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6/22

*셸리 케이건의 ‘죽음이란 무엇인가’DEATH를 읽고 - 자료실 - 연찬문화연구소

*셸리 케이건의 ‘죽음이란 무엇인가’DEATH를 읽고 - 자료실 - 연찬문화연구소

*셸리 케이건의 ‘죽음이란 무엇인가’DEATH를 읽고
작성자 남곡|
작성시간19.07.15|
조회수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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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누구나 맞이하는 최대의 사건은 죽음이다. “죽은 다음에도 나라는 존재가 계속 남아 있을까?”라는 질문은 죽음을 두려워하고, 영생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심각한 질문이 된다.

많은 사람들이 철학적으로나 종교적으로 2원론을 받아들이면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즉 인간은 물질적인 육체와 비물질의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육체가 소멸하여도 영혼은 영속한다고 생각한다. 즉 ‘나’의 정체성은 유한한 육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무한한 ‘영혼’에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 경우 인간의 정신은 ‘영혼’의 작용으로 된다.

셸리 케이건은 미국 예일대 최고의 명강의로 알려진 이 강의에서 자신이 일원론 즉 물리주의(physicalism)의 입장이라는 것을 명백히 한다.

즉 인간은 ‘다양한 p기능을 하는 육체’라는 것이다. 여기서 p란 person의 약자(略字)로서 인간의 특징인 고차원적인 정신적·정서적 작용을 의미한다.

그는 굳이 증명할 수 없는 ‘영혼’을 도입하지 않고도 1원론의 입장에서 충분히 죽음에 대해 설명할 수 있고, 죽음이 결코 나쁜 것이라거나 두려워할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 특히 영생이 결코 좋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 탁월한 논리적 분석으로 설명하고 있다. 수학적 논리적 증명 방식을 익숙하게 사용하기 때문에 수학이나 논리학에 익숙치 않은 사람은 책을 읽어가는 것이 쉽지 않아서 중도에 그만 둘 가능성이 있는 책이다. 그러나 지나치게 정독(精讀)을 하지 않고, 이해가 안되는 것은 그냥 넘어가는 여유를 가지면 책에 빠져 들 수 있는 것 같다. 내가 바로 그런 식의 속독(速讀)을 하는 사람이라 책을 다 보기는 했는데, 놓치거나 오해하거나 이해하지 못한 부분도 꽤 있을 것이다.

평소 사람들이 당연하게 생각하거나 느끼는 죽음에 대한 공포나 영생에 대한 갈망들을 어떤 금기(禁忌)나 환상(幻想)에서도 벗어나 인간의 지성으로 분석하는 점이 서양학문의 뛰어난 점이 아닌가 생각하는데, 그는 이것을 아주 잘 보여준다.

영혼의 존재를 믿고 있는 분들에게도 일독을 권하고 싶은데, 그것은 그 믿음에 대해 회의(懷疑)하라는 것보다는, 인간의 지성을 통과할 때 그 믿음이 보다 튼튼한 기반을 갖게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이다. 사실 일원론이나 이원론의 어느 것이 옳은가하는 것은 아직 말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니며 얼마든지 제3의 다른 관점도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자기와 다른 관점을 백안시하거나 적대하는 것은 옳은 입장이 아니라고 본다.

이 책의 내용으로 돌아가 그가 어떤 방식으로 지적 작업을 하는지 몇 가지 소개해 보려 한다.

 

1. 영혼의 존재에 대해서

 

이원론자들 즉 영혼의 존재를 인정하는 사람들은 물리주의자들이 어떤 결론도 이끌어 내지 못한, 그렇기 때문에 이원론의 관점으로만 설명할 수 있는 인간에 대한 미스터리와 수수께끼에 주목한다. 그렇다면 영혼을 가정해야만 설명할 수 있는 그런 ‘특성(feature)'이 있을까?

인간이 그저 육체적 존재가 아니라 이를 초월한 존재라고 가정했을 때, 훨씬 효과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특징들을 ‘특성F(F는 feature의 약자(略字))’라고 해보자.

무엇이 특성 F인가? 영혼을 가정해야만 설명할 수 있는 특성이 있을까?

