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4/10

[여성 의료분야 개척자, 로제타 셔우드 홀] 숭고한 인류애로 43년 의료선교 헌신-국민일보

[여성 의료분야 개척자, 로제타 셔우드 홀] 숭고한 인류애로 43년 의료선교 헌신-국민일보



[여성 의료분야 개척자, 로제타 셔우드 홀] 숭고한 인류애로 43년 의료선교 헌신
<1> 사랑이 세상을 구하리라
입력 : 2016-01-04 

1890년 25세의 나이로 조선을 찾아 43년을 한결같이 여성들과 어린이를 치료하는데 열정을 바친 닥터 로제타 셔우드 홀. 오른쪽은 로제타 홀이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조선에 도착하기까지 바다에서 보낸 40일 간의 여행기가 담긴 두루마리 편지. 하희정 박사 제공




“쿼바디스 도미네(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길 위에서 제자들이 스승에게 물었다. “지금 당신은 어디로 가는가?” 길 잃은 세상이 교회에 묻는다. 민족의 미래가 칠흑 같았던 1890년 가을, 조선을 찾아온 스물다섯 살의 젊은 미국인 여의사가 있었다. 고통에 신음하는 여성들을 돕겠다고 청진기를 들고 무작정 태평양을 건넜다. 감리교 선교사 닥터 로제타 셔우드 홀(Dr. Rosetta Sherwood Hall)의 이야기다. 그는 미국에서 처음 세워진 여자의대를 졸업한 엘리트였다. 탄탄대로 같은 인생이 펼쳐져 있었지만 결혼도 마다하고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동방의 작은 나라를 선택했다. 이유는 단 하나였다. ‘진정 인류를 위해 봉사하려거든 아무도 가려 하지 않는 곳에서 아무도 하려 하지 않는 일을 하라.’

거부할 수 없는 하늘의 명령이었다. 그 후 43년을 한결같이 조선 여성들과 어린이들을 치료하는 데 열정을 바쳤다. 세상에는 하늘의 뜻을 깨닫고 이를 온전히 신뢰해야만 갈 수 있는 길이 있다. 모두가 크고 탐나는 열매가 되기를 꿈꿀 때, 스스로 땅에 묻히는 길을 선택한다는 것은 큰 용기와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로제타가 선택한 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지만 아무나 갈 수 없는 길이었다. 그는 어떻게 그 길을 걸어갔을까.

인종과 민족을 뛰어넘은 인류애

최근 로제타 홀의 전기와 일기가 연이어 출간됐다. 여간 반갑지 않다. 황해도 해주에서 여섯 살까지 살았던 손녀가 오랫동안 간직해온 자료들을 제공해준 덕분이다. 알츠하이머로 기억이 급속도로 무너져가는 상황에서도 그는 할머니가 남긴 소중한 기록들을 꼼꼼히 챙겨 한국으로 보내주었다.

양화진문화원에서 열리고 있는 ‘로제타 홀의 일기 공개특별전’에서 그 자료들을 직접 만나 볼 수 있다. 네 권의 일기와 두 아이의 육아일기는 그녀의 숨 가빴던 시간들을 고스란히 전해주는 듯하다.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조선에 도착하기까지 바다에서 보낸 40일 간의 여행기가 담긴 두루마리 편지는 길이가 31m나 된다. 깨알 같은 글씨로 가득 채워진 작은 기도수첩은 24권에 달한다. 여백에 빼곡히 적힌 메모와 스크랩 자료들이 심심찮게 등장하는 낡은 성경책은 혼란스러운 순간에도 자기성찰의 끈을 놓지 않았음을 그려보게 한다.

무엇보다 그의 손때가 묻어 있는 꼼꼼한 기록들에는 한 신앙인의 정직한 고뇌가 담겨있다. 한국인들의 절망과 고통을 끝까지 끌어안으려 몸부림친 진심 어린 용기도 보인다. 그가 한국인들에게 전해준 것은 핏기 없는 창백한 교리가 아니었다. 인종과 민족을 뛰어넘는 따뜻한 인류애였다.

