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2/06

밭에 감추인 보화 같은 유교의 道, 이은선 - 주간기독교

한국 페미니스트 신학자의 유교 읽기 < 주간기독교


한국 페미니스트 신학자의 유교 읽기 목록( 총 :3건)

밭에 감추인 보화 같은 유교의 道
기자명 이은선 한국信연구소 대표  승인 2022.01.04
 

   도산서원선비문화수련원은 ‘한국 정신문화의 수도’라는 구호를 걸고 있는 안동시에 소재한 유교 선비정신 수련장이다. 동방의 스승 퇴계 선생(1502-1571년)을 기리고 그 정신을 널리 퍼뜨리고자 2001년 개원하였다. 지난 11월 그곳에서 일종의 가톨릭 피정 시간으로 유교 선비 수련을 체험한 대구 성당의 한 교인은 그 체험을 마치 ‘황금을 주운 것 같다’는 심정으로 토로했다고 한다. 왜 그 천주교인은 자신의 유교 선비정신과 만남을 그와 같이 황금을 주운 것 같은 경험이라고 했을까? 그런데 사실 이 글을 쓰는 본인도 오래전 유럽에서 유학 생활을 하면서 유사한 경험을 했다. 당시 유럽 기독교 문명의 중심에서 기독교 신학을 공부하고 있을 때, 박사학위 논문 주제로 유교와 기독교의 대화라는 큰 물음 아래서 16세기 중국의 신유교(新儒敎) 학자 왕양명(王陽明, 1472~1529)을 만나면서 한 경험이었다. 그때 지도교수였던 바젤 대학의 후리츠 부리(Prof. Fritz Buri) 교수는 본인에게 가톨릭 수녀 출신 중국 여성종교학자 쥴리아 칭의 저서 『지혜를 찾아서-왕양명의 길, To Acquire Wisdom, The Way of Wang Yang-ming』을 건네주었는데, 그 책을 읽으면서 본인은 정말 신약성서 마태복음 13장 이야기의 주인공처럼, 밭에 보화가 감추인 것을 발견하고서 돌아가서 모든 소유를 팔아 그 밭을 산 사람처럼 동아시아 신유교의 가르침을 큰 기쁨과 행운으로 맞이했다.

   당시 서유럽에서 한국인으로서 기독교 신학을 전공으로 공부하면서 민족적 자존감이 많이 흔들리는 것을 경험했다. 또한, 학문하는 사람으로서 학문적 사유의 토대와 정체가 약한 것을 느끼면서 고심하고 있을 때였다. 그때 왕양명이라는 한 강력한 유학적 인격을 만났고, 그럼으로써 그 고민과 고심을 풀기 위해 나아가는 길에서 환한 등불을 만난 것 같았다. 양명은 서구 기독교사에서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와 견주어질 정도의 전복적인 사상가로 평가받는다. 그때까지 본인이 기독교 초월신 신앙에서만 가능하다고 여겼던 큰 인격적 깨달음과 삶의 전회를 바로 기독교 유일신 하나님과는 다른 모습과 방식으로 그려지는 유교 내재적 초월(天/理)의 체험(心卽理) 안에서 유사하게 본 것이다. 또한, 이후 그 삶의 실천적 행보가 어떤 기독교 신앙인의 그것보다 덜하지 않은 것도 보았다. 물론 본인의 그 등불에 대한 이해가 유학 생활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서 한국 유교에 대해서 더 공부하고, 특히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여성 생활인과 직업인으로서 살아가며 또 다른 차원을 알아가면서는 다시 변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그 첫 만남의 충격은 여전하다. 지금 21세기 초 인류가 코로나 팬데믹이라는 복병을 만나기 전까지 전 지구가 서구 기독교 문명으로부터 세례를 받았지만, 그러나 오늘 심각한 한계가 드러나면서 다른 길을 탐색하며 그 ‘이후(以後, postmodern)’를 찾고 있다. 본인은 그 길 위에서 동방의 유교와 그 핵심 정신으로 나타나는 선비정신이 하나의 결정적 역할을 할 것을 의심치 않는다. 

