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서 - 고전으로 읽는 성서 | EBS CLASS ⓔ
김학철 (지은이)EBS BOOKS2020-12-16
책소개
EBS CLASSⓔ 시리즈.
『신약성서』의 첫 번째 책으로, 인류의 고전이 된 「마태복음서」에 대한 역사비평적 읽기를 시도한 책이다. 예수의 탄생부터 죽음, 부활까지를 다루고 있는 오래된 인류의 고전 「마태복음서」는 인간은 무엇인가,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인가, 용기란 무엇인가, 기적은 무엇인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결국 우리는 어떤 가치를 추구하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성찰한다.
목차
책을 펴내며
제1강. [비블리오 게네세우스] 이 오래된 책에 묻다
그리스도교보다 먼저 탄생한 「마태복음서」 / 이 오래된 책이 아직도 유효할까? / 고전의 자격 / 뒷모습을 비추는 거울 / 렘브란트의 그림에서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기둥까지 / 천지창조 이전의 독백 / 윤동주의 시 「팔복」 / 문(文)의 세계
제2강. [역설과 해체의 통치자]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인생은 결국 한 줄로 요약된다 / 족보의 반전 / 혈통을 거부하다 / 역설과 해체 / 구원에 담긴 정치적 의미 / 새로운 통치자를 맞이하는 법 / 대학살을 부른 크리스마스 / 희생에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
제3강. [격돌하는 두 질서] ‘회개한다’는 것에 대하여
난세를 살아가는 네 가지 방법 / 오독과 참뜻 / 기존 체제를 향한 정면 도전 / 진실 앞에 선 우리 /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니 / 낙관과 용기 / 권력보다 중요한 것
제4강. [새 나라의 윤리와 지혜] 철학자처럼, 통치자처럼
악인에게도 해는 떠오른다 / 계급 사회의 윤리 / 철학자처럼 행동하라 / 통치자처럼 행동하라 / 전통적 지혜 / 전복적 지혜 / 실천적 지혜 / 악의 순환을 끊는 법
제5강. [기적이 바꾸는 것] 빛이 있는 곳으로 담대하게 걸어가라
과학적 방법론과 기적 / 세리와 함께 한 식사 / 마태의 소명에서 순교까지 / 침묵 듣기 / 자신을 낮추는 이들에게 / 무엇이든 할 수 있고 아무것도 못하는
제6강. [변혁의 시어] ‘합당한 것’과 ‘정의로운 것’
산문적 인생의 복판을 가로지른 시 / 보물을 맞딱드린다면 / 낙관과 확신의 비유 1 : 하늘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 낙관과 확신의 비유 2 : 하늘나라는 누룩과 같다 / 포도원 주인의 비유 : 합당한 품삯은 얼마인가? / 정의로운 분배 / 능력주의와 공정함
제7강. [공존의 윤리] 나의 눈 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는가
비판과 심판 / 내 눈 속에 들보 / 공동체의 윤리 / 돌이킬 공간을 줄 것 / 인과응보의 사슬 / 어떤 세상에 살고 싶은가
제8강. [전복적 상상력] 새로운 세계를 향하여
성전을 뒤엎다 / 기복 아닌 혁명 / 납세 논쟁 / 부활 논쟁
제9강. [살해의 구조와 십자가형] 나도 예수를 죽인 자인가
십자가형 / 사건을 기억하는 법 / 제자들의 배신 / 책임 있는 자 / 십자가에서 내려다본 얼굴들 / 반복되는 희생의 구조
제10강. [부활이 연 상징 세계] 다시, 끝까지 살아내는 용기더보기
책속에서
첫문장
마태복음서는 그리스도교 경전인 성경에 있는 문서 중 하나입니다.
클래식이란 한 사람이, 한 사회가, 인류가 전쟁과 같은 위기 상황에 있을 때 그것을 이겨낼 수 있는 정신적 자원이 될 만한 사상, 지식, 책을 일컫는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고전’이라 부르는 것에는 생존과 그 이상의 인간다움을 구현하는 ‘강력한 힘’이 깃들어 있습니다. 한편 전쟁이 났는데 보낼 수 있는 자원이 자기 아들밖... 더보기
광야에서 은둔 생활을 벗어난 요한이 외쳤습니다. “회개하시오. 하늘나라가 이미 가까이 왔습니다.” 바로 이 외침, 일종의 슬로건을 예수가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비유하자면 이어달리기에서 뒤에 오는 주자에게 바통을 건네주듯이, 이 슬로건과 거기에 내포된 의미를 세례자 요한이 들고 뛰다가 예수에게 건네줍니다.
