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6/14

한국 퀘이커- 함석헌과 종교다원주의

섭리와 경륜

퀘이커 관련 글모음

http://scepter.egloos.com/7195987

퀘이커(Quaker)교파에 대하여


전통적인 퀘이커 예배의 신학의 뿌리는 죠지 폭스(George Fox)의 내적 체험에서부터 그 출발을 찾을 수 있다. 죠지 폭스는 그의 마음속에서 강하게 역사하신 그리스도의 능력과 계시를 통해 중생을 체험했다. 그리고 이윽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의 체험과 변화를 간증하면서 그리스도를 전하고 가르치기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이들 예배의 목적은 침묵 속에서 기다리다가 하나님의 권능과 임재하심에 즉각적으로 응답하는 것이다.



퀘이커 교도의 예배 신학은 종교개혁의 미온적 개혁의지에 대한 깊은 불만족으로 시작되었다. 특히 영국의 지배적인 세력으로 성장한 청교도들에게 깊은 반감이 있었는데, 왜냐하면 퀘이커 교도들은 그들이 성령님의 자유로운 역사하심과 예배시 성령에 사로잡힌 회중의 자율성을 무시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또한 예배의 현장에서 만인 제사장론을 부인하거나 무시하고 사제에게만 그 중심적 역할을 제한하는 국교회를 비난했다.



1887년 「리치몬드 신앙선언」(The Richmond Declaration of Faith)은 퀘이커의 전통적인 예배 신학을 담고 있는데, 이 선언문에서 "예배는 하나님의 영인 성령님의 감동하심에 마음과 정성을 다해 경배의 응답을 드리는 것이다. 형식을 갖춘 예배를 인정하지는 않으나 또한 전적으로 무형식의 예배만을 고집하지 않는다. 심지어 말씀도 필요치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반드시 성령안에서 진정된 준비가 있어야 한다."라고 밝히고 있다.



이들에게 진정한 예배는 오직 하나님의 영인 성령님께서 예배를 위해 모인 회중의 마음속에 역사할 때 발생한다. 그리고 계획되지 않은 침묵은 성령님께서 자유로운 역사를 가능케 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성령님의 강권하시는 신비적인 역사를 통한 하나님과 예배자와의 직접적인 만남을 강조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적으로든, 개별적으로든지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은 자의 입을 통해 공동체에게 말씀하신다.



다음은 전통적인 퀘이커의 예배 신학을 개괄적으로 살펴본 내용이다.



1. 그리스도는 믿음의 공동체의 모든 회중에게 그의 영을 주신다.



2. 예배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을 통한 그리스도의 임재에 개인적으로든, 집단적으로든 자신을 개방하기 위한 것이다.



3. 예배행위는 훈련된 방법에 따라 침묵으로 기다리는 것이다. 이는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위한 기다림이며, 그에 따른 내적인 응답을 드림과 성령님의 지시하심대로 말씀의 선포와 기도를 하기 위함이다.



4. 성령님에 의한 그리스도의 임재를 위해 어떤 중개물도 필요치 않다. 그렇기에 말씀과 형식과 같은 모든 외적인 수단과 인간적인 행위들은 부차한 것이다. 예배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도하심에 달린 것이다. 그렇기에 예배에서 인간적인 준비들은 필요치 않는 것이다. 심지어 예배를 위한 인도자도 필요치 않다.



5. 성령님은 모인 전체 회중이나 어떤 특정인에게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회중과 사제, 남자와 여자, 종이나 자유자나 구분해서는 안된다.



6. 하나님은 모인 전체 회중이나 어떤 특정인에게 말씀하신다. 그 이유는 모든 신자는 제사장으로서 서로를 위한 목회자이며 그렇기에 구별된 사제가 필요치 않는 것이다.



7. 세례에 있어서의 한 가지 유일한 요소는 성령님에 의한 내적인 세례이다. 주님의 만찬도 역시 영적인 주님의 만찬만이 유일한 요소인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신약성경에서 발견되는 성례전이 그의 죽으심 이후에도 계속되리라 의도하지 않으셨다.



8. 예배 음악에 있어서도 오직 자발적인 음악만이 허용되었다. 퀘이커들은 신약성경 어디에도 인위적인 음악에 대한 가르침이나 예가 등장하지 않는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퀘이커의 예배는 다양한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그들중 대부분은 전통적인 퀘이커 신학의 한 변화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프란시스 홀(Francis Hall)은 진정한 퀘이커의 예배는 그의 특정한 형태에 관계없이 다음 아래의 통일된 형식을 유지하고 있다고 말한다.



1. 회중들은 신령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모인다. 그리고 진정으로 하나님의 영의 역사하심에 응답하고 그분의 임재를 체험키 위해 모이는 것이다.



