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6/23

다석은 새로운 영성의 종교혁명가 9-⑩ 심중식 소장 - 황호택 릴레이 인터뷰

다석은 새로운 영성의 종교혁명가 - 아주경제

다석은 새로운 영성의 종교혁명가
황호택 논설고문·카이스트 겸직교수
입력 : 2021-03-24 


다석은 통일 대신 귀일(歸一)하자고 했죠
황호택 논설고문·카이스트 겸직교수
입력 : 2021-03-17 17:09


황호택 릴레이 인터뷰⑨ 심중식 소장<上>

광주 동광원과 벽제 동광원은 육신의 즐거움을 끊고 고신극기(苦身克己)의 삶을 산 무명(無名)의 성자 이세종 이현필과 다석 류영모의 정신이 서려 있는 곳이다. 다석은 1948년 광주 동광원 수양회에서 첫 강의를 했고 1971년 여름 수양회까지 매년 연초와 광복절 전후에 광주에 찾아와 말씀을 전했다.
다석이 81세이던 1971년 동광원 여름 수양회에서 한 마지막 강의는 학력이 낮은 동광원 사람들이 알아듣기 쉽게 다석의 신앙과 생각을 풀어내 소중한 자료로 남았다. 심중식 귀일연구소장이 오래 돼서 녹음 상태가 좋지 않은 테이프를 원음에 충실하게 풀어 <한나신 아들 예수>라는 책으로 펴냈다.
동광원을 세운 이현필의 스승 이세종(1877~1942)은 집안이 가난해 어린 시절부터 머슴으로 살았지만 근검절약해 동네에서 제일 큰 부자가 되었다. 무학의 이세종은 성경을 읽기 위해 한글을 깨쳤다. 그는 “예수님의 사랑을 알고부터 가난한 이웃의 고통과 슬픔을 생각하며 차마 배불리 먹지 못하고 따뜻한 잠도 잘 수 없다”며 채무자들을 모아놓고 빚문서를 태워버렸다. 창고 문을 열어 양식과 재물을 주위의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주고 길 가는 나그네나 거지들이 오면 대접해 보냈다.
기도와 말씀 묵상으로 수도자의 삶을 살던 이세종은 아내를 누님이라 부르며 부부생활을 끊고 해혼(解婚)을 했다. 하루 한끼만 먹고 육식도 금했다. 그가 부엌 구정물 통에 빠져 버둥거리는 쥐를 구해주었다는 일화도 있다. 주식은 쑥범벅이었다. 그는 성경을 거의 외울 정도로 많이 읽었다. 그가 기도터를 세우고 성경을 가르치자 많은 사람이 찾아왔다.
1937년 감리교신학대학교 교수였던 정경옥은 전남 화순에 살던 기독교인 이세종을 만나고 나서 신학잡지 <새사람>에 “도암의 숨은 성자를 찾아서”라는 제목의 글로 소개했다. 정경옥은 마하트마 간디보다 더 존경할만한 인물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이세종은 세속적 명리와 욕심을 끊겠다며 원래 이름을 버리고 ‘빌 공(空)’자를 써서 이공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다. 마하트마 간디와 이공이 실천한 일일일식(一日一食)과 해혼을 다석도 따라 했다. 이공의 수제자가 바로 이현필이다.


벽제 동광원 뒷산에서 심중식 소장.[사진=유수민 인턴기자]
다석은 1946년 서울YMCA 현동완 총무의 이야기를 듣고 이세종의 자취를 찾아 화순을 돌아보게 되었다. 이공이 작고한 지 몇 년 뒤였다. 현 총무는 세계의 성자들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서울에서 기차를 타고 온 다석과 현 총무를 광주역으로 이현필(1913~1964)이 마중 나갔다.
이현필은 1948년 여수순천 사건으로 발생한 고아들을 돌보기 시작해 6·25 전쟁 중에는 600여 고아들을 보살폈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는 가정으로 돌아갈 수 없는 폐결핵 환자들을 거두어 주었다.
이현필과 마더 테레사(1910~1997)는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 일생 동안 버림받고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을 낮은 자세로 섬기며 살았다. 이현필은 가톨릭 같은 교회나 조직의 지원도 없었다.
이현필은 스승 이공의 가르침에 따라 이나 벼룩도 죽이지 않고 놓아주었다. 길을 다니다 벌레를 밟아 죽일까 염려해 맨발로 다녔다는 일화도 있다. 불교의 불(不)살생 교리 형성에 영향을 준 인도 자이나교의 수행자들과 비슷한 삶의 자세였다.
다석은 당대에 이광수 등과 함께 조선의 3대 천재라고 불릴 만큼 지식인 사회에서 알려진 사람이었지만 이현필은 변변한 학력이 없는 초라한 시골 청년이었다. 공통점이 있다면 진리를 구하는 정직한 구도자로서 식색(食色)을 초월하여 절대이신 하나님만을 모시는 진실한 신앙인이었다. 광주를 빛고을이라는 우리말로 처음 고쳐 부른 사람도 다석이다.

