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6/27

始源 한국 성서신학의 현주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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始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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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성서신학의 현주소

나는 최근에 들어 세계굴지의 출판사들로부터 한국 성서해석학에 대한 글을 요청받고 있다. 최근 마감된 『옥스퍼드한국성서학핸드북』에는 성서신학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여러 번 거절했지만, 그 저서의 역사적 중요성과 편집자의 끊임없는 요청에 못 이겨, “도의 신학 입장에서 성경읽기”라는 제목으로 참여하였다.<1> 

얼마 전에는 세계 성서학계에서 가장 크고 권위 있는 학회인 성서학회(Society of Biblical Literature)의 한 저술 프로젝트에 서구적이 아닌 한국인의 독특한 성서해석학을 써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담당 편집자는 글을 요청하며 안병무의 민중 성서해석학조차도 불트만의 성서신학에 많이 의존했기에 한국적이라 보기에는 부적절하다고 했다.

​그래서 몇몇 원로 성서학자들에게 연락해보았으나 별 소득이 없었다. 심지어 한 중견 성서학자는 단적으로 이렇게 말했다: “한국 성서학자는 그런 것을 할 수 없는 실정입니다.” 그러다 편집자인 미국 한인2세 성서신학자로부터 다시 연락이 왔다. 듣기 민망한 내용이었다.

"그러나 [한국 성서신학자들의] 실제 글들을 읽어보면 대부분의 각주와 출처는 전통적인 백인, 서양, 유럽 중심의 성경 연구에서 나온 것들입니다. [심지어] 일부 글에는 한국인이나 한국인 디아스포라의 정체성, 역사, 맥락, 문화, 공동체 및 전통 등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한국성서연구와 한국성서해석이 어떻게 발전 할 수 있을까요? [지금처럼] 유럽 중심적 기반, 그러니까 서구의 자본주의와 식민지 프로젝트의 영속화를 돕는 것이 아닌, 한국의 역사, 개념, 체계, 전통들을 중시하고, 발전시키고, 즐기는 것으로서 말입니다. 그 질문이 프로젝트의 핵심입니다."

한국 성서신학이 현재까지도 세계에서 이 정도 수준으로 인정받고 있는지를 몰랐다. 오죽했으면, 조직신학자인 내게 성서해석에 관한 글을 써달라고 요청을 하고 있을까? 현재 한국의 성서학과 신학의 민낯이 우리의 2세 신학자에 의해 들춰진 것 같아 창피했고, 또 서글펐다. 그나마 이러한 비판적 견해는 그가 1세가 아니고 2세이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나도 미국에서 신학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이런 점을 이해할 수 있다. 미국과 같은 나라에서 신학을 공부하게 되면 시작부터 신학교육의 지배담론인 백인 중심적 서구신학으로부터 백인이 아닌 동양인 신학도로서 자기 신학의 정체성에 대한 확실한 규명이 요구된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종교문화를 포함한 사회적 위치(social location)에 대한 분명한 의식과 자리매김 없이 세계 신학계에서 자기의 신학 담론을 설득력 있게 전개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신학은 자기의 사회적 위치에 대해 분명한 인식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 20세기 기독교 신학의 가장 큰 깨달음이다. 자기 상황과 맥락에 대한 확실한 인식과 지식이 전제되지 않으면 글로벌 신학의 정글에서 하나의 주체적 신학으로 살아남기 어렵다. 도의 신학은 그러한 상황 속에서 잉태된 한국 및 동아시아 신학이다. 지금까지 생존했을 뿐 아니라, 이젠 어느 정도 자리매김도 한 것 같다. 이론신학 분야들에서 뿐만 아니라, 옥스퍼드핸드북과 세계 성서학회(SBL)에서 한국 성서신학에 관한 글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 방증이 아닌가 한다. 

(계속)
​주 1: Heup Young Kim, “Biblical Readings on a Theology of Dao”, The Oxford Handbook of the Bible in Korea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forthcoming). 이 글은 이 논문을 기반으로 작성되었음을 알려둔다.
​(출처: 김흡영, '성서와 도의 신학'(도의 신학이란 03), 기독교사상 751(2021.07), 168-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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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와 도("도의 신학이란 03: 성서와 도의 신학" 기독교사상 7월호)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14:6)


신약성서에서 예수께서는 자신을 가르쳐 ‘로고스logos’라고 한 적이 없다. 대신 위에 인용한 요한복음 14장6절에서 유일하게 진리와 생명의 ‘길’, 곧 ‘호도스’(οδός)라고 했다. 코이네 희랍어 ‘호도스’는 길(도로), 삶의 지혜, 행동 방법, 생명의 총체적 방향성 등 여러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것은 유사한 여러 뜻을 동시에 품고 있는 도(道)와 잘 맞아떨어진다. 비록 요한복음 1장1절(“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에서 요한은 ‘로고스’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으나, 예수께서 자신을 호도스라고 밝힌 이 구절을 결코 생략하지 않았다. 더욱이 그 ‘로고스’는 구약에 나오는 히브리어 ‘다바르’(דָּבָר)를 희랍어로 번역한 것으로 이해된다. 로고스와 다바르는 같이 ‘말하다’를 표현하지만 서로 강조하는 측면에 차이가 있다. 다바르는 행위의 실천에 방점을 두는데 반해, 로고스는 앎(지식, 생각, 이성)을 강조한다.<2>