   이번 회부터 “한국 페미니스트 신학자의 유교 읽기-신학(神學)에서 신학(信學)으로”라는 제목으로 격주로 연재하고자 하는 글은 이런 본인의 생각을 좀 더 구체적으로 풀어내고 변증해 가는 과정일 것이다. 그것은 본인이 여전히 유교 공부에서 일천함을 벗어났다고 할 수 없지만, 그 안에 보화가 담겨있다는 것을 엿보았기 때문에 용기를 낸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오늘 매우 유아독존적이고, 자기 우월에 빠져있는 한국 교회나 서구 가치 중심적 인류 문명에게 자기와 다른 타자를 듣는 일은 긴요하다. 그 타자 중에서, 아니 어쩌면 그 타자와 자기 바깥이라고 생각했지만, 유교 道는 특히 한국 신앙인에게는 더 오래된 스스로의 토대로서, 그래서 이미 만남이 있었지만, 지금까지 의미를 잘 알아채지 못해서 저버렸고 억눌렀고 무시했던 자신이었는지도 모른다.

   20세기부터의 한국 개신교 역사에서 끊임없이 다른 것과의 대화를 통해서 자신을 새롭게 하는 일에서 뛰어났던 함석헌 선생은 지금 인류가 가장 원하고 필요로 하는 것은 ‘새 종교’라고 갈파했다. 그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는 한국 유교 전통에 대해서 그렇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는 기독교가 불교, 유교를 일깨워서 다시 생기를 주어야 한다고 발설했다. 하지만 한편으로 예로부터 우리나라의 산 힘은 늘 ‘선비(士)’에게 있었다고 하면서 자신이 매우 중시한 ‘뜻(志)’이란 바로 ‘선비(士)’의 ‘마음(心)을 말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선비(士)’란 ‘열(十)’에서 ‘하나(一)’를 보고, ‘하나(一)’에서 다시 ‘열(十)’을 보는 뛰어난 통찰과 통섭, 통일의 마음을 지닌 사람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유교야말로 현실에 잘 이용된 종교다”라고 하면서, 앞으로 지구 인류의 삶이 크게 ‘민족’, ‘소유권’, ‘가정’이라는 “인류 사회의 캠프를 버텨 오던 세 기둥”에 대한 이해에 따라 좌우될 것이라고 했다. 즉 오늘 20세기 이후 인류의 삶이 이 세 기둥에 따라 크게 흔들리면서 어떻게 거기에 대한 관점을 새롭게 정립하는가에 따라서 큰 차이가 날 것임을 말한 것이다. 

   앞으로 연재될 유교와 기독교와의 대화도 주로 이와 유사한 물음들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를 들어 우리의 유교 이해에서도 먼저 그 유교 문명의 발단이나 전개 역사 등을 살필 때 한국 유교를 단순히 중국 유교로부터의 피동적인 수용자와 수혜자로 보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까지는 잘 언술 되지 않았지만, 더욱더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역할과 기원에 대한 탐색, 그 전개에 대한 고유한 역할 등을 언급할 것이고, 이러한 일을 통해서 우리의 대화는 지금 인류 문명의 미래를 위해서 중요한 관건이 되는 ‘민족’이나 ‘국가’의 경계 물음에 대해서 어떤 대안을 찾을 수 있는지 물을 것이다. 두 번째 ‘소유권’과 관련한 탐구는 오늘 인류 문명이 온통 빠져있는 지독한 유물주의와 경제 제일주의, 그를 통한 자아의 무한 팽창과 번영에 대한 욕망을 어떻게 제어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물음과 관계된다. 이것은 우리 궁극의 가치와 그에 다다르고자 하는 길을 무엇으로, 어떻게 보느냐와 긴밀히 연결될 것인데, 오늘 한국 교회의 탐욕과 물질주의에 대해서 우리의 오래된 미래로서의 유교는 무슨 말을 할 수 있는지 살피고자 한다. 마지막 ‘가정’이나 ‘가족’에 대한 물음과 관련해서는 지금 시급한 실존적 물음이 된 성(性)과 몸, 가족적 삶과 돌봄, 보살핌이나 탄생과 떠나감, 집 등에 관한 물음이 탐색 될 것이다. 이 물음과 관련해서는 오히려 유교 측에 대한 현대 서구 페미니즘으로부터의 비판과 달라짐이 요청될 터인데, 이에 대해서 유교 道는 무엇을 말할 수 있는지, 어떻게 그 높은 파도 앞에서 응전하면서 그러나 단지 일방적인 들음만이 아닌 오늘 ‘고립’과 ‘외로움’을 세기의 특징으로 규정하는 서구 페미니스트들에게 무엇인가 말해줄 것이 있는지 등을 돌아보고자 한다. 여기서도 둘의 대화가 결코 일방적이지 않다는 것이 드러날 것이다.

