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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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2008년 8월호) 
 
  ‘여러 밤’ ‘그이’의 ‘하늘놀이’ : 다석 유영모의 기도와 영성
  

 
몸성히, 맘놓이, 바탈퇴히
빈탕한데 맞혀 하늘놀이

새 길을 열며

다석 유영모(1890-1981)는 그의 제자 함석헌과 더불어 종교영역에서 뿐만 아니라 20세기 한국이 배출한 최고의 사상가로 평가된다. 이번 여름(7월 30일-8월 5일) 서울에서 개최되는 세계적 권위를 가진 제22차 세계철학대회(XXII World Congress of Philosophy)에서도 한국준비위원회는 한국을 대표하는 철학사상가로서 유영모와 함석헌을 선정하고 특별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한국 기독교계 내에서는 유영모가 과연 기독교인인가? 하는 등의 원초적인 의문을 제기하며 “한국신학의 광맥”으로서 그의 중요성을 홀대하고 있다.1)

 그러나 유영모 사상의 기조는 확실히 성경에 있으며, 성경 말씀을 중심으로 한 영성 수련에 따른 통찰에 있다는 것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
특히 영어몰입교육 등 한글과 한국문화의 중요성에 대한 의식고취보다는 언어와 경제적 실용이 서구화의 가장 큰 반사이익을 얻은 기독교인들에 의해 우선적으로 주장되는 지금의 상황에서 유영모의 눈물겨울 정도로 끈질겼던 한글사랑이 한국 기독교인에게 암시하는 바가 크다. 많은 독자들은 이 글의 제목과 맨 앞에 인용된 키워드들을 보면서, 그것들이 순수 한글임에도 불구하고 도대체 무슨 말인가? 하고 신기함과 의구심을 동시에 느꼈으리라. 제목에서 ‘여러 밤’이라 한 것은 ‘밤 셋’이란 뜻을 가진 유영모의 호 다석(多夕)을 필자가 한글로 풀어서 표현해 본 것이고, ‘그이’란 ‘선생’ 또는 ‘군자’를 다석이 자주 그렇게 호칭했다. 그래서 ‘여러 밤 그이’는 다석 선생을 지칭한다. ‘하늘놀이’라는 것은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다석에 있어서는 최상의 기도법을 말한다. ‘몸성히’, ‘맘놓이’, ‘바탈퇴히’는 다석이 순 한글로 표출한 기독교 영성 수련이다. 다시 말하면 이들은 ‘한나신 아들’인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은 ‘참몸’, ‘참맘’, ‘참바탈’을 성취하기 위한 다석의 수양법, 곧 전통신학적인 용어로 굳이 말하자면 성화론을 지칭한다.
다석의 수양법은 말로는 “성령! 성령!” 하지만, 구체적인 영성수련법이 빈곤한 한국 개신교에게 앞으로 소중한 자원이 될 것이며 큰 길잡이 역할을 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이글에서는 “몸성히, 맘놓이, 바탈퇴히, 빈탕한데 맞혀 하늘놀이”라는 구절을 화두로 놓고 살펴보고자 한다. 

기독자의 삶과 영성

다석에 있어서 영성과 일상(聖과 俗)은 서로 따로 있던 것이 아니고, 일상의 삶 전부가 곧 영성이고 곧 기도이다. 그의 ‘기독자’라는 다음의 한시(1956. 12. 8)에서 이러한 생각이 분명하게 표출된다.2)

기독자(基督者)

기도배돈원기식(祈禱陪敦元氣息)
찬미반주건맥박(讚美伴奏健脈搏)
상의극치일정식(嘗義極致日正食)
체성극명야귀탁(      誠克明夜歸託)

기도배돈원기식(祈禱陪敦元氣息)

다석에게 있어서도 그리스도인이란 기도하는 사람을 말한다. 그리고 기도는 보통 교회에서 말하는 것처럼 숨을 쉬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숨을 쉰다는 것은 단지 상징적이고 영적인 것만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호흡하는 것을 의미한다.(元氣息: 기도는 본래 숨을 쉬는 것이다) ‘배돈’이란 “조심조심 후하게 또한 정중히 두텁게 하는 것”을 말한다. 다석은 이 구절을 이렇게 풀어준다.

