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0/14

송시열과 17세기 조선 성리학의 재조명 < 대학신문 2007

송시열과 17세기 조선 성리학의 재조명 < 기획 < 기획 < 기사본문 - 대학신문

송시열과 17세기 조선 성리학의 재조명
기자명 대학신문   입력 2007.05.06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 1689)은 17세기 조선사회를 이끈 정치가이자 성리학자다. 그는 조선에서 ‘송자(宋子)’라고 추앙될 정도로 최고의 성리학자로 평가되지만 동시에 실학과 양명학 등 새로운 학문의 움직임을 막았던 보수적인 학자로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최근 학계 일각에서는 17세기 성리학의 재평가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 국사학계에서 실학과 성리학을 대결구도로 설정해 17세기 성리학이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17세기 조선 성리학과 그 중심에 있었던 우암 송시열. 『대학신문』에서는 송시열 탄생 400주년을 맞아 송시열과 17세기 조선 성리학에 대해 재조명해 보고자 한다.

<인터뷰이 명단>

김문준 교수(건양대 교양학부)
김용흠 교수(연세대 국학연구원)
우경섭 연구원(인하대 BK21 동아시아한국학사업단)
이덕일 소장(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이영춘 연구관(국사편찬위원회)
정옥자 교수(서울대 국사학과)
지두환 교수(국민대 국사학과)

◆17세기의 대표적인 성리학자 송시열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흔히 비판받는 것처럼 송시열은 민생을 돌보지 않고 공리공론(空理空論)에만 주력했는가?

정옥자 교수(이하 ‘자’): 당시 성리학은 학문이자 정치 이념이었다. 국가통치 이념을 세우기 위해 성리학 사상을 제시한 것을 공리공론이라고만 평가할 수 있는가. 양 난(兩亂) 이후 왕과 신하의 관계를 정립하고 어떻게 하면 사람답게 살 수 있는가를 논하는 것은 국가 재건을 위한 첫 작업이었다.

김문준 교수(이하 ‘준’): 송시열은 강력한 도덕윤리를 국가 통치 이념으로 내세우는 한편 대동법이나 호포제를 실시하고 노비종모법(奴婢從母法)과 서얼제를 폐지하는 등 민생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실제 정책에도 관심이 많았다.

이덕일 소장(이하 ‘일’): 송시열이 개혁 정책을 폈다고는 하지만, 인조 시기 충청도 관찰사 등을 맡았던 김육이 대동법을 주장했을 때 송시열이 반대하는 보수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는 말로는 민생안정을 외쳤지만 막상 민생 안정의 기본이 될 대동법을 시행하고자 했을 때는 격렬히 반대했다.

김용흠 교수(이하 ‘흠’): 송시열은 처음에 분명히 대동법을 반대했다. 그런데 나중에는 대동법을 인정한다. 그러면서 대동법이 지주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하지 않도록 ‘물타기’를 한다. 즉 당시의 국가적 위기와 관련해 제도개혁의 불가피성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실질적으로 무력화시키려는 짓을 한 것이다. 나는 여기에 송시열과 노론의 정치적 노회함이 있었다고 본다.

◆17세기 조선을 평가할 때 예송논쟁을 뺄 수 없다. 왕권과 신권(臣權)이 대립했던 예송논쟁에서 송시열은 신권을 강조했다. 이에 대해  송시열은 왕권을 약화시키고 사대부의 권위만 높였다고 혹평을 받는가 하면 왕의 전제정치를 막고 왕과 사대부가 서로 협력·견제를 해야 한다는 선구적 생각이었다고 높이 평가받기도 한다. 예송논쟁에서 맞부딪친 왕권과 신권의 대립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 예송논쟁(禮訟論爭)
효종이 죽었을 때 효종의 계모인 자의대비가 상복을 입어야 할 기간을 두고 서인과 남인이 벌였던 논쟁이 1차 예송이며, 효종 비가 죽었을 때 같은 논쟁이 재현된 것이 2차 예송이다. 서인은 ‘왕실과 사대부 모두 똑같은 가례를 적용해야 한다(천하동례(天下同禮))’며 각각 1년과 9개월, 남인은 ‘왕과 사대부의 예는 다르다(왕자례부동사서(王者禮不同士庶))’며 3년과 1년의 복상(服喪)을 주장했다. 1차에서는 송시열의 서인 세력의 주장이 관철됐으나 2차에서는 남인이 승리했다. 이후 다시 정권을 잡은 서인 세력은 남인 세력의 처리를 두고 다시 노론과 소론으로 분화됐다.

