읽을 기회가 있었던 한글로 된 몇 글들에서 “非有非無妙有”에서 “妙有”를 현상세계를 가리킨다면서 “實在(실재)한다”라고 표현하는 경우를 여러 번 보았는데, “실재한다”를 내가 해석하는 대로 ‘실제로 존재한다(actually exist)’라고 이해한다면 옳은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실재하는’이 영어에서의 ‘real’로 이해된다면 번거로운 철학적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지난 40여 년 동안 서양현대철학에서 實在論(실재론 Realism)과 反實在論(반실재론 Antirealism)에 대한 논의가 있었는데, 실재론이란 세계에 존재하는 사물들이 그것들을 파악하는 우리의 인식주관의 능력과는 상관없이 그 스스로의 본질을 가지고 객관적으로 존재한다는 주장이다. 철학적 훈련을 받지 않은 보통 사람들에게는 상식인 견해지만, 현재 서양 철학자들 가운데 이렇게 순진하게 존재세계의 독립적 존재를 인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래서 실재론은 실제로 독단적인 형이상학적 실재론 (dogmatic metaphysical realism)이라고 불린다. 그래서 요즈음은 ‘real’이라는 의미와 관련해서 “실재”라는 말을 쓰면 ‘자성을 가지고 (인식주관과는 상관없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객관적 실재’라는 의미를 강하게 함축하게 되어, 현상세계로서의 妙有와는 전혀 다른 의미로 읽힐 위험이 있다. 그래서 나는 현상세계에 대해 “실재하는”이라는 표현보다는 좀 번거롭지만 “실제로 존재하는 (actually existing)”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현상으로 존재하는 것이 妙有고 또 이것이 사물이 ‘실제로 존재하는’ 방식이라면 우리가 이 ‘번거로운’ 표현을 받아들이지 못할 이유가 없겠다.

 

2. 實體(실체 substance).
어떤 것이 그것의 존재를 위해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는다면 즉 독립적 존재(independent existence)라면 그것이 실체이다. 한편 基體(기체 substratum)라는 개념이 가끔 실체의 개념과 혼동되어 쓰이기도 한다. 그러나 기체란 실체와는 다르다, 우리가 사물의 존재방식을 파악하려 할 때, 사물을 속성들이 어떤 한 바탕에 모여 이루어진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그 바탕이 바로 기체가 된다. 혹자는 기체를 속성 걸게(property hanger)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연기법을 받아들이는 불교는 이렇게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실체나 기체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러면서도 불교는 우리에게 삼라만상을 잘 설명하고 이해시킨다. 불교에서는 실제로 있다고 인정하는 존재자의 숫자를 최소한으로 줄이면서도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기 때문에, 이는 존재와 사유의 경제성의 원리에도 - 오컴의 면도칼 (Occam’s Razor) - 잘 맞는다.
나는 역사상 존재했던 수많은 불교 이론이 제대로 된 해석에 의해 모두 會通(회통)한다는 점을 보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다른 차이점이라면 모를까 만약 실체나 기체를 형이상학적 實在로 인정하려는 학파가 있다면 회통을 위한 해석의 노력을 수포로 돌아가게 할 수도 있다고 염려한다. 아뜨만(我, 참나, 참마음)이나 브라흐만(梵, 절대적인 객관적 실재 또는 그것으로 잘못 이해된 空)과 같이 형이상학적으로 實在하는 실체의 존재를 인정하는 이론들은 연기와 空으로 존재세계를 이해해야 할 불교의 이론으로 해석하기가 너무도 어렵다.

 

3. 同一性(동일성 identity).
‘동일하다(identical)’는 것은, 철학적으로 엄밀히 말해, ‘數的(수적)으로 하나이고 質的(질적)으로 같다’는 (numerically one and qualitatively the same) 뜻이다. 물론 수적으로 하나인 것이 질적으로 다를 수는 없겠다. 그러나 동일성의 개념이 우리 일상생활에서는 좀 혼동되어 쓰이는 경우가 꽤 있다. 예를 들어 일란성 쌍둥이(identical twins)는 실은 동일하지(identical) 않다 (Identical twins are not identical). 왜냐하면 생김새 등이 질적으로는 같지만 (qualitatively the same) 수적으로는 둘이어서 (numerically two) 동일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not identical). 예를 몇 가지 들며 이 동일성의 개념을 더 설명해 보겠다.
(1) 완전히 똑같이 생긴 동전 두 개를 상상해 보자. 이 둘은 동일한가(identical)? 철학적으로 엄밀히 말해, 그 둘은 동일하지 않다. 왜냐하면 질적으로는 같지만 수적으로는 둘이어서 동일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단 수적으로 하나여야 동일성을 이야기할 수 있다. (2) 백범이 김구라는 것을 모르던 사람이 나중에 백범이라는 사람과 김구라는 사람이 비록 두 다른 이름으로 불리지만 알고 보면 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면, 백범과 김구가 하나의 (동일한) 인물임을 알게 된다. 하나의 인물이 두 다른 이름을 가진 경우일 뿐이다. 이 경우에는 철학적으로 엄밀한 의미에서 동일성이 성립된다. (3) 어떤 정사각형의 네 변을 각각 a, b, c, d라고 할 때 그것들의 길이가 모두 같으므로 수학자들은 흔히 쉽게 “a = b = c = d”라고 표현한다. 그런데 엄밀히 말해 이때 ‘=’ 기호는 네 변의 길이가 같다는 의미이지, 각각 다른 네 변이 존재론적으로 (수적으로) 하나여서 철학적인 의미에서 동일하다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a, b, c, d의 네 변은 질적으로 길이가 같을 뿐 철학적으로 말할 때 동일한 하나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우리가 초등학교 때부터 배우는 수학의 엄밀하지 못한 표현이 우리를 오도할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하겠다.

 

4. 不一不二(불일불이).
동아시아 불교권에서 “不一不二”라는 표현은 “一(일)”과 “二(이)”라는 단어가 ‘하나’와 ‘둘’이라는 숫자를 의미하기도 하며 동시에 ‘같다’와 ‘다르다’라는 질적 차이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래서 “不一不二”와 같이 중요한 표현이 경우에 따라 그 의미가 수적으로 또는 질적으로 달리 해석되어야 한다면, 엄밀한 비판적 사고와 생산적인 논의를 진행하기 위해서는 적합하지 않은 부주의한 (sloppy) 표현방식으로 판단되어야 한다. ‘不一不二’에서 “一”과 “二”를 숫자로 이해하고 그 의미를 생각해 보자. 그러면 어떤 것이 수적으로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다’는 뜻이 된다. 그러나 주어진 경우에 수의 전체집합이 {1, 2}로서 이 두 숫자밖에 없는 경우에는 어떤 것이 수적으로 하나이거나 둘이어야지 하나도 둘도 모두 아닐 수는 없으니 不一不二는 명백한 모순이 된다. 그리고 존재론적으로 (수적으로) 하나인 것이 동시에 수적으로 둘일 수도 없고, 또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이런 해석에서는 “不一不二”가 뜻이 통하지 않는 문장이 되어 버린다. 그러나 한편 “一”과 “二”를 질적으로 ‘같다(same)’와 ‘다르다(different)’로 생각해도 여전히 문제가 남는다. 이렇게 해석한다면 “不一不二”는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라는 의미의 문장이 된다. 위에서 수의 전체집합이 하나와 둘만을 원소로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야 했듯이 여기서도 질적 속성의 전체집합은 {같다, 다르다}의 두 개 선택지만 가져야 한다. 그러나 이럴 경우 “不一不二”는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는 의미가 되어, 위에서 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선택지로서 받아들일 수 없는 의미를 가지게 된다. 그리고 질적으로 같은 것이 동시에 다를 수는 없고 또 다른 것이 같을 수도 없으니, 질적인 해석에서도 수적 해석에서와 마찬가지로 “不一不二”가 뜻이 통하지 않는 문장이 되어 버린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동아시아 한자 문화권에서 사용되어 온 “不一不二”라는 표현에 제대로 뜻이 통하게 하려면 좀 예외적인 해석이 필요하다.‘非有非無妙有’에서 ‘不二’는 ‘非有非無’에 쉽게 적용되고 이해되지만 ‘不一不二’는 ‘妙有’에 적용해야 논의가 시작되겠다. ‘妙有’에 대해 ‘不一不二’를 뜻이 통하게 하려면, 밑에서 더 상세히 논의하겠지만, ‘경험적으로 존재하는 현상세계와 空의 세계가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다’라고 읽어야 된다. 그러나 위에서 논의했듯이 수적으로 하나도 아니고 동시에 둘도 아닐 수는 없으며, 또 질적으로 같지도 않으며 동시에 다르지 않을 수도 없다. 그래서 위에서 밝힌 대로, 엄밀히 말해 “不一不二”를 문자 그대로 해석한다면 이는 뜻이 통하지 않는 문장이 되어 버린다. 이 문장이 이치에 맞는 뜻을 가지게 하려면, “不一”일은 ‘질적으로 같지 않지만’으로, 그리고 “不二”는 ‘수적으로 둘도 아니다’로 해석해야 한다. 현상 세계와 공의 세계가 질적(속성)으로는 같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둘이 존재론적으로 다른 두 세계인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이것은 백범과 김구가 같은 이름은 아니지만 이 두 다른 이름이 지칭하는 사람은 둘이 아니라 하나의 인물이라는 것과 구조적으로 같은 이야기다. 그런데 “不一不二”라는 한 문장 안에서 숫자로 표시된 두 단어들이 첫째 숫자 “一”은 “不一”에서 ‘질적으로 같지 않다’는 뜻으로 해석해야 하고 또 다른 숫자 “二”는 “不二”에서 ‘수적으로 둘이 아니라’는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면, 이는 논리학에서 경고하는 모호한 표현의 오류에 해당된다(the fallacy of equivocation). 그래서 불필요하게 신비감을 주는 “不一不二”와 같은 표현은 詩語(시어)로서는 적합할지 모르지만, 진리를 추구하는 엄밀한 논의를 위해서는 멀리해야 할 종류의 문장이다. 원래 신비감을 주는 표현은 논리적 오류를 포함하고 있거나 개념적 문제점을 은폐하는데서 생기기 마련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표현을 접할 때마다 일단 이런저런 의심을 해 보아야 하고 날카로운 비판적 사고로 그 문제점들을 파헤치려 노력해야 한다. 천여 년 전에 좀 덜 비판적인 사고를 통해 만들어진 동아시아 불교의 표현들은 이제 엄밀하게 재검토해서 한국어에 더 잘 어울리는 표현으로 바꾸는 것이 좋겠다. 그래서 妙有에 대해서도 존재론적으로는 하나인 것에 대해 보는 관점에 따라 두 가지로 다르게 기술된다는 점을 드러내는 표현으로 설명하는 길을 찾아야 하겠다. 이 작업은 영어에 파묻혀 사는 나보다는 한국에 계신 독자들께서 맡아 주시는 것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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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장명확

 칸트와 不二
 
한 손에 붉은 장미 한 송이를 들고 있다고 상상해 보자. 사람들은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이 장미의 색깔과 향기 등을 느끼고 경험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개는 색맹이어서 이 장미의 빛깔을 볼 수 없다. 그러면 벌집모양의 수 만개의 낱눈으로 형성된 겹눈을 가진 잠자리는 이 장미를 어떻게 볼까? 부엉이는 적외선도 볼 수 있다고 하며, 매나 독수리는 놀라운 시각을 가졌다. 하지만 시력이 거의 없어 음파로 사물을 감지해야 하는 박쥐들에게 이 장미는 달리 보일(?) 것이다. 이 모든 種(종)의 개체들이 하나의 같은 꽃송이를 모두 다르게 본다. 그렇다면 이 꽃송이 그 자체는 근본적으로 무엇이고 어떤 모습일까? 칸트식으로 질문하자면, 그것의 物自體(물자체)는 무엇일까?


물자체는 존재하지만 생명체들은 물자체로부터 인식주관 안으로 들어오는 정보를 해석해서 얻어진 현상으로서의 세계만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에, 어느 種(종)도 다른 종보다 물자체에 더 접근했다고 볼 수는 없다. 결국 물자체는 우리가 그 모습을 알 수 없는 그 무엇이다 (that we know not what). 칸트에 의하면, 우리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선천적 직관 형식으로 받아들인 잡다한 내용을 12개의 개념(범주)로 질서지어주어 우리의 경험적 지식을 구성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에게 드러나는 것은 오직 우리의 인식능력으로 구성한 현상에 불과하며, 따라서 물자체는 알 수 없다고도 한다. 그러나 물자체는 우리 현상의 인과적 근원으로서 (형이상학적으로) 실재하는 그 어떤 것이다. 이것은 우리 일상의 상식과 통하는 견해이고, 또 한편 바라문교(힌두교)와 같이 (아뜨만이나) 브라흐만의 존재를 인정하는 주장과도 쉽게 양립가능하다. 한편 칸트는 경험적 실재론(empirical realism)은 선험적 관념론(transcendental idealism)이라고도 하는데, 나는 이것을 경험적으로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으로 보이는 현상 세계가 선험적인 관점에서 볼 때는 12개의 개념(범주)로 구성된 관념의 세계와 존재론적으로 (수적으로) 하나라는 주장이라고 해석한다. 20세기에 들어와 비트겐슈타인도 말하듯이, 실재론(realism)과 관념론(idealism)은 한 동전의 양면과 같이 볼 수도 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유의해야 할 점은 불교에서는 물자체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며 그러지 않으면서도 모든 것을 잘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칸트의 견해가 언뜻 불교의 不二論과 유사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실은 브라흐만의 존재를 인정하고서 출발하는 바라문교의 견해에 더 가깝다. 

 

현상세계의 현대철학적 이해
 
그러면 서양현대분석철학은 현상세계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지금 이 시각에도 여러 이론이 치열하게 각축하고 있지만, 불교의 아비달마론과 유사한 트롭론(trope theory)이 많은 주목을 받아 오고 있다. 트롭이란 아비달마론의 다르마(dharma 法)와 유사한 존재자인데, 트롭론은 만물을 속성개별자(property trope)의 집합체로 이해한다. 먼저 트롭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어떤 이가 검은 색 구두를 신고 있다고 가정하자. 전통적으로 서양철학에서는 이 두 짝의 구두가 검은 이유가 ‘검정’이라는 보편자(universal 또는 보편적 속성)가 이 두 짝의 구두에 예화(instantiation)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런데 트롭론은 보편자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며, 그 대신 각각의 구두 짝에 우리가 통상 ‘검정’이라고 부르는 속성개별자(trope 또는 property instance)가 존재한다고 설명한다. 트롭론에 의하면 만물이란 아무런 基體(기체 substratum)도 없이 온갖 다양하며 무수히 많은 속성개별자들만의 집합체이다.


그런데 우리는 집합체가 허상 또는 허구(fiction)에 불과하다는 아비달마론부터 개진되어 온 불교의 여러 논증을 알고 있고 또 현대 형이상학에서도 집합체 허구론은 가장 영향력 있는 주장의 하나이다. 그리고 주지하듯이 대승에서는 아비달마론이나 트롭론과는 달리 다르마(法)에 어떤 자성이 있음도 부정한다. 이 점에 대한 더 이상의 논의는 다음 기회로 미루어야 하겠지만, 나는 다르마나 트롭들도 연기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에 空하다는 대승의 견해가 옳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현상세계를 설명하려는 현대철학의 트롭론은 대승 불교적 관점에서 볼 때는 다소 빈약한 이론이다.  


좀 순진하게 들릴 이야기가 되겠지만, 자연과학적 시각을 비유로 도입해 보면 현상세계의 모습을 좀 더 불교적으로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도 같다. 태풍이나 허리케인을 떠올려 보자. 태풍은 근본적으로 수많은 공기분자와 물분자들이 소용돌이를 이루며 이동하는 현상이다. 태풍은 여러 인과적 작용에 의해 – 연기에 의해 – 생성 지속 소멸하니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며, 또 이 태풍들의 바탕이 되는 基體(기체)같은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태풍이나 허리케인은 “카트리나”나 “샌디”와 같은 고유명사까지 가지며 엄청남 인과적 결과를 초래하며 엄연히 존재하는 현상이다. 실체로서 있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없지도 않아서 현상으로 실제로 존재한다. 그리고 나는 이것이 우리를 포함한 모든 물체들의 모습이라고도 생각한다. 우리 몸만 하더라도 이 태풍과 같이 무수히 많은 여러 입자들이 끊임없이 소용돌이치며 서로 상호작용하는 가운데 현상으로서 존재하는 어떤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현대 과학에 의하면 우리의 심리현상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들도 두뇌에서 일어나는 이런 물리현상과 그 작용에 의해 생성 지속 소멸하는 어떤 것들일 뿐이다. 한편 여러 입자들 자신도 그것들을 점점 더 미시차원으로 내려가 살펴볼수록 그 차원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서로의 관계와 변화의 관점에서만 알려질 수 있다고 한다. 결국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소립자 물리학도 연기와 공의 관점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현상에 대한 현대 과학적 이해는 불교의 현상에 대한 이해와 그다지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데이빗슨과 不二
 
존재세계 전체가 하나의 실체이며 정신(마음)과 물질이란 이 하나의 실체가 가진 두 양상(mode)일 뿐이라고 주장했던 17세기 스피노자의 전례가 있기는 하지만, 20세기 후반 가장 위대한 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데이빗슨(Donald Davisdon)의 사건이론(event theory)은 不一不二를 설파하는 불교철학에 시사하는 바가 매우 많다. 나는 그의 철학이 불교의 깊은 진리에 그래도 많이 접근한 견해로 판단한다. 그의 사건이론을 예를 들며 간단히 설명해 보겠다.
다리가 무너졌다. 한강 다리 하나가 무너졌다. 마포구에서 여의도를 잇는 서울대교가 무너졌다. 한강 다리 하나가 구조상의 문제점으로 무너졌다. 다리 하나가 갑자기 무너졌다. 어제 수십 명의 목숨을 앗아 간 사건이 한강 위에서 벌어졌다. 어제 모든 석간신문 1면을 장식한 일은 한강에서 벌어졌다. 한강 다리 하나가 어제 오후 4시 35분에 무너졌다…. 원칙적으로 수없이 많은 문장들이 모두 어제 한강 다리가 무너진 사건에 대해 조금씩 다른 각도에서 기술(describe)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수많은 문장들이 수많은 다른 사건들을 기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단 하나의 사건에 대한 다양한 기술들일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데이빗슨은 우리의 심리현상에 대해서도 같은 설명을 한다. 머릿속에서 어떤 사건이 일어난다고 가정해 보자. 물리적으로 볼 때 이것은 어떤 신경다발이 흥분된 (excitation) 현상이지만 심리적으로 볼 때는, 예를 들어, 어떤 통증이 일어난 사건이다. 존재세계의 입장에서는 하나의 사건만이 존재하지만 물리적 관점과 심리적 관점을 적용해 보니 신경다발흥분이라는 사건과 통증이라는 사건으로 달리 드러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데이빗슨의 견해는 어떤 사건이란 존재론적으로는 하나이지만 두 관점(개념)으로 기술된다는 것으로, 존재론적으로 하나인 사건이 두 개의 주요 관점(심리적 물리적)에 따라 심리사건으로 또 동시에 물리사건으로도 기술된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두 개의 사건이 실은 존재론적으로 하나인 時空 속에 존재하는 어떤 구조가 없는 개별자 (a spatiotemporally bound unstructured particular)를 두 개의 관점에서 보고 기술한 것들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데이빗슨을 비롯해 대부분의 현대 철학자들은 이 두 기술이나 관점들이 서로 상호교환가능하거나 환원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데이빗슨은 자신의 견해를 존재론적 일원론이자 개념적 이원론 (ontological monism & conceptual dualism)이라고 결론짓는다. 不一不二를 연상시키는 데이빗슨의 주장이 반갑기는 하지만, 나는 그가 여전히 현상의 근원이 되는 그 자체로는 알려질 수 없는 존재자로서의 사건의 존재를 인정하는 한 그의 견해가 칸트와 마찬가지로 불교보다는 바라문교의 관점에 더 가깝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건(event)의 개별성(individuation)과 동일성(identity)이 그 사건이 다른 여러 사건들과 맺는 인과관계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보는 그의 견해도 대승의 非有非無妙有의 논제를 보여주는 모델로 나쁘지는 않으나, 우리의 기술과 관점에 존재적으로 선행하는 사건의 實在性(실재성)을 인정한다는 한계가 있다. 사건이 일단 우리의 인식주관과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있고, 우리가 적용하는 관점에 따라 사건이 이러저러하게 기술된다는 것인데, 엄밀히 말해 이것은 여전히 實在論(실재론)의 입장이어서 反實在論(반실재론)의 입장을 취하는 대승불교와는 거리가 있다.


한편 데이빗슨보다 앞서 20세기 초반에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도 우리가 의식 속에서 경험하는 감각 현상을 “그것은 (實體로서의) 무엇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無도 아니다 (It’s not something, but it’s not nothing either)”라고 하며 非有非無妙有를 연상시키는 재미있는 표현을 사용했다. 불교보다 천여 년 이상 늦었지만, 그래도 늦게나마 따라와 주어서 반갑다. 

