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생각하는 토착화 - 에큐메니안
내가 생각하는 토착화일명 한국적 신학에 대한 단상
이정배 교수(顯藏아카데미) | 승인 2020.05.19 17:44
며칠 전 스승의 날을 맞아 제자들과 함께한 저녁식사 자리에서 평소 생각을 나누었다. 모두들 학위를 마친 학자들이었지만 옛적 내가 그랬듯이 신학교 틀에 갇혀있거나 목회현장에서 적응하느라 쩔쩔매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하 내용을 나누고 돌아설 때 이구동성으로 신학함에 있어 ‘얼’이 모처럼 다시 깨어났다고 토로 했으니 이후 삶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미쳤으면 좋겠다.
삶이 어려운 탓이겠지만 신학하는 사람들, 신학자들 영혼의 크기가 작아지는 현실을 우리는 두렵게 생각해야 한다. 신학의 언어가 쓸모없어 지는 것도 걱정스럽다. 그럼에도 우리는 무용지용, 쓸모없는 쓸모로서의 신학을 위해 정성을 다해야만 한다. 쓸모없는 것이 쓸모 있게 여겨지는 세상을 만들기 위함이다. 신이 인간이 된 성육신이 토착화 신학의 근거라 할 때 이 신학 전통 속에 몸담은 우리의 삶 역시 부끄럽지 않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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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본래 영락교회 출신이며 그 재단 소속 학교인 대광 중·고등학교를 다녔다. 중학교 3학년을 끝내고 친구따라 작은 감리교회로 이적했으며 그곳서 만난 큰 목사(장기천)님 덕에 감신에 입학했고 치구지간인 일아 변선환 선생을 사사했다. 자연스럽게 토착화 신학 전통을 배웠고 기독교와 유학의 대화를 주제로 학위논문을 마친후 30년을 모교에서 가르쳤으며 4년 반 전 명예퇴직을 했다.
2020년 8월이 되면 만 65세가 되어 정년은퇴 시점이 될 것 인바 이제 서야 비로소 은퇴를 실감하고 있다. 새롭게 시작되는 은퇴 이후의 삶을 생각하며 언제까지가 될지 모를 나의 신학적 과제를 짧게 서술할 것이다. 이후 긴 글로 다시 쓰여 질 것을 기대하며 스승의 날 찾은 제자들과 나눈 이야기 속내를 짧게나마 내비쳐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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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명퇴를 작정하기 몇 년 전부터 나의 신학에 작은 변화가 시작되었다. 세월호 참사를 목도하고 ‘생명평화 마당’을 통해 ‘작은교회’ 운동을 주도하면서 자타가 이를 감지하기 시작한 것이다. 재직 중 필자는 탁사 최병헌에게서 시작되었고 윤성범을 거쳐 변선환에게서 꽃피운 토착화 신학 전통을 잇고자 애썼다.
▲ 한국적 혹은 토착화 신학을 추구했던 유영모·윤성범·변선환(사진 왼쪽부터)
토착화 2세대란 평을 들었으며 제자들을 그 3세대로 키우기 위해 때론 민중신학과 토론하고 민족개념을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나름 역할을 했던 것이다. 동학을 비롯하여 유·불·선 동양 종교와 문화들을 연구했고 기독교의 배타적 절대성을 극복하고자 일아 선생처럼 그렇게 서구 종교다원주의 사조를 방편 삼았다. 기독교의 배타적 ‘오직(only)’ 사유를 극복하기 위해 포스트모더니즘과 더불어 출현한 다원주의 신학사조의 도움을 적지 않게 받았다.
하지만 토착화 신학은 이에 만족하지 않았고 거기에 머물지 않았으며 근간에 있어 이들과 같을 수 없었다. 토착(뿌리내림)을 넘어 항시 토발(솟구침)을 꿈꾼 까닭이다. 토착이란 말 탓에 종종 오해가 있었음을 인정할지라도 토착화를 수동적 개념으로 서구 다원주의 신학의 아류로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서구신학은 어떤 것이든지 각주일 뿐 본문이 될 수 없다는 것이 토착화 신학의 출발점인 까닭이다.