2. 예수 그리스도는 예배를 통해 영광 받으신다. 예배는 그리스도의 구속적 은총과 하나님의 성품의 최고의 계시자로서의 그리스도의 역할과 성령의 전달자로서의 역할에 의해 발생한다.



3. 진정한 예배는 하나님의 영인 성령님께서 예배자들의 마음속에서 역사하실 때 가능하다.



4. 퀘이커의 예배는 인간에 의해 짜여진 순서에 의해 구속받지 않는다. 성령님은 자유로우신 분이시기에 예배시 성령님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진 자는 또한 성령님의 자유로운 역사에 민감하게 된다.



5. 침묵은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이며 중요한 수단이다. 그리고 성령님의 자유로운 활동을 가능케하는 가장 확실한 통로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침묵은 퀘이커 예배의 특징적인 요소로서 모든 퀘이커 예배에 있어서 절대적이며 중심적인 부분이다.



* the Quaker : 퀘이커 교도. 주의 말씀에 떨다 는 말에서 붙인 속칭으로 퀘이커교도 자신들은 이 말을 쓰지 않는다. 퀘이커 교도들은 빨간색은 잘 입지 않으며 폭력을 반대하는 입장이다..



퀘이커교도들은 모임에서 자기를 소개할 때 다음의 4가지를 가지고 말한다고 한다. 첫째는 내가 어렸을 때 가장 기억에 남는 일, 둘째는 내 인생에서 가장 따뜻한 시절, 셋째는 내 인생에서 가장 추웠던 시절, 넷째는 내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던 때이다. 이러한 방식의 자기 소개에는 독특한 면이 있다. 이는 사람들에게 자기를 적나라하면서도 깊이 있게 드러내는 것이다.


한국 사람들은 좀처럼 자기 표현을 잘하지 않는다. 가까운 사이가 아니면 이러한 자기 드러냄은 부담스러울 수 있다. 그러나, 어떤 공동체를 구성하는 사람들의 관계가 깊어지려면 이런 나눔의 시간이 필요해진다. 이러한 나눔이 주는 유익은 서로를 깊이 있게 알게 해준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나름대로의 성격이나 태도, 말이나 행동 스타일로서의 기질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나눔은 사람들의 기질이 어떤 배경에서 형성되었는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나는 선교회원들간에 인간관계 갈등이 생기는 것을 지켜보면서 그간의 교제와 친교가 수박겉핡기 식으로 된 것은 아니었는지 물은 경우가 있었다. 그래서, 새사람선교회 내의 모임들이 성숙해지기 위해서 이러한 자기 소개 시간을 가지면 어떨가 한다. 특히 소규모로 가지는 그룹 모임 (예로서 마리아, 마르다, 베드로, 바울 모임 등)에서는 이런 시간들이 있었으면 한다.


일례로 지난 마리아 모임에서 Quaker's Question 시간을 나누었다. 참가자들은 서로의 얘기를 듣느라고 예정된 모임 시간을 1시간이나 넘기고 배고픈 것을 참으면서 감동의 시간을 가졌다. 이 과정에서 어떤 이들은 자기 고백을 할 때 속에서 우러나오는 감정을 참지 못해 북받쳐 오르는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속에 있는 프라이버시 얘기까지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어느 정도 치유를 경험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을 겪으면서 서로를 이해하고 긍휼히 여기며 중보기도할 수 있는 사랑의 관계가 깊어졌으리라고 믿는다.


이러한 시간이 주는 개인적 유익은 나눔을 통해 자신을 새롭게 발견하는 것이다. 과거의 사건들이란 계속적으로 사람들의 생각과 감정, 그리고 태도를 지배한다. 특히 어렸을 때 받은 강렬한 경험은 일생을 통해 개인의 기질을 형성한다. 폭력적인 부모 밑에서 자란 사람은 내면에 숨겨진 분노를 가지게 된다. 형제들과 비교 받으며 자란 사람들은 성인이 되어서도 쉽게 열등감에 젖거나 우월의식에 빠지게 된다. 특별히 아픈 사건을 경험한 사람들은 이런 것들이 습관적인 불안이나 두려움으로 영향을 미친다.


사랑의 기초로서 A, B, C, D가 있다. A는 Accept이다.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사랑의 첫 걸음이다. B는 Believe이다. 상대를 일단 믿어주는 것이 사랑이다. C는 Care이다. 상대를 돌봐주는 것이다. D는 Desire이다. 상대에 대해 기대를 가지고 바라보는 것이다.


이러한 나눔이 좋은 방향으로 열매맺는 것은 상대의 약점이나 부족한 점을 놓고 중보기도자로 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타인의 약함과 문제를 놓고 기도할 때 나의 약함이나 문제까지도 함께 해결해주시는 분임을 종종 체험한다. 하나님은 자기 짐만이 무겁다고 발버둥치는 것을 받으시기 보다 서로의 짐을 나누어지는 것을 원하신다. 서로의 짐을 져줄 때 나의 짐마저 가볍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다. 이렇게 서로의 짐을 나누어지겠다고 중보기도하면 내가 내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할 때 보다 하나님의 손길을 더 깊이 체험하리라 믿는다.