 

현상과 空 그리고 不二
 
그러면 이제 不二의 진리를 常主도 斷滅도 아니라는 차원(非有非無)을 넘어서 妙有에 해당하는 空과 현상 사이의 관계에도 적용해 보자. 不二가 진정한 진리라면 모든 차원의 존재에 끝까지 적용되어야 할 테니까.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가 현상(phenomena)으로만 존재한다는 견해는, 앞에서 논의한 대로 삼라만상을 속성개별자들의 (trope 또는 property instance) 집합체로 보거나 또는 물리학에서 말하는 에너지와 소립자들로 이루어진 것들로 보는 견해보다도 오히려 더 세련된 철학적 입장이다. 왜냐하면 이 주장은 객관 세계가 그것을 파악하는 주관의 인식능력과 구조로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식주관과의 상호작용에 의해 그 모습이 현상으로만 드러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현대철학에서 받아들이는 反實在論(antirealism)의 입장인데, 지금은 상식이 된 이 반실재론은 서양에서 1980년대부터 주목받기 시작했다. 현응스님(현 조계종 교육원장)은 그가 1980년대에 쓴 글을 모아 놓은 『깨달음과 역사』에서 이미 우리 일상의 경험세계를 반실재론의 입장에서 단지 현상으로 또는 幻으로 보아야 한다고 설파하면서 常主와 斷滅뿐 아니라 주관과 객관의 二分法(이분법)도 넘어서는 不二를 주장했다. 그리고 내가 아는 한 그의 책이 ‘실재’라는 개념을 현대철학의 입장에서 보아도 문제가 없이 사용한 한글로 된 유일한 불교관련 서적이다. 


현상과 空도 不一不二라고 보아야 한다면, 그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뜻이 잘 통할까. 현상에 대해서는 위에서 여러 번 설명했으니, 이제 空에 대한 철학적 분석을 시도해 보겠다. ‘空’이란 개념은 ‘(본질 또는 자성이) 결여되어 있다 (is empty of (svabhava))’라는 형용사로부터 생겨났지만, 자성을 결여한다는 존재의 양상(mode)을 표현하는 명사로도 쓰이게 되었다. 그런데 어떤 명사가 있다고 해서 그것이 지시하는 대상이 실제로 존재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빨갛다”라는 형용사로부터 “빨강”이라는 명사가 나왔는데, “빨강”이라는 말이 있다고 해서 어떤 형이상학적 공간에 빨강이라는 추상적 존재자가 있고 그것이 존재세계에 예화된다는 (instantiated) 플라톤류의 철학은 역사상 수많은 반론에 직면해 왔다. 그리고 현대철학에서는 거의 설득력 없는 주장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결여되어있다(空)”라는 형용사로부터 “결여(空)”라는 명사를 만들어 낸 후 이 존재세계에 그것이 지시하는 ‘결여(空 또는 空性)’라는 존재자가 있다고 보는 것은 논리적으로 결코 용납되지 않는 많은 비약을 내포하는 주장이다. 그 스스로 철학자였던 루이스 캐롤의 책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재미있는 예를 하나 들어 이 점을 더 명확히 해 보겠다.

 

“여기 오는 길에 누구 본 사람 있어?”
“아무도 못 보았습니다. (I saw nobody.)”
“그래 맞다, 걸음이 빠른 내 친구도 그 느린 Nobody를 지나쳐 왔어.” 

      

이 대화가 웃음을 자아내는 이유는 질문자가 답변자의 “nobody”라는 단어를 실제로 존재하는 “Nobody”라는 이름을 가진 어떤 사람을 지칭하는 것으로 오해했기 때문이다. 서양철학자들이 즐길 법한 논리적 코미디의 한 부분이다. 그리고 “I saw nobody”라는 표현이 있다고 해서 Nobody가 사람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듯이, “결여(空)”라는 말이 있다고 해서 결여(空 또는 空性)가 존재자로서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은 아니다. 이 점을 오해한다면 불교의 空사상이 서양철학자들 사이에 회자할 또 다른 코미디의 주제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空이 모든 사물의 존재를 전적으로 부정한다는 것은 물론 아니다. 사물이 空하다는 것은 단지 그것들이 자성을 가짐을 부정할 뿐이다. 사물은 현상으로서 실제로 존재하지만 단지 자성을 결여할 뿐이다.


그런데 달라이 라마도 말하듯이, “자성을 결여함이란 (즉 空이란) 언제나 否定的으로 또 俗諦(현상)세계의 한 특성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Lack of inherent existence must always be understood as negative and as a feature of conventional reality).” 그리고 시더리츠(Mark Sideritz) 교수가 주장하듯이 “空은 경험을 개념화하는 하나의 편리한 방법 이상의 것이 아니다 (Emptiness is no more than a useful way of conceptualizing experience).” 내가 다른 에세이에서도 한번 밝혔지만, 나는 空을 논리적 관점에서 부정적인 개념으로만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空은 연기법으로부터 논리적으로 추론되는 결과여서, 연기와 공은 결국 같은 진리에 대한 두 다른 관점에서의 표현일 뿐이다. 그래서 우리가 현상세계 사물의 생멸에 연기법을 적용해 이해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동시에 공의 관점을 적용해서 이해하는 것과 다름없다. 나는 동아시아 불교 일각의 空사상에서 空이 어떤 존재론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기도 하는 신비주의를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제되지 않은 채로 空사상이 서양에 더 많이 알려진다면 머지않아 뉴욕 브로드웨이에 空을 주제로 한 코미디 뮤지컬이 오를지도 모른다, 역사상 성리학자들이 불교의 여러 모습을 가혹하게 조롱거리로 만들어 책을 써 냈듯이.


그렇다면 이제 空과 현상세계가 不一不二라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를 구체적으로 논의해 보자. 앞에서도 밝혔듯이 一과 二를 모두 숫자로만 해석하거나 아니면 둘 다 같거나 다르다고 질적으로만 해석하면 “不一不二”는 뜻이 통하지 않는 문장이다. 그래서 데이빗슨이 사건(event)을 존재론적으로는 하나인 구조가 없는 개별자이지만 (不二) 각각 두 개의 다른 기술로 표현될 수 있다고 (不一) 한 것과 마찬가지로, 空의 세계와 현상세계는 하나의 존재자를 두 다른 관점에서 볼 때 각각 성립하는 것이라고 이해하면 쉽게 뜻이 통할 수 있다. 시더리츠 교수와 더불어 서양불교철학계의 쌍벽을 이루는 가필드(Jay Garfield) 교수도 “空과 현상세계는 구분되는 두 개의 (어떤) 것이 아니다. 그들은, 오히려, 한 동일한 (어떤) 것에 대한 두 특성묘사이다. (Emptiness and the phenomenal world are not two distinct things. They are, rather, two characterizations of the same thing.)”이라고 하며 나와 유사한 견해를 보여주고 있다. 결국 우리의 인식과 기술의 차원에서는 두 접근방식이 가능해서 하나인 기술만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不一) 존재론적으로는 두 구분되는 존재자들이 아니라 하나의 존재자라는 것이다 (不二).


여기서 나는 우리가 주의해야 할 철학적 문제를 다시금 지적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空을 唯名論的(유명론적 nominalistic)으로 이해하며 우리가 현상세계를 바라보는 어떤 특정한 관점이나 존재자들의 존재 양상에 대한 기술로만 받아들이지 않고서, 무리하게 더 나아가 空에 어떤 존재론적인 實在로서의 위상을 부여하는 순간 우리는 수많은 철학적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예를 들어 댄서와 그가 추는 왈츠를 상상해 보자. 댄서는 분명 우리 세계에 존재하는 사물이고, 왈츠란 댄서가 춤을 추는 동안에 보여주는 댄서의 존재양상이다. 왈츠는 댄서의 몸동작의 양상을 쉽게 표현해 주는 이름에 불과할 뿐이어서, 이 왈츠라는 것이 댄서와 떨어져 세상에 따로 존재할 수는 없다. 만약 왈츠가 따로 존재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붙잡아 예쁜 상자 안에 넣어 멋지게 포장해 백화점에서 비싼 값에 팔 수 있겠는데, 물론 그것은 불가능한 이야기다. 이 왈츠의 예로부터 우리는 어떤 이름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지시하는 대상이 모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 그런데 만약 空이, 불교계 일각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현상과는 달리 궁극적 진리로서 변하지 않는 어떤 고유한 존재성을 확보하는 것으로 상정된다면 이는 생멸하는 현상세계와 존재론적으로 구분될 수밖에 없게 되어 버린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空과 현상세계가 존재론적으로 구분되게 되어 (不一) 대승의 不二의 원리에 어긋나게 된다. 결국 우리는 空에 어떠한 독자적 존재 영역을 인정해서도 안 된다고 결론지어야 한다. 시더리츠 교수도 그가 번역 해설한 『근본중송』 24장 18절에서 空을 단지 개념적 허구(a mere conceptual fiction)로 번역하고 그런 취지에서 해설을 덧붙인다. 그리고 앞에서도 논의했지만 空이란 ‘경험을 개념화하는 편리한 방법’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것에 어떤 實在性(실재성 reality)을 부과해서도 안 된다.


한편 왈츠를 유명론적으로 해석해야 하고 또 空도 하나의 개념으로만 보는 것이 좋은 또 다른 이유는 근본적으로 우리가 존재와 사유의 경제성의 원리(Occam’s Razor 오컴의 면도칼)를 존중하기 때문이다. 존재세계를 가장 적은 수의 존재자들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하고, 또 어떤 이론도 가장 적은 수의 공리와 가정들만으로 구성되어야 한다는 원리인데, 인도에서는 이것이 ‘가벼움의 원리(the principle of lightness)’라고도 불려 왔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철학자들과 과학자들이 소중히 지키는 원리다. 


그런데 空과 현상세계에 대해 “空과 현상세계는 구분되는 두 개의 (어떤) 것이 아니다. 그들은, 오히려, 한 동일한 (어떤) 것에 대한 두 특성묘사이다. (Emptiness and the phenomenal world are not two distinct things. They are, rather, two characterizations of the same thing.)”라는 가필드 교수의 해석은 우리에게 여러 모로 시사하는 바가 많다. 앞에서는 그의 해석이 가진 긍정적 측면을 부각시켜 소개했다. 그런데 나는 여기서 우리가 가필드 교수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어떤 ‘것’에 대해 깊이 논의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동일한 그 어떤 것(the same thing)’에서 이 ‘것’이라는 것조차도 실체로서 자성을 가지고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보아서는 안 되겠고, 또 인식주관과 상관없이 나름대로의 속성을 가지고 실재한다고 보아서도 결코 안 되겠다. 이런 방식으로 존재하는 그런 ‘것’을 인정한다면 그것은 불교라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불교가 다른 어떤 종교나 철학보다도 극히 더 섬세하고 미묘한 진리를 보여준다고 보는 이유는 불교가 이 어떤 ‘것’의 實在를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존재세계 전체를 잘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응스님은 이미 거의 30년 전 그의 『깨달음과 역사』에서 이런 ‘것’조차 있다고 보아서는 안 된다고 썼다. 그런 ‘것’조차 독립적으로 따로 존재하는 (實在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空의 진리를 끝까지 철저히 이해해 나가면 그렇게까지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현응스님의 이 해석이 근본적으로 옳다고 본다. 그래서 이 ‘것’의 존재론적 성격에 대해 좀 더 논의해 보겠다.


앞에서 살펴 본 데이빗슨의 時空으로 제한된 구조가 없는 개별자 (spatiotemporally bound unstructured particular)로서의 사건의 개념이 이 ‘것’과 유사하지만, 데이빗슨의 경우에는 사건이란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기술하든 말든 스스로 존재하면서 다른 사건들과 인과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말하자면 실재론/반실재론 논쟁에서 말하는 형이상학적으로 實在하는(real) 무엇이다. 그러나 나는 불교에서 말하는 이 ‘것’은 더 미묘하게 이해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칸트의 알 수 없는 물자체나 데이빗슨의 無構造(무구조)의 개별자는 모두 그것들의 독립적인 형이상학적 實在가 인정된 후에 우리가 그것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비유를 들어 이 점을 설명하자면, 어떤 길이 이미 있고 우리가 그 길을 걷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두 발로, 네 발 짐승은 네 발로, 그리고 뱀은 기어서 그 길을 간다. 각 種이 가진 인식능력의 구조에 따라 길을 달리 파악하고 가겠지만, 함께 걸어가는 길은 (존재론적으로 하나인) 같은 길이다.


그러나 위와 같은 길 가기의 해석과는 달리, 나는 불교에서는 우리가 이미 존재하고 있는 길을 걷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걷는 곳이 길이 된다고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형이상학적으로 實在하는 길의 독립적 존재가 선행하고 우리가 그것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걸으면서 동시에 길의 존재가 논리적으로 구성된다고 (logically constructed) 생각해야 한다고 본다. 길은 형이상학적으로 實在하는 어떤 것이 아니다. 우리 인식작용의 특성 때문에 그 존재가 요구되고 구성될 뿐이다. 개미들이 줄을 지어 이동할 때 또는 기러기들이 V자를 그리면서 날아갈 때, 그들이 만들고 있는 것 같은 一자나 V자의 線(선 line)이 우리의 인식주관과 상관없이 독립적으로 實在(실재)하는가 아니면 우리의 인식구조가 그 線의 존재를 그렇게 구성하는 것인가? 존재의 경제성의 원리 (Occam’s Razor)를 존중한다면, 우리 인식능력이 線의 존재를 구성해 내는 것으로 판단함이 옳다.


그런데 논리적이든 아니면 어떤 다른 방식으로든 우리가 걸어가며 길의 존재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은 길의 바탕이 되는 땅이 먼저 있기 때문이니 그 바탕이 되는 (브라흐만 같은) 땅의 존재를 인정해야 한다고 반론할 논자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렇다면 아무 것도 없는 우주 공간에서 이동하는 우주선이 그리는 항로(route) 같은 것을 상상하면 그럴 오해의 소지가 좀 줄어들겠다. 항로 같은 것은 우리가 머릿속에서 또는 지도에서 그리는 線일 뿐이지 존재 세계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만약 이 공간이라는 것도 바탕으로서 미리 존재하는 형이상학적 實在가 아니겠느냐고 하는 반대자가 있다면, 나는 어쩔 수 없이 그에게 용수의 『근본중송』을 잘 읽어 보고 나서 다시 토론하자고 할 수밖에 없겠다.


나는 불교에서는 우리가 현상세계를 경험하는 방식이 그 어떤 ‘것’의 존재를 논리적으로 구성하게 만든다고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어떤 물자체가 미리 존재하거나 또는 무구조의 개별자가 존재한 다음에 우리의 인식능력으로 그것들을 파악하는 방식에 따라 현상세계가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현상세계라는 경험의 내용이 동시에 논리적으로 그 어떤 ‘것’의 존재를 구성하게끔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렇게 무의식적으로 그 어떤 ‘것’의 존재를 구성하게 되는 이유는, 불교식으로 말하자면, 이런 어떤 ‘것’의 존재가 미리 있어야 그것에 대한 경험으로 현상세계가 드러난다고 생각하는 잘못된 습관 - 언제 시작했는지도 모르는 오래된 습관 (beginningless habit) - 때문일 뿐이다. 다시 비유로 말하지만, 이 세상에 원래 길이 있어서 우리가 그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걸어가는 곳이 바로 길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空이란 우리가 살아가는 현상세계의 경험을 편리하게 개념화하는 도구 또는 경험을 기술하는 매우 편리한 개념에 불과하다.


가필드 교수가 空과 현상세계가 존재론적으로 구분되는 두 존재자가 아니라 같은 것(존재자)에 대한 두 특성묘사로 보아야 한다고 표현했을 때, 나는 이 같은 ‘것’이 형이상학적으로 實在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논리적으로 그 존재가 구성될 뿐이라고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가필드 교수의 견해는 많은 철학적 비판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런 어떤 ‘것’조차 실재한다고 보아서는 안 된다는 현응스님의 말이 옳다고 본 것이다. 전통적으로 불교에서 이야기되었고 또 현응스님도 『깨달음과 역사』에서 강조하듯이, 우리는 이 현상세계를 집착할 것이 없는 幻의 세계라고 보아야 마땅하다. 그리고 나는 그 幻의 바탕이 존재하고 그 바탕이 형이상학적으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幻의 세계의 경험 내용이 곧 그 어떤 ‘것’의 존재를 논리적으로 구성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여기서 우리가 다시 주목해야 할 점은, 비록 형이상학적 실재론에서와 같은 ‘實在’는 아니어도, 幻으로서의 현상세계는 실제로 존재한다 (actually existing)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경험하며 살아가는 세계이다, 물론 이 幻으로서의 현상세계가 自性이 없이 空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겠지만.

 

7,000장의 기저귀 갈기 수행
 
이번 글에서는 꽤 진지한 철학적 논의를 많이 했으니 마지막을 좀 가벼운 이야기로 맺으려 한다. 원래 어려운 이야기도 웃으며 해야 덜 어렵게 느끼기에 그렇다. 전통적으로 선문에서는 실참을 통해 깨침의 경지에 도달한다고 가르쳐 왔는데, 좀 농담 같은 이야기지만 나는 실제로 14년 전 태어난 우리 쌍둥 아이들 기저귀를 2년 반 동안 7,000장쯤 갈았을 때 살짝 깨쳤다는 경험을 했다. 내가 종신교수심사를 통과해야 하는 조교수였을 때 당시 듀크대학 박사과정 대학원생이었던 아내가 내가 있던 미국 미네소타주로 돌아와 쌍둥이를 출산했다. 사고무친한 곳에서 첫 아이를 쌍둥이로 얻은 우리는 물론 어떤 일들이 닥쳐올지 아무런 감이 없었다. 한국에서 대학원 석사과정까지 다니고 군복무를 마친 후 유학해 미국대학에서 미국현대분석철학을 가르치는 교수가 될 때까지 나는 누구 못지않게 많은 도전과 어려움을 겪었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종신교수심사 준비하며 강의하고 그 와중에 대학원생이었던 아내를 뒷바라지하며 집안일과 쌍둥 아이들 양육을 거의 도맡아 한 2년 반이 이제 한국 나이로 50대 중반에 접어든 내게 아마도 가장 어려웠던 시절이었던 것 같다. 쌍둥이여서 작게 태어난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더 자주 먹었어야 했기 때문에 첫 6개월은 하루에 기저귀를 하루 종일 밤새도록 20~40장까지도 갈았어야 했다. 도와 줄 일가친척 한 명도 없는 곳에서 그랬다. 종신교수가 되자마자는 2년 동안 휴직하고 아내의 대학원이 있던 1,800마일 떨어진 노쓰 캐롤라이나주로 가족이 모두 내려가 내가 아이들 키우고 집안 살림하며 아내 박사과정 공부 뒷바라지했다. 여러 모로 무척 바쁘고 어려웠던 기간이었다. 그러다가 아이들이 두 살 반 정도 되던 어느 날 여전히 기저귀를 갈고 있던 나는 홀연히 모든 것이 시원하게 내려가면서 극히 상쾌해지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정말 멋지고 신비로운 체험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꽤 여러 날 지속되었다. 그 경험 후 나는 불교(철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물론 여러 해 동안은 영어로 된 책들밖에 구할 수 없었지만. 복이 많은 나는 미국에서 대학원을 다닌 곳이 숭산스님이 미국에 와서 처음 세운 관음선원(Providence Zen Center)이 있는 곳에서 차로 40분 거리에 있어서, 바쁜 대학원 생활에도 불구하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관음선원에 다녀왔고 또 숭산스님이 그곳에 들리셨을 때는 법회에도 참석했다. 그런데 정작 서양현대분석철학이 전공인 내게 불교 공부를 하게 만든 것은 엉뚱하게도 기저귀 7,000장의 수행(?)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우리 아이들은 틈만 나면 자기들 덕분에 아빠가 불교를 공부하게 되었다고 내가 불교공부로 쌓는 공덕은 자기들 덕이라고 뽐내곤 한다. 그리고 그때의 경험으로 나는 한국에서 여성재가불자들이 보살님이라고 불려야만 하는 이유를 좀 알게 된 것도 같다, 남성재가자들은 아무리 올라가도 거사에 불과한데 말이다. 만약 우리 아이들이 기저귀를 떼지 않았더라면, 기저귀를 끊임없이 갈았었어야 했을 나는 언젠가 결국 완전히 깨쳐 금강열반에 들어 명호를 ‘기저귀 가는 부처님’으로 가질 수도 있었을 텐데, 참 아쉽게도 되었다. 그래도 온 가족의 성원 아래 아내는 대학원을 성공리에 마쳤고 지금은 생명과학철학 전공으로 미네소타주립대학 맨케이토 철학과 교수가 된지 9년째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한국 가정과는 달리 우리 집에서는 엄마보다 기저귀를 더 많이 간 아빠가 보살님이다.


철학적으로 무거운 글을 읽어주신 독자들께 감사드리는 마음으로 다시 가벼운 마음으로 돌아들 가시라고 농담 같은 진담으로 살아 온 이야기 하나를 말씀드렸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열반에 대한 철학적 분석을 시도해 보겠습니다. 철학적 분석 자체가 열반을 직접 가져다주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열반을 가리키는 여러 손가락 가운데 하나의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해 봅니다.

 

 

홍창성교수11-1.jpg

*필자 홍창성 교수는?
서울대학교 철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미국 브라운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졸업. 철학박사. 현 미국 미네소타주립대학교 모어헤드 철학과 교수. cshongmnstate@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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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대승불자 2016-02-29 13:30:18답변 삭제  
서양철학연구 + 7,000장의 기저귀 갈기 수행 = 불교 공부! 재미있는 등식이다.

