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교사연구의어제와 오늘
李萬烈 * * 숙명여자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
Ⅰ. 머리말 3. 기독교사 연구의 확산
Ⅱ. 선교사들의 한국 및 한국교회사 Ⅳ. 해방 후 한국기독교사
연구 연구의 진행과정
1. 선교사들의 한국문화 연구 1. 한국기독교 通史의 출현
2. 선교사들의 傳記 - 해방에서 1960년대까지
3. 선교사들의 한국교회사 2. 역사신학의 한 분야로서의
연구 한국기독교사 - 1970년대
Ⅲ. 일제강점기의 한국교회사 3. 교회사와 국사학의 만남
연구 - 1980년대 이후
1. 한국기독교사 연구의 출발 Ⅳ. 맺는 말 - 한국기독교사
2. 백낙준의 ‘한국개신교사’ 연구1) 연구의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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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머리말
기독교가 한국에 수용된 지 한 세기가 넘었다. 그 동안 한국기독교는 자 기 정체성을 정립하는 데에 노력해 왔다. 자기 정체성은 주로 두 가지 측면 에서 이뤄진다. 하나는 기독교가 갖는 핵심적인 진리에 얼마나 접근하고 충 실하려 하는가에 있다. 이 점은 세계 기독교가 갖는 공통의 과제로 자기 정체성의 보편적인 기반을 의미한다. 또 하나는 한국기독교만이 갖는 개성으 로서 이것을 성숙시키는 정도에 따라 자기 정체성의 위상이 결정된다. 보편적인 기반 위에서 정립되어야 할 한국기독교이지만, 한국기독교만이 갖고 있는 정체성의 또 하나의 축인 개성은 무엇보다 자기 전통과의 접목을 통해 형성된다. 한국기독교사는 그러니까 보편적인 기독교가 한국의 전통과 의 만남을 통해 형성된 한국기독교의 정체성을 역사적으로 천착하는 과정이
다.
한국기독교사 연구는 선교사들의 것도 있지만, 1920년대 백낙준의 The History of Protestant Missionsin Korea,1832~1910에서부터 시작 된다고 할 수 있다. 백낙준의 연구에서는 기독교의 복음이 선교사를 통해 이 땅에 전해지고 정착하는 과정이 그려졌던 것이다. 1930년대 선교 희년을 맞아 역사의식이 고양되는 듯했으나 식민지적 상황은 이를 한계 이상으로 용납하지 않았다.
해방은 기독교적 전통을 찾는 데에도 절호의 기회였으나, 신사참배로 얼 룩진 한국기독교계는 오히려 분열과 쟁투로 허송하였다. 역사는 오히려 자 기의 과거를 들쳐주는 거추장스러운 어떤 존재로 인식하였다. 그런 속에서 도 해방 이후의 역사를 정리하려는 노력이 기울여진 것은 다행스러운 현상 이었다. 시대사 및 특수사(분류사)의 인식 단계에서 한국기독교사를 通貫해 서 파악하려는 단계로 진입하는 것은 4.19 후였다. 4.19는 의식을 새롭게 깨우는 사건이었던 것이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역사를 총체적으로 인 식하려는 작업이 주어진 것은 이 때문이다.
1980년대 ‘선교 100주년’을 맞는 의식은 한국기독교사 연구에 새로운 분 위기를 마련하였다. 개교회사와 교단사가 준비되었고, 한국기독교 100년사 를 써야 한다는 논의가 비등하였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한국기독교사연 구회’가 조직되었고, 연구 세대와 방법 등 연구 환경이 많이 바뀌게 되었다. 한국 기독교사 연구의 단계를 끌어올린 환경의 변화는 대략 다음과 같다. 첫째, 한국기독교사 연구는 그 동안 신학을 전공한 학자들에 의해서 연구 되어 왔는데, 이 무렵에 와서 역사학을 전공한 학자들이 참여, 국사학의 한 영역으로 접목되었다. 둘째, 한국기독교사 연구가 개인적인 연구에서 공동 연구나 학회 수준의 연구로 상승하게 되었다. 이 말은 개인적인 연구가 공 동 연구보다 연구의 질이 부실하다거나 반대로 공동 연구가 연구의 질을 담 보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셋째, 한국기독교사 연구의 자료가, 뒤에서 언급된 백낙준의 연구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국내 자료에 한정되어 있었고 그 한계를 거의 벗어나지 못했는데 이제는 그것을 넘어설 수 있게 되었다. 자료 수집이 부진했던 이유는 자료 수집을 위한 경제적인 여건이나 해외여행의 자유가 제약당하고 있었던 상황과 관련시킬 수 있다. 그러나 그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연구 방법상의 문제와 깊이 관련되어 있었다. 한국 기독교사가 신학의 영역에서 다루어지는 것과 역사학의 영역에서 다뤄지는 것에는 사료 활용상에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또 공동연구는 그 속성상 사료의 발굴에 더욱 깊은 관심을 갖게 된다.
이 글은 한국기독교사 연구의 역사를 정리하려는 것이다. 그 동안 한국기 독교사 연구의 진행과정과 문제점과 과제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선각자들이 논구한 바가 있다.1) 그들의 이 분야에 대한 문제의식이나 주제가 이 글이 뜻하는 바와 다를 바가 없다. 다만 이 글에서는 범위를 조금 넓혀 선교사들 의 업적도 한국기독교사 연구의 범주에 넣어보려고 하였다. 한국인들의 것 은 크게 해방 전과 해방 후로 나누되 거기서도 시기상의 특징을 고려, 세분 하였다.
1) 한국기독교사 연구의 방법론이나 사관, 반성과 과제 등에 관해서는 다음의 글이 참고된다. 洪以燮, 한국기독교연구소사 (白樂濬博士 還甲紀念 國學論叢, 1955).
―――, 한국기독교사 연구 개황 (신학논단 7, 1962년 10월). 金得龍, 韓國基督敎史 硏究上 惹起되는 問題 (로고스 19호, 1967). 洪以燮, 韓國基督敎史硏究小史 (韓國史의 方法, 탐구당, 1968). 李章植, 韓國敎會史 編纂構想에 대한 提言 (基督敎思想, 1964년 6월호). 朱在鏞, 한국 교회 100년과 그 과제 (기독교사상, 1981년 2월호). 閔庚培, 한국 교회사에 있어서 ‘민족’의 문제 (기독교사상, 1981년 4월호). 이상규, 韓國 基督敎會史 硏究의 現況과 課題 (高神大學 論文集 10集, 1982). 金英才, 韓國敎會史 硏究 方法論 (神學指南 199호, 1983년 가을).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머리글 (한국기독교의 역사 I, 기독교문사, 1989). 金英才, 한국 교회사 연구 방법론 (한국교회사, 개혁주의신행협회, 1992). 閔庚培, 한국 교회사의 제문제 (한국기독교회사 신개정판, 연세대출판부, 1993). 이덕주, 한국교회사 연구 흐름과 최근 경향 (감신대학보, 1993년 10월 14일자). 신광철, 한국개신교사 연구사 (종교와 문화 제2호, 서울대 종교문제연구소, 1996).
연구사 정리란 으레 선학의 업적을 평가하는 성격을 띄고 있다. 글의 성 격상 이 점은 어쩔 수 없다. 때문에 학문적 양심과 객관적 평가는 이런 글 의 생명이다. 그 점을 깊이 의식하였으나 褒와 貶, 添과 削을 공평하게 취했 는가는 의문이다. 그러나 비판보다는 격려에 유의하려고 한 것은 분명하다. 同學諸賢의 叱正을 기대한다.
Ⅱ. 선교사들의 한국 및 한국교회사 연구2)
한국기독교사의 연구는 처음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의 한국 연구와 함께 이뤄졌다. 선교사들의 한국 연구는 그들이 한국 선교에 종사하면서 이룩한 것으로 그같은 관심이 결국에는 한국기독교와 기독교사에 대한 관심으로 연 결될 수 있었다. 한국기독교사에 대한 연구는 초기에는 한국인들 못지 않게 선교사들에 의해 이뤄졌다. 한국인들에 의한 한국기독교사 연구의 전개과정 을 살피기 전에 그들의 한국 및 한국기독교에 대한 관심과 연구를 살펴보려 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할 것이다. 이 장에서는 주로 1930년대까지 의 선교사들의 연구를 중심으로 간단히 살펴보겠다.
이덕주, 신학연구의 다양성-성공하는 토착화 신학(해방후 50년 한국종교 연 구사, 한국종교학회 편, 도서출판 窓, 1997).
2) 선교사들의 한국 연구는 대단히 중요한 분야이지만, 아직도 본격적인 연구가 이 뤄지지 않은 상태다. 선교사들의 이 방면에 관한 업적은 H. H. Underwood가
1931년에 간행한 BiographyonKorea(이 책은 1930년에 같은 저자에 의해 OccidentalLiteratureonKorea 라는 제목으로 간행되었다)에 그 때까지의 업적이 거의 소개되어 있어서 연구자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
1. 선교사들의 한국 문화 연구
개항을 전후하여 외국인들은 한국에 관한 정보를 얻기 위하여 한국에 관 한 역사와 관찰을 남겼다. 1879년에 스코틀랜드 선교사 로스(John Ross, 羅約翰)는 HistoryofCorea,AncientandModern을 썼는데, 이는 한 국 선교에 관한 역사적인 정보를 얻기 위한 것이었다. 1882년 한미수호조약 을 앞두고 미국에서는 한국에 관한 소개서가 나왔다. 그리피스(Wm. E.Griffis)의 Corea,theHermitNation이 그것이다. 이 책은 1911년까지 9판이나 거듭 출판되어 미국인들의 한국 인식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이다. 이 책의 저자인 그리피스는 처음 교육자로서 일본에 와서 동경대학을 설립하는 데에 공헌한 분으로 당시 한번도 한국을 다녀가지 않은 상태에서 그같은 한 국관계 저서를 남겼다. 뒷날 그는 목사 안수를 받고 선교사로서도 활동하였 기 때문에 그의 저서 또한 선교사의 한국 인식으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로스와 그리피스의 저서는 당시 선교사들에게 한국을 이해시키는 데 에 크게 공헌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의 한국 연구는 그 뒤 많이 나타나게 되었다. 선 교사들의 한국 연구는 선교적인 필요성과 개인적인 취향에 의해 이루어졌 다. 이들 업적 가운데는 뒷날 한국학 연구에 큰 영향을 끼친 것도 없지 않다.
선교사들의 한국 연구는 여러 분야에 걸쳐 있었다. 그들이 한국에 관해
남긴 저술들을 간단하게 열거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우선 초기에 왔던 선교사들은 한국 언어와 문자에 관한 소개서를 남겼다. 로스(J. Ross, 羅約翰)가 Korean Primer(1877)를 통해 영어로 처음 한 국어를 소개하였는데, 이 책은 한국어의 기본문장 얼마를 골라 한글로 쓰고 거기에 대한 발음을 영어로 그 밑에 쓰고 그 뜻을 풀이한 것이다. 여기에 사용된 언어는 거의 서북지방의 어투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어서 로스에게 한국어를 소개한 사람이 평안도 사람임을 알 수 있다. 1885년 4월 5일에 입국했던 언더우드(H. G. Underwood, 元斗尤)는 한영자전 (Korean-English Dictionary, Yokohama, 1890)과 English-Korean Dictionary (Yokohama, 1890) 및 Introduction to the Korean Spoken Language (Yokohama, 1890) 등 한국어 사전과 한국어 소개서를 남겼다. 게일(J. S. Gale, 奇一)이 辭課指南을 펴냈고 Korean Grammatical Forms (Seoul, 1893)와 한영대자전(A Korean English Dictionary, Yokohama, 1897)을 남겼는데 이것은 그 뒤 서양인들이 한국어를 공부하는 데에 큰 도 움이 되었다. ) 그는 존 번연의 The Pilgrim's Progress를 天路歷程으 로 번역하여 출판하였을 뿐 아니라, 金萬重의 九雲夢을 영어로 번역하여
The Cloud Dream of the Nine (London, 1922)라는 제목으로 간행하 였다. 베어드 부인(Annie L.A.Baird, 安愛理)은 Fifty Helps for the Beginner in the Use of the Korean Language(Seoul, 1897)를 써서 한국에 입국하는 외국인들의 한국어 습득에 도움을 주었고, 그의 남편 베어 드(Wm. M. Baird, 裵偉良)도 An English-Korean and KoreanEnglish Dictionary of Parliamentary, Ecclesiastical and Some Other Terms (Seoul, 1928)를 저술하는 한편 한국어 및 한국문자에 대 한 논설도 써서 이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여주었다.4) 이러한 사전과 어학서 들은 한국에 처음 오는 선교사들과 외국인들을 위한 한국어 안내서로서 큰 도움이 되었다.
선교사들은 한국에서 활동하는 동안 자신의 경험담을 틈틈이 남기면서 한 국의 전통과 문화를 소개하는 서책도 간행하였다. 의료선교사로 처음 내한 하였으나 뒷날 외교관으로 더 오랫동안 활동한 알렌(H. N. Allen, 安連)은 한국에서의 생활을 통해 KoreanTales(1886), Korea,FactandFancy (Seoul, 1904), ChronologicalIndex(Seoul, 1901), ThingsKorean (New York, 1908) 등을 남겼는데, 특히 ThingsKorean은 알렌이 선교 사와 외교관으로서 한국에 머무르는 중에 보았던 한국의 풍물과 일화 등을 그린 것으로, 비교적 먼저 입국하여 자신이 목격한 바를 통해 한국을 해외 에 소개하는 데에 일정하게 기여하였다. 언더우드는 The Call of Korea(New York, 1908) )와 TheReligionsofEasternAsia(New York, 1910)를 남겼는데, 특히 TheCallofKorea는 자신의 초기의 선교 경험담을 기록한 것으로서 초기 한국 기독교사의 연구에도 많은 도움이 된 다. 언더우드는 그 밖에도 각종 잡지에 한국과 한국의 선교를 소개하는 글 을 많이 기고하였는데, 그 중 선교 보고서 형식의 글들은 당시의 선교사를 이해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된다. ) 그러나 초기 선교사 중에서 마펫(S. A. Moffett, 馬布三悅)은 한국에 관해 공개적으로 글을 발표한 것은 거의 보이 지 않는다. 그가 발표한 글은 주로 복음 선교사로서 한국의 복음화에 관한 것들만 보이고 있다.
클라크(C. A. Clark, 郭安連)는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로서 1902년에 내 한하여 초기에는 서울에서 활동하면서 승동교회당을 건축하는 등 선교와 목 회 및 문필 활동에 주력하였다. ) 클라크의 강연 원고 중에서 한국의 고대 종교에 관해 발표한 것이 있는데, 이는 그의 사후에 ReligionsofOld Korea (Seoul, 1961)로 출판되었다. 이 책은 1921년 프린스턴신학교의 선교학으로서 처음 강의한 것이며, 1929년에 다시 피츠버그의 웨스턴신학교 와 연합장로회신학교에서 강의하면서 보완되었고, 그 뒤 시카고의 장로회신 학교와 뉴욕의 어번(Auburn)신학교에서도 강의한 것이라고 밝혔다.8) 그는 이 책에서 한국의 ‘고대 종교’인 불교와 유교, 도교를 비롯하여 모하메드교와 일본 신도, 보천교, 단군교, 천도교 및 샤머니즘을 다루었으며, 기독교의 한 국 접촉도 다루었다. 그는 이 책 제 7장을 ‘고대 조선과 기독교의 첫 접촉’ 으로 설정하고 고대에서 천주교의 박해까지 다루고 있다. 그는 기독교와의 첫 접촉을 삼국시대에 한국에 전래된 불교와의 관련에서 찾으려고 노력한 고든(E. A. Gordon)의 관점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특히 고구려에 처음 불 교가 들어왔을 때 세워진 두 사찰 중 이불란(伊弗蘭, Ibullam)이라는 이름 은 외국어에서 음역(transliteration)된 말로서 그 뜻을 알 수 없고, 성경 의 요셉의 아들 에브라임(Ephraim)이 중국문자로 그렇게 표기되었을 것이 라는 점을 들어 기독교와의 연관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고 지적하였다.9) 미국계가 대부분인 초기 선교사 중에는 영국계 출신으로 캐나다 토론토대 학 기독교청년회의 파송을 받아 내한한 게일이 있는데, 그는 문필 활동을 통하여 한국 선교에 특이한 업적을 남겼다. 그는 특히 한국의 언어를 연구 하고 문학작품을 번역하였으며 한국의 전통과 역사를 연구하는 일에도 앞장 섰던 분이다. 그는 내한한 지 10여 년 만에 한국을 보는 신선한 감각으로 19세기말의 한국 상황을 비교적 솔직하게 그려 놓고 있는데 KoreanSketches (New York, 1898)가 바로 그것이다. 그가 쓴 TheVanguard (New York, 1904)는 일종의 선교 소설로서 한국교회 초기의 장로의 한 사람이었던 고 찬익의 개종 실화를 비롯하여 한국 북부지방 선교의 이면사를 그린 것으로 선교 초기의 역사를 소설적인 상상력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하였다.10) 그는 또 짧은 글이긴 하지만 1907년 한국 장로교회에서 처음으로 노회(老會)가 조직되었을 때에 한국의 첫 노회 (First Presbytery in Korea)라는 기독
8) C. A. Clark, ReligionsofOldKorea, p.5.
9) ibid.
10) 이 책은 심현녀가 선구자-한국 초대교인들의 이야기(대한기독교서회, 1993) 라는 제목으로 변역, 출판하였다.
교사 관계 논문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 그가 쓴 KoreainTransition (New York, 1909)은 제목 그대로 20세기 초 전환기의 한국을 그린 것이 지만, 거기에도 그의 선교 활동과 선교 초기의 모습을 나름대로 그려 놓고 있다. 그가 남긴 한국의 전통과 역사 관계 저술은 KoreanFolk-Tales
(translated from the Korean of Im Bang and Yi Ryuk, London,
1913), KoreanLiterature(Chicago, 1918), TheHistoryoftheKorean
People(Seoul, 1931) 등이 있다. 그 밖에 게일은 선교 잡지 등에 한국의 언어 문자 등 한국의 문화와 관련된 글을 많이 기고하였다.12)
게일 못지 않게 한국의 문화를 사랑하고 소개한 선교사로서 존스(G. H.
Jones, 趙元時)와 헐버트(H. B. Hulbert, 訖法)가 있다. 존스는 감리교 선교사로서 비교적 한국 문화에 관하여 폭넒은 이해를 시도하였다. 그는 An
English-Korean Dictionary(Tokyo, 1913)를 간행하였을 뿐만 아니라 한국어 한국문자 및 한국 문화 전반에 걸쳐 폭넓은 이해를 시도하고 있었 다. ) 헐버트는 처음에 미국에서 신학교를 졸업한 후 育英公院의 교사로 왔 다가 뒷날 다시 감리교회의 선교사로 내한하였다.14) 그가 문필활동을 통해 일본의 침략 야욕을 공격하는 한편 국제사회에 대하여도 한국이 자주독립해 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랬던 만큼 그는 언어를 비롯한 한국의 문화와 역사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저술활동을 하였다. 그는 한국어 및 한국 문자에 관하여 깊은 관심15)을 보였을 뿐 아니라 한국사에 관해서는 TheHistoryofKorea(Seoul, 1905), ThePassingofKorea (London, 1906) 등의 저술을 간행하였는데, ThePassingofKorea는 그가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을 당시인 대한제국 종말의 역사를 서술하였다는 점에서 주목을 끌었다. 이 밖에도 헐버트는 한국의 문화와 전통에 관해서도 소개하는 글을 남겼다.16)
초기에 한국에 선교사로 왔던 분들이 한국 사회와 한국 선교에 관해 남긴 글들은 이 밖에도 많이 있어서17) 당시 한국(교회)의 상황을 알게 하는 데에 크게 도움이 된다. 또 한국에 오지는 않았으나 선교본부 등에 재직하면서 한국의 선교와 정치 상황 등에 관해 남긴 글들도 많은데, 이 또한 당시의 상황을 일정하게 설명해 주고 있다.18)
14) 헐버트에 관해서는 윤경로의 헐버트의 한국에서의 활동과 한국관(한국근대사 의 기독교사적 이해, 역민사, 1992) 참조.