그는 SF영화나 양자역학등 현대물리학을 통한 자유의지와 결정론을 설명하고, 그리고 임사체험등 신비체험을 생물학적 물리학적 설명을 제시한다.

결론적으로 그는 이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 놓는다.

 

“어떤 현상을 설명하거나 최선의 설명을 제시하기 위해서 영혼의 존재를 반드시 인정할 수 밖에 없다고 결론을 내려야 하는 시점이 찾아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까지 내가 살펴본 바로는 어떤 주장도 영혼의 존재를 받아들여야 하는 충분한 이유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2. 나는 왜 내가 될 수 있는가?

 

20년 전에 밭에서 일을 하고 있던 사람과 지금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는 사람이 동일 인물인가?

‘나’를 ‘나’라고 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내 ‘정체성’의 핵심은 무엇인가?

20년 전의 머리 숱이 많고 허리가 곧고 구렛나루가 있는 사람과 20년 후의 대머리에 허리가 굽었고 구렛나루가 없는 사람은 동일 인물인가? 아닌가?

이 인간의 정체성에 관한 ‘영혼관점 soul view; 정체성의 핵심은 동일한 영혼이다’과 ‘육체관점 body view; 정체성의 핵심은 동일한 몸을 갖는 것'을 비교 분석한다.

그리고 그는 육체적 관점을 지지하며, 육체 관점의 최고봉인 뇌 버전(육체의 동일성은 뇌의 동일성을 말한다는 것)을 추가한다. 그리고 물리주의자는 물론 이원론자도 뇌 버전에는 동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인격관점 personality view; 인간의 정체성의 핵심은 인격적 동일성이다’을 소개하고, 이 인격관점이 물리주의와 완전히 양립할 수 있다고 말한다. 동일한 인격을 유지하기 위해서 비물질적인 존재에 의존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인격은 끊임 없이 변화하고 진화한다.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핵심을 동일한 인격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믿음과 욕망 등의 요소들을 특정한 조합의 형태 그대로 보존한다는 의미는 아닌 것이다. 말하자면 동일성을 유지하는 범위 내에서 천천히 변화한다는 뜻이다. 중복 및 연속성의 패턴이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다면, 지금 내가 열 살 무렵의 믿음 기억 욕망 등과 상당히 다르다고 하더라도 , 끊임 없이 진화하는 하나의 동일한 인격이라고 할 수 있다.

 

3. 인간은 모두 홀로 죽는다?

 

우리는 다른 사람과 함께 식사를 하고, 휴가를 즐기고, 음악을 들을 수는 있지만 함께 죽지는 못한다. “우리 모두 홀로 죽어야할 운명이다”

그는 이 주장도 틀렸다고 말한다.

이 말은 죽음에 대한 뭔가 심오한 이야기가 담겨 있는 듯한 착각을 유발하지만, 이 말 속에는 어떠한 심오한 진리도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점심 식사에 대해 생각해보자.

함께 먹더라도 어느 누구도 나를 대신해 내 점심을 먹을 수는 없다. 거의 모든 일에 대해, 아마도 세상의 모든 일에 그렇게 말할 수 있다. 아무도 나를 대신해 나의 죽음을 경험할 수 없다는 주장이 완벽한 진실이라고 하더라도 이는 죽음의 독특한 본질에 대한 어떤 심오한 통찰도 던져주지 않는다.

인간은 모두 홀로 죽는다는 주장의 진정한 의미는 아마도 ‘외로움’이라는 심리적 현상일지 모른다.

임종의 순간에 드는 극심한 외로움을 쉽게 상상할 수 있지만, 그것이 보편적인 현상인가하면 전혀 그렇게 말할 수 없다. 수 많은 죽음이 순간적으로 오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물론 조건을 추가할 수 있다.

이 죽음을 맞이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만 모든 사람들은 외로움과 소외감을 느끼며 죽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도 그렇지 않은 사례들을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다. 영국의 철학자 데이비드흄은 죽는 순간까지 많은 사람들을 불러 놓고 병상에 둘러 앉아 함께 이야기를 나누도록 했다. 끝까지 그는 유쾌하고 즐거운 모습이었다.