요한의 저 외침은 ... 더보기
인간의 존엄은 신분이 낮은 사람에게도 있습니다. 예수는 늘 오른뺨을 맞는 사람들에게 고개 숙이지 말라고 합니다. 당신도 존엄하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채무자로 평생을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돈이 없다고 자신의 삶을 함부로 유린하도록 놓아두면 안 된다고 가르칩니다. 가난한 삶도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법과 권력으로 다른 사... 더보기
오늘날 사회는 능력주의를 전제로 깔고 있습니다. 능력대로 일하고 일한 만큼 받는다, 그래서 능력이 모자란 사람과 뛰어난 사람을 구분해야 한다, 이런 것이지요. 열심히 일하고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더 많이 버는 것이 합당해 보입니다. 그래야 일할 맛도 나겠지요. 난 열심히 일하고 저 사람은 노는데 똑같이 보상을 받으면 정말 화가 날... 더보기
“심판자 노릇을 하지 마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은 심판을 받게 됩니다. 여러분이 심판하는 그대로 여러분은 심판을 받습니다. 여러분이 재단하는 그대로 여러분도 재단당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 흔히 알려진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비판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받을 것이요,...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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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김학철 (지은이)
저자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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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다. 「사도행전」의 바울을 지식사회학적 관점에서 분석하여 석사학위(Th. M.)를, 1세기 로마 제국의 통치 선전의 배경에서 「마태복음서」를 사회정치학적으로 해석하여 박사학위(Ph. D.)를 받았다. 저서로는 『아무것도 아닌 것들의 기쁨─사도 바울과 새 시대의 윤리』, 『마태복음 해석─마태공동체의 사회정치적 현실과 신학적 상징 세계』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신약─문학으로 읽는 신약성서』(공역) 등이 있다. 신약학 및 기독교교양학을 주제로 여러 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현재 연세대학교 학부대학 교수로 기독교... 더보기
최근작 : <마태복음서>,<아무것도 아닌 것들의 기쁨>,<마태복음 해석> … 총 8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새로운 삶을 상상하고 그것을 실현할 용기와 패기를 불어넣는 책
「마태복음서」는 무엇이 옳고 그르며, 무엇이 가치 있고 그렇지 않은지를 분별하는 지혜를 담은 책이다. 부당한 요구에 단호히 거절하며 폭력에 맞서는 용기와 소박하고 검소한 삶을 사랑하는 지혜를 이야기한다. 그리하여 기존의 질서에 따라 걷지 않고, 새로운 세계를 상상하며, 내가 가야 할 길을 지치지 않고 가도록 하는 응원을 담고 있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오래된 질문에 답하다
사람은 무엇이고 죽음은 무엇이며,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은 너무 낡고 오래되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이 질문을 내려놓을 수 없고 끊임없이 해답을 구한다. 이 질문에 어떤 해답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내 삶의 모습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 책은 예수의 탄생부터 죽음, 부활에 이르는 과정을 살펴보며, 수많은 시험과 난관 앞에서 선 예수의 선택과 행동을 통해 우리의 오래된 질문... 더보기
고전으로 읽는 성서 <마태복음서> 새창으로 보기
서양고전을 서양역사를 읽다보면 기독교 라는 벽에 부딪힐 때가 많았다. 나는 종교가 없으므로 종교에 대한 이해기반이 부족했다. 성서를 역사서로서 한번 읽어볼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그 두께와 그 어색한 문체가 늘 선택장애를 가져오곤 했다. 신학자들이 쓴 책을 읽어볼까 싶기도 했다. 하지만 전도를 위해 믿음을 종용하는 분위기를 참을 수 없었다. 그렇게 계속 미루고만 있던, 비록 개인적이긴 하지만 숙제같았던 부분에 대해 조금은 할 수 있게 한 이 책을 만났다.
기독교 성서를 전공하고 이에 관해 여러 편의 책과 논문을 냈지만 이후 저는 기독교를 교양교육으로 가르치는 일을 주로 했습니다. (중략) 이 책은 [마태복음서]라는 기독교 성서 중 한 권의 책을 교양인에게 해설하려는 목적으로 진행한 총 열 번의 강의를 풀어놓은 것입니다. 강의 현장감을 살리려 책에 구어체를 유지했습니다. 저는 [마태복음서]를 기독교인만이 읽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인류의 고전이라고 생각합니다. (p. 4) 여러 훌륭한 성서 번역본이 있지만 이 책의 [마태복음서] 본문은 제가 그리스어 성서를 번역한 것입니다. (p. 5)
저자는 신학을 전공했고 기독교교양학을 연구하며 가르치고 있는 학자다. 신학을 공부했으나 목회자는 아니고 기독교를 가르치고 있으나 종교가 아닌 교양으로 가르치고 있는 학자다. 그리고 EBS에서 강의됐던 프로그램이 바탕이 된 책이다. 여러모로 신뢰가 가는 책이었고 무엇보다 얇아서 부담이 없었다. 무엇보다 비록 부분적이긴 하나 원전번역 이라는 점에서 더 매력적이었다. 기존의 한글성서를 바탕으로 한 책은 결국 중역본일 수 밖에 없고 결국 어쩔 수 없이 원전에선 조금 멀어지게 될 수밖에 없다. 종교인이 아니라 '고전으로서' 읽는 첫 성서로 이만한 조건을 갖춘 책은 드물지 않나 싶어 반가웠다.