여성불자 2016-02-29 13:46:36답변 삭제  
홍창성교수님, 열심히 끝까지 읽었습니다. 많은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여성재가불자들, 파이팅!

현응님이나필자께서는 2016-02-29 15:07:26답변  
지금, 또는 여지껏, 필자께서는 철학적 논리적 사유 전개 법칙을 벗어나서는 모순이고 애매모호 하다고,,

또는 불자에게, 그 불교적 특징적 독창적 언어와 사유를 버리고,  철학적 논리적 사유 전개법칙으로 들어와서 피력하라고  권고하시는것 맞죠?

대결구도반대 2016-02-29 22:53:05답변  
억지로 대결구도를 만드는 의도가 무엇입니까? 님은 홍교수 글을 제대로 이해한 것 맞소? 올바른 "불교적 독창적 언어와 사유"와 "철학적 논리적 사유 전개법칙" 또한 홍교수 해석의 “不一不二”가 아니겠소!

누가대결구도인가 2016-03-01 07:51:46답변  
석가모니는 열반할 때 "방일하지말고 정진하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깨달음은 이해로 가능하다, 또는 전통을 넘어서 이해로 가야한다고 이들은 이야기합니다.

이렇게 억지로 대결 구도로 만드는 의도는 무엇입니까?
님은 석가모니의 열반게를 제대로 이해 한것 맞소?

불교의 독창적 언어와 사유가, 철학적 전개법칙과  같은 것 같소?

대결구도반대 2016-03-03 13:04:34답변 삭제  
그래서 천 년도 더 전에 만들어진 옛날 언어와 사유 속에 갖혀서 21세기까지 이루어진 다른 학문의 결과들과는 담을 쌓아야 한다는 말이오? 서로 소통해야 하지 않겠소?

기저귀론이수행은아니죠 2016-03-01 10:07:23답변  
실생활이 법이라는, 이러한 착각은, 
그동안의 한국불교 퇴보의 원인제공자 입니다.

그러나, 그런건 불교도 아니고 수행도 아닙니다.

그러고보니 어느분의 말씀도 생각나네요...
그무슨" 선방보다 길에서 어쩌구저쩌구..."

재밌는불만같은데요 2016-03-01 12:57:29답변 삭제  
우리 불교 수행자들은, 석가모니의 첫번째 사유를 잘 감당하고 있는데요,...

무슨 어거지를 쓰시는지...

님의세번째는 2016-03-01 17:02:02답변 삭제  
첫번째든, 두번째든, 세번째든,

제가 보기에도 어거지같네요...

또다른불교수행자 2016-03-01 13:43:44답변 삭제  
어거지란 말 공감합니다.

왜 어떤 분들은 근거도 없이 자신들만 더 높은 경지의 자유를 누린다고 생각하고 싶어 하시는지...

전혀아닌데요 2016-03-01 17:03:58답변 삭제  
철학은 철학이고, 불교는 불교인데요...

불교가철학보다뒤떨어져보이나요 2016-03-01 16:41:24답변 삭제  
'철학적 사유는 세간적자유','철학은 사유의 산수''철학은 도그마깨는 자유''철학은 부처님깨달음 포기위로 자유'...?

'현상적 세계는 환'이라면서 왜 그속에서 '경험논리'에 천착하는지...

부처님수행이 진정한 인간적 자유실천도 아니고 종교적 도그마로 느껴지는 가 보군요...그러니 불만이 이렇게도 ...

다원 2016-03-01 16:30:54답변  
좋은 글 감사합니다. 공간적으로도 감히 만나기가 어려운 상황인데도 뎃가 없이 이렇게 좋은 글을 접할 수 있다는 것이 시대를 잘 만난 인연의 복이라고 생각 합니다.  맹구우목의 생득 인연담보다 더 귀한 인연으로 담고 공부합니다.

가만 있으면 책방주인인데 입만 열면 책장사가 되버려서 두번째 화살은 피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열심히 책만 고릅니다. 다음 글을 기다리며...

그 글에도 열반은 없을거라는 걸 알아요... 그 열반은 여기에 있으니까요....
왜냐면? 책방에서 나오면 책을 읽어야 하는거니까요...

열반이여기있다라니 2016-03-01 16:45:12답변  
일체현현?
생활이 법?

다원 2016-03-01 22:11:01답변  
날마다 교도소로 출근하는 교도관은...
날마다 철창생활이나...?
먼 너므 답이 그래?

생각이 거 까지인거야 할 수 없지...
내가 그렇게 썼으니까...
해당되지 않는 사람에게야 어쩔 수 없지 않겠나요?

무유정법 2016-03-01 18:03:49답변 삭제  
부모님께 효도하고 어른을 잘 모시고 일가친척을 잘 돌보고 항상 인내하면서 열심히 생활해라.

연기 2016-03-01 18:16:21답변  
불일불이는 상즉상의성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상호의존성의 이것과 저것은 자아가 없고, 자아가 없는 이것과 저것은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라는 뜻입니다. 즉 현상을 분별하면서 이것, 저것에 대해서 존재론적 관념(숫자적 관념)을 치워버리라는 말씀이지요. 이것과 저것이 의존성으로서 성립하는 것이니 이것과 저것을 하나, 둘이라고 분별하는 것이 바로 무명 아니겠습니까?

다원 2016-03-01 21:37:22답변  
자아도 없고 둘이 아니라면 이미 하나라는 말인데... 그러면 그 하나는 무엇으로 의존한다는 말인가? 중론에서는 상호의존도 성립이 안되는데... 분별한다는 자체로 무명이 아닌가? 어떻게 무명으로 무명이 도출되는지 이해 불가...

불립문자 2016-03-01 20:16:59답변  
평소에 <공>이라는 이낱말이 무얼까?  한번식 스치듯 생각해본적이 있는데..
이렇게 교수님께서 서양철학적인 접근으로 알기쉽게 설명해 주시니...
하나의 불교적인 수수께끼가 풀린듯 속이 시원합니다.
감사합니다

空이란 개념은 본질 또는 자성이 결여되어 있다라는 형용사로부터 생겨 났지만 , 자성을 결여한다는 존재의 양상을 표현하는 명사로도 쓰이게 되었다.

나는 空을 논리적관점에서 부정적인 개념으로만 보아야한다고 생각한다.
空은 연기법으로부터, 논리적으로 추론되는 결과여서, 연기와 空은 결국같은 진리에 대한 두 다른 관점에서의 표현일 뿐이다

공들여서 이글을 읽은 보람이 있었습니다.
저의 불교공부에 쬐끔 ~ 도움이 되었어요 !
교수님 !  다음글 기대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다원 2016-03-01 22:04:04답변  
공의 논리가 부정적인 개념이라면 이 또한 잘못된 관념론이 될 소지가 농후하다는 말만 할 수 있고... <-- 이 내 답글 문형이 자립론증파의 중론이구요.

귀류논증에서는 이 자립 논증의 단점을 논파하기 위해서 부정논법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귀류파의 월칭(찬드라키르티)은 중론주석서(쁘라산냐빠다)에서 '불생불멸'의 소멸이 먼저 부정된 이유는 발생과 소멸의 선후관계가 성립하지 않음을 밝히기 위한 것이라 라고 부정논법의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더 자세히 쓰기는 어렵네요...

이 다원이 성의가 부족한 것아 아니라 디지털 글쟁이가 못되고요.
아날로그 이미지 센서라서 그래요. 그래서 한번 박히면 수정이 어렵네요.^^

다원 2016-03-01 22:27:43답변  
그런데, 용수(나가르쥬나)는 발생을 먼저 부정하면 소멸을 부정하기가 쉬워진다고 이유를 말하고 나중에는 '만일 태어남이 있고 죽음이 뒤에 있다면 죽지 않는자가 태어나는 모순이 있게 되어서 어느 것이 먼저라는 순서의 필연성을 없으나 소멸의 부정을 먼저 언급한 이유도 말하고 있다.

부정은 이미 성립된것에 연합하여 스스로 부정되는 논리고 자기의 주장은 성립하지 않기에 공관이 성립하는 것이다. 오직 공론은 연기에 의해서만 서술 될 수 있는 것이라고...

다원 2016-03-01 22:59:49답변  
공론이 연기법으로 추론된 논리가 아니고... 론적 사유에 의해서 연기법이 증인 되는 것이다.
용수가 공론을 저술한 목적이 부처님이 깨달은 연기법이 토대임을 밝히면서 예배를 올리는데서 알수 있다.

연기로서 공론이 추론된다면 용수가 부처가 되야 하고... 부처는 대승 조사가 되는 이상한 상황이 나타난다.
그렇잖아도 유식 교학의 화신처럼 북방불교의 교조로 떠 받들어지고 있는 작금에 대,소승의 혼란이 이로 인한 것이 아닌가?

다원 2016-03-01 23:00:59답변  
(첫줄 수정)

론적 사유 <-- 공론적 사유

무유정법 2016-03-01 23:58:33답변 삭제  
마음속의 생각을 버려라.  (필경공=구경공)

 

9월1일 대사께서는 배휴에게 말씀 하셨다.

달마대사께서 중국에 오신 이휴로 오직 한 마음만을 말씀하셨고, 오로지 한 법만을 전하셨다.  그 전하는 방법은 부처에 의하여 부처를 전하셨을 뿐(무유정법)  이것 이외의 다른 부처는 말씀하시지 않았다.  (불가설, 불가취)

또 법에 의하여 법을 전하셨을 뿐 이것 이외의 다른 법은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그 법이라는 것은 가히 설명할 수 없는 법이며, 그 부처라는 것은 가히 파악할 수 없는 부처이다.  그것은 바로 본원청정심이기 때문이다.

오직 이 하나의 일만이 진실일 뿐 그 밖의 나머지는 진실하지 않다.

 

반야를 지혜라고 하지만 이 지혜는 모양이 없는 본래의 마음이다.  범부는 도에 나아가지 않고 단지 육정만을 제멋대로 하게하여 육도로 간다. 

도를 배우는 사람이 한 생각이라도 생사를 헤아리면 곧 바로 마귀의 세계에 떨어진다.  또 한 생각이라도 여러 가지 분별심을 일으키면 즉시 외도에 떨어진다.  생이 있음을 보고 그 멸로 나간다면 성문도에 떨어진다.  생이 있음을 보지 않고 오직 멸만이 있음을 본다면 연각도에 떨어진다. 

법은 본래 생하지도 않고, 더구나 지금 역시 멸하지도 않는다.  두 가지 분별심을 일으키지도 않고 모든 것에 대하여 싫어하지도 않으며 좋아하지도 않는 것이다. 

일체 모든 법의 근본은 오직 이 한 마음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승(단 하나의 진실한 가르침)을 세울 수 있는 것이다.  범부는 모두 외적인 대상을 따라 마음을 내어 마침내 기뻐하고 싫어한다.  만일 경계가 없기를 바란다면 마땅히 그 마음을 잊어야 한다.

마음을 잊어버리면 대상은 공적하고 대상이 공적하면 마음이 없어진다.  만약 마음을 잊지않고 단지 경계만을 없애려고 한다면 경계는 제거되지 않으며 도리어 어지러움만 늘어날 뿐이다. 

그러므로 만법은 오직 마음의 변현일 뿐이지만 그 마음조차도 또한 얻을 수 없는데 다시 또 무엇을 구하려고 하는가?  반야를 배우는 사람은 하나의 법도 얻을 수 있다고 보지 않아서 생각을 삼승에 두지 않기 때문에 오직 하나의 진실만 있을 뿐이며, 더구나 그것은 증명하고 획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능히 깨달을 수 있고, 능히 얻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은 모두 증상만의 사람이다.  법화회상에서 옷을 털고 떠나간 사람들이 모두 그러한 무리들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보리라고 하는 것에 대하여 실로 어떠한 것도 얻은 것이 없다"고 한 것이다.  그저 묵묵히 계합(직접 체험)할 따름이다.

 

대개 범부가 임종할 때 단지 오온이 보두 공하여 시대는 자아가 없고 진실한 마음은 모양이 없어서 가지도 않고 오지도 않으며, 우리 몸이 태어날 때 성품이 또한 오는 것이 아니고 죽을 때 성품이 또한 가는 것도 아니라고 자세히 관찰하면 담연히 적정하여 마음과 대상이 하나가 될 것이다. 

다만 능히 이와 같이 바로 이 자리에서 단번에 깨달을 수 있다면 삼세에 결쳐서 구속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곧 세간을 뛰어넘은 사람(현세를 초탈한 사람)이다.  간절히 바라건대 절대 털끝만큼이라도 나아가는 방향이 있어서는 안 된다.  설사 임종시에 좋은 모습을 한 여러 부처님이 와서 맞이하며 갖가지 신기한 모습을 목전에서 나타내는 것을 볼지라도 또한 마음이 따라감이 없어야 한다. 또 가령 악마의 모습이 여러 가지로 현전하는 것을 볼지라도 역시 마음이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 

다만 스스로 마음을 잊어 버리고 법계(만법)와 하나가 되면 곧 바로 무애자재를 얻는 것이다.  이것이 요점이다.

호잔 2016-03-02 08:25:20답변  
깨달음과 그 논의 및 진정한 불자
(출처 : http://blog.naver.com/hojanyun/220643111679 )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깨달음을 어렵게 철학적으로 논의하고 있으나, 그렇게 어렵게 말할 필요는 없다.
경전에 나오는 10가지 족쇄(결박)에 따라 간단히 정의된다.
즉, 10가지 족쇄가 포함된 마음이 일어날 가능성과 강도 및 빈도에 따라 간단히 정의된다.

수다원의 깨달음은 3가지 족쇄가 포함된 마음이 일어날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자신이 확실히 알고 보는 것(부분적 해탈 지견)을 말한다.
사다함의 깨달음은 수다원의 깨달음에 더하여 2가지 족쇄가 포함된 마음이 일어나는 강도와 빈도가 현저히 줄고 약하다는 것을 자신이 확실히 알고 보는 것(부분적 해탈 지견)을 말한다.
아나함의 깨달음은 사다함의 깨달음에서 줄고 약화된 2가지 족쇄가 포함된 마음이 일어날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자신이 확실히 알고 보는 것(부분적 해탈 지견)을 말한다.
아라한의 깨달음은 아나함의 깨달음에 더하여 나머지 5가지 족쇄가 포함된 마음이 일어날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자신이 확실히 알고 보는 것(완전한 해탈 지견)을 말한다.

‘완전한 해탈 지견’이 일어난 상태(아라한)를 유여열반이라고 한다.
유여열반은 번뇌 및 번뇌의 뿌리가 없는 행의 마음(아라한의 끼리야 마음)이 일어나는 형성 상태이며, 완전한 열반 상태는 아니다.
‘완전한 해탈 지견’이 일어난 상태에서 그 생의 마지막에 도달되는 상태를 무여열반(반열반)이라고 한다.
무여열반은 번뇌 및 번뇌의 뿌리가 없는 행의 마음(아라한의 끼리야 마음)도 일어나지 않는 무형성 상태이며, 완전한 열반 상태이다.

이러한 깨달음 또는 열반은 모든 붓다의 가르침으로 요약된 바와 같이, 나쁜 일(빠-빠)을 하지 말고 유익한 일(꾸살라)을 하며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것(빠리요-다빠낭)에 따라 도달된다.
나쁜 일은 결국 족쇄가 포함된 마음에 의한 일이며, 유익한 일은 결국 족쇄가 포함되지 않은 마음에 의한 일이다.
이에 도달하기 위한 구체적 실천 지침이 팔정도이다.
기본적으로 이 외에 복잡하게 더 다른 어떤 깨달음에 대한 논의가 필요할 것인가?

성향에 따라 깨달음을 철학적으로 더 논의하는 것은 별 문제가 없으나, 이 기본을 잊거나 이 기본이 바탕이 되지 않으면 아무리 깨달음을 철학적으로 논의해도 모든 붓다의 가르침에 어긋나므로 불교(붓다의 가르침)에서는 별 의미가 없다.
즉, 이 기본은 필수적이며, 깨달음에 대한 철학적 논의는 선택적이다.
모든 논의는 이 기본에서 벗어나지 않아야 한다.

잘못된 견해는 이 기본적인 길에서 벗어난 견해이며, 사성제와 팔정도 및 삼법인을 모르는 견해이다.
그래서 사성제와 팔정도 및 삼법인의 가르침이 중요하다.
사성제와 팔정도 및 삼법인의 가르침은 연기법 및 조건법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이에 따라 설해진 가르침이 붓다의 가르침 즉 불교이며, 모든 외도(유사한 불교 및 포장된 불교 포함)의 가르침과 명확히 구분되는 가르침이다.

견해가 바르지 않거나 행위가 바르지 못하면(막행막식의 해탈 포함)은 불교에 따른 생활이 아니다.
불교에 따른 생활이 되지 않으면 붓다의 가르침에 따르는 진정한 불자라고 할 수 없다.
절이나 선원에 다닌다거나 불교를 단순히 안다고 해서 진정한 불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내가제일잘나가 2016-03-02 10:47:40답변 삭제  
홍창성교수는 니까야 기본만 말하면 됐지 왜 기본 이외 복잡하게 다른 어떤 깨달음에 대한 논의를 하냐, 사성제와 팔정도및 삼법인을 모르는 잘못된 견해다?

자기만 진정한 불자?

불교는매우어렵습니다 2016-03-02 10:46:50답변  
세상의 학문이나 철학 가지곤 전혀 가능치도 않고,
초기불교 가지곤 이론정립도 어려우며,
대승불교 가지곤, 허깨비 노릇이나 하다가고,
선불교 가지곤 애만태우다 중도에 퇴굴하기 쉽상인,
그만큼 어렵다는게죠.....

아무나 한다면 그게 수행의 길 일까요?
누구나 된다면 그게 위없는 길 이겠어요?

그저 세상에서 이게 도  이게 법 이게 선  내가 선지식 나도 인가 나도 깨달음, 이런거 가지고 불교를 보고 수행을 보면 큰착각이고 한계 됩니다.

그저, 학문이나 개인적 취미, 조직이해관계, 밥그릇, 닭벼슬 과는,
차원 그자체가 전혀 다른, 그런것이라는 것이죠.

전 이렇게 판단해요....

봄봄 2016-03-02 10:51:21답변 삭제  
댓글이 곧 자기자신의 상태죠.
초기불교도 안되고 대승불교도 안되고 선불교도 안되고....불교 왜 해요? 하지 마요?

혹시 초기불교도 모르고 대승불교도 모르고 선불교도 모르시고 있는 거 아닙니까.

동감 2016-03-02 11:00:04답변 삭제  
공감됩니다...

무심시도 2016-03-02 12:17:39답변 삭제  
生也一片浮雲起(생야일편부운기),    死也一片浮雲滅 (사야일편부운멸),   

 

          浮雲自體本無實(부운자체본무실),    生死去來亦如然.(생사거래역여연).

 

          生은 한 조각 구름이 일어남이요, 死는 한 조각 구름이 스러짐이다.

 

          구름은 본래 그 실체가 없으니, 나고 죽고 오고 감 역시 그러하다.

일체유심조 2016-03-02 12:43:38답변  
공이라는 것은 실체없다,실체가 없으니 환이다.
환이니 분별 집착하지 마라.
분별 집착하는 마음은 자신의 업식의 작용이다.
그러니 분별하고 집착하는 마음을 놓아라.
그 방법으로 무상고무아를 통찰하고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는 것.
사실 아비담마는 필요없다.
경전만 공부해도 충분하다.

호잔 2016-03-02 13:00:25답변  
아비담마가 필요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경전만으로 충분하지 못하므로 아비담마가 필요한 사람도 있습니다.

필요없는 경전은 전승할 필요가 없습니다.
님은 테라와다 불교에서 아비담마를 전승한 것은 쓸데없는 전승이라고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붓다의 가르침은 아비담마부터 사라진다고 했습니다.
함부로 말씀을 하시면 불교의 전승에 큰 불선업을 짓는 것입니다.

일체유심조 2016-03-02 13:14:25답변  
그래서 붓다의 가르침은 아비담마부터 사라진다고 했습니다.
--누가 이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미래는 정해진 것이 아닙니다.

호잔 2016-03-02 18:17:01답변  
아비담마의 가르침이 사라지는 것은 정해진 것이 아니지만, 우연히 아비담마의 가르침이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님과 같은 견해가 확장되어 지배적이거나 님과 같은 견해로 영향력 있는 사람에 의해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상카라 담마에 의한 현상계)의 모든 것은 원인과 조건에 따라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개념(빤냣띠) 또는 실재(담마) 현상이라는 것은 잘 아실 것입니다.

참고로, 열반은
상카라 담마에 의한 현상계가 아니라, 형성되지 않은 아상카라 담마로 표현되는 비현상계로서, 현상계와는 전혀 다른 상태이며,
현상계에 영향을 미치는 어떤 계(진여나 참나 등)나 현상계가 그곳에서 나오는 근원이라고 말할 수 없는 비현상계입니다.

국지적으로 불교가 발생한 인도에서도 그 가르침은 힌두교의 가르침에 지배당해 사라지고 만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윤홍식 대표(홍익학당 대표)같은 사람과 그에 동조하는 사람들에 의해 불교의 기독교화 또는 짬뽕화는 종교간의 화합이라는 말로 포장하여 대승불교가 지배적인 한국에서도 그 추세로 나가고 있기도 합니다.
원래 불교의 교리와 세상의 모든 다른 종교의 교리는 근원적으로는 화합될 수 없는 물과 기름과 같은 것입니다.