필자는 다석 유영모의 귀일신학이 서구 종교다원주의 신학과 변별된다는 이야기를 수 없이 했고 그 실상을 여러 곳에서 밝혀 놓았다. 다석 연구자들 간 견해차가 생긴 것은 실존적 차원에서 비롯했을 것이다. 교회와 대학 그리고 사회, 어느 곳에 발 딛고 서있는 가에 따라 담론의 무게중심이 달라졌을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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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순간 필자 역시도 기존 토착화 전통에 만족할 수 없었다. 과거 문화를 소중히 여기며 민족 주체성을 일깨워 주었으나 정작 정치적 보수성에 고개를 좌우로 내 저어야 했다. 선배 신학자들의 무색무취한 정칙성향, 이에 더해 태극기 부대에 편승하며 가짜뉴스를 진실처럼 매개하는 이들의 적극적(?) 역할마저 목도했던 까닭이다.
▲ 박순경 교수
기존 토착화 스승들, 소위 문화신학자들이 종교해방신학자 변선환 이전으로의 퇴행한 결과였다. 이로써 예전부터 언급된 것이지만 감리교 내 토착화, 문화신학 전통의 한계가 분명해 졌다. 이는 자신들 속에 자유(문화)주의 전통 뿐 아니라 진보성, 곧 사회주의 유산이 있었음을 잊은 자업자득이었다.
손정도를 비롯하여 김창준 그리고 전덕기를 중심한 독립 세력들을 망각한 결과였다. 이후 장기천 감독이 NCCK를 통해 그 뜻을 펼쳤고 박순경 교수가 주체사상을 연구했으나 주목받지 못했다. 필자가 세월호를 비롯하여 4.27 판문점 선언에 생각을 보탠 것도 그리고 5.18, 40주년 행사를 눈물로 지켜보며 힘을 합했던 것은 과거 전통을 소환하기 위함이었다.
기독교가 본래 사회주의였기에 소중하다는 이들 목회자들의 주장을 폄하, 조롱한다면 자본주의에 먹힌 기독교, 감리교의 미래는 없을 것이다. 감신 내 한 건물 벽에 독립선언서에 서명했던 모교 출신 목회자 7분 얼굴상이 걸려있다. 자진 월북한 김창준의 얼굴상을 없애자는 의견이 한 때 팽배한 적이 있었다. 그 타협안이겠으나 김창준의 얼굴이 다른 분의 그것보다 동판에 아주 희미하게 표현된 상태로 걸려있다. 마지못해 주조되어 걸려 있는 듯이 말이다.
조만간 그의 상이 다시 또렷해지기를 기대할 것이다. 사회적 실천력을 잊고 정치성을 망각한 기독교는 토착화를 말할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문화적 토착화그 역시 반쪽 기독교의 민낯일 뿐이다. 민족의 현실과 맞닥트린 기독교, 바로 그것이 토착화의 다른 이름이어야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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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신 목사(1927.12.25-1981.12.17). 감리교 전통에서 기독교 환원운동에 전념하며 고독한 길을 갔다.
30년 재직하면서 아주 늦게 자각한 또 한 사조가 있다. 이는 시대를 앞선 목회자들의 기독교에 대한 헌신의 발로였다. 기독교 주류 역사에 편입되지 못했을 뿐 이들의 공헌은 다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한마디로 감리교 내에 ‘기독교 환원운동’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동석기, 강명석 목사 등 해외 유학을 마치고 돌아 온 이들이 온갖 교파를 넘어 그리스도에게로의 환원을 주창했다.
이들 사상은 의당 누혈의 목회자 이용도와 잇대어 있을 것이다. 당시는 교파적 기독교가 대세인 상황이었다. 교파에 의지하여 선교를 해야 살길이 열리던 시대였다. 하지만 이들은 교파적 기독교가 민족 미래를 위해 도움이 될 수 없음을 일찍 자각했다. 유학파, 감리교 목회자란 후광을 걷어차고 이들 목회자들은 그리스도에게 희망을 둔 것이다.