[마태복음서]는 그리스도교 경전인 성경에 있는 문서 중 하나입니다. 제가 여기서 말씀드리는 '그리스도교'는 로마카톨릭, 프로테스탄트 곧 우리가 흔히 말하는 개신교, 그리고 동방정교회를 모두 포함합니다. 앞으로 그리스도교 혹은 기독교라 부르겠습니다. 로마가톨릭과 개신교와 동방정교회는 서로 조금씩 다른 경전 문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서]는 교파를 불문하고 경전에 속합니다. 기독교 경전을 흔히 '성경' 혹은 '성서'라고 합니다. 성경은 전서 입니다. 전서란 어떤 분야에 관련한 사실이나 지식을 망라하여 체계적으로 엮은 책이지요. (p. 13) 그리스도교 문명권에서 [마태복음서]는 고전입니다. (중략) 제가 직접 번역을 해봤는데요, 200자 원고지로 약 400매 정도 밖에 되지 않는 분량입니다. A4용지로 하면 50쪽 정도에 불과합니다. 이 얇은 책이 서양 세계에서 오랜 시간 동안 고전의 지위를 확고히 유지하고 있습니다. (p. 14) [마태복음서]는 이스라엘 바로 위 시리아의 안디옥이라는 곳에서 기원후 80~90년대에 기록되었습니다. (p. 15) [마태복음서]는 그리스도교라는 종교가 탄생하기 전에 기록되었습니다. 그리스도교라는 종교를 옹호하거나 강화하는 목적으로 기록된 것이 아니지요. (p. 16) [신약성서] 중 제일 앞에 나오고 중요한 것이 바로 [마태복음서]입니다. 세계 인구 중 3분의 1에 달하는 사람들의 세계관을 안다는 것, 그들의 삶과 생각을 형성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이해한다는 것, 그것이 [마태복음서]를 읽어야 하는 이유가 될 것입니다. (p. 17)
나는 성서에 대해 기독교에 대해 1도 모르는 사람인데 이렇게 차근차근 하나하나 친절하게 설명해주니 첫장부터 바로 쉽게 다가갈 수 있었다. 종교서를 읽고 있지만 고전으로서 느끼게 해주는 적당한 거리감과 적절한 요약이 편하고 좋았다. 동시에 적당한 설득력도 갖추고 있어서 읽을수록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저는 여러분과 같이 [마태복음서]를 역사비평적으로 읽으려고 합니다. 역사비평은 문헌이 기록될 당시 저자와 청중을 고려해서 텍스트를 읽는 것입니다. 2천년 전 지중해에서 기록된 문헌을 21세기 한국 사람이 쓴 것인양 읽으면 필연적으로 오독할 수밖에 없습니다. 동시대에 살더라도 다른 지역에 있으면 문화가 다릅니다. 같은 지역이라도 시대가 다르면 이해가 다릅니다. 역사비평은 그때 그곳의 사람들에게 [마태복음서]는 어떻게 들렸을까, 저자는 당시 그곳에서 어떤 의도로 글을 썼을까를 물으면서 문헌에 접근하는 방법입니다. (p. 29)
딱 좋았다. 내가 찾던 방향의 책이었다. 저자가 성서를 통째로 역사비평적으로 번역해주면 당장 사서보고 싶은 마음이다. 고전이라 불리는 책들은 당대의 문화에 맞춰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몇줄의 명문장으로 의미를 부여하고 표현된 문장을 직접적으로만 해석하여 지금의 현실에 끼워맞히는 것은 굉장히 위험하다. 종교서는 더더욱 위험하다. 그렇기에 종교관련 책들 중 읽을만한 책을 찾기가 어려웠었는데 이렇게 반가울수가.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이 두 문헌은 무의 세계, 무력의 세계입니다. 이른바 사내들의 세계고, 전쟁의 세계고, 명분의 세계입니다. 다른 한편, [마태복음서]의 두번째 단어 '게네세우스'를 당시 유대인들은 어떻게 들었을까요? 아마도 유대인 경전의 제일 처음에 있는 [창세기]를 떠올리게 했을 겁니다. 유대인에게 [마태복음서]는 새로운 창조의 이야기를 함으로써 자기주장을 하는 책으로 이해되었을 것입니다. (p. 30)
요약하면, [마태복음서]는 누가 이상적인 통치자인가, 누가 이 세상을 통치해야 하는 사람들인가, 라는 오래된 그리스 철학의 질문에 답을 줍니다. 예수와 그 추종자들이 오랫동안 찾고 있었던 철학자이자 통치자라는 것이지요. 예수와 제자들은 지혜로 이 세상을 건설해나가려고 하는 사람들이라는 선언이 [마태복음서]의 주요 내용입니다. (p. 31)
열번의 강의로 서술되는 이 책은 첫번째 강의부터 흥미진진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와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 그리고 [마태복음서]의 첫 단어를 비교함으로써 당대의 문화를 바탕으로 한 이해를 도우면서, [마태복음서] 가 단순히 종교서를 넘어 왜 고전이 되고 철학이 되고 나아가 혁명서가 될 수 있었는지 호기심도 불러일으켰다.