   21세기 인류의 삶은 이제 더는 어떤 초자연적인 神의 이름이나 초월 이야기로 좌우되지 않는 급진적인 탈종교화의 시간으로 들어섰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여기 지금에서의 모든 초월적 차원의 탈각은 또 다른 심각한 문제를 일으킨다는 것도 함께 경험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가장 적게 종교적이면서도 참으로 풍성하게 영적인 초월’을 찾아 나서고자 한다. 거기서 유교의 道가 줄기차게 여기 지금의 지극한 일상과 평범, 정치나 교육과 같은 구체적인 세간(世間)의 삶에서 초월과 궁극을 찾는 ‘하학이상달(下學而上達)’이나 ‘극고명이도중용(極高明而道中庸)’을 말하는 것이 시선을 끈다. 그래서 이러한 모든 정황을 더는 어떤 초월 神에 관한 이야기(神學)가 아니라 여기 지금 우리의 진정한 눈뜸과 새로운 인식(信學)이 가장 긴요한 관건이라는 의식에서 이번 연재의 부제로 ‘신학(神學)에서 신학(信學)으로’를 가져왔다. 

 

이은선(李恩選) 교수는 세종대학교를 명예퇴직하고 지금은 현장(顯藏) 아카데미 <한국信연구소> 대표를 맡고 있다. 21세기 인류 문명의 전환을 위해 유교와 기독교의 대화를 지속하면서 종교(聖)와 정치(性), 교육(誠)의 통합학문적 시각에서 한국적 신학(信學)과 인학(仁學)의 구성을 탐색한다. 지은 책 중에는 『잃어버린 초월을 찾아서-한국 유교의 종교적 성찰과 여성주의』(2009), 『한국 생물生物여성영성의 신학』(2011), 『생물권 정치학 시대에서의 정치와 교육-한나 아렌트와 유교와의 대화 속에서』(2013), 『다른 유교, 다른 기독교』(2016), 『환상과 저항의 신학』(공저, 2017), 『세월호와 한국여성신학』(2018), 『3·1운동 백주년과 한국종교개혁』(공저, 2019), 『동북아 평화와 聖·性·誠의 여성신학』(2020), 『사유하는 집사람의 논어 읽기』(2020), 『한국전쟁 70년과 ‘以後’교회』(공저, 2021), 『李信의 묵시의식과 토착화의 새 차원』(공저, 2021)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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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문명화 과정과 유교
기자명 이은선 한국信연구소 대표  승인 2022.01.17 


주승인
 

   요사이 지구상 대부분 사람은 공통의 역(曆)에 맞추어서 연말연시를 보내고 있다. 그에 더해서 그리스도인들은 유사한 시기에 예수 탄생의 성탄절을 보낸다. 그런데 2020년 1월부터 본격화된 코로나 팬데믹 때문이기도 하지만, 오늘날 성탄절을 보내는 예식(ritual)이 매우 간소해진 것 같다. 예식이 간소해졌다는 것은 사람들이 예전처럼 그렇게 서로 많이 모이지 않는다는 것이고, 직접 관계를 맺는 일이 점점 더 드물어진다는 것이며, 홀로인 경우가 많아지면서 더는 리추얼이 필요하지 않게 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그렇게 리추얼과 명절, 또는 축제가 없어진다는 것은 그 리추얼을 마무리하고 ‘다시 시작하는’, ‘새로 시작하는’ 일도 드물어진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예를 들어 서구 기독교사에서 어거스틴이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한 이유는 ‘새로 시작하는 일을 위해서였다’고 했다면(Initium ut esset homo creatus est), 우리가 리추얼을 소홀히 하고, 마침내는 그것을 그만둔다고 하는 것은 바로 새로 시작하는 일을 그만둔다는 것이고, 그것은 곧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일과 같은 것이 된다. 그리고 그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일은 서로 모이고, 연결하고, 함께 관계 맺는 일을 그만두는 일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임을 말해준다.

