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2/28

Namgok Lee | 에릭 올린 라이트의 '리얼 유토피아' 읽기

(3) Namgok Lee | Facebook


둘째 아들이 신청해서 보내준 책이다.
'리얼 유토피아'라는 책은 둘째가 보기에 내 취향과 맞을 것 같다고 권한 책이고,

'전라디언의 굴레'는 내가 호남인이어서(15세까지는 고향인 전남 함평에서 60세부터는 장수에서 18년 그리고 지금은 익산)이기도 하지만, 아마도 지금의 꽉막힌 정치지형을 이해하고 풀어가기 위해서 일독을 권하는 것 같다.

'조봉암 기록'은 옛 주소로 와서 늦게 전달 받았다.
노년에도 책을 권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것을 읽고 싶은 내가 있으니, 다른 복은 몰라도 책 복은 있는 것 같다. ㅎㅎ

시력(視力)을 생각해서 하루 한 장 씩 읽고 있다.
주로 광주(光州) 권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이고, 내가 전라도에 돌아온 것은 60의 나이에 전북 장수였기 때문에 실감이 좀 다른 것은 있지만, 지금 전라도가 처한 상황을 이해하는데 실사구시하려는 점에서 중요한 기여를 하는 책이라고 생각된다.
이견(異見)이 있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젊은 학자의 분석이 발전적인 담론을 창조하는 활발하고 생산적인 대화와 토론의 한 장(場)이 되기를 바란다.
오늘 읽은 2장(章)의 주제는 ⌈‘산업화 열차의 꼬리칸’이라는 문제⌉다.
짧은 감상이다.
‘산업화 열차‘는 이미 되돌릴 수 없는 과거다.
이제 원튼 원하지 않든 ‘대전환’의 시대다.
문명의 대전환과 그것을 위한 사상(가치체계)ㆍ 정치 ㆍ 경제의 전환이 이제 출발하는 열차다.
‘산업화 열차에서는 꼬리칸’이었지만, ‘새로운 전환의 열차에서는 선두칸’이 될 수 없을까?
상생과 호혜의 문명을 위해서는 이미 조선 말기부터 일제강점기에 걸쳐 많은 전통이 응축된 곳이다.
내가 모악산이 보이는 익산의 주거지에서 느끼는 심정이다.
비록 실패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 저류에는 맥맥히 흐르고 있는 정신이 있다.
이것을 현대적 조건에 맞게 살린다면 ‘이 새로운 열차에는 선두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은 지금까지와 같은 경쟁과 갈등의 구조에서의 선두가 아니다.
아들이 이 책과 함께 보내준 책이 ‘리얼 유토피아’인데, 아직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새로운 선두칸에 대한 암시인 것 같다. ㅎㅎ

에릭 올린 라이트 저 ‘리얼 유토피아’를 읽기 시작했다.

오늘은 ‘민주평등주의적 가치에 근거한 리얼 유토피아 구상’이라는 서문과 한국의 독자들에게 보내는 ‘참을 수 없는 불확실성의 미래’라는 서문을 읽었다.
서문을 읽으면서 우선 들었던 생각은 한국에서는 왜 이런 학문적 작업을 시도한 학자나 사상이론가들이 출현하지 못했을까에 대한 아쉬움이다.

특히 사상 때문에 전쟁까지 치룬 나라에서 이른바 마르크스주의의 ‘전통’ 속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재구성하려는 시도들이 좌파에게서 나오지 않고, 오히려 증오와 적대의 정서 속에서 정체하거나 퇴영적이어서 결국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 따라서 진보의 의미를 왜곡하거나 상실하게 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는가에 대한 반성적 성찰이 앞서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두 번째는 그 목차를 보면서 내가 학문적인 글을 읽는데 익숙하지 않아서 잘 읽어낼 수 있을까에 대한 걱정도 되지만, 서문들을 통해 그 접근 방식에 동감하는 바가 커서 이번 기회에 이런 학문적인 글을 읽는 연습을 해보고 싶다는 열정(?)이 생기기도 한다.
18개국의 나라에서 50회 이상 강연을 한 것으로 소개되는데, 한국이 빠져 있는 것도 눈에 띈다.
한국에서 실사구시적인 태도를 취했던 좌파이론가들이 이른바 좌파 진영에서 배척되었던 그런 풍토에서 벗어나 ‘보편적이고 현실적인 이상주의’가 동서양의 이론과 정신들을 회통하면서 출현하기를 고대하게 된다.
이제 그런 때가 되었다고 본다.
이 책을 소개하고 보내준 아들에게 감사한다.