- 미니홈피에서

[퀘이커]

출처: 퀘이커 서울 모임(http://www.quakersmm.org/)

- "퀘이커"란 어떤 사람들인가?

"퀘이커"란 명칭은 처음에는 자기네 스스로를 "친우들(Friends)"이라고 불렀던 사람들을 조롱하기 위해서 썼던 말입니다. 오늘날 친우들은 퀘이커라 불리는 것을 별로 반대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좀더 특색 있는 이름으로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일반 세상이 그렇게 부를 때는 자선사업단체, 혹은 평화운동조직, 그런 것들과 결부시켜서 생각합니다. 그러한 일반의 생각이 근거 없는 것은 아니지만, 둘 다 퀘이커들의 활동의 어느 특수한 것에만 붙잡혀서 도리어 근본적으로 중요한 점을 놓치고 있습니다. 그런 것들은 종교친우회(The Religious Society of Friends/Quaker)의 생활과 사업의 한 특수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 것들입니다.

퀘이커들은 세계에 널리 퍼져 있는 기독교의 한 갈래입니다. 그리 오랜 것도 아니고(1650년경에 와서 겨우 창설됐습니다) 또 그리 큰 교파도 아닙니다. 전세계의 회원을 다 합한대야 20만 명이 될까말까합니다. 이들의 신앙과 실천은 독특한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증거하는 데서도, 인류의 정신적 전통에서도 큰 공헌을 하고 있습니다.



- 오늘날의 친우회(퀘이커)

신교 자유령이 선포되고, 퀘이커들의 첫 번째 세대가 지나간 후에, 친우회는 "퀘이커 그레이(Quaker-gray)"라는 검소한 복장, "당신(thee와 thou)"이라는 호칭사용, 음악과 미술을 신용하지 않는 일, 경건하고 엄숙하다는 것 등으로 인해서 세속의 사람들과 외따로 떨어진 사람들의 그룹으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어떤 지방에서는 이 전형적인 퀘이커의 이미지를 보존하고 있는데, 잘 알려진 귀리죽의 상표 도안으로 사용되기도 합니다(퀘이커가 아닌 사람들인데도 자기들 상품인 귀리죽 통조림통의 겉면에, 품질과 신용을 보장하는 표시로 "퀘이커 그레이"라는 복장을 한 초기 퀘이커의 모습을 그려 넣어, 자기들 상표로 사용하는 곳이 아직도 있다고 함 - 역자 주). 그러나, 지금은 세계 어디에서도 그와 같은 퀘이커의 이미지에 부합하는 퀘이커들을 찾아 볼 수는 없다고 말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퀘이커의 전통적인 복장은 폐지되었고, "당신"이란 호칭의 사용도 점점 줄어드는 추세이고, 음악과 미술도 기꺼이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친우들도 진지하다고는 볼 수 있지만 별로 엄숙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친우들은 매우 다양한 실천 방식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각 지역에 있는 모든 친우들에게 똑같이 적용될 수 있는 용어로 오늘날의 퀘이커주의를 간결하게 기술하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다음에 나오는 것은 유럽과 오스트레일리아와 북아메리카의 여러 지역에서 실천되고 있는 퀘이커주의에 관한 설명입니다.

- 예배 모임(Meeting for Worship)

- 종교적 실천과 원리 -

친우회(퀘이커)의 본질적 특징은 예배하는 공동체라는 점입니다. 작은 모임이나 새로 생긴 모임은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개인 집에서 모입니다. 대부분의 모임은 그들의 모임집(Meeting House)을 갖고 있는데, 그 모임집은 종교적인 장식이 전혀 없이 간단하게 꾸며져 있습니다. 모임집은 신성스러운 건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성령으로 예배하기 위하여 모인 곳이면 어디든지 나타나셔서 거룩하게 해주실 것이라고 친우들이 믿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모임집은 평일에 비종교적인 목적을 위해서도 사용될 수 있습니다. 일요일(오래된 퀘이커들이 사용한 용어로는 "첫 번째 날(First-days)"), 좌석은 정방형이나 원형으로 배치되는데, 테이블이 있고 보통 그 중앙에 꽃병이 놓여 있습니다. 친우들은 자리에 들어와서 침묵에 들어갑니다. 그들은 단순히 침묵의 명상에 빠져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함께 추구하는 것입니다. 한 마디의 발언도 없이 전체의 예배 시간이 지나가 버리는 적도 가끔 있습니다. 대개의 경우, 전해야 할 메시지를 받았다고 느끼는 친우는 침묵을 깨뜨립니다. 그러면 또 다른 메시지들이 아마 소리내서 하는 기도의 형태로 뒤따르게 되는데, 각각의 메시지들은 그것 자체만으로도 완전하지만, 참석한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일체감 및 다른 사람들과의 일체감으로 이끌어 갑니다.