   

   오늘과 같은 모습의 서구 공동체 삶을 이루는데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이 그 바탕이 되어왔다면, 동아시아에서는 그와 견줄만한 것이 무엇이 있을까? 그중의 하나로 유교(儒敎)를 드는 것에 이의가 없을 것이고, 그렇다면 그 유교는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이 물음에 가장 생생하게 답할 수 있는 말이 ‘문명화 과정(the civilizing process)’이라고 생각했다. 이 말은 독일의 역사사회학자 노버트 엘리아스(Novert Elias, 1897-1990)가 쓴 말인데, 한국에서도 1996년에 그의 책이 번역 출판되었다(노르베르트 엘리아스, 『문명화과정 I, II』, 박미애 옮김, 1996/1999). 거기서 저자는 유럽에서 특히 중세 이래 근대 부르주아 사회까지의 유럽인들의 삶의 변화를 살피면서 그것을 일종의 ‘문명화 과정’ 또는 ‘예(禮)와 리추얼의 세련화’ 과정으로 파악했다. 즉 사회 변화에서 단기적인 과정이나 정태적인 개별 대상에 관한 관심보다는 더욱 장기적인 변화와 거기서의 장기간적 역사적인 경험들을 실증적으로 살펴보았을 때 거기에 분명 뚜렷한 포괄적인 사회 발전의 방향과 구조가 드러난다고 한다. 그것은 종교나 경제, 국가 형태나 예술뿐 아니라 특히 일상적 본능과 관련된 삶으로 식사예절, 오줌 누기, 코풀기, 침뱉기, 성생활 태도 등의 변화 과정을 살펴보면 점점 더 뚜렷하게 스스로의 본능적인 충동을 조절하고, 인간 삶의 일상적 관계에서 동물적 측면이 억압되며, 잔인성과 폭력성, 더럽고 불결한 것에 대한 수치와 당혹감이 확장되어 가는 과정이 보인다는 것이다. 또한, 이 ‘예절’이라는 말이 점점 더 ‘인간애(humanity)’라는 말과 동일시 되어갔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설명을 들으면 유교야말로 동아시아에서 그러한 문명화, 예절화, 인간화 과정을 추동해온 근본 힘인 것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왜냐하면 유교는 지치지 않고 “인자인야(仁者人也. 『중용』 20장)”나 “인야자인야(仁也者人也. 『맹자』 진심下16)”를 말하면서 바로 인간이라는 것(人)은 인간성(仁)을 지키는 일이고, 그 인간성(仁)이란 인간 사이에 그러한 인간애를 지키는 예절과 예의를 실천하는 일이며, 그래서 인간이란 그러한 관계(仁)를 통해서만 인간이 될 수 있으므로 그사이의 예절을 더욱 섬세하고 세련되게 다듬어나가는 일을 자신 도의 핵심으로 삼아왔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그 일을 주로 남자 어른들 사이의 일로만 여겼고, 여성들의 살림살이나 그들과의 관계, 또는 어린아이들 삶에는 그렇게 주목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가면서 장기간의 동아시아 역사 과정을 살펴볼 때, 특히 한국인의 삶에서는 그러한 문명화와 인간화를 지향하는 유교화의 과정이 점점 심화·확대하여 간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런 맥락에서 네덜란드 한국학 교수 왈라번(B. Walraven)은 일찍이 유럽의 기독교 문명화 과정에서 중요한 자료가 되는 16세기 에라스무스의 책 『소년들의 예절론』을 18세기 조선 후기 실학자 이덕무(李德懋, 1742-1793)의 『사소절(士小節, 선비의 작은 예절)』과 비교하였다. 그러면서 조선의 유교 문명화 과정이 유럽 기독교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지적하였는데, 곧 인간 삶의 문명화 과정이란 공동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 의식과 태도 안에 자기 통제력(self-control), 시간 의식(the sense of time), 식자력(literacy) 등을 습득해 가는 과정으로 이해한 것을 말한다. 조선 후기 영조 51년(1775)에 이덕무가 당시 조선의 시대 상황을 반영하면서 쓴 예절 수신서인 『사소절』은 특히 그 가르침의 대상에 여성과 아동도 포함해서 크게 ‘남자의 예절’, ‘부녀자의 예절’, 그리고 ‘아동의 예절’의 세 부분으로 구성하여 각자에게 해당하는 일반적 사회생활 예절-성행(性行), 언어, 복식, 근신 등-을 제시했다. 이것은 18세기 후반에 이르러서 조선의 유교화가 정치나 남성의 영역만이 아니라 여성과 아동의 영역까지 확장되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런데 이후 지나친 유교 예화는 현실에서 많은 부작용과 불의를 불러온 것도 사실이다. 특히 여성들에게는 더해서 오늘날 우리가 유교에 대한 혐오를 가장 빈번히 표출하는 곳이 바로 이 지나친 예의와 예절, ‘체면’에 대한 강조와 그것을 특히 신분과 성(性)의 차별에 근거해서 주장할 때는 더 이상 돌아보고 싶지 않게 만든다. 그러나 한편 다시 생각해 보면, 오늘날 서구적 절대 평등주의가 몰고 온 무한 경쟁주의, 자아 절대주의, 그리고 그것이 극한으로 치달아 무한 ‘능력(평등)주의’가 난무하는 상황을 보면, 어쩌면 그 본래의 의미대로 차별이 아닌 ‘차이(別)’에 근거한 유교적 관계의 예절인 예(禮)의 강조는 다시 돌아보아야 하지 않을가 생각한다. 차이에 근거한 예화와 인간화, 문명화는 어떤 차이도 용납하지 않고 모든 차이를 없애버리는 데까지 몰아가면서 유아독존적으로 홀로만의 최고의 성공을 위해서 급기야는 자신까지도 파괴하는 무한 경쟁주의로 내몰지 않는다. 그보다는 나름의 ‘역할완수’를 더욱 진지하게 관심하도록 하며, 그래서 여전히 ‘관계’들이 살아있을 수 있도록 한다. 예를 들어 오늘 한국 사회 페미니즘 논쟁에서 여성들도 군대 가는 일도 포함해서 모두 똑같이 평등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게 된 배경에는 어떤 차이 내지는 ‘현실적 차별’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서구 페미니즘의 급진주의가 놓여있는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그렇게 되면 이제 여성들은 군대 가는 일도 포함해서 남성들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할 수 있도록 그와 같은 신체적, 물리적 힘까지 취득해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되고, 그렇게 두 성 사이에서 야기되는 전쟁과 경쟁은 능력주의에 근거한 무한 경쟁으로 치닫게 하여 어떤 관계 맺음도 가능치 않도록 만든다. 물론 이러한 이야기는 남성들에게도 예를 들어 출산과 육아 일과 관련해서 똑같은 것이 말해질 수 있다. 또한 그에 더해서 오늘날은 더 이상 성의 역할과 능력이 예전처럼 본질주의적으로 고정된 것으로 여겨지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성찰에 또 다른 차원이 첨가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오늘날 일반적인 상황은 유교적 예가 강조하는 구별과 다원성(別)의 의미, 그에 근거한 인간관계 맺는 일(리추얼, 禮)의 중요성에 대한 강조 등을 돌아보게 한다.