얼음은 거의 없다.
날씨는 쾌청한 것 같지만, 내게는 그 맑음을 측량하는 척도가 생겼다.
모악산이 모습을 보이는 정도다. ㅎㅎ
요즘 새벽 독서는 올린 라이트의 '리얼 유토피아'를 보고 있다.
스스로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라 마르크스주의 전통을 잇는 학자라고 자기정체성을 밝히고 있다.
학자의 글이라 한번에 많이 읽지는 못하지만, 책의 부제에 있는 것처럼 '좋은 사회를 향한 진지한 대화'에 어울리는 내용이다.
즐겁게 읽고 있다.
나보다 두 살 연하인데, 2019년에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한번 만날 기회가 있을까하는 기대도 있었는데...

Namgok Lee
183 F2ebr0utatar7y ato 190g6:2i434d  · 
한국의 좌와 우, 보수와 진보는 연합정치의 상대로 서로 될만한 정당으로 진화해야 한다.
내가 오래전부터 일관되게 제안하는 것이지만 현실은 거꾸로 가는 듯했다.
그러나 역사는 대단히 다이내믹해서 예상치못한 상황들(어찌보면 우연인 것 같지만, 내재된 모순의 나타남이라는 점에서는 필연인)로  그 방향으로 다가서는 것 같다.
내가 반전과 변혁의 기미를 본다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다.
대선 이후 최대의 과제는 사회통합과 연합정치다.
내가 연정을 이야기하는 것은 지금까지의 낡고 퇴영적인 편가름(진영)을 바탕으로 비슷한 정당(정치세력)끼리의 '소연정'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으로는 국내외의 산적한 도전과 인류적 위기에 대응할 수 없다.
제대로 된 진영(좌우, 보혁)  간에 이루어지는 '좌우 대연정'을 말한다.
그것은 권력을 향한 정치공학 때문이 아니라, 나라의 발전단계가 그것을 요구하고, 더욱 긴박해진 인류적 위기에 나라와 국민의 힘과 지혜를 집중하기  위해서 절실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기 위해
낡은 진영논리나 특히 정서에 바탕한 낡은 진영이 허물어지는 것이 어쩌면 가장 어려운 일인데, 역대 최악의 선거라는 외형을 통해 그것이 이루어진다면, 역설적으로  나라의 운이며 국민의 복이 될 것이다.
나는 그런 점에서 반전과 변혁의 기미를 본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지금은 전쟁 중이라 이런 말들이 잘 귀에 들어오지 않겠지만, 전쟁이 끝난 후 우리 역사에서 일찌기 없었던 반전이 일어나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것을 위해 배려하고 준비해가는 정치세력이 커지기를 바란다. 
우리 역사의 오랜 비원이다.