15) 헐버트가 한국어 및 한국문자에 관해 쓴 글들은 The Korean Alphabet
(1892, 1896)를 비롯하여 Romanization Again (1895), The Itu (1898), The Korean Language (1903), A Comparative Grammer of the Korean Language and the Dravidian Dialects of India (1906) 등이 있 다.
16) 그가 잡지 등에 기고한 한국에 관련된 글 중 앞에서 언급한 한국어 및 한국의 역사와 관련된 것들을 제외하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Korean
Poetry(1896), Korean Proverbs(1896), An Ancient Gazetteer of Korean (Yo-ji Song-Nam)(1897), A Vagary of Fortune, A Korean Romance (1901), Korean Folk-Tales(1902), Omjee the Wizard(1925), Korean Reforms(1895), The Mongols in Korea(1898), The Enfranchi -sement of Korea(1898), Korea, The Bone of Eastern Contention (1904), Japan's Object Lesson in Korea(1908), Japan and Isothermal Empire(1916), Japan in Korea(1920), Korea(1899), Korea and its People(1899), Origin of the Korean People(1895), The Rise of the Yangban(1895), National Examination in Korea(1923), The Geomancer (1896), Russo-Japanese War and Christian Missions in the East (1904), Japanese and Missionaries in Korea(1908), Korean Inventions (1899), Korea's Opening by Rail(1904), Korean Art(1897), Korean Vocal Music(1896), The Face in the Mist(1926).
2. 선교사들의 傳記
20세기에 들어설 즈음이 되면 한국에 왔던 1대 선교사들 중에는 유명을 달리하는 분들이 있었다. 유족들이나 선교회에서는 그들의 전기를 펴내기도 하였다. 이 전기들은 전기 주인공들의 활동을 통해 한국의 상황과 그들 선 교의 모습을 드러내주면서 선교의 역사를 증언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선교사들의 전기는 선교 본국의 입장에서 전해주는 한국 교회사의 증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전기들 중 먼저 꼽을 수 있는 것이 TheLifeofRev.William
JamesHallM.D.(New York, 1897)19)인데, 그의 부인 R. S. Hall이
17) Jean Perry의 UncleMactheMissionaryorMoreNewsfromKorea와 TheManinGreyorMoreaboutKorea,C.A.Clark의FirstFruits inKorea(1921), G. T. B. Davis의 KoreaforChrist(1910), Lois H.
Swinehart의 KoreaCalls!(1924), W. G. Gram의 KoreatheMiracleof
ModernMissions(1922), F. S. Miller의 OurKoreanFriends(1935), Daniel L. Gifford의 EveryDay Life inKorea(1898)와 A forward MissionMovementinNorthKorea 등.
18) 대표적인 것으로 W. E. Griffis의 Corea the Hermit Nation(1885),
Robert E. Speer의 MissionsandModernHistory:Reportonthe
MissionsinKoreaofthePresbyterianBoardofForeignMissions (1897), G. T. Ladd의 InKoreawithMarquisIto(1908), A. J. Brown 의 ReportofaVisitationoftheKoreaMissionofthePresbyterian BoardofForeignMissions(1902)와 MasteryoftheFarEast(1919) 등 이 있다.
19) 이 책은 玄鍾書에 의해 한국에서 최초로 순직한 선교사 닥터 윌리암 제임스 홀(도서출판 에이멘, 1994)로 번역되어 간행되었다. 참고로 윌리암 제임스 홀 의 아들 셔우드 홀이 쓴 WithStethoscope in Asia: Korea(McLean, 1978)는 金東悅이 닥터 홀의 조선회상(동아일보사, 1984)으로 번역하여 출판
편집한 것이다. 홀(W. J. Hall, 許乙, 賀樂)은 원래 캐나다인이었지만, 뉴 욕 빈민가에서 활동하면서 로제타를 만나 약혼하고 그녀를 뒤따라 1891년 미감리회 의료선교사로 내한, 평양에서 개척선교사로 활동하다가 과로로 1894년에 돌아갔다. 홀에 관한 영문판 전기가 출판되던 해에 한국에서는 이 를 부분적으로 발췌, 번역하여20) 국문 허을의원젹, 賀樂醫員史蹟으로 간행하였다. 이 책에는 그의 생애를 서술하면서 그가 남긴 편지나 글들도 상당히 모아 간간이 첨부하였다. 이 책의 뒷부분에는 홀과 관련을 맺었던 당시 생존 인사들의 홀에 관련된 증언을 남겨 놓고 있어서 교회사 연구에 큰 도움이 된다.21)
캐나다인으로 1893년에 교단의 협력을 받지 못하고 독립선교사로 내한했 던 매켄지(W. J. McKenzie, 梅見施, 金世)에 관한 전기로서 ACornofWheat ortheLifeoftheRev.W.J.McKenzieofKorea(Toronto, 1903) 가 있다. 매켄지는 소래교회에서 활동하면서 동학군이 소래로 진군한다는 소문을 듣고 자기가 가졌던 총들을 부셔버렸고, 관군이 동학군을 찾아 처단 하려고 했을 때에는 그들에게 피신처를 제공한 선교사이기도 하다. 이 전기 는 그가 한국에서 고독하게 돌아간 후에, 캐나다장로회 소속 선교사로 와서 원산에서 평생 독신으로 선교활동에 종사한 그의 약혼녀 맥컬리(E. A. McCully, 李愛理施)가 쓴 것이다.
내한 선교사 중 가장 먼저 왔던 복음선교 활동을 전개한 선교사는 아펜젤 러와 언더우드인데, 이들이 1902년과 1916년에 각각 돌아가게 되자 그들의 전기가 편찬되었다. 아펜젤러의 전기 AModernPioneerinKorea, The LifeStoryofHenryG.Appenzeller(New York, 1912)22)는 일본에 와서 하였다.
20) 이성삼, 賀樂醫員史蹟 해제 , 賀樂醫員史蹟(홀 연구회 편, 1992).
21) 여기에는 노블, 마펫, 존스, 올링거, 노병선, 김창식, 오석형 등의 편지들이 보 인다.
22) 이 책은 한국에서 그의 내한 100주년을 맞아 필자가 번역하여 그의 자료와 함께 한국에 온 첫 선교사, 아펜젤러(1985, 연세대 출판부)라는 제목으로 펴냈다.
교육선교사로 활동하면서 Corea,theHermitNation(1882)을 출판하는 등 한국에 관한 많은 저술을 남긴 그리피스(Wm. E. Griffis)가 쓴 것이다. 이 전기 집필을 위한 자료는 아펜젤러의 부인이 수집하였고, 그 일부가 뉴 욕 유니언신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언더우드의 전기 UnderwoodofKorea (New York, 1918)23)는 그의 부 인 언더우드 여사가 집필한 것이다. 언더우드 여사는 미국 북장로회 의료선 교사로 내한하여 8세나 연하인 언더우드(元杜尤)와 1889년에 결혼하였고 궁중의 전의로도 활동하였다. 그녀는 문필에도 능하여 한국의 풍물과 선교 상황에 관해서도 많은 글을 남겼다.24) 언더우드가 돌아간 후 그에 관한 行狀류의 글은 게일(奇一) 등 여러 사람들에 의해 쓰여졌는데,25) 이 중 백낙 준이 쓴 元杜尤博士 小傳은 1934년에 대한예수교장로회 전래 50주년을 맞아 간행한 것을 1959년에는 연세대학교가 ‘창립’됨에 그 설립자인 언더우 드의 출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뜻에서 재간행하였다.
해방 전에 간행된, 전기적인 성격을 띤 연구서로서 Fred H. Harrington 의 God,Mammon,andtheJapanese:Dr.HoraceN.AllenandKorean -AmericanRelations1884~190626)(Madison, 1944)이 있다. 부제에 서 붙여 놓은 바와 같이, 이 책은 초기에 미 북장로회 의료선교사로 왔던 알렌의 생애를 전반적으로 취급한 것이다. 해링턴은 알렌 문서와 미국 외교
23) 이 책은 필자에 의해, 언더우드, 한국에 온 첫 선교사(기독교문사, 1990)라는 이름으로 번역, 출판되었다.
24) 그 대표적인 것으로 FifteenYearsamongtheTop-Knots(New York, American Tract Society, 1904)와 WithTommyTomkinsinKorea(New York, Fleming H. Revell Co., 1905) 등이 있으며, 그 밖에도 많은 글들이 있다. 한편 그녀의 생애에 관해서는 그의 자매인 Leonora Horton Egan이 쓰 고 그녀의 증손부(曾孫婦)인 Nancy K. Underwood(H. H. Underwood, 元漢光의 부인)가 편집한 LilieinKoreaandContributingCircumstances (1977)이 있다.
25) 이 점에 관해서는 이만열 역, 언더우드, 한국에 온 첫 선교사(기독교문사,
1990), p.359 이하를 참고하라.
26) 이 책은 李光麟에 의해 開化期의 韓美關係 - 알렌 博士의 活動을 중심으로(일 조각, 1973)라는 이름으로 번역되었다.
문서를 총 섭렵하여, 선교사와 物神이 유입되는 한말에 한국선교 상황도 밝 히면서 일본제국주의 침략 과정을 밝히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이 책은 “1930년대 이후 조선신교사 연구에 현재까지 학적으로 가장 높이 평가할 수 있는 道標를 세웠다”27)고 평가되기도 한다. 3. 선교사들의 한국교회사 연구
한편 한국 선교의 연륜이 쌓여지면서 그 역사를 역사적인 기록의 형식이 나 역사 저술의 형식을 취하지 않고 단편적으로 남기는 경우도 있었다. 게 일이나 언더우드에게서 이미 보인 것이지만, 그들이 보낸 연례보고서는 그 자체로서 하나의 역사적인 성격을 갖는 것이다. 선교잡지 등에 소개된 이 같은 보고서만 하더라도 비단 위의 두 선교사에게서만 보이는 것은 아니다. 선교사를 파송한 각 교단의 선교본부의 자료실에는 이 밖의 선교사들이 보 낸 각종 보고서도 보인다. 선교부에 따라서는 선교기념 책자를 간행하는 경 우도 있었다.
선교본부에서는 가끔 선교현장을 돌아보고 보고서를 남기곤 하였다. 그 가운데는 당시의 현지 사정을 매우 정확하게 파악한 보고서도 있어서 당시 한국의 전반적인 상황은 물론이고 교회의 형편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도 록 해준다. 거기에는 미북장로회의 총무 브라운(A. J. Brown)의 Report ofaVisitationoftheKoreaMissionofthePresbyterianBoard ofForeignMissions(New York, 1902)와 ReportonaSecondVisit toChina,JapanandKorea(1909) 등이 있고, 역시 북장로회 총무로 있던 스피어(Robert E. Speer)의 ReportintheMissionsinKorea ofthePresbyterianBoardofForeignMissions(1897)과 Reportof DeputationofthePresbyterianBoardofForeignMissionstoSiam, thePhilippines,Chosen,andChina,April-November,1915(New York, 27) 洪以燮, 韓國基督敎史硏究小史 (韓國史의 方法, 탐구당, 1968), p.441.
1915) 등을 들 수 있다.
1909년 선교 25주년을 맞아 在韓장로교 선교회에서는 25주년 기념책자 를 간행하였는데, 이 책자에는 복음 선교사업을 위시하여 의료 및 교육사업, 여성선교, 문서사업 등과 재정 상태와 각종 통계를 실었다. ) 이것은 바로 25년간의 宣敎史였다. 1910년에는 또 한국 선교 25주년을 맞은 뉴욕의 미 국 감리교 본부가 KoreaQuarterCentennialDocuments라는 제목의 책자를 간행하였다. 여기에는 미국 감리교회의 한국 선교에 관련된 여러 문 제들, 예를 들면 선교의 과정, 기독교 의료와 교육, 부흥운동 등을 열거하였 다. ) 이같은 책자는 1934년 선교희년을 맞아 미북장로회 조선 선교부에서 간행한 JubileePapers,KoreaMissions,PresbyterianChurchU. S.A.(YMCA, 1934)도 같은 종류에 속한다고 할 것이다.
1910년을 전후하여 감리교와 장로교의 선교부(사)들은 그 동안의 한국 선교를 역사적으로 정리할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한국 선교 25주년을 맞은 데다가 일제의 한국 강점으로 역사의식이 고양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 된다. 특히 장로교의 경우, 1907년에 독노회가 조직된 데 이어 1912년에는 전국적인 총회가 조직되었고, 敎界禮讓이라고도 하는 감, 장 선교지 분할이 이뤄져 어차피 그러한 역사까지 정리해야만 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선 교사 개인들도 개 교회 혹은 선교부의 역사를 정리하는 경우도 나타나게 되
었다.30)
1910년대에 들어서서 펜윅(M. C. Fenwick, 片爲益)이 TheChurch ofChristinCorea(New York, 1911) )를 간행하였다. 이것은 엄격하 게 말해서는 역사책이라고 할 수 없지만, 그가 1889년에 선교사로 내한한 이래 자신이 한국에서 경험한 것을 서술하여 초기 한국인 신자들의 모습을 이해하는 데에는 큰 도움이 된다. 그는 이 때 감리교나 장로교에 속하지 않 은 독립선교사로서 처음에는 황해도 소래를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뒷날 원산 을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폈다. 이 무렵 영국성공회의 트롤로프(Mark N.
Trollope, 조마가)는 TheChurchofCorea(1915)를 썼다.
선교사들의 역사의식은 역사를 편찬하기 위해 역사의 자료를 정리하는 작 업도 꾸준히 계속하였다. 그 대표적인 것이 서울에서 활동하던 클라크(C. A.
Clark, 郭安連) 선교사가 펴낸 DigestofPresbyterianChurchin Korea(Chosen)(Yokohama, 1918) )로 나타나게 되었다. 편자 클라크는 한국어․영어 회의록 등 당시 이미 한국에서 간행되었던 대부분의 자료들을 보유하고 있는 상황에서 애초에는 이 책 2장에 주로 수록되어 있는교리와 교회법의 요약만을 모아 정리하려고 했던 것이었다.33)
이 책은 자료집에 불과하여 엄격하게 말하여 사실의 기록에다 평가와 해 석을 곁들인 전형적인 역사서라고는 할 수 없지만,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가 한국교회사를 본격적으로 정리한 최초의 작업이라고는 할 수 있다. 저자는 서문에서 “본서는 조선예수교장로회 창설 후 각 會 역사와 교회헌법과 禮儀 와 인사의 변천과 각 年 총계를 수합, 편성한 것인데 六大條로 나누고 교회 사전휘집이라 명명”34)한다고 하였다. 그 6대조는 總會史記, 교회헌법휘집, 총회규칙휘집, 총회의 각 위원과 각국의 사기휘집, 선교사와 조선인목사 명 부휘집 및 교회창설 이래 30년간 총계휘집 등이며, 이 밖에 1901년부터 1906년까지의 공의회의 회록을 부록으로 첨부하고 각 조항을 찾는 데에 편 리하도록 목록을 삽입하였다.
이 중에서도 특기할 것은 제1장에 해당하는 ‘총회사기’ 부분으로 여기서는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조직된 경위를 이렇게 간단히 설명하였다.
예수교장로회 선교사가 조선에 처음 건너오던 날부터 시작하여 금일까지 그 해수를 계산하면 백년에 삼분의 일(33개년)이 되었도다. 당초에 교회설립된 형 편을 생각하면 당시는 교회라 칭하는 자 하나와 선교사 거류하는 주택 한 곳에 지나지 못하더니 그 후에 점점 진보하여 일개 미슌회가 성립되었다가 계속하여 미슌회가 성립되며 이에 장로회공의회가 조직되고 一轉하여 전국연합노회가 성립 되고 再轉하여는 일개 총회와 9개 老會가 조직되었도다35)
고 하였다. 편자는 서문에서 이 책을 편찬하기 위한 자료에 관해 언급하였 다. 자료 중 문제가 된 것은 공의회 성립 전의 기록이었는데 이것은 미국 북장로회의 선교부가 1909년에 작성한 선교 25주년기념회의록(theQuarter CentennialReportoftheU.S.A.MissionNorth,1909)에서 초출
(抄出)하였다고 하였다. 그 나머지는 직접으로 장로교회의 ‘고등회의록’(공의 회 노회 총회)에서 수집하여 각 조목마다 그 출처를 명기하였던 것이다. 교회사전휘집이 편찬되기 전에 조선예수교장로회 제5회 총회(1916년)에 서는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를 편찬키로 하고 편집위원 14인을 택한 바가 있다.36) 전휘집의 편찬자 곽안련도 14인 중의 한 사람이었지만, 그는 이 전 휘집이 장로회사기와는 다른 것이라고 밝혔다. 총회에서 거론한 조선예수교 사기는 “본교회의 보통사기로서 그 범위가 광대하여 각 사물을 자세히 기록 할 것”이지만, 이 책에 수록된 제 1장의 ‘총회약사’는 ‘특별사’로서, 단지 “교 회정치규례 등 일의 발전 여하만 編述한 것”이며, 이 자료들은 다 각 회록에
35) 長老敎會史典彙集, p.1.
36) 14인은 다음과 같다. 마포삼열, 길선주, 이눌서, 김인전, 공위량, 임택권, 업아 력, 박창영, 왕길지, 정재순, 곽안련, 함태영, 함가륜, 정기정.
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고등회(총회 노회 공의회 등)가 무슨 일을 의논하며 어떤 모양으로 결정하는 것만 밝히 나타내려고 하였다고 그 저술 동기를 밝 혔다.37)
이 전휘집은 비록 자료집의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한국 장로교회의 초기 의 역사를 밝히는 데에는 빼놓을 수 없는 귀중한 것이다. 이것 자체가 역사 적 사실을 밝히는 중요한 문헌이다. 특히 기록의 전거를 일일이 밝혀 놓았 기 때문에 이 책 자체가 요약된 역사서라고 할 수 있다.
곽안련은 뒤에 이 책의 후속편으로서 장로교회사전휘집(朝鮮耶蘇敎書會, 1935)을 간행하였다. 1918년에 간행된 것이 장로교 선교사의 입국에서부터 獨老會까지를 다룬 것이라면, 1935년에 간행된 것은 독노회 때의 사적을 간 단히 언급한 후에 주로 1912년 총회가 조직된 이후의 사실을 수록하고 있 다. 이것은 뒤에서 다시 언급되겠지만, 장로회 총회에서 조선장로회사기를 상․하권으로 편집, 간행한 것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즉 전자가 선교사의 입장에서 한국 장로교회사를 기록한 것이라면 후자는 한국 교회의 입장에서 한국의 장로교회사를 정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때문에 전자가 주로 교회 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선교사적 시각이 투영되어 주로 장로교회를 위에서 부터 내려보는 관점에서 서술된 것이라면 후자는 한국 교회의 역사가 밑에 서부터 조망되는 듯한 느낌을 받고 있다고 할 것이다.
선교사들이 한국의 선교상황과 관련된 글들을 많이 남겼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특히 1907년을 전후하여 일어난 대부흥운동에 관한 기록은 소책 자 형태로 많이 남겼다. 일제는 한국 강점 후에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소위 ‘105인사건’을 조작하여 박해를 가하였다. 서북지방에서 오랫동안 선교활동 을 해 오던 미국 북장로회에서는 깊은 관심과 우려를 가지고 여기에 대처하 는 한편 미국의 선교본부에서는 한국 상황에 대한 보고서를 출판하여 세계 여론에 호소하였다. 미국 북장로회 총무로 있던 브라운(A. J. Brown) 등 은 초기에 일제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글을 남겼다. 1919년 3·1운동 후에도
37) 곽안련 편, 교회사전휘집, p.2.
