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석 류영모의 생존 직제자 임락경 "그는 3%의 성자"다석이 1981년 91세로 숨을 거둔 지 어언 40년이 넘게 흘러갔다. 다석을 스승으로 모시고 직접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은 거의 모두 세상을 떠났다. 다석의 문하에서 배운 제자는 박영호 임락경(1945~ ) 두 사람뿐이다. 임 목사는 열일곱 살에 광주 동광원에 들어가 1년에 두 차례씩 동광원에 와서 강연을 하던 다석을 만났다. 서울 구기동에 살던 다석은 계명산 자락에 있는 벽제 동광원에도 자주 와서 말씀을 전했다. 임 목사는 양주 장흥의 동광원 남자 수도원에 있을 때 계명산을 넘어가 다석의 동광원 강의를 들었다. 임 목사는 다석의…2021-06-16 17:24:04
- 다석이 66년 간직했던 1909년판 신약성경 주셨죠다석의 문하에서 직접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과 다석을 연구하는 학자, 다석의 뜻을 알리고 실천하는 수행자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는 이번 릴레이 인터뷰의 대상자는 모두 12명이다. 하다 보니 예수의 12 제자와 숫자가 같지만 전적으로 우연일 뿐이다. 코로나19 때문에 비(非)대면 인터뷰 방식을 활용했다. 캐나다 밴쿠버에 있는 오강남 교수와는 줌(Zoom)으로 인터뷰를 했다. 바깥 출입이 어렵고 청력이 약해진 박영호 회장과는 서면 인터뷰를 활용했다. 내가 질문지를 보내자 박 회장이 A4 용지 18장짜리 답변서를 등기우편으로 부쳤다.…2021-06-09 16:49:29
- "반(半)무당이 된 외래 종교들"-후학들이 다석을 연구하고 펼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어떤 생각이 듭니까? “다석은 ‘톨스토이와 나의 신앙은 비정통으로 이단’이라고 말하기를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여러 신학자들과 학생들이 다석 사상으로 학위 논문을 쓰거나 저서를 냈습니다. 참으로 고맙고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최근에 아주경제 곽영길 회장의 유튜브의 금요명상과 이상국 논설실장이 다석의 생애와 사상을 100회나 연재한 것은 한얼님의 깊은 뜻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믿습니다. 새벽 3시에 자리에서 일어나 덩실덩실 춤을 추며 감사하였습니다. 다석 사상…2021-06-02 16:32:55
- 다석 "공산유토피아 때문에 사람 죽여도 되는가"-다석이 종교는 ‘상놈의 종교’가 돼야 한다고 말했는데, 당시 조선에서 시대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지요? “다석은 스스로 19세기 사람이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1890년에 태어났는데 1910년에 조선조가 멸망했습니다. 중병에 걸려 하루하루 쇠약해지듯 나라가 멸망해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자라다가 20살이 되었을 때 기어이 조선조가 사라졌습니다. 15살 때 기독신자(크리스천)가 되어 연동교회에 나가기 시작한 것도 의지할 나라가 없어지자 교회라도 의지해보려고 나가게 된 것입니다. 나라가 멸망하자 나라를 찾으려는 우국지사들이 …2021-05-26 17:11:01
- 함석헌을 존경해 뵈었더니 '진짜 하늘같은 다석' 말해줬다-박영호 선생이 다석을 처음 만나 배움을 시작했을 때가 대략 중학교 시절이라고 들었는데요. 어린 나이에 어떻게 그분과 인연을 맺었는지요? “어릴 때의 일이라면 눈물부터 글썽거리게 됩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일제의 교육을 받았습니다. 공부는 안 가르치고 군사 훈련을 실시하고 근로봉사라 하여 일을 시켰습니다. 강변을 개간하고 솔가지를 따오게 하고 농사일을 강요했지요. 젊은이들이 군인으로 징집되고 보국대에 끌려가고 농사 지을 인력이 모자라니까 초등학생들이나 중학생을 끌어다 농사일을 시켰습니다. 일본인 선생들에게…2021-05-19 14:09:16