食色을 초월하는 하루 한끼와 해혼(解婚)

벽제 계명산 앵무봉 골짜기에는 현동완 YMCA 총무가 찾아와 기도를 드리는 움막이 있었다. 1956년 현 총무를 따라왔던 정한나 수녀가 이듬해 이희옥 박공순 수녀와 함께 수도처를 개척했다. 수녀 세 사람이 농사를 짓고 수도생활을 하면서 이 지역 사람들이 수녀골이라고 불렀다. 이현필은 1964년 52살 때 광주에서 이곳을 찾아와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벽제 동광원은 다석이 살던 구기동에서 두 시간 정도면 걸어서 올 수 있는 곳이다. 다석은 웬만한 거리는 모두 걸어 다녔다. 다석은 가끔 이곳에 와서 동광원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강연도 하고, 예배도 보았다. 1919년 파고다 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정재용도 벽제리 웃골에 살았다. 다석은 벽제 동광원에 들를 때면 꼭 정재용의 집을 찾았다.
동광원, 귀일원, 귀일사상연구소 등은 이세종 이현필과 다석의 사상을 연구하고 실천하는 자매 기관이다. 현재(鉉齋) 김흥호 목사가 다석의 뒤를 이어 동광원 수양회 강사를 하다 2002년 경부터 나이가 들어 그만두면서 심중식 귀일사상연구소장이 강사를 맡았다. 현재는 다석이 아끼는 제자인 김 목사에게 내려준 호다.

-이현필 성인은 굶기를 예사로 하고 나중에 부부관계를 끊는 해혼을 했습니다. 금욕적이라는 차원을 넘어서서 자기학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이런 삶이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현대인에게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요?

“이현필 선생이 어떻게 사셨는지 살펴보면 눈물겨울 정도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당한 사랑의 고통을 몸소 겪으며 자기를 극복하려는 고신극기의 삶을 사셨죠. 지금 기준으로 보면 과하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당시 거의 모든 국민이 하루 한끼도 제대로 못 먹고 굶주리던 시절이었죠. 전쟁 통에는 하루에 고구마 몇 개로 연명했습니다. 내가 안 먹으면 누군가 다른 사람이 먹지 않겠는가, 그런 자비와 사랑에서 우러난 행위였지 자기학대는 아니었습니다.”

-동광원과 귀일원 사람들은 귀일(歸一)이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요. 어떤 뜻이 담겨 있습니까?

“다석이 1955년 6월 2일에 쓴 일지를 보면 귀일이라는 용어가 나옵니다.

統一爲言 人間譌 (통일위언 인간와)
歸一成言 天道誠 (귀일성언 천도성)

한시를 풀이하면 이런 뜻이죠. ‘통일(統一)을 이루겠다 떠드는 것은 인간들이 하는 거짓이다. 귀일(歸一)하여 말씀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법도요, 진실이다.’ 인간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통일하겠다고 야단을 쳤습니까. 우리나라가 해방되자마자 이념 때문에 남북으로 갈려서 서로 싸우면서 계속 통일을 부르짖었습니다. 6·25 전쟁 3년 동안 참화는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이처럼 분단과 전쟁의 참화를 겪은 다석은 정치지도자들이 떠드는 통일이란 말을 싫어했습니다. 다 제 욕심에서 나온 통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귀일은 자기를 부인하고 극복하여 무아(無我)가 되어 진리이신 한 분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늘의 길에 순종하는 통일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이신 그리스도 예수, 그이의 마음 안에서 녹아져 너도 없고 나도 없고 그리스도의 몸으로 하나가 되자는 운동입니다. 귀일의 의미가 다석과 이현필에 의해서 기독교식으로 해석되고 공동체적 사회원리로 확장되었지만 이 말은 원래 선불교에서 나온 말입니다.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 一歸何處). 우주 만물이 하나로 돌아간다.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갈까’ 라는 유명한 화두입니다. 법화경에 일승(一乘)을 설명하면서 ‘회삼귀일(會三歸一 · 셋이 모여서 하나로 돌아간다)’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에 비해 통일은 해방 후 분단된 조국 현실을 놓고 나온 정치적 의미의 새로운 용어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석은 통일을 말하지 말고 귀일하자고 주장했습니다. 각자가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 진실이 되면 진리 안에서 진정으로 하나가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통일 전쟁이 부른 참화

이현필은 말년에 정인세 원장에게 ‘귀일원을 하시오’라고 권했습니다. 귀일원을 통해 우리 사회에 한 사람이라도 소외되거나 버림받는 영혼이 없는 그런 민주적인 사랑의 공동체가 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귀일원은 현재 약 150여명의 장애인들과 50여명의 직원들이 함께 지내고 있다. 직원들 가운데 동광원 출신은 거의 은퇴하고 수녀님들 몇 분이 함께 생활하며 봉사하고 있다. 심 소장은 귀일원의 천사 복은남 수녀 이야기를 들려줬다. 복 수녀는 이현필의 초기 제자로 여러 언님(다석이 만든 말로 동광원에서는 수사 수녀를 이렇게 부른다)들이 따랐다.
“복 수녀는 귀일원에서 어려운 환우들을 돌보며 생활했는데 언제나 그 얼굴이 화평하고 행복해 보였습니다. 그분이 맡은 환우 중에 사고를 당하여 꼼짝도 못 하고 24시간 누워 지내는 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환우의 얼굴이 항상 밝아 차츰 사람들에게 천사의 얼굴로 소문이 났습니다. 사람들이 그 환우를 보기 위해 찾아오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환한 천사의 얼굴을 만들어준 사람이 누구인가 하면 바로 복은남 수녀였습니다.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면서 날마다 그 환우의 침대 밑에서 생활하며 조금이라도 환우가 불편한 기색을 보이면 곧바로 일어나서 수발했습니다. 식사는 물론이고 대소변과 목욕, 자세를 돌려주고 옷 갈아입히고 세수를 시켜주고 온종일 쉴 새 없이 돌봤습니다. 그렇게 십수 년을 한결같이 지극 정성을 다하자 환우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처럼 밝아지게 된 것입니다. 복 수녀에게 ‘얼마나 힘드시냐’고 물으면 “힘들다니요? 제가 주님을 섬기는 일인데 어찌 기쁜 일이 아니겠습니까”라고 대답했습니다.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니라 하신 예수의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고 있었습니다. 번화한 도시에 있는 정신장애인 수용시설이지만 지금까지 쇠창살 자물쇠 등의 격리시설이나 통제 없이 한 가족이 되어 자유롭게 생활하면서 저절로 동화되고 치유되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종교적 헌신성과 영적 감화의 능력이 대대로 축적되어 흐르는 곳이 귀일원이라 하겠습니다.”