퀘이커의 첫 번째 세대에 속하는 스코틀랜드의 유명한 퀘이커인 로버트 버클리는 예배모임의 특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 "내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침묵의 집회에 갔을 때, 나는 그들 가운데서 신비한 힘을 느꼈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내가 그 힘에 푹 빠져들자, 나는 내 속에 있는 악이 쓰러지고 선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버클리의 시대와 마찬가지로 오늘날도 이 "침묵의 집회"는 친우회의 회원들만으로 국한된 것은 아닙니다. 친우들은 성령께서는 우연한 방문자를 먼저 규칙적이고 익숙한 참석자(attender)나 동조자로 이끌어 주시고 나아가 정식회원이 되게도 하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모든 진지한 찾는 자들(seekers)이 그들의 모임에 오는 것을 환영합니다.

예배 모임은 두 명의 장로가 손을 흔들면서 끝나게 됩니다. 장로는 또한 예배모임이 단순한 토론으로 타락하거나, 매주일 마다 미리 준비된 설교를 하는 자칭(a self-appointed) 설교가에게 청중을 동원시켜 주게 된다든지 하는 위험에서 예배모임을 지켜주는 까다로운 책임을 맡고 있습니다. 그러한 일들은 출석한 사람들이 모임 자체에서 우러나오는 신비한 힘 앞에 겸허한 마음을 지니지 않을 때 일어나곤 합니다. 확실히 그것은 항상 쉽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퀘이커의 예배방법은 세속적인 관심을 멀리하고 성령에 자기 자신을 열어 놓으라고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퀘이커 예배에는 찬송가나 기도나 성례 의식과 같은 외면적으로 도움을 주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친우들은 예배모임에서 눈에 보이는 외면적인 징표의 도움 없이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내면의 영적인 은총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고 있을 뿐입니다. 기록된 교리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친우들은 종교적 깨달음이란 정해진 어떤 한 순간에 포착될 수도 없고 항상 말로 옮겨질 수도 없는 지속적인 과정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퀘이커 교리에 가장 가깝게 접근하는 것은 "권면과 신앙반성질문서(Advices and Queries)"에서 찾아 볼 수 있는데, 이 권면과 신앙반성질문서 중에서 몇몇 짤막한 구절들이 한 해 내내 모임에서 가끔씩 읽혀집니다 : 그것은 친우들이 영적인 생활과 사회적 의미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나 하는 것을 간략하게 가장 잘 요약하고 있습니다.

친우들이 참고하는 외면적인 보조자료 중의 하나는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에 대한 위대한 기록인 성경인데, 성경은 항상 모임집 책상에 놓여 있습니다. 많은 연회(Yearly Meetings)는 퀘이커 경험(Quaker Experience)에 대한 그들 자신의 기록을 기독교인들의 신앙훈련서(Book of Christian Discipline)에 모아 놓고 있는데, 그 책에는 초기부터 최근까지의 퀘이커 저술에서 발췌한 것이 실려 있습니다. 친우들은 또한 개별적으로 자신들의 영적인 순례의 기록을 남겨 놓고 있습니다. 즉, 죠지 폭스와 죤 울만(John Woolman)의 "일기(Journals)", 우리와 동시대인인 토마스 켈리(Thomas Kelly)의 "헌신의 약속(Testament of Devotion )" 등이 그것입니다. 이 책들은 모두 성령의 실재하심을 증거하고 있지만, 로버트 버클리가 "변호(Apology)"라는 그의 저서에서 시도했던 것 같은 체계적인 퀘이커 신학에 해당되지는 않습니다. 현대에는 이것에 상응할 만한 책이 없습니다. 오늘날 친우회는 많은 유명한 성서신학자들과 몇 개의 퀘이커 연구센터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통합하기 힘들 정도로 풍부하고 다양한 경험을 3세기 동안 물려받았습니다. 어떤 친우들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통합이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른 기독교인들이 교리적으로 그들에게 대답해 주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질문들에 대하여 개인적으로 답변에 이를 수 있는 자유를 제한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 퀘이커 봉사활동