[마태복음서]는 '읽는' 책이 아니라 '듣는' 책이었습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나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 역시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책이었습니다. 누가 들려줬을까요? (중략) [마태복음서]도 한 사람이 낭독하고 그것을 듣는 형식으로 '공연'되었습니다. (p. 35) 첫 장 첫 구절을 '족보' 로 시작합니다. (p. 36) 예수는 누구인가? 그것을 알려면 일단 족보부터 봐라, 이렇게 되는 겁니다. 제가 번여간 [마태복음서] 1장 1절과 달리 다른 번역본에서는 대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라고 나올 겁니다. 순서가 바뀌어 있을 거예요. 그러나 헬라어 원문의 순서는 '다윗과 아브라함'입니다. 다윗은 아브라함의 후손이지만 다윗이 더 중요한 사람이라는 뜻이지요. (p. 37) '다말', '라합', '롯', 이 셋은 여성 이름입니다. 나머지는 모두 남자 이름이고요, 이상하지 않습니까? 족보에는 혈통주의, 정통성, 남성우월주의를 보여주려는 의도가 있습니다. (중략) 혈통이 중요한 유대인의 족보에서 중요한 건 유대인과 남성인데, 예수가 유대인 왕가의 후손임을 자랑하려는 이 족보에 비유대인 여성이 등장하다니, 어떤 아이러니가 숨어 있을까요. (p. 39) 족보는 혈통주의, 정통주의, 남성우월주의, 도덕주의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자 마태는 족보의 한 측면에 그 이데올로기를 반영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을 해체해버리지요. 전통과 보존이 있고, 동시에 해체와 전복이 있습니다. (p. 41)
누가누구를낳고 또누가누구를낳고 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첫장부터 읽기힘들다 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책이 성서였다. 그런데 단순한 나열이 아니었음을 이제야 깨달았다. 어디에사는 누구의 아들이라는 것을 밝히는 습관은 호메로스의 작품에서도 로마제국 고전에서도 익숙한 표현 방식이었다. 단순히 같은 이름이 하도 많으니 그렇게 위로 거슬러올라가야 누구인지 밝힐 수 있는 것이겠거니 했었다. 그런데 예수의 족보는 길이도 길이지만 남다른 인물들이 섞여 있었던 것이다. 사연많은 여인 셋, 그리고 '다윗과 우리아의 아내가 솔로몬을 낳았다' 라는 문장에서 고발한 죄악, 무엇보다 기껏 누가누굴낳고를 주욱 나열했는데 마지막에 가서 정작 예수는 왕가 혈통인 요셉과 관계가 없어진 마무리. 이 기나긴 족보는 예수라는 인물의 정통성을 강조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해체하는 전복성을 드러내고 있었다. 놀라웠다.
태어난 '유대인의 왕'은 '난민'입니다. (p. 55) 아기들을 죽인 사람이 예수는 아니지만 예수 때문에 죽은 건 맞지 않나? 베들레헴의 수많은 어린아이가 죽었잖아. 이게 왕이고 구세주인가? 당시 사람들도, 죽은 아이들도 이와 같은 질문을 던졌을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 예수는 바로 이 물음에 답하는 것으로 자기 인생을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나 때문에, 내가 태어난 탓에 사람들이 죽었다면 나는 그 죽음에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 (중략) 난민이 되었지만 자신과 관련하여 목숨을 잃은 저 많은 베들레헴의 아이들, 그리고 그 부모의 절규에 예수는 삶으로 응답해야만 하지요. (p. 57)
예언된 아기, 헤롯왕의 아기 학살, 왕의 탄생.. 모르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러나 예수가 평생 짊어졌어야 할 질문에 대해 생각해보지 못했었다. 자신의 탄생이 수많은 죽음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면 어찌 고민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어찌 열심히 성찰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예수의 삶이 운명적으로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회개하라는 말부터가 그러합니다. 회개하라고 하면 뭔가 기분이 나쁘지요. 내가 뭘 잘못했나 싶고, 잘못한 것도 별로 없는데 회개하려니 언짢습니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이나 예수가 말한 '회개하라'는 것은 도덕적, 윤리적, 법적 죄를 돌이키라는 뜻 이상입니다. '삶의 방식 자체를 돌이키라'는 의미이지요. (p. 66) 3장2절은 간략히 이렇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삶의 방향을 전환합시다. 신의 질서가, 신의 통치가 바로 이곳으로 오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말은 "예수천당 불신지옥" 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하늘나라'는 죽어서 가는 천당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구약]에는 훨씬 더 그러하지만, [신약]에는 사후 세계에 관한 관심이 크지 않습니다. 기독교 문화권의 사후 세계에 관한 이미지는 단테의 [신곡]에서 형성된 것이라고 말하는 학자가 있습니다. (p. 67) 신의 통치가 이 땅에 '온다'는 것이지, 죽어서 '가는' 저곳을 바라보라는 것이 성서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신의 질서가 여기로 옵니다. 그러니 그 새롭고 정의로운 질서에 편입하자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구체제에 길들어 살던 우리 삶의 방향이 전환되어야 하겠지요. (p. 68)
왠지 시원해지는 기분이었다. 회개하라가 모두가 죄인이라는 의미가 아니었다니, 기독교라는 종교가 천당에 가기위한 기도를 드리는 종교가 아니었다니. '예수천당 불신지옥' 은 성서와 아무 상관이 없었다니.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대체 성서를 읽기는 한 것인지 모르겠다. 아니 읽었더라도 보고싶은데로 보고 이해하고 싶은데로만 이해한다면 그렇게 됐을 수도 있겠다. 그렇게 해석의 여지가 너무 많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다. 하지만 여하튼 나는 이제야 기독교에 호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동안 오해와 편견을 넘어 굉장히 좋은 논리였구나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예수는 현실적으로 옷도 제대로 못 입고 굶기를 밥 먹듯 하는 민중을 앞에 두고 말합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라고. 이러한 가르침은 민중을 향해 통치자와 철학자로 스스로 간주하고, 그 윤리를 실행하라는 촉구입니다. 그것이 신의 질서, 신의 나라에서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의 뜻을 풀 수가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모두 주체가 되어 신의 자녀임을 깨닫고 연대하며 서로를 불쌍히 여기십시오. 철학자와 통치자처럼 생각하고 행동하십시오. 신의 질서는 그렇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p. 93)
에픽테토스와 세네카의 가르침과 연결된다는 예수의 가르침들을 보면서 고대그리스로마의 철학자들의 가르침이 예수에게는 고전이었을테니까 그렇게 영향을 받는 것이 어쩌면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웠겠구나 싶다. 그리스철학이 중세기독교시대로 넘어가면서 끊기거나 사라졌다가 보다는 철학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삶에 대한 근본 질문을 던지는 철학은 한번도 끊어진 적이 없는 것 같기도 하다.