이현필 묘소 앞에서 대담하는 심중식소장(왼쪽)과 인터뷰어. [사진=유수민 인턴기자]
이현필 신앙공동체가 가족과 사회에서 버림받은 고아와 불치병자들을 돌보기 위해 시작한 동광원은 1965년 사회복지 법인 귀일원으로 이름이 바뀐다. 귀일원에서 정신장애 및 지체장애인들을 보살피던 언님들이 정년 퇴임하여 갈 곳이 없게 되자 남원시 대산면에 새로 터를 닦아서 신앙공동체를 이루었다. 그것이 현재의 남원 동광원이다. 동광원과 귀일원은 이현필의 제자들이 세운 신앙공동체이자 사회복지 봉사 기관이다. 2010년부터 귀일원에서 귀일사상의 연구와 전파를 위해 귀일사상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대학시절 함석헌 선생과 <씨알의 소리>에 접하고 반독재 민주화 운동에 동참했다지요. 그러다 방향을 전환해 1981년부터 현재를 찾아가 다석을 공부하고 실존적 신앙을 배우게 됐다면서요?

“시골 출신이라 서울에 대한 동경이 무척 컸습니다. 그러나 정작 서울대에 들어와 보니 고등학교 시절과 질적으로 다를 게 없었습니다. 이제 남과 경쟁하는 일은 그만두고 내가 갈 길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막막했습니다.
몇몇 동아리에 들어가 공부를 했습니다. <자유로부터의 도피>라는 에리히 프롬의 책을 시작으로 역사학 및 사회과학 서적을 보면서 고민이 많아졌습니다. 학교에서 몇 번 데모를 하고 친구들을 따라 함 선생 집회에 참석하면서 인생이 무엇인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생각하게 됐습니다. ‘독재 타도! 민주평화통일 만세!’ 라고 외치지만 저에게는 용기가 없을 뿐 아니라 목숨이 아까웠습니다. 내가 세상에 나온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누구인가. 내가 죽으면 어떻게 되나. 처음으로 실존적 물음을 해보면서 내 자신이 백지장 같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예수와 성경 그리고 기독교를 알고 싶어 기독학생회 활동을 하면서 함 선생의 <씨알의 소리>를 구독하고 동양 경전들을 읽어보고 김태길 교수님을 찾아가 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5·18을 겪고 실의와 절망에 빠져 있을 때 만난 분이 현재였습니다. 현재가 이끄는 이화여대 연경반(硏經班)에 처음 참석했을 때 선생은 시국에 관한 언급은 하지 않고 종교철학적인 이야기만 하니까 너무 현학적이지 않은가 하고 거부 반응이 생겼습니다. 그렇지만 왠지 모르게 하루 한끼를 먹으며 세속을 초탈한 도인같은 느낌이 들고 동양경전과 성경을 새롭게 그리고 쉽게, 깊은 내용으로 풀어주는 것을 보고 차츰 말씀에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하나님을 만나서 변화된 사람들의 이야기가 관심을 끌었습니다. 현재는 다석을 만난 지 6년 만에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을 하시고 일식(一食)을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하며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참 스승을 모시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복음 14장 6절)는 독특한 해석이 제게 천둥 같은 울림으로 다가왔습니다. 지금까지 기독교는 바울 사상이 지배적이었지만 이제는 요한 사상으로 기독교를 다시 살려야 된다고 하셨습니다. 누가복음과 바울서신은 로마사람들을 위한 복음이지만 요한복음이야말로 동양인을 위한 복음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나도 요한복음을 가장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귀가 열려야 눈이 열린다

-어떻게 동광원과 인연을 맺게 됐습니까?

“연경반에서 현재는 다석뿐 아니라 이현필 선생과 동광원에 대해 가끔 말했습니다. 1985년 박영호 선생의 <다석 유영모의 생애와 사상>이라는 전기를 읽었습니다. 엄두섭 목사가 1977년 쓴 <맨발의 성자 이현필>이라는 책도 봤습니다. 현재는 다석과 함께 광주에 내려가 이현필 선생을 만났던 이야기도 해주었습니다.
이현필 선생이 옷 속에 있던 이가 소매로 기어 나오니까 그것을 잡아서 너도 함께 살아야지 하면서 다시 자기 품속으로 집어넣더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서울 YMCA 화장실이 아주 더러운 공중화장실이었는데 이 선생이 제일 깨끗한 화장실을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이 선생께서 직접 또는 제자를 시켜 계속 청소하고 관리를 하니까 가장 깨끗한 화장실이 되었다고 합니다. 가장 더러운 곳을 가장 깨끗한 곳으로, 가장 척박한 땅을 가장 비옥한 옥토로 만드는 사람들이 이현필의 동광원 사람들이라고 김흥호 선생은 소개했습니다.
그래서 나도 벽제 동광원을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처음에 갔을 때 아무리 둘러봐도 동광원 간판이 없었습니다. 허름한 토담집들이 두어 채 있는데 거기가 동광원이었습니다.
그 당시 현재가 동광원 여름 수양회에서 강사로 말씀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2002년 현재가 동광원 수양회에서 이제 나이가 많아서 더는 찾아오기 힘들다고 하자 동광원 사람들이 제자라도 보내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2003년 내가 처음으로 동광원 수양회 강사로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다석, 현재, 그리고 나로 이어지는 3대(代) 강사라 할까요. ”

-현재의 강의를 녹취 편집해 주역, 원각경, 양명학, 법화경, 화엄경 강해를 펴냈는데요.