선교사들의 보고를 받은 미 본토에서는 그 실상을 알리는 보고서를 출간하 였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TheKoreanSituationI, II(The Federal Council of the Churches of America, The Commission on Relation with Orient, 1919. 7, 1920. 4)이다.
선교사들의 한국교회사에 대한 서술이 본격화되는 것은 1930년대에 들어 서서, 세계 선교사상 유례없이 성장하고 있던 한국 선교가 희년을 맞게 되 자 이를 기념하려는 분위기 속에서 이뤄졌다. 이에 앞서 선교사들은 오랜 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선교 현장인 한국 선교의 여러 영역을 대상으 로 하여 저술하거나, 혹은 안식년 등으로 귀국하여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하 면서 한국 선교를 그 논문 테마로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게 간행된 저술 들은, 그것 자체가 한국의 선교역사나 기독교사를 연구한 결과물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말하자면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한 한국 기독교의 특수한 활 동 영역을 연구한 전문 서적들이라고 할 수 있다.
먼저 한국의 초대 선교사 언더우드의 아들 언더우드(H. H. Underwood, 元漢慶)는 1925년 뉴욕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는데, 그 학위논문 이 한국의 근대교육(특히 선교사들에 의한) ModernEducationinKorea (New York, 1926)이었다. 그는 그의 아버지가 간행했던 영한사전과 한국 어에 관한 책들을 보완하여 출판했고, 연희전문학교에 관한 소개서(Chosen
ChristianCollege,SeoulKorea,NewYork, 1925)도 간행하였다.
1919년에 부인과 함께 남감리회 선교사로 내한하여 1935년까지 봉직하면서 연희전문학교 교수로도 활동한 피셔(J. E. Fisher, 皮時阿)는 컬럼비아대 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고 DemocracyandMissionEducation inKorea(New York, 1928)를 간행하였다. 그는 한국의 현대교육 발전에 공헌하였을 뿐 아니라 민주주의 교육이론을 한국에 소개한 분으로도 알려져 있다. 언더우드와 피셔의 저술을 두고 일찍이 홍이섭은 이렇게 평가했다.
右 二個의 저서는 한국근대교육사의 중요한 문헌임은 불문하고라도, 元漢慶선 생은 조선의 근대적 교육의 시책에 있어 기독교가 지녀온 경과를 兼行한 총독부 의 조선에서의 일본교육을 살피며 교회의 종교교육운동을 논함과, 皮時亞선생은 조선의 기독교 교육과 민주주의와의 관계를 구명키 위한 연구다. 역시 총독부하 의 일본교육의 究明 비판은 물론 기독교 교육의 반성을 구하며 근대 특히 식민지 하의 조선에 있어 정치 경제 전통적 문화와의 연관성을 유의하면서 그것의 교육 과의 관계를 논하고 조선에 있어 지성적인 자유주의와 종교적 威嚴主義 간에 전 개되는 갈등을 새로운 기독교적 종교교육으로 조절할 것을 논하고 있다. 이것이 특히 교육문제를 대상으로 연구한 것이로되 우리 근대사의 정치 경제 전통적인 문화와 知的인 현대 조선청년(1920년대)의 사상적인 제 조건을 현실적으로 응시 하면서 우리 사회에 기독교 정신과 민주주의 정신이 선교교육을 매개로 해서 여 하히 전달되느냐는 究明에 집결한 皮時亞선생의 정열적이며 정당한 심정이 맺혀 진 이 책은 곧 근대사를 정신사의 입장에서 파악케 하는 좋은 연구로 이대로 초 기에서 1920년대까지의 기독교사를 이해케 한다.38)
앞에서 거론한 바 있는 선교사 클라크는 1908년 이후 평양신학교 교수 로, 神學指南 편집자로도 활동하면서, 시카고 대학에서 문학 및 철학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그는 앞서 말한 DigestofPresbyterianChurchin Korea(Chosen)(Yokohama, 1918)를 간행한 외에 1930년에는 TheKorean ChurchandtheNeviusMethods(New York, 1930)39)라는 책자도 간 행하였다. 이는 그 전해 그가 시카고대학에서 학위를 받을 때의 학위논문이 었다. 이것은 한국선교부들이 1890년 네비어스 선교사의 내한을 계기로 취 하기 시작했던 네비어스 선교방법이 한국 교회의 성장에 큰 영향을 미친 것 으로 보고 이를 연구하였던 것이다. 네비어스 선교방법은 그 선교방법 수립 에 직접 참여했던 언더우드가 그 이론과 실제를 소개한 것40) 외에는 거의
38) 洪以燮, 韓國基督敎史硏究小史 (韓國史의 方法, 탐구당, 1968), p.440.
39) 이 책은 박용규․김춘섭에 의해, 한국교회와 네비우스 선교정책(대한기독교서 회, 1994)이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되었다.
40) H. G. Underwood, An Object Lesson in Self-Support(TheChinese Recorder, Aug., 1900 & Sept., 1900), Principles of Self-Support in Korea, TheKoreaMissionField,June, 1908.
볼 수 없는 것인데 클라크가 이렇게 학위논문의 테마로 설정하여 훌륭하게 소화하여 소개했던 것이다.
이 밖에도, 필자가 그 책을 읽어 본 적이 없지만, 1919년 미감리회 소속 으로 한국 선교사로 내한하여 감리교 종교교육협회 총무로 활동한 바 있는 레이시(J. V. Lacy, 禮是約翰)는 ReligiousEducationintheMethodist ChurchesofKorea(Chicago, 1929)를 남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1903년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로 내한하여 평양․재령 등지에서 활동하다가 1913년 이후에는 주로 서울에서 활동하며 경신학교 발전에 많은 공헌을 쌓 은 쿤스(E. W. Koons, 君芮彬)는 PresbyterianChurchinChosen(New York, 1925)라는 조그마한 책자를 남겼다.
이렇게 선교사들이 한국 선교의 역사를 쓰려고 하는 시도는 여러 방면에 서 진행되고 있었다. 그것이 구체적인 결실을 맺게 되는 것이 1930년대이 다. 1930년대에 들어서서 1934년과 1935년이 한국에 대한 선교 50주년을 맞는다고 하여 여러 가지 행사가 계획되고 있었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선교사들 중에는 자신의 선교활동이나 자기 교단의 선교사 나아가서는 한국 의 선교를 정리해 보려고 하였다. 또 세계 선교사상 유례없는 발전을 거듭 해온 한국의 복음화 과정에 대하여도 체계적으로 연구해 보려는 필요성도 느끼고 있었다.
우선 남감리회 소속으로 내한하여 원산에서 주로 활동한 쿠퍼(S. Kate
Cooper, 巨布計)가 EvangelisminKorea(Nashville, 1930)를 써서 간 행하였는데, 이는 “한국에서의 기독교 선교의 역사적 개관을 목적으로 한 것 이지만, 기독교복음이 한국이라는 토착문화 속에 어떻게 수용되었는가를 보 여주고 있다.”41) 이어서 미국 북장로회 소속으로 만주와 평북 지방의 선교 활동을 거쳐 청주 지방에서 오랫동안 선교하고 있던 Stanley T. Soltau가
Korea:TheHermitNationandItsResponsetoChristianity
41) 이상규, 韓國 基督敎史 硏究의 現況과 課題(高神大學 論文集 제10집, 1982), p.
198.
(New York, 1932)를 간행하였다. 이 역시 초기 한국사회의 기독교 수용 과 그 전개과정을 다룬 것으로 대표적인 연구로 지적된다.42)
1934년은 감리교회와 장로교회가 선교 50주년으로 기념하는 해로서 각종 축하행사를 거행하고 많은 기록들도 남겼다. 1930년에 합동한 남북감리교회 는 1934년 6월 19~29일에 50주년 기념행사를 갖고 그 기념행사에서 발표 된 글들을 묶어 WithintheGate(YMCA, 1934)라는 제목으로 간행하였 다. 여기에는 한국인들의 글과 함께 선교사들의 글이 많이 실려 있고43) 와 그너(Ellasue Wagner)의 극본 At the Hermit's Gate도 실렸다.
선교희년을 맞아 선교사를 정리하는 작업도 활발하였다. 1934년에는 남 감리회 선교사 왓슨(Alfred W. Wasson, 王瑛德)이 ChurchGrowthin Korea(New York, 1934)를 저술하였다. 이 책의 저자는 1905년 밴더빌 트 대학을 졸업하면서 그 해에 남감리회 소속의 선교사로 내한, 송도고보와 협성신학교 교장으로 활동하였고, 1931년에는 시카고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 1934년부터는 남감리회 해외선교부 총무로 봉사하였다. 이 책은 선교 사상 유례없는 성장과 발전을 이룩한 한국 선교에 대해 외국인으로서는 최 초로 선교학적인 체계로 접근하여 수준 높은 연구 결과를 생산한 것이다. 그는 한국 교회 성장의 원인을 규명함에 네비어스 선교방법과의 관련을 중 시하고 있다. 그는, 한국의 개화인사들이 기독교를 한국 근대화의 기반이 될 수 있음을 확신하고 기독교를 통한 근대 교육에 노력하였다고 지적하는 한 편 선교에서는 근로층과 하층민을 주대상으로 하여 파고들었음을 중시하였 고, 그러한 바탕 위에서 선교의 영역을 점차 상류사회로 확대하여 한국의 복음화에 크게 기여할 수 있게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宣敎史 연구에서 1934년은 또 하나의 업적을 낸 해다. 미국 북장로회 소
42) 이상규, 위의 논문, p.198.
43) 이 책에 기고한 사람들은 양주삼, 김활란, 신흥우와 E. M. Cabke, W. A.
Noble, R. A. Hardie, J. L. Gerdine, Annie E. Bunker, Mattie W. Noble, H. D. Appenzeller, Sherwood Hall, M. B. Stokes, John Z. Moore, B. W. Billings 등이다.
속의 로드스(Harry A. Rhodes, 魯解理)가 HistoryoftheKoreaMission, PresbyterianChurch,U.S.A.1884~1934(Seoul, 1934)를 ‘편집’하 여 출판하였다. 로드스는 1908년에 내한하여 처음에는 평북 강계․선천 지 방에서 활동하다가 1918년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선임되면서 상경하여 전도, 교수 및 문필 활동을 통하여 문서선교에 큰 공헌을 남겼다.
로드스(노해리)는 이 책의 출판에 앞서 1928년에는 당시 감․장 연합기 관지였던 긔독신보(基督申報)에 17회에 걸쳐朝鮮基督敎會略史(1월 4일 자~5월 30일자)를 연재한 적이 있고, 1933년에는 그것을 묶어 조선기독 교회약사(조선예수교서회)를 간행한 적이 있다.44) 그는 한국기독교사 서술 을 景敎에서 시작하여 천주교를 거쳐 ‘신기독교’(개신교)에 이르렀다. 경교비 를 소개하면서, 영국의 기독교인인 고든(E. A. Gordon)여사가 1916년 5 월 금강산 장안사에 중국 西安의 大秦景敎流行中國碑를 모방하여 세웠다는 것을 밝혔다. 그는 또 최근 백년 이래로 한국만큼 신그리스도교가 속히 발 전된 곳이 세계 어느 곳에도 없다고 하면서, 한국에서 40년 동안의 신그리 스도교는 다른 나라 백년 통계보다 더 나은 성적을 보이고 있는 원인을 나
름대로 분석하였다.45)
HistoryoftheKoreaMission,PresbyterianChurch,U.S.A.1884~
1934는 미국 북장로회의 한국 선교를 여러 자료를 곁들여 편집한 것으로 사실상 역사 서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책은 한국에 선교한 개 교 단으로서는 가장 먼저 자기의 역사를 정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의 서문(foreword)에는 이 책의 출판 경위를 자세히 설명해 놓았는데, 북장로 회 선교회가 한국선교 25주년을 맞으면서 宣敎史를 간행하기로 하고 1906 년부터는 위원회의 위원까지 지명하는 데서부터 이 책의 간행 계획이 구체
44) 이 책은 景敎碑의 연혁으로부터 천주교와 개신교의 수용을 소개하였다고 하면 서, 이 책의 자료는 그리피스(Wm. E. Griffis) 박사가 일본에 와서 편집한 조 선 역사와 선교사들의 일련의 저서와 보고서 및 알렌의 소장자료들이라고 밝혔
다.
45) 魯解理,朝鮮基督敎會略史(16), 基督申報 1928년 5월 23일 5면.
화되었다. 이 책은, 뒤에서 언급할 백낙준의 한국교회 연구를 참고한 듯, 한 국 천주교회사와 만주를 통한 기독교 수용을 간단히 언급한 후 개항과 더불 어 시작되는 선교사의 내한과 북장로회의 선교활동을 서술하였다. 이 책이 북장로회의 한국선교 50주년을 기념하는 의미도 있기 때문에 선교거점별로 그 활동을 서술하고 각종 통계를 제시하는 데도 신경을 썼다. 이 책에 이어 선교 75주년을 맞아 노해리는 Archibald Campbell과 함께 공동편집으로
HistoryoftheKoreaMission,PresbyterianChurch,U.S.A.,Vol. II,1935~1959(New York, 1964)를 간행하였다. 이 책으로 미국 북장로 회는 한국 선교의 역사를 나름대로 총 정리한 셈이다.
북장로회의 선교사를 정리한 HistoryoftheKoreaMission,Presbyterian Church,U.S.A.,Vol.I,II는 다른 선교부에서 펴낸 선교사와는 다른 의미를 갖는다. 다른 교단에서 출판한 한국선교사는 대부분 개인의 학위논 문의 형식을 빌어 개인이 연구, 출판한 것이다. 그러나 북장로회의 것은 선 교부가 공적으로 그 정리와 출판을 계획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때문에 교단 선교부의 역사 이해가 거기에 반영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많은 1 차 자료를 비롯하여 풍부한 자료를 담고 있으나, 기본적으로는 뒤에서 언급 할 백낙준의 TheHistoryofProtestantMissionsinKorea,1832~
1910을 답습하고 있으며 거기에 많이 의존하고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이 밖에도 시대를 달리하여 선교사들의 한국 기독교사 연구 업적이 있으
나, 그것들은 다음에 다시 언급될 것이다.
Ⅲ. 일제강점기의 한국교회사 연구
한국 기독신자들의 자기 역사에 대한 인식은, 한국 교회의 성장 속도에 상응하지 못했다. 1920년대, 한국에 기독교가 수용된 지 40여년이 지난 후 에야 자기 역사를 정리하려는 의식이 본격화되었다는 것이 이를 반증하고 있다. 선교사가 입국하기 전에 성경이 번역되었다거나 일찍부터 전도문서가 배포되어 기독교적인 문화의식이 확산되고 있었던 점 그리고 기독교에 의한 반봉건의식과 반외세의식이 고양되었다는 점에 비추어볼 때 이런 점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세기말부터 자기 민족에 대한 전도의 중요성을 깨달 은 기독교인들은 전도문서를 만들었고, 기독교를 통해 사회개혁을 시도하면 서 자기 전통에 대한 확인 작업도 진행시켜 나갔다. 한말 일제하에 기독교 인들 중에서 민족문화를 중심으로한 국학에 관심을 가졌던 분들이 많았다. 국어학의 주시경을 비롯하여 그의 제자들격인 최현배, 김윤경, 장지영 등과 국사학에 관심이 깊었던 남궁억, 최병헌, 이윤재가 기독교인이었고, 안재홍 이 기독교와 관련을 맺었다는 것, 그리고 함석헌이 성서적 입장에서 한국사 를 서술했다는 점46) 등은 기독교인들이 자기 민족사에 대해 얼마나 깊은 애 정을 갖고 있었는가를 보여준다고 할 것이다. 그러한 자기 전통에 대한 확 인작업의 하나가 가문의 개종 과정이나 교회의 설립 등을 중심으로한 역사 기록을 남기게 되었다. 우선 한국 기독교의 역사서술의 과정을 살피겠다.
1. 한국기독교사 연구의 출발
한국 기독교인들이 한국 교회에 대한 자기 인식을 나타내는 것은 기독교
46) 함석헌은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 를 聖書朝鮮 1934년 2월호부터 연재 하기 시작하여, 1938년 3월호(22회)로 끝냈고, 해방 후 1948년에 단행본으로 묶었으며, 1967년에 이를 뜻으로 본 한국역사 개제하여 간행하였다. 그는 이 책에서 “聖書 立場에서야만 역사는 쓸 수 있다”고 전제하고, 성서적 사관을, 성서 는 역사적 本源을 하나님께 구하며, 우주는 하나님의 창조물이며, 이 세상은 終末의 날이 오며, 元始의 날과 終末의 날 사이에는 하나님이 통치하며,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주의 창조일 뿐 아니라 통치주며, 존재의 원인이 될 뿐 아니라 발전 의 원리가 되고 敎導者가 되며, 그러나 그는 우주 속에 자유의지를 넣었으므로 성서는 인생을 도덕적 책임자로 본다는 것 등이다.
회가 설립되고 난 후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난 뒤다. 우선 한국인들이 자기 표현을 할 수 있는 공공수단을 갖게 되는 것은 1897년 2월 2일과 4월 1일에 각각 창간되어 주간으로 간행되기 시작한 감리교회의 죠션크리스도 인 회보와 장로교회의 그리스도신문을 갖게 되면서부터라고 할 것이다. 이러한 신문들에는 초기의 교회의 사정을 말해주는 기사들이 더러 있지만 본격적으로 한국 교회의 역사를 기재했거나 연재한 것은 보이지 않는다. 그 러나 그런 기사 가운데는 종종 개인 혹은 교회들의 단편적인 역사를 소개한 것이 있다.
예를 들면, 그리스도신문(5권 38호, 1901년 9월 19일자)에는셔션생 샹륜의 경력이라는 글이 있다. 이 글은 徐相崙의 개종을 알게 해 주는 서 상륜 자신의 고백인데, 그가 만주 영구에 가서 신병으로 고생하고 있을 때 스코틀랜드 연합장로회의 선교사 매킨타이어를 만나 예수를 알게 되는 경위 를 소개하고 있다. 개인의 회심 과정을 그린 글이면서 한국교회사 이해에 도움을 주는 이같은 글은, 그의 회심이 있은 지 20년 정도 경과한 후의 일 이지만 초기 한국교회사 연구에 도움을 주는 것이다. 서상륜의 동생 徐景祚 도 神學指南에서경조의 信道와 傳道와 松川敎會 設立歷史를 밝힌 바가 있는데 이 글도 초기 한국 기독교회사를 이해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된다고
할 것이다.47)
일제 강점기에 들어서면서 한국교회는 심한 핍박을 받게 되었다. 소위 ‘105인 사건’이 그 대표적인 것이다. 이 점에 관해서는 우선 한국에 선교사 를 파송한 미주의 선교본부나 선교본부의 관할하에 있는 기관에서 ‘105인 사건’의 만행과 그것이 선교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을 염려하면서 이를 폭 로하는 글들이 나왔다. 일본과 미국의 선교기관에서 일본의 조선 기독교인 학대에 항의하는 문서들이 간행되었는가 하면, 이승만은 한국교회 핍박(1913) 에서 일제의 기독교에 대한 탄압을 고발하였다.
47) 서경조, 서경조의 신도와 전도와 송천교회 설립역사,神學指南 1925년 10 월호 참조.