- 어미소 젖을 빨듯이 다석의 가르침을 받았다다석을 직접 만나 그의 말씀을 듣던 제자와 지인들은 거의 세상을 떠나고 박영호 다석사상연구회장과 임락경 목사가 생존해 있다. 소중한 증인들이다. 박 회장은 다석한테서 유일하게 마침보람(졸업장)을 받은 제자다. 다석전기를 집필하고, 문화일보에 325회에 걸쳐 ‘다석의 생각과 믿음’을 연재해 다석을 세상에 알리는 데 큰 공헌을 했다. 박 회장을 댁으로 찾아가 인터뷰하려고 했으나 고령(87세)에 코로나 때문에 바깥출입을 삼가고 있었다. 인터뷰 확답을 얻지 못한 상태에서 질문을 만들어 등기우편으로 부쳤더니 “열심히 답변을 …2021-05-12 15:03:35
- 다석같은 큰 스승 다시보기 어렵습니다정 신부는 책 머리에 고은 시인의 중 를 옮겨 놓았다. 고은의 시는 다석의 삶을 시적으로 잘 표현했는데 마지막 연이 걸린다. 여기저기 도토리 나무 솎아 베는 나무꾼만 못함이여 무슨 큰 뜻이 있는 듯하나 그저 부질없음이여 -고은의 시가 다석이라는 큰 인물에 대해 불경스러운 표현을 쓴 것 아닌가요? “세계 위인들을 칭송하는 찬탄사도 많고 헐뜯는 말도 많아요. 서울대 법대생 제자가 하루는 다석 선생을 찾아가 물었어요. ‘부처님과 예수님을 비교하면 누가 더 훌륭합니까?’ 다석이 간단하게 대답했습니다. ‘비교 연구해야 하는…2021-05-05 16:29:26
- "제사 문제로 수많은 순교…가톨릭 주교단이 사과해야"정양모 신부의 집안은 증조부부터 6대가 가톨릭을 믿는다. 고종 때인 1887년 증조부모가 가톨릭에 입교했다. 가톨릭이 조선에 들어온 후 100년 동안 박해를 받다가 신앙의 자유를 얻은 것은 1886년 5월 1일 한불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고 나서다. 이 조약에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다고 명기함으로써 수많은 가톨릭 신도들이 참수당한 박해의 시대가 끝났다. 정 신부의 집안은 다음 해에 가톨릭에 입교했다. 정 신부는 1960년부터 10년 동안 프랑스 독일 이스라엘에서 공부를 한 뒤 광주가톨릭대학과 서강대학에서 교수를 지내고 말년에는 성…2021-04-28 16:53:49
- 서구 중심적 하느님 신화를 거부한 다석의 '비빔밥 정신'인터뷰어는 시리즈 인터뷰의 대상자들에게 사전에 질문지를 보냈다. 종교와 사상에 관한 인터뷰라서 깊이 있는 이야기를 듣자는 뜻이었다. 이 교수에게도 질문지를 보냈더니 A4로 21페이지나 되는 답변서를 미리 보냈다. 이 교수는 저서가 20여 권에 이르고 네이버 블로그에도 왕성하게 글을 올린다. 서면 답변만 정리해도 인터뷰에 충분한 분량이었지만 아주경제 스튜디오에서 유튜브 동영상을 촬영해야 했다. 집안 사정 때문에 외출하기가 어려운 상황인데도 다석 사상을 알리는 인터뷰를 위해 이 교수는 어렵게 시간을 냈다. 서면 답…2021-04-21 13:51:44
- 서구가 만든 하느님을 거부한 '비빔밥 영성'인터뷰어는 시리즈 인터뷰의 대상자들에게 사전에 질문지를 보냈다. 종교와 사상에 관한 인터뷰라서 깊이 있는 이야기를 듣자는 뜻이었다. 이 교수에게도 질문지를 보냈더니 A4로 21페이지나 되는 답변서를 미리 보냈다. 이 교수는 저서가 20여 권에 이르고 네이버 블로그에도 왕성하게 글을 올린다. 서면 답변만 정리해도 인터뷰에 충분한 분량이었지만 아주경제 스튜디오에서 유튜브 동영상을 촬영해야 했다. 집안 사정 때문에 외출하기가 어려운 상황인데도 다석 사상을 알리는 인터뷰를 위해 이 교수는 어렵게 시간을 냈다. 서면 답…2021-04-21 13:42:17