우리가 기도를 하는데 숨을 쉬면 두텁게 후하게 그리고 정중하게 하는데 그 '원(元)'은 숨입니다. 그래서 기도드린다는 말은 안 됩니다. 호흡을 드린다는 말이 옳습니다… 우리가 숨쉬는 것, 곧 호흡하는 것을 바로 하느님에게서 받아서 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즉, 기도는 우리의 ‘원기식’을 두텁게 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이 구절(‘기도배돈원기식’)에는 또 다른 흥미로운 해석을 가할 여지가 있다. 즉 기도란 배돈하게 원기를 호흡한다(息)는 말이 된다. 기도란 원기(元氣), 즉 우주의 근원이 되는 기운, 곧 성령의 호연지기(浩然之氣)를 숨 쉬는 것이다. 다석의 선도(仙道)와의 관련성을 추측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다석은 호흡하는 숨 하나하나 속에서도 놓치지 않고 나와 하나님의 관계성 그리고 내가 기독교 신앙인이 된 의미를 음미하고 묵상하며 숨을 쉬었던 것이다. 숨을 흡(吸)하면서 하나님을 받아들이고 숨을 호(呼)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나의 믿음과 공경을 바쳤던 것이다. 

찬미반주건맥박(讚美伴奏健脈搏)

다석의 영성은 다만 정신적이고 영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 생명의 가장 기본적인 생물적이고 육체적인 차원에서 확인되고 체험된다. 살아있다는 것은 숨을 쉬는 것이요 맥박이 뛰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숨 쉬는 것이 곧 하나님에 대한 기도요, 맥박이 건강하게 뛰는 것이 곧 하나님에 대한 찬미반주이다. 그는 말한다.
맥박은 건강해야 합니다. 맥박이 건강하게 뛰는 뚝딱뚝딱 하는 소리는 참찬미입니다. 다른 것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몸성히 맘놓이 바탈퇴히’로 나가는 것이 ‘건맥박’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찬미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래서 다석은 참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맥박이 팔딱팔딱 찬미하며 반주합니다. 이렇게 뛰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피입니다. 기도는 배돈하고 ‘원기식’을 드리며, 찬미에는 ‘건맥박’으로 반주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아닌가 합니다.

그 ‘건맥박’을 달성하는 방법이 바로 다름 아닌 ‘몸성히 맘놓이 바탈퇴히’인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고 권면했고. 이것을 우리가 드릴 “영적 예배”라고 정의했다.(롬 12:1) 그러나 많은 기독교 영성전통들은 희랍사유의 이원론적 영향을 받아서 영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만을 숭배하고 몸과 육체를 경시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오늘날 ‘몸 신학’ 또는 ‘몸의 영성’이 주목을 받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다석의 ‘찬미반주건맥박’과 ‘몸성히’라는 통찰은 이러한 상황에서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영성신학적 자원인 것이다. 

상의극치일정식(嘗義極致日正食)
물론 이러한 공경의 자세는 건강을 위해 음식을 섭취하는 식사 때에도 적용된다. 모든 식사가 곧 성만찬이요, 곧 제사인 것이다. 그는 강조한다.
이 한마디만큼은 기억해주십시오. ‘상의극치일정식’은 제사이고 성찬입니다. 애식과 회식의 정신으로 먹는 것이 상의극치인데, 성찬은 제사의 근본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아직 가짜가 들어 있습니다. 먹고 마시는 것을 허락하여 주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는데, 예배당에서만 해서는 안 됩니다. 그 정신을 가지고 일상을 사는 것이 ‘상의극치’가 됩니다. 보본추원(報本追遠)의 정신을 매끼 식사 때마다 표시하여야 극치를 이룰 것입니다.(좬다석 강의좭: 329)

교회에서 예배할 때만이 아닌 모든 식사 때는 물론이고, 일상의 삶 전부가 바로 산제사요, 예배인 것이다.(롬 12:1)

체성극명야귀탁(    誠克明夜歸託)
다석은 하나님을 알기위해서는 ‘체성극명’해야 한다고 말한다. 체(  )란 조상을 기리며 정성껏 봉양하듯 하나님을 추원하는 것이요. 성(誠)은 참을 존재론적으로 이룸을 말한다.

하느님에 대한 추원(追遠)을 옳게 하는 것이 체(    )요, 이에 바로 들어가면 성(誠)입니다. 체성(    誠)은 치성(致誠)입니다. 이 ‘체’를 밝혀야 ‘성’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극은 늘 하자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체성'을 하자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야 하느님을 알게 됩니다. 늘 ‘체성’을 밝히면 밤, 곧 신탁(神託)에 들어갑니다. 말씀이 늘 참에 들어 갈 수 있습니다. 이래야 우리가 세상을 떠날 때 떳떳하게 들어 갈 수 있습니다. 영원한 밤에 들어갑니다.