'누군가 그대의 오른쪽 뺨을 치거든 그에게 다른 쪽도 돌려 대라'
당시 사회는 오른손잡이 문화였습니다. 공공연하게 공중에서 왼손을 사용하면, 왼손을 사용한 사람에게 모욕적인 눈길을 보내는 사회였지요. 오른손잡이가 다수이기도 하니, 누군가 다른 이의 뺨을 친다면 오른손으로 칠 것이라고 생각하지요. 그런데 내가 오른손으로 앞에 있는 사람의 뺨을 치면 그 사람의 어느 쪽 뺨을 치게 됩니까? 왼쪽 뺨이지요. 그런데 왜 '오른쪽 뺨을 치거든' 이라고 했을까요. 오른손의 손등으로 때려서 그렇습니다. 고대 유대인의 한 문헌은 같은 신분의 사람끼리 손바닥으로 상대방을 때렸을 경우에는 벌금이 4전인 반면, 손등으로 때리면 벌금이 100배인 400전을 내야 한다고 기록합니다. 왜 그럴까요? 아무래도 손등보다는 손바닥으로 때리는 것이 더 고통을 줄 텐데요. 손등으로 때리는 것은 주인과 종, 장군과 부하, 왕과 신하 등 신분의 격차가 확연할 때 상대방을 제압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같은 신분인데도 손등으로 상대방을 때리면 그것은 폭력과 모독의 죄를 동시에 범한 것이기에 벌금의 차이가 크게 나는 것입니다. 윗사람에게 손등으로 뺨을 맞은 사람들이 전형적으로 취하는 태도가 있지요. 사죄하며 고개 숙이고 물러나는 겁니다. 당시 사회는 그렇세 신분이 주는 절망을 학습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는 오른뺨을 맞으면 왼뺨을 내밀라고 합니다. 일단 예수의 청중들은 모두 웃었을 겁니다. 이런 상황을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비일상적이었거든요. (중략) 이런 행동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p. 99~100) 왼뺨을 대며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도 사람이야, 너와 같아. 때리고 싶으면 때려. 하지만 네가 신분으로 나를 굴복시킬 수는 없어' (p. 101)
오른뺨을 맞으면 왼뺨도 내밀어라 하는 말이 그저 비폭력을 나타내는 말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겉옷을 뺏는 예도 '강제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십리를 가주어라' 하는 말도 그 직접적 문장의 의미가 다가 아니었다. 역사비평적으로 저자가 알려주는 문장의 의미들은 보다더 깊고 진지한 의미가 들어있었다. 알면 알수록 멋진 철학이었다.
예수가 일으켰다는 기적의 의미와 예수가 했다는 은유적 표현속의 숨은 뜻 그리고 당대를 향한 비판과 전복적 상상력이 모두 새롭게 다가왔다. 번역에서 빠지고 왜곡되고 악용되는 일부 사례들에 대해서 제대로 알게되는 부분들도 좋았다.
우리는 예수가 견고한 상징체계, 그러나 어떤 열매도 굶주린 이들에게 주지 못하는 옛 질서에 도전하고 전복적인 상상력을 발휘해 새 세상을 그려주는 것을 보았습니다. 또한 그것을 추구해나갈 때 한계나 죽음을 전혀 개의치 않고, 또 지헤로웠던 청년 예수, 젊은 예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p. 183)
종교인으로서 성인으로서 어쩌면 신으로서 접하는 예수라는 이미지보다 고민하는 선구자로서 앞선 생각의 철학자로서 민중의 리더로서 접하는 예수의 모습이 의미있게 다가왔다. 역시 종교로 읽는 것보다 역사로 읽었어야 했다. 이런 책이 더 많이 더 넓게 나와줘야 한다.
그리스의 오래된 정치철학 담론, 누가 이상적인 통치자인가 하는 담론의 배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플라톤에 따르면 이 세상은 '철학자 왕'이 다스리는 것이 좋은데, 철학자 왕이란 크게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는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고, 두번째는 검소하고 소박한 삶을 기꺼이 살 수 있는 사람입니다. 소박하고 검소한 삶과 지혜를 사랑한 삶이 철학자, 통치자의 이상입니다. 이 구절을 읽으면 에수가 바로 그러한 통치자임을 잘 이애할 수 있을 것입니다. (p. 226)
예수의 죽음을 둘러싼 상황들과 주변 인물들의 심리 그리고 부활에 대한 믿음까지 자연스럽게 이해되었다. 특히 부활과 관련해서 [안티고네] 및 당시 로마황제가 죽으면 신격화했던 '아포테오시스' 와의 연결은 수긍이 가는 부분이 많았다. 항상 소외된 사람들 가까이 있었다는 점에서 비슷한 논리를 펼쳤던 고대의 철학자들과 달리 종교성을 획득하기에 자연스럽기도 했다. 예수의 삶이 기독교라는 종교에 대한 이해가 조금은 자리잡아가는 기분이 들었다. 예수는 당대 필요했던 진정한 왕이었다.