일: 왕권과 신권 중 무엇이 더 강해야 한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 관계가 조선 사회 전체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를 말해야 한다. 왕도 신하와 같은 사대부라는 송시열과 노론의 주장은 한편으로 백성의 위치를 피지배층으로 더욱 확고히 했다는 점에서 사대부의 권위만 높였던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지두환 교수(이하 ‘환’): 신권과 왕권의 관계가 아니라 ‘왕도(王道)’와 ‘패도(覇道)’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한다. 그 당시 송시열과 노론은 왕과 신하가 함께 국정을 운영하는 왕도의 개념을 실천하려 한 것이지 의도적으로 왕권을 약화시키려고 한 것이 아니다. 예송논쟁에서 효종에 대한 예를 일반 사대부에 대한 예와 동일하게 적용한 것도 왕과 사대부가 함께 국정을 이끌어 가는 진정한 왕도정치를 구현하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다.

흠: 조선후기 정치에서 신권을 강조하는 것은 거의 대부분 양반 지주의 입장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국왕도 봉건 지주였지만 국가를 운영하는 입장이므로 양반 지주의 입장만 일방적으로 따라갈 수는 없었던 것이다. 학계 일각에서 말하는 공론정치라는 것도 양반 지주의 공론이지 오늘날의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조선후기 실학자들이 공론, 공론정치에 대해 비판한 것은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이영춘 연구관(이하 ‘춘’): 송시열이 의도적으로 왕권을 약화시켰다고 보기는 어려우나 그와 서인 세력들 때문에 왕권이 자연히 약화된 측면은 있다. 조선후기의 왕권 약화는 국가 기강을 흔들고 양반 귀족의 특혜만 조장했다는 측면에서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었다.

◆조선은 양 난 이후 중세에 머물렀으며 이는 조선 후기 성리학의 정체성·보수성에 근거한다는 평가가 있다. 조선 후기 성리학의 정체성·보수성의 실체는 무엇인가?

일: 조선은 호란을 교훈 삼아 개방정책으로 전환해야 했고, 명분이 아니라 힘이 지배하는 국제현실을 깨달아야 했다. 그러나 청나라 문물을 받아들이고 천주학 등 다양한 사상을 수용해 조선을 개방적 국가로 바꾸려했던 소현세자는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살해됐다는 설도 있다). 청을 오랑캐라 해 배척하고 주자학 외에 모든 학문을 금지한 당시 인조와 서인 정권의 성리학이 개방의 꿈을 좌절시킨 것이다. 개방도 북벌도 모두 하지 못한 조선은, 명분으로는 청나라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현실로는 청나라에 사대하는 모순의 길, 즉 소중화의 길을 걸어야 했다.

자: 17세기 조선은 전후(戰後) 위기를 극복하고 국가를 재건하는 시대적 과제에 직면했다. 이에 ‘문화국가 조선은 일본에 패배하지도 않았고 청나라에 심복(心腹)하지도 않는다’는 의식을 고취하려고 국가 지도이념으로 창안한 논리가 존주론(尊周論)과 북벌론(北伐論)이다. 이는 유교 이념을 공통 분모로 하는 동아시아 사회에서 조선의 명분을 강화하는 일이었고, (유교)문화가치를 강화함으로써 상처받은 자부심을 치유하는 자기회복 방법이었다.