한국 기독교의 역사를 쓴 단편적인 글들은 감리교와 장로교가 연합하여 간행한 基督申報(1915~1937)에 더러 나타나고 있다. 긔독신보는 1928년에 들어서서 ‘조선기독교 각파의 정세’를 소개하겠다고 하면서 각파의 집필자도 소개하고 있다.48) 1934년의 희년을 맞으면서 역사의식이 고양되고 있었는 데, ) 이 때 앞서 말한 선교사 로드스(魯解理)의 조선기독교회 약사를 비 롯하여 조선 기독교 각파의 略史도 소개하고 한국기독교계의 여러 기관의 역사와 한국 신학과 문화의 문제 등 여러 분야에 걸쳐 언급하고 있다. 0) 한국 교회가 자기 역사에 대하여 거교단적으로 관심을 표명하게 되는 것 은 1916년 장로회 총회에서 ‘사기편찬위원’을 선정하는 데서 엿볼 수 있다. 그 2년 후 1918년에 선교사 클라크(C. A. Clark, 곽안련)가 敎會史典彙
48) 참고로 기독신보 1928년 4월 11일 및 4월 25일자에 소개된 필자는, 천주공 교(金翰洙), 장로교회(吳天泳), 북감리교회(金昌俊), 남감리교회(鄭春洙), 성공 회(李源昶), 안식교회(禹國華), 성결교회(李明稙), 회중기독교(柳一宣), 동아기 독교(安大闢) 및 구세군(李建泳) 등이다.
集을 편찬하였는데, 앞에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이 책을 영문과 국문으 로 편찬하였다. 이것이 총회사기, 교회헌법휘집, 총회규칙휘집, 총회의 각 위원과 각국의 사기휘집, 선교사와 조선인 목사 명부휘집 및 교회창설 이래 30년간 총계휘집 등 조선예수교장로회의 연혁과 각종 통계를 넣었기 때문에 이를 장로교회사전휘집이라고도 한다. 이 책은 선교사가 편집한 것으로, 한국인들의 역사의식을 크게 자극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서 하나 짚고 넘어갈 것은 일본 총독부가 식민통치의 필요상 기독교 에 대한 책자를 내부 업무용으로 편찬하였다는 것이다.朝鮮의 統治와 基督敎라는 이 소책자는 190 년 조선통감부를 설치하면서부터 1919년 3·1운 동 직후까지의 기독교 상황을 정리하였는데, 이것은 총독부가 그동안 기독 교대책을 어떻게 세웠는가를 보여준다. 이것은 또한 식민지시대의 한국 기 독교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1)
1920년대에 들어서서 한국인의 한국기독교회사 연구가 본격화하기 시작 했다. 미국에 유학 중인 白樂濬(George L. Paik)이 한국교회사 연구로 박 사학위를 받은 데다 그 직후에 한국기독교사에 관한 책들이 출판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시작된 한국인에 의한 한국기독교사 연구가 더욱 심화되어 갔 기 때문이다.
2. 백낙준의 ‘한국개신교사’ 연구
백낙준의 역사 및 교회사 연구52)는 그의 미국 유학시절에 본격화된다. 평 북 선천의 信聖학교를 졸업한 그는 중국 천진의 新學書院을 거쳐 1918년에 도미, 미주리주 파크(Park) 대학에서 역사학을 공부하고 프린스턴에서 신 학과 역사학을 연구한 후 예일대학에서 당시 선교학과 교회사로 이름이 높 던 라투렛(K. S. Latourette) 교수의 지도를 받아53) TheHistoryofProtestant MissionsinKorea,1832~1910이라는 논문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곧 귀국하였다. 백박사는, 과거 신성학교 시절의 은사였고 미국 파크 대학을 소개해 주었으며 그의 귀국 당시에는 평양 숭실대학 학장으로 있던 尹山溫
(George S. McCune) 박사의 호의로, 1929년 숭실대학 출판부에서 이 논 문을 단행본으로 간행하였다. 그가 논제로 했던 한국선교의 역사는 당시, 선 교사상 유례가 없다고 할 정도로 성장 발전했다고는 하나 아직 40여년 남짓 한 역사밖에 되지 않아서 박사학위 논문의 논제로 삼기에는 여러 가지 난점 이 있을지도 모르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용기와 사명감을 가지고 당시 교통편이나 자료수집의 어려운 여건을 무릅쓰고 한국의 초기 선교사를 훌륭 하게 정리해 냈던 것이다.
이 연구서는 제목이 ‘한국 개신교 선교사’이긴 하지만, 이 연구에서 시도 한 것은 “한국 개신교의 초기부터 1910년까지 그 수용과 확장 과정에서 실 제 일어났던 것들을, 문헌비판적인 확증성이 허용되는 한, 객관적으로 기술, 해석하려는 것”54)이었다. 저자가 선교학자인 라투렛의 지도를 받았고 그의 TheStudyoftheHistoryofMissions에서 제시된 관점이 백 박사의 탐구에 기본적인 골격으로 채택되고는 있었지만, 그렇다고 저자 자신이 적 어도 영문판 저서에서는 이 연구가 ‘순전히 선교의 역사’로 단정하지는 않았
다.
53) 홍이섭은 韓國基督敎史硏究小史 (韓國史의 方法, 탐구당, 1968, p.434)에서 “선생님은 …고국에 돌아올 준비로서 학위를 받을 계획으로 각 대학에 적당한 연 구과제가 없는가를 서신으로 문의하였을 때 예일대학의 라뚜렛 교수가朝鮮基督敎宣敎史 를 권함에 同 대학에서 2년간 연찬하여…”라고 하였으나, 백 박사는 1929년에 刊行된 영문판 서문(Preface)에서 “이 연구분야는 원래 예일대학교의 매킨토쉬(D. C. Macintosh) 교수로부터 권유를 받았고, 연구는 라뚜레트 교수 의 지도로 이뤄졌다”로 밝혔다.
54) L. George Paik, TheHistoryofProtestantMissionsinKorea,1832 ~1910, Preface, iii.
그러다가 저자가 1973년 그의 학위논문을 국문판으로 번역해 내면서 기
독교사가 선교사임을 분명히 했다.
기독교사는 그 본질에서 선교사이다. 또한 반드시 선교사가 되어야 한다. 교 회는 기독교사상의 한 중간적 존재이다. 우리 주님이 죽으심으로부터 다시 오실 때까지만 존재하게 되어 있다.(고전 11: 26) 이 중간적 존재체인 교회의 철두철 미한 사명은 복음선포이다. 기독교사는 자초지종에 선교사로 일관되어 왔다. 이 런 입장에서 볼 때에 우리 한국개신교회사도 선교사가 되어야 한다. 선교사를 外人선교사에 의한 被宣敎의 과정으로 해석하여서만은 아니된다. )
백박사가, 그 전부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생각되지만, 자신의 한 국 개신교사를 포함하여 한국의 개신교회사가 ‘선교사’가 되어야 한다고 천 명한 것은 1973년이다. 1973년 국문판에서는, 영문판이 출간된 후에 나온 書評 중에 “한국측 사료가 결여되었음”을 지적한 것을 두고, 자신은 “이 연구 가 진행되던 때와 곳에서는 본래 여기에 인용한 자료 이외의 한국문헌 입수 는 불가능한 실정이었음”을 밝혔다. 이 反論은 그가 “한국기독교사의 사료, 적어도 그 초기사의 사료는 傳授圈側의 사료를 의거하지 아니할 수 없고 또 그리 하여야 된다”는 논점과도 상통한다고 생각되는데, 따라서 그가 한국개 신교사의 順序的 서술을 傳來史로 실마리를 풀어야 한다는 주장은, 후학들 에 의해 그것을 收容史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가 제기됨에도 불구하고, 백박 사로서는 논리적 일관성을 갖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백박사는 한국기독교사 연구에서 초기사를 제대로 다뤄야만 후기사도 정 확하게 될 것이라 생각하고 “초기사를 전문적으로 다룬 저서가 零星”하다는 판단 하에 한국기독교사로서는 1910년까지 비교적 초기사에 해당하는 이 분야를 연구테마로 잡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유의한 것은 ‘국사의 한 분 류사’라 할 수 있는 한국기독교사를 “서구사학가들의 연구방법을 응용”하여 연구하겠다고 ‘시도’했다는 것이다.56) 따라서 이 연구는 역사학과 신학을 연 구한 학자가 서구의 역사학적인 방법을 충분히 구사하면서 역사학과 선교학 을 종합하는 관점에서 생산해낸 업적이다. 이 점은 라투렛 교수가 서문에서 적절히 지적한 바와 같다.
그는 서양사학가의 방법응용에 능숙할만한 훈련을 받았으므로 持久力을 가지 고 자료를 수색 수집하였고, 그 자료의 비판과 해석에는 객관성을 견지할 줄 아 는 기술을 소유하였다. 그 결과는 초기한국개신교의 활동을 기록하는, 이 처음되 는 진지한 시도에 거의 완벽을 備하였다. 이 부분의 역사에 관하여는 다시 연구 에 착수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57)
라투렛 교수는 이어서 백 박사의 이 연구를 두고, “한국기독교사를 연구하 는 저술가나 학생은 백 박사의 저작을 숙독하지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고 극찬하였는데, 그의 이같은 찬사와 같이, 이 책은 한국기독교사 연구를 시작 하는 학도들에게 꼭 거쳐야 할 입문서이면서 수준 높은 연구로 하여 한국사 학사에서도 손꼽혀야 할 한 고전으로서 불후의 가치를 가질 것이다.58) 이
57) K. S. 라투렛, 序 (백낙준, 한국개신교사, 연세대학교 출판부, 1973), iv.
58) 일본의 山口正之가 지적한 이 저술에 대한 평가는 대단히 중요하다. 그는朝鮮新敎史 書評 (靑丘學叢 第7號, pp.144~146)에서 “朝鮮近代史의 중요한 일부 분을 구성하는 프로테스탄트傳道史에 관한 아카데믹한 名著를 맞이한 것을 깊이 기뻐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고, 이어서 그 내용에 관해서는 “백 박사는 조선에 있어 新敎의 전래 접촉기를 서설로 삼고, 성립의 기점을 개국에 두고 開國道程과 신교의 전래와를 불가분의 內的 連繫下에 파악하려는 것이다. 開國史와 新敎傳達史, 환언하면 정치사와 종교사를 상이한 궤도를 달리는 同元體로써 서구문화가 종합적으로 작용한 한 무브멘트로서 이해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저자는 新敎各派의 교구(Mission field) 伸展과 문화시설의 情況을 精確한 사료를 전거로 하 고…명쾌히 논술하였으며, 늘 사회와의 관계에 관점을 두고 근대서구문화의 전달 자로서 선교사의 활동이 반도의 정치 경제 교육 사상에 여하한 변이를 일으키었 는가? 하는 문화현상으로서의 기독교의 가치에 주의를 돌리고 있다.…더욱 저자 는 엄정하여 그 풍부한 사료를 종횡으로 구사하여 半言雙句라도 소홀히 하지 않 았다.…歐文史料는 거의 전부 망라된 감이 있으며…脚註1,574개를 볼 때, 우리 들은 저자의 辛苦를 잊고 그 文獻學的 구성의 美에 황홀하게 된다…”고 극구 칭 찬하였다. 그러나 이 연구에 대해 그는 “이 책이 지니는 전면적인 결함이라고 할 것은 조선측의 사료가 일체 묵살된 것이다. 이것은 저자의 알바이트가 주로 미국 에서 된 것으로 할 수 없으나, 본국의 자료를 무시하고 如斯한 종교사의 문화적
저술은 또한 선교사에 의한 것이든 한국인에 의한 것이든 간에 한국 기독교 사 연구로서는 학적인 체계를 갖춘 가장 선행적인 연구였고, 이 연구를 계 기로 하여 그 뒤 이 분야에 관한 많은 저술들이 나오게 되었다.59)
백 박사가 이 연구에서 보인 역사적 관점은, 흔히 ‘宣敎史觀’으로 불려지 고 있으나, 1973년 韓國改新敎史라는 국문판이 간행됨으로 자료의 이용이 영문판에서 보여준 약점-이것은 비판자들이 그의 사관을 ‘선교사관’으로 보 려는 전거가 되기도 한다-을 상당히 보완하고 있다. 백박사의 이 저술은 한 국인 연구자들이 선교사들의 원자료를 이용할 수 없었던 상황에서, 그 원자 료는 어떤 것이 있으며 그 소재처는 어디인가를 알게 해 준 통로적인 구실 을 했다. 그럴 정도로 이 책은 한국기독교사 연구에 필요한 1차적인 자료를 많이 제공하고 있으며 그 때문에 1970년대 말까지 한국기독교사 연구에서 선교사들이 남긴 1차적인 자료를 제공하는 거의 유일한 역할을 감당하였다. 예일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백낙준은 귀국하여 연희전문학교 문 과의 행정책임을 맡아 국학을 강화하는 데에 노력하는 한편 기독교 지도자 로서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 조선은 선교희년을 맞아 1934~35년에 각종 행사를 치르고 한국교회의 역사를 되돌아보는 각종 행사를 거행하고 역사문 건을 만들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그는 조선기독교 50년사(신동아, 1935)를 써서 일반 신자들의 역사의식을 높이고자 하였다. 3. 기독교사 연구의 확산
백 박사의 학위논문이 완성된(1927) 후 그것이 아직 간행(1929)되기 직
연구가 가능하냐 하는 근본 疑義는 영원히 남는다.”고 하여 그 약점도 지적하고 있다(홍이섭, 앞의 논문, p.434).
59) 앞서 말한 선교사들에 의한 한국 기독교사 연구는 대부분 백 박사의 연구 후에 나온 것이며, 뒤에서 언급할 한국인에 의한 연구도 한동안 백 박사의 학문적인 업적을 기초로 하여 이뤄졌지만 그 학문적인 영역과 수준을 능가하지는 못하였
다.
전인 1928년에 한국 기독교사 연구에 관련, 주목할 만한 책 두권이 간행되 었다. 李能和의 朝鮮基督敎及外交史와 車載明이 저작 겸 발행자로 된 朝鮮예수敎 長老會 史記가 그것이다.
이능화의 朝鮮基督敎及外交史는 “한국 기독교의 전개과정을 근대한국의 정세와 국제관계를 통해서 서술”60)한 것이라고 하지만, 이 책은 상, 하편 대부분 주로 천주교를 다루고 있고 개신교에 관해서는 이 책 하편 말미에 약간 취급하고 있는 형편이다.61) 이에 앞서 이능화는 1923년 東明 에 朝鮮基督敎史를 연재(제2권 21~23호)한 적이 있다. 朝鮮基督敎及外交史 에서 저자는, 그의 다른 저술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朝鮮王朝實錄 등의 관찬사료와 문집류 등의 자료를 활용,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자세를 견지하 였다. 그러나 이 책이 1928년에 간행되었다는 것과 이능화가 자료수집에 세 운 공헌 등을 감안한다면, 이 책에 나타난 한국개신교사 관계 기록은 미흡 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능화는 이 밖에도 한국의 여러 종교, 神敎․佛敎․道敎 등에 대한 저술도 남겼으나, 이런 저술들이 그의 자료 정리에 공 헌한 영예만큼 높이 평가되는 것은 아니다.
朝鮮예수敎長老會史記는,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조선예수교장로
60) 신광철, 한국개신교사 연구사 (종교와 문화, 제2집, pp.184~185). 이능화 의 조선기독교급외교사에 관해서는 홍이섭, 朝鮮基督敎 及 外交史 複印序와 이능화 선생의 ‘조선기독교 급 외교사’ (한국사의 방법, 탐구당, 1968), 김수 태, 이능화와 그의 사학: 특히 그의 조선기독교 급 외교사를 중심으로(동아연 구 제4집, 1984)와이능화의 한국기독교 연구 (종교연구 제9집, 1993), 신 광철의 이능화의 종교사학과 한국 기독교사 연구 (한국기독교와역사 제4호, 1995) 등 참조.
61) 이 책에서는 개신교와 관련, 하편 14장의 1832년의 귀츨라프의 홍주만 상륙과 관련된 기록, 22장의 ‘쩨네랄 서어맨’호 사건(특히 이능화는 이 배에 승선한 崔蘭軒은 耶蘇敎傳道師이며, 崔蘭軒의 원명은 토마스로 ‘米國人宣敎師’라고 하였으며, 崔蘭軒이라 한 것은 쩨레랄과 음이 비슷한 데서 온 것이라고 하였다), 29장의 立約後基督敎傳布狀態에서 영국 미국 러시아 독일 등의 선교사들은 이 나라들 과 조약이 맺어진 후에 선교가 시작되었다는 점, 30장의地獄卽天堂에서 개화 파 인사들이 독립협회 사건으로 옥고(地獄)를 치르면서 개신교도로 개종(天堂)하 였다는 것을 쓰고, 마지막 31장에서朝鮮基督敎各派現狀及事業統計表를 제시 하는 정도이다.
회 제5회 총회(1916년)에서는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를 편찬키로 하고 편 집위원 14인을 택한 바가 있는데, ) 이 편집위원 중의 한 사람인 곽안련은 선교사들의 문헌을 토대로 1918년에 ‘교회사전휘집’을 간행하였다. 곽안련이 지적한 바, 위원 14인이 편집할 ‘교회사기’는 자신이 편집한 ‘교회사전휘집’ 과는 다른 것으로, 이것은 “본교회의 보통사기로서 그 범위가 광대하여 각 사물을 자세히 기록할 것”63)으로서 이것이 바로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는 啓發時代와 公議會時代, 獨老會時代 등 3시기 로 나누어 서술하였다. 제1편 계발시대(1865~1892)는 토마스(R. J. Thomas) 목사의 한국 연해 접근시기부터 그 시기를 잡고 있지만, 그 전의 천주교의 유래도 다루고 있다. 제2편 공의회시대(1893~1906)는 미국 남북장로회의 선교사들이 1893년 한국에서 선교사공의회(Council of Missions Holding Presbyterian Form of Government)를 조직하고 1901년에는 합동공의 회(장로회공의회)로 개칭하여 1907년 獨老會를 조직하기까지의 역사를 기 록한 것이다. 제3편 독노회시대(1907~1911)는 대한예수교장로회노회(독노 회)를 조직하는 과정과 노회의 의안들을 쓰고 노회 산하의 각 대리회(京忠, 平北, 平南, 黃海, 全羅, 慶尙, 咸鏡)의 교회 조직과 전도 환란 교육 자선사 업 및 진흥을 기술한 것이다.
장로회 총회 사기편집위원회는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를 편집하면서 원 래 1923년까지의 역사를 정리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1928년 이 책을 처음 출간할 때, 1912년 총회 조직 때까지의 사실만 수록하고 나머지 총회조직 이후(1912~1923)의 것은 원고 상태로 두고 출판을 기다리고 있었다. 1930년에는 이미 수정 완료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이 未刊된 ‘史記 下卷’의 原稿 )는 몇 부 복사하여 보관하였던 것 같은데, 그 동안 총회사기편집위원 의 한 분이었던 咸台永 목사도 有罫美濃紙에 黑紙複寫된 한 帙의 完成稿本 을 갖고 있다가 6·25동란 중 釜山 피난지에서 東京 한인교회의 담임목사였 던 吳允台 목사에게 전달하였고, 그 원고를 찾고 있던 백낙준이 1965년에 東京의 吳목사로부터 이 원고를 발견하여 1968년 한국교회사학회(회장 백 낙준)를 통해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하권으로 간행하였다.65) 하권은 상권 에 이어 제4편 총회시대(1912~1923)로 하여 편집하였는데, 총론에서 총회 의 설립과 의안, 선교회의 사업, 청년운동 및 시대의 형편을 다룬 후 각 노 회별로 노회설립과 의안, 교회조직, 전도 교육과 환란 및 진흥 등을 기록했
다.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는, 앞에서 언급한 선교사 곽안련 편집의 장로교 회사전휘집과 여러 가지로 비슷한 점이 있다. 두 책자는 상하권 모두 각각 비슷한 시기에 이루어졌다. 사기가 1923년까지 취급한 데 비하여 전휘 집은 1933년까지 취급하였고, 사기가 각 시대별로 교회 설립과 조직, 각 급 회의의 의안, 전도와 교육, 환란과 자선, 진흥과 이단 등을 기술한 데 비 하여, 전휘집은 각급 기독교 조직의 사기를 비롯하여 헌법과 규칙, 선교 및 교육 사업, 그리고 각종 통계 등을 역사적으로 제시하였다. 전자가 조선 인의 입장이 강조되었다면, 후자는 선교사의 관점과 정리 방식이 적용되어 이룩된 것이라고 할 것이다.