그들은 [마태복음서]를 보며 살아갈 힘을 얻지 않았을까요. 오늘의 현실은 어떤가요. 많은 사람이 서로를 향해 날을 세우고, 폭력과 모욕을 안기며 생채기를 내는 악순환이 거듭되고 있습니다. 생명이 발가벗긴 채 놓여 있는 듯한 이 차가운 현실 앞에, [마태복음서]는 변함없이 유효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절망을 이겨낼 아름답고 멋진 세상을 펼쳐 보여줍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우리에게 [마태복음서]가 고전이자 교양으로 읽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p. 228)
좋은 책이었다. 고전으로 읽기에 충분한 깊이가 있는 책이었다. 종교도 어찌보면 삶의 철학이다. 삶은 그렇게 늘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삶이 던지는 질문에 어떻게 답하는가는 개인마다 다를 것이다. 종교에서 혹은 철학에서 혹은 돈에서 혹은 또다른 길에서 답을 찾고자 할 것이다. 그 답을 찾는 과정에서 고전은 좀더 분명한 길을 보여주리라 생각한다. 고전으로서 읽는 [마태복음서]는 그런 과정에 의미를 더해준 멋진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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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LLY 2021-01-25 공감(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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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가장 많이 퍼진 책이지만 그 의미와 해석에 대해서는 많은 갈등이 있는 성경에 대해 살펴보는 것이 한 해를 시작하는 독서로 의미있다고 생각하여 읽게 되었다. 최근의 코로나 정국에 대한 개신교의 대응 등에서 내가 생각했던 성경의 이해와는 거리가 아주 먼 모습을 발견하여 과연 어떻게 성경을 이해하는 것이 좋을 지 고민이 되기도 했는데, (개인적 판단으로는) 비교적 합리적으로 보이는 역사비평적인 시각으로 성경으로 보는 이 책을 택하게 되었다. 신앙적인 면을 제외하고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 지에 대한 것도 최근에 벌어지는 갈등에서는 종잡을 수 없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예수의 삶 이전에 대한 성경에 대한 해설 부분은 아주 만족한다. 기존에 생각하지 못한 참신한 내용도 있고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을 명쾌하게 해주는 부분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의 삶에 대한 내용은 그정도로 명쾌하지는 않은데, 신앙적인 면을 빼고 성경을 설명하다보면 어쩔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에서 예수의 말이 귀에 걸면 귀고리, 코에 걸면 코걸이라는 대사가 있는데, 성경에 대한 명쾌한 해석이 정말 어려운 것 같다.
개인적으로 창세기에 대한 책은 김민웅 교수의 창세기 이야기를 무척 인상적으로 읽었고 아주 좋은 책이라 생각하는데, 신약도 이런 책이 출간되었으면 좋을 것 같다. (완벽한 해설이 아니라도 내가 발견하지 못한 의미를 찾아주면 좋을 것 같다.)
예수의 조상과 족보로 시작되는 성경 문구를 설명하면서 저자가 주목한 것은 '변혁'이라고 생각한다. 기존 질서(권위)에 순응하는 삶이 아닌 하나님의 가르침에 따른 새로운 삶에 대한 변화가 주된 내용이다. 조상에 대한 이야기부터 일반적인 혈연과 다른 부분 (불륜과 이방인과의 혼인 등)을 강조하는 내용으로 시작했다는 설명이 무척 인상적이다. 또한 성경에서 말한 하나님의 나라가 사후세계가 아닌 현생의 삶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른 것이라는 설명이 무척 인상적이다. 이 내용을 주목하면 성경이나 예수의 말이 신앙이 아닌 도덕이나 윤리, 또는 삶의 지침 정도로 보아도 큰 무리가 없게 되는데, 그런 이유인지 신앙측면서 중요한 예수의 행적이나 죽음 이후 부활의 의미에 대한 설명은 앞부분에 비해 울림이 적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것은 변혁을 꿈꾸는 예수의 말을 따르는 신앙이 왜 순종을 강조하는 보수적인 내용으로 바뀌게 되었는지 이해하기 더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아마도 마태복음서 이외 성경의 다른 부분에 대한 저자의 생각 또는 다른 분들의 역사비평적 시각 등을 접할 수 있으면 좀 더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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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아벨리 2021-01-18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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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연세대에서 기독교교양학을 가르치는 저자가 신약성서 마태복음을 비기독교인들까지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풀어낸 책입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마태복음을 역사비평적으로 들여다 보며 문헌이 기록될 당시의 역사적 배경과 여러 비유들에 담긴 의미를 탐구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예수의 제자 중 한 명인 마태가 쓴 ‘복된 소식’, ‘반가운 소식’이라는 뜻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일컫는 말인 복음을 담은 복음서입니다.
기독교의 경전인 신약성서는 예수 탄생 후의 하나님의 계시를 기록한 것으로 예수의 생애와 언행을 기록한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이 각각 저술 한 것으로 알려진 복음서 4권을 중심으로 제자들의 선교 활동을 기록한 사도행전 1권, 사도들의 서신 21권, 계시록 1권 등 모두 27권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 중 마태복음은 신약성서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복음서죠.
저자는 이 책에서 사람은 무엇이고 죽음은 무엇이며,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의 답을 마태복음을 통해 알아갈 수 있다고 소개하며, 마태복음이 이야기하는 메시지와 교훈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마태복음을 기독교 교리의 근거 구절이 아니라, 모두를 위한 고전과 교양으로서 풀어내고 인간이 추구해야 할 보편 가치를 예수의 삶, 그가 말한 수많은 비유·모순·역설에서 찾아내고 있습니다.