 

   본인은 이것이 다른 말로 하면 한국 유교가 제일 중시해온 것의 하나인 ‘中’의 의미를 되새기는 일이라고 본다. 『중용』 1장은 “‘中’이라는 것은 천하의 큰 근본이고, ‘화(和)’라는 것은 천하의 통하는 도다(中也者 天下之大本也, 和也者 天下之達道也.)”라고 했다. 그런데 여기서 ‘中’을 잡는다고 하는 것은 그저 평면적으로 양쪽을 저울질해서 쉽게 그 중간을 취하거나, 양비(兩非)나 양시(兩是) 등의 애매한 입장을 말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매 경우와 매 상황의 차이에 주목하면서 그에 대한 적극적인 성찰과 숙고를 통해서, 궁극적으로는 그 일에 관련된 ‘사람’과 ‘공동체’와 ‘관계’를 살리고 키우는 일에 집중하여 선택하는 일일 것이다. 곧 판단자 개인의 사적 욕심을 넘어서 공평무사한 판단과 결단을 내리는 일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어서 『중용』은 “‘中’과 ‘和’를 지극히 하면, 천지가 제자리를 잡고, 만물이 성장한다(致中和 天地位焉 萬物育焉.)”라고 했다. 이 『중용』의 언어를 20세기 서구 정치사상가 한나 아렌트에 대한 다음의 언어와 함께 생각해 보면 좋겠다: “변화와 참여에의 열망은 관계의 힘에서 나온다. 그 힘은 사람들이 더 이상 고립되어 있지 않다는 것, 즉 무력하지 않으며 함께 무엇인가를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기 때문이다.”(양창아, 『한나 아렌트, 쫓겨난 자들이 정치』, 2019, 296쪽). 우리 지구 집의 문명화와 예화, 인간화를 위해서 지금까지 동서에서 떨어져서 나름의 역할을 해온 유교와 기독교 사이에는 이렇게 내적으로 서로 연결되는 점이 많이 있는 것을 본다.  