부모로부터 경건과 약자 배려 배워

성경에 바탕을 둔 기독교 휴머니즘은 시공간의 벽을 뛰어넘어 누구와도 소통할 수 있는 언어였다. 로제타는 그 뜨거운 사랑의 언어를 누구에게서 배웠을까. 로제타에게 경계 없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처음 가르쳐 준 것은 그의 부모다. 로제타는 남북전쟁이 막을 내린 1865년 9월 19일 뉴욕 리버티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영국에서 건너온 청교도 가문이었으나 제2차 대각성운동이 한창이던 1840년대에 감리교로 개종했다. 덕분에 로제타는 청교도 전통으로부터 근면과 정직의 경건생활을, 감리교 전통으로부터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와 관심을 조화롭게 배울 수 있었다. 특히 큰 농장을 운영한 그의 아버지는 남북전쟁 이전부터 노예제도를 반대해온 감리교의 가르침에 충실하여 노예반대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양심 있는 퀘이커교도 친구들과 비밀리에 흑인노예들을 탈출시키는 일을 돕기도 했다.

로제타가 태어나기 전부터 그의 가족이 된 ‘조’라는 이름의 흑인도 그의 아버지가 구해준 탈출 노예였다. 가족이 되는데 피부색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조는 로제타를 특별히 아꼈다. 이들은 영락없는 삼촌과 조카였다. 로제타는 흑인 노예로 태어나 굴곡진 삶을 살아온 조를 늘 안쓰럽게 여겼다.

이들의 친밀한 관계는 로제타가 조선에 온 이후에도 이어졌다. 글을 읽지 못하는 조는 고향에서 발행되는 지역 신문을 빼놓지 않고 보내주어 로제타가 고향을 떠나온 외로움을 느끼지 않도록 해주었다. 로제타도 자신의 방에 조의 사진을 걸어두고 그리워하며 조선의 소녀들에게 그의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로제타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정직한 농부였고 말과 행동이 다르지 않은 언행일치의 표본이었다. 서울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주일, 언행일치에 관한 설교를 듣고 자연스럽게 아버지를 떠올릴 정도였다. 그리고는 이런 기록을 남겼다. “나는 말보다 행동이 나은 사람을 적어도 한 사람은 알고 있다. 바로 나의 아버지가 참다운 본보기다.”

한국교회가 회복해야 할 근원

아버지보다 25세나 젊었던 그의 어머니는 어릴 때부터 해외선교에 관심이 많았다. 외가 쪽은 그의 어머니가 10살 때 이미 미국에서 처음으로 해외에 파견한 독신 여선교사를 집으로 초청하여 환송회를 열어줄 정도였다. 그 영향 때문인지 로제타의 어머니는 해외선교저널도 충실하게 구독했다.

덕분에 로제타는 어릴 때부터 다양한 배경을 가진 여성들이 국경을 초월해 국제적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문명이 닿지 않은 곳곳에서 활동하는 환경에 자연스럽게 노출되었다. 로제타에게 의료선교사의 꿈을 심어준 것도 인도에서 남편과 함께 선교사로 활동하고 있었던 한 여성이었다. 그녀는 인도여성들이 몸이 아파도 남성 의사에게 몸을 보일 수 없어 진찰을 받지 못한다고 전해주었다. 질병의 고통으로부터 여성들을 구해줄 여의사가 꼭 필요하다는 호소도 잊지 않았다. 로제타의 어머니는 해외에서 보내오는 인쇄물이나 이국적인 물건들을 딸에게 보여주며 끊임없이 해외선교사의 꿈을 자극했다. 여성으로서 어머니와 노예였던 조는 차별받은 경험을 공유해서인지 로제타가 관습에 매이지 않고 누구보다 주체적이고 진취적이고 독립적인 삶을 살기를 바랐다. 모든 인간은 동등한 가치를 지닌다는 보편적 진리는 우연히 얻어진 것이 아니다.

현재는 과거의 열매요 미래의 씨앗이다. 열매는 씨앗을 두고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이는 성서의 가르침이기도 하다. 130여 년의 역사를 가진 한국교회는 어떤 씨앗에서 난 열매일까. 시대의 아픔과 고통을 외면할 때 사회의 지탄을 받게 된다는 아픈 교훈을 보여주는 오늘의 한국교회는 어디에서 날아든 씨앗의 열매일까. 한 세기 전 고난의 땅에 찾아든 사랑의 씨앗들은 지금 어느 들녘을 헤매는가. 이제 그 안에 담긴 그리스도의 거룩한 정신과 삶, 한국교회가 회복해야 할 초심이 무엇인지 가만히 들여다보아야 할 때이다.

하희정 박사

◇약력=감신대와 감신대학원(Th.M.)을 졸업하고 미국 버클리연합신학대학원(GTU)에서 석·박사(교회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교회사학회와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에서 활동 중이다. 현재 감신대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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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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