종교간의 화합은 교리의 화합을 말하는 것이 아닌데도, 교리를 왜곡시켜 화합하려고 하는 사람들에 의해 붓다의 가르침이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한국 사람으로 왜곡의 원류라고도 할 수 있는 원효대사를 들 수 있습니다.
원효대사에 대해 저가 어떤 입장이라는 것은 예전에 말한 적이 있으므로 더 이상 말하지 않겠습니다.
( http://blog.naver.com/hojanyun/220590658126 의 댓글 참조)
아비담마의 가르침이 사라지면, 불교는 윤홍식 대표 같은 사람에게 대항하지도 못하고 불자들도 그 왜곡된 유사불교에 동조하여 붓다의 가르침이 결국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붓다의 가르침은 세상의 욕망(감각적 욕망과, 존재적 욕망, 비존재적 욕망)의 흐름에 반대되는 방향의 가르침이므로 일반 사람들에게 바르게 먹혀들기가 원래 어렵습니다.
그래서 경전(경장)을 바르게 해석하게 하는 정교한 아비담마(논장)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러한 아비담마의 가르침이 없다면 세상 학문의 과학자(특히 자연과학자) 또는 철학자들에게 대항하지 못하고 붓다의 가르침이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바담마가 전승되지 않았다면 현재의 왜곡된 잡다한 유사불교 이론에 대항할 수가 없습니다.

아비담마부터 사라진다고 하는 말씀은 미얀마에서 테라와다 비구계를 받은 스님에게서 들은 말입니다.
미얀마 불교계는 경전해석의 기준으로 어렵지만 아비담마를 매우 중시하고 있다는 것은 잘 아실 것입니다.
아비담마 중에서도 ‘빳타나(발취론_원인과 결과의 법칙을 24조건으로 논한 논서)’부터 사라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비담마를 이해하기 어려워 경시하는 경향에 따라, 미얀마 불교계에서 아비담마의 대가들에 의해 어떤 근거가 있기에 이런 예측을 한 것이라고 판단됩니다.

일체유심조 2016-03-02 23:27:12답변 삭제  
아비담마가 사라질가 두려우면 열반을 성취하세요.
남방불교에서 아라한이 출현하면 두려워 할 하등의 이유가 없죠.
아비담마가 사라져도 경장과 율장이 있고 대승이 있고 구사론 유식이 있으니,아비담마만 정법이라는 편견을 버리고 바른 법을 보면 됩니다.

일체유심조 2016-03-02 23:28:56답변 삭제  
참고로 열반을 논하는 것은 희론으로 흐르니 자제하세요

석양 2016-03-02 17:18:12답변 삭제  
* “非有非無妙有”라는 표현의 논리적 문제
홍교수는 이 표현이 엄밀하지 못한 모호한 표현으로 논리적으로 오류,라면서 대승을 비판한다. 그런데 내가 보기엔 이건 대승의 잘못이 아니다. 홍교수가 앞에서 말했던 상주와 단멸 두 극단을 여읜 중도를 한문으로 표현한 것 뿐이니까.  결국 홍교수는 석가모니 붓다의 중도라는 개념 자체가 애매모호하다, 논리적으로 오류다, 라고 주장하고 있는 격이다. "엄밀하게"로 따지자면 석가모니 붓다의 오류를 대승의 잘못으로 누명씌우는 거다.

*실체
초기불교는 현상계의 연기적 존재들에 대해 무아라고 규명한다, 초기불교의 정의와 마찬가지로  대승불교는 현상계의 연기적 존재들에 대해 무아라고 인정하면서 동시에 현상계를 '현상계 너머의 진리작용'으로 말한다. 여기서 홍교수는 '현상계 너머의 진리'를 실재화하는 것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다. 그렇게 되면 연기법이 부정된다고 말이다. 그런데 나는 반문하고 싶다. "현상계 너머의 진리"가 실재화되거나 실재화되지 않거나 현상계의 작동원리인 연기법이 왜 손상되는가,하고.

예를 들어 보자. 빅뱅이후 시-공간이 발생하면서 물질들이 생성소멸을 거듭하면서 확장 현재의 현상계가 탄생했다. 인간을 포함한 현상계내의 모든 존재들은 무상.고.무아이고 연기적 존재들이다. 여기서 빅뱅이전의 '어떤 것'을 현상계를 만든 실재로 본다고 해서 현상계의 존재들을 연기와 공으로 해석하는 것이 불가능해 질까? 이렇게는 말할 수는 있다. "현상계 입장에서, 현상계 너머의 어떤 것을 볼때" 현상계는 시간과 공간가지고 언어로 기술될 수 있는 세계인데 "현상계 너머의 것'은 언어로 기술하는 거 자체가 말이 안되므로 실체화도 안되고, 실재로 있다고 말할 수도 없는 것이라고. 이렇게 "언어적으로 보자면" 말이 된다. 시공속의 내(생멸하고 연기적인 존재)가 어떻게 시공이전을 상상하거나 말할 수 있냐고.

하지만 논리적으로 현상계는 우주인플레이션(빅뱅) "이전의 어떤 것"을 상정하지 않고는 안되는 세상이 됐다. 빅뱅이전의 특이점은 과학적,수학적,물리학적인 당연한 귀결이다. 특이점을 실재로 보건 실체화하건 말건간에 현상계를 연기와 공으로 이해하는 것에 아무런 지장을 받지 않는다.

*동일성
태아 홍창성과 유아 홍창성 , 유년기 홍창성과 청소년기 홍창성, 청년 홍창성과 중년 홍창성.....모두 동일한가?
현상계내의 홍창성은 세월의 흐름과 함께 무상하게 변했다. 수적으로 하나의 인물이므로 '동일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질적으로 존재자체가 계속 변해왔기 때문에 엄밀하게 말해 "'동일하다'고도 할 수 없다". 홍창성의 자아는 매순간 느끼고 감정을 가지고 생각을 하며 변했지만 그런 변화들 속에서도 홍창성은 자신이 홍창성 자신 그대로임을 부정하지 않았다. 유년기의 홍창성만 진짜고 청소년기의 홍창성은 가짜다, 라던지 중년의 홍창성만 인정해달라 그 이전의 홍창성은 허구다,라던지 하지 않았다. 생에서 노까지 계속변화하는 가운데에서도 항시 스스로를 홍창성임을 자각하고 있었던 변화지 않는 동질성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에 자신을 포함한 타인들도 홍창성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동일하지 않은 홍창성의 특성과 동일한 홍창성의 특성을 동시에 설명하는 엄밀한 언어가 있는게 가능할까.

* 不一不二(불일불이)
 “非有非無妙有”와 마찬가지로 '모호한 표현의 오류'라고 보지 않는다.
不一不二도 현상계와 공의 세계를 모두 포함하면서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매우 훌륭한 중도의 표현이다. 현상계와 공을 하나로 표현하면 구별할 수 없고 그렇다고 현상계와 공의 세계가 따로 따로 별개의 것들이라고 말하면 분별망상에 떨어진다. 그래서 불일이면서 불이라고 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어 보인다. 이건 언어의 문제라기 보다 존재양상의 이중성 때문이라고 봐야 한다. 마치 입자와 파동이 물질의 이중성인 것처럼. 입자와 파동은 속성이 전혀 다르다. 입자이면서 파동, 파동이면서 입자라는 말은 언어적으로 굉장히 모순이지만 과학적으로 둘다 맞는 말이다.논리적으로야 색은 색이고 공은 공이겠지만 진리적으로 색은 공이고 공은 색이니 어쩌겠는가 말이다.

*칸트와 不二
칸트는 물자체에서 철학을 멈춘것 같다. 아마 더 연구했더라면 서양발 유식사상이 됐을 지도 모른다. 홍교수는 유식사상을 불교로 간주하는 않는 것일까.

* 현상과 空 그리고 不二
홍교수는 공(空)을 초기불교식으로 한정해서만 쓴다. 그래서 '결여'의 의미만 쓰는데 대승에서의 공은 '현상계 너머에서' 현상계를 작동시키는 근원적 원리로서 공(空)으로 '현상계의 그 어떤 것으로 부터도 오염되지 않은 퍼펙트한 진리당체'의 의미를 가진다. 빅뱅이전의 특이점 처럼 언어로 설명할 수 없고, 상상도 기술도 안되는 어떤 것이지만 현상계(우주)를 탄생시켰던 원리로서 '있는 것'이다(물론 이때의 '있다'라는 개념은 현상계서 말하는 '있다/없다'에서의 '있다'는 아니다). 초기불교의 '공'개념을 가지고 대승경전인 반야심경의 '공'을 해석하려는 시도인데. 잘못된 시도이다.

홍교수는 초기불교식 공(결여)을 근거로 해서 이 공을 존재자로 인식하면 서양철학자들 사이에서 불교가 코미디가 된다고 말한다. 당연하다 공이 오직 '결여'의 의만 있다면 말이다. 달라이 라마 주장은 홍교수의 주장을 반만 인정하는 내용이다. 속제(현상)의 한 특성으로는 맞겠지만 '언제나 부정적으로는 아니다' 달라이 라마가 진정 그렇게 말씀하셨다면 뭔가 밀교의 입장에서 초기불교로 한걸음 후퇴한 것이다. 대승이 무아에 위배되는 거 아니냐는 공격에 움찔해서 홍교수가 자주 말하는 모호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대승에서의 참나등 진리어는 속제에 대한 얘기가 아니다. 속제를 넘어선 진리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우주(현상계)는 법칙대로 굴러간다. 성주괴공,생주이멸,이합집산,생로병사..공의 작용으로서의 현상계는 오차없이 굴러간다. 현상계의 운행 이면에 현상계의 작동원리로서의 법칙을 배제하고 현상계 자체만으로 설명이 가능한가. 대승은 이부분에서 결여로서의 공 대신 진리당체로서의 공을 도입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시공간이 탄생하면서 현상계가 펼쳐지고 이 현상계가 연기법으로 굴러가도록 하는 빅뱅이전의 법칙을 상정한다고 해서 코미디가 될까. 우주(현상계)가 겨자씨만 한 것(특이점)에서 나왔다,라고 얘기하면 똑똑한 대중들에게는 코미디가 될 것이다. 그런데 물리학자들은 전혀 코미디로 여기지 않는다. 우주가 점점 확장되는 것을 거꾸로 돌리면 반듯이 특이점으로 모이는게 당연하니까.

'춤과 댄서'의 비유에서 춤을 현상계로 놓고 댄서를 본질로 봐야 이치에 부합하지 않을까. 춤은 왈츠,탱고,자이브,지루박,쌈바,플라맹고로 다양한 이름들이 있다. 그런데 모두 댄서라는 본체에서 나온 현상(춤)들이다. 춤은 몸동작의 패턴(현상)에 대해 이름을 붙여 분류한 것이다. 춤이라는 현상에 대해 말할 때 종종 우리는 댄서라는 본질을 놓친다. 다양얀 춤들이 시대의 유행을 지나 사라지기도 하고 새로운 춤이 생겨나기도 한다. 본질적으로 춤은 무상.고.무아라서 실체가 없다 하지만 춤을 가능케 하는 원리,근원으로서 댄서는 있지 않은가.

현응스님의 주장은 현상계 입장에서 볼때에만 맞는 말이다. 공을 '결여'라는 개념에 충실해서 현상계를 볼때에만 맞는 말이다. 하지만 대승은 초기불교와 반대로 진리를 본성으로 놓고 진리 입장에서 현상계를 진리의 작용으로 본다. 이런 관점의 차이를 현응과 홍교수는 간과하고 있다. 그래서 선불교에서 말하는 바를 선불교 관점에서가 아닌 현상관에 입각한 관점으로 이해하려고 하니 모순으로 보이고 코미디로 보이는 것이다.

홍교수는 대승적 관점과 소승적 관점을 마구 섞어 버린다. '존재'라는 것을 말할때는 현상계와 연결해야 한다. 컵, 핸드폰,열쇠, 연필..이런 것처럼 가시적으로 느껴지고 보여지고 만져지고 확인되는 것이 현상계의 존재들이다. 대승에서 말하는 공의 실재는 "현상계 존재들 넘어선" 원리로서의 '존재'라서 홍교수가 맨 처음 거론한 비유비무묘유에서 같은 有라도 의미가 다르게 봐야 한다. 따라서 공을 실재로 본다고 해서 그 공이 현상계의 어떤 존재들 마냥 같은 취급해 버리면 안된다. 홍교수도 여타 초기불교도들 처럼 무위차원의 진리로서의 존재를 현상계의 무상.고.무아와 같은 존재로 취급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현응이 '것' 조차도 있다고 보아서는 안된다고 말한 것은 현상계에서 볼때만 맞는 말이다. 그 정도는 이미 선사들이 '한 물건 도 없다'고 한 경우와 마찬가지로 현응의 독창적인 주장도 아니다.

우리가 주어진 길을 가는게 아니라 우리가 가는길이 길이다? 홍교수는 안이비설신의 감각기관을 자발적으로 선택한 것이 아니다. 오온을 홍교수가 만든게 아니다. 태어나 보니 이미 주어줬다. 기쁠때는 웃고 슬플때는 울고 부당한 것에 분노하는 마음도 홍교수가 만든게 아니라 이미 주어진 것이다. 나만 그런게 아니라 거의 대다수 사람이 기쁠때는 웃고 슬플때는 울고 부당한 것에는 분노한다.  다 웃는 상황에서 웃지 않거나 슬피 울면 공감능력이 결여된 싸이코패스나 인지부조화에 걸리거나 미쳤거나 이다. 희노애락이라는 감정은 내가 선택하거나 거부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태어나면서 가지고 나온 숙명같은 것이다. 홍교수가 앞서 말했듯이 인식하는 주체와 별개로 현상계가 따로 있다는 것이 아니다. 유식학에서 죽을 때까지 인간은 자기 마음만 본다. 내가 지금 보고 듣고 느끼는 현상계 전체는 사실 내 마음이 뇌를 통해 조작한 일체다. 그래서 감각기관과 뇌 통해 마음이 조작한 현상계 전체에 대해 판단중지(오온부정)하면 현상계를 떠나 열반(대승에서 공적영지)을 체험하는 것이다. 대승에서는 이 상태를 참나, 일심이라고 한다. 현상계 입장에서 보면 실체도 없고,알 수 없고, 파악이 불가능한 어떤 것이겠지만(결여로서의 공만 이해되지만) 진리입장에서 보면 청정한 진리로서의 공은 있는 것이다. 선사들이 괜히 홍교수나 현응한테 '실참'운운하는 것이 아니다.

숭산스님 선원에 가 봤다면 숭산스님이 참나 찾으라, 참나 찾아서 타인을 도와라, 아라한도에 머물지 말라는 말씀을 들었을  것이다.

* 7000장의 아기 기저귀
어느 날 여전히 기저귀를 갈고 있던 나는 홀연히 모든 것이 시원하게 내려가면서 극히 상쾌해지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정말 멋지고 신비로운 체험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꽤 여러 날 지속되었다-- 홍교수의 열반, 득도라고 가정하고.

홍교수의,  '시원하게 내려가면서 극히 상쾌해지는 경험'이 초기불교로 열반이고 선불교식으로 참나상태이다. 홍교수의 경험은 아이들 것도 아니고 아내것도 아니고 오직 홍교수 개인의 것이다. 홍교수가 체험한 열반을 선불교에서는 참나라는 마음상태로 규정한다. 절에서 삼천배를 해도 홍교수와 동일한 체험을 한다. 절하기 싫어, 힘들어, 고통스러워라고 궁시렁 대는 에고가 일순간에 소멸하면서 마음이 청정한 상태가 된다. 그게 열반이다. 기저귀 가는게 고되고 힘들어 라고 궁시렁 대던 자아가 일순간 소멸하여 홍교수는 시원한 청량감을 가지는 마음상태가 됐고 며칠동안 그런 마음상태가 유지됐던 것이다.  그 경험에서 멈추지 말았어야 했다. 그 경험을 더 파고 들었다면 불이라는 개념에 혼동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그 지점이야 말로 '실참'이란 단어로 집요하게 물고늘어져야할 마음상태였는데.......

전체적으로 글을 읽고.
홍교수의 주장이 내가 생각하는 불교와 여러면에서 핀트가 맞지 않는다.
용어들에 대한 개념이랄까 전제에서도 홍교수는 "완벽한 무균상태(언어적으로 오류가 없는 상태)에서만 수술(논리전개)을 시도하겠다"고 말하는 것 같은데 그가 말하는 무균상태라는 것이 그만의 관점이라는 것. 그리고 그가 제시하는 공(空)의 개념이 아니면 모두 틀렸다는 전제에 동의 하지 않으며, 만일 홍교수가 주장하는 공의 개념만 존재하면 홍교수는 대승의 법공과 법공을 기반으로 하는 가르침들을 전부 부정해야만 한다는 거. 현응의 관점은 초기불교의 현상관 관점에서는 맞지만 대승의 본성관 관점에는 맞지 않는다는 것, 그래서 계제가 다른 두 개를 동일한 범주에 놓는 오류에 빠졌다는 거. 기저귀 갈다가 진리(본성)를 일별한 상태를 초기불교에서는 열반, 선불교에서는 참나라고 한다는 거.  그 마음상태가 현재에도 지속되는지 여부, 지속되지는 않지만 언제든지 그 마음상태가 될 수 있는지의 여부가 견성의 단계를 가늠해 볼 수 있지만 이론,개념적으로 법공이 아닌 체험으로서의 법공이 아닌 것은 확실해 보인다는점.

억지 2016-03-02 17:59:31답변 삭제  
그것이 꽤 여러 날 지속되었다-- 홍교수의 열반, 득도라고 가정하고.
......
이건 안보일까 ==> 홍교수의 열반,득도라고 가정하고

명상 2016-03-02 20:22:12답변 삭제  
"업의 원인이 되지 않는 마음을 무표심(無表心)이라고 한다. 원인과 결과가 없기 때문에 무인작용심(無因作用心)이라고도 한다. 눈, 코, 입 등 감각기관을 통해 대상과 접촉하는 순간 알아차림이 있으면 무인작용심을 일으킨다. 원인이 없기 때문에 결과도 없고 업의 상속도 없다. 따라서 윤회를 돌리지 않는다. 이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지만 단지 계발되지 않았을 뿐이다. 범부도 한 순간의 알아차림으로 업의 원인을 만들지 않는 ‘순간의 열반’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알아차림이 상습화한 부처님이나 아라한들은 어떤 대상을 만나더라도 ‘단지 작용하는 마음’만 있다고 한다. 괴롭거나 즐거운 대상과 접촉하더라도 선심이나 불선심으로 반응하지 않고 단지 느낌만 있다는 것이다."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N035/1

그렇죠공개토론하면깨질껄 2016-03-02 22:28:37답변 삭제  
사실 이견이 있으면, 한자리에 모여, 공개토론하면, 차이가 드러나게 되는데...
그러나 그 간단한 공개토론을 안하니까, 헛된 소견만 양산되고있는...

황당한길도동감 2016-03-03 08:44:43답변  
'우리가 주어진 길을 가는게 아니라 우리가 가는게 길이다'

이말에 느꼈을 황당함에 공감합니다.

그래서 불교적 '철부지'라는 수사를 얻지않았겠어요?

대승불자하나더 2016-03-03 12:15:45답변  
반대를 하려면 논지로 하세요. 아무 논점없이 상대를 철부지라고 해서야 쓰겠습니까. 님과 동의하지 않으면 모두 철부지입니까. 홍교수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나 하고 이러는지 의심이 갑니다. 하긴 홍교수의 이번 글은 님같은 언어 수준으로 이해할 수 없어 보이기도 하네요.

논지흐트리기 2016-03-03 13:12:07답변 삭제  
전형적인 논지흐리기...

그러게요 2016-03-03 10:31:41답변 삭제  
동감합니다.

석양 2016-03-03 12:35:30답변 삭제  
난 아무것도 지우지 않았다.

소승사과 단계에서 소멸되는 10가지  족쇄의 총합이
 '에고'이자 '자아'다.
수다원과에서 소멸되는 것만이 자아라는 주장인데
그렇다면 아나함에서 제거되는 아만,들뜸,어리석음은 자아가 일으키는게
아니라 다른 무언가가 일으키는 감정인가.

소승사과의 경지는 각각의 수준에서 모두 열반이다.
다만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대승불자하나더 2016-03-03 12:35:51답변  
그런데 홍교수가 언제 자신이 체험한 것이 열반이라고 썼습니까? 그냥 농담같은 이야기이니 한번 웃으며 가벼운 마음으로 돌아가자고 한 것 같은데... 자신에게는 무슨 계기가 된 경험이었겠지만, 글을 읽는 분들에게는 가볍게 기분전환용으로 한 이야기로 읽었습니다.

석양 2016-03-03 12:56:08답변  
저도 홍교수와 마찬가지로 가볍게 얘기했는데 제 3자가 "진지.엄숙"으로 받아치네요.