Namgok Lee
193 F2ebr0utatar7y ato 190g9:5i438d  · 

올린 라이트는 자본주의에 대해서 열한 가지 비판을 한다.
1. 자본주의적 계급관계는 제거 가능한 인간 고통을 영구화한다.
2. 자본주의는 확장적 인간번영의 조건들이 보편화되는 것을 가로막는다.
3. 자본주의는 개인의 자유와 자율에 있어 제거 가능한 결함들을 영구화한다.
4. 자본주의는 사회정의의 자유주의적 평등주의 원칙들을 위반한다.
5. 자본주의는 어떤 결정적인 측면들에서 비효율적이다.
6. 자본주의는 체계적인 소비자주의 편향을 가지고 있다.
7. 자본주의는 환경파괴적이다.
8. 자본주의의 상품화는 사람들이 널리 지닌 중요한 가치들을 위협한다.
9. 자본주의는 국민국가의 세계에서 군국주의와 제국주의를 부추긴다.
10. 자본주의는 공동체를 침식한다.
11. 자본주의는 민주주의를 제한한다.
나는 청년시절 마르크스주의를 세계변혁의 이념으로 받아들였다가 거기서 떠난 사람이다.
올린 라이트는 자본주의를 지양(止揚)하는 것이 자유롭고 해방된 사회를 향한 길이라는 점에서는 마르크스주의의 전통을 잇고 있지만, 덜 단정(斷定)적이고 덜 단절(斷絶)적이다.
나 같은 사람에게도 충분히 설득력을 가지고 이상의 명제들을 설명하고 있다.
마르크스 이후의 세계사의 진행과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여러 이론 사상들과 진지한 대화를 모색하고 있다.
 마르크스의 예상은 실제의 세계사에서는 빗나간 것이 많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계급투쟁으로 자본주의를 타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도 하지만, 바람직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더 분명한 것은 지금의 자본주의를 넘어서지 않고서는 인류가 봉착한 여러 핵심 과제들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열한 가지 명제를 설명하면서 올린 라이트는 다음과 같이 다음 장(章)으로 연결 시킨다.
“가만히 놓아두면 자본주의가 이 모든 해악들을 머지 않아 다 치유할 것임을 논증함으로써 이 명제들이 모두 거짓임을 보일 수 있다면, 자본주의에 대한 해방적 대안의 매개 변수들을 명확히 밝히려는 마음은 현저히 꺾일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내재적 속성과 동학에 관한 현재의 지식 상태를 고려해볼 때, 결코 그럴 수는 없을 것 같다. 
이 판단이 올바르다면, 이 해악들을 완화시키려는 모든 진지한 노력은 궁극적으로 자본주의 그 자체와 대결해야 한다.
이것은 두 가지 심각한 문제를 제기한다.
첫째, 자본주의의 대안은 무엇인가? 이 해악들을 실제로 감소시킬 실행 가능한 대안들이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자본주의 그 자체에 도전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둘째, 우리는 이 대안을 창조하기 위해 현존하는 사회의 권력관계와 제도들에 어떻게 도전해야 하는가?
우리는 어떻게 여기에서 저기로 가야하는가? 이 책의 나머지 부분은 이 질문들에 대해 생각해 볼 것이다.“
아직 뒷 부분은 안 본 상태이지만, 이런 생각들(이른바 마르크스 주의의 전통)에 동의하는 사람이나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나 진지한 자기 안의 대화를 위해서도 한번쯤 읽어보기를 권하고 싶다.
특히 새로운 문명을 생각하는 사람들이나 단체들, 협동운동이나 공동체운동 마을운동을 하는 사람들이나 단체가 이 책을 소재로 토론이나 연찬을 해보는 것은 충분히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Namgok Lee
20 Februamctr10lyf a8tn s08g9r3g8:1id5  · 
총론(總論)이 비슷하더라도 각론(各論)은 다를 수 있고, 어쩌면 다른 것이 당연(자연스럽다)하다고 생각한다.
각론의 다름이 총론을 다시 살펴보게 되고, 총론을 더욱 풍부하고 튼튼하게 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다름을 서로 인정하지 않고, 더 나아가서 적대적으로 배제하려고 한다면, 총론이 매우 허약하거나 허위의식이 많을 때라고 생각한다.
같은 말을 사용하는데, 서로 상대방을 배제하려고 하는 현상들이 유독 심하게 진행되는 현실을 지금  만나고 있다.
나는 정명(正名)이 총론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한다.… See more