“1981년 현재의 이화여대 연경반에 출석하면서 종교철학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주된 관심은 진리가 무엇일까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다석이 52세에 중생(重生) 체험을 했다는데 그게 어떤 것일까. 현재는 35세에 하나님을 만났다고 하는데 그게 어떤 체험일까. 사도 바울이나 아우구스티누스, 감리교를 시작한 존 웨슬리나 모두 거듭남의 체험을 가졌는데 나는 언제 어떻게 하면 그런 체험을 가질 수 있을까?
현재는 늘 귀가 열려야 눈이 열린다 했습니다. 그래서 부지런히 듣고 들었습니다. 그렇게 여러 해가 지나자 선생의 말씀이 점점 더 깊이 다가왔습니다. 깊이 심취해서 듣고 있으면 시간이 가는 줄 몰랐습니다. 이제 무슨 말인지 거의 다 알아듣는가 싶었지만 그게 곧바로 제 것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현재의 말씀이 어떻게 하면 나의 이야기로 될 수 있을까?
그걸 놓고 고민하다가 현재와 좀 더 가까이 지내기 위해서 붓글씨를 배웠습니다. 매주 토요일이면 댁으로 찾아가서 차로 한 시간쯤 걸리는 곳으로 모시고 갔습니다. 그렇게 두 시간을 배우고 저녁 식사를 함께 하고 다시 댁으로 모셔드린 후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던 1992년 5월 5일 새벽에 마음이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영적 차원의 세계와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갑자기 기쁨과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동광원 옆에 있는 현동완 YMCA 총무의 기도터. [사진=황호택]
그후 나도 일식을 시작하면서 현재의 강의를 녹취하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다석의 일좌식(一坐食) 일언인(一言人)을 따라하기 시작했습니다. 일식과 해혼(解婚)은 일언이고, 일좌는 현재의 강의를 듣는 것이고, 일인(一仁)은 녹취를 푸는 것이었습니다. 다석이나 현재의 모든 말씀을 요약하면 일식 일언 일좌 일인입니다. 일식은 주야통(晝夜通)이요, 일언은 생사통(生死通)이요, 일좌는 천지통(天地通)이요, 일인은 유무통(有無通)이라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주역강해>로부터 시작하여 <법화경 강해> <화엄경 강해>까지 계획대로 마칠 수 있었습니다.”

-날마다 땅 파고 김 매며 농사짓고 예배드리는 일이 동광원의 일상인데요. 이런 수도자적 삶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일상에서 수도자로 사는 삶, 그것이 가장 자연스런 삶이요, 가장 자기답게 사는 삶이요, 가장 아름다운 삶이라 하겠습니다. 그렇기에 그런 일상적 수도자의 삶이 되면 거기에 무슨 목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의미가 있어 사는 것도 아닙니다. 배고프면 먹고 고단하면 자는 생활, 그처럼 그저 무위자연(無爲自然)이니까, 자유요, 평화와 기쁨의 삶이지 조금도 특별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경지에 이르기까지 거쳐야 하는 길은 좁고 험난합니다. 선불교에서 3단계를 이야기합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이런 1단계에서 얻는 평상심은 도라고 할 수 없겠습니다. 그런데 산은 산이 아니요, 물은 물이 아니라는 2단계를 거쳐서 마지막에 산은 역시 산이요, 물은 역시 물이라 하는 3단계에 이르러 고요한 평화를 얻게 됩니다. 그런 평상심을 일상에서 살아내는 것이 마지막 수도자의 삶의 모습이라 하겠습니다.
이런 3단계를 심우도(尋牛圖)에서는 10단계로 표시하는데 일체 공(空)이 되었다가 마지막에 시정 바닥으로 다시 내려가서 남을 도우며 살아간다는 입전수수(入廛垂手)입니다. 공자로 말하면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欲不踰矩)의 경지입니다. 지천명(知天命)과 이순(耳順)을 지나 평상심이 되니까 이제 마음대로 해도 조금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그런 자유의 경지입니다. 동광원에서는 일생 험난한 온갖 역경을 겪고 난 뒤에 일체를 하나님의 손길에 맡기고 감사와 기쁨으로 사는 언님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인터뷰어=황호택 논설고문·정리=이주영 인턴기자)