월회는 또한 친우들이 "관심사"라고 부르는 일들을 추진시킬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초창기부터, 친우들은 민감한 사회의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윌리암 펜이 이야기했듯이, "진정한 신성스러움은 사람들을 이 세상 바깥으로 내모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보다 더 잘 살 수 있게 해 주고, 이 세계를 개선하는 데 힘쓰도록 격려해 주는 것입니다." 윌리암 펜의 시대 이래로, 친우들의 활동은, 기독교인의 양심에 도전하는 일련의 사회적인 문제들과 인간의 비극에 자극 받아 왔습니다. 이 도전에 대한 퀘이커의 응답은 종종 행동하라는 부름을 받았다고 느끼는 한 사람의 친우들에게서 비롯되기도 합니다. 그 친우는 월회(나아가 더 큰 기구에)에 그의 관심을 표명합니다. 월회는 그의 관심이 하나님의 목적을 드러낼 수 있는 일과 정말로 관계가 있는지 여부를 결정하는 일을 맡습니다. 월회가 다함께 일할 관심사를 결정하게 되면, 친우회는 새로운 봉사활동에 착수하게 됩니다. 어떤 친우들은 확고한 신념을 갖고 거의 혼자서 친우회를 새로운 길로 이끌어 나갔습니다.

18세기 미국의 성자다운 퀘이커인 죤 울만(John Woolman)이 그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노예를 해방하는 데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 문제를 다루어 나가는데 있어, 목청을 높여서 하는 선전으로써가 아니라, 아직 노예제도의 사악함을 깨닫지 못한 그 시대의 친우들에게 "사랑으로 진리를 말함"으로써 친우회가 노예해방에 관심을 갖도록 하였습니다. 노예제도의 폐지가 깊은 종교적인 관심사가 되었기 때문에, 친우들은 3세대에 걸쳐 노예제도 반대운동을 지속할 수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19세기 초엽 영국의 퀘이커였던 엘리자베스 플라이(Elizabeth Fry)는 감옥에 갇힌 사람들의 복지문제에 대한 관심을 실행에 옮겼고, 퀘이커로 하여금 (범죄자들의 인간적 존엄성과 영적 성장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증진시켜 줄 수 있는) 형벌제도에 대한 조사·연구 작업을 시작하도록 했습니다.

친우회는 중대한 관심사가 있으면, 그것에 관련된 기관들을 설립하곤 합니다. 교육의 증진이 전반적인 관심사로 대두됨에 따라, 영국과 아일랜드 친우들은 기숙사를 둔 12개의 고등학교를 설립했으며, 북아메리카의 친우회는 학교뿐만 아니라 상급교육기관인 대학까지도 갖게 되었습니다. 전문적인 상무직원을 두고 있으면서, 친우들이 그들의 종교적인 통찰력을 실제적으로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영구위원회의 연회에서는 또 다른 관심사를 위해서도 새로운 기구를 설립합니다.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유럽대륙 등에 있는 친우들은 런던에 있는 "친우봉사협의회(the Friends Service Council)"와 필라델피아에 있는 "미국친우봉사위원회(the American Friends Service Committee)"등과 같은 봉사위원회를 설립했습니다. 이 두 단체 곧 "친우봉사협의회"와 "미국친우봉사위원회"는 두 차례의 세계 대전에서 희생된 사람들을 도와 준 활동에 대한 감사와 그들을 고취시켰던 평화주의자 신념에 대한 인정의 표시로 1947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습니다. 친우봉사위원회는 빨간 별과 검정별이 겹친 모양의 마크를 그들의 상징으로 채택했는데, 이 마크는 1870년도의 전쟁 직후 불란서에서 활동했던 퀘이커 구호사업 담당자들에 의해 처음 사용되었으며, 지금은 퀘이커 전통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이루어지는 봉사 활동은 그 시대의 도전에 대한 새로운 관심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전통적인 것을 알 수 없습니다. 이 도전은 다음과 같은 많은 상이한 형태를 취해왔습니다.

1845년 에이레의 기근으로 인한 극심한 곤궁, 이와 비슷하게 1970년 Sahel(사엘)가뭄에 따른 지독한 궁핍: 실업자들, 경제적인 피해를 입은 사람, 소수인종 전쟁시 적국에서 거주하던 사람 등이 겪는 곤경: 무엇보다도 나치즘이나 공산주의 또는 제국주의나 인종차별을 피해 온 사람들과 인간에 대한 잔학 행위에 희생당한 사람들이 겪는 고통 등.

- http://www.clm.or.kr/technote/readr.cgi?board=simple&nnew=2&y_number=21

======

한국 퀘이커교를 진단한다 / 교리와 현황

“나는 갈수록 퀘이커가 좋습니다. 좋은 이유는 그들은 형식을 차리지 않기 때문이요, 교리나 신학 토론에 열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목사도 없고 신부도 없고 아무 차별도 없습니다. 누가 누구를 가르치겠다는 것도, 누가 뉘게 배우겠다는 것도 없이, 그저 살림을 통해서 하는 전도가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마음에 드는 것은 종교 냄새가 별로 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연스럽고, 속이 넓으면서도 정성스럽습니다. 누가 와도, 불교도가 오거나, 유니테리언이 오거나, 무신론자가 온다 해도, 찾는 마음에서 오기만 하면 환영입니다. 그러니 참 좋지 않습니까?”