한편으로 저는 홍교수가 기저귀 수행을 마냥 농담으로 거론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선방식 '실참'만이 실참이 아니라 제대로 된 실참은 홍교수 자신처럼 일상의 평범한 가운데서 깨치는 실참도 선방 실참 못지 않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한자경 교수의 화두참선의 실참 요구에 대해, 그리고 자신이 책, 문자적으로만 깨달음에 대해 파악하는 수준은 아니라는 취지의 농담반 진담반이라고 봅니다.  어쨌든 기꺼이 홍교수의 실참에 대해 인정해 드릴 수 있습니다. 선어록에 스님들 깨치는 상황을 보면, 빨래하다가, 호미질 괭이질 하다가,  장작 쪼개다가, 기왓장을 던졌는데 나무에 맞을 때, 물동이 이고 가다가 떨어트렸을 때... 기저귀 갈기 수행으로 얼마든지 깨칠 수 있어요)

대승불자하나더 2016-03-03 13:12:00답변 삭제  
그렇게 생각해도 좋을 것 같군요. 코멘트 고맙습니다.

처음대승불자 2016-03-03 12:55:54답변  
그런데 왜 이렇게 시비조의 댓글이 많을까. 아, 서로 건설적인 의견을 주고 받는 공간이면 얼마나 좋을까. 상대방을 아무렇게나 쉽게 재단해서 비난하고는, 그것이 잘못임이 밝혀지면, '아니면 말고' 식이 너무 많다. 이래서야 언제나 좋은 분위기에서 토론이 이루어질까. 인성이 의심되는 댓글이 너무 많다.

오히려이런멘트문제 2016-03-03 13:27:32답변 삭제  
오히려, 이런멘트 댓글정서에 도움 되나요?
어떤뎃글이 문젠지 그뎃글에다 토다시면....

한참웃었다 2016-03-03 13:23:54답변 삭제  
마성님이 초불과 대승의 깨달음이 다르다 는 것을 보고 웃었어요..
계속 우겨야 하나보죠?
공개토론 하면 간단한걸.......

석양 2016-03-03 13:47:09답변  
어제 못한 얘기를 좀 이어가고 싶네요.
홍교수가 말한 공(결여)은 현상계를 집착할 것이 없는 환으로 보기에 아주 유용하죠. 그런데 초기불교와 대승을 포함 불교전반에서 공을 '결여'의 의미로만 써야 한다는 주장은 대승의 가르침을 통째로 부정하는 논리가 됩니다. 아마 대다수 대승불교 학자들은 터무니 없는 주장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공을 '결여'가 아닌 '실재'로 쓸경우 불교가 코미디가 되고 조롱받을 거라고 했던 말을 아마 대승학자들이 홍교수께 할 것입니다. 홍교수가 초기불교와 대승을 나누지 않고 마구 섞어서 어느 부분을 어떻게 비판해야 할지 매우 난감하다고 어제 말씀드렸는데요,  대승의 불이를 긍정하다가 또 공(결여)로 부정하다가 왔다갔다 한다는 거죠. 홍교수는 자신의 논리의 엄밀성만을 추구하기 위해서만 대소승을 섞어 버렸어요. 본인의 논리를 지켰을지 모르지만 대소승이 섞이는 바람에 비판하기가 매우 '애매모호'하게 됐죠.

각설하고. 홍교수는 다음 글에 열반에 대해 말씀하시겠다고 해서 글을 쓸까말까 좀 망설였습니다. 그런데 홍교수의 다음글이 언제 올지 모르고, 그때 제가 글을 쓸 상황이 될지 안될지 몰라서 기회가 있을 때 쓰기로 합니다.

공(결여)을 홍교수의 주장에 입각해서 열반을 얘기해 봅시다.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대승은 현상관에 대한 얘기가 아니라 본성관(열반,참나)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대승의 본성관과 홍교수의 공(결여)가 만나는 지점이 있습니다. 홍교수의 입장에서 열반이란 에고(자아)의 결여된 상태죠? 자아가 탐진치를 가지는 현상계를 떠난 열반이므로 열반은 자아의 결여(공)이자 탐진치의 결여(공)입니다. 이 열반상태에 있는 자는 자아가 결여 돼 있으므로 나와 남을 분별하지 않을 것입니다. 너는 너, 나는 나 딱 선을 긋고 자기 위주의 이기적 행위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자는 나와 남을 가르지 않기 때문에 남의 아픔을 자기의 아픔으로 강하게 느낄겁니다. 어떻게든 도와주려고 할겁니다. 홍교수님의 주장대로 자아가 결여(공)된 사람안에서 "차별심, 이기심이 없는" 보시가 나오지 않습니까. 에고의 결여(공)에서 보시가 나옵니다. 에고가 결여된(공) 사람은 탐진치가 사라졌기 때문에 나쁜짓을 하지 않습니다. 에고가 결여됐기 때문에 분노하지 않습니다. 에고가 결여됐기 때문에 선입견,편견같은 견해에 의한 어리석음이 없습니다. 최소한 탐심과 분심에 자신을 가두는 어리석음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에고가 결여(공)된 사람은 이렇게 계.정.혜가 나옵니다. 에고와 탐진치가 결여(공)된 사람은 더러움, 번뇌에 물들지 않았기 때문에 청정합니다.

홍교수의 논리에 충실해서 보면 열반은 자아(탐.진치)의 소멸(결여,공)입니다. 그런데 그 결여가, 그냥 텅빈 결여가 아니라 보시.지계.인욕.선정,정진.지혜라는 것들이 들어 있는 결여죠? 현상계의 존재들과 비교하면 열반(에고의 결여)은 청정하죠? 대승은 이 부분이 열반의 핵심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홍교수는 공을 '결여'의 부정적 개념으로만 써야 한다고 말했지만, 홍교수의  주장에 입각해서 본 열반(에고의 결여)은 6바라밀이라는 긍정의 요소가 꽉들어차 있습니다. 대승에서는 이 6가지를 진리의 공덕상이라고 합니다. 대승에서는 열반이 결여로서 "텅빔"만 있는게 아니라 묘유로서 6바라밀이라는 공덕상이 꽉 들어 차 있다는 의미도 동시에 가진다는 거에요.
"에고의 결여(공)"인 열반은 결코 "부정적"일 수 없습니다. 달라이 라마도 일부 말씀하셨지만 현상(속제)에 국한해서 공을 쓸때는 홍교수의 입장이 타당할지 모르겠지만 열반(에고의 결여)입장에서 까지 결여의 공만 강조하면 열반에서 나오는 보시,지계등 6바라밀을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열반상태에서 나오는 6바라밀을 부정할 수 있나요? 에고가 사라진 열반상태에서 부당하게 당하는 사람을 보면, 에고가 사라져 나와 남을 둘로 여기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습니까. 내면의 명령에 따라 도와주어야 할 것입니다. 이때 도와주려는 마음에 대해, '이 마음은 공(결여)하다'하면서 외면할 수 있나요? 그리되면 비양심적인 것이되고 아직도 탐진치가 남았다는 얘기 이므로 열반은 아니겠지요. "에고가 결여(공)된 열반" 상태에서 묘유로 계속 나오는 6바라밀은 거부할 수 없습니다. 6바라밀은 진리의 다른 이름인 것입니다. "에고의 결여"인 열반을 대승에서는 공,공성으로 보고, 이때의 공은 '결여' '텅빔'이 아니라 6바라밀이라는 진리의 상이 꽉 차있는 공이됩니다.

홍교수의 결여로서의 공은 현상관을 다루는 초기불교에는 맞지만 진리의 공덕상을 열반의 본질로 보는 대승의 본성관에는 맞지 않는 개념입니다. 앞에서 우스개 소리로 기저귀 수행으로 열반을 맛 보왔을 때, 거기서 멈추지 말고 더 진도나가야 한다는 말을 그래서 한 것입니다. 만일 홍교수가 자신의 깨침에서 멈추지 말고 더 연구했다면 대승불교의 공관으로 인식전환했을 수도 있기 때문에요.

석양 2016-03-03 14:04:18답변 삭제  
첨언.

초기불교의 공= 무상. 결여.
대승불교의 공=진리의 작용, 청정함,으로 요약할 수 있겠네요.
대승(선,밀교)의 깨달음 내용은 모두
텅빔각성=공적영지=적적성성=진공묘유로 표현됩니다.
텅빔=공적=적적=진공...은 번뇌와 망상,자아의 결여적 측면이고
영지=성성=묘유...는 텅빔의 결여속에소 묘하게 작용하는 진리의 6가지 상을 의미합니다.

초기불교의 공이 부정적 쓰일 수 있지만 대승의 공은 부정과 긍정 두가지 측면을 다 가집니다. 그래서 대승에서 '공'하다 할때 그 의미를 '결여'의 의미로만 파악한다면 결코 대승의 진수를 맛볼 수 없을 겁니다. 쉬운예로 결여의 의미로 대승경전인 반야심경을 읽는다면 반야심경을 엉뚱하게 해석하는게 됩니다.

석양 2016-03-03 15:02:27답변 삭제  
그런식으로 따지면 홍교수의 글도 강요, 당신의 글도 강요.
미디어붓다의 댓글란이 '공포'를 강요하는 곳이라는 인식이 어떻게 가능할지 도저히 상상이 안갑니다.

저의 댓글이 당신을 죽이겠다는 협박이 아닌데 왜 공포심을 느껴요? 공포심을 느껴가면서까지 굳이 댓글을 써야만할까요.

저의 형이상학적 추론이 아니라
대승경전 전반의 내용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쉬운예로 반야심경만 해도 공을 '결여'의 의미로 쓰지 않아요.

석양 2016-03-03 16:21:14삭제  
나는 홍교수의 글을 '강요'라고 생각하지 않고
당신의 댓글도 '강요'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제가 당신에게 제글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특정한 조치를 취하겠다고 엄포를 한 것도 아닐진대 왜 '강요'라고 생각하고, '무섭다'고 느끼시죠?

혹시 제 댓글를 접하고 당신이 믿어왔던 관념이나 편견이 깨질것 같아 두려워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저와 무관하게 당신 내면의 일입니다. 저에게 책임을 전가할 일이 아니라 본인의 내면에서 벌어진 일이므로 잘 해결하세요.

오히려반대죠 2016-03-03 16:53:09삭제  
말이야 바른 말이지 강요는 자칭 초기불자들이 늘상 하는 일이죠. 대승불교보고 불교란 말을 빼라는 둥 대승교라고 쓰라는 둥 너희는 사성제를 부정한다는 둥 간화선을 버리라는 둥. 횡포가 이루 말할 수 없죠.

사성제 2016-03-03 17:34:57삭제  
누가 강요했죠? 대승불자가 초기불자보고 대승불교 믿으라고 "먼저" 강요했나요? 대승을 불교라고 인정하라고 강요했나요? 아니죠. 먼저 시비를 건 쪽이 누구인가요? 초기불자들이 항상 대승불교보고 너희는 불교가 아니다, 불교란 말을 버려라, 대승교라고 해라, 혜능교라고 해라, 조교라고 해라 라는 말을 하면서 먼저 시비 걸고 강요해서 보다 못한 대승불자들이 반박을 하는 거 아닙니까? 전혀 대승불교에서 강요하지 않은 것을 어떻게 그렇게 거꾸로 보는지 알 수가 없군요. 초기불자들의 끝없는 대승불교비방에 반박도 하지 말라는 건가요?

불이법, 참나(깨달음)와 사성제, 팔정도는 절대 양립불가인가요? 공적과 영지는 절대 양립불가인가요? 빛의 입자성과 파동성은 절대 양립불가인가요? 무아와 윤회는 절대 양립불가인가요?

팔정도 2016-03-03 17:46:09삭제  
대승불교 닮았다고 하는 기독교인은 초기불교는 뛰어넘었다고 한다죠? 초기불교 잘못인가요? 초기불교는 이제 기독교에 포함되는 건가요? 기독교 초등반이 배우는 수준이 초기불교인 건가요?

석양 2016-03-03 17:54:52답변  
제 글을 '강요' 로, '공포'로, '무섭다'고 받아들인 것은 당신입니다. 당신 마음안에 벌어진 공포, 무서움을 제가 어떻게 해드릴 방법이 없으므로 당신 스스로 잘 해결하시라 했습니다.

저의 내면의 현실은 '아무런 공포심이 없음'입니다. 당신 스스로나 걱정하세요.

석양 2016-03-03 18:03:55삭제  
이제 당신 내면의 현실을 직시하셨군요

상사도 2016-03-03 18:31:11삭제  
제 견해로는 윤회탈출이 가능합니다, 당연히.
단지 차마 나 혼자 탈출하지 못하겠다는 것이 대승보살도입니다.

석양 2016-03-03 16:25:12답변 삭제  
연기하는 현상계를 떠나 열반에 도달하자,
이렇게 현상계와 현상계를 떠난 열반자리를 상정하고
수행하자고 하신 분이 석가모니 부처님입니다.
이언덕인 현상계를 떠나 저언덕인 열반에 가자,
이건 이원론이 아니면 뭐죠?
석가모니 부처님이야 말로 당신이 비판해 마지 않는 이원론자이시네요.

석양 2016-03-03 17:57:03답변  
계속 따라다니면서 질문공세만 하시는데요, 이제는 저에 대한 공포심이 사라졌나 보네요. 다행입니다.

이제 질문은 그만하시고 스스로 공부하세요

삼법인 2016-03-03 18:44:26삭제  
빛이 입자성과 파동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된다고 못 믿겠다는 사람을 어떻게 설득시킬 수 있나요? 로보트가 되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이 자꾸 로보트가 되어야 겠다고 고집부릴 때 어떻게 막을 수 있나요?

대승불교를 어떻게든 무너뜨리겠다는 굳은 각오를 가지고 막무가내로 시비 거는 초기불교 성전주의자들에게 "공부를 시켜 주"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공부시켜 달라는 것 자체가 이미 자칭 초기불자의 레토릭일 뿐입니다.

등식표현반대 2016-03-03 17:49:08답변  
석양님과 다른 분들이 이용하시는 "초기불교의 공= 무상. 결여.
대승불교의 공=진리의 작용, 청정함,...." 이런 등식표현은 문제가 한없이 많은 전달방식입니다. 이러한 등식 표현은 암기하여 무조건 외우게하는 구세대의 잘못된 교육방법입니다. 우리가 해야할 일은 이런 잘못된 간단한 표현들을 최대한 친절히 정성을 다해 풀고 풀어 사람들이 알아들을수 있게 설명해야 합니다.부처님 말씀은 글과 말로 정성을 다해 긴 호흡으로 풀어야하는 지극히 섬세한 가르침입니다.

석양 2016-03-03 18:02:23답변  
모든 요약방식은 다 구세대의 잘못된 교육방법이겠네요.
제가 많이 쓰지도 않거니와 그게 잘못된 표현방식이라는 것에 동의 하지도 않습니다.  부처님 말씀은 요약하면 안된다는 금기가 있는 것도 난생처음 접합니다. 대학강단 교수들이 강의 할때 간단한 낱말과 등식부호를 이용합니다.  저의 표현이 거슬리면 보지 않으면 됩니다.

등식표현반대 2016-03-03 18:30:30답변  
등식 같은 초간단 표현으로 요약해서는 부처님말씀의 진수를 알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요약한 결론이 중요한것이 아니라 어떻게 이런 결론이 나왔는지 깊게 생각하고 누구나 알아 들을 수 있게 말로 표현해야합니다. 대학교수들이 이렇게 강의한다느니, 동아시아 대승불자들이 어떠어떠하게 생각한다느니 하는 말은 '대중을 이용한 논의 오류'를 범하는 겁니다.

석양 2016-03-03 18:46:45삭제  
모든 사람의 구미에 제가 맞출 도리가 없구요.
당신이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타인들도 이해하지 못할 거라는 단정은 성급한 것이죠.
저는 효과적이서 쓰는 표현이었는데 당신한테는 효과가 없었던 것뿐이지요. 그걸 오류라고 딱지 붙이기 해 본들 의미가 있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남에게 특정한 표현방식을 강요하진 마세요. 아무도 그럴 권리가 없습니다. 저의 표현방식이 맘에 들지 않으면 무시하시면 됩니다.

등식표현반대 2016-03-03 19:12:21삭제  
등식 같은 초간단 표현으로 배움을 받으면 학생들은 사지선다형 질문에 답은 할 수 있을지 몰라도 한 문장 이상으로 설명하지는 못하게 됩니다. 결론은 들어봐서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말로 풀어 설명하라니, "아몰랑"이지요. 후세대를 위해서도 그 어떤 초간단표현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석양 2016-03-03 19:38:51삭제  
후세대까지 배려하시는 님의 생각은 존중해 드릴테니
타인의 표현방식에 대해서 강요하지 마세요.
저는 필요에 따라 효과적이라고 판단될때 등식이나 부등식 표현을 쓸겁니다.

대승불자가석양님께 2016-03-03 14:39:26답변  
좋은 댓글들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자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보면 空이지만 공은 곧 연기가 아닙니까? 연기때문에 자성을 결여하게 되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결여의 측면에서는 공이지만 연기의 측면에서는 살아 움직이는 삶이요 현상세계라고 보아야 겠지요. 그리고 홍교수가 위의 어디에선가 공을 연기와 같은 것으로 즉 공이 단지 연기법의 논리적 결과라고 쓴 것 같은데요... 그렇다면 홍교수가 자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했지 모두 텅 빈 상태라고 한 것은 아니지 않을까요. 연기하는 현상세계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으니까요. 공을 그냥 논리적 개념이라고 했으니,무엇이 공하다는 것은 그것이 자성이 없다는 것이지 그것의 존재 자체가 없다는 이야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글쎄, 열반에 대해서는 무슨 이야기를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석양 2016-03-03 16:26:47답변  
거듭 말하지만 홍교수의 주장, 공을 결여로 부정적으로만 쓰자는 주장은 초기불교 현상관에 딱 들어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대승에서는 공을 결여의 의미로만 쓰지 않는다구요. 대승에서는 홍교수가 코미디로 조롱받을 것이라고 우려해 마지 않는 '실재'로 놓고 교리를 전개합니다. 그게 대승의 본성관입니다. 홍교수가 인정하든 하지 않든간에 대승의 가르침이 그렇습니다. 홍교수는 대승과 소승을 마구섞어 놓고, 혹은 구분하지 않은 채 그냥 '통불교'로 놓고 현상관에 맞는 공 개념을 적용해 한다고 주장하는데 그렇게 되면, 홍교수는 '대승불교는 없는샘 치고' 공을 '결여'의 의미로만 쓰자,라고 주장하는 격인데요, 동아시아 대승불자들이 동의해 줄까요? 언감생심이죠.

홍교수가 열반에 대해 글을 쓴다고 하니 기다려봅시다.

허수아비때리기오류 2016-03-03 18:10:02답변  
석양님은 '결여'라는 단어를 석양님이 좋아하시는 존재론적으로 해석하시는데, 홍교수는 '결여'를 '논리적'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논지아닌가요? 지난번 한자경교수가 홍교수의 논지를 한교수가 좋아하는 존재론적으로 해석하여 문제가 생긴 것처럼 석양님도 같은 '허수아비 때리기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석양 2016-03-03 18:42:21답변  
한자경교수나 저의 문제가 아니고요 대승에서 공을 존재론적으로 다루고 있어요. 홍교수 혼자 초기불교의 현상관에 입각해서 공을 특정한 개념으로만 써야 한다고 아무리 말한들 그게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

허수아비때리기오류 2016-03-03 19:25:26삭제  
석양님, 동아시아 대승불자들이 어떠어떠하게 생각한다느니 하는 말은 '대중을 이용한 논의 오류'를 범하는 겁니다.

석양 2016-03-03 19:48:46삭제  
'대중을 이용한 논의 오류'인지의 여는 님의 생각대로 하세요.
대승불교자체도 그렇고 대승불자들도 그렇고 오래전 부터 대승식 공의 개념이 있어왔던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홍교수가 이 사실을 알고 말하는지 모르고 말하는지 몰라도 대승권에서 공이 어떻게 쓰여지는 여부와 상관없이 자기 방식의 공만 써야 한다면 해 보시라고 하세요. 저는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에둘러 표현한 것입니다.

당신식으로 하면 홍교수는 '대승의 공개념에 대한 무지의 오류' 정도로 규정되겠네요.

이젠 2016-03-03 19:57:13삭제  
소승의 오류도 지적해 주세요.

허수아비때리기오류 2016-03-03 20:10:40삭제  
"당신식으로 하면 홍교수는 '대승의 공개념에 대한 무지의 오류' 정도로 규정되겠네요" 또 석양님 촣아하는 방식으로 해석하시네요, 아니면 논리적요류논을 모르시나. "무지"와 "무지의 오류"를 구분 하지 못하다니. 답답해서 난 여기서 퇴장.

다르긴뭐가달라요사람이다르지 2016-03-03 15:50:57답변 삭제  
결국, 마성님과 홍교수와 논지는 같다고 보여지네요.

"개념은 서로가 다르다" 이거맞죠?

무유정법 2016-03-03 21:38:20답변 삭제  
연기즉공
공즉연기

무유정법 2016-03-03 21:46:42답변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항상 마하 반야바라밀다 심경을 암송하면 큰 이익이 있으리.

관자재보살기도문인가 2016-03-03 23:09:25답변 삭제  
암송, 이익?
기독교의 주기도문과 같은 가 보네...

너무 대승교 수준을 떨어뜨리는 거 아녀~~~
H-학당의 대승교학에서 그만 헤어나시구려...

윤회 탈출도 없다드만...
달랑 에고 소멸까지만 있고... 그것도 농담이라던 것 같고...