일: 양 난을 겪은 농민·천민들은 나라를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도망가기 바쁜 지배층에 실망하고 사대부 지배체제에 회의를 느꼈다. 그 결과 양 난 이후 신분제 약화 현상이 나타난다. 그러나 사대부는 기득권을 놓치지 않기 위해 변화를 요구하는 이러한 사회 저변의 현상을 억누르고 오히려 기존의 신분제를 강화했다.
율곡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 사상이 17세기 김장생, 송시열, 송준길에 이르러 예학(禮學)으로 변한다. 17세기 조선 성리학의 주류가 된 예학은 각 신분에 따라 지켜야 할 행동 규범을 강조했다. 성리학자들은 거세게 일었던 백성들의 신분제 철폐 운동을 억압하기 위해 예학을 강조했다. 즉 이들 당파가 그 종주(宗主) 율곡의 개혁정신을 저버리고 사회 변화를 저지하는 보수적인 정치당파로 변했음을 시사한다.

자: 17세기 예학 발달의 궁극적 목표는 강력한 사회정의 추구이다. 그들의 이상적 정치형태인 왕도정치의 구체적 방안으로 덕치(德治)와 예치(禮治)가 강조됐고, 그 이론적 기반인 예학에 대한 관심이 이미 조선전기부터 단계적으로 확대되고 있었다. 또한 예치는 무너진 사회 질서를 회복하고 사회 정의를 구현하는 방법이었다.

흠: 송시열 등의 노론 성리학자들은 주자학 중에서도 명분론과 의리론을 강조했다. 명분과 의리를 강조하게 되면 다른 생각을 가진 학자와 쉽게 타협하지 못하고 끝없는 정치 투쟁을 불러 일으키게 된다. 특히 주자 이외의 다른 모든 사상이나 주장을 이단으로 몰아 정치적 박해 대상으로 규정했던 송시열의 벽이단론(闢異端論)은 관인(官人)·유자(儒者)들의 분열을 끊임없이 부채질하면서 정치적 대립을 격화시킨 면이 있다.

◆17세기 조선 성리학자들이 내세운 대명의리론, 중화주의 등은 ‘사대주의’라는 비판을 많이 받는다. 이러한 비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자: 명(明)이 무너진 것은 중화 문화 질서의 붕괴를 의미했고, 이에 조선이 그 후계자로서 중화 문화를 부흥하고 수호해야 할 의무와 사명을 가졌다고 자부하기에 이르렀다. 즉 17세기 조선이 차용한 존주론은 그 존중 대상을 명에서 조선으로 전환시킴으로써 조선이 곧 중화라는 조선중화주의를 성립시켰다. 조선은 사대주의 국가가 아니라, 문화 중심국가라는 자부심으로 조선 고유문화 창달에 성공한 국가라 볼 수 있다.

일: 광해군은 명·청 교체기에 현실적인 외교로써 국가의 안전을 도모했으나 서인은 그를 명나라에 대한 군신의 의리를 저버리고 오랑캐에 투항한 비도덕적인 배신자로 몰아 폐위시킨다(인조반정). 이는 성리학자들이 현실을 무시한 친명사대주의자였음을 보여준다. 서인의 대명의리론은 결국 호란을 초래했고, 호란의 결과는 인조가 청 태종을 향해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려 항복한 삼전도의 치욕이었다. 또 소중화사상은 한(漢)족이 세운 국가를 부모의 국가라고 여기고 우리를 작은 한(漢)족이라고 인식하는 것으로, 결코 주체적인 사상이 될 수 없다. 중화사상은 현실적으로 보나 학문적으로 보나 본받지 말아야 할 한 시대의 잘못된 풍조다.