한국 장로교인들이 자기 교회의 역사를 정리하려고 하는 시도는 성결교회 와 감리교회에도 일정하게 영향을 미쳤다. 1929년에는 성결교회의 李明稙이 朝鮮耶蘇敎東洋宣敎會 聖潔敎會略史를 써서, 성결교단의 역사를 나름대로 간단하게 정리하려고 하였다.
1930년 남감리회에서는 자신들의 한국 선교 30년을 기념하기 위해 양주 삼(J. S. Ryang, 梁柱三)이 국․영문으로 된 朝鮮南監理敎會 三十年紀念 p.404)에 보면, 그가 수정완료하고 跋文을 쓴 것이 1930년 8월 20일로 되어 있
다.
65) 백낙준, 緖言 (朝鮮예수敎長老會史記下卷), pp.1~2. 참고로 1928년에 간행 된 것은 첫 책에는 ‘上卷’이라는 표시가 없다.
報(朝鮮南監理敎會傳道局, 1930) SouthernMethodisminKorea.Thirtieth
Anniversary를 한 권으로 간행하였다. 미국 남감리회는 1925년 4월에 개 최된 ‘長老司會議’에서, 1926년 10월 16, 17일, 리이드 목사와 헨드릭스 감 독이 한국에 처음 온지 30주년이 되는 날에 한국선교 30주년을 기념하면서 축하식과 교회사업전람회를 갖도록 하고 축하를 마친 후에 그 기록을 종합, ‘조선남감리교회30년역사’를 국, 영문으로 편찬발행하도록 결정하였다. 그러 나 재정 형편으로 기념식은 1927년 9월로 미뤄졌고 소책자의 간행도 지체 되어 1929년에야 원고가 완성되고 1930년에 출판되었다. 編者는 이 책이 역사가 아니며 역사를 저술코자 한 것도 아니라고 하면서 다만 “역사를 저술 하기에 不少한 자료가 포함되었다”고 밝혔다.66)
이 책은 남감리회가 한국에서 선교한 역사를 연대기적으로 정리하였을 뿐 아니라 남감리회에서 운영하는 각 기관의 연혁을 소개하고 남감리회에서 활 동하고 선교사와 교역자의 이력서와 사진, 각종 통계 등을 모으는 한편 ‘조 선남북감리교회통합운동의 내력’도 적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자는 1930년 감리교단 통합에 앞서 남감리회의 역사를 정리한 셈이 되었다. 이 책은 북 장로회 선교사 클라크(C. A. Clark)가 1918년에 저술한 敎會史典彙集 (국, 영문)과 좋은 대조가 되는데, 클라크의 것이 선교사가 중심이 되어 영 문과 국문으로 장로교회 사료를 정리, 두권으로 펴낸 것이라면, 양주삼의 것 은 한국인의 입장에서 국․영문으로 남감리교회 사료를 정리하여 한권으로 펴낸 것이다. 이것은 사료집이라는 점에서 이 무렵에 간행된 조선예수교장 로회사기와 편찬의도상 맥락을 같이한다고 할 것이다.
1934년은, 앞의 선교사들의 저술활동에서도 보았듯이, 한국선교 50주년 으로 기념하는 해였다. 그래서 수많은 행사가 있었다. 50주년의 역사와 기 록을 남기려는 작업들도 눈에 띄게 나타난다. 이 해에 장로교 총회에서는 조선예수교장로회50주년 역사화보를 출판하였고, 鄭仁果는 조선예수교장
66) 梁柱三, 朝鮮南監理敎會 三十年紀念報(朝鮮南監理敎會傳道局, 1930), 서언 참
조.
로회50년사 일별을 간행하였다. 감리교계에서도 감리교 50년사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협성여자신학교를 졸업한 여류시인 張貞心은 1934년에 朝鮮基督敎五十年史話를 썼다.
일제가 만주사변(1931)과 중일전쟁(1937)을 일으키고 식민지 조선에 대 해 전시체제를 강화함에 따라 민족말살 정책을 노골화하였다. 언어․문자 통제정책은 물론 전시사상통일을 강화한다고 하여 신사참배와 궁성요배를 강요하여 거기에 불복하는 기독신자들을 투옥시켰다. 언론활동이 위축되고 1940년대에 들어서면 문필활동에서 조선어의 사용이 금지되어 갔다. 그런 상황에서 東京대학을 졸업하고 평양신학교에서 가르쳤던 채필근은기독신 문(1938. 8. 16~1942. 4. 23)에朝鮮基督敎發達史를 연재하였고, 조선 기독교회 전도부에서도 朝鮮基督敎會小史(1941)를 편찬하였으나 한국교 회는 역사의식을 회복하기에는 지쳐 있었다. 기독교에 대한 탄압이 계속되 면서, 희년을 계기로 열기를 더해가던 기독교인들의 역사의식은 점차 위축 될 수밖에 없었고, 일제의 강요된 교단 통합정책은 교파 의식은 물론 한국 기독교 자체에 대한 정체성 의식에도 문제를 던져주고 있었다. 1930년대 말 이후에는, 한국 사회의 전반적인 상황이 그렇듯이, 기독교회도 암흑기에 들 어서고 있었다.
Ⅳ. 해방 후 한국기독교사 연구의 진행과정
해방은 한민족 전체에 새로운 활기를 주었지만, 일제로부터 극심한 핍박 을 받아 굴절의 역사를 감수해야 했던 기독교계에는 새로운 소망과 함께 과 거청산이라는 큰 숙제가 주어졌다. 그것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한국 교회는 분열이라는 큰 회오리에 휘말리게 되었다. 역사의식이 제대로 있었다면 일 제하의 하나님과 민족 앞에서 훼절한 오욕의 역사를, 한국 교회의 자기 전 통에 입각해서라도 새롭게 점검하면서 뼈를 깎는 회개와 자아반성이 있어야 했으나, 과오를 떠넘기고 변명하기에 급급했던 몰역사적인 한국 교회는 이 귀중한 기간을 허송세월하고 말았다. 그렇게 함으로써 해방 공간에서 기독 교회가 민족을 거듭나게 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자기의 철저한 회개 없이 민족을 회개운동으로 이끌지 못한다는 것은 너무나 뻔한 일이었
다.
6․25전쟁이 끝나고 교회의 분열이 가속화되면서 한국 교회는 ‘선교’ 70 ~75주년을 맞게 되었다. 이런 일들로 한국기독교는 자기역사를 더 깊이 되 짚어보는 기회를 갖게 되었지만, ‘몇권의 영문으로 된 기독교사’ 외에는 한국 기독교사에 관한 책이 거의 없었다. 교인들과 젊은이들에게 자기의 교회사 를 가르치려 하여도 마땅한 책이 없었다. 한국기독교 통사를 저술할 만한 첫째가는 학자로는 백낙준이 손꼽혔는데, 그는 연희대학교와 나아가서는 한 국 교육의 책임자로서 투신하게 되어 자신의 학문을 더 발전시키거나 대중 화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을 안타까워하면서 한국기독교 통사가 출현하게 되었고, 신학 전공자들 중에서 역사신학의 한 分流로서 한국기독 교사를 연구하는 이들이 출현하게 되었다.
1. 한국기독교 通史의 출현 - 해방에서 1960년대까지
해방 후 10여년간은 국토의 분단과 민족의 상잔, 남북 이산 가족의 양산 과 교회의 분열 등이 중층적으로 부닥쳐온 시기였다. 이같은 역사 전개는 당연히 역사가에게 자기 시대 역사전개에 대한 심각한 물음을 던지고 있었 다. 역사학도는 이 같은 물음에 대해 역사적인 조명으로 답해야 했다. 당시 한국기독교사를 연구하는 한국인 연구자들이 더러 있었지만, 金良善은 먼저 자기 시대의 當代史로서 답하려고 하였다. 그는 한국인 최초의 수세자 중의 한분이었던 白鴻俊의 外孫이었고 그의 부친을 이은 목사로서 자기 시대가 안고 있던 민족적 교회적인 문제와 관련, 韓國基督敎解放十年史(大韓예수 敎長老會總會宗敎敎育部, 1956)를 간행하였다.
해방 이후 한국 교회의 회복과 분열, 6·25의 동족상잔과 그런 와중에서 많은 고난과 승리를 경험한 한국 교회를 보면서 저자는 한국 역사와 교회사 상 그 유례를 볼 수 없었던 이 격동적인 사건들을 역사적인 안목으로 판단 하여 기록으로 남기려고 의도했던 것이다. 저자는, 자신이 고백한 바와 같 이, “한국교회의 초석이 된 가정적인 환경” 때문에 若冠 때부터 한국기독교 사료수집을 시작하여 해방 때까지 5천을 넘는 귀중 사료를 수장하게 되었 고, 그런 자료를 바탕으로 한국기독교 전래사를 ‘탈고’한 지 오래되었다. 그 런 상황에서 그는 북한으로부터 가져온 일부 자료로써 1948년 기독교박물 관을 창설하였으나 6․25로 그들 사료를 거의 유실하게 되어 기독교사 집필 이 절망 상태였는데, 이 무렵 한국선교 70주년(1954년)을 맞은 한국기독교 연합회로부터 한국 기독교사의 집필을 의뢰받고 용기를 갖게 되었던 것이
다.67)
그가 원래 계획했던 것은 한국기독교사를 전래, 포교, 부흥, 수난, 재건 (해방 십년사)의 5권으로 정리하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한국기독교 통사를 쓰겠다는 몸부림이었다. 그가 해방십년사를 펴낸 것은 계획한 5권의 순서를 바꿔서 “최후의 것을 먼저 내어 놓게 되는” 셈이었는데, 이는 “戰禍로 인한 사료의 결핍”에 대한 우려와 “경험과 기억을 중요사료로” 해야 하는 저자 나 름대로의 고충때문이었다. 그는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기관이 거의 현 존하고 있는 상황에서, 중대한 사건일수록 완결되지 않고 진행되고 있어서 결론을 내리기 힘들다는 점, 그리고 ‘보수주의 신학’이니 ‘자유주의 신학’이니 하는 역사적 용어의 不定性 등 여러 가지 애로 때문에 가능한 한 ‘述而不作’ 의 태도를 취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한국교회 해방십년사의 시기와 흐름 을 ‘해방과 재건’, ‘수난과 부흥’, ‘영도권 문제와 교파의 분립’, ‘한국신학 수 립의 태동과 교파의 분립’이라는 ‘四大題綱’으로 정하고, 그 네 ‘題綱’을 “‘고 난과 구원’, ‘대립과 화해’란 史觀의 테두리 안에서” 정리하되, “승리자로서의
67) 김양선, 自序 (한국기독교해방십년사), p.33.
교회와 신도의 모습을 뚜렷이 나타내는데 주력하면서 이 십년사를 요약 전
개시켰다”고 술회하였다.68)
한국기독교해방십년사는 우선 대결과 투쟁의 격동기에 상이한 이해집 단의 주장을 ‘대립과 화해’라는 관점에서 풀어보려고 한 점에서 저자의 역사 관과 용기를 엿보게 해주는 저술이다. 이 책은 사가들이 좀처럼 취급하기를 꺼리는 당대사를 연구의 대상으로 설정하였고, 격동기에 보존하기 어려운 이해쌍방의 문건을 중요한 대목에서 ‘공정하게’ 자료로 제시하려 노력했다는 점과, 기록사료 뿐아니라 경험과 기억을 자료로 활용하려 했다는 점에서 우 선 저자의 역사서술의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백낙준․함석헌 이래 확고한 사관을 가지고 역사를 서술한 기독교인이 없었는데 그런 공간을 메웠다는 점도 내세울 만하다. 그러나 이 책은, 장로교의 분립문제를 서술함에 불편부 당의 입장을 견지하였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지 않다. 김양선은 이 밖에도 간추린 한국교회사(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1962) 와 韓國基督敎史(2)-改新敎史(民族文化史大系 Ⅵ, 高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1970)를 서술하여 한국기독교사를 일반 학계에 소개하는 데에 공헌하 였다. 그의 사후에는 韓國基督敎史硏究(基督敎文社, 1971)가 간행되었는 데, 이 책은 “그가 생전에 한국기독교사 개설의 원고를 써놓은 것”인데, “그 의 별세 일주년을 기하여 그의 조카 김광수 목사가 이를 정리, 몇 개의 논 문을 가하여 하나의 책으로 출판하게 된” 것이다.69) 이 책은 원고상태로 보 면 가장 먼저 쓰여진 한국기독교사 개설서70)일 수도 있으나 출판된 것으로 보면 그렇지 않다. 이같은 업적에서 드러나는 점은 그의 한국교회사 연구가 한국측의 자료를
68) 김양선, 앞의 책, pp.33~35.
69) 안광국, 머리말 (韓國基督敎史硏究, 기독교문사, 1971).
70) 이 책에서는 목차 중에 -한국기독교사 개설-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이 책 에서 그는 개신교이전의 한국기독교에서 景敎와 천주교를 서설로서 다루고, 본문 을 新敎 전래와 開敎의 단서, 개국과 선교사업의 개시, 대부흥의 발흥과 교회기 반의 확립, 행정기구의 확립과 교회의 발전, 3.1운동과 민족교회로서의 성장 그 리고 禧年과 수난의 6편으로 나누어 서술하고, 3편의 연구논문을 부록하였다.
발굴하여 활용하기에 애썼다는 것이다. 이 점은 그가 ‘恩師’라고 지칭한 바 있는 백낙준이 해외 선교사의 자료를 주로 활용한 것과는 대조가 되면서 보 완적인 성격을 갖는 것이며, 그런 점에서 한국기독교사 연구의 방법을 보완 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구상했던 5권의 한국기독교사 서술이 ‘계획’에 그치고 말았다는 것과 그의 역사 서술에서 전승에 의존한 나머지 고증의 불철저한 점이 나타나는 것은, 그것이 시대적 한계 때문이라고 하더 라도, 아쉬운 점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김양선은 한국 교회사학자였던 것 못지 않게 한국의 고고학과 일반 역사 학에도 관심을 기울였던 사학자였다. 그의 사후(1972)에 숭전대학교 박물관 에서 간행한 梅山國學散稿는 그의 이같은 국사학자로서의 면모를 드러내 주고 있다. 그의 국사학자로서의 면모는, 그를 계기로 교회사연구에서 한국 측의 사료와 증언이 더욱 중요시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을 것으로 이해된
다.
1950년대는 한국 기독교계에서는 분열이 폭발적으로 나타나던 시기였다. 한국 기독교계 특히 장로교단의 분열은 외국의 선교학자들에게는 교회성장 을 부추기는 것으로 역설적으로 인식되기도 하였지만, 그것이 아무리 신학 의 정통과 신앙의 순결을 지키는 일이라 할지라도, 민족상잔의 기간에 진행 되고 있었다는 점에서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무렵 예 일대학에 유학 중인 全聖天은 ‘한국기독교의 분열과 연합’을 박사학위 논문 의 주제로 삼아 씨름하였다. 이에 앞서 그는 일본 靑山學院을 졸업하고 조 선신학원에서 7년간 교편을 잡았다. 그 후 만학으로 프린스턴에 유학, 석사 학위를 마치고 예일대학에 진학, 니버(Richard Niebuhr)와 라투렛(Kenneth
S. Latourette)의 지도를 받아 SchismandUnityintheProtestant ChurchesofKorea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 연구논문은 오랜 시간을 기다렸다가 1979년 대한기독교서회에서 영문 단행본으로 출간되었 다. 그는, 자신의 연구가 “한국 교회 분열의 경향성의 요인을 밝히고 후대 학자들의 연구토대를 마련하고 그들 연구의 새로운 방향을 준비함에 있다”고 한 바와 같이 한국 교회 분열의 원인과 과정, 그리고 연합의 전망을 그 분 열의 현장을 직접 목격한 세대로서 학문적인 접근을 꾀하려고 했던 것이 다. ) 이것은 말하자면 김양선이 역시 분열의 현장에서 그것을 증언하는 심 정으로 한국교회사를 정리하려 했던 것과 비슷하다고 할 것이다. 다른 것이 있다면 김양선이 해방 10년에 초점을 맞추었다고 한다면, 전성천은 한국 교 회의 분열을 한국기독교의 전 역사에서 조명하려고 했던 점이라 할 것이다. 백낙준과 김양선(생전)의 연구에도 불구하고 한국기독교계에는 아직도 한 국기독교의 통사를 갖지 못한 상태에 있었다. 이 점은 해방 후 일정한 시기 까지 한국기독교가 자기의 역사를 관통해 볼 수 있는 역사적인 통찰력을 갖 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누구보다 안타깝게 생각한 이가 邊宗浩였 다. 그는 일찍이 연희전문을 졸업하고 감리교신학을 마친 후 목회자가 되어 1937년경부터 그의 스승이기도 한 李龍道 목사의 전기를 쓰고 그의 서간과 시가를 정리해 왔으며 해방 후에는 이를 모아 전집을 편찬하기도 하였다. 그는 평양의 요한신학교에서 가르친 적이 있고 감신에서 야간부장을 맡은 적도 있어 교수 생활을 했던 지성인이었다. 그가 1950년대가 저물어 갈 무 렵 한국기독교사[개요](心友園, 1959)를 간행하였다. 그는 자신이 전문가 가 아니면서도 이 책을 쓴 데 대하여 이렇게 겸손해 했다.
한국에 기독교(개신교)가 전래한지 75년이 되었는데 그 역사책이 한권도 안 나온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물론 영문으로 쓴 책 이나 어느 한 시대만의 국한된 사실을 기록한 책은 몇 종 있습니다). 5년전에 선 교 70주년 기념으로 기독교사가 나올 줄 믿었으나 안 나오더니 이제 75주년에도 또 안 나올 모양이므로 내라도 하나 간단히 써 본다고 쓴 것이 이 적은 책자입니 다. … 이 책은 학계에 무슨 공헌이 되리라고 해서가 아니고 또 많이 아는 것을 자랑하기 위해서도 아니며 그저 이백만 기독신자 중 한국 교회의 역사가 어떤 것 인지를 조금도 모르는 이들에게 우리 교회의 역사의 어느 일면이라도 알려드리려 는 적은 생각에서 써 낸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시는 이들’에게는 대수로운 글이 못될 것을 알면서도 쓴 것이라는 것을 아시는 이들은 요해하심이 있기를 바랍니
다.72)
그는 ‘선교 75주년’을 맞아도 자기의 통사 한권을 갖지 못한 한국기독교의 몰역사성을 안타까워하면서 이 책을 썼다. 이 책의 내용이 풍부한 것은 아 니지만,73) 이 책으로 그는 한국기독교사 전공자들이 갖지 못한, 한국 최초 의 개신교사를 저술한 영예를 차지하게 되었다. 성경의 말씀대로 나중된 자 가 먼저 되었던 격이다. 이것은 자기 시대를 통찰할 줄 아는 역사의식의 소 산이었다.
1960년에 4․19혁명은 한국의 정치상황은 물론 사상적인 풍토도 많이 변 화시켰다. 민주주의의 사상과 체제를 신장시킨 것은 물론 민족주의를 부활 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국사학계에서도 申采浩․朴殷植 등 민족주의 사학자 들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면서 그 연구가 촉진되었다. 그 이듬해 5․16은 4․19로 고양된 민주주의와 민족주의에 대한 기대를 상쇄시켰다. 해방 후 자유당 정권에 이르기까지 기독교인들은 대체로 정권과 유착된 행태를 보여 왔다. 그 때문에 역사의식면에서는 투철한 편이 못되었다. 1960년대의 역사 의식의 수준은 기껏 몇몇 교단사를 편찬하는 정도에서 그쳤고 그 외에는 이 렇다 할 한국기독교사 연구가 이뤄지지 않았다.74) 이것이 한국인에 의해 이
72) 변종호, 머리말 (한국기독교사개요), p.1.