좋은주문이긴한가봐 2016-03-03 23:13:21답변 삭제  
「그러므로 반야바라밀다는
가장 신비(神秘)한 진언(眞言)이며
가장 밝은 진언이며
최상(最上)의 진언(眞言)이며
비할 바가 없는 진언(眞言)이니라.
능히 일체(一切)의 괴로움을 소멸시키며
진실(眞實)하여 허망(虛妄)하지 않느니라.
그런고로 이 반야바라밀다를 설(說)하느니라」

무유정법 2016-03-03 23:35:56답변 삭제  
소승교로는 법집을 깨기도 정법을 보기도 하늘의 별 따기 보다 어렵다.
분별을 버려라.

일체유심조 2016-03-04 06:03:49답변 삭제  
일체 만법이 공하다.
오직 식작용 뿐이다.
비우고 비우고 또 비우고...
놓고 놓고 또 놓고...
바른 법을 깨쳐 깨쳤다는 생각도,한 법도 세우지 마라.
열반에 이르는 길이다.

일체유심조 2016-03-04 06:12:28답변 삭제  
도닦음은 비움이다.
모든 철학,관념을 비워라.
철학도 관념일 뿐이다.
비워라.
비워야 얻는다.

호잔 2016-03-04 08:38:08답변  
위에서 아비담마의 사라짐에 대해 저와 일체유심조님사이에 댓글이 오간 것이 있는데, 그에 대한 답변입니다.
일체유심조님이 아비담마와 구사론 유식 등이 어떤 논서인지 바르게 아실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 아비담마를 결집한 3차결집에 대한 아래의 글을 올립니다.

한국인 유일의 삼장법사 스님이신 아짠 빤냐와로 스님께서 올해 한국테라와불교 서울법회의 법문 주제로 ‘테라와다 불교사’를 마무리하시고 나면, 올해 말이나 내년에 테라와다불교 재가자 모임에서는 책으로 출판할 예정인 내용의 일부입니다.
현재 한국불교에서 알고 있는 불교사는 거의 대승불교 관점에서 기술된 내용이므로 테라와다불교 관점에서 기술된 불교사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봅니다.

참고로 한국테라와다 불교의 본원은 얼마전에 시마홀 지정의식을 한 경주 마하보디선원입니다.
삼장법사 스님이 살아계실 때, 삼장법사 스님을 중심으로 한국테라와다불교 교단의 뿌리를 튼튼히 해야 할 텐데, 여러 가지 이유로 쉽지 않습니다.
남방에서 테라와다 비구계를 받은 스님들조차도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중간 생활을 중도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대승불교에 붙어 생활하거나 독자적으로 자기 나름의 길을 가려고 하고, 처음에 한국테라와다 불교교단에 참여한 스님들도 여러 가지 이유로 교단의 활동에 거의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와 일체유심조님 간의 마지막 댓글에 대해,
열반을 향해 노력을 하고 있지만 해탈하거나 열반하고 싶다고 하여 그렇게 쉽게 도달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원인과 조건이 맞고 공덕이 그를 받쳐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의욕(찬다)도 없는 어리석음 마음이나, 탐욕 부류나 성냄 부류의 마음에 따라 일어나는 두려움으로는 아무리 노력해도 결코 해탈하거나 열반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아 래-

<제 3차 불교 결집> 

모처럼 빈틈없이 확정한 성전도 바꾸려고 하고 자신들의 주장대로 펼쳐 나가려고 하면서 제2차 결집으로부터 아소까왕이 나올 때까지의 근 백년간 부파의 분열은 원래대로 돌아가기는커녕 더욱 더 분열해 버렸습니다. 대중부는 한층 더 몇 개의 부파로 분열되고, 북서 인도에서는 설일체유부가 생겨나 남서 인도의 원 줄기인 테라와다로부터 분리되어 헤어져 버렸습니다.

역사적 관점에서 보자면, 원래의 테라와다란 한 줄기로부터 17개의 부파로 분리된 것입니다. 디빠왕사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테라와다는 거대한 니그로다 나무와 같이 가장 뛰어나다. 모자라지도 않고 넘치지도 않은 최고의 승리자의 가르침이다. 마치 나무에 있는 가시와 같이 나머지 17개 부파들이 생겨난 것일 뿐이다.”

중요한 부파의 이름이 몇 개 있습니다. Sarv&#257;stiv&#257;da(설일체유부), Sautr&#257;ntika(경량부), &#346;alia(산주부), Praj&#241;&#257;ptiv&#257;da(설가부), Vetulya(Vedula, Vedala, 방광부)들입니다. 이들은 자신들 만의 경전을 갖고 있는 부파들입니다. 테라와다는 유일하게 암송에 의해 전승돼 온 빨리어 경전 삼장 전체를 갖고 있습니다. 다른 부파들은 산스크리트어로 경전을 보존하고 다른 언어로 번역했습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빨리어, 산스크리트어, 티벳어, 중국어 같은 5, 6개의 다른 언어로 된 율장과 경들이 현재 존재하는 것입니다. 

부처님 입멸 218년 후에 즉위한 아소까 왕은 갠지스와 인더스의 양대 강을 포함한 인도 북부를 정복하고 마우리야 왕조의 제3대 왕이 되어 데칸 산맥의 인도 남부까지 정복하여 인도 전 국토를 지배했습니다. 아소까 왕의 시대는 정치, 사회, 경제적인 면에서 비교적 안정되었던 시기여서, 이것이 종교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상가의 구성원들은 함께 지켜야 할 오직 하나의 율장이 존재하는데, 출가자는 이 공통의 율을 지키는 것으로 같은 소속감을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역적인 확장에 의한 지방적 특성이나 시대의 변화에 따라 일어난 현실적인 문제 등으로 인해 각각의 지역에서 각각의 율장을 가지게 되면서, 각기 다른 부파로서의 자각을 갖게 되고, 다른 집단으로서 독립된 행위를 하는 결과가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즉, 견해를 같이 하는 사람끼리 각 지역을 중심으로 상가를 구성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분열하지 않은 하나의 테라와다와 제각기 분열한 17개의 분파로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아소까왕은 스스로 깊이 불교에 귀의하였지만 교단이 점점 부파로 분열하고, 많은 부파에서 경이나 율이 자의적으로 편찬되어, 불교가 서서히 쇠퇴해 가는 상태를 걱정하여 마우리야 왕조의 수도 빠딸리뿟따에서 부처님의 바른 말씀을 따르는 종파를 찾아내기 위하여 BC 3세기에 제3차 결집을 소집할 것을 상가에 권유하였습니다. 

제3차 결집은 불교교단 내부의 교리적 분쟁을 원인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 불교교단 내부에 들어온 외도들에 의해 생겨난 혼란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즉 아소까 왕의 불교귀의 이후 왕가의 후원이 불교에 집중되자 많은 외도들이 왕가의 후원을 얻기 위해 불교에 귀의하게 되면서 교단에 내부적으로 교리적 계율적 혼란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올바른 빅쿠들은 승려인 척 행동하는 외도들과 함께 포살하는 것을 거부하게 되어 7년 동안 아소까라마(Asok&#257;r&#257;ma) 사원 등에서는 포살이 중단되었습니다. 

이에 장로들은 아소까왕의 이 권유가 시기에 맞고 이치에 맞아, 적어도 남서 인도의 테라와다는 제3차 결집에 적극적으로 참가했습니다. 그래서 테라와다의 사서에 이 제3차 결집의 기사가 자세히 기록됩니다. 

대조적으로 대중부를 비롯한 부파 계통의 사서에는 제2차 결집의 기사는 실려 있지만, 이 제3차 결집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율을 바꾸고 불교의 정신과 빅쿠의 출가 생활을 어지럽혀 아소까왕의 권유와 후원에 의해 실시된 제3차 결집에서 배척되어 버렸기에 나쁜 것을 기록하고 싶지 않았던지, 대중부계를 비롯한 각각의 부파가 이 후에 급속히 쇠약해져서 기록하는 여력조차 없어졌든지 이 3차 결집이 언급되지 않고 있습니다. 

아소까왕 시대에 남서 인도의 테라와다에서 분열했던 북서 인도의 설일체유부도 자파의 사서에 아소까왕의 사적을 많이 싣고 있지 않습니다. 그 뿐 아니라 앞의 제2차 결집과 아소까왕의 제3차 결집을 함께 적어 「불멸 백년 후 아소까왕의 시대에 제2차 결집을 실시하여 테라와다와 대중부의 2개파로 분열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설일체유부도 아소까왕과 견해가 맞지 않았던 것인지 기록의 실수인지 설일체유부가 없어진 지금은 확인할 방법이 없습니다. 

붓다왕사(Buddhavaṁsa, 불종성경)와 마하왕사(Mah&#257;vaṁsa, 대사, 대왕통사)에 의하면, 아소까 왕은 당대의 가장 탁월한 빅쿠 스님인 목갈리뿟따 띳사 장로에게 자문을 구했습니다. 목갈리뿟따 띳사 장로는 왕에게 상가의 이상적인 형태로서 위밧자와다(Vibhajjav&#257;da)라는 분별가르침을 따르는 것을 기준점으로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왕은 각 부파의 대표들과 인터뷰를 하면서 부처님은 어떻게 담마를 설하였는가를 물어, 부처님은 담마를 분별하여 가르친 분이라는 것을 받아들일 것인지 아닌지 질문을 했습니다. 예라고 답한 사람들만 교단에 머물게 하고, 그렇지 못하고 단멸론이나 상주설 등 삿된 견해를 지니고 이설을 주장하는 자에게는 빅쿠가 아니라고 선언한 후 흰옷을 입혀 환속시켰습니다. 그 수가 무려 6만명이나 되었습니다.

이렇게 교단은 다시금 통합되고 교설은 청정해지게 되었기에 상가는 모여서 포살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목갈리뿟따 띳사 장로는 이렇게 승인된 수많은 빅쿠 중에서 오랜 경험으로 확신에 차있고, 여섯 종류의 신통력을 갖추었으며, 삼장에 능통하고, 무애해도를 갖추고, 삼명을 구족한 천명의 빅쿠들을 선발하여 법과 율을 다시 확인하고, 모든 이설을 까타왓투(Kath&#257;vatthu)라는 논서를 설하여 논파하고 청정하게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천명의 빅쿠들에 의해 빠딸리뿟따의 아소까라마에서 불멸 후 236년 음력 9월 보름 안거해제일인 자자(Pav&#257;raṇ&#257;)날까지 9개월에 걸쳐 법의 결집을 행하였습니다. 이 결집을 제3차 결집이라고 합니다. 

한편 설일체유부의 승려들은 이 결정을 거부했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은 과거 현재 미래(sabbaṁ asti; atthi)에 존재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반면 테라와다는 현재의 순간만이 존재하는 것을 유일하게 입증할 수 있는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후에 대승불교에서 나가르주나(Nagarjuna, 용수)는 설일체유부의 그릇된 관점을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연기법에 뿌리를 둔 공(sunyat&#257;) 사상에서 나가르주나는 아무것도 스스로에 의존해서는 존재할 수 없음을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견해의 사람들을 소승(Hinayana)이라고 불렀습니다. 따라서 소승(Hinayana)이라는 말은 설일체유부를 가리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과거 현재 미래의 존재를 주장한 유일한 부파였기 때문입니다. 

테라와다의 목갈리뿟따 띳사 장로를 의장으로 한 이 제3차 결집의 특징은 경장과 율장의 재확인뿐만 아니라, 이 때 처음으로 논장 아비담마의 편찬이 명기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그것은 빨리 아비담마 7론의 마지막 「논사」이므로 이때까지 논장도 거의 정리하고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빨리 성전의 논장인 아비담마는 경전의 엣센스를 분류하여 집성한 것으로 경전의 가르침을 한 발자국도 바꾸는 것이 아니지만, 주로 제자들의 손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경장이나 율장과 달리 부처님의 직설이라고는 말하기 어려운 면도 있습니다. 그 때문에 이 제3차 결집까지는 어느 논장도 이름마저 기록되고 있지 않았습니다. 

「논사」성립의 사정이 특수하기 때문인지 여기에 이름이 나왔습니다. 이 논장은 부처님 이래의 성전으로부터 빗나간 여러 가지 이견·사악한 견해를 한 개씩 비판하며 논파한 논문입니다. 그 견해의 수가 216가지에 이릅니다. 이것은 불멸이후로부터 2백여년이란 기간 동안 그만큼 많은 이설이 배출되고 성전이 삐뚤어져 제자들이 여러 가지 부파로 분열해 버렸다고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와 같이 제2차, 제3차 결집까지 부파가 계속 분열했고, 많은 부파에서 성전도 자의적으로 개편되고 있었기 때문에 「현존하는 빨리 성전도 시대와 함께 상당한 변천을 거쳐 왔을 것이다」라고 학계에서는 잘못되게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의해서 기록을 읽어 보면 대부분의 부파가 성전을 개편하는 중에도, 단 1줄도 경장과 율장을 바꾸는 일 없이 완고하게 지켜온 파가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 파는 남서 인도의 테라와다입니다. 그들은 지금도 빨리 성전을 계속 보관 유지하고 있지만, 그것이 어떠한 개편을 받은 흔적도 없으니 당연히 제3차 결집 때에도 전혀 개편된 것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빨리 성전도 개편되었을 것이다」라는 생각은 어떤 증거에 근거하는 올바른 추측이 아니라 단순한 억측이라는 것이 됩니다. 

제3차 결집에서 아소까 왕은 담마를 전 세계에 전파시키기를 원했습니다. 그리하여 아소까 왕의 제안을 받아들여 목갈리뿟따 띳사 장로는 앞으로 또 다시 이런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혼란이 없기를 바라며 포교승을 파견할 9개국을 선택하였습니다. 서쪽으로는 요나까(Yonaka, 지금의 그리스 지방) 사람인 담마락키따(Dhammarakkhita) 장로를 아빠란따까(Aparantaka, 인도 서해안) 지역에, 더 아래 서쪽으로는 마하담마락키따(Mah&#257;dhammarakkhita) 장로를 마하랏타(Mah&#257;raṭṭha, 데칸산맥 서북부) 지역에, 더 나아간 서쪽으로는 마하락키따(Mah&#257;rakkhita) 장로를 요나까 지방(Yonakaloka, 서북쪽 인도 국경지역)에 보내었고, 북쪽으로는 맛지마(Majjhima) 장로를 히마완따(Himavanta, 히말라야 지방인 지금의 네팔) 지역에 보내었고, 동쪽으로는 소나까(Sonaka) 장로와 웃따라(Uttara) 장로를 수완나부미(Suvaṇṇabh&#363;mi, 지금의 캄보디아, 태국, 인도네시아, 버마 남부)에 파견하였습니다. 남쪽으로는 마하데와(Mah&#257;deva) 장로를 마히사까만달라(Mahisakamaṇḍala, 데칸산맥 동남부) 지역에, 더 아래 남쪽으로는 자신의 동주(Saddhivih&#257;rika)제자인 마힌다(Mahinda) 장로와 잇디야(Iddhiya) 장로와 웃띠야(Uttiya) 장로와 삼발라(Sambala) 장로와 밧다살라(Bhaddas&#257;la) 장로를 땀바빤니(Tambapaṇṇi, 스리랑카)에 보내었고, 서남쪽으로는 락키따(Rakkhita) 장로를 와나와시(Vanav&#257;si, 데칸산맥 서남부)지역에, 서북쪽으로는 맛잔띠까(Majjhantika) 장로를 까슈미라 간다라(Kasm&#299;ragandh&#257;ra, 지금의 페샤와르와 라왈삔디 지역)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확립하여 전파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렇게 목갈리뿟따 띳사 장로의 제안으로 상가에서 결정하여 각 지역에 파견된 장로들은 각각 다른 4명의 동료들과 함께 그곳에 도착하여 중생들의 깨달음을 위하여, 그리고 각 지역에 부처님 가르침의 확립을 위해 힘썼습니다. 

그러므로 제 3차 결집의 중요성은 분열된 상가의 단일 교단으로의 정화와 불교 역사상 처음으로 인도의 영역을 넘어 포교단을 파견한 일입니다. 이 두 가지는 매우 중요합니다.

테라와다라는 말은 제3차 결집 후에 대중적으로 유명해졌습니다. 그렇다고 제3차 결집 이후를 테라와다의 시작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테라와다 사람들은 그들의 기원은 적어도 제2차 결집을 주도했던 Sthavirav&#257;da(장로의 견해)까지 거슬러 올라가므로 부처님 시대까지 이른다고 말합니다.

한편 대승불교는 우리가 이용 가능한 어떤 역사적 자료에 의하든, 지금까지 대승(Mahayana)의 존재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북전의 자료에서 설일체유부는 3차 불교 결집 이후 인도의 북쪽 지방을 행동의 중심지로 선택했습니다. 이것이 결국에는 대승(Mahayana)운동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설일체유부는 불교 사상을 확장하고, 마지막으로 대승이 일어난 곳으로 확장하는데 기여했습니다. 

불교역사는 이때부터 테라와다의 중심지가 인도에서 스리랑카로 옮겨지게 됩니다. 그렇다고 테라와다 불교가 기원전 3세기 이후에 인도에서 고사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여전히 인도에 남아 있었습니다. 

인도의 테라와다 사람들의 활동에 대한 증거들은 약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부처님 입멸 후 인도에서 쓴 유명한 3권의 책이 기원전 3세기에 스리랑카에 소개되었습니다. 그 책들의 이름은 (1)Nettipakar&#257;ṇa(수행 안내서, 指導論) (2)Peṭakopadesa(부처님 가르침에 대한 입문서, 藏釋論) (3)Milindapa&#241;h&#257;(밀린다왕문경)입니다. 이 경전들은 현재 빨리어 문헌에 포함되어 있으며 ‘후 빨리어경전’ 텍스트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처음 두 책은 기원전 1세기에 속하는 것으로 생각되고 있습니다. 밀린다왕문경(1~88 pp. PTS본)의 처음 부분 역시 기원전 1세기에 속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반면 그 책의 두 번째 부분(90~420 pp.)은 아마도 기원후 1세기에 테라와다 사람들에 의해 덧붙여졌을 것입니다. 밀린다왕문경의 앞부분은 중국어로 번역되었습니다. 

아소까 왕의 공헌은 목갈리뿟따 띳사 장로에 의해 시작된 포교활동을 후원한 것입니다. 포교단들은 스리랑카, 캄보디아, 버마를 포함하여 9개국에 보내졌습니다. 그 중 가장 성공적인 경우는 스리랑카였습니다.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마하왕사와 붓다왕사 같은 스리랑카 역사의 기술가들은 불교가 스리랑카에서 꽃피우도록 운명 지어진 이유를 입증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마하왕사에 의하면 부처님은 스리랑카를 몸소 3번 방문하셨으며, 제석천(Sakka deva)에게 스리랑카의 Vijay&#257;(승리, 영광)를 지키도록 요청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부처님의 예지력은 스리랑카라는 땅이 불교의 땅이 될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마하왕사에 따르면 부처님 살아계실 때 보리수나무 가지가 스리랑카로 보내졌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연대기의 기술가들이 얼마나 불교와 스리랑카의 연결고리를 확립하려고 했나를 보여줍니다. 

테라와다는 제3차 결집 후에 아소까왕의 추천에 따라 왕의 친족인 마힌다 장로를 필두로 불교를 스리랑카에 전하여서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제3 결집 뒤에 마힌다 장로를 시작으로 테라와다가 스리랑카에서 포교를 시작한 경위는 「디빠왕사(도사)」 「마하왕사(대사)」 등 스리랑카의 사서에 상세히 설명되고 있습니다. 테라와다는 스리랑카에 건너가서는 다른 부파와 거의 관련 없게 되었습니다. 다른 부파가 인도에서 소멸되었어도 테라와다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스스로의 경위를 세세하게 적고 있기 때문에 스리랑카 테라와다의 역사나 사적은 현대의 학계에서도 의심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 중에 빨리 성전에 관해서는 스리랑카에 건너가고 나서 현재까지 어떤 변경도 없이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았다는 것을 학계에서도 거의 이해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 의문시되고 있는 것은 「스리랑카에 건너가고 나서나 혹은 남서 인도에 있었을 무렵에 이미 테라와다의 성전이 부처님 당시의 마가다어로부터 현존하는 빨리어로 번역된 것은 아닌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서 등에 전혀 기록되지 않았는데 이러한 의문이 일어나는 「근거」로 2가지를 들고 있습니다.

그 하나는 인도에 남은 제 부파의 경이나 율이 현지의 방언으로 번역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원본은 이미 없어졌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한역된 문헌의 원어가 마가다어 혹은 「빨리어」가 아니라, 예를 들면 북서 인도의 간다라어 등과 유사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으로부터 학계에서는 「역시 제 부파는 성전을 현지의 언어로 번역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빨리어도 그럴 것이다.」라고 추측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서 아무 증거도 없는데 다른 부파의 것이 그렇다고, 어째서 테라와다의 빨리 성전도 그럴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현재의 빨리 성전 언어가 부처님 당시의 마가다국에서 사용되고 있었을 「반마가다어」라는 것입니다. 

「반마가다어」는 부처님과 동시대에 마가다국 등에서 활동하고 있던 자이나교의 조사나 제자들에 의한 문언에 남은 것입니다. 마가다어도 빨리어도 지금은 사어(死語)가 되어 버렸기 때문에 자이나교의 문헌은 부처님 당시 마가다어의 흔적을 더듬는 귀중한 자료입니다. 