모두 10개의 강의로 나누어진 이 책에서 특히 제8강 [전복적 상상력] 편 ‘새로운 세계를 향하여’에서 저자는 예수는 금의 질서가 우리의 삶과 사회에 전혀 유익하지 않다면 거대하게 도발적 상상을 하고 새로운 질서를 꿈꾸고 정교하게 상상하고 나아가서 그것을 과감하게 실행할 능력과 용기를 또한 기획하라는 말을 건네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오늘날의 우리의 “실패하면 어떡하지? 어차피 바뀌는 것은 없는 것 아니야?”와 같은 자조적이고 패배주의와 허무의 몸짓을 향해 예수는 이 짧은 생애가 전부라고 여기지 말라고 권유한다고 말이죠.
마태복음은 기독교인들 뿐 아니라 타 종교인들도 인류의 고전으로서 반드시 읽어야할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책이 고전으로 읽는 마태복음으로 쉽게 마태복음의 핵심을 배울 수 있는 책이라 생각합니다.
"본 서평은 북뉴스 카페를 통하여 책을 제공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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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2021-02-17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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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의 시선으로 다시 읽는 성경-[마태복음서] 새창으로 보기
성경을 인문학적 관점에서 읽으면 어떨까.
비신자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성경을 고전 중의 하나로 인지할 수도 있음으로 다른 고전들과 나란히 했을 때 성경의 차별성은 무엇인지 설명하는 것도 썩 괜찮은 것 같다.
나는 이같은 사실을 김학철 교수가 쓴 [고전으로 읽는 성서 마태복음서]를 통해 깨달았다.
이 책은 성경 신약의 4대 복음 중 하나인 <마태복음>을 교양인에게 해설하려는 목적으로 진행한 총 10번의 강의를 풀어놓은 것이다.
1. <마태복음서>를 읽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저자는 <마태복음서>를 읽어야 하는 이유, 혹은 실효성에 대해 크게 두 가지를 들고 있다. 첫번째는 전 세계 인구의 3분의 1이 기독교인이라는 점에서 그들의 세계관과, 그들의 삶과 생각을 형성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이다. 두번째는 저자가 생각하기에 <마태복음서>는 기독교인만이 읽기에 아까울만큼 인간은 누구인가,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인가, 삶의 가치는 무엇인가, 용기란 무엇인가 등등 심오한 삶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고 심도 있는 대답을 제시하는 가치있는 고전이기 때문이다.
2. <마태복음서>는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가?
마태복음의 시작인 1장1절은 '족보'로 시작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다윗과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그의 족보는 다음과 같다.'
저자의 말을 빈다면 족보로 소개되는 예수는 '왕이자, 이스라엘의 신인 야훼가 왕위를 약속했던 다윗의 후손'이지만 동시에 '인종주의,성차별주의, 엘리트주의, 성공주의, 혈통주의, 도덕적 자기중심주의를 해체하고 오는 왕'이다. (41페이지 참조)
그런 예수가 군사적 폭력이 난무하고 지역 간 갈등이 깊어가며 경제 체제가 착취적이라 대부분이 가난한 로마통치 시대에 갈릴리 땅에서 태어나 새로운 신의 질서와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를 가르치고 기적을 행하다가 구조적인 폭력과 동지들의 배신, 권력자들의 무능과 무책임, 선동당한 군중들의 무지와 폭력성, 시기와 욕심에 의해 십자가에서 처형당하는 이야기다. [<제10강 부활이 연 상징 세계
-다시,끝까지 살아내는 용기>참조]
3. <마태복음서>는 '오늘'과 어떻게 연결이 되는가?
저자는 제1강을 시작하는 말에서 라틴어, 곧 고대 로마의 온라인 '클라시쿠스'에서 유래한 클래식을 언급하며 이렇게 정의한다.
클래식이란 한 사람이, 한 사회가, 인류가 전쟁과 같은 위기 상황에 있을 때 그것을 이겨낼 수 있는 정신적 자원이 될만한 사상, 지식, 책을 일컫는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고전'이라 부르는 것에는 생존과 그 이상의 인간다움을 구현하는 '강력한 힘'이 깃들어 있습니다. [<제1강 비블로스 게네세우스-이 오래된 책에 묻다>참조]
성경이 고전이 맞다면 복잡하고 삭막한 오늘날에도 여전히 영향력이 있고 힘이 있어야 한다. 기독교인들의 표현을 빈다면 '살아있는 말씀'이어야 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마태복음서] 해석을 읽으며 세 가지를 느꼈다. 첫번째는 모양만 다를 뿐, 인간이 통치하는 세상은 여전히 불공평과 이기적인 판단, 입장차이로 인한 풀리지 않는 매듭, 강한 자의 독식 등 똑같은 패턴의 문제들이 각 시대마다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는 점이다.
두번째는, 예수의 가르침에 대한 깨달음이다. 저자는 예수 시대의 배경을 풀이하여 역사적 관점에서 예수의 가르침을 해석한다. 특히 자신의 모든 소유를 팔아 보화가 묻힌 땅을 사는 사람의 비유나, 각자 다른 시간대에 포도원에 온 일꾼들에게 똑같은 삯을 지불하는 것에는 어떤 정신이 깃들어있는지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은 깊은 울림이 있었다.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영역과 꿈꾸는 공평은 신의 영역과 완전히 다른 것임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세번째는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깊은 성찰이다. 막연하게 '희생' 이라는 단어 하나로 설명하기에는 그 죽음에 담긴 의미가 얼마나 무거운지를 생각하게 됐다. 인간의 본성, 사회에 만연한 부도덕과 불의함...그러나 그 모든 것을 딛고 부활한 예수가 전하고자 하는 메세지는 무엇이었는지를 깊이 상고할 수 있는 것이 이 책의 클라이맥스었다.