우경섭 연구원(이하 ‘섭’): 송시열이 사용한 ‘중화’의 개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송시열에게 중화란 ‘한족이 세운 왕조’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는 ‘(유교)문화’의 담지 여부를 가지고 중화와 오랑캐를 구별했다. 따라서 명나라가 멸망한 뒤 천하에서 유일하게 유교문화를 계승한 존재로서 조선의 정통성을 주장한 것이다. 송시열이 그저 사대주의자였다면 정통 한족 국가인 수나라에 고구려가 맞섰던 것을 비판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수양제가 자기 아버지를 죽이고 후궁과 간음하는 등 인륜을 저버렸기 때문에 고구려가 이를 토벌한 공로를 높이 평가했다. 그리고 호란 직후 진정한 ‘사대주의자’라면, 현실적인 힘의 열세를 인정하고 청나라에 복종하자고 주장했던 사람들이 아니겠는가?

흠: 조선전기에도 뜻있는 사대부들은 대명의리론에 얽매이지 않았다. 말하자면 중국이라는 강대국이 존재하는 현실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생존할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사대(事大)를 말한 것이다. 그것은 청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러한 주체적 입장에 대한 고려 없이 무조건 중화사상을 고수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사대주의로 보면 된다.

준: 송시열이 강조했던 진리는 ‘존군부 양이적(尊君父 攘夷狄)’이다. 누가 군부이고 누가 오랑캐인가? 성리학자가 보기에는 청이 인간다움을 추구하지 않는 오랑캐였을 것이다. 이들을 배척하고 군부다움을 추구하며 민생 안정을 꾀하는 것이 성리학자들의 생각이었다. 청의 힘을 몰랐던 게 아니라 인륜을 거스르는 청의 힘을 비판했던 것이라 볼 수 있다.

◆성리학과 비주류 학문(실학, 양명학 등)의 대결 구도, 무엇이 문제인가?

환: 학계에서 실학을 강조하다 보니 17세기 성리학을 실학을 배척한 보수적 학문으로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학문이 보수화된 것은 조선 말 세도정치 시기인데 학계에서는 조선후기 성리학 전체가 보수적인 것처럼 말한다. 성리학은 당시로서는 가장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사상이었다고 생각한다. 세종대왕이 주자성리학을 기반으로 조선을 선진국으로 만들었고 율곡이 조선성리학을 집대성해 양 난을 극복하고 조선을 대동사회로 만들 기반을 세웠고, 영조대왕이 조선성리학을 바탕으로 자주적인 진경(眞景)시대를 열 수 있었던 것이다.

자: 실학이란 당시 가장 중요하고 필요한 학문을 말한다. 조선후기에 성리학이 그 역할을 다하고 폐단을 드러내자 이를 극복하기 위해 북학파가 새로운 학문을 모색했고 그것이 조선후기 실학이다. 그러나 이는 성리학에 반대되는 개념이 아니라 성리학을 모태로 한 보완학문이다.

흠: 주자학과 실학은 대립 범주가 될 수 있으나 성리학과 실학은 대립 범주가 아니다. 실학은 사회개혁론, 즉 정치사상이 본령인 반면 성리학은 성명의리에 관한 학문이므로 엄밀하게 말하면 정치사상이 포함돼 있지 않다.
실학자들이 처음부터 실학자가 돼야겠다고 해서 실학자가 된 것이 아니다. 그들도 주자학, 성리학을 공부했는데 이를 현실 문제에 적용하다가 괴리되는 부분이 있어서, 그 부분을 천착하는 과정에서 실학이 나온 것이다. 따라서 실학자들이 굳이 성리학을 부정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실학자들에게서 성리학적 요소가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춘: 실학이라 불리는 많은 부분들이 기본적으로 성리학의 소양 위에서 구성된 것이었다. 성리학에도 과학적 측면과 정치혁명이나 빈민구제와 같은 사회개혁의 원리가 포함돼 있다. 그러나 성리학 자체가 중세적인 사유방법이었고 그것을 탈피하지 못했다는 점에 실학의 한계가 있다.