그러나 「반마가다어」는 「반」이 붙듯이 완전한 마가다어라고 할 수 없는 방언과 같은 것입니다. 그것과 빨리 성전의 언어가 일부 다르다고 해도 빨리어가 완전한 마가다어일 가능성은 당연히 남습니다. 

불멸 2백여년 후 아소까 왕에 의한 법칙비문으로부터 빨리 성전의 언어 문제가 추정되고 있습니다. 아소까 왕은 인도 각처에 그 지방의 언어로 비문을 세웠고 테라와다가 활동하고 있던 남서 인도의 피샤체어와 마가다 지방의 「마가다어」로도 법칙문을 새겼습니다. 

그렇지만 「빨리어」는 그 어느 쪽과도 조금씩 다릅니다. 「아소까 왕 비문의 「마가다어」와 빨리 성전의 언어가 조금 다르기 때문에 「성전은 마가다어로부터 빨리어로 번역되었을 것이다」라고 학계에서는 말하지만, 부처님의 시대로부터 2백년이나 후의 「마가다어」가 부처님 당시의 마가다어와 같을 수는 없습니다. 조선시대의 한글과 현대의 한글을 비교해 보면 상상할 수 있겠지요. 

빨리 성전의 언어는 아소까 왕 당시의 남서 인도 피샤체어와도 조금 다르기 때문에 피샤체어이지도 않습니다. 게다가 양자 간에 닮은 점이 있다고 해도 빨리 성전이 남서 인도의 피샤체어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빨리 성전의 언어는 그것을 말하는 장로들과 함께 2백년간이나 그곳 사람들의 종교 생활의 지침이 되고 있었으니까요. 

이와 같이 「성전어가 마가다어로부터 빨리어로 번역되었다」라고 말하는 것은 언어로부터 살펴봐도, 사서 등의 문헌 자료로부터 살펴봐도, 그 증거는 전혀 없습니다. 다른 부파의 성전은 번역되었을지 모르지만, 빨리 성전만은 어떤 다른 언어로부터 「빨리어」로 번역한 흔적이 발견되지 않기 때문에 빨리 성전은 처음부터 그 언어로 말해졌고 그것이 그대로 어떤 변형도 받지 않고 현재에 이르고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 자연스럽습니다. 

원래 부처님의 말씀 그대로의 성전을 전혀 바꾸지 않고 계속 보관 유지해 온 테라와다가 설혹 어떤 이유가 있어도, 언어가 비슷해도, 그 금언을 다른 현지의 언어로 번역했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번역 자체가 성전을 변경하는 큰 문제이기 때문에 변경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테라와다는 스리랑카에서 글로 남길 때에도 빨리 성전을 스리랑카의 싱하라어로 번역하여 적지 않고 빨리어 그대로의 발음을 적었습니다. 빨리 성전은 빨리어인 채입니다. 

아소까 왕의 시대에 테라와다는 스리랑카에 전해졌지만, 인도에서는 테라와다가 일정기간 유지되다가 서서히 사라진 것 같습니다. 아니면 마힌다 장로의 포교단이 정착한 이후에 서서히 스리랑카로 이동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인도에 남은 다른 대중부의 부파도 똑같이 사라져 버립니다. 계율까지 바꾸어 버린 대중부 여러 부파는 아소까 왕에 의해 배척되고 나서 2~3백년 내에 그 성전과 함께 역사의 저 멀리로 사라졌습니다. 

그 중 설일체유부는 부파 중에서 끝까지 남아 인도 북서부의 바라문교와 대항하면서 기원 전∙후부터의 산스크리트(Sanskrit)어 붐을 타고 자파의 논문(대승의 「논장(아비다르마)」이라고 하는 「불교에 관한 개인의 논문」)을 산스크리트어로 써서 대승불교와 같이 중국이나 티벳으로 이동합니다. 

그 후 기원후 3~4 세기에는 설일체유부의 아비다르마와 대승의 「중관파」가 합쳐져서 「유식파」도 나타나면서 그것과 대항하다가 유부 자신도 기원후 7세기 무렵에는 결국 멸망해 버립니다. 

이와 같이 원어를 버려 버리고 번역한 것을 포함하여 부처님의 성전을 조금이라도 바꾼 부파는 모두 멸망해 버렸습니다. 제1차 결집으로 확정한 성전을 전혀 바꾸지 않고 그 후에도 계속 보관 유지해온 테라와다만이 스리랑카나 동남아시아를 거쳐 온 세상에 지금도 맥을 같이하며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유일하게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는 테라와다의 빨리 성전을 최초 결집부터 말도 내용도 변함없이 이어서 전승하여 온 부처님의 말씀(Buddhavacana) 그 자체라고 하는 것입니다. 

현존 빨리 성전이 부처님의 가르침 그대로인가를 확실하게 확인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 방법이란 빨리 성전을 스스로 읽고 말해진 내용을 스스로 실천하여 이해하고 확인하는 것입니다. 가르침의 내용에 직접적으로 접하다 보면 그것이 부처님의 말씀 그대로라는 것을 스스로 분명히 압니다. 

스스로 깨달아서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는 가르침이기 때문에 그것이 부처님이 말한 가르침인가 하는 것은 거기에 깨달음의 길이 나타나고 있는지 없는지 스스로 확인하면 압니다. 

누구에게나 분명하게 나타내 보인 불변의 가르침은 요구하기만 하면 금방 손에 넣을 수가 있습니다. 성전은 지금도 여기에 그대로 있습니다.

일체유심조 2016-03-04 09:11:02답변  
아비담마와 구사론 유식 ...등등은 기본적인 것이고,
삼장법사가 대단한 인물이지만 삼장을 달달 외운다고 정법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초기경전에도 이런 글이 있으니 찾아 읽어보세요.
아짠 빤냐와로 스님의 경지라 해봐야 수다원이나 그 밑의 경지일 것이고,물론 개인생각입니다.
본인 생각에 반박한다면 아짠 빤냐와로 스님과 법거량으로 확인할 용의도 있으니 기회를 만들어 보세요.

호잔 2016-03-04 09:20:44답변  
한국테라와다불교 교단 부산법회나 대구법회 또는 서울법회에 참석하시면언제든지 삼장법사 스님과 법거량을 하실 수 있습니다.
서울 법회는 매달 3째 주 토요일 10부터 탁발법회와 함께 진행됩니다.
이번 서울법회는 3월 19일 오전 10시 부터 입니다.
법거량은 거창하게 한다고 바르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호잔 2016-03-04 09:26:28답변 삭제  
아, 서울법회 장소를 말하지 않았군요.

*장소: "우리는 선우"
(서울시 중구 동호로 24길-14. 지하철 3호선 동대입구역 2번출구.
우리함께빌딩 6층)

*문의: 한국테라와다불교 재가운영회
임창균(성천)사무국장 010-6206-9441
이수미(꾸살리)총무 010-2420-7426

일체유심조 2016-03-04 09:30:29답변 삭제  
법거량이란 선불교의 법거량이 아닙니다.
초기불교의 경지를 문답으로 확인한다고 보면 됩니다.
삼장법사란 분이 본인을 만나러 와야 정상입니다.

일반법회말고요 2016-03-04 09:45:13답변 삭제  
공개법거량은 선불교서나 가능한 얘기구요.

공개토론을 여시면 저도 참가할께요.
초불과 대불의 공개토론이 기대됩니다....

일체유심조 2016-03-04 09:20:59답변  
남방불교의 최고라 하는 아잔브람스님의 경지도 기껏해야 사다함과나 그 이하에 불과합니다.
이 역시 개인생각입니다.
확인할 용의가 있으니 이도 기회를 만들어 보세요.
대승불교를 만만하게 보면 큰 실수를 하는 겁니다.

호잔 2016-03-04 09:48:09답변  
법거량을 할 용의가 있으시면,
위 임창균(성천) 회장님에게 전화를 한번만 해 주세요.
추진해 보겠습니다.

공개로하시면 2016-03-04 09:55:57답변 삭제  
저도 참가합니다...

일체유심조 2016-03-04 11:07:30답변 삭제  
삼장법사에게 먼저 물어보세요.
본인을 만나러 올 용의가 있는지?

일체유심조 2016-03-04 11:10:27답변  
아잔브람스님에게도 물어보세요.
본인을 만나러 올 용의가 있는지?

호잔 2016-03-04 12:15:10답변  
아잔브람 스님은 저가 한번도 친견한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저가 접촉할 수 있는 스님이 아닙니다.
아짠 빤냐와로 삼장법사 스님은 저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적어도 한 달에 한 번 이상은 친견하고 있는 스님이므로 삼장법사 스님과의 법거량만 추진할 수 있습니다.
누가 만나러 가고 만나러 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누가 누구에게 먼저 물어보고 나중에 물어보고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연락이 되어야 하므로 전제조건을 달지 마시고, 법거량 용의가 있으시면 전화번호만 남겨 주세요.
여기에 공개적으로 전화번호를 남기기가 힘드실 것 같으므로,
위 댓글에 있는 성천 회장님의 연락처에 전화나 메시지 한 통만 남기시면 됩니다.
정말로 법거량 용의가 있으시면 간단히 연락처만 남겨 주시면 됩니다.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연락이 없으시면 무책임하고 적지 않은 불선업이 되는 님의 해로운 쓰레기 댓글이라고만 판단하겠습니다.

일체유심조 2016-03-04 12:25:46삭제  
그러면 장소는 부산법당으로 합시다.
시간과 날자는 여러분들이 편하도록 거기서 정하시오.
많은 분들의 참석 바랍니다.
의심도 병이라!
그리 비워라 했거늘.

일체유심조 2016-03-04 12:27:16삭제  
전번은 만나면 자연히 알게될 것이고.
아주 나쁜 버릇이구만.

일체유심조 2016-03-04 12:32:33삭제  
약속은 1분 1초도 틀리면 안됩니다.
자신있으면 서로 믿고 법을 논해 봅시다.
참석할 분들도 있을 것 같으니 여러분들이 상의해 날자와 시간을 정하면 참석합니다.
불자가 사람을 못믿으면 불자라 하면 안되지.

일체유심조 2016-03-04 12:41:52삭제  
삼장법사 전화번호를 알려주면 본인이 지금 전화할테니 연락처 적어보세요.

일체유심조 2016-03-04 12:56:28삭제  
도과를 얻은 자는 중생이 원하면 지옥이라도 두려움없이 가야 하리.

신앙불교 2016-03-04 16:25:42삭제  
세계학계의 연구마저 무시하고 대승불교를 힌두논사가 만들었다 주장하고 마가다어가 빨리어라고 주장하던 전통적 신화가 마가다어와 빨리어가 다르다고 학계에서 논파되자 이제는 자기들만은 번역되지 않아서 어떤 변형도 없었다고 하고(빨리어가 부처님 직설이라야만 하는 신앙이 그들에게는 있음) 니까야는 일점일획도 틀리지 않다고 하는 니까야 무오설을 주장하는 사람들과 대화가 될지 모르겠네요. 어떤 면에서 남방 본토보다 더 광신적인데......

성장하자쫌 2016-03-04 17:26:04삭제  
다 큰 어른들이
중2 병에 걸린 것 같다

문제는필요에따라초불대승갈아타는기레기즘 2016-03-04 18:04:19삭제  
신앙불교님 말씀처럼 그렇죠.

그동안의 잘못된 오류둘은 이제 바로 잡혀 나아가야 한다 보여집니다. 그러기 위해선 공개토론이 답이죠.

누구들만의 게임과 리그가 되지 않기 위해서 말이죠...

이무슨음해 2016-03-04 10:03:56답변 삭제  
음모론 입니까?
이런식 마시고요, 풀어서 그댓글에다 토 다시면....

유식 2016-03-04 11:28:54답변 삭제  
삼장 달달 외우는 거 잘하면 법위가 높아요,
경전 뜻을 몰라도 되고 토씨하나 안틀리고 다 외우면 상위등급으로 올라갑니다. 새파란 승려가 법납높은 늙은 승려보다 더 위인 경우가 많습니다.
북방권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풍경이죠

테라와다님들께 2016-03-04 09:53:46답변 삭제  
초불하시는분들 중에도, 열심히 수행하시는분들이 있는걸 압니다.
그러나, 거의가 친설에 함몰돼, 사성제나 팔정도만 말하면 되는줄 아는거 같더군요.

그래서 질문 하나 드려볼께요...

1.저번에, 아쇼카선언, 나왔을때, 그당시 뭐하셨나요?
2.이번에, 붓다로 살자, 할때 그당시 뭐하셨어요?

반대입장 하셨나? 궁금해서요

이런말씀드린이유가 2016-03-04 17:56:58답변 삭제  
테라와다 테라와다 하시니 말씀드린겁니다.
과연 테라와다는 이러한류의 개념들에 대해서,
어떤 고견을 갖고 계신가? 해서 말이죠.

그저, 손가락 들고 이게 법 이다?
그저, 사성제, 팔정도 입에 달고?

적어도, 이런건 아니라면,
한국불교안에서 법을 펼치신다면....

님이무슨학당분이신가요 2016-03-04 09:31:58답변  
자세히 읽어보니, 도법님의 신대승운동과 비슷하군요?

그리고, 선'은 아니니까, 선'이라는 말은 빼시고 말씀하시면.....

더공부합시다 2016-03-05 21:40:44답변  
위 글을 몇 번이고 읽어 보아도 판타지라는 이해 밖에는 오지 않네요. 단어 조합의 주관성, 문장 형성의 창조성. 허나 부처님의 불교를 그와 같은 정도의 개체적 망상으로 대체하겠다는 꿈은 가당치 않다는 것이 독자의 견해입니다. (h-학당의 본좌가 지식도 상당히 많고, 의욕도 넘치는군요) 그래서 욕계의 욕망치고는 상대적으로 훌륭한, 아주 바람직한 의견들을 제시하는 것은 고무적이긴 하나, 부처님 가르침에 대하여 가릴 것 못 가릴 것을 오도하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그 분 자신이 가지고 가는 본인의 의도를 모르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교조성으로 치고 나가는 것은 그 분 역시 전통적 대승이나 초불과 소통할 의지가 없다는 의사의 암묵적인 표현이겠죠.)

댓글-계의 지식 수준들을 보면 저 포함해서 다들 일천함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부딪히는 것이고요. 부딪히면서 서로들 이해가 늘면서 그 차이를 알게 되고요. 그 덕분에 h-학당의 지식 역시 별반 깊이가 있지 않구나 라는 판단도 하게 되어, 보다 초심자 시절이라면 나도 훅~갔겠구나, 지금은 다행히…라는 안도를 느끼기도 하는군요.

초불-매니아가 권청해 봅니다. 수행론을 곁들여 가면서 이성적 오해를 호도하지 마시고, 먼저 이성적 이해를 더 철저하게 추구해 보심이 어떨지요. 불교는 신앙이 아니니까요. 그리고 님들은 부처님을 교주로 모시는 종교와는 다른 가르침을 추구하시는 분들이니 부처님 가르침을 더 추구하는 이들을 약간이나마 더 배려를 고려하시는 것은 어떨지요. 저보다는 이 길에서는 분명 선배님이신 것 같아서 희망을 가져 봅니다. 물론 그것은 앞으로의 저에게도 상호적이겠죠?

봄이왔네 2016-03-06 17:47:55답변 삭제  
어떤게 판타지?
단어 조합의 주관성은 무엇이며,
문장 형성의 창조성은 또 무엇이며, 그게 개체적 망상인지?

부처님 가르침에 대하여 가릴 것 못 가릴 것 오도하는 대목은?
교조성으로 치고 나가는 부분은?
댓글-계의 지식 수준들이 왜 일천하며, 반대로 높은 수준이라면 어느 정도여야 하는지?
h-학당의 지식보다 당신의 지식이 높다는 근거는?

어떤 부분이 이성적 오해를 호도하는 부분인지?
어떤 부분에 대하여 이성적 이해를 더 철저하게 추구해야 하는지?
대승불교 역시 부처님을 교주로 모시고 있는데, 부처님을 교주로 모시고 있지 않다는 근거는?
본인들이 부처님 가르침을 더 추구한다면 그 근거는?
그리고 왜 대승불교가 당신들에 대하여 더 배려를 고려해야만 하는지 그 이유는?

밑도끝도 없이 인상비평만 장황하게 늘어놓고
자기들보다 못하다고 하면서 못한 근거도 없고 자기들이 더 잘난 근거도 없고, 그렇지만 저쪽에서 자기들을 더 배려해 줘야하고?

대승은 초불을 이해해도 초불을 대승을 이해하지 못한다.
구조적으로 초불은 초불에서 더 나아간 대승의 가르침을 배운 바가 없어서 이해할 수 없다. 초불입장에서는 대승이 무엇인지 모른다. 몰라서 초불의 대승비판은 언제나 황당하며, 자기들이 정법이라는 주장과 더불어 대승은 날조라는 말만 할 뿐이다. 말로는 이성 운운하지만 단 한 번도 이성적으로 대승의 논리에 귀기울이지 못한다. 혹시라도 대승의 논리에 마음이 흔들려 금이야옥이야 애지중지 했던 초불관이 흔들릴까바 지레 겁을 먹는 것이다.

이성보다 초불에 대한 신념이 더 중요하니깐
대승에 대해 경끼를 일으키며 발작적으로 거부한다.
매니아라는 말은 자신의 시야가 매우 제한적이고 협소하다는 것을 알기는 안다는 뭐 그런?

열반에서참나까지참나에서하느님까지 2016-03-06 20:41:43답변  
열반에서 참나로, 그리고 참나에서 하느님으로…

아래 인용 글의 내용이 추구하는 것 자체는 저도 긍정적입니다… 우린 중생이니까요…
허나 가릴 것은 가리자는 생각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과 부처님의 가르침을 팔아 먹는 것…

가서 읽어 보세요… “내 안의 하느님 모시기”…라는 글을요…

http://cafe.naver.com/bohd/28432

1. “내 안에 하느님(참나, 주인공)께서 계시고 하느님 안에 제가 있습니다.

2. 우리 머릿골에는 하느님께서 내려와 계시며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곳은 바로 천국이다. 이 천국의 평화와 기쁨과 충만을 늘 맛보지 못하는 자는 진심으로 하느님을 모시는 사람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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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하느님!” 한 마디면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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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생략… 유일신앙과 불교의 언어-사유들이 짬뽕된 기도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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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동안의 그 대승보살님이 첨부터 홍익보살이셨나요? 좀 헷갈리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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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이보는시각이겠죠 2016-03-07 09:57:52답변 삭제  
불교인은 안헷갈려요...

석양 2016-03-04 15:49:46답변  
초불과 대승의 현피?
태국 고승과 한국 승려가 만나도 대화가 안되는 판에.......
각자 자기의 말만 상대가 들어주길 바라겠지요.
on에서 충분히 불통을 경험한 것 같은데 그걸 off에서도 하겠다니.

만나게면 사이좋게 덕담 주고받으면서 밥 한끼 드셔요들.
'불교'라는 종교가 자신의 성찰과 인격함양이 아닌
나의 우월성을 드러내는 도구(수단)가 되면 스리랑카나 미얀마처럼 배타주의로 흐름니다. 그러라고 부처님이 불교 만든 거 아니고
대승 보살도에도 어긋납니다.

어쨌든만나야죠 2016-03-04 17:53:07답변  
나쁘게 보면 현피겠지만,
좋게보면 공개토론이죠,

요즘같은 시대엔 이런토론도 없이 마구잡이 개념도출이 문제 아닙니까?
서로 만나서 풀어야죠...

안만나면 그게 나아쁜 ㅇㄷ 아닐까요?....

석양 2016-03-04 19:41:00답변 삭제  
마구잡이 개념 도출이란게 뭘 뜻하는지 모르겠고
대승불자와 소승불자가 만나서 풀어야할 뭐가 있나요?

대승은 무아를 위반하는 힌두교다, 소설이다, 사법이다, 훼불이다, 마구니다,한반도 역사속의 위대한 고승들은 모두 부처님 팔아먹은 사기꾼들이다, 테라와다 정법을 배워 가짜 불교인 대승을 몰아내자, 보살도는 니까야에 없는 가르침이다,는 저들을 뭘 어떻게 설득을 하려구요?

대승경전 모두 소승에서 성자로 모시는 아라한들 불러다 놓고 아라한이 배웠던 불교는 틀렸다, 다시 배워라 라면서 보살들이 가르치는 내용입니다. 소승 입장에서 대승경전 자체를 인정하지 않아요.

그들과 소통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신다니 성과가 있기를 바랍니다.

정법안장 2016-03-05 00:45:53답변  
대승불교는 외도가 아닙니다.
한국불교가 썩었지만 그래도 정치에 물들지 않은 큰 스님들 중에는 초기불교의 사다함과는 된다고 봅니다.
초기불교만이 정법이고 위대하다면 아라한이 출현해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대승이 아라한을 폄하하지만 바른 견해가 아닙니다.
아라한은 위대한 존재입니다.
아라한은 열반에 안주하지도 않습니다.
열반은 아라한만이 체험할 수 있기에 현재 열반은 그 누구도 모릅니다.

선불교와대승불교를구별하며 2016-03-05 09:31:53답변 삭제  
요즘의 대승불교 주창은, 외도 같습니다.
수행부정하거든요....