<심중식 소장 약력>

-1957년 출생
-1977~81년 서울대학 공과대학 기계설계학과. 대학시절 5.18을 겪고 좌절을 겼다 이화여대 김흥호 교수를 만나 다석 유영모의 동양적 기독교와 주체적 신앙을 알게 됨
-1981~83년 서울대 공대 대학원.
-1981~2011년 30여년 동안 현재(鉉齋) 김흥호 선생에게 동양경전과 성경을 배움.
-1992년부터 일일일식하며 스승의 강의를 녹취 편집하여 주역강해, 원각경강해, 양명학공부, 법화경강해, 화엄경강해 등을 출간.
-2003년부터 다석과 김흥호 선생의 발자취를 따라 자생적 기독교 수도공동체인 동광원, 귀일원에서 수양회 강사로 참여
-2010년 귀일연구소소장으로 활동하며 귀일영성학교 운영중
-2018년 <맨발의 사랑 이현필의 삶과 신앙> 편저
-2020년 다석이 1971년 8월 광주 동광원에서 행한 마지막 강의를 정리한 <한나신 아들 예수>를 편찬





황호택 릴레이 인터뷰⑩ 심중식 소장<下>

1950, 60년대 시골 교회에서 부흥회가 열리면 유명한 부흥 목사들이 와서 현란한 쇼맨십을 보여주는 설교를 했다. 요즘 케이블 채널에서 인기를 끄는 장경동 목사를 연상하면 될 것이다. TV도 없었을 때의 이야기다. 교육 수준이 낮고 성경을 잘 모르는 사람들을 우선 교회로 끌어들이는 데 효과적인 선교 방식이었다.
<한나신 아들 예수> 머리말에 나온 것처럼 다석이 동광원에서 한 강의는 학력이 거의 없는 신도들을 상대로 비교적 쉽게 풀어서 한 말씀이다. 그래도 여전히 딱딱하고 어렵다. 엔터테이너 부흥사가 인기를 끌던 시대에 다석을 모셔와 강의를 들은 이현필과 동광원 식구들은 기성교회 사람들과는 생각이 달랐던 것 같다.
“물론 다석이 강의할 때 대부분은 알아듣지 못했다고 합니다. 알아듣는 이는 이현필 정인세 김준호 김금남 등 몇 사람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석은 한 사람, 아니 반 사람만 있어도 그 영혼을 위해 말씀을 다했을 분입니다. 그리고 다석의 말씀을 다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한마디라도 기억했다가 두고두고 곱씹으며 사는 동광원 언님들을 보았습니다. 예를 들어 최옥남 언님은 “일러 이에 이르시니 이겨 일즉 이러나서 이룬 일을 이루어라”는 구절을 늘 외고 있었습니다. 또 어떤 언님은 “있다시 온 옛다시 간 없이 있을 나”라는 구절을 외며 살았습니다. 수녀 수사로서 순결과 초월의 믿음으로 사는 그 수도의 길에 다석이 동행한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큰 힘이요 격려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벽제 동광원을 자주 찾았던 다석

-심 소장이 책으로 출간한 다석의 마지막 강의는 다석학에서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다석은 책을 저술하지 않고 20여 년 간 일기를 남겨 놓았습니다. 그 일기를 모아서 나온 책이 <다석 일지> 4권입니다. 그런데 그 책은 주로 시(詩)로 되어 있는데 일반인들은 이해하기가 어려워 다석 직제자들의 풀이를 읽어봐야 그 뜻을 알 수 있습니다. 현재가 간단히 해설을 붙인 <다석일지 공부> 7권을 솔출판사에서 출간했습니다. 그리고 현재가 속기사를 시켜 1년 동안 다석의 YMCA 강의를 속기한 자료가 책으로 나온 것이 <제소리>입니다. 박영호 선생이 이를 보강하고 해설을 붙인 책이 <다석강의>입니다. 그리고 1959년부터 1961년까지 연경반 강의를 주규식이 노트한 것을 바탕으로 박영호 선생이 펴낸 책이 <다석 씨알강의>입니다. 그리고 다석이 1971년 동광원 여름수양회에서 1주일 간 한 강의를 녹취해 나온 책이 <다석 마지막 강의>입니다. 이같이 여러 책이 나왔지만 다석의 육성과 대조할 수 있는 책은 <다석 마지막 강의> 뿐입니다.
내가 이번에 새로 <한나신 아들 예수>를 다시 편집한 경위는 머리말에 적어 놓았습니다. 다석의 남아있는 유일한 육성이기 때문에 그 사상과 믿음과 영성을 연구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하고 객관적인 자료라 하겠습니다. <다석 일지>도 다석이 직접 기록한 1차 자료이지만 시적인 표현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해석에서 논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석의 동광원 강의는 쉽게 풀어서 말한 내용이라 훨씬 이해하기 용이하고 해석상 논란이 별로 없습니다. 따라서 다석의 진면목을 알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동광원 마지막 강의를 직접 듣는 것입니다. 다만 녹음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아서 그것을 듣기 쉽게 책으로 나온 것이 <한나신 아들 예수>라 하겠습니다. <한나신 아들 예수>도 녹취 과정에서 잘못되거나 누락된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부분을 찾아내 자꾸 보완해 나감으로써 완성도가 높은 책이 되길 바라고 있습니다.”


동광원을 만들고 평생 봉사하는 삶을 산 성자 이현필의 초상 [사진=유수민 인턴기자]
 
-이현필은 굶기를 예사로 하고 극한의 고통을 감내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극단적이라는 생각이 드는 대목도 있는데요. 풍요의 삶을 사는 현대인들에게 공감을 줄 수 있을까요?