 이은선 한국信연구소 대표 cnews197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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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 문명의 기원과 전개
기자명 이은선 한국信연구소 대표  승인 2022.02.04


   요즘 잦은 말실수로 설화를 겪고 있는 국민의 힘 윤석열 대선후보는 또 지난 12월 말에 “한국 국민, 특히 청년 대부분은 중국을 싫어한다”라고 언술했고, “중국 청년들도 대부분 한국을 싫어한다”라고 했다. 이 말들로써 그는 문재인 정부의 대중국 정책을 비난하면서 그런 “중국 편향 정책”에도 불구하고 국민의 반중 정서가 커졌다고 말했다. 이러한 말을 한국의 대선후보로서 직접 발설하는 것은 적절해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많이 들어 온 대로 특히 사이버상에서 두 나라 젊은이들 사이의 갈등이 높다. 그 원인은 주로 두 나라 사이의 국민적 자존심 싸움에 있는 것 같다. 우리의 처지에서 보면 동북공정 등의 역사 왜곡을 밀어붙이는 중국의 제국주의적 행보에 대한 반감일 것이고, 특히 오늘 전 세계적으로 퍼져나가는 K-문화 한류 앞에서 그 문화의 기원을 모두 자신들 것이라고 주장하는 중국 젊은이들의 왜곡된 애국주의가 갈등을 부추기는 측면이 있다.   

   한국 사람 중에서도 유교 문화를 모두 중국 것으로 여기는 사람이 많다. 특히 미국 편향의 기독교인 중에서 유교를 우리 정신적 토대 중 하나라고 말하면 왜 그것이 우리 것이냐 중국 것이지 라는 말로 반응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일면 맞는 말이기도 하다. 필자도 중고등학교  한국사 시간에 삼국 시대 고구려 소수림왕 2년(A.D.372)에 유교 교육기관인 태학(太學)이 설립되었고, 그것이 우리 유교 문화의 시작이라고 배운 기억이 있다. 하지만 이후 그러한 도식적인 역사 이해와 문명 이해가 얼마나 많은 한계를 가졌는지를 알아갔다. 특히 인류 문명사 교류에 대한 더 넓은 이해와 인류 고고학적 탐구나 동아시아 고기(古記)에 대한 새로운 발견들은 이러한 좁은 이해를 넘어서도록 한다. 예를 들어 오늘날 서구 문명의 연원으로 여겨지는 그리스 로마 문명이나 유대 기독교 문명과 관련해서 그것이 21세기 오늘날도 여전히 민족국가들로 자리하고 있는 그리스나 이탈리아, 이스라엘 등에서 나온 것이라 해도 그것을 받아서 이후 나름대로 전개 시킨 독일이나 프랑스, 영국이나 미국 등이 자신들 문화를 그 나라들 것이라거나 아류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자신들 나름의 고유한 꽃으로 보면서도 그 오래된 연원을 소중히 하며 계속 가꾸고 탐구하는 것을 보는데, 왜 우리는 유교 문화나 중국과의 관계에서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일까? 