유무중도 2016-03-06 16:10:37답변 삭제  
열반을 성취하기 위해선 함이 없어야 한다.
오직 선업만을 짓되 지은바 없이 지어야 한다.
악업을 지었으면 참회하고 악업 역시 공함을 조견해 후회가 없어야 한다.
바른 법을 깨쳐 있는 그대로 비추어 봐야 한다.
도과를 얻어도 도과 역시 공함을 조견해 무심해야 한다.
무심은 탐진치 없음이며 비움이며 내려놓음이며 머물지 않음이며 중도이다.
무심이 도이다.

유무중도 2016-03-06 16:39:57답변 삭제  
호흡도 하나의 대상일 뿐입니다.
호흡이 중요하다는 것은 편안하고 자연적인 호흡을 말합니다.
아나빠나사띠를 할 때 호흡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호흡을 놓치지 않고 아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대상이 반드시 호흡이거나  꼭 좌선만 고집할  필요는 없습니다.
행주좌와 어묵동정 어디에서든 모든 분별망상과 집착을 놓고 변하는 대상 중 강하게 느껴지는 대상에 집중하는 담대하고 깨어있는 마음이 정에 들게 합니다.

호잔 2016-03-06 17:37:28답변 삭제  
무심無心을 위 유무중도님의 이해와 같이 받아들이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사람들은 무심을 그 말의 일반적 의미(마음없음) 때문에 그렇게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앞 저의 댓글에서 삼장법사 스님과 관련한 댓글(일체유심조님 과의 법거량 관련)은 별 의미가 없을 것 같으므로, 그저께(3/4) 대구 붓다야나 선원 법회에서 행해진 삼장법사 스님의 법문에 대한 프린트 교재 올리는 것으로 이만 그치겠습니다.
좀 길기는 하지만..
(녹음 법문은 아직 유튜브로 올려오지 않았습니다.)

-아 래-

<다툼이 있을 때의 다섯 가지 처방전>
출처 : http://cafe.daum.net/bdynt/Ypks/56

이것은 인간관계에 대한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인간관계에서 트러블은 누구라도 있는 것입니다. 없다고 한다면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동물 중에서는 인간관계와 같은 트러블은 없습니다. 인간인 만큼 이 문제가 있기에, 이것은 난문입니다. 그래서 공부하는 것이 좋습니다. 문제가 없는 인간관계는 없습니다.

부처님도 인간관계로 문제가 있었습니다. 코삼비의 비구들이 논쟁을 거듭하면서 상가가 내분될 위기에 처했을 때에 부처님이 이를 조정하려고 했지만 비구들은 부처님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이에 질려버린 부처님께서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사원 거주처를 떠나서 숲에서 3개월 동안 혼자서 지내셨습니다. 그때 부처님께서는 「문제없이 살고 싶으면, 혼자서 생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경전에는 혼자서 사는 것의 평온함을 노래한 게송도 있습니다. 이것은 경전에 기록되고 있는 큰 사건이지만, 좀 더 세세한 트러블은 부처님 당시에도 많이 있었습니다.

혼자서 평온하게 살아가는 것은 정신적으로 강한 사람의 삶의 방법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약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갑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자신의 약점을 보충해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잊어버리고 자아를 드러내 버립니다. 관계 가지고 있는 다른 사람에게 안하무인으로 업신여기며 말합니다. 당연히 트러블이 일어납니다.

부처님은 혼자 지내는 평온함을 말하면서도, 사람들이 고민과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도와주기 위해서 사회로 나아갔습니다. 정신적으로 나약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사회로 나아가서 도움을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살아가면서 다툼이 있을 때는 사회의 경험자들에게서 도움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다툴 때는 1. 상대방을 비난하지 말고 현재의 감정만을 말해라. 2. 과거의 일을 끄집어내지 마라. 3. 한가지의 사건으로 다툴 때는 그 한 가지에서 여러 가지로 확대하지 마라. 4. 가족이나 친척을 들먹거리거나 끌어들이지 마라. 5. 잘못했으면 빨리 인정하라. 6. 합의하여 해결하였으면 다시는 그것을 끄집어내지 마라. 6. 이기려하지 마라. 7. 삼가해야할 말은 끝까지 삼가라. 8. 먼저 양보하고, 먼저 사과하고, 먼저 손을 내밀어라. 9. 오래 싸우지 마라.

여기서는 부처님이 말씀하신 다툼의 해결책에 대해 설명해 보겠습니다.
부처님의 말씀에는 일관된 인간관계의 포인트가 있습니다.

인간관계의 한 포인트는 「다른 사람을 바로잡으려고 하지 않는다. 가르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비록 아이라도 바로잡으려고 하지 마세요. 비록 가족이라도 그 사람에게 가르치려고 하지 말아 주세요. 다른 이에게 자신의 이상을 요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대신에 자신의 마음을 훈계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자신이 괴롭지 않는지 판단하면 됩니다. 부부 싸움을 한 후에 자신이 올바르다고 할지라도 상대방을 인정하기 위해서&#160; 몇 개월 동안 괴로워하는 것보다, 어떻게 하면 괴로움을 벗어나 자신이 즐겁게 생활할 수 있는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분노로 고민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소개하는 경전은 비구들에게 가르침을 주신 부처님의 말씀입니다. 다툼으로 초조해하는 마음, 상대방을 허락하고 받아들일 수 없는 마음을 어떻게 벗어버리는 지를 다섯 가지 항목으로 가르쳤습니다. 수행하는 자는 초조함이 있으면 전혀 수행이 되지 않습니다. 더구나 출가자는 출가의 생명과 관련되는 문제입니다. 출가하여 사는 것의 조건에서 실격이 되어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초조함에 질질 끌려 사는 것은 학교에 입학했지만 수업에 한 번도 나오지 않고 끝나버리는 것과 같기에 치명적입니다.

그럼 다툼이 있을 때의 다섯 가지 처방전을 소개합니다.

1. 만약 누군가와 다툼으로 초조함이 생기면, 그 사람에게 자애(mett&#257;, 멧따-, 慈愛)를 실천합니다.

자애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불교의 답입니다.
「나도, 다른 생명도, 모두 행복하게 되고 싶어 합니다. 서로 사이좋게 지내지 않으면 행복하게 살 수 없다」…이 사는 기본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불자가 목표로 하는 것은 지혜에 의해 얻을 수 있는 최종적인 해탈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깨달음을 얻을 때까지 어떤 식으로든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또 깨달음을 이루어도 자신의 수명이 끝날 때까지는 생활해야 합니다.

그럼 실제의 생활 속에서 어떠한 삶의 방법을 해야 하는 것인가?
그래서 불교에서는 자비의 삶의 방법을 말합니다.
자비와 지혜는 불교를 지탱하는 두 개의 기둥이기에, 어느 쪽도 빠뜨릴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야말로 행복의 길입니다.

생명이라는 것은 관계들의 연결입니다. 여러 가지 형태로 서로 서로를 지탱하고 있습니다. 혼자서 살아갈 수 있는 생명은 없습니다. 우리는 많은 생명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그들 덕분에 살아 있습니다.
그래서 서로 자애를 실천하는 것은 절대적인 일로, 호흡을 하는 것과 같이 기본적인 일입니다. 자비를 호흡에 비유한 것은 먹는 것 보다 더 기본적으로 빠뜨릴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좋은 사람인가 나쁜 사람인가, 지혜가 있는 사람인가 어리석은 사람인가라는 것은 「생명에 대해 어느 정도의 자애 행위를 할까」라는 것으로 측정되어집니다. 동료를 어느 정도 도와주는지, 사람들의 마음을 어느 정도 편하게 해 주는지, 상대방의 괴로움을 어느 정도 줄이려고 노력하고 있는지, 이와 같이 노력하는 사람은 당연히 훌륭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을 「지혜가 있는 사람, 좋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이 만약 아라한이 되고자 생각한다면, 자애의 수행도 대단히 중요합니다.
다른 사람을 대할 때도 자애롭게 집중하고, 평화스러운 마음으로, 몸과 마음을 관찰하도록 하여야 합니다.
부처님은 「자비의 마음」으로 모든 것을 관찰하셨습니다.
몸과 마음을 볼 때도, 인과 관계를 볼 때도 자비를 지니고 보셨습니다.
부처님의 경우는 자비의 기초위에 선정을 만들고 나서 위빳사나 수행을 하셨습니다.

멧따를 기르는 실천방법이 있습니다.
「내가 행복하기를! 나의 친한 사람들이 행복하기를! 살아 있는 모든 중생들이 행복하기를!」이라고 충만 되게 멧따의 마음으로 가득 채웁니다.

다음에 「내가 싫어하는 사람도 행복하기를! 나를 싫어하는 사람도 행복하기를!」이라고 싫은 사람에 대해서도 명상합니다.
좋아하는 상대에게 자애롭게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개나 고양이조차 좋아하는 상대에게는 상냥합니다. 여러분들은 자신을 방해하는 사람, 싫은 사람도 행복하기를 바라는 인간이 되어야 합니다. 처음은 저항이 있겠지만, 능숙해지면 진정한 자비심이 일어나게 됩니다.
자애의 명상은 행복하게 되기 위한 치료법입니다. 그러나 잘못하면 맑고 깨끗한 자애를 기르는 것이 아니라, 감정(특히 애정, 집착, 성냄)을 기를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명상의 정해진 방식을 지키는 것이 안전하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도 모든 이들이 도반이라는 마음을 길렀으면 합니다. 상대를 걱정하는 마음을 기르도록 하십시오.

2. 만약 누군가와 다툼으로 초조함이 생기면, 그 사람에게 연민(karuṇ&#257;, 까루나-, 悲 )을 실천합니다.

다른 사람의 괴로움을 없애 주고 싶다고 하는 마음을 연민심이라고 말합니다.
만약 자신의 아이가 병이 들거나 사고를 당했다고 하면, 어머니는 어떤 기분이 될까요? 순수하게, 그리고 재빨리 그 아이를 도와주려고 생각하겠지요. 그것이 까루나의 기분입니다. 또한 아이가 상처를 입었다면, 어머니는 낙담하고 있지만은 않고, 서둘러 아이를 데리고 병원까지 달려갑니다. 설혹 병원이 닫혀 있어도 굴하지 않고 다른 곳을 찾아 활발하게 움직입니다. 그처럼 진심으로 사람을 도우려고 하는 사람은 매우 밝고 건강하고 활발한 상태가 됩니다. 상대를 도와주고선, 「아! 지쳤다」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좋았어! 잘했어!」라고 자신이 무엇인가 할 수 있었던 것을 기뻐합니다.

까루나는 「아이고 불쌍해…」라고 감정적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감정적이 되면 이성이 없어지고, 연민심에 빠져버려서, 지혜가 나타나지 않게 됩니다. 예를 들어 「가족을 그대로 두면 밥도 못 먹고 불쌍할 것 같다」 등의 감정적인 이유로 수행을 그만두거나 하는 것은 이성적이지는 않습니다. 자비로운 사람은 자기희생적인 삶의 방법만을 택하지는 않습니다. 서로 좋은 길을 찾습니다. 감정에 빠지는 것은 괴로움의 원인입니다. 불교에서는 감정을 자비희사의 마음으로 바꾸기를 권장합니다. 자비는 지혜가 발달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며, 자아를 없애는 방향으로 일하는 것입니다.

까루나를 기르는 실천방법이 있습니다.

「내가 번뇌와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기를! 나의 친한 사람들이 번뇌와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기를! 살아 있는 모든 중생들이 번뇌와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기를!」이라고 충만 되게 까루나의 마음으로 가득 채웁니다.

까루나는 사람을 도와주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기르기 쉬운 마음입니다. 또 모든 것을 뒷전으로 미루는 게으름뱅이에게는 좋은 약이 됩니다. 밝고 활발하게 행동하고 싶다면 까루나를 기르면 좋습니다. 까루나를 실천하면 활발하게 될 뿐만 아니라, 즐거움과 충실감을 느끼며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다음에 「내가 싫어하는 사람도 번뇌와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기를! 나를 싫어하는 사람도 번뇌와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기를!」이라고 싫은 사람에 대해서도 명상합니다. 이것은 실생활 중에서도 가능한 한 실천해 보면 좋습니다. 예를 들어 이쪽은 가만히 있는데 왠지 심술을 부리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런 사람에 대해서 화를 내고 미워할 것이 아니라, 「이 사람이 번뇌와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기를! 이 사람도 행복하기를!」이라고 하면서 충만 되게 까루나의 마음으로 가득 채웁니다. 그러면 그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이 아니라 할 수 있으면 도와줄려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싫은 사람에 대해서 자비의 마음을 기르면 강한 자비심이 일어납니다. 또 그 때는 담보를 기대하는 마음이 없기에, 순수한 자비를 기를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싫은 사람이 동료가 된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공격하는 사람에 대해서 화내지 않고, 반대로 걱정해 주는 마음, 상냥한 마음을 기르는 것입니다. 「무지한 바보에 대해서 공격할 만큼 어리석은 사람은 없다」라는 부처님의 말이 있습니다. 「화내는 사람에 대해서 화내는 사람은 더 나쁘다」. 그러한 생각이 아니면 이 세상은 행복하게 되지 않습니다. 자신이 행복하게 되고 싶으면, 미워할 것이 아니라 걱정해 줍니다.

이처럼 불교에서는 자신의 적에 대해서도 연민 심을 실천할 것을 말합니다. 어떤 악인이라도 생명이기 때문에 행복하게 되는 것이 무엇이 나쁠까요? 현자는 그처럼 생각하므로 「적」이 없는 것입니다.

3. 만약 누군가와 다툼으로 초조함이 생기면, 그 사람에게 평정(upekkh&#257;, 우뻭카-, 捨)을 실천합니다.

차별이 없는 평등한 마음으로 행하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는 것을 우뻭카라고 합니다.
Upa라는 접두어는 「침착하게, 포괄적으로」라는 의미가 있는데, 거기에 ikkhati라는 「보다, 관찰하다」가 합쳐진 동사 upekkhati의 명사형이 upekkha이므로, 「침착하게 객관적으로 관찰하는 것」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일방적으로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편견이 없는 마음입니다. 그 의미를 봐도 알 수 있듯이 우뻭카는 지혜와 가깝습니다. 「우뻭카가 자란다.」와「지혜가 자란다.」는 동의어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입니다. 지혜를 기르기 위해서는 본 것, 들은 것에 사로잡히지 않고, 고정 관념을 버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뻭카의 중국 번역어인 「捨」라고 하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취하지 않는다, 집착하지 않는다.」라고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뻭카의 사람은 주관적인 유신견이 사라진 넓은 마음으로 「생명은 여러 가지 형태를 취하며 각각 살아간다. 그러나 모두 똑같은 생명이다. 나도 단지 그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봅니다.

우리 모두는 동물이나 벌레, 물고기, 천상이나 지옥에 수없이 윤회를 반복해 왔습니다. 그러니까 누가 훌륭하다, 누가 훌륭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것을 이해하면 평등이라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 되어, 구체적이고 엄밀하게 생명은 평등하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이해한 후, 우뻭카를 기르는 실천방법이 있습니다.

「깨달음의 빛이 나타나기를!」입니다. 이 말을 자기 자신과 친한 사람들, 살아 있는 모든 중생들, 내가 싫어하는 사람들, 나를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차례차례로 충만 되게 우뻭카의 마음으로 가득 채웁니다. 이것은 마음의 더러움을 지워 없애고, 마음의 작은 그릇을 부수고 무량한 크기의 밝은 마음 상태를 만드는 수행입니다.

우뻭카는 멧따와 닮아 있습니다. 그러나 우뻭카는 멧따보다도 굉장히 넓은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난폭한 자가 수행처에 와서 시끄럽게 굻고 있다고 합시다.
멧따의 자애가 있다고 하면 「시끄럽습니다.」라고 마음 편히 말할 수 있습니다.
난폭한 자도 부드러운 자애의 말에 격노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뻭카를 지닌 사람은 조용히 「모두 제 각기 자신의 삶의 태도를 하고 있기에 좋지 않은가!」라는 느낌으로 어떤 일도 없이 침착하게 그 난폭한 자를 이해한다는 눈빛으로 그 사람을 평정하게 응시합니다.

이것은 무관심과는 반대입니다. 무관심은 무지한 것이며, 침착성은 지혜입니다.
침착성은 사물을 이해함으로써 일어납니다.
누구에 대하여도 조용하고 침착하며 평온한 사람이 있으면, 주변의 사람들도 더불어 고요해지고 기분이 좋아집니다.

생명은 평등하다고 이해하여 다른 생명의 권리·인격을 침해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성을 가지고, 항상 침착하며 평온하게 있는 것, 어떤 문제가 있어도 저 녀석이 나쁘기에 그 범인을 찾아 그 사람을 고치려고 하지 않아야 합니다. 자신이 침착하면 초조함도 사라지고, 다른 대상을 객관적으로 관찰하게 됩니다.

4. 만약 누군가와 다툼으로 초조함이 생기면, 그것을 사고의 대상(visaya)으로 하지 않아야 합니다.

「아, 그런 일이 있었어?」라는 느낌으로 놓아버립니다. 우리는 상대의 일을 계속 생각해서 괴로워합니다. 없었던 것으로 하면 상당히 마음은 편합니다. 상대의 일을 생각해 화내는 것은 독침을 감춘 것과 같은 것으로 계속 끝없이 괴로워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상대를 바로잡는 것도 아닙니다. 그 대신 자신이 마음의 평온함을 얻는 것입니다. 자신은 다른 일에 집중합니다. 수행자는 명상의 대상에 집중하면 초조함이나, 불건전한 것들이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5. 만약 누군가와 다툼으로 초조함이 생기면, 각 생명은 자신의 업을 소유하고 있는 것(kammassakat&#257;)이라는 법칙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은 어렵지만 결정적으로 효력 있는 방법입니다. 업은 개인의 재산입니다. 업은 타인과 공유할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의 업으로 내 자신이 이렇게 되었다」라는 일은 있을 수도 없고, 일어날 수도 없습니다. 개개의 업은 개별적입니다. 교차하지 않고 공유할 수 없습니다. 업은 자신의 것이라고 아는 것이 바른 견해입니다(kammassakat&#257; samm&#257;ditthi). 자신의 행위의 결과는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올바른 생각입니다. 즉 자신의 행위는 자기책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성격이나 태도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어쩔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이 지은 업으로 그렇게 되었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업은 기능입니다. 행위와 결과의 덩어리입니다. 고민할 필요도 없습니다. 각각의 개인의 업은 각각 다릅니다. 그러니까 다투면서 화를 내어 나의 나쁜 업을 만들 필요가 없습니다.

이와 같이 관찰합니다. 「그 사람은 그 자신의 업을 소유하고 있다. 자신이 업의 상속자이다. 업으로부터 태어났다. 업의 굴레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업을 의지하여 살아가고 있다. 그 사람이 저지르는 행위의 결과는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본인이 받는다.」

이러한 업의 법칙을 올바르게 이해해서 냉정하고 침착해야합니다. 즉 좋은 일을 만나도, 싫은 일을 만나도, 집착함이 없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다툼은 사라집니다.

무언가를 인식하고 판단하여 상대방과 다투기 전에 담담하게 알아차림을 하면 적어도 불선업은 만들지 않습니다. 동시에 날카로운 판단 능력과 지혜가 일어납니다. 자신의 마음에 일어나는 사건을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알아차려만 가십시오. 그것만큼 우수한 방법은 없습니다.

또 다른 경전에는 사리뿟따 존자가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은 다양합니다.

1. 몸의 행위는 나쁘지만, 말할 때는 훌륭한 사람.
2. 행위는 좋지만, 말은 더러운 사람.
3. 행동도 말도 나쁘지만, 이따금 마음을 열고, 이따금 좋은 생각도 하는 사람.
4. 행동도 말도 나쁘고, 조금도 마음을 열지 않고, 조금도 좋은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
5. 행위도 말도 좋고, 마음을 열고, 좋은 생각도 하는 사람.

「‥‥이런 다섯 종류의 사람들에게 화내는 것은 모두 성립될 수 없습니다. 화낸 사람이 바보스런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잘 관리해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관계는 항상 다툼이 있는 법이지만, 행복하게 사는 것은 모두 자신 나름입니다.
자아 중심의 삶의 방법을 고치는 것으로 다툼은 줄고 인간관계는 호전되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다섯 가지 처방전을 다툼이 있을 때뿐만 아니라 평소에 꾸준히 행하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사람이 바뀝니다. 분명히 딴사람이 됩니다. 온화해지고, 항상 기쁨의 물결로 채워진 사람이 됩니다. 이것은 종교를 뛰어넘는 진정한 행복의 길입니다.

일체유심조 2016-03-07 08:07:25답변 삭제  
어느 때 부터 초기불자들에 의해 공 유식 등 대승불교가 힌두교라는 유언비어가 유포되고 의미없는 논쟁이 시작된다.
나는 법을 알지 못한다는 자기 고백이다.
이젠 멈추어야 한다.

일체유심조 2016-03-07 08:13:51답변 삭제  
「그 사람은 그 자신의 업을 소유하고 있다. 자신이 업의 상속자이다. 업으로부터 태어났다. 업의 굴레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업을 의지하여 살아가고 있다. 그 사람이 저지르는 행위의 결과는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본인이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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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심을 놓는 방편으로 유용하나 이것은 상대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해당되는 것이다.
업의 개념도 중요하다.
업의 굴레에서 벗어날 때 해탈열반을 이룰 수 있기에 위 인용글의 완전한 이해가 반드시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