한국의 대표적 퀘이커교도였던 함석헌의 ‘퀘이커 예찬’이다. 퀘이커교가 한국에 들어온 지 벌써 반세기가 지났다. 이들은 일정한 교회 제도를 택하지 않았기에 큰 조직체를 가지지 못했다. 그러나 반면 그들은 개인의 마음속으로 파고들어가서 많은 동조자를 얻어 현재까지 그들 특유의 방법으로 모임을 가지며 교세를 확산시키고 있다. 동시에 한국교회 종교다원주의 운동의 선구적 역할을 해왔다. 

이에 퀘이커교의 발생배경과 근본사상 그리고 한국전래와 현황을 살펴보고자 한다.


1. 역사적 배경

16세기 영국에서 일어난 종교개혁 운동은 여러 가지 부작용을 일으켰다. 영국 교회가 로마 천주교회와 큰 차이가 없다고 본 많은 신도들이 자기들의 주관적 판단에 따라 개혁운동을 일으켜 17세기에는 영국교회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확산되었다. 그들을 분리주의자(The separatists)라고 부른다. 그 중에는 장로교회, 침례교회, 회중교회 등이 있었다. 이들 분리주의자들은 후에 주로 미국을 발판으로 큰 교파로 발전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분리주의자들 중에 특이한 그룹이 있었는데 그것이 1647년 영국인 죠지 폭스가 창시한 ‘친우회(Friends)’ 또는 ‘퀘이커단(Quakers)’이다.

이들은 신조, 성직자, 또는 기성교회가 지니고 있는 그 밖의 다른 형식 없이도 하나님을 직접 내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집회를 가질 때 ‘내면의 빛’ 또는 ‘모든 사람 안에 있는 신성’을 조용히 기다리며, 특히 사회 개혁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크롬웰에 따르면 퀘이커교도들은 난잡하고 무질서한 예배의식 때문에 가는 곳마다 박해를 받았다. 450명 이상이 퀘이커 조례(1662)와 그와 유사한 규제법으로 영국 감옥에서 죽었다. 그러나 1681년 영국의 왕 찰스 2세는 퀘이커교 지도자 윌리엄 펜에게 있었던 빚 대신 그에게 웨스트뉴저지 개발권을 주었고, 새로운 식민지 펜실베니아(펜의 아버지 이름을 따서 지음)는 동료 퀘이커교도들의 신앙의 자유를 위한 안식처가 되었다.

2. 퀘이커교의 교리

첫째, 퀘이커교는 그들 특유의 예배 형식을 가지고 있다. 이것을 예배라고 할 수 있는지도 논의의 대상이 되어 있다. 그 모임에 참가한 사람들은 무언(無言)을 지킨다. 침묵(명상)을 계속하는 동안 그들은 성령의 내림을 기다린다.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이나 누구든지 그 자리에서 성령의 내림과 사역이 있으면 받은 영감을 말한다. 17세기에 이 운동이 일어났을 때는 영감을 받을 때 전신이 떨었다 해서 ‘진동자(Quaker)’라는 별명을 얻었다. 만약 영감을 받은 사람이 없으면 무언으로 그 모임은 끝난다. 그들은 직접적 영감을 중시하여 언제든지 새 계시를 받는다고 한다. 함석헌은 “퀘이커의 명상은 동양의 참선처럼 개인적인 명상이 아니라 단체적인 명상이다. 퀘이커들은 단체로 명상할 때 하나님이 임재한다고 믿는다”고 설명한 바 있다.

둘째, 퀘이커교는 성서가 모든 종교체험에 관한 가장 우수한 문학적 표현이라고 인정한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 안에 불변의 진리가 있거나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퀘이커에 따르면 “성서는 원천에 관한 방향 제시는 되나 원천 자체는 아니다. 그 원천은 오히려 성령 또는 각자의 내부에 있는 ‘영적 빛’이다.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내적으로, 직접적으로 자기 안에 내주하는 성령에 의해 인도되어야 한다”고 한다.

셋째, 퀘이커교는 내적 계시를 중시하고 성서를 격하시키기 때문에 어떤 교리나 신앙고백서를 만들지 않는다. 그들은 오히려 모든 신학적 사변의 무거운 짐을 바닷가에 다 버렸다고 자랑한다. 퀘이커호주연회에서 펴낸 <청소년을 위한 퀘이커 신앙 안내서>의 교리적인 부분을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는 모든 외적인 전쟁과 싸움을 무조건 반대한다. 따라서 군대에 들어간다거나 전쟁준비 작업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한다(양심적 병역거부).”

“우리는 노예제도, 인종차별을 반대한다.”