- 이성과 존재의 태양을 꺼야 별이 보인다이기상은 가톨릭 모태 신자로 신부의 길을 가기 위해 서울 종로구 혜화동에 있는 성신고등학교에 다녔다. 신부 지망생들은 엄격한 규율 아래 전원 기숙사 생활을 했다. 그는 성신고등학교 기숙사 골방에서 ‘나는 누구인가’ ‘신은 존재하는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같은 물음이 시작됐다고 말한다. 가톨릭 대학 신학부를 졸업하고 1972년 벨기에 루뱅 대학에 신학을 공부하러 갔다. 그의 자전적(自傳的)인 글에 따르면 유학 가서 처음 일 년 동안 유럽의 그리스도교가 죽어가고 있는 현실에 충격을 받았다. 신앙의 정신이 사라진 유…2021-04-14 16:49:28
- 말기 암환자가 하루라도 더 살려는 건 다석 알리기 위해서죠독립운동가, 농민운동가이자 교육자였던 성천 유달영(1911~2004)은 함석헌과 함게 다석이 아끼던 제자다. 유달영은 농장이 경부고속도로에 편입되면서 받은 보상금으로 성천문화재단을 설립했다. 그의 좌우명이 호학위공(好學爲公)이다. 열심히 배워서 공익을 위해 봉사하자는 것이다. 다석사상연구회는 매주 화요일 서울 여의도 성천문화재단 사무실에서 공부 모임을 갖고 있다. “2015년 다석 공부를 하려고 한국에 왔거든요. 한국에 나온 동기가 다석 사상을 제대로 공부해 한국에 널리 보급해보겠다는 것이었어요. 20년 전에 처음 접했…2021-04-07 17:03:15
- 날 목사로 이끈 다석사상 책 백번 읽었죠최성무 목사는 호주에서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을 때 두 가지 서원(誓願)을 했다. 첫째 예수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지만 자신은 목회하다 굶어 죽겠다는 것이었다. 둘째 사례비를 받지 않고 목회를 하겠다는 결심이었다. 그는 호주에서 목사를 하면서 돈벌이 직업으로 청소를 택했다. 호주에서 클리너(cleaner)라고 부르는 직업을 혼자 할 때도 있었고, 많게는 수십 명 또는 일백여 명 종업원을 데리고 있었다. 종업원은 대부분 교회 식구들이었다. 호주에서는 목사나 승려가 교회, 사찰을 세워 신도 수가 70~80명에 이르면 …2021-03-31 16:57:47
- 다석은 새로운 영성의 종교혁명가1950, 60년대 시골 교회에서 부흥회가 열리면 유명한 부흥 목사들이 와서 현란한 쇼맨십을 보여주는 설교를 했다. 요즘 케이블 채널에서 인기를 끄는 장경동 목사를 연상하면 될 것이다. TV도 없었을 때의 이야기다. 교육 수준이 낮고 성경을 잘 모르는 사람들을 우선 교회로 끌어들이는 데 효과적인 선교 방식이었다. 머리말에 나온 것처럼 다석이 동광원에서 한 강의는 학력이 거의 없는 신도들을 상대로 비교적 쉽게 풀어서 한 말씀이다. 그래도 여전히 딱딱하고 어렵다. 엔터테이너 부흥사가 인기를 끌던 시대에 다석을 모셔와 강의…2021-03-24 16:43:38
- 다석은 통일 대신 귀일(歸一)하자고 했죠광주 동광원과 벽제 동광원은 육신의 즐거움을 끊고 고신극기(苦身克己)의 삶을 산 무명(無名)의 성자 이세종 이현필과 다석 류영모의 정신이 서려 있는 곳이다. 다석은 1948년 광주 동광원 수양회에서 첫 강의를 했고 1971년 여름 수양회까지 매년 연초와 광복절 전후에 광주에 찾아와 말씀을 전했다. 다석이 81세이던 1971년 동광원 여름 수양회에서 한 마지막 강의는 학력이 낮은 동광원 사람들이 알아듣기 쉽게 다석의 신앙과 생각을 풀어내 소중한 자료로 남았다. 심중식 귀일연구소장이 오래 돼서 녹음 상태가 좋지 않은 테이프를 …2021-03-17 17:09:10
- 한국의 골짜기 정신에서 세계 사상 나온다조선 사회는 유교 중에서도 가장 근본주의적인 성리학의 지배를 받으면서 본산인 중국보다 더 유교적인 사회가 됐다. 유학의 지나친 보수성과 배타성으로 결국 조선 유교사회를 멸망시켰다고 김흡영 교수는 에서 지적한다. 삼국시대에 전래된 불교는 통일신라와 고려를 거쳐 1,000년 동안 꽃을 피웠다. 조선에서 억불숭유(抑佛崇儒)를 했다고 하지만 민간에서는 물론이고 왕실의 여인들까지도 불교 신앙에 의지했다. 조선은 국방의 중요 부문을 사찰과 승려에 의존할 정도였다. 개신교는 유교 불교에 비해 역사가 짧지만 세계 최대의 교회…2021-03-10 16:28:42