그러므로 체성극명야귀탁! 이 한 구절로 다석은 신학을 명쾌하게 정의하고 있다. 신학은 바로 다름 아닌 체성, 극명, 신탁에 들어가려고 하는 인간의 노력이기 때문이다.

몸성히, 맘놓이, 바탈퇴히
몸성히
기독자의 참 삶과 영성에 들어가려면 우선 “하나님의 성전”(고전 3:15)이요, “거룩한 산 제사”(롬 12:1)인 우리 몸을 성하게 ‘건맥박’하게 해야 한다. 다석은 이것을 ‘몸성히’라고 칭한다. 이 대목에서 다석이 “몸이 성하면 몸이 성하지 않는 사람을 도와주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는 것을 주목해야한다.(좬다석 강의좭:56) 왜냐하면 다석의 ‘몸성히’가 온전한 사람만을 위한 것으로 우생학적 오해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맘놓이,  비히
그리고 무엇보다도 마음을 내려놓아야 한다. 곧 마음을 비워야 한다. 다석은 이것을 ‘맘놓이’ 또는 ‘  비히’라고 칭한다. ‘  비히’는 ‘자기비움(kenosis)’의 영성(빌 2:7)을 다석의 방식으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마음은 진공이 될 때까지 깨끗하게 비워야한다. “마음을 비워야 합니다. 진공을 만들어 놓으면 한데 쏠려 몰려들어 옵니다.” 그 몰려들어 오는 참된 것들, 곧 ‘속’, ‘곧’, ‘믿’(忠信)을 말아서 채워야 한다(‘챔말기’). 이 ‘말기’는 결국 ‘맑기’에 이르게 된다고 다석은 설명한다.

‘말기’만 채우지 말고 몸 성히 비어 있으면 영원히 맑고 맑아집니다. 이승에서가 아니라 죽음을 넘어 저승에서 그러하다는 말입니다. 가는 길에 속을 보이게 될 것입니다.3)

바탈퇴히
‘몸성히’와 ‘맘놓이’의 두 단계는 ‘바탈퇴히’의 과정을 지향한다. ‘바탈’은 나의 바탕, 개성(個性)을 말한다. ‘퇴히’의 ‘퇴’는 본래 ‘ㅌ’ 밑에 ‘아래 아’자를 쓰는데, ‘태워버린다“(燃)라는 뜻과 ‘태워나간다’(乘)는 의미를 동시에 가진다.(좬다석 강의좭:174-6) 즉 나의 못된 버릇과 악한 바탕을 끊임없이 태워 변화시켜나가는 성화의 과정을 말한다. 다석은 말한다.

‘나’밖에 없습니다. 단지 내 바탈을 태워서 자꾸 새 바탈의 나를 낳는 것밖에 없습니다. 종단에는 아주 벗어버리는 것입니다. 새로운 '나'를 하느님 뜻대로 자꾸 낳아가도록 노력하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이렇게 여러분께서도 바탈을 태워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좬다석 강의좭:206)

‘바탈퇴히’는, 내 바탈(自)을 스스로 태우는(燃, 然) 것이고, 그것을 다른 말로 옮기면 곧 자연(自然)인 것이다. 그리고 다석은 스스로 ‘자(自)’자는 ‘코 속’을 형상한다고 본다. 그래서 자연은 또한 코가 불탄다, 즉 코로 숨 쉰다는 것을 표상한다.

우리 동양 말로 ‘자연(自然)’은 불탄다는 말입니다.…우리가 숨쉬는 것은 불 타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코 속이 불탄다는 말입니다.(좬다석 강의좭 377)

이것 또한 다석과 선도의 연관성이 보이는 대목이다.
선도와 비교하자면, ‘참몸’을 만들어 가는 ‘몸성히’는 올바른 몸인 정체(正體)와 진체(眞體)를 체현하기 위해 몸을 고르는 ‘조신(調身)’에 해당하고, ‘참맘’을 향한 ‘맘놓이’는 올곧은 마음인 정심(正心)과 진심(眞心)을 구현하기 위해 맘을 고르는 ‘조심(調心)’과 유사하고, ‘참바탈’로 성화하려는 ‘바탈퇴히’는 ‘참숨’인 정식(正息)과 진식(眞息)을 이행하고자 호흡을 고르는 ‘조식(調息)’과 관련된다. 이와 같이 ‘몸성히, 맘놓이, 바탈퇴히’는 ‘조신(몸고르기), 조심(맘고르기), 조식(숨고르기)’과 대비된다. 그것을 도표로 하면 다음과 같다.