“우리가 사는 이 시대의 기준에서 판단할 것이 아니라 이현필 선생이 살던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이현필 개인의 실존적 상황을 고려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가 자기처럼 살라고 가르치거나 본을 보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1940년대 1950년대에 거의 굶주림에 시달렸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배불리 먹는다는 것이 죄의식으로 다가올 정도였습니다. 다 굶고 있는데 어찌 나만 배를 불릴 수 있느냐?
하늘나라에서는 맨 꽁무니가 꼭대기라 했습니다. 이현필은 버스나 기차를 타도 맨 마지막에 타고 밥을 먹어도 맨 마지막에 먹어야 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좋은 것은 모두 남에게 먼저 양보하고 남은 것이 있으면 그때 참여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 자세를 특히 강하게 의식하며 살았던 분이 무아(無我)를 추구했던 이공 이현필 선생이라 봅니다. 진리를 추구하는 신앙인이 자기를 이기고 도를 실천하는 길은 식색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이현필의 스승 이세종은 이런 길을 성령 충만의 가난이라 했습니다. 조선시대 서당에서 배우는 명심보감에 포난사음욕(飽暖思淫慾)이요 기한발도심(飢寒發道心)이라 했습니다. 배부르고 등 따뜻하면 음욕이 일어나고 춥고 배고플 때 구도의 마음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이긴다는 것은 결국 식욕과 성욕을 벗어나는 자기와의 싸움입니다.
이현필 선생이 6.25 피난 생활을 하는 동안 많은 분들이 희생을 치렀습니다. 미국인 유화례 선교사를 모시고 화학산에 들어가자 공산 빨치산들이 그들을 잡아내려고 혈안이었습니다. 화순 도암에서 세 분이 순교를 당했습니다. 순교자들의 희생 덕분에 살아나기는 했지만 죄의식이 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기는 누구보다 큰 죄인이라는 생각에서 회개와 기도를 하며 살았습니다. 후두 결핵으로 고생을 하면서도 약을 쓰지 않았습니다. 결핵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에게 약을 써서 다 치료해주고 자기가 마지막으로 남게 되면 그때 약을 먹고 치료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약이 아주 귀한 시절이기 때문에 그런 비싸고 귀한 약을 어떻게 차마 자기가 먼저 먹을 수 있느냐는 심정이었습니다.
쥐나 이도 죽이지 않은 것은 전통적인 불교의 불(不)살생 신앙의 영향 때문이기도 하지만 성경에도 상한 갈대도 꺾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현필이 말하길 천지는 나와 한 몸이요, 만물은 나와 한 지체라 했는데 이런 만물일체지인(萬物一體之仁)의 사랑 때문에 저절로 그렇게 한 것이라 봅니다. 요새 언어로 말하면 우주적 생명의식과 생태학적 영성이 강했던 분들이라 하겠습니다.”

다석의 육성이 남아 있는 동광원 강의

-다석은 이 세상에 나온 어떤 사상이나 주의도 미정고(未定稿)라 했는데요?

“다석은 주의(主義·이즘)를 반대하였습니다. 민주주의가 좋지만 진정한 민주주의가 되려면 주의가 없어져야 된다고 했습니다. 민주도 주의가 되면 또 다른 전제정치가 된다는 것입니다. 미정고에 불과한 그런 주의나 사상에 붙잡히면 참 진리를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존 힉이라는 분이 종교다원주의 이론을 발표했는데 거기에도 진실이 있겠지만 그것도 미정고에 불과한 것입니다. 종교간 대화로써 평화를 이루자는 취지엔 찬동하고 지지할 것입니다. 그러나 다원주의라 하여 모든 종교가 같다고 생각한다면 다석의 뜻과는 다르지 않을까 싶습니다.
다석은 ‘나는 다른 아무것도 믿지 않고 말씀만 믿는다. 여러 성현(聖賢)들이 수천 년 뒤에도 썩지 않는 말씀을 남겨 놓았는데 그걸 씹어 먹고 산다. 이렇게 말하면 종교통일론 같지만 그렇지 않다. 나는 통일은 싫다. 통일이 아니고 귀일(歸一)이라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모든 종교가 같아지는 것이 아니라 각각 고유의 개성을 가지고 발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각기 다른 개성을 가지고 인류 전체를 위해서 하나가 되어 일하자는 것이 귀일입니다. 공자가 말하길 소인은 같으면서 불화하는 사람이고 대인은 각각 다른 입장에서 화합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소인은 동이불화(同而不和), 같아져야 한다면서도 서로 다투며 화합이 되지 않습니다. 대인은 화이부동(和而不同), 서로 화합하여 하나가 되기 위해서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불교가 각기 특성을 살려 나가야지 모두가 같다고 해서 각자의 특성을 없애려 든다면 가능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결국은 생명력을 잃게 되지 않을까요?”

-심 소장은 현재(김흥호)의 제자인데요. 현재의 제자들과 박영호 선생과 그 제자들이 다석을 보는 입장이 좀 다른 것 같던데요. 다석이 기독교의 테두리 안에 있느냐, 밖에 있느냐는 관점의 차이인 것 같습니다.

“현재는 다석을 참 크리스천이라고 보는 데 비해 박영호 선생은 다석을 탈(脫)기독교 또는 기독교를 초극한 분으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박 선생은 다석이 얼나를 깨치고 솟나신 분이요, 종교다원주의의 선구자로서 유불선과 기독교를 회통하고 종교를 초월하신 분이라고 본 거지요. 특히 박 선생이 불교의 니르바나를 기독교의 하나님과 같은 분이라고 하면서 불교나 기독교나 궁극적 진리에서는 같은 것이라고 하는데 이런 주장에 동조하시는 분들도 많은 듯합니다.