◆앞으로 송시열과 17세기 조선성리학에 관한 연구가 나아갈 방향은?

환: 근대 이전 동양은 서양에 나침반, 화약, 인쇄술을 가르쳐 줄 정도로 과학기술이 앞서 있었다.  동양의 과학기술이 정말로 앞섰다면 이를 주도한 정치, 경제, 사회, 문화도 서양보다 앞섰을 것이다. 이제는 동양이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서 서양보다 앞섰던 점을 규명하는 것이 필요하다.
퇴계와 율곡은 심학(心學)을 기반으로 한 성리학을 ‘조선성리학’으로 집대성했다. 송시열은 율곡의 인심도심설(심성론에서 심(心)의 양면성에 관한 학설)을 바탕으로 『심경석의(心經釋疑)』를 지어 조선성리학에 입각한 심학을 완성하고 퇴계가 편찬한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를 확대해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를 짓는 등 조선성리학을 심화·발전시켰다. 이는 중국의 성리학보다도 앞선 내용이다. 조선이 이룬 문화는 동양을 이끌어 가는 최고의 문화였다. 이에 대한 사회경제적, 정치사상적 규명이 필요하다.

섭: 조선후기 사회에서 왜 ‘근대’의 맹아를 찾아보려 하는지 반문하고 싶다. 근대로의 전환을 필연으로 보거나 긍정적로만 보는 것은 전형적인 오리엔탈리즘이고 제국주의적 시각이다. 근대란 인류역사의 보편적 발전법칙이 아니라 서유럽 몇몇 국가의 특수한 역사적 경험일 뿐이다. 그리고 조선 망국의 원인을 수백년 전인 송시열에게서 찾아보려는 그간의 시각들이 과연 역사학적 관점에 부합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나는 근대의 잣대로 조선을 조명하기보다는, 긍정과 부정의 차원을 넘어서 조선시대의 전개 과정을 당대의 시각과 논리 속에서 이해하는 것이 일차적인 과제라 생각한다.

일: 조선 역사에 대해 긍정할 것은 긍정하고 부정할 것은 부정해야 한다. 다양한 사람이 다양한 생각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주자학이라는 유일사상만 고수하고 타인의 사상이나 처지를 인정하지 않은 독선적인 자세는 비판해야 한다. 또 시대의 요구나 사회 변화와 관계없이 지배층의 권위를 우선했던 당시의 세태가 이후에 어떤 결과를 불러왔는지는 분명히 조명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역사적 반성을 통해 지역감정이나 비이성적인 당쟁이 나라의 운명을 결정하는 현 시대의 저급한 정치인식을 꼬집을 필요가 있다.

흠: 청산해야할 부정적 유산을 계승해야할 역사적 전통으로 착각해선 안 된다. 조선후기에서 근대사상의 맹아를 추구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부정적 유산에 대해 체계적으로 연구해 극복하자는 의미도 있다. 성리학 내지 주자학의 봉건성과 그로 인한 각종 봉건적 정치행태, 사회적 관습 등등이 아직도 남아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자율적 근대화, 시민혁명을 거쳐서 근대화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러하다. 성리학과 주자학이 현실 적합성을 상실하였다는 것을 당대의 학자들이 분명하게 인식했기 때문에 실학이 나온 것인데, 성리학을 계승하자는 것은 역사를 거꾸로 돌리자는 말이나 같다고 본다.

자: 우리는 서양 제국주의의 힘의 논리가 주류를 이루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의리나 명분 등 성리학적 가치관을 주요 기준으로 삼았던 조선의 사고방식과 역사상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어렵다. 제국주의가 동양사회에 자행한 식민사학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그 제국주의의 틀을 벗어나서 우리 전통시대의 가치관과 시대정신을 찾아내고 재음미하는 작업에서 출발해야 한다.   <끝>

윤수진 기자 youn23@sn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