73) 이 책은 제1장 ‘기독교의 한국 전래’에서 경교, 천주교와 개신교의 전래를 다룬 이후, 푸로테스탄트의 한국 개교, 개척지 전교에의 三大 방도, 초기 전도상의 여 러 가지 곤란, 한국 교회의 급속 발전의 원인, 한국 기독교회의 三大 전투, 七大 정변과 선교사의 환경 대응, 시국의 변환과 신앙 사조의 추이, 한국교회사상의 三大 부흥운동, 한국 교회 이합운동의 개관, 한국기독교가 사회에 끼친 공헌, 한 국기독교 75년사의 개관, 각 교파史의 개요, 한국 기독교회의 금일과 명일, 양화 진의 가을 아침, 개신교회 사상의 ‘최초’와 ‘제일’(75항) 및 한국교회사 관계 주요 연대표로 된 국판 199쪽의 책자다.
74) 1960년대에 이뤄진 기독교사에 관한 저술을 대력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郭安全․심재원 공저, 한국교회사(대한기독교서회, 1961) ; 박용규, 한국교회 인물사(한조문화사, 1961) ; 김용해, 대한기독교침례회사(대한기독교침례회
루어진 기독교사 연구의 현황이었다.
1960년대에 한국기독교사 연구에서 특이한 것은 과거 한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한 외국인들의 한국교회사에 관한 연구서가 많이 간행되었다는 점이다. 1960년대에 들어서서 여러가지 이유로 한국에 대한 외국의 선교는 막을 내 리고 있었다. 선교사들 중에는 몇 대에 걸쳐 사역하던 한국을 떠나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때문에 선교사들 혹은 선교사의 후예들 중에서는 한국이라 는 사역지에서 얻은 경험을 학문적으로 정리하려고 하였다. 아마도 그런 이 유로 이 무렵 선교사 혹은 그 후예들이 한국선교사를 저술한 것으로 보인
다.
먼저 스톡스(Charles D. Stokes, 都益瑞)의 HistoryofMethodist MissionsinKorea,1885~1930(1964)75)을 들 수 있다. 그는 1907년 이래 남감리회 선교사로 내한하여 거의 일생을 한국에서 보낸 스톡스(Marion B. Stokes, 都瑪蓮)의 4남으로서 1947년에 예일대학에서 이 논문으로 학위를 받고 한국 선교사로 나와 1955년에 대전 목원대학을 설립하였다. 그는 감리 교회가 한국선교를 시작한 때부터 남북감리회가 통합하는 1930년까지의 선 교의 역사를 정리했던 것이다.
미국 남장로회 선교사로 1950년에 내한, 1977년에 남장로회 해외선교부 총무로 전임한 브라운(George T. Brown, 夫明光)은 남장로회의 한국선교 사를 정리, MissiontoKorea(PCUS, 1962)로 간행하였다. 이 책은 그가 리치몬드의 유니온 신학교에서 학위논문으로 제출한, AHistoryofthe
KoreanMission,PresbyterianChurch,U.S.,from1892to1962 라는, 767페이지나 되는 방대한 양의 논문을 축약하여 출판한 것이다. 이 두 책으로 아직까지 정리되지 않은 미국 남장로회의 한국선교 역사의 공백
총회, 1964) ; 이영린, 한국재림교회사(시조사, 1965) ; 한국기독교장로회총 회편, 한국기독교장로회50년 약사(한국장로회, 1965) ; 서명원(이승익 역), 한국교회성장사(대한기독교서회, 1966) ; 이영린, 한국재림교회사연구(선명문 화사, 1968) ; 김춘배, 한국기독교수난사화(聖文學舍, 1969).
75) 이 책은 1964년에 학위논문을 제출한 원고를 영인하여 배포한 적이 있다.
을 상당한 부분 메울 수 있게 되었다.
1916년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로 내한하여 강계 등지에서 활동하였고, 해 방 후에 다시 내한, 대구 총회신학교 교장과 계명기독대학 학장 역임한
Archibald Campbell(甘富悅)은 한국 선교 경험담을 쓴 TheChristof KoreaHeart(Falco Publishers, 1954)를 남겼다. 그 뒤 그는, 앞에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미국 북장로회의 후기 한국선교사로서 Historyof theKoreaMissionPresbyterianChurchintheU.S.A.II,1935
~1959(Commission on Ecumenical Mission and Relations, the
United Presbyterian Church in the U. S. A., 1964)를 로드스(H. A. Rhodes, 魯解理)와 함께 편집하였다.
이 시기 선교사의 한국선교사 연구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클라크(Allen
D. Clark, 郭安全)가 저술한 History of the Korean Church(CLS, 1961) )와 스웨러(Roy E. Shearer, 徐明源)가 쓴 Wildfire : Church Growth in Korea(1966) ) 두 저서다.
클라크는 그의 아버지 郭安連이 한국선교사로서 기독교사 연구에 많은 공 헌을 남겼던 분이다. 이 책은 “그리스도교가 한국에 들어와서 이 때까지 발 전해 내려온 역사를 기록한 것”으로, 저자는 한국에서 기독교 청년들과 접촉 하는 중에 한국 교회사에 관한 지식이 너무 부족한 것을 느끼고 한국교회사 에 관한 책을 찾았으나 없었기 때문에 직접 쓰기로 결심하게 되었다고 하였 다. 이 책은, 백낙준과 노해리의 저서를 많이 참고하였기 때문에 독창성에 문제가 있지만, 앞의 변종호의 것보다 장․절의 짜임새가 체계적이고 시대 구분도 합리적이다. ) 따라서 이 책의 저자는 한국기독교의 통사를 처음 쓴 선교사로서 기억될 것이다.
스웨러의 한국교회성장사도 한국 교회의 성장에 초점을 두고 서술한 통 사적 성격을 지닌 저술이다. 저자는 “서양 선교사가 한국에서 신흥 교회의 성장을 돕는 데 실제로 참여”하는 방법을 찾기 위해 이 연구를 시작하였다. 그는 한국교회의 놀라운 성장에는 인간적인 방법이나 노력에 의한 것이 아 니라 “오직 성령에 의한 것”이었음을 먼저 고백하였다. 저자는 미국 연합장 로회의 선교사로서 한국장로교회에 중점을 두고 “10년간을 단위로 하여 교 회의 성장률”을 제시하는 방법을 취했다.79) 이 책은, 그 뒤의 한국교회의 성장을 예견이라도 한 듯이, 그 무렵부터 대두하기 시작한 교회성장론의 관 점에서 한국교회사를 보는 안목을 열어 주었던 것이다.
1960년대의 한국기독교사에서 주목해야 할 점의 하나는 신학과 신앙의 토착화 문제라고 할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적 관점에서 한국의 종교와 문화 적 전통을 재해석함으로 기독교 전통과 민족 전통을 배척과 단절 개념이 아 닌, 연결과 보완개념으로 전화시키려는 신학흐름”80)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같은 한국적 신학흐름을 土着化神學(indigenization theology)이라고 한 다. 이 문제에 관해 고민했던 분들 중 尹聖範은 基督敎와 韓國思想(대한 기독교서회, 1964)을, 柳東植은 韓國宗敎와 基督敎(대한기독교서회, 1965) 를 써서 이 분야의 운동에 앞장서고 있었는데, 이같은 저술들은 한국기독교 사 연구사에서도 길이 남을 것으로 간주된다.
2. 역사신학의 한 분야로서의 한국기독교사 - 1970년대
1950년대, 한국기독교계에서는 교단간의 분열이 시작되었고 6·25를 계기 로 외국으로부터 여러 교파와 기관이 들어왔다. 외국 여러 기관과의 관계는
문제, 해방 이후의 한국교회, 변환기에 처한 한국교회.
79) 서명원(이승익 역), 머리말 (한국교회성장사), pp.3~5.
80) 이덕주, 신학연구의 다양성-성공하는 토착화 신학,앞의 책, p.83.
한국내의 교단분열을 가속화시켰다. 그런 가운데 1960년대에는 교단분열이 계속되는 그만큼 교단의 자기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이 필요했다. 교단의 자 기정체성은 신학의 정립과 교회의 제도적인 뒷받침을 통해 이뤄질 수 있었 다. 이를 위해서는 신학교를 설립하고 교역자를 양성해야 했고, 신학교육이 나 교단의 응집력을 위해서는 자기전통을 주입할 수 있는 교단의 역사가 필 수적이었다. 아마도 60년대와 70년대에 교단사의 간행이 부쩍 느는 것은 바 로 이같은 이유가 있었다고 본다. 참고로 교단사는 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지만, 1981년까지의 것을 연도별로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
다.
金庄鎬, 朝鮮基督敎會小史, ) 朝鮮基督敎會傳道部, 1941 김용해, 대한기독교침례회사, 대한기독교침례회총회, 1964 이영린, 한국재림교회사, 시조사, 1965 편찬위원회 편, 한국기독교장로회50년 약사, 한국기독교장로회, 1965 이영린, 한국재림교회사연구, 선명문화사, 1968 김세복, 한국그리스도의교회 교회사, 참빛사, 1969 이천영, 성결교회사, 기독교대한성결교회, 1970 장희근, 한국장로교회사, 아성출판사, 1970 장형일, 한국구세군사, 구세군대한본영, 1975 기독교대한감리회교육국 편, 한국감리교회사, 1975 최 훈, 한국교회박해사, 예수교문서선교회, 1979 이성삼, 한국감리교회사, ) 기독교대한감리회본부교육국, 1980 전용복, 한국장로교회사, 성광문화사, 1980 김장배, 침례교회의 산 증인들, 침례회출판사, 1980
오만규, 재림교회사: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성광, 1980 안수훈, 한국성결교회성장사, 기독교미주성결교회출판부, 1981 편찬위원회 편,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30년사, 종려문화사, 1981
한편 신학교육이 궤도에 오르면서 한국교회사 과목도 신학교 교과목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게 되었다. 여러 과목의 세계교회사 강의 가운데 한국교회 사는 거기에 구색을 맞추는 정도로 시작되었다. 1970년대에 이르기까지 아 예 한국교회사 강의가 없는 신학교도 있었다. 강의가 설정된 초기에는 한국 교회사 강의가 구전에 의한 단계를 넘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교회 내에 전 승되고 있는 구전의 역사가 기껏 강의의 주내용이었다는 뜻이다.
1970년대에 들어서서 한국기독교사를 본격적으로 연구하는 학자와 일련 의 저작들을 남기는 저술가들을 대할 수 있게 된다. 이들은 대부분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로 안수받은 분들로서 그들에 의해서 한국기독교사는 역사신 학의 위치로 접목하게 된다. 70년대는, 당시의 인식으로는, 80년대를 한국 선교 100주년으로 기념해야 하는 시기로서 한국 교회내에서 역사의식이 환 기되기도 하였지만, 유신정권의 탄생 등 군사정권이 강화되면서 교회의 예 언자적 사명이 현실비판 대신 역사를 통하여 자기소리를 내려는 경향도 없 지 않았다. 이 점은 일반학계도 마찬가지였다.
70년대에 들어서서 한국기독교회사 연구를 본격화하는 작업이 閔庚培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는 대학 재학시절부터 한국교회사 연구를 목표로 하고 일관되게 자료를 수집하고 논문을 써 왔다. 그런 학문적인 업적을 바탕으로 먼저 한국의 기독교회사(서울 기독교서회, 1970) )를 썼고, 그 2년 후에 韓國基督敎會史(대한기독교서회, 1972)를 간행하였다. 그는 이 책의 서론 에서 ‘기독교회사’의 개념과 범위를 정리하는 한편 ‘한국 교회사의 제 문제’를 다루었다. 그는 그 이전의 한국교회사 연구에 대한 촌평을 가하면서 한국교 회사 연구에 임하는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있다.
그는 먼저 그의 스승이기도 한 백낙준의 TheHistoryofProtestant MissionsinKorea, 1832~1910을 宣敎史로 보고, 선교사가 갖는 한계를 지적하면서 자신의 입장을 이렇게 밝혔다.
그러나 이 宣敎史는 저자 자신이 시인하고 있는 바와 마찬가지로 순전히 기독 교 선교의 역사이며 따라서 관점과 사료의 대부분이 선교사를 파송한 나라의 교 회와 인사들에게서 수집되었다고 하는, 일방성을 가진다. 한국 교회 쪽의 고백과 증언이 전혀 고려되고 있지 않는 것이다.
교회사를 한국 교회를 주제로 해서 취급하는 한국 민족 교회사의 저술로 시종 하는 방법이 따로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이런 史觀에서 비로소 한국 교회의 체 험과 삶이 혈맥처럼 파동쳐 갈 것이며, 우리 자신의 삶과 신앙이 역역히 뭉클하 게, 호소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방면에 남긴 학적 공헌이 공백임을
한으로 여긴다.84)
민경배의 비판은 백 박사의 연구가, 첫째 ‘순전히 기독교 선교의 역사’이 며, 둘째 史料의 선교사 파송국 편중성 때문에 한국 교회 쪽의 고백과 증언 이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는 것이며, 셋째 따라서 ‘한국 교회의 체험과 삶이 혈맥처럼 파동’치는 그러한 방면의 학적인 공헌이 될 수 없다는, 세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스승의 그늘을 벗어나 새롭게 한국기독교사 연구를 시작하 려는 민경배의 연구방향을 감지케 하는 한편 사제간의 긴장관계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민경배의 비판 중에서 백 박사가 “자신이 시인하고 있는 바 와 마찬가지로 순전히 기독교 선교의 역사”라고 했다고 한 부분은 어디에 근 거한 것인지 분명치 않지만, 사료의 편중성 문제는 일찍이 山口正之가 “이 책이 지니는 전면적인 결함이라고 할 것은 조선측의 사료가 일체 묵살된 것” 이라고 지적한 것과 같다. 그러나 山口正之는 이렇게 된 이유를 “저자의 알 바이트가 주로 미국에서 된 것으로 할 수 없었다”고 여지를 열어 놓았다.
1972년에 이같이 민경배의 비판이 나오자 백 박사는 그 이듬해 韓國改新敎史(연세대학교 출판부, 1973)를 번역, 출판하면서, 영문판(1929년)과
84) 민경배, 韓國基督敎會史(대한기독교서회, 1972), p.18.
는 다른 내용의 自序를 통해, 앞의 첫째와 둘째번 비판에 대해서는 정면 대 응하고, 셋째번 비판에는 답변을 보류한 채 그 답을 독자에게 맡겨 버렸다. 민경배의 비판에 대한 백 박사의 답변에서, 자신은 “기독교사는 그 본질에서 선교사”이며, 따라서 “우리 한국개신교사도 선교사가 되어야 한다”는 관점을 분명히 하였고, 사료의 편중성 문제는 山口正之와 민경배에게 함께 답하기 라도 하듯, “이 연구가 진행되던 때와 곳에서는 본래 여기에 인용한 자료 이 외의 한국문헌 입수는 불가능한 실정”이었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 민경배가 인용한 사료의 양이나 질을 놓고 볼 때, 백 박사의 연구에 대해 사료편중을 들어 비판할 수 있겠는지는 의문의 여지가 없지 않다.85)
閔庚培는 또한 김양선의 韓國基督敎解放十年史에 대해서도 “확실히 여 기에도 민족 교회사의 의식이 바탕처럼 깔려 있지는 않았다.”고 하면서 자신 의 ‘민족 교회사’의 잣대로 비판의 기준을 삼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여기에 다 그는 2년 후에 한국민족교회형성사론(연세대학교 출판부, 1974)을 써 서 자신의 ‘민족교회론’을 확고하게 세워갔다. 이런 이유로 해서, 그가 백 박
85) 의문의 근거는 이렇다. 민경배의 저술은 백 박사보다 43년이나 뒤에 간행된 것 이어서, 여건 상 한국측의 사료는 희귀본에 해당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섭렵할 수 있는 환경이었다. 그러나 민경배는 백 박사를 비판할 정도로 한국측의 자료를 섭 렵하지 못했으며 따라서 그가 말하는 대로 “한국 교회 쪽의 고백과 증언”이 제대 로 고려된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백 박사가 저술의 하한연도로 잡은 1910년까지의 자료에 국한하는 것이다. 참고로, 백 박사가 인용한 각주는 1,574 개인데, 그 중 프로테스탄트 선교 이전의 것 183개를 제외하고 나면, 1,391개가 되는 셈이다. 그 중 대부분은 선교사들의 보고서나 선교본국의 자료들이고, 한국 쪽의 자료로는 朴殷植의 韓國痛史(1915)나 ‘韓佛條約’(1887), 헐버트의 The PassingofKorea(1906)나 이광수의 “Defects of the Korean Church Today” (KMF, Vol Dec., 1918) 등이 인용되고 있는 정도다. 거기에 비해 백 박사의 개신교사 서술영역(1832~1910)에 해당하는 민경배의 저술(pp. 99~ 231)에는 각주가 458개인데 선교사나 선교본국의 것이 아닌 것은 대략 150여개 가 넘는다. 그 중 1차자료에 해당하는 것은 朝鮮王朝實錄과 일본측 자료, 죠션그 리스도인회보 등 몇몇 교회사 자료에 불과하고 대부분이 백 박사의 연구서 출판 후에 간행된 제2차자료들이다. 민경배가 인용한 1차자료에 해당하는 것들은, 백 박사가 연구하던 그 무렵에는 공개 또는 간행되지 않은 것이어서, 백 박사가 한 국에서 연구했다 하더라도 이용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사의 교회사를 ‘宣敎史’로 명명한 것처럼, 그의 역사학도 후학들에 의해 ‘민 족교회사관’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이런 여러 관점을 통해서 볼 때 민경배의 韓國基督敎會史(대한기독교서회, 1972)는 ‘민족교회사관’이라는 사관을 토 대로 쓰여진 것이며, 그런 점에서 스스로 확실한 사관을 의식하면서 쓴 최 초의 通史라고 할 수 있다.
민경배의 한국기독교사 연구사상의 의의는 또 있다. 아마도 그는 한국교 회사 연구를 필생의 전공분야로 설정하고 거기에 전 생애를 건 최초의 학자 가 아닌가 한다. 그 전에 백낙준도 평생을 學人으로 살기를 원하였지만 자 신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김양선 또한 한국기독교사 연구에 평생을 걸었던 학자라고는 할 수 없다. 거기에 비해 민경배는 시종일관 한 길을 걸었다. 그 결과 남다른 업적을 남기기도 하였다. 韓國基督敎會史는 두 번이나 개정판 을 내었고, 그 밖에도 한국의 기독교(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75), 敎會와 民族(대한기독교출판사, 1981), 순교자 주기철 목사(대한기독교서회, 1985), 알렌의 선교와 근대한미외교, 韓國基督敎社會運動史(대한기독교출판사, 1987), 日帝下의 韓國基督敎 民族․信仰運動史(대한기독교서회, 1991) 등의 저서 와 많은 논문들을 남겨 한국기독교사 연구의 거목으로서 그늘을 널리 드리 우게 되었다.
1970년대에 주목할 만한 업적을 남긴 분으로 吳允台를 꼽을 수 있다. 그 는 동경한인교회 목사로서 오랫동안 일본에 있는 한국기독교사 관계 자료를 수집하였는데 그것을 토대로 괄목할 만한 업적을 남겼다. 그는 1968년에 日語로 韓日基督交流史(한국어판은 1980년 혜선문화사에서 간행됨)를 간행 한 이래 70년대 이후 4권의 韓國基督敎史86)를 저술하여 한국기독교사 연 구의 지평을 넓히는 데에 크게 공헌하였다. 그의 저술들은 때로는 중요한
86) 오윤태의 韓國基督敎會史는 제1권 韓國景敎編을 제1편 東方으로 傳來된 基督敎 라 하여 1973년에 간행한 이래, 제2권 韓國가톨릭史 I編을 제2편 가톨릭 敎會의 傳來와 成長 (1975)으로, 제3권 韓國가톨릭史 II編을 제3편 가톨릭 敎會 의 迫害史와 新敎前史 (1979)로, 제4권 改新敎傳來史를 先驅者 李樹廷編
(1983)으로 각각 간행하였다.