‘리얼 유토피아’ 독서 중.
마르크스주의 전통을 잇는다는 입장의 저자는 마르크스의 이론과 예측에 대해서는 마르크스 이후 세계의 변화와 현실 사회주의의 실패 그리고 자본주의의 변화 등을 실사구시하여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다.
자본주의를 옹호한 쪽에서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를 넘어서려는 대안을 모색하는 입장에서 하는 비판이고, 사회과학자가 ‘과학적’으로 접근하는 것이어서 특히 마르크스의 분석틀에 대한 진보주의자들의 토론과 연찬의 테마들이 많다고 생각한다.
오늘 읽은 것 가운데 마르크스를 비판한 간단한 언급을 소개한다.
“이 이론은 결국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와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의 조합에 의지한다. 즉, 노동자들은 그들의 집단적 정치조직을 통해 권력을 강화시킬 것이며, 이 새로운 제도들을 구축하는 실제과정은 창조적 시행착오적 민주적 실험방식으로 진행될 것이다. 따라서 마르크스는 사실상 자본주의 종말에 대해서는 아주 결정론적인 이론을, 그 대안의 구축에 대해서는 비교적 주의주의(主意主義)적인 이론을 제공했던 셈이다.”
그리고 5장 ‘사회주의 나침판’에서 자신이 창안한 이론들을 소개한다.
오늘 읽은 대목을 한 구절 소개한다.
“현재의 문맥에서 우리는 세 가지 중요한 권력 형태를 구분할 수 있다. 경제적 자원에 대한 통제력에 기초한 ‘경제권력’, 규칙제정에 대한 통제력과 영토에 대한 규칙집행능력에 기초한 ‘국가권력’, 그리고 다양한 종류의 자발적 집합행위를 위해 사람들을 동원할 수 있는 능력에 기초한 ‘사회권력’이 그것이다.
슬로건을 사용해서 말한다면, 사람들에게 일을 하게 만드는 세 가지 방식이 있다. 당신은 그들을 ‘매수’할 수 있다. 당신은 그들을 ‘강제’할 수 있다‘ 당신은 그들을 ’납득‘ 시킬 수 있다. 이것은 각각 경제권력의 행사, 국가권력의 행사, 사회권력의 행사에 상응한다. 그리고 앞으로 보겠지만, 이들은 자본주의, 국가주의, 사회주의의 구분과 밀접히 연결되고 있다“
여기까지 읽었다.
여기서 국가주의는 주로 러시아 10월 혁명 이후의 현실 사회주의를 이렇게 표현하고,
거기에 대비되는 사회주의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그 중요한 주체와 동력을 ‘사회권력’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나도 그 방향에서 생각을 많이 했던 사람으로 이른바 ‘납득’이 어떻게 진행되는지에 대한 그의 설명이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 참고로 2500년 전 공자는 '(매수나 강제로) 따르게 하기는 쉬워도, 납득하게 하기는 어렵다'
비슷한 이야기를 했는데, 이런 상황이 얼마나 바뀌었을까 또 어떻게 바뀔 수 있을까에 대한 저자의 설명이 궁금하다.

