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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적인 증언자가 되고 싶었다
등록 :2021-10-22
[한겨레Book] 나의 첫 책 - 여성학자 정희진
여성학과 설립 20년 되도록
가정폭력 다룬 논문 한 편 없어
7년간 피해자·가해자 인터뷰
‘성역할-인권 충돌’ 문제제기
나의 첫 단독 저서는 석사 논문이 토대가 된 <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 가정폭력과 여성인권>(또하나의문화·2001)이다. 2016년 <아주 친밀한 폭력>(교양인)으로 개정증보판이 나왔다. 석사 논문이 과분한 칭찬을 받았지만, 책을 낼 생각은 없었다. 그러다가 국내 박사 과정 진학이 좌절되면서 유학 준비 학원을 다녔는데, 거기서 만난 이들이 저서가 있으면 일종의 ‘스펙’이 된다고 조언해주었다.
나는 20대에 5년간 아내폭력 피해자를 지원하는 여성의전화(women’s hotline)에서 상근자로 일했다. 당시 대학 동창들이 “할 일 없는 여자들이 수다나 떨면서 무슨 ‘핫라인’이냐, 그건 남북 관계에나 쓰는 말”이라고 했다.
이후 나는 아내폭력 현실이 너무 답답해서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공부한 학과(여성학과)가 설치된 지 20년이 지났는데도, 가정폭력 관련 논문이 한 편도 없다는 사실에 놀랐다. 사회복지나 신학, 법학, 간호학, 사회학 등에서는 박사논문도 나왔는데, 왜 여성학과에서는 아내폭력 논문이 없을까. 문제는 연구 방법이었다. 통계나 기존 논의를 정리한 글은 많았지만, 피해자의 이야기를 직접 듣고 그들의 목소리를 연구자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논문이 당시에는 없었다. 여성학 전공자 중에서도 가정폭력 피해자가 있지만, 당사자의 자기 문제 연구는 쉬운 일이 아니다.
20대. 나는 ‘여성’과 ‘학생’ 사이에서 방황했고 전두환씨 덕분에 청춘을 날렸다는 분노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여성운동 단체에 근무하면서 페미니즘을 알게 되었고, 정치적으로 구원받았다. 아내에 대한 폭력. 가장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폭력, 가장 오래된 역사, 가장 광범위하고 비가시화된 피해. 가정폭력은 ‘미투’도 없다. 세상에 이런 인간사가 있을까. <아주 친밀한 폭력>은 약 7년 동안(1992~1999년) 가해자와 피해자를 인터뷰한 내용을 바탕으로 썼다. 이후 전시 성폭력, 기지촌 성산업, 성매매, 가족 내 성폭력 등 젠더 폭력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게 되었다.
드러나지 않은 폭력이다 보니, 들어도 들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세상이 믿지 않으면, 피해 당사자도 듣는 사람도 믿기 어려운 법이다. 지금 생각하면 일종의 메시아 콤플렉스였는데, 나는 이 문제를 세상에 알리고 피해자를 ‘구출’해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탔다. 피해자, 연구자, 운동가라는 세 가지 위치 사이에서 긴장했지만, 윤리적인 증언자가 되고 싶었다. 묘한 흥분 속에서 잠을 잘 수 없을 정도였다.
나는 평범한 사람이지만 특정 분야에서만은 승부욕이 있다. 읽을 수 있는 데까지 국내외 선행 연구를 모두 읽었다. 끔찍한 사연(인터뷰 내용)을 반복해서 읽고, 지하철에서는 녹취록을 들었다. 그러나 논문은 심각성을 쓰는 것이 아니라 분석하는 일이다. 기존 이론을 자료에 적용하지 말고 내게 체현된 데이터로 새로운 주장을 펼쳐야 한다.
나는 이 책을 세 가지 버전으로 썼다. 처음에는 내가 그토록 피하려고 했던 방식, 여성의 피해자화와 남성의 가해자화를 쓰고 있었다. 분노, 가슴 미어짐, 고립감, 동일시 등 마음을 관리하는 것도 벅찼다. 결국 세 번째에서야 사회 구조와 개인의 행위성을 동시에 분석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았다. 한 번에 원고지로 각 600매, 마지막까지 총 1800매를 썼다. 아내에 대한 폭력을 ‘성역할과 인권의 충돌’이라는 측면에서 문제제기했다. 여성에게는 맞지 않을 권리(보편적 인권)보다 참아야 할 도리(성역할)가 더 우선적인 가치였던 것이다.
세 가지 사연. 나는 피해 현실이 선정적으로 읽힐까봐 결벽증을 앓았다. 가장 경미한 사례만 썼는데도 논문 심사위원을 포함, “과장이 아니냐”는 말을 들었다. 그때마다 상대방 멱살을 잡고 싶었다. 문학을 전공하신 엄마는 말씀하셨다. “네가 이 책을 쓰느라고 얼마나 머리에서 기름이 빠졌겠냐, 가슴 아파 못 읽겠다”. 어떤 남성은 ‘꽃’이 들어간 책 제목 때문에 연애 관련서인 줄 알고 샀다며 화를 냈다. ‘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는 미국의 아내폭력 생존자가 쓴 시다. 폭력 후 남편이 주는 꽃을 받지 않았더라면, 자기 묘비 앞의 조화와 마주하지 않았으리라는 내용이다.
정희진 여성학자
그리고 다음 책들
페미니즘의 도전
이 책 역시 계획에 없었다. 엄마 간병, 생계와 공부…. 여유가 없었다. 출판사의 연락을 피해 다녔다. 한예원 편집장님이 “이런 책이 꼭 필요하다”며 직접 나를 설득했다. 이 책은 편집자와의 공저이다. 쇄를 거듭할 때마다 내용을 고쳤고, 세 차례 개정증보판을 냈다. 이 책이 16년 동안 팔리는 현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l 교양인(2005, 2012, 2020)
정희진처럼 읽기
독후감 모음이다. 서평의 형식과 의미를 문제제기하고 싶었다. 독서보다 더 중요한 공부는 읽은 후의 생각을 나누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서평은 책이라는 세상을 통과한 전후의 자기 변화를 쓰는 창작 행위다. 내용 요약, 감상 반반으로 쓰는 기존의 방식에 동의하지 않는다. 필사용으로 사용한다는 독자 메일이 가장 기쁘다. l 교양인(2014)
낯선 시선: 메타 젠더로 보는 세상
여성주의는 정체성의 정치로 시작하지만 “여성이라는 깨달음”은 몇 시간 가지 못한다. 여성들 간에는 인종, 계급, 나이 등 수많은 차이가 있다. 여성주의는 보편성과 당파성의 모순이 없다. 내게 여성주의는 젠더에 기반하면서도 젠더를 넘어서는 메타 젠더의 세계관이다. 이 책은 메타 젠더의 시각에서 창의적 사고와 글쓰기를 모색한다. l 교양인(2017)
혼자서 본 영화(2018, 교양인)
영화는 당대 지식의 집약이다. 영화광인 내게 모든 영화는 책 몇 권의 공부 분량이다. 시나리오 작가는 대사 하나에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겠는가. 그래서 나는 영화를 두 번 본다. 한번은 대사를 필기하고, 한번은 온전히 감상한다. 같은 문제의식을 가진 글쓴이(감독)를 만나는 즐거움, 나 혼자 누리는 석학과의 대화다. l 교양인(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