여기서 이미 앎과 행위를 분리하는 로고스의 이원론적 문제점과 한계가 노출된다. 서구의 신학은 이러한 문제점을 안고 있는 로고스를 신학의 근본 은유로 사용함으로써 교리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담론으로 흐르게 되었다. 이러한 로고스 신학의 결함과 구약의 다바르적 특성은 20세기에 결국 프랙시스 신학으로 표출되었다고 하겠다. 그 이전에도 이러한 이원론은 ‘믿음이냐 행위냐’ 하는 이원적 구원론으로 전개되고, 서구교회가 가톨릭과 개신교로 분리되는 역사를 초래했다. 그래서 스리랑카의 신학자 피에리스(Aloysius Pieris)는 신학을 로고스 모형, 다바르 모형, 그리고 호도스 모형으로 구분했다. 그에 따라 그리스도를 “현실을 해석하는 말씀, 역사를 변혁시키는 매개체, 그리고 모든 담론을 종결시키는 ‘길’”이라는 세 가지 측면으로 나누고, 그들을 한데 엮을 수 있는 통전적 모형을 찾고자 했다.<3>

​그러나 우리는 전호의 글에서 살펴본 봐와 같이 이들을 통전할 수 있는 ‘도’라는 탁월한 근본 은유를 이미 보유하고 있었다. ‘도’(道)는 머리 ‘수’(首)자와 움직일 ‘탁’(辶)자로 구성되어 앎과 행위의 일치, 곧 지행합일(知行合一)의 뜻을 그 문자에 담지하고 있다. 곧 도는 로고스(앎)와 다바르(행위)의 뜻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도는 진리와 생명의 길(호도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는 그리스도론에서는 물론이고, 요한복음 서두에 나오는 ‘말씀’에 대해서도 희랍어 로고스나 히브리어 다바르보다도 성서적으로 더욱 적절한 용어라고 하겠다. 그러므로 최초의 한글 요한복음(1882)에서 존 로스(John Ross, 1842-1915)가 그 구절의 ‘로고스’를 ‘도’로 번역한 것은 당연하고 필연적인 것이었다.
 
​더욱이 성서는 전체적으로 ‘구원의 도’를 말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구원의 로고스’(지식) 또는 ‘구원의 역사’(구속사)라는 표현보다도 더 적절할 것이다. 구약의 잠언과 전도서와 같은 지혜문서들은 한마디로 ‘신앙적 삶의 도’(지혜)를 가르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예수는 명백하게 자신을 유일한 구원의 도(길, 호도스)라고 선포했다.(요14:6) 공관복음에서 예수의 설교는 분명히 ‘하늘나라(천국)의 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사도행전은 ‘크리스천Christian’이라는 단어가 나오기 전에 이미 그리스도인들을 예수의 ‘도’를 따르는 자로 표현하고 있다(행24:14). 그 외에도 우리말 성서에는 도를 사용하는 구절이 즐비하다: ‘주의 도’(행18:25, 19:9, 22:4; 시25:4, 51:13, 67:2, 77:13, 86:11, 119:3, 119:15, 119:37; 렘 32:23), ‘십자가의 도’(고전1:18), ‘하나님의 도’(마22:16, 막12:14, 눅20:21, 행18:26, 삼하22:31, 시18:30), ‘여호와의 도’(창18:19, 삿2:22, 삼하22:22, 대하17:6, 시18:21, 138:5; 잠10:29, 호14:9) 등이 그 예이다. 그러므로 성서를 ‘도’의 시각에서 보는 입장은 성서를 한글로 번역한 초기부터 시작되었고, 도의 신학적 사유는 이미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발생할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예컨대, 한국 가톨릭의 성조라는 광암 이벽(1754-85)은 예수 그리스도를 ‘천도(天道)와 인도(人道)의 교착점’이라고 보았다. 

-계속-
주:
2. David Allan Hubbard and Glenn W. Barker, eds., Word Biblical Commentary (Waco, TX: Word Books, 1982), 9.
3. A. Pieris, Fire and Water: Basic Issues in Asian Buddhism and Christianity (Maryknoll, NY: Orbis, 1996), 138-146을 보라.
(출처: 김흡영, '성서와 도의 신학'(도의 신학이란 03), 기독교사상 751(2021.07), 170-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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