몸성히 (참몸) 몸고르기 調身 - 正體 = 眞體
맘놓이 (참맘) 맘고르기 調心 - 正心 = 眞心
바탈퇴히 (참바탈, 참숨) 숨고르기 調息 - 正息 = 眞息

빈탕한데 맞혀 하늘놀이: 다석의 기도

빈탕한데 맞혀 놀이(空與配享)
다석의 영성에 있어서 사람살이(살림 또는 삶)의 궁극적인 목적은 ‘공여배향(空與配享)’이다. 그는 그것을 “인간으로 나서 본 인간에 대한 결론”이라고 말한다.(좬다석 강의좭:458) 이 ‘공여배향’을 한글로 풀이한 것이 ‘빈탕 한데 맞혀 놀이’이다. ‘빈탕’은 크고 큰 허공, 즉 “공공허허대대실(空空虛虛大大實)”을 말한다. ‘안팎 한테’(안과 밖이 하나가 되는 한데 + 하나 = 한테)에서 나온 ‘한데’는 ‘베풀’ 여(與)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좬다석 강의좭:466) ‘맞혀’는 맞추어 간다라는 뜻의 배(配)를, ‘놀이’는 제사(享)의 유희삼매에 빠져 노는 것을 말한다. 다석이 내린 “인생의 결론”을 한 마디로 하자면, 이와 같이 “빈탕 한데에 맞추어서 놀이하자!”이다.(좬다석 강의좭: 467) 그것은 곧 바울의 말씀에 의하면 우리 몸을 “거룩한 산제사”로 “영적 예배”를 드리자는 것과 공명한다.(롬 12:1)

빈탕한데 맞혀 하늘놀이: 우주 산보

다석의 ‘빈탕한데 맞혀 놀이’, 곧 거룩한 산제사와 영적 예배는 “산보” 또는 “정신하이킹”이라고 부른 그의 기도문에서 정점에 이른다. 그 기도문을 살펴보자. 

산보

높고 높고 높고 산보다 높고 산들보다도 높고 흰 눈보다도 높고 삼만 오천육백만 리 해 보다도 높고 백억 천조 해들이 돌고 도는 우리 하늘 보다 높고 하늘을 휩싼 빈탕(虛空)보다도 높고 허공을 새겨낸 마음보다 높고 마음이 난 바탈(個性)보다 더 높은 자리에 아버지 한나신 아들 참거룩하신 얼이 끝없이 밑없이 그득 차이시고 고루 잠기시며 두루 옮기시사 얼얼이 절절이 사무쳐 움직이시는 얼김 맞아 마음 오래 열려 예여오른 김 큰김 굴려 코뚤리니 안으로 그득 산김이 사백조 살알을 꿰뚫고 모여 나린 뱃심 잘몬의 바탕 힘 바다보다 깊이 땅 아래로 깊이 은하계 아래로 깊이 한 알 알을 꿰어 뚫다. 이 긴김 깊이 코김 뱃심으로 잇대는 동안 얕은 낯에 불똥이 튀고 좁은 속에 마음종 울리다 마니 싶으지 않은가, 우는 이는 좋음이 있나니 저희가 마음 싹임(消息)을 받을 것임이라. 우리 마음에 한 목숨은 목숨키기 깊이 느껴 높이 살음 잘몬의 피어 울리는 피도 이 때문 한 알 알의 부셔져 내리는 빛도 이 때문 우리 안에 밝은 속알이 밝아 굴러 커지는 대로 우리 속은 넓어지며 우리 꺼풀은 얇아지니 바탈 타고난 마음 그대로 왼통 속알 굴려 깨쳐 솟아나와 오르리로다.4)
 
다석은 이것을 노래처럼 외우면서 깊게 기도했다고 한다. 그 내용은 “정신하이킹”이라고 명명한 것처럼, 우주를 관통하고 “높이 높이 올라 하나님의 보좌까지 올라갔다가 거기서 얼김[성령]을 받아가지고 다시 이 세상에 내려왔다가 다시 내 목숨을 키워 올려 결국은 마음의 꽃을 피우라는 것”이다. 다석의 기도는 그야말로 하늘을 무대로 우주 산보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하늘을 덧붙여 ‘빈탕한데 맞혀 하늘 놀이’라는 이름하고, 이것이 ‘몸성히, 맘놓이, 바탈퇴히’와 더불어 다석 영성신학의 요약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 기도문에 대한 다석의 해설을 직접 들어보자.