에릭 올린 라이트는 2018년 4월초에 급성 골수성 백혈병이라는 진단을 받고, 그가 추진하던 책을 출간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한다.
그리고 2019년 1월 13일, 열달 동안 병에 맞써 싸우다가 세상을 떠났다.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낙관주의자이자 현실적인 유토피아주의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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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을 아들이 보내주었다.
지금 읽고 있는 책을 보고 이어서 볼 생각이다.
그의 영혼이 심금을 울린다.
이 책을 보면서 어떻게 보면 ‘안될 줄 알면서도 헛되이 노력하는 사람’이라는 비난을 받았던 공자를 닮았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나 자신이 걸어온 사상과 실천의 맥락에서 볼 때, 같은 시대에 태어나 나라와 사회의 조건이 다름에도 그 바탕의 상통함이 많이 느껴져서 그의 영혼의 숨결을 느끼며 책을 읽고 있다.
물론 다른 점들도 있지만, 이 책을 다 읽은 다음에 그런 점들은 살펴보기로 한다.
오늘 읽은 내용을 소개하고 싶다.
우리나라에서 협동조합 바람이 불고 사회적 경제나 마을 운동들에 관한 관심과 참여가 높아졌던 근래의 사례들을 반추해 보는데 참고가 될 것 같아서 이 내용을 옮겨본다.
“우리는 리얼 유토피아 설계와 제안을 탐구하기 위해 두 가지 전략을 채택할 것이다. 첫 번째 것은 경험적인 전략으로, 제 5장에서 정교화된 사회권력 강화의 원칙들을 상이한 방식으로 구현하는 세계 각지의 구체적 사례들에 초점을 맞춘다. 이러한 경험적 사례들을 제대로 분석하려면 많은 과제들을 수행하여야 한다.
첫째, 그 사례가 정말 사회권력 강화과정을 구현한다는 것을 확증해야 한다.
둘째, 문제의 제도적 설계가 실제로 정확히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가능한 한 세밀하게 분석해야 한다.
셋째, 보다 추상적인 제도적 설계의 여러 요소들을 구성하는 몇 가지 일반 원리들을 그 사례로부터 추출해내야 한다.
넷째, 그 사례를 가능하게 한 촉진 조건들을 탐구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이 리얼 유토피아 설계가 직면하는 모순, 한계, 딜레마를 들어내야 한다.
이러한 종류의 분석에서 결정적인 위험은 이와 같은 실례들에 대한 연구가 선전적(宣傳的) 응원으로 전락한다는 것이다. 급진적인 자본주의 비판자들이 그들의 포부를 구현하는 경험적 모델에 필사적이 되면, 소망적 사고가 냉정한 평가를 압도할 수 있다. 이에 상응하는 위험은 물론 냉소주의이다.
지식인들은 순진한 열정을 폭로하는데 큰 찬사를 보낸다. 따라서 필요한 것은 경험적 사례들에 대한 설명이 순진하지도 냉소적이지도 않으면서, 사회권력 강화를 위한 실천적 노력의 진정한 잠재력 뿐만 아니라 복잡성과 딜레마들까지 완전히 인식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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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 중.
오늘 아침 '리얼 유토피아'를 읽다가 그 내용 가운데 생각된 것을 걸으면서 되새겨본다.
대의제 민주주의의 보완책으로 무작위선출(추첨방식)로 구성하는 '시민의회'를 제안하고 있다.