   이러한 인류 문화 흐름의 보편에 관한 이야기와 더불어 필자가 진정 더 나누고 싶은 이야기는 과연 유교 문명의 연원을 꼭 좁은 의미에서 중국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현대에 들어와서 더욱 심화한 갑골학이나 금석학(金石學)을 통한 중국 고자료(古資料) 연구는 중국 고대 문화를 다시 인식하게 한다. 물론 유교는 공자(B.C. 551-479) 이전부터 연원한다 하더라도 공자에 이르러서 집대성되고 종합·정리된 사상이라 할 수 있다. 그런 공자는 가까이는 중국 주나라(B.C. 1121)의 주공(周公)을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흠모했고, 더 멀리는 요순(堯舜)을 최고의 인격으로 그렸다(『논어』 「술이」, 「태백」, 『중용』 제6장 등). 그런데 20세기에 들어와서 주나라 이전의 은나라에 대한 古기록인 갑골문 등이 대거 발견되면서 은대가 중요한 역사시대로 학문적 실증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은나라 이전의 세계에 대한 제반 모습이 더 알려지면서 하나라(夏, B.C. 2183) 이전의 요순(B.C. 2333, B.C. 2233)시대에 관한 연구도 실증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류승국, 『한국사상의 연원과 역사적 전망』, 유교문화연구소 2009, 19-36쪽). 일반적으로 유교를 말하면 으레 요·순·우·탕·문·무·주공·공자의 도라고 일컬어져 왔다. 그러나 점점 심화하는 고대 연구들로 동아시아 상고대의 전개에서 중국 민족은 하·은·주 삼대를 거쳐서 발달해 온 서방의 화하족(華夏族)이고, 동방에는 하·은·주 삼대 이전부터 일찍이 발달한 비한어계(非漢語系)의 민족인 동이족이 있었다고 밝힌다. 중국 고전에서 ‘동이(東夷)’는 중국 한족(漢族)이 동방의 비(非)한족을 가리키는 호칭인데, 산동과 발해·요동·서북조선 지방을 중심으로 널리 황하 하류의 연해 지대에서 농업과 어업을 겸하면서 중국의 한족(漢族)에 앞서서 문화권을 이루었고, 중국의 유교는 역사적으로 이 동이족과의 관계에서 형성되어 온 것에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된다(류승국, 같은 책, 21~24쪽). 

   하·은·주 시대 이전 대략 B.C. 2000여 년, 중국 유교가 연원으로 삼는 요순에 대해서 특히 『맹자』는 “순(舜)은 … 동이 사람이다(東夷之人也. 「離婁 下」)”라고 하였다. 갑골 복사에는 요순에 관한 기록인 중국 『상서(尙書)』의 기록을 실증할 수 있는 내용도 들어있다고 한다. 또한 『논어』에서 공자는 “바다 건너 구이(九夷)에 가 살고 싶다”라고 하였고, 제자가 “누추한 곳에서 어떻게 살겠습니까?”라고 묻자 “군자들이 사는 곳이니 무슨 누추함이 있겠느냐?”(子欲居九夷 或曰陋 如之何 子曰 君子居之 何陋之有. 「子罕」)라고 대답했다. 이러한 것들은 중국 한족에 의한 문화와는 다른 고대 동방문화가 있었음을 시사하는 것이고, 은(殷) 무정 시대(B.C. 1339-1280) 등의 복사에는 그 동방문화의 주인공인 동이 정벌에 관한 기록이 자세히 나타나 있다(류승국, 같은 책, 30쪽). 이러한 모든 탐구는 동이족이 한족에 선행해서 독자적인 문화권을 이루었고, 특히 은(殷) 부족과 교류하였는데, B.C. 12세기 말경 서부족인 주(周)의 공략 때문에 은이 멸망하였지만, 유교 사상은 그 동이족의 동방문화와 많은 연관이 있는 은대의 종교적 성격을 가진 천명(天命)사상을 계승하였고, 이후 인본주의적 예제(禮制)문화를 특징으로 하는 주례(周禮)를 중심으로 유교 문물제도가 전개되었다고 정리된다. 