 

4. 죽음은 나쁜 것인가?

 

사람들은 죽음이 당연히 나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죽음은 ‘왜’ 나쁜 걸까? ‘어떻게’ 죽음은 우리에게 악이 될 수 있을까? 죽음이 정말로 나쁜 거라면, 반대로 ‘영생’은 좋은 걸까?

물리주의자에게는 죽음은 나쁜 것이 될 수 없다. 내 육체적 죽음은 인간으로서 내 존재의 끝이다. 내가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죽음이 내게 나쁜 일이 될 수 있는가? 죽음이 나쁜 것은 오직 ‘살아 있는’ 사람들한테다. 그를 사랑했던 사람들의 슬픔이다. 그러나 그것은 핵심을 비켜 가는 것이다. 죽음의 과정이 고통일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도 죽음 자체에 대한 것은 아니다.

죽은 다음에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비존재’가 내게 나쁜 것이다. 그러나 비존재 때문에 죽음이 나쁜 것이라는 설명은 직접적인 대답이 아니다.

비존재가 나쁜 것이라는 것을 설명하는 이론들 가운데, ‘결핍’이라는 점에서 ‘상대적’으로 나쁜 것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결핍돼 있는가? 구체적으로 말하면, 삶이 내게 선사하는 모든 ‘좋은 것’들이 결핍됐다. 즉 살아 있으면 얻을 수 있는 삶의 좋은 모든 것들을 ‘박탈’해 버리기 때문이라는 ‘박탈 이론’이 아마 지금까지 나온 이론 가운데는 가장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 박탈 이론에 대해 여러 가지 각도에서 분석한다. 박탈이론으로 죽음이 나쁜 것이라는 설명이 다 옳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가장 바람직한 접근방식이라고 본다.

살아 있을 때 삶이 가져다주는 선물을 하나도 누릴 수 없기 때문에 죽음은 우리에게 나쁜 것이다. 이것 말고는 어떤 이유도 없다고 생각한다.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삶이 가져다 주는 선물’ 쪽으로 이행한다.

 

5. 삶의 가치는 어디에 있는가?

 

삶에서 계속 좋은 것들을 얻고 있다면, 죽음은 나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어두운 미래만을 빼앗아 간다면 죽음은 나쁜 것이 아니라 좋은 것이다.

결국은 ‘행복한 삶은 무엇일까?’로 귀결된다.

그는 여기에 대해서 많은 이론들과 실례들을 통해 분석 설명한다.

그리고 삶 자체는 좋은 것과 나쁜 것들을 채워 넣을 수 있는 ‘그릇(container)'과 같은 것이라는 그릇 이론을 다각도로 소개한다.

삶이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지 평가를 내리기 위해서는 그 내용물들의 가치를 모두 더해야 하는 것이다. 삶 그 자체가 가치를 가지는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물론 삶 자체가 가치가 있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소개하면서 여러 가지 그릇 이론들을 분석한다.

내가 읽고 느낀 것으로는 그는 대체로 ‘영생의 끔찍함’(이것을 한 장으로 다루고 있는데, 그 내용 소개는 생략) 때문에 인간의 죽을 운명은 좋은 것이라고 보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삶이 나쁜 것으로 ‘전환’되기 한참 전에 죽음이 우리를 찾아온다고 많은 사람들이 느끼는 것이다. 즉 ‘영생이 나쁜 것’이라는 생각과 ‘ 죽음은 항상 너무 일찍 찾아온다’는 생각은 얼마든지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하는가? 삶과 죽음에 관한 사실들을 바라보는 가장 바람직한 태도는 무엇인가?”

그는 죽음이 결코 두려운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여러 가지 분석을 통해 오직 이성의 힘만으로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설명한다.

우리가 가져야할 바람직한 감정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분노도 아니다. 대신 살아 있다는 사실에 대한 감사하는 마음 뿐일 것이다.

하나 뿐인 삶, 그리고 죽음의 예측불가능성을 생각할 때, 모든 가치 있는 모든 목표들을 추구하기에는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우리는 무엇이 ‘가장’ 가치 있는 일인지를 결정해야 하는 테마에 직면한다.