일종의 양원제인 셈인데, 선거방식의 '시의회'와 추첨방식의 '시민회의'를 병립하여 대의제의 단점을 보완하는 것이다.
물론 필요하고 가능한 분야에서 출발한다.
이것을 지역을 단위로 실험해보는 것은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 상당히 선구적이고 창조적 실험이 될 것이다.
물론 여러 조건들이 충족되어야 하겠지만, 지역당 설립이 가능해진다면, 먼저 가능한 지역에서 실험해볼 수 있다.
어차피 이번 대선 이후, 중앙 정치의 대변혁은 불가피해 보인다.
그것과 병행하여 지역정치도 중앙정치의 종속에서 벗어나는 혁신이 일어나야 한다.
영남과 호남 등의 지역갈등이 아니라, 실제는 중앙과 지역의 불균형이 문제다.
기업이나 기관을 분산하는 것으로는 근본적인 해결이 되는 것이 아니다.
지역이 스스로 매력 있는 곳으로 변하는 것이 더 근원적이다,
나라의 전반적인 정치 후진성을 극복하는 길의 하나로 어떤 방면에서는
지역 정치(정당)가 물꼬를 틀 수 없을까?
호남의 지역정당과 영남의 지역정당이 손을 잡고 중앙과 지역의 균형을 위한 정책이나 입법을 공동제안하는 모습도 그려볼 수 있다.
더 나아가 본다면, 국경을 넘어 지역당들의 연대를 통해 문명전환을 향한 세계정치의 진화를 위해 틈새확장 방략이 될 수 있다.
지역의 특성과 자산(물적ㆍ정신적)을 살리는 창조적 지역정치의 성공적모델 들이 나오는 것이 그 출발점으로 될 수 있을 것이다.
전국 단위로 어려운 창조적 실험들을 지역 단위로 할 수 있는 것도 많을 것이다,
역동적인 정치변혁의 하나의 목표 내지는 과정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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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경제’에 대한 여러 정의(定義)들이 있다.
사회적 경제 분야에서 일하거나 사회적 경제에 대해 관심이 있는 분들에게
에릭 올린 라이트의 정의를 소개한다.
(내가 좀 더 정독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나는 사회적 경제를 아주 넓게 정의해, 일정한 형태의 사회권력 행사를 통해 직접적으로 조직되고 통제되는 경제활동으로 정의한다. 사회권력은 시민사회의 자발적 결사체에 근거한 권력이며, 다양한 종류의 집합행위를 위해 사람들을 조직할 수 있는 능력에 기초해 있다. 사회적 경제에서는 재화와 서비스의 생산과 분배-경제활동-가 이러한 사회권력의 행사를 통해 직접적으로 조직된다.
이 정의는 ‘비영리부문’의 모든 조직이나 기업이 사회적 경제에 속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어떤 비영리조직들은 시민사회에서 형성된 자발적 결사체라기보다 기본적으로 자본주의 기업이나 국가의 일익이다. 또 어떤 비영리 조직들은 대규모 자본 기부금을 받아 생산활동을 하는데 필요한 자원을 공급 받으며, 위계적 기업의 방식으로 지휘된다. 따라서 경제활동에 대한 그들의 통제는 사회권력(즉, 시민사회의 집합적 결사체에 근거한 권력)의 동원에 기초한 것이라기보다 그들의 기부금에서 나오는 경제권력의 행사에 기초해 있다. 이것이 시사하는 바는, 많은 조직들은 혼합적 혹은 하이브리드적 성격을 가질 것이라는 것이다. 그들이 시민사회의 결사체적 삶에 근거한다면, 그들은 사회적 경제활동의 예이다. 재화와 서비스의 생산과 분배에 종사하는 그들의 권력이 국가권력이나 경제권력에 기초한다면, 그들은 국가주의적 조직이나 자본주의적 조직이다.“
아마 저자는 넓게 정의한다고 말하지만, 이 글을 읽는 사람들 가운데는 저자의 이상주의적 생각과 전망에 기초해 아주 협소하게 정의하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도 있을 것 같다.
그것은 저자의 태도가 자본주의를 지양하려는 마르크스주의의 ‘전통’ 위에 서 있으면서도, 기존의 마르크스주의를 강하게 비판하는 기조 위에서 대안을 모색하는데서 일어나는 일종의 제한과 불가피하게 진행되는 논란의 과정에 있음을 반영한다고 생각된다.

☆ 산책하면서 들었던 생각.
지금 반 정도 읽었는데,
그가 자본주의를 넘어서려는 낙관적 이상주의자라는 것은 알겠는데, 왜 굳이 마르크스주의의 전통을 잇는 것을 자기정체성으로 하는지, 그것이 잘들어오지 않는다.