자료를 싣고 있어서 연구자들에게 큰 도움이 되지만, 자료 나열과 서술이 중복되는 등 저자의 논지가 분명하지 않은 점이 더러 있다. 오윤태는 韓國基督敎會史 제1권을 韓國景敎史編으로 하고 한국기독교사
연구의 범위를 景敎에까지 확대하면서 이렇게 썼다.
東洋的 惰怠의 정치윤리 속에서 또한 생명의 경외감을 잊어버린 虛無의 철학 속에서도, 꺼질 줄 모르는 민족의 등불을 지켜온 이 민족 후예들의 구름기둥은 무엇이었던가? 또한 고대 삼국시대부터 이 땅을 지배해온 大衆佛敎의 내면에는 무엇이 그 支柱가 되어 왔던가를 살피면서, 극동의 이스라엘이라 할 한국역사의 기독교적 의미를 살피려 한 것이 이 책을 쓰는 의도였다. 使徒 도마의 동방선교 는 서역과 인도와 중국을 거쳐, 이미 예수님 시대의 기독교적 정신과 종교적 관 습이 이 민족의 역사와 문화 속에 동화하고, 이것이 오늘과 같은 기독교적 터전 이 되었음을 저자는 看過하려 하지 아니한다.… 이 민족사를 재음미함으로써, 민 족문화의 기저와 그 윤리적 근거와 및 이웃 나라들과의 관계에까지 시야를 넓혀 보려 한 것이 한국기독교사를 다시 쓰는 저자의 욕심이었다. 따라서 我田引水格 의 기독교 우월론에 스스로 도취하려 함이 목적이 아니며, 佛敎와 道敎와 民俗信仰 속에 감추인 신비한 신앙적 근거를 애써 부인하려는 의도도 없었음이 사실이 다. 다만 他宗敎 속에 감취인 기독교적 산 신앙의 실마리를 풀어 오늘의 역사에 연결해 보려는 욕심이 過했던 것만은 고백해도 좋겠다.87)
그의 고백에서 보여지듯이 그는 한국에 전래된 타종교 특히 불교의 大乘佛敎와 彌勒佛信仰 속에 기독교적 요소가 있었다고 보았고, 불교 예술 속에 도 그러한 요소가 있다고 설명하였다. 이렇게 그가 경교의 전래와 관련하여 이 책을 저술한 의도는 분명하지만, 사료적인 뒷받침이 이를 담보하지 못하 는 데다가 고증하는 자세도 ‘욕심이 과’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1960년대를 전후한 시기부터 한국기독교사의 산 증인으로 왕성하게 저술 활동을 계속하고 있는 全澤鳧는 ‘토박이 신앙’을 강조하면서 기독교 신앙․ 신학의 한국적인 맥락을 찾는 데에 열중해 왔다. 그는 인간 신흥우(1971),
87) 吳允台, 韓國基督敎會史 제1권을 韓國景敎史編(惠宣文化社, 1973), p.18, 저 자의 말.
월남 이상재(1977) 등의 한국YMCA를 이끌었던 인물들의 전기와 한국 기독교청년회운동사(1978)를 쓰는 한편 토박이 신앙산맥 1, 2(1978/ 1982)를 썼다. 그는 또 서울YMCA 총무로서 한국교회 연합과 일치 운동에 관여하였던 만큼 한국에큐메니칼운동사(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1979)를 써서 교회연합운동의 역사적인 근거를 제시하기도 하였다. 그는 또한 토박 이신앙의 관점에서 이 땅에 묻힌 선교사들의 행적을 살피기도 하였는데 그 것이 이 땅에 묻히리라-양화진외인열전(홍성사, 1986) 이다. 그가 1980 년대 한국기독교 ‘선교100주년’을 맞아 민경배, 송길섭, 이만열 등과 함께 기독교서회에서 기획한 ‘韓國基督敎百年史大系’의 제1권인 韓國敎會發展史 (대한기독교출판사, 1987)를 집필하였다.
1970년대에 보인 두 권의 통사도 기억하는 것이 좋겠다. 蔡基恩의 韓國敎會史와 李永獻의 韓國基督敎史이다. 전자는 기독교 언론인으로 활동 하였던 저자가 총회신학교에 출강하면서 오랜 동안 한국교회사에 관해 견문 하고 수집하였던 바를, 1972년 2월부터 ‘평신도를 위한 한국교회사화’라는 제목으로 40회에 걸쳐 기독신보에 연재한 것을 다듬어 엮은 것이다.88) 후자는 장로회신학교에서 교회사를 강의하였던 저자가 평신도들을 위해 쉽 게 써달라는 월간 새생명사의 요청에 따라 7년간 연재한 것을 묶은 것이 다.89) 이 책은 해방 후의 교회사-한국교회의 재건과 시련, 분열과 종파운동 및 평신도 신학운동, 토착화운동, 복음화운동 등-에 대하여 다른 통사보다도 상대적으로 비중을 더 두고 집필한 듯한 느낌을 받는다. 이 두 책은, 두 저 자가 모두 신학교에서 한국교회사를 강의하였고, 신문사와 잡지사로부터 연 재 부탁을 받아 집필을 시작했으며, 평신도를 위해 쉽게 쓰도록 했다는, 공 통성을 갖고 있다. 평신도를 위한 ‘쉬운’ 한국교회사가 필요했다는 사실은 이 무렵에 평신도에게 한국교회사를 가르쳐야 할 정도로 그들이 성장하고 있었 음을 감지할 수 있다.
88) 蔡基恩, 韓國敎會史(기독교문서선교회, 1977), 머리말. 89) 李永獻, 韓國基督敎史(컨콜디아사, 1978), 머리말.
70년대에는 한국기독교의 시대사와 분류사도 선을 보였다. 그러나 이들 작업들이 엄격한 역사연구의 방법을 거쳤다거나 자기역사에 대한 깊은 고민 을 통해 저술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는 것들도 없지 않았다. 목회자, 문필가로 찬송가 작사에도 공헌하였으며 감리교신학교 등에서 교수 로도 활동한 바 있는 李浩雲의 사후에, 그의 韓國敎會初期史(대한기독교 서회, 1970)가 간행되었다.
김양선의 조카로서 일찍부터 기독교사연구 분위기에 익숙해 왔던 金光洙 는 東方基督敎史(기독교문사, 1971), 아시아基督敎擴張史(기독교문사, 1973), 韓國基督敎傳來史(한국교회사연구원, 1974), 韓國基督敎人物史(기독교 문사, 1974), 韓國基督敎成長史(기독교문사, 1976), 韓國基督敎受難史 (기독교문사, 1978) 등 7년 사이에 무려 6권이나 저술하였다. 그는 이 무 렵 그의 숙부 김양선의 韓國基督敎史硏究(기독교문사, 1971)도 편집하였 고, 長老會神學校七十年史(1971)와 大韓예수敎長老會最近史(1974)도 집필한 것으로 소개되고 있어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하였음을 알 수 있다.
70년대에 간행된 분류사 혹은 기관사로서는 尹春炳의 韓國基督敎新聞雜誌百年史(대한기독교출판사, 1975)와, 신사참배와 공산주의에 항거한 재건 교회의 역사를 다룬 崔薰의 韓國敎會迫害史(예수교문서선교회, 1979), 한 국YWCA50년사편찬위원회의 한국YWCA반백년(1976), 김남식의 韓國基督敎勉勵運動史(성광문화사, 1979) 등이 있다. 이 무렵, 앞에서도 언급 한 것처럼, 전택부가 한국기독교청년회운동사(1978)와 한국에큐메니칼운 동사(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1979)를 간행하였다.
특히 이 때 기독교여성사와 관련하여, 김현자의 기독교여성운동사(한국 기독교교육사, 1974)가 간행된 데 이어, 이원화의 서울YWCA 50년사(YWCA, 1976)가 출판, 한국여성운동사를 조명하는 시각이 열리게 되었고, 주선애의
장로교여성사(대한예수교장로회 여전도회전국연합회, 1978)과 장병욱의 한국감리교여성사(성광문화사, 1979) 등의 교단적인 차원의 여성운동사가
출간되었다.90)
해방 이후 1970년대까지에 이르는 한국기독교사 연구는 이제 겨우 신학 교에서 역사신학의 한 분야로 강의되는 정도였다. 그러나 70년대에 들어서 서는 연구의 질적인 면이나 양적인 면에서 도약이 이뤄졌다. 한국기독교사 에 관한 알찬 통사가 저술되어 교회사의 틀이 접혔고, 한국기독교사 연구를 필생의 사업으로 삼겠다는 학자도 나왔으며, 기독교사를 연구, 서술하는 방 법과 史觀도 학적인 체계를 갖추었던 것이다. 그리고 80년대의 한국 ‘선교 100주년’을 역사연구의 측면에서 준비하는 모습도 보여지고 있었다.
3. 교회사와 국사학의 만남 - 1980년대 이후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국기독교사 연구의 지형이 새롭게 변화되기 시 작했다.
우선 정치환경에서 79년 10․26으로 유신정권이 무너지고 ‘서울의 봄’을 기약하는 분위기가 조성되는 듯했으나, 그 이듬해 신군부의 등장으로 극우 적인 파쇼군부정권이 들어섰다. 이러한 정치환경의 악화는 일반사학계에서 도 그러했지만, 기독교계에서도 새로운 역사의식을 환기시켰다. 종래 인권과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던 진보적인 기독교계는, 그 운동을 통해 역사의 주인
90) 1980년대 이후에 가면, 한국기독교여성사 관계의 저술들이 많이 나오게 되었다. 박순경의 한국민족과 여성신학의 과제(대한기독교서회, 1983)가 여성운동의 신학적인 과제를 제시한 데에 이어, 김영삼의 김마리아(한국신학연구소, 1983) 전기가 간행되었고, 李愚貞이 한국기독교 女性百年의 발자취(민중사, 1985)를 써서 여성운동사 탐구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이어서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 사업협의회 여성분과위원회에서 여성! 깰지어다, 일어날지어다, 노래할지어다: 한국기독교여성100년사(대한기독교출판사, 1985)와 배가례의 성결교회 여성 사, 1907~1987(기독교대한성결교회출판부, 1987), 김명현․엄마리 편의 민 족사 속의 감리교 여성: 연선교회 월례회 순서 공과(기감여선교회 전국연합회, 1989), 이우정․이현숙의 여신도회 60년사(한국기독교장로회 여신도회전국연 합회, 1989) 등이 간행되었다. 한편 이덕주는 한국교회사의 관점에서 한국교회 처음 여성들(기독교문사, 1990)과 태화기독교사회복지관의 역사(태화기독교 사회복지관, 1993) 및 한국감리교여선교회의 역사, 1897~1990(기감여선교회 전국연합회, 1991) 등을 썼다.
공으로서의 민중을 발견하게 되어 민중신학을 점차 정립하게 되었다. 한편 그 운동의 한계상황과 관련해서는 항상 안보라는 벽을 의식하게 되었는데, 안보는 곧 분단문제에서 오는 것이며 분단문제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통일이 불가피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어, 이제는 인권․민주화 운동을 위해서도 통일운동에 나서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한국 기독교계가 1980년대에 들어 서서 통일운동에 앞장서고 통일신학을 말하게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1980년대는 한국교회사적으로 볼 때,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었다. 1984년에 가톨릭이 200주년을, 개신교가 100주년을 맞는 해였기 때문이다. 기독교계에서는 80년대에 들어서면서 ‘선교100주년’ 기념사업을 계획하는 일에 열중하였다. 기념사업은 거의 역사적인 성격을 띠는 것이 많았다. 식자 들 중에는 100주년을 맞아 가장 의미있는 일은 정확한 역사를 쓰거나, 역사 를 쓸 수 있도록 흩어져 있는 기독교사 관계 사료를 수집해야 한다고 주장 하였다. 이런 교계의 분위기에 따라 개교단 혹은 개교회적으로 역사편찬위 원회를 조직하여 역사를 편찬하자는 의견들도 있었고 실제로 조직하는 경우 도 없지 않았다.
‘선교100주년’의 역사를 정리하려는 시도는 대한기독교서회(총무: 성갑식) 에서 먼저 계획되었다. 기독교 연합기관으로 1890년에 설립된 기독교서회는 1984년과 1990년에 맞을 의미있는 시간들을 기념하기 위하여 ‘한국기독교 백년사대계’를 간행하기로 하였다. “과거 100년의 역사를 현 시점에서 재검 토하고 앞으로 선교 2세기를 전망하도록”91) 하자는 것이었다. 1982년부터 계획된 이 사업은 1987년 4권의 책이 출간됨으로 마무리되었다. 全澤鳧가 집필한 韓國敎會發展史를 제1권으로 하여, 宋吉燮이 쓴 韓國神學思想史, 李萬烈이 쓴 韓國基督敎文化運動史 그리고 閔庚培가 쓴 韓國基督敎社會運動史 등 4권이 계획대로 간행되었으나, 원래 계획한 年表는 중도에 좌초 되고 말았다. 이에 앞서 간행되기 시작한 기독교문사의 基督敎大百科事典도 한국기독
91) 성갑식, 간행사 (韓國敎會發展史, 대한기독교출판사, 1987), p.3.
교 100주년을 어느 정도 의식한 듯한데, 이 사전의 간행이 한국기독교사 연 구에 큰 촉진제가 되었다. 이 사전은 10여년 전부터 구상하고 자료수집에 5 년여를 경과하여 그 첫권을 1980년에 출판하였다. 이 사전에는 한국교회사 관계 항목(사건과 인물)이 많이 수록되었는데, 이는 한국기독교사 관계 자 료를 많이 모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때부터 수집된 기독교문사의 한국 기독교사 관계 자료는 이 대백과사전의 편찬에만 활용된 것이 아니고 그 뒤 이 방면 연구자들에게 활용되어 한국기독교사 연구를 한 차원 끌어올리는 데에 크게 공헌하였다. 그리고 기독교문사의 이 자료는 이 방면의 학자들을 발굴하고 그들의 공동연구를 가능하게 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92) 한국기독교사 연구사에서 획기적인 사건의 하나는 1982년 9월 말 한국기 독교사연구회가 창립되었다는 것이다. 이 연구회는 지금까지 개별연구 단계 에 머물렀던 한국기독교사 연구를 공동연구의 차원으로 끌어올렸고 새로운 자료의 발굴과 복간에 힘썼으며, 연구방법에서 역사과학적인 방법을 더욱 발전시키게 되었다. 회원 중에는 역사신학을 전공한 이들도 있었지만, 일반 국사학을 전공한 학도들도 있어서, 이 연구회의 결성으로 과거 역사신학적 인 관점에서 일방적으로 진행되어 오던 한국기독교사 연구가 자연스럽게 역 사학적인 문헌비판과 고증을 중시하는 학문적인 풍토가 조성되었고, 회원들 에게는 ‘신앙과 학문’을 같이한다는 동지애적인 유대가 아주 끈끈하였다.93) 이 연구회는 매월 연구발표회를 가졌고 일년 일차씩 한국기독교 유적지를 답사하였으며, 1985년 4월 5일(이 날은 100년전 이 땅에 복음선교사 아펜 젤러와 언더우드가 제물포에 도착한 날이다)을 기해서는한국기독교사연구 라는 격월간 소식지를 간행하여 회원들의 연구를 발표하는 장을 마련하기
92) 기독교문사40년사편찬위원회, 책에 담은 복음과 나라사랑(기독교문사, 1995),
p.182.
93) 초기 회원들은 이만열, 박효생, 윤경로, 김흥수, 이덕주, 서굉일, 이진호, 조영 렬, 심한보, 서정민, 김형석, 김승태, 한규무 등이다. 이 중 심한보는 자료를 복 간하는 데에 남다른 열성과 희생을 감수하였다. 한국기독교사 연구가 활발하게 된 데에는 자료의 간행 보급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인데 이 점에서 심한보의 공헌 과 기독교문사의 협조는 길이 기억될 것이다.
도 하였다.
이 연구회가 모태가 되어 1990년 9월 27일에는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가 창립되었다. 자료의 수집과 공람, 연구인력의 조직화와 연구재정의 확보, 연 구의 체계화와 계속성 유지 등을 위해서 그리고 이제 한국에서도 한국기독 교사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기관이 필요하다는 판단 등이 복합적으로 상승 작용을 일으켜 출발하게 되었다. 연구소로 발전한 뒤에도 매월 연구발표회 를 계속하였으며 계간으로 소식지를 간행하는 한편 1991년 7월부터는 연 2 회를 목표로한국기독교와 역사라는 학술잡지를 간행, 연구를 발표할 수 있는 공동의 장을 마련하였다. 그 동안 연구회와 연구소에서 복간하여 보급 한 자료들94)은 한국기독교사 연구의 저변을 확대하는 일에 크게 공헌하였 다. 연구소에서는 또 통사 한국기독교의 역사 I, II(기독교문사, 1989, 1990)를 간행하였는데 한국기독교사의 연구성과를 잘 반영하였을 뿐 아니 라 기독교사 인식을 한 차원 높였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논문선집과 연구총 서 번역총서 등 수십 권을 간행하였다.
한국에서 교회사 관계 연구단체로는 역사신학을 교수하는 학자들을 회원 으로 하여 1960년대에 조직된 韓國敎會史學會가 있는데, 초기에는 학회지를 간행하고 朝鮮예수敎長老會史記 下卷을 간행하는 등 활발하게 움직였다. 90년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의 설립을 전후하여 최근에는 여러 연구기관과 역사자료실 등이 설립되었다. 그 중 한국감리교회사학회와 한국교회사학연 구원(1997) 및 한국교회사문헌연구원(원장 : 심한보) 등이 저술, 발표, 복 간 사업 등을 비교적 활발하게 진행시키고 있다.
1980년대 이후의 연구성과에 대해서는 신광철이 비교적 자세히 언급한 바 있다.95) 때문에 필자는 먼저 아래와 같이 80~90년대의 업적(단행본 수
94) 복간 자료에는 선교사들의 저술 등 20여종을 비롯하여 기독신보 (1915~1937)와 1905년부터 1941년까지 선교사들이 연합하여 간행한 월간지 The Korea
MissionField 등이 있다.
95) 신광철,한국개신교사 연구사-한국개신교사의 총체적 이해를 지향하며-,앞의 책, pp.191~195 참조.
준)만 나열하고, 이 시기의 한국기독교사 연구의 특징을 간단히 언급하고자 한다.
1980년대~1990년대 한국기독교사 관계 단행본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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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이 목록은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의 도움을 받아 조사하여 저자명 가나다 순으로 배열한 것이다. 필자의 분류기준에 따라 개 교단사와 전국적인 규모의 기관사는 수록하였지만, 개별적인 노회, 연회 및 개 교회사와 인물의 전기 등은, 학문적인 업적으로 충분히 간주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외되었다. 조사의 미비로 마땅 히 이 목록에 들어가야 할 것 중에서도 누락된 저작들이 없지 않을 것이다. 이 점 독자들의 이해를 구하며 기회가 닿는 대로 보완토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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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김영재의 이 책은 특히 서론 : 한국 교회사 연구방법론이 주목된다. 이 서론 은 이미 신학지남 (199호, 1983년 가을)에 게재했던 것으로, 한국교회사 중요 저서 및 논문을 소개하고 한국교회사와 교회의 전통, 한국교회사의 과제 등을 기 술하였는데, 한국교회(사)를 대하는 저자의 신학사상과 인품이 잘 드러나는 글이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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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90년대 한국기독교사 연구의 경향성은 우선 1984년 한국기독교 ‘선교100주년’을 맞아 역사의식이 고양됨으로 교회사에 대한 인식이 대중화 되는 추세를 들 수 있다. 이 무렵에 개교회의 역사가 많이 출간되었다는 것 도 이와 무관하지 않는데, ‘20년사’, ‘30년사’ 같은 명칭을 붙여 개교회사를 쓰겠다고 하는 것은 ‘역사’를 모르고 하는 짓이다. 역사는 사실의 나열이나 연혁을 기록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실들을 일관되게 꿰어 그 인 과관계를 정확하게 해야 하고 그런 뒤에 해석과 평가와 褒貶을 가하는 작업 까지를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교회들의 역사의식이 고양되는 것은 환 영할 만한 일이지만, ‘역사’라는 명칭을 무분별하게 남용하여 개교회사, 그것 도 50년도 안되는 역사를 쓰는 데까지 적용하겠다고 하는 것은 삼가야 할 점이라고 본다. 그럴 경우에는 ‘역사’라는 말 대신에 몇 년‘誌’ 정도로 하면 적당할 것이다.