그는 말한다.

 

“고백컨대 나는 불교에 깊은 존경심을 갖고 있다. 삶이 고통이라는 진실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좋건 나쁘건 간에 나는 서양에서 태어 났다. 신이 세상을 창조하고 이를 흐뭇하게 바라보는 <창세기(Genesis)>를 믿는 사회에서 자라났다. 그렇기에 삶을 고통으로 바라봄으로서 상실의 아픔을 최소화하려는 것은 내가 선뜻 받아들일 수 있는 전략이 아니다. 그렇다면 내게 그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유효한 선택은 앞서 논의했던 다양한 낙관적 전략들 사이에서 하나를 고르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렇게 물어야 한다. ‘우리의 삶을 가장 가치 있게 만들어주는 것은 무엇인가?’ ‘적어도 한번은 신들처럼 살아봤으니’라는 횔덜린의 말에 동의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하는가?”

 

나는 책을 너무 빨리 보는 타입이지만, 그래서 아마 오해하거나 알아듣지 못한 부분이 많으리라고 생각하지만, 저자의 탁월한 이성적 능력에 의한 긴 분석적 사유의 터널을 통과해 죽음은 결코 나쁜 것도 두려워하거나 분노해야할 것도 아니라는 결론과 만났다. 죽음을 직시 하면서 가장 가치 있는 삶을 사는데 집중하는 것이 죽음에 마주서는 가장 올바른 태도라는 것을 이성적 분석으로 들려준데 감사한다.

 

그러면서도 저자의 말을 빌리면 나는 어쩔 수 없이 동양인이어서 그런지 공자나 석가의 태도에 마음이 끌린다.(사실 불교에 대한 저자의 이해는 좀 단순하다고 보인다)

공자는 누군가 죽음에 대해 물어 봤을 때, “삶도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말하리오”라고 답변한다. 석가는 죽음, 영생 등에 대해 질문하는 사람에게 독화살의 비유를 들어 그와 같은 논의보다 더 중요하고 현실적인 테마를 이야기한다.

나에게는 일원론이나 이원론의 어느 것이 옳은가 하는 것보다 ‘어떤 삶이 가장 가치 있는가? 그렇게 살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가 더 중요하게 다가온다.

선가의 화두에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다’는 무분절을 통과한 분절의 세계를 말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말하기가 조심스럽지만, 이제는 현대과학도 이 세상 만물이 분리독립되어 있는 실재는 없고 하나의 큰 생명속에 통섭되는 일체라는 것을 밝히고 있지 않는가?)

‘나’라는 정체성도 이런 관점에서 보면 어떨까? ‘나는 나가 아니다’ 즉 나라는 존재가 결코 분리 독립되어 있는 실체가 아니라는 것을 자각한 바탕에서, 그 일체의 나타남인 ‘나’로 보이는 경지를 살아 있는 동안에 체득하는 것이다. ‘나’의 정체성이 보다 우주적 차원으로 넓어진다. 그러면서도 나는 나인 것이다.

공자의 절사(絶四; 네가지 끊음; 毋意 毋必 毋固 毋我)도 이와 같은 무분절을 통과한 의식 세계로 보인다.

이것을 깨닫고 체득하는 것이 인생의 기쁨인 것이다! 學而時習之不亦說乎!

이 과정에서 죽음이나 영생 같은 테마들이 자연스럽게 보여오지 않을까?

 

저자도 비슷한 결론에 이르고 있다고 보지만, 가장 가치 있는 삶에 대한 동양적 지혜와 결합하면 더욱 풍성한 삶이 될 것 이라는 기대가 생긴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어떤 입장인지가 물어졌다.

이원론에 끌리는 일원론 같기도 하고, 그 반대 같기도 하였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내가 30대에 죽었다면 느끼지 못할 평화를 누리고 있다.

앞으로 언제 세상을 떠나야할지 예측 불가능하지만, 살아 있는 동안 이 평화가 더 온전해지기를 바랄 뿐이다. 감히 서평은 할 수 없고 나의 독후감이라고 보아주기 바란다.

저자의 생각을 오해한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내 부족함이니 어쩌랴!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