다 읽어보면 판단이 될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공상과 달리 계급 및 생산관계 생산력 국가 등에 대해 과학적인 분석의 전통을 잇는다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이른바 그 '과학적 분석'을 통해 기존의 마르크스 주의를 비판하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자본주의 붕괴에 대해서는 결정론적 시각을 나타내는데, 그 너머의 사회의건설에 대해서는 주의(관념적 이상)주의를 넘어서지 못함을 비판하는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결정론 자체가 과학에 배치되는 것만큼이나, 새로운 사회에 대한 구체적 비전은 관념 수준에 머무는 것을 비판하는 것으로 보인다.
'리얼 유토피아'는 이런 양 측면을 넘어서려는 연구로 보인다.
그런데 '마르크스주의 전통' 자체가 하나의 틀로 작용하지 않을까?
자본주의를 넘어서려는 '과학적'시도를 계승하고, 마르크스의 관념에 그친 새 사회 건설의 설계를 현실 사회주의의 실패 경험과 자본주의 변천 과정을 통해서 '과학적'으로 접근하려는 것을 이른바 '전통'이라고 표현하는 것으로 들린다.
그런데 나에게는 그런 '전통' 자체가 일정한 사고의 틀로 제약하는 면이 있다는 생각을 해왔다.
이 나라에서도 상당히 실사구시하려는 사람들이 그 틀 속에 머묾으로서 그 창조적 능력이 제약되는 것을 본 바가 있어서, 과학=마르크스주의 전통이라는 것을 넘어설 수 없을까 생각한다.
저자가 경제권력, 국가권력, 사회권력으로 구분하고, 그것을 자본주의, 국가주의, 사회주의로 대응시키면서,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는 동력을 각각 '매수' '강제' '납득'으로 이야기한다.
이렇게보면 '납득'이야말로 리얼 유토피아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우애와 협동, 관용과 양보'라는 자기중심성을 넘어서는 정신(의식ㆍ문화)이 이상을 환상이나 공상을 넘어 리얼로 만드는 동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전에 잠간 언급했지만, 나는 실패한 경험이 어른거리는 사회주의라는 용어보다 다른 용어를 창조하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한다.
물론 하나의 언어가 만들어져 보편화되는 어려움이 얼마나 큰가는 알고 있지만.
산책하면서 반 쯤 읽은 독후감을 써본다.
끝까지 보고 나서 지금 쓴 것을 다시 쓰게 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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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ok Lee l2016 F9ebtr9uaory at0a 0e9:20l0 · ‘리얼 유토피아’ 독서 중. 마르크스주의 전통을 잇는다는 입장의 저자는 마르크스의 이론과 예측에 대해서는 마르크스 이후 세계의 변화와 현실 사회주의의 실패 그리고 자본주의의 변화 등을 실사구시하여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다.
자본주의를 옹호한 쪽에서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를 넘어서려는 대안을 모색하는 입장에서 하는 비판이고, 사회과학자가 ‘과학적’으로 접근하는 것이어서 특히 마르크스의 분석틀에 대한 진보주의자들의 토론과 연찬의 테마들이 많다고 생각한다. 오늘 읽은 것 가운데 마르크스를 비판한 간단한 언급을 소개한다. “이 이론은 결국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와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의 조합에 의지한다. 즉, 노동자들은 그들의 집단적 정치조직을 통해 권력을 강화시킬 것이며, 이 새로운 제도들을 구축하는 실제과정은 창조적 시행착오적 민주적 실험방식으로 진행될 것이다. 따라서 마르크스는 사실상 자본주의 종말에 대해서는 아주 결정론적인 이론을, 그 대안의 구축에 대해서는 비교적 주의주의(主意主義)적인 이론을 제공했던 셈이다.” 그리고 5장 ‘사회주의 나침판’에서 자신이 창안한 이론들을 소개한다. 오늘 읽은 대목을 한 구절 소개한다. “현재의 문맥에서 우리는 세 가지 중요한 권력 형태를 구분할 수 있다. 경제적 자원에 대한 통제력에 기초한 ‘경제권력’, 규칙제정에 대한 통제력과 영토에 대한 규칙집행능력에 기초한 ‘국가권력’, 그리고 다양한 종류의 자발적 집합행위를 위해 사람들을 동원할 수 있는 능력에 기초한 ‘사회권력’이 그것이다. 슬로건을 사용해서 말한다면, 사람들에게 일을 하게 만드는 세 가지 방식이 있다. 당신은 그들을 ‘매수’할 수 있다. 당신은 그들을 ‘강제’할 수 있다‘ 당신은 그들을 ’납득‘ 시킬 수 있다. 이것은 각각 경제권력의 행사, 국가권력의 행사, 사회권력의 행사에 상응한다. 그리고 앞으로 보겠지만, 이들은 자본주의, 국가주의, 사회주의의 구분과 밀접히 연결되고 있다“ 여기까지 읽었다. 여기서 국가주의는 주로 러시아 10월 혁명 이후의 현실 사회주의를 이렇게 표현하고, 거기에 대비되는 사회주의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그 중요한 주체와 동력을 ‘사회권력’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나도 그 방향에서 생각을 많이 했던 사람으로 이른바 ‘납득’이 어떻게 진행되는지에 대한 그의 설명이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 참고로 2500년 전 공자는 '(매수나 강제로) 따르게 하기는 쉬워도, 납득하게 하기는 어렵다' 비슷한 이야기를 했는데, 이런 상황이 얼마나 바뀌었을까 또 어떻게 바뀔 수 있을까에 대한 저자의 설명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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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일
‘리얼 유토피아’의 저자는 ‘사회적 자본주의’라는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