“우리는 모든 어린이는 태어나는 순간 하나님의 권속의 일원이 된다고 믿기 때문에 세례를 받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되는 일은 외적인 성례전 없이도 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성례전을 갖지 않는다.”

“우리 각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부분이 있다. 그것은 ‘씨’, ‘속의 빛’, ‘사람의 영’ 등으로 불려왔다. 그것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어떤 인종이나 종교에도 상관없이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 속에 있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자신 속에 있는 영을 계발하고 진리를 더 열렬하게 추구했기 때문에 하나님께로 매우 가까이 나아갔다. 이들 중에는 이집트인 악나톤, 인도 왕자 석가모니, 중국 신비주의자 노자, 유대인 이사야 등이 있다.”

“우리는 비 기독교인들의 신앙을 배척하지 않는다. 우리는 힌두교나 유교 또는 그밖의 다른 종교나 철학이 하나님께 향하는 또 다른 길을 보여 주고 있음을 알기 때문에 그들의 신앙과 실천을 존중한다.”

주로 Joseph John Gurney(1788~1847)의 영향 하에서 나타난 복음주의적 퀘이커는 성경의 무오성과 그리스도의 신성을 믿으며, 그것이 자신들이 주장하는 계속적인 계시와 철저한 평화주의(doctrinal pacifism), 그리고 내면의 빛을 통한 구속과 조화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퀘이커들은 목사를 임직시키지는 않지만, 목사를 청빙하기는 한다. 또한 순서를 따라 드리는 예배를 하기도 하는데, 이런 복음주의적 퀘이커의 표준적 진술은 ‘리치몬드 선언’(1887)이다.

현대 비복음주의적 퀘이커주의는 부분적으로는 18세기 정적주의적 퀘이커 사상(quietist Quakerism)에서 연원한 것으로 합리주의적이고 자유주의적인 것과 신비적인 것을 결합시킨 사상이다. 보편적 내면의 빛 교리를 확장시켜 모든 종교에 그 빛이 작용하고 있다고 하며 모든 종교들은 다 조화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인류는 다 하나라고 믿기에 이런 분파의 퀘이커는 평화 운동과 사회봉사 활동에서 매우 활동적이다.”

넷째, 퀘이커교는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두 가지 종자가 있다고 믿는다. 이는 죄의 종자와 신적 종자다. 죄의 종자는 인간 자신으로부터 싹이 트나, 신적 종자는 신으로부터의 개입이 필요하다. 이것을 ‘하나님의 심방’이라고 부른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심방의 하루 또는 한 때를 주어 그가 구원을 얻어 그리스도의 죽음의 열매에 동참하게 한다. 이 하나님의 심방의 때를 가지는 사람이 구원을 얻는다. 마음속에 비치는 빛에 항거하는 사람은 멸망받는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화해 사역은 아직 미완성이다.

또, 퀘이커에 의하면 사람에게는 아담의 죄값이 전가되어 있지 않다. 사람이 다 같은 불복종의 죄를 범하고부터 비로소 죄책이 생기게 된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에게까지 원죄의 책임을 지우는 교리는 잔인하고 자연과 하나님의 자비와 의에 어긋나는 견해다.

이승구 교수는 이에 대해 “이와 같이 아담의 죄의 전가를 거부하는 퀘이커교는 결국 펠라기우스적인 구원론을 주장하게 되고, 그 구원의 방도는 내면의 빛에 순종하는가의 여부가 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다섯째, 퀘이커교의 교회는 ‘거룩한 빛, 자기 안에 있는 하나님의 증거를 순종하는’ 모든 사람으로 구성한다. 그 안에는 이미 죽은 사람도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이교도(異敎徒)와 터키 사람과 유대 사람도 다 포함되어 있다. 사람은 다른 사람을 위해 눈을 뜨고 은혜의 선물의 정도에 따라 서로 가르치고 교육하고 배려한다. 이것이 교회다. 그런데 외적 신앙고백과 외적 의식이 없으면 교회가 아니라는 사람들이 있다면(로마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교회를 지목) 그들은 악마의 꼬임에 빠져 있다.

여섯째, 퀘이커교는 자타가 공인하는 평화주의자이다. 따라서 퀘이커교가 병역과 선서를 거절하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세상과 이 세상이 필요로 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봉사적 사랑으로써 적극적으로 가담한다. 이 점이 다른 기독교신비주의자들과 다른 점이다.

3. 퀘이커교의 한국 전래와 현황

처음 퀘이커가 한국에 전해진 것은 6.25전쟁 직후다. 1953년 전북 군산의 도립병원에서 구제활동을 폈던 미국과 영국의 퀘이커 의사들을 통해 처음 퀘이커를 접한 군산 사람들이 그들의 침묵예배에 참석하면서 한국 퀘이커가 탄생했다. 퀘이커 봉사자들이 떠난 이후에도 한국인들끼리 자체 모임을 계속해 한국 퀘이커 1세대가 출현했으며 최초의 한국인 퀘이커는 이윤구였다.