역사의식의 대중화는 이 시기에 교단사가 많이 출판되었다는 데서도 감지 된다. 역사의식의 대중화가 교단사 편찬에까지 이르게 된 것은 나무랄 수 없지만, 우리의 경우, 사분오열 분열된 교단이 분열을 정당화하고 분열된 자 기존재를 합리화하기 위해서 역사를 편찬한다면, 이것은 금물이 아닐 수 없 다. 이럴 경우, 교단사는 분열을 합리화하는 바탕 위에서 자기 교단의 역사 와 전통을 심화시키는 매개체가 되기 때문에 교단사가 많아지는 것은 그만 큼 교단의 통일을 더 어렵게 만든다는 우려를 낳게 된다.
1980~90년대의 한국기독교사 연구의 경향으로 교회사와 일반 역사학과 의 만남이 본격화되었다고 지적하였다. 일반 역사학을 공부한 이들은 주로 국사학의 근현대사를 공부하다가 기독교의 반봉건개화운동, 반외세민족운동 과 독립운동, 농촌운동 혹은 지성운동과 문화운동 등과 관련하여 한국기독 교사 연구에 관심을 갖게 된 이들이다. 과거 한국기독교사가 역사신학의 일 부로서 연구될 때는 때때로 사실을 구명함에 역사학적인 방법이 소홀하거나 무시된 적이 있었다. 그러한 사실 구명에 앞서서 해석과 평가를 성급하게 하려는 경향 때문에 잘못된 사실의 인과관계를 가지고 역사를 해석하고 평 가하는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 또 역사연구에서 지나치게 어떤 사관을 고집 하는 경우도 있었고, 사관을 갖지 않고서는 역사적 사실을 대할 수 없는 것 처럼 연구자세를 강조하게 되어 역사연구의 기본 핵이라 할 사실 규명을 소 홀히 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국기독교사 연구가 일반 국사학과 만남으로 그 방법론을 통해 문헌비판과 사실 고증이 한층 탄탄하게 되었음은 말할 필요 도 없다. 이 점은 한국기독교사연구가 역사과학의 수준으로 끌어올려지는 데에 큰 힘이 되었을 것이다.
일반 국사학계가 기독교사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의 하나는,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한국기독교사연구회와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에서 복간한 자료들 이 각 도서관에 배포된 것과 관련이 깊다. 기독교 관계 자료의 보급이 학자 들로 하여금 그 방면에 관심을 기울이도록 하였다는 뜻이다. 일반대학에서 한국기독교사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최초의 논문을 윤경로의 105인사건과 신민회 연구(일지사, 1990)라고 생각된다. 그 후 강인철, 이진구, 조영렬, 신광철, 한규무, 강명숙, 성백걸 등이 국내에서 학위를 취득하였고, 이들을 이어 일반대학원에서 많은 석․박사 후보생들이 한국기독교사를 학위논문의 테마로 잡고 있다. 최근 해외에서 한국기독교사 연구와 관련하여 박사학위 를 취득한 이들은, 미국에서 박정신(워싱턴), 박명수(보스턴), 신기영(애리 조나), 최재건(하버드), 이철(보스턴), 이승준(드루), 류대영(밴더빌트), 장 동민(웨스트민스터), 영국에서 고무송(버밍햄), 프랑스에서 김경빈(소르본 느), 일본에서 양현혜(동경대), 조재국(同志社大), 호주에서 이상규 등이 있
다.
일반 국사학을 전공하는 학도들이 기독교사연구에 투신함으로 한국기독교 사와 민족운동사의 연구분야가 더 밀접해졌다. 특히 한말 일제하의 민족운 동 중 기독교민족운동 분야설정이 가능하게 되어가고 있다. 이것은 학문의 한 분야로서뿐만 아니라 독립운동의 실체적 모습에서 민족운동의 한 유파로 서의 ‘기독교민족운동’을 의미하는 것이다. 윤경로의 일련의 연구나 한규무와 강명숙 등의 연구는 이러한 가능성을 예견시켜 주고 있다. 또 1930년대 후 반부터 전시체제가 강화되고 신사참배가 강요되자 한국교회는 완강히 저항 하면서 신앙과 민족의 문제를 일치시키려고 했는데, 이에 대한 연구도 재일 학자 韓晳羲와 구라다마사히코(藏田雅彦) ) 등의 저술과 김승태의 일련의 업적들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민족문제는 한말의 반봉건운동과 일제하의 민족모순을 극복하려는 독립운 동만에 한정되지 않는다. 민족 분단의 문제는 더 심각한 민족문제임에 틀림 없다. 이것은 남과 북의 이념적인 대결에다 기독교 자체가 이념대결의 한 축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문제의 해결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기독교계 는 이 문제를 풀기 위하여 민간단체로서는 가장 먼저 자신을 열어 놓고 북 쪽의 형제들을 끌어안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말하자면 文益煥으로 대표되는 한국의 진보측에서는 80년대 이래 민간 통일운동의 최선봉에 서서 이를 이 끌어갔고, 자신들의 평화통일에 대한 입장을 1988년 2월 29일민족의 통 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을 발표하게 되었다. 이 선언이 계기 가 되어 1990년대에 들어서서는 한국 기독교계의 보수진영은 북한을 돕는 일에 앞장서게 되었다.
민족의 화해와 통일의 문제를 역사적인 관점에서 접근한다는 것은 한국기 독교사 연구의 중요한 분야가 되고 있다. 이 분야와 관련, 김흥수의 일련의 연구와 사와마사히코(澤正彦)의 저술100)은 대단히 중요하며, 한국기독교역 사연구소가 편찬한 북한교회사(1996)는 기독교의 통일방향을 설정하는 데에 날로 그 유용성을 더해갈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 가운데서 한편에서는 한국기독교의 통일운동사를 정리하는 작업도 진행되고 있다.101)
한국기독교사 연구의 궁극적인 목적의 하나는 한국의 기독교문화를 창달 하기 위한 기반조성이라고 할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를 한국에 단순히 이식 하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한국문화와의 접목을 통해서 이룰 과 제다. 이를 위해서는 한국의 문화 전통과 만나 형성되고 있는 한국기독교에 대해 먼저 역사학적인 접근과 분석으로 그 정체성(identity)을 찾아야 한 다. 이런 문제에 대해 일찍부터 고민해 온 이덕주는 역사적 사실과 신학적 해석을 결부시킴으로 한국기독교의 정체성을 더욱 명료하게 드러내고자 노 력해 왔는데, 이같은 평소의 생각은 최근 한국의 신학사상을 정리하는 작 업102)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역사학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이런 작업은 신학과 종교학 등 인접학문의 뒷받침을 받는 역사연구를 통해서라야만 가능
100) 사와마사히코 저, 김숙자․강문규 역, 남북한기독교사론(原題 南北朝鮮基督敎史論 ; 민중사, 1997) 등.
101) 참고로 필자의 한국기독교 통일운동의 전개과정(민족통일을 준비하는 그리 스도인, 두란노, 1994)과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의 역사적 의의 (기독교사상, 1995년 1월호)도 그런 작업의 하나다.
102) 이덕주, 신학연구의 다양성-성공하는 토착화 신학(해방후 50년 한국종교연 구사, 한국종교학회 편, 도서출판 窓, 1997).
한 것으로, 각기 다른 출발선에서 시작했으나 비슷한 고민을 하면서 한국기 독교사 연구에 매진해온 서정민과 신광철은 이런 점에서 주목된다.
80-90년대에 들어서서 한국기독교사 연구자들이 국내의 기독교 사적 답 사를 통해 사실을 확인하고 해석의 다각성을 시도하며 기독교 문화재에 대 한 개념을 쌓아가고 있는 것은 고무적인 현상이다. 또 해외와의 학술교류를 통해 연구의 시야를 넓히고 학술정보를 원할하게 해 왔다. 1990년 2월과 91년 8월의 한국기독교 사학자들과 일본 교회사학계와의 상호방문 학술교류 를 진행시키면서 한일 양국민에게는 물론 양국교회 사이에도 앙금처럼 남아 있는 신사참배 문제와 3.1운동의 문제를 다루어 양국교회가 그리스도 안에 서 과거사를 해소하기 위하여 먼저 어떤 자세를 가지고 어떤 역할을 감당해 야 할 것인가를 솔직하게 논의할 수 있었다. 또 서로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 키기 위해 교회사 관계 저술들을 서로 번역, 보급하는 작업도 꾸준히 진행
시켜 왔다.103)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최근 한국기독교사 연구에서 선교사들과 재 외한인들에 대한 연구가 서서히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앞에서 초기 선교 사들의 傳記에 대해 언급하였거니와, 최근에 와서 내한선교사들에 대한 연 구가 서서히 일어나고 있다.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에서는 김승태․박혜진 공편의 내한선교사총람 1884~1984(1994)을 펴내어 선교사 연구의 기 초자료를 조사하여 제시한 바 있고, 선교사의 저서 등 평소에 대하기가 어 려운 자료를 복간하고 있으며,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 소장의 자료를 마이크 로필름화하여 연구자들이 공람할 수 있도록 하였다.104)
103) 예를 들어, 한국에서는 일본의 유명한 교회사학자인 도히아키오(土肥昭夫) 교 수의 일본 기독교의 사론적 이해(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3)와 일본기독 교사(기독교문사, 1991)가 번역되었고, 일본에서는 민경배의 한국기독교사 (1974)와 유동식의 한국의 종교와 기독교(1975), 한국기독교신학사상사 (원제목: 韓國神學의 鑛脈, 1986), 한국의 기독교(1987) 등이 번역되었고, 최근에는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의 한국기독교의 역사 I, II(1996, 1997)가 교단출판사 등에서 번역, 출판되었다.
104)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소식지 및한국기독교와 역사광고란 참조.
초기 선교사들에 대한 연구가 오래 전에 학위논문의 테마로 등장하였고, 그들의 전기는 벌써 여러권 출판되었다.105) 또 재외한국인 및 재외한국교회 에 관한 역사도 간행되고 있다. 유동식은 하와이의 한인과 교회 그리스도 연합감리교회 85년사(그리스도연합감리교회, 1988)와 在日本韓國基督敎靑年會史 1906-1990(在日本韓國基督敎靑年會, 1990) 등을 집필하였고, 김수진은 京都敎會의 歷史 1925-1998(在日大韓基督敎京都敎會, 1998)를 썼다. 멕시코 한인과 한인교회의 역사를 쓰기 위해 여러 차례 현지답사를 한 이자경의 노력은 돋보인다.
Ⅳ. 맺는 말 - 한국기독교사 연구의 과제
지금까지 우리는 선교사들의 한국 및 한국교회사 연구에서부터 시작하여 1920년대 백낙준이 그 연구를 본격화하게 되는 시기를 거쳐, 해방 후 1990 년대에 이르기까지의 한국기독교사 연구의 진행과정을 주마간산격으로 살펴 보았다. 이제 이 글을 마무리하면서 연구사에 나타난 문제점을 짚어보고 앞 으로의 과제를 필자 나름대로 제시하고자 한다.
현단계의 한국기독교사 연구는, 한국기독교의 여명기와 관련, 기독교의 수용과정과 초기 선교사들의 입국, 선교정책, 선교지역 분할 등은 어느 정도 밝혀졌으나 복음의 이입과정이나 한국인들의 입신과정 그리고 그들의 사상 적인 변화 등에 관해서는 아직도 미흡한 느낌이다. 초기사와 관련, 아직도 선교본국의 신학과 신앙이 어떠했으며, 그것이 어떻게 피선교지와 접맥되는
105) 예를 들면, 馬布三悅博士 傳記(마포삼열박사전기 편찬위원회, 1973)을 비롯 하여, Allen D. Clark(郭安全)의 AvisonofKorea, 에비슨 전기(연세대학 교 출판부, 1979), 김정현(J. H. Grayson)의 羅約翰 한국의 첫 선교사(계 명대학교 출판부, 1882), 이광린의 올리버 알 에비슨의 생애(연세대학교 출 판부, 1992) 등을 들 수 있다.
가를 밝히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한국인이 남긴 기록이 영성하기 때문일 것이라는 자포자기적인 자세보다는, 비록 중국의 것을 번역한 것이라 하더 라도, 당시의 전도문서 등을 분석해서라도 그 접맥과정과 초기의 신앙이 어 떻게 형성되고 있었는가를 밝혀야 한다. 백 박사가 강조했던 것처럼, 초기의 것을 제대로 밝혀야 후기의 역사와 오늘의 우리의 모습을 점검하는 데도 도 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한말 일제하의 기독교사 연구와 관련, 그 시대가 격동기였던만큼 기독교 와 대내외적인 민족운동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그 동안 많은 관심이 주어졌 으나, 그러한 민족운동의 기독교적인 원동력으로서의 신학과 신앙에 대해서 는 거의 무신경하였다. 민족사에 나타난 굵직한 사건들과의 관계를 규명하 는 데에 몰두하다 보니 당시 교회의 참 모습이 어떠했는지에 대한 연구가 거의 없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기독교민족운동은 복음화된 신자들에 의한 것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그들이 신앙했던 내용이 어떠했던지 를 知悉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또 복음의 지방화 과정에 대한 연구가 상대적으로 미흡한 상태이다.
한국기독교사 연구와 관련, 아직도 연구가 취약한 시기는 해방 후라고 하 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일반 국사학계에서 한국현대사 부분의 연구가 제 대로 이뤄지지 않는 점과 상통하다고 할 것이다. 그 결과 동시대에 이뤄지 는 대소 사건들에 대해서는 역사적으로 그 책임을 물을 수 없는 형편이다. 일반 사회와 마찬가지로 역사적인 규명대신 정치적인 해결이 기독교 내에 횡행하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이럴 때에 연구자들은 그 시각을 해방 후 의 교회사에로 넓혀야 할 필요를 느낀다.
그 동안의 한국기독교사 연구에서 검토해야 할 문제로 떠오른 것의 하나 는 史觀이다. 요지는, 백낙준의 사관을 ‘선교사관’으로, 민경배의 것을 ‘민족 사관’으로 그리고 ‘민족사관’을 비판하고 나선 것이 ‘민중사관’이라는 것인 데, ) 우선 이 사관들의 확실한 개념이 어떤 것이며, 과연 이러한 도식이 타당하고 필요한 것인가 하는 점이다(이런 점에 대해서는 따로 자세히 논급 할 기회를 갖기를 원한다). 필자는 하나의 일관된 사관으로 한국기독교사 전체를 조명하고 설명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하는 의문을 가지며, 가령 그것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앞서 언급된 ‘사관’에서 자신들이 표방했던 ‘사관’ 대로 한국기독교사를 보았느냐는 의문 또한 없지 않다. 꼭 사관 문제를 거 론해야 한다면, 먼저 사관의 개념을 분명히해야 하며, 어떤 사관의 時宜性을 따질 수 있을지는 몰라도 정당성 여부는 따지기 곤란할 것이고, 또 그 사관 으로 역사를 제대로 충실히 보았느냐의 문제는 따질 수 있을지는 몰라도 왜 그 사관이냐는 비판은 곤란할 것으로 본다.
한국기독교사 연구와 관련, 자료수집과 보존의 문제가 있다. 현재 각 교 단에는 역사연구소 혹은 자료보관소가 있고 초교단적인 것으로 기독교문사 와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한국교회사문헌연구원 그리고 기독교학교 소속의 여러 도서관들이 있다. 이런 기관들이 자료를 공개 공람하도록 하고 희귀자 료의 복사본 제작과 자료의 교환 등이 절실히 요청되고 있다. 특히 외국의 한국기독교사 자료 소재처에 대한 정보와 자료의 반입 등은 시급히 해결해 야 할 과제라고 본다.107)
서 언급된 적이 있고, 이덕주가 감신대학보(1993년 10월 14일자)에서 ‘한국 교회사 연구 흐름과 최근 경향’에서 이 점을 거듭 소개한 적이 있는데, 그 후 이같은 견해가 정설처럼 되었다.
107) 참고로 국내외의 중요한 자료보관처는 다음과 같다.
海外지역 : Presbyterian Historical Society (PCUSA, Philadelphia, PA) / Historical Foundation (PCUS, Montreat, NC) /Methodist Archives (Drew Univ., NJ) / United Church Archives(Victoria Univ. in Toronto, Canada) / McRae Collection (Nova Scotia, Canada) / A. J. Brown Collection (Yale Div. School Lib.) / H. N. Allen Papers (New York Public Lib.) / Lib. of Union Th. Seminary in New York (Appenzeller Paper 등) / National Archives of USA (Washington D. C.) / Lib. of Congress (esp. Manuscript) Div. W. D. C.) / Ohlinger Paper (Fremond, OH) / G. S. McCune Paper (Univ. of Hawaii) / S. P. G. (London) / BFBS Archives (Lib. of Cambridge Univ.) / NBSS Archives (Edinburgh) / British Museum (London) / 靑丘文庫(神戶) 등.
끝으로 앞으로의 과제 몇 가지를 지적하고 끝맺고자 한다. 연구분야와 관 련하여, 선교사들에 대한 연구가 미흡하다. 한국을 다녀간 선교사들이 2,300여명이나 되는데 그들에 대한 연구가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다. 둘째 로 최근의 연구와 관련, 기독교와 인권․민주화 운동과의 관계를 구명하는 작업을 서둘러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군부독재 시절 해외에 보관한 한국기 독교사 관계 문헌을 속히 반입하여야 한다.108) 셋째, 한국기독교의 분열과 연합에 관한 연구가 적극화되어야 한다. 특히 선교사들과 폐쇄적인 보수신 학에 의해 ‘이단’으로 낙인찍혔던 소수의 신앙인들에 대한 연구가 절실하다. 어쩌면 여기에서 한국기독교의 주체적인 모습의 일단을 발견할 수도 있을는 지 모른다. 넷째, 한국신학의 정립과 한국기독교문화의 정립을 위해 한국인 에 의한 신앙, 신학사상과 문화에 대한 연구가 절실하다고 할 것이다. 지방 화시대를 맞아 지역교회사와 인물사에 대한 연구를 체계화하고, 수요가 급 증하고 있는 개교회사의 연구와 집필을 위해서는 토론과 훈련이 필요할 것 이다.
끝으로 연구의 협동화와 토론문화의 정착, 연구방법의 과학화가 더욱 필 요하다. 지금까지는 연구와 발표의 일방통행만 있었는데, 이제는 이것을 지 양, 협동연구와 성숙한 토론, 나아가서는 연구방법의 과학화를 통하여 한국 기독교사의 학문으로서의 질을 높이는 데에 더욱 매진해야 할 것이다.
한국 : 기독교문사 /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및 한국교회사문헌연구원 / 숭실 대 박물관 / 사료관(예장 통합) / 연세대 도서관 / 기타 기독교대학 및 신학교 / 개 교회 사료관.
108) 예를 들면, 東京의 富阪 크리스챤 센터와, 뉴욕의 인터처치 센터에서 수집하여 현재 UCLA에서 보관하고 있는 것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