신학자 이신 역시 감리교 전도사로 시작했으나 이들 선배를 만나 ‘훤원 운동’에 몸 담으며 고독한 길을 갔다. 요즘 같은 시대에 그리스도 환원 운동은 슬로건으로만 남아 있겠으나 당시 이들은 이 길에 생명을 바쳤고 가족마저 희생시켰다. 우리가 토착화를 말함에 있어 이런 그리스도, 이런 예수를 말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공허한 이론과 사변에 불과할 것이다. 현실 교회가 아무리 타락하고 못난 짓을 해도 교회를 부정할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럴수록 그리스도 정신- 그것이 하느님 나라 사상이든, 묵시적 인자 사상이든 혹은 역사적 예수의 지혜이든지 간에-에 입각하여 자신을 재구성하는 일에 정성을 아끼지 않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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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세 사조가 공존하며 지난 백년 남짓한 한국 신학계에 존재해왔었다. 하지만 신학자들은 저마다 어느 한 사조에 속하여 상대에 대한 존중보다는 비판을 앞세우며 자기 영역에 갇혀 세월을 보냈다. 한 노학자는 이들 세 사조를 자유주의, 진보주의, 복음주의라 개념화 했지만 일리는 있되 전리는 아니라 생각한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주의’(ism)가 아니라 그 속에 담긴 본뜻인 까닭이다. 지금껏 이 세 흐름과 옳게 만나지 못한 채 이들을 일개 ‘-주의’로 이해했으니 비극이다. ‘-주의’로서의 세 사조는 모두 서로를 냉대했고 함께 여성에 무지한 한계를 자체속에 노정한 까닭이다.
하지만 현실 문제를 날 것으로 관심할 것만이 능사가 아닐 것이다. 현실과 조우하되 그를 신학 언어로 재구성하는 일 역시 똑같이 중요하다. 그렇기에 향후 토착화는 세 흐름의 본질을 꿰뚫어 하나로 녹여내는 치열한 논리와 열정 그리고 함께하는 마음을 요구할 것이다.
각자도생의 신학으로는 세상과 교회를 바꿀 수 없다. 신학보다 큰 담론을 말하는 학문이 없으나 누구도 신학 이야기에 주목하지 않는 현실에 가슴을 칠 일이다. 향후 교파의식 역시 필자에게는 무의미할 수밖에 없다. 감리교 신학 속에 담겼던 세 요소들은 더 이상 그들만의 것이 아닐 것이다. 교회성장을 위해 자신 속의 보고를 내다 버린 탓이다.
이웃종교들, 온갖 이념들이 기독교 근원과 마주할 때 모두가 하나 되는 교파 초월적 신학, 큰 기독교를 기대할 수 있겠다. 이를 필자는 이후 기독교, 이후 신학 그리고 이후 교회라 불렀고 다석 학파의 기독교 이해에서 이런 가능성을 찾고자 했다. 수년전 필자가 문화신학자들과 『한류로 신학하기: K-Christianity』란 큰 책을 펴낸 것도 이런 맥락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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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다 앞서 필자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으면서 루터가 말한 3개의 ‘오직’ 교리를 달리 구성할 것을 제안했었다. 중세를 극복하여 근대를 열어젖힌 동력이었으나 근대(자본주의)와 짝하면서 이 셋이 중세의 면죄부만큼 타락했으며 시대를 타락시켰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하여 필자는 근대성(자본주의)과의 투쟁을 위해 이 세 가지 ‘오직’ 교리- 믿음, 은총, 성서- 를 고독, 저항 그리고 상상이라 달리 풀었다. 믿음을 고독으로, 은총을 저항으로 그리고 성서를 상상력의 보고로 달리 개념화한 것이다.
▲ 이정배·이은선 교수는 명예퇴직을 하고 강원도 횡성에서 각각 현장아카데미와 신연구소를 마련하고 토착화신학에 매진하고 있다. ⓒ한겨레 조헌 기자
떼거리 군중 속에서 신독의 삶을 구했으며 늦게 온 자에게도 같은 품삯을 지불하는 하늘 은총을 세상저항의 동력이라 여겼고 성서가 정의와 평화가 입 맞추는 상상력을 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웃종교들과의 공존하는 세상이 상상의 산물이라면 사회주의 이념의 수용을 은총이라 하겠고 그리고 깊이로 침잠하는 환원의식을 고독이라 명명해도 좋겠다 여긴 것이다. 이런 생각을 담은 글을 필자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여 베를린에서 열린 교회의 날 행사장에서 발표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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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여성신학자 이은선은 아주 오래 전부터 동양(유교) 고전에서 배운 3개의 개념인 聖(성)·性(성)·誠(성)을 갖고서 나름 치열한 토착화 작업을 수행해 왔다. 유교와 기독교의 대화를 통해 기독교의 재구성, 곧 여성신학적 차원에서 토착화 논쟁에 참여했던 것이다. 넓게는 기독교와 인문학간의 대화의 장을 펼쳤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신학적으로 위 세 개념들은 저마다 신론, 기독론 그리고 성령에 해당된다. 이를 인문학적 언어로 풀면 통합성, 타자성 그리고 지속성이라 말할 수 있다. 이 세 개념들은 모두 여성적 가치들로서 역사 속 남성들에게 많이 낯설 수도 있겠다. 체화된 한국적 여성의식이 기독교의 핵심교리를 종교 보편적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여기서 하느님은 모든 것과 관계하는 존재로서, 예수는 여성이 남성의 타자이듯 신의 타자성으로, 그리고 성령은 모성을 통해 경험하듯 삶의 변화를 추동하는 힘(지속성)으로 재언표 된다.