광주 동광원(지금의 귀일원)에서 집회를 마치고 여성 신도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했다.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 중 가운데가 다석. [사진=동광원 제공]
다석은 20대부터 정통 기독교를 벗어나기 시작했습니다. 20세기 초에 세계적으로 유명했던 톨스토이와 간디의 영향을 받아서 다석은 그동안 진리로 믿었던 기독교 교리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성경과 함께 불경이나 유교의 사서삼경을 보며 자득(自得)한 것을 YMCA 연경반에 나가서 가르쳤습니다. 그러다가 52세에 성령을 체험하고 ‘부르신 지 38년 만에 믿음에 들어감’이라는 글을 김교신이 발행하는 <성서조선>에 발표했습니다. 이 글에서 다석은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 할 때 노자의 몸도 아니고 석가의 맘도 아니고 공자의 집도 아니고 예수의 인자라고 하였습니다. 이때 다석이 말하는 새로운 믿음에 들어감이란 의미가 무엇일까요? 52세 때인 이 당시의 믿음은 기독교 믿음이지 유교나 불교의 믿음이라 할 수는 없겠지요? 그렇다고 또 다석이 정통 기독교로 돌아갔다는 의미도 아니지요.
무엇보다 다석이 82세에 동광원에서 마지막 강의를 했는데 그 말씀을 들어보면 다석은 여전히 하나님 아버지를 믿고 예수의 정신으로 사는 참 크리스천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다석의 동광원 마지막 강의가 다석을 연구하는 자에게 가장 중요한 자료라고 생각합니다.
무교회자로 알려진 일본의 우치무라와 한국의 김교신 선생은 제도적인 교회를 거부하고 본래의 교회를 회복하자는 분들이지요. 다석은 김교신 선생과 서로 존경하는 사이였습니다. 그러나 신앙 기조는 조금 달랐습니다. 같은 크리스천이지만 김교신은 바울 사상에 기초한 정통교리를 받아들인 분이고 다석은 바울 사상을 벗어난 분이었습니다. 나는 다석을 새로운 기독교 영성을 보여 주신 종교 개혁자, 또는 종교 혁명가로 봅니다. 기독교 탈출자나 초극자(超克者)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미리 보낸 질문에 대한 서면 답변인데 상당히 길어서 분량을 줄여 싣는다. 기독교 신앙인으로서 다석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다석이 크리스천이라고 하는 관점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박영호 선생과 그 제자들로서는 다석이 기독교라는 한 종파의 교리를 넘어섰다고 하는 관점도 양보하기 어려울 것이다.

-현재가 이화여대에서 다석 연경반을 꾸릴 때는 150~200명씩 모였다고 들었다는데요. 현재가 돌아가시고 이명섭 전 성균관대 교수가 3년 정도 끌고가다가 해체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모임이 왜 오래 지속하지 못했습니까?

“이명섭 선생이 용인에서 오기 때문에 매주 참석하시기엔 너무 거리가 멀었습니다. 사모님이 운전을 하고 모셔왔는데 사모님이 아프면서 지속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화대학 교회에서 담임 목사님 중심으로 연경반을 이어가는 것이 바람직했겠지요. 현동완 총무가 세상을 떠나자 다석이 하던 YMCA 연경반도 그만두게 되었는데 새로 부임한 총무가 다석의 연경반을 달가워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기존 교회나 교단에서 신학을 한 목사들이 다석이나 현재의 사상과 신앙을 용납하기에는 아직 때가 일렀던 거지요.”

뜻 모르고 주르륵 외는 것은 기복신앙

-다석은 사도신경에 대해 “더덕더덕 다 주워 모은 것이지 생명이 통하지 않는다. 요긴한 게 아니다”라는 비판적인 말을 했는데요.

“이 부분은 <한나신 아들 예수> 동광원 마지막 강의에 비교적 잘 나와 있습니다. 더덕더덕 주워 모은 것으로 생명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생명이 통하지 않는 그런 글을 무슨 신조라고 조르르 욀 필요가 무엇이냐는 것이지요. 불교에서도 신자들이 염불한다고 뜻도 모르고 그저 경을 읽거나 외기만 하면 부처님이 병도 물리치고 여러 액운을 벗겨주신다고 믿는 것은 기복신앙이 될 수 있지요. 사도신경도 그렇게 생명 없이 조르르 욀 필요가 없다고 한 것이지 그 내용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라 했습니다. 아무리 외워봐도 생명이 통하지 않는데 왜 이런 것을 형식적으로 굳이 할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지요. 사도신경이 12 사도가 한마디씩 한 것을 모아놓았다는 전설이 있는데 아마 그것 때문에 주섬주섬 모아놓은 것이라 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심 소장은 주역에 조예가 깊다고 들었습니다. 다석은 모든 동양 고전에 밝았지만 주역에도 일가견이 있었다고 하지요. 보통 사람들은 주역 하면 점치는 책으로 인식하는데요.

“유교 삼경에 서경 시경 역경이 있습니다. 현대식으로 서경은 역사, 시경은 문학, 주역은 철학이라고 보아도 될 것입니다. 주역에는 우주관과 세계관과 인생관이 들어있습니다. 주역은 이진법 수리철학이라 하겠습니다. 두 기호를 사용하여 이진법을 쓰게 되면 3자리 수는 8, 6자리 수는 64가 됩니다. 인생과 자연과 우주의 요소를 8가지로 구분하고 인생과 자연과 역사에서 일어나는 모든 상황을 64가지로 범주화해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8가지 요소들이 서로 부딪혀 일어나는 64가지 상황 속에서 나는 지금 어떤 상황에 있고 그 상황 안에서 어떤 자리에 있느냐 하는 것을 밝혀보자는 것입니다. 같은 상황이라 해도 그 자리는 또한 6개로 구분되어 있으니까 64 곱하기 6 하면 384가지의 경우가 나옵니다. 인생과 역사 사회의 모든 문제를 64개의 상황과 384가지 처지로 구별하여 설명하는 체계입니다.