맨 처음에 산에서 부터 시작하여 해를 거쳐서 은하계 저편 우주를 싸고 있는 빈탕 한데 저편에 거기가 마음인데 그 마음 한복판에 하나님의 보좌를 생각하고 그 보좌에서 생명의 강처럼 흘러 내려오는 얼김을 생각해 본다. 그래서 이슬이 내리듯 내 마음에 내려 그 얼김으로 입이 뚫리고 코가 뚫리고 눈이 뚫리고 귀가 뚫리고 마음이 뚫리고 지혜가 뚫려서 사백조 살알 세포를 다 뚫고 그 기운이 배 밑에 모여 자연을 움직이는 힘이 되어 은하계를 뚫고 태양계를 뚫고 내리어 우리 얼굴에 불똥이 튀게 하고 우리 마음에 종을 울리게 하여 깊이 느끼고 깊이 생각하여 마음을 비게 하고 마음을 밝게 하면 우리 마음속에서 깨닫게 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이 우리의 목숨 키우고 우리의 생명을 키워가는 것이다. 그래서 깊이 느끼고 높이 살게 하는 것, 깊이 생각하고 고귀하게 실천하는 것 그것이 생명의 핵심임을 알게 된다.
 
다석의 기도, 하늘 산보는 빈탕한데 우주(大宇宙)와 맞혀 노는 것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 몸 속의 우주(小宇宙)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나타난다는 것을 유의해야 한다. 대우주와 소우주가 내 안팎에서 성령(얼김)을 통해 소통되고 있고 나는 그것에 맞혀 놀이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대주천(大周天)과 소주천(小周天)을 지칭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좀 더 구체적으로 이 기도문은 다음과 같은 영성의 단계와 구조를 제시하고 있다.

땅 위: 지구-우주 (우주인) -> 빈탕한데(虛空): 노자(도교) -> 마음(心): 부처(불교) -> 바탈(性): 공자(유교) -> 아버지 하나님: 성부 -> 한나신 아들: 예수(성자) -> 참거룩하신 얼: 성령 -> 얼(숨)김(성령): 김(氣) -> 큰김 - 코 뚤리니 -> 산김 - 사백조 살알 뚫고 -> 뱃심 잘몬의 바탕 힘(단전) -> 바다 - 땅 아래 -은하계 -> 한 알 알 꿰어        다(玄牝一窺) -> 긴김 - 코김 - 뱃심 - 낮에 불똥 - 마음 종 - 마음 싹임(소식) - 목숨 - 올리는 피 - 내리는 빛 - 밝은 속알(덕) - 속은 넓어지고 - 거플 얇아지니(피부호흡) - 바탕 울려 속알 굴려 - 깨쳐, 솟아나와, 오르리로다.

여기에서 다석의 영성이 지닌 다섯 가지의 특징을 추출해 낼 수 있다.
첫째, 다석의 영성은 지구의 좁은 범위를 넘어 선 광활한 우주를 무대로 하는 우주적 영성(영적 우주인)이다.(빈탕한데 맞혀 하늘놀이) 
둘째, 다석의 영성은 동양의 모든 영성 전통들을 관통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통전하여 더 높이 승화된 기독교 영성의 새로운 동양적 지평을 열고 있다. 빈탕한데(虛空)는 노자와 도가 사상의 단계를, 마음(心)은 부처와 불교의 차원을, 바탈(性)은 공자와 유교를 함의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기독교의 영성은 그 단계의 하늘들을 훌쩍 넘어 더 높은 차원의 하늘로 묘사되고 있다.
셋째, 다석의 영성은 삼위일체적 영성이다. 다석에 있어서 영적 에너지의 근원은 아버지 하나님(성부), ‘한나신 아들’(성자), ‘참 거룩하신 얼’(성령), 곧 삼위일체 하나님이다.
넷째, 다석의 영성은 성령중심적이며, 그 얼김은 숨과 김(氣)을 통하여 역사한다. 그리고 삼위일체 하나님의 기(氣)는 성령의 강림을 통해 우리 몸에서 구체적으로 육화한다.
다섯째, 다석의 영성은 몸의 영성이다. 정신하이킹은 정신적 유희삼매로 끝나지 않고, 그 성화의 과정은 우리 몸의 변화를 통하여 구체적으로 체화된다. 그야말로 몸성히, 맘놓이, 바탈퇴히가 몸의 실질적인 변화와 징조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이것은 단순한 영적 ‘하늘놀이’가 아니라, 성령과 기를 통해 소통과 연합에 이르는 ‘하늘몸놀이’인 것이다.