[마태복음서]에는 저자의 소개처럼 인문학적인 메세지와 질문들이 담겨있다. 그것은 오늘날도 여전히 유효하여 살아내고자 한다면 삶의 각 영역에서 여전히 연결점을 찾을 수 있다.
기독교인이든 아니든, 예수의 일대기와 가르침 그리고 전하고자 했던 메세지가 무엇이었는지 깊이 알게 된다면 어둠속에 별을 헤는 마음을 갖게 될 것이다. [끝]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무상으로 제공받아 완독 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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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연 2021-01-23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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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서 -김학철- 새창으로 보기
[출판사로부터 도서 협찬을 받았고 본인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하여 작성함]
고전으로 읽는 성서
EBS CLASSⓔ 시리즈. 『신약성서』의 첫 번째 책으로, 인류의 고전이 된 「마태복음서」에 대한 역사비평적 읽기를 시도한 책이다. 기독교 성서 중 한 권의 책을 교양인에게 해설하려는 목적으로 진행한 총 열 번의 강의를 풀어놓은 것으로 가독성이 매우 뛰어난 책이다. 로마카톨릭과 개신교와 동방정교회는 서로 조금씩 다른 경전 문서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마태복음서>는 교파를 불문하고 경전에 속해있다. 2천년전 이야기인 <마태복음서>를 지금 읽어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는 전 세계 인구의 1/3이 기독교인(로마카톨릭, 프로테스탄트, 동방정교회)이라는 사실이다. 저들의 세계관, 가치관, 종교관을 엿볼 수 있다.
<마태복음서>는 기독교인만 읽기에는 너무 아까운 문서이다. 고전으로써 충분한 가치가 있다. 인간은 누구인가,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인가,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는 무엇을 목표로 살아갸 할까, 삶의 가치는 무엇인가, 신적 존재가 있다면 그 존재는 어떤 존재인가, 기적이란 무엇인가, 용기란 무엇인가, 희망은 어디서 오는가, 폭력에 맞설 수 있는가, 새로운 질서를 꿈꿀 수 있는가, 등 심오한 삶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고 심도 있는 대답을 제시 하는 것이 바로 ‘고전’이다. 그런 의미에서 2천년 전 쓰여진 <마태복음서>는 고전이다.
마태복음서는 미술뿐 아니라 건축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대표적인 예로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이 있다. 이 책은 <마태복음서>를 역사비평적 읽기를 한 것이다. 그렇다면 역사비평은 무엇일까? 역사비평은 문헌이 기록될 당시 저자와 청중을 고려해서 텍스트를 읽는 것이다. 역사비평은 그때 그곳의 사람들에게 어떻게 들렸을까? 저자는 당시 그곳에서 어떤 의도로 글을 썼을까? 를 물으면서 문헌에 접근하는 방법이다.
마태복음서는 누가 이상적인 통치자인가? 누가 이 세상을 통치 해야하는 사람들인가? 라는 오래된 그리스 철학의 질문에 답을 준다. 마태복음서에 나오는 족보가 알려주는 예수의 정체는 왕이자, 이스라엘의 신인 야훼가 왕위를 약속했다는 다윗의 후손임을 알려준다. 그런데 그는 인종주의, 성차별주의, 엘리트주의, 성공주의, 혈통주의, 도덕적 자기중심주의를 해체하고 오는 왕이다.
세례 요한과 예수가 외친 ‘회개하라’는 것은 도덕적, 윤리적, 법적 죄를 돌이키라는 뜻 이상이다. 삶의 방식 자체를 돌이키라는 의미이다. 돌이키는 것, 방향전환, 기존 질서에 따라 걷지 않고 다른 방식으로 사는 것이다. 그 이유는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기 때문이다. 여기서 하늘나라는 물리적 공간이 아닌 신적인 존재가 있는 공간을 가리키는 상징이다. 하늘나라는 신의 통치를 가리키고 요한은 지금 신의 통치가 임하니 현실 세계의 지배자들이 구획해놓은 질서에서 돌이키라고 촉구하는 것이다. <마태복음서>에서 복음(福音)이라는 말 자체가 기쁜 소리, 기쁜 소식을 뜻한다. 그리스어로 하면 ‘유앙겔리온’이다. ‘유’가 좋다는 뜻이고 ‘앙겔리온’이 소식이라는 뜻이다. 기쁨에 사로잡힌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다. 성서와 같은 고전은 권위가 있기 때문에 종종 사람들은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하기 위해 문맥의 앞뒤를 자르고 한 문장을 ‘악용’ 하는 경우가 많다.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21 장 22절)도 그렇게 피해를 본 문장이다. 기복적 신앙과 미신적 축복을 구하는 구절로 오해받았지만 정작 문맥을 읽으면 매우 혁명적인 희망을 고취하는 말씀이라 할 수 있다.
기독교인 살아가고 있는 내가 처음으로 성서 중 마태복음을 믿음의 시각이 아닌 역사비평적 시각으로 바라보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 교훈, 가르침은 지금 따르는 이들 뿐 아니라 믿지 않는 이들에게 큰 울림을 넘어 혁명을 전해 줄 수 있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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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동이아빠 2021-01-15 공감(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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