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8/14

김진호 화해의 신학과 ‘주변으로부터의 구원’ - 임지현의 〈화해의 정치와 용서의 윤리 1910

올빼미의 밥상(김진호. 민중신학자) :: 화해의 신학과 ‘주변으로부터의 구원’ - 임지현의 〈화해의 정치와 용서의 윤리―동아시아의 기억공간에서 폴란드-독일 주교단 편지 다시 읽기〉에 대한 논평



화해의 신학과 ‘주변으로부터의 구원’ - 임지현의 〈화해의 정치와 용서의 윤리―동아시아의 기억공간에서 폴란드-독일 주교단 편지 다시 읽기〉에 대한 논평논평 2019. 10. 31. 00:36 posted by 한때 올빼미


국제심포지엄 <동아시아 기억의 연대와 평화 - 한일 가톨릭 교회의 화해와 협력>(2019.10.30~31)에서 임지현 교수의 기조연설에 대한 논평글.






화해의 신학과 ‘주변으로부터의 구원’
임지현의 〈화해의 정치와 용서의 윤리―동아시아의 기억공간에서 폴란드-독일 주교단 편지 다시 읽기〉에 대한 논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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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평적 화해신학의 시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서양제국들의 식민주의와 결탁한 ‘교회의 낡은 선교론에 대한 청산’이 국제선교협의회(International Missionary Council, IMC) 제4차 대회(1947. 토론토 휘트비)와 제5차 대회(1952. 서독 윌링겐) 때에 주요 의제로 제기되었다. 선교의 본질은 ‘교회의 포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류 구원을 위해 일하는 ‘신의 선교에 동참하는 것’에 있다는 논점이다. 하여 교회의 선교는 그 자체로 정당성을 갖지 못하며, 오직 이러한 신의 선교에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선교관은 제5차 IMC 대회에서 ‘신의 선교’(Missio Dei)라는 용어로 정