새 하늘을 열며.
빈탕한데 맞혀 하늘놀이: 삼 천 년대의 새로운 기독교 영성

인간이 대기권을 뚫고 지구 밖 우주를 향해 나아가기 이전에 다석 유영모는 이미 우주적 영성을 체득하고 스스로 “영적 우주인”이 되었다. 그가 자주 오른 북한산 등반은 단순한 하나의 등산이 아니라 우주를 단전 안에 품고, 굴리고, 더불어 숨 쉬었던 우주 산보, 영성 수련이었던 것이다. 기도라는 것은 단지 물질적 축복을 요구하는 인위적인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이 주시는 우주적 호연지기를 숨쉬며, 체화시키며, 그것(율려)에 맞춰서 춤을 추는 ‘빈탕한데 맞혀 하늘몸놀이’였던 것이다. 값싼 표피적 기독교 영성이 판을 치고 있는 오늘날 다석의 영성은 마치 진흙탕 속에 숨겨져 있는 금광석과 같이 그 중요한 가치의 빛을 발하고 있다.
이러한 다석의 영성은 비단 한국 기독교를 위해서만 아니고, 서양의 문턱을 벗어나 드디어 고향으로 돌아온 세계 기독교에 큰 영성적 희망을 보여주고 있다. 다석 영성신학의 중요성은 종교다원주의와 같은 배타적 인식론적 관념론을 넘어서서 다원종교가 실재하는 동양적 상황에서 기독교 영성의 통전적 정체성(또는 보편적 구체성)을 구현했다는 점에 있다. 다석의 기독교적 사유 속에는 글로벌 시대의 현대신학이 갈망하는 패러다임(다원종교, 다원문화, 학제간)을 위한 거의 모든 단초들이 내포되어 있다.(필자는 이러한 새로운 패러다임의 신학을 “도의 신학”이라고 부른다.)5) 또한 다석은 첨단과학과 디지털 문명에 의해 인간이 사이보그로 기계화되어가는 트랜스휴먼(trans-human), 포스트휴먼(post-human) 시대에 대처하기 위해 시급히 필요한 ‘몸과 숨의 영성’의 한 지평을 선보이고 있다.(매트릭스 속의 분신과 기계 인간에게는 몸과 숨이 없다.)6) 그러므로 다석이 기독교인인가에 하는 등의 원초적인 의문을 제기하며 폄훼하는 것은 더 이상 바람직하지 않다. 그것은 우리의 한 소중한 영성적 유산을 무시하고 파괴하는 일이다. 다석 사상의 기조는 성경에 있으며, 성경말씀을 중심으로 한 영성 수련에 따른 통찰에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 다석의 새벽 기도는 성경구절을 암송하며 나를 반성하고 알아가는 ‘나알’의 과정에서 시작하고, 성경말씀을 품고 알을 낳는 ‘알나’의 과정에서 종료된다.(이 ‘알나’의 과정을 통해 그의 주옥같은 한시들이 탄생했다)
더욱이 언어와 문화적 주체성보다는 경제적 실용성이 우선하는 오늘의 상황에서, 다석의 눈물겨울 정도로 끈질겼던 한글사랑이 주는 의미를 지금까지 서구화 과정에서 오는 반사이익을 독점하다시피 해왔던 한국교회와 기독교인들은 다시 한 번 깊이 음미해야 하다. 또한 여러 가지 어려운 미래에 대한 징조가 지금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때 ‘여러 밤 그이의 하늘놀이’, 곧 다석 선생의 기도는 우리에게 호방한 호연지기를 숨 쉬게 한다. ‘한나신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은 ‘참몸’, ‘참맘’, ‘참바탈’을 체득하고 구현하기 위한 ‘몸성히, 맘놓이, 바탈퇴히, 빈탕한데 맞혀 하늘몸놀이’의 다석 수련법은 지금은 비록 밤하늘 저쪽에서 빛나고 있는 듯하지만, 앞으로 한국 기독교의 밝은 미래와 삼 천 년대에 높이 떠오를 세계 기독교 영성의 새 하늘을 준비하고 있다.

몸성히, 맘놓이, 바탈퇴히,
빈탕한데 맞혀 하늘몸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