- 다석 사상은 한국 신학의 광맥경북 영주는 중국에서 들여온 한국 유학의 본향이다.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성리학을 도입한 안향(安享)을 배향하는 소수서원이 자리잡고 있다. 소수서원에서 차로 30분 정도 거리에 있는 무섬마을은 낙동강의 지류인 내성천이 감싸고 흘러가는 전형적인 물도리 마을이다. 다양한 형태의 구조를 지닌 40여 채 고택이 옛 그대로 남아 있다. 반남 박씨와 선성 김씨의 집성촌이다. 이 마을에서 가장 큰 집이 해우당(海愚堂) 고택이다. 이 건물은 선성 김씨 입향조인 김대(金臺)의 손자가 1830년에 건립했고 고종 때 의금부 도사를 지낸 해우당…2021-03-03 15:38:11
- 21세기 생태문명의 맹아를 담은 다석 사상이정배 교수의 스승인 변선환 전 감신대 학장은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는 폭탄 선언과 함께 기독교의 절대성을 부정하고, 종교다원주의를 제창했다. 그는 기독교와 불교 간 대화를 중심으로 종교간 대화를 활성화하는 운동도 벌였다. 그러다 결국 보수적인 기독교계 목사들의 표적이 되다시피 해 소속된 감리교단으로부터 출교(黜敎)당했다. 변선환 신학을 계승한 대표적인 제자가 이정배 교수다. -변선환 학장이 1992년 금란교회 김홍도 목사가 주도하는 교리수호대책위원회로부터 출교 조처를 당했더군요. 김홍도 목사는 지난해 광…2021-02-24 16:06:56
- 코로나 이후 교회, 기복 신앙 힘 잃을 것내가 오 교수와 처음 만난 것은 동아일보 논설위원을 하던 2001년경이다. 오 교수는 그때 현암사에서 라는 책을 펴냈다. 나는 이 책을 읽고 기독교에 대해 새로운 개안(開眼)을 하는 느낌을 받고 동아닷컴에 칼럼을 썼다. 이 칼럼을 읽은 오 교수가 서울에 왔을 때 신문사로 찾아와 처음 만나게 됐다. 그 뒤로 나는 종교에 관한 글을 쓸 때마다 그에게 전화나 메일로 자문(諮問)을 했다. 는 2001년 5월 초판이 나온 이래 개정판까지 42쇄를 찍은 장기 베스트셀러다. 그런데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글들을 보면 정통 기독교인 중에는 오 교…2021-02-04 16:26:45
- 文字를 넘어 신의 속나를 보라아주경제와 유튜브 채널 '다석의 생각교실'이 공동 기획한 '내가 본 다석, 내가 들은 류영모'의 두 번째 인터뷰이는 비교종교학으로 명망이 높은 캐나다 리자이나 대학교 오강남 명예교수다. 코로나 19로 오 교수가 한국에 오지 못하고, 나를 비롯한 취재진이 캐나다로 갈 수도 없는 상황에서 줌(Zoom)을 이용해 인터뷰가 이뤄졌다. 대학을 갓 졸업한 유수민 인턴기자가 카카오톡 통화로 오 교수에게 줌 작동법을 코치하기 시작한 지 몇 분 만에 오 교수의 얼굴이 화면에 나타나고 목소리가 들렸다. 음성 전달에서 캐나다…2021-01-27 16:49:12
- "나를 섬기면 종교된다" 다석이 경계윤 신부와 나는 1955년생 양띠 갑장이다. 같은 해에 태어나 같은 교과서(국정)를 읽고 박종철 사건을 비롯해 동세대의 경험을 공유했다는 이야기다. 나이를 알고 나니 또래집단(cohort) 의식이 생겼다. 윤 신부가 차를 따를 동안에 서울서 갖고 간 내 저서 ‘박종철 탐사보도와 6월항쟁’을 내놓았다. 내가 “제가 3년 전에 쓴 책인데요. 박종철 탐사보도가 6월 항쟁의 불꽃에 기름을 부었다는 관점에서 썼습니다”라고 하자 그는 “6월항쟁이면 제가 사제 서품받았을 때인데…”라며 책을 들춰봤다. 나중에 보니 “없이 계시는 하나님” 박사학위…2021-01-20 16:16:48
- "그분은 제 소리를 냈던 사람입니다"윤정현 신부는 인터뷰에서 "다석은 동양철학과 기독교 사상을 회통했던 큰 스승"이라고 말했다. [사진=유수민 인턴기자] 한국이 낳은 위대한 종교 철학자 다석(多夕) 류영모(1890~1981)는 19세기 말에 태어나 20세기 후반에 세상을 떠났다. 지금 지구는 다른 종교를 배척하는 근본주의 신앙으로 인한 전쟁과 살육이 그치지 않는다. 한국같은 다원주의 종교국가에서도 종교간 갈등이 심한 편이다. 세계의 한쪽에서는 탈(脫)종교 현상이 번지고, 다른 쪽에서는 근본주의 종교가 세계 평화를 깨트린다. 다석이 서구의 기독교 정신과 동양…2021-01-13 19:14: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