하늘의 빛과 땅의 힘과 사람의 숨이 하나가 되는 것, 그것이 주역의 길입니다. 시간과 공간과 인간이 합쳐져 6차원의 세계를 펼쳐가는 것입니다. 주역에 관하여 유명한 말이 무극이 태극(無極而太極), 태극생양의(太極生兩儀)입니다. 그러니까 무극( ○ ) 태극 ( · ) 음양(∽), 이 셋이 핵심 개념인데 음양은 4상 8괘 64괘로 무한히 발전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 태극도(太極圖)입니다. 생명(○)과 진리(․)와 도道(∽)를 그린 것입니다. 주역은 복희伏羲)의 체험과 문왕(文王)의 표현과 공자(孔子)의 해석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공자의 해석을 깊이 생각하고 문왕의 표현을 삶으로 실천해가다가 종당에 복희의 근본체험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빛과 힘과 숨을 통하여 일체지인(一体之仁)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역경(易經)을 통해서 지천명(知天命)하고, 이순(耳順)하고,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欲不踰矩)함으로 나 자신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역경은 점치는 책이 아닙니다. 우주의 원리와 인생의 윤리를 알려주는 책이지 점치는 책이 아닙니다. 역경은 한마디로 궁신지화(窮神知化) 성덕야(盛德也), 절대자에 부딪쳐서 나 자신이 변화되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길을 알려주는 책이라 하겠습니다.”



벅제 동광원에서 이현필 기념관이 완공을 앞두고 있다. [사진=유수민 인턴기자]

1964년 이현필 선생은 광주에서 아픈 몸을 이끌고 벽제에 와서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현동완 총무의 기도처가 있는 계명산 골짜기의 모임에 다석은 자주 참석했다. 이현필 선생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전하자 다석은 무릎을 탁 치시며 “아, 시원히 잘 가셨소!” 했다고 한다. 다석은 계명산을 찾아올 때마다 “이 선생~ ! 이 선생 ~” 하고 살아있는 사람처럼 불렀다고 심 소장은 전했다.
이현필은 죽기 직전에 “나는 죄인이니까 거적에 싸서 그냥 아무나 밟고 다니는 길에 묻어라. 봉분을 만들지 말고 평토장(平土葬)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현필의 스승인 이세종도 산골에서 숨을 거두며 관, 수의, 비, 묘를 만들지 말라고 했다. 그래서 이공의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게 되었다. 제자인 이현필 선생도 세상을 떠나며 수의나 관을 쓰지 말고 길가에 묻으라고 유언했다. 그러나 제자들은 관을 구해서 가까운 산 언덕에 무덤을 썼다. 1990년대 말에 동광원 출신으로 아프리카 선교사를 갔던 박찬섭 목사가 이현필 선생의 무덤을 찾느라 몇 시간을 헤맸다. 스승의 무덤을 어렵게 찾아낸 박 목사는 ‘성인의 무덤을 이렇게 방치해서 되겠느냐’고 주위를 설득해 봉분을 만들고 묘비를 세웠다. 묘비의 글은 엄두섭 목사가 짓고, 묘비엔 현재의 붓글씨를 새겼다.
벽제 동광원에서 이현필 기념관이 완공 단계에 접어들었다. 동광원에서 이현필과 다석의 가르침을 받은 임락경 목사가 한옥으로 짓자고 발의해 이현필은 세상을 떠난 뒤에야 근사한 집을 갖게 됐다.

-수도권에 있는 벽제 동광원에서 수녀들이 밭농사 짓는 것도 좋지만 젊은이들이 찾아와 다석과 이현필의 정신을 잇는 영성공동체로 활성화하는 방안을 세웠으면 좋겠다는 의견도 있던데요.

“좋은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평신도 중심의 동광원 영성공동체가 활성화할 때 교회가 새로워질 것이며 신학이 달라질 것입니다. 우리 사회를 새롭게 갱신하는 교회가 되어야 생명력이 있지, 그렇지 못하면 저주받은 무화과나무처럼 말라버릴 것입니다. 다석과 이공의 귀일신앙으로 평신도 영성공동체가 활성화하면 교회가 달라질 것이고 갱신된 교회라야 사회에 새 물결을 일으킬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시대의 과제는 양극화와 생태계 및 환경파괴, 그리고 가치관 혼돈이라 하겠습니다. 이런 시대적 과제를 풀어낼 수 있는 새로운 한국 사상과 영성이 다석과 동광원에서 이미 시작되었다고 봅니다.”

벽제 동광원에서 인터뷰를 마치고 언님들이 차려준 점심을 먹었다. 계명산의 쑥과 찹쌀로 빚은 쑥개떡이 별미였다. 김치와 깍두기도 농약을 뿌리지 않은 유기농 채소에 젓갈을 쓰지 않아 맛이 담백했다. 점심 후에는 현동완 총무의 기도처와 이현필 선생의 묘소, 기념관을 둘러보고 계명산을 떠났다. (인터뷰어=황호택 논설고문·정리=이주영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