하지만 이은선은 한걸음 더 나아갔다. 이들 각각을 종교, 정치 그리고 교육의 차원에서 설명했고 셋의 한몸 짜기를 통해 토착화 과업을 이루고자 한 것이다. 이는 기독교적으로는 성과 속의 합일이며 종교적으로는 기독교와 유교의 일치(대화)일 것이며 문명사적으로는 기독교 서구(미국)와 중국문명(유교)를 함께 극복하는 길이라 하겠다. 이런 작업은 역시 베를린 교회의 날 행사장에서 소개되었고 그곳서 큰 호응을 얻었다.
이는 결국 앞서 말한 환원운동과 저항운동 그리고 공존능력 간의 통섭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이 셋은 필자의 개념들, 고독, 저항 그리고 상상과도 짝할 수 있는 개념으로서 믿음, 은총, 성서의 인문학적 재해석이라 해도 좋겠다. 이로부터 코로나 이후 시대 기독교의 미래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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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에서 토착화론에 대한 짧은 단상을 소개했다. 압축적인 글이라 질문이 적지 않을 것이며 의심도 생겨날 수도 있겠다 싶다. 수많은 내용을 덧붙인다 한들 질문이 사라질리도 없고 의심 자체가 소멸되지도 않을 것이다. 누가 주장한다고 사람들이 따르지도 않을 것 같다. 그만큼 토착화 논의는 쉽지 않고 미정고로서 존재할 뿐이다.
주지하듯 은퇴 후 필자는 이은선 교수와 함께 강원도 횡성에 <현장 아카데미>을 열었다. 지난 주 한겨레 ‘휴심정’에 소개되었듯이 중세 수도원 전통을 따라 학문과 영성 그리고 노동의 삶에 전념하기 위해서이다. 여기서 학문이라 함은 토착화 연구를 뜻할 것이다.
앞서 말한 방향에서 우리 부부는 신학적 동지로서 통합적인 토착화 신학에 전념할 생각이다. 홀로 할 수 없기에 소장학자들의 뜻 또한 모아지기를 소망한다. 이 작업을 위해 조만간 ‘한국 신(信)연구소’가 출범할 것이다.
7월 중으로 예상하는 바, 이 시점에 맞게 몇 권의 책이 출판될 예정이다. 『사유하는 집사람의 논어읽기』(가제)와 『동북아 평화와 聖(성)·性(성)·誠(성)의 여성신학』이 이은선의 이름으로 출판될 것이며, 필자 역시 『다석의 귀일신학』을 선보일 생각이다. 노동과 영성을 위한 연구와 실천도 별도로 계획 중에 있다.
실로 ‘다른 기독교’를 절실하게 생각할 때가 되었다고 판단한다. 이 작업을 위해 기꺼이 우리들 남은 시간과 여력을 바칠 작정이다. 이를 위해 같은 생각을 품은 사람이 많이 그립다. 신학마저 각자도생의 작업이 될 경우, 우리들 미래는 더욱 볼품없어 질 것이기에 말이다.
이 글을 읽는 분들에게 7월 어느 날 우리들 책 한 권이 전해질 수 있기를 소망하며 5.18 40주년 광주 아픔을 새기며 동시에 한겨레신문 1만호 출간을 축하하는 마음을 담아 에큐지에 이 글을 보낸다.
이정배 교수(顯藏아카데미) ljbae@mt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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