   애석하게도 오늘날까지 고대 한국사 연구의 자료도 중국 문헌이 위주였다. 사마천(B.C. 145-86)의 『사기』나 『한서』 , 『후한서』 등에 기록된 「조선전」이나 「동이전」이 주된 문헌이었다. 하지만 최근 여러 맥락에서 주목받고 있는 『환단고기(桓檀古記)』 는 동아시아 지역의 역사를 B.C. 7000여 년까지 소급해서 언급하며, 특히 우리의 고대 역사를 ‘환국(B.C. 7000)’, ‘배달국(B.C. 4000)’, ‘단군조선(B.C. 2333)’, ‘북부여(B.C. 239)’, ‘고구려(B.C. 108)’ 등으로 이어지는 연결로 밝힌다. 그것은 앞에서 언급.  한 대로 요순 이전의 非한족에 의한 동방 역사의 실재를 가늠하게 하는 서술로 볼 수 있다. 또한, 이후 요순시대와 하·은·주 등의 중국이 어떻게 이 고조선의 주체들과 서로 관계해 왔는지를 밝히는 기록들이 있다. 물론 오늘날 이 『환단고기』의 위서(僞書) 여부에 대한 논란이 모두 가신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얼마 전 오랫동안 유교 고전 사서삼경 등을 연구해온 유교 철학자가 이 『환단고기』를 읽게 되면서 그것을 몰랐을 때 풀리지 않던 『시경』, 『서경』 등의 내용이 술술 풀리는 경험을 했다는 고백도 있고 보면(이기동·정창건 역해, 『환단고기』, 2019, 9쪽), 『환단고기』는 우리의 古역사뿐 아니라 동아시아 문명의 연원과 전개 이해를 위해서 더는 무시할 수 없다고 본다. 몽골 원의 지배를 받았던 고려와 중국 성리학으로 새 왕조를 연 조선 초기에 세조가 중국으로부터 더욱 확실히 자신의 자리를 인정받고자 많은 책을 없앴다는 이야기는 그 와중에서 우리 古역사에 대한 책이 많이 사라졌을 것을 짐작하게 한다. 그러나 일부 뜻있는 사람들이 몰래 일부 기록들을 필사본으로 간직해 오다가 조선 말기, 다시 나라가 큰 위기에 처하자 『환단고기』로 정리되었다고 보는데, 예를 들어 유대 민족의 古역사인 모세 5경의 책도 그전부터 내려오던 J 문서나 E 문서, P 문서 등의 구술 모체가 있었고, 바벨론 포로(B.C. 587~538) 등으로 나라와 민족이 위험에 처하자 그 모체에 기대어서 『창세기』 등을 기술한 것이다. 그렇게 『환단고기』도 우리 古역사의 모체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이상처럼 우리는 유교의 발단과 전개를 살피는 가운데 ‘인종’이라는 인간 구별의 처음 차원을 가져왔다. 그러나 한나 아렌트 같은 정치 사상가는, ‘인종(race)’이란 정치적으로 말하면 인류의 시작이 아니라 종말이고 민족의 기원이 아니라 쇠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간의 자연적 탄생이 아니라 그의 부자연스러운 죽음”이라고 일갈했는데(한나 아렌트, 『전체주의의 기원 1』, 이진우·박미애 옮김, 317쪽), 왜냐하면 인류가 지난 세기 나치즘이나 범슬라브주의에서 보았듯이 결국 인간을 최종적으로 ‘인종’으로 환원시키고 구분해서 그때까지의 모든 인류 문명과 문화를 무화시키는 반인륜의 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오늘 한·중, 중·한, 또는 중·미, 미·중 관계가 정치적으로 다시 인종주의에 물드는 경향을 보이는 것이 우려스럽다. 그런데도 여기서 유교의 기원과 전개를 말할 때 ‘동이족’의 역할과 위치를 밝히고자 한 것은 바로 유교가 어느 한 인종이나 민족만의 것이 아니라 장기간에 걸친 동아시아 인간 삶의 공통적 작업이었다는 것을 드러내고자 함이다. 그렇게 탄생하고 전개된 유교는 인류 문명의 어떤 다른 전통보다도 크게 진정 ‘인간(人), 인간이면 족하다’는 근원적 인본주의를 표방한다. 그 보편적 인본주의 탄생에 뛰어난 역할을 했던 중국조차도 다시 세계 헤게모니 싸움으로 파트너 미국의 보수 기독교 복음주의자들처럼 인종주의의 유혹에 넘어가서는 안 될 일이다.  

 이은선 한국信연구소 대표 cnews197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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