그 구체적 사례로 캐나다 퀘백주의 ‘퀘백노동연합연대기금’을 소개하고 있다.
창립 2년후인 1985년, 기금은 1,430만 캐나다 달러, 5,000명이 약간 넘는 회원 주주, 그리고 네 개의 동반자 회사들에 대한 투자를 가지고 있었다. 2007년 이것은 72억 캐나다 달러의 자산, 574,794명의 회원 그리고 1,696개 회사들에 대한 투자로 성장해, 중소기업들에게 자본을 제공하는 데 중요한 주자가 되었고, 퀘백에 있는 모든 모험 자본의 거의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었다.
저자의 소개다.
“이 기금들은 사회적 자본주의가 사회권력 강화 경로임을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예들이다. 그들은 자본주의 자체에는 도전하지 않는다. 그들은 노동자가 소유하는 협동조합에 지분투자를 제공하기도 하지만, 대개 일반 자본주의 기업들에 투자한다. 그들의 투자 전략은 퀘백 자본주의를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퀘백 경제 안에서 기업들이 경쟁력을 강화하는 것이며, 계급 적대를 심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고용자와 노동자 사이의 보다 협력적인 관계를 촉진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적 자본주의는 자본주의가 여전히 본질적 요소인 하이브리드 형태이다. 그러나 이 하이브리드는 노동운동이 기금을 운용하고 우선 순위를 정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에 사회권력이 보통의 자본주의 구조에서보다 더 큰 무게를 가지는 하이브리드다”
읽으면서, 우리나라의 어떤 지역이나 어떤 분야에서 ‘후발 선진국’에서 나올 수 있는 새로운 모델들이 만들어져서 뜨거운 잇슈로 떠오르는 것을 상상해 본다.
이제 노동운동을 비롯한 한국의 진보가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사례들을 성공시킴으로서 세계 진보에 대한 선구적인 역할을 하는 것을 상상조차 할 수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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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ok Lee 0h2t35Su8p9ooufaa8fetmhg · ‘몬드라곤’이 한국에 본격적으로 소개되는 과정에 관여했던 한 사람으로서, 에릭 올린 라이트가 몬드라곤을 사회적 자본주의의 한 중요한 사례로 예시하면서, 실제로 몬드라곤 사람들과 대화를 나눈 것들에 깊은 관심이 간다. 나는 근래의 몬드라곤을 모른다. 어렴풋하게 알고 있는 것은 해외에 자(子)회사를 거느린 큰 규모의 경제 주체로 발전하였다는 것과 다른 한편 몬드라곤과 같은 협동기업이 다른 나라에 성공적으로 뿌리내린 예는 찾기 힘들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그 예에 속한다. 몬드라곤에 대한 저자의 언급을 일부 발췌해본다. “이 통치구조는 주권적 조직 단위들의 연맹 내에서 대의민주주의와 직접민주주의가 혼합된 모습을 보인다. 예상 가능한 일이지만, 이 구조는 모순과 긴장으로 가득차 있다. 밑으로부터의 민주적 책임성과 경영 자율성 사이에, 탈중앙집권적인 의사결정과 중앙집권적인 조정 사이에, 전체 협동조합들의 연대 원칙과 개별 협동조합들의 경제적 이익 사이에, 주변 지역사회의 복지에 관심을 기울이는 광범위한 사회적 연대에 대한 헌신과 협동조합 내부 회원들의 기업적 복지 사이에, 몬드라곤에 대한 좌파 비판가들은 이 이율배반의 모든 항목에 있어 MCC(몬드라곤 협동조합 기업)는 점점 더 일반 자본주의 기업처럼 되어간다고 주장한다. MCC 옹호자들은, 이 긴장에도 불구하고 협동조합의 노동자 소유자들은 개별 기업들과 전체 기업의 광범위한 전략에 대해 의미 있는 민주적 통제력을 지니고 있으며, 이 점에서 자본주의 기업들과 아주 다르게 움직이고 있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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