1960년대 ‘사람이 죽은 후에 하늘나라에 가는 것보다 세상의 평화와 사회정의를 이루는 일에 힘이 모아져야 한다는 데 공감한 함석헌의 가담으로 퀘이커는 한때 크게 부흥했다. 함석헌은 본래 장로교 신자였으나 일본에 건너가 우찌무라 간조의 영향을 받아 무교회주의자가 되었다가 사회에 대한 그들의 소극적 신앙태도에 만족하지 못하고 퀘이커교로 옮기게 되었다. 그 후 퀘이커 지도자였던 브린튼의 영향을 직접 받아 그것을 생활화하는 가운데 한국 민주화 투쟁에 앞장서게 된 것이다. 그러나 한국 퀘이커교는 1989년 함석헌 타계 후 내부 혼란과 갈등을 빚으며 10년이 넘도록 예배모임조차 없었다.

2000년대에 들어 박성준 성공회대 교수가 미국 펜들힐에서 정식 퀘이커교도가 되어 귀국한 이후 한국퀘이커에도 활기가 생겼다. 옛 퀘이커 멤버들을 중심으로 원상 복귀를 위해 노력해 다시 모임을 갖게 된 것이다. 현재 서울 신촌의 모임에는 약 50여명의 교도들이 있고, 곧 대전에 모임이 만들어질 예정이다.

박성준 교수는 “21세기의 문턱에서 민중신학을 다시 생각한다”는 글을 통해 퀘이커교와 민중신학의 연합을 시도한다. 그는 죠지 폭스는 ‘예수가 이미 재림한 사실을 알리려 했던 것’이라고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죠지 폭스는 거듭 거듭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백성들을 몸소 가르치시기 위해 오셨다(Jesus Christ is come to teach his people himself)’라고 외쳤다. 이것은 두말할 여지도 없이 ‘the Second Coming of Christ’를 선포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가 하시 하처에 육신적으로 재림한다는 뜻이라기보다는 민중의 마음속에 이미 ‘내면의 빛’, ‘씨앗’, ‘하나님의 영’이 들어 있음으로 이미 ‘그리스도’가 와 계신다는 것을 알리려 했던 것이다.”

박 교수는 계속해서 “죠지 폭스의 새 진리를 따라 새 사람으로 변화된 수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삶을 통해 그리스도가 말씀하시고 행동하신다는 것, 그리스도가 그 시대와 사회의 불의와 폭력에 도전하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며 “그러므로 내면의 빛과 씨앗, 영을 통한 그리스도의 재림이란 단지 사적인 경험에 그치는 것이 아닌, 변화된 남녀들이 새 삶의 방식으로 그리스도를 따를 때, 밖으로 사회와 역사 속으로 나아가는 종말론적 운동을 뜻했다”고 해석한다.

이승구 교수는 박성준 교수의 이와 같은 주장에 대해 “결국 그리스도의 가시적 인격적 재림을 부인하는 것으로, 이는 성경의 가르침과는 다르다”며,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그대로 살고 이 세상에서 실천해야 한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강조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또,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것이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는 것이라고 할 수는 있으나(갈 2:20), 바울을 따라 우리가 이렇게 말할 때에도 바울은 그리스도 자신과 성도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시는 그리스도인의 질적인 차이를 분명히 했으며, 우리는 그 점을 매우 강조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박 교수는 또 “함석헌은 1970년대 초 퀘이커의 회원이 되었다고 한다. 그가 ‘씨알’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전개한 것은 그보다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하지만, 그의 씨알 사상의 핵심 내용은 퀘이커 사상과 흡사하다”며 “민중신학의 창시자 격인 서남동과 안병무에게 미친 씨알 사상의 영향을 생각할 때, 민중신학과 퀘이커 사상의 만남은 일찍이 이뤄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이승구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함석헌 선생님은 무교회주의사상과도 오랫동안 관련을 갖고 계셨고, 1970년대에 퀘이커 회원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항상 종교적으로 자기 나름의 길을 추구하였기 때문에 퀘이커 사상을 항상 변해 가는 것으로 정의하지 않는다면 그를 충실한 퀘이커라고 하기는 어렵다. ‘씨알’ 사상은 퀘이커 사상 보다 더 오래 전부터 영글어진 것이 분명하며, 퀘이커 사상과 민중 신학을 연관시키는 것은 흥미롭기는 하나(따라서 학자들이 그런 논구를 할 수는 있으나) 그리 공정하지 않은 것으로 여긴다.”

(전정희 기자)

▶ 본 기사의 전체내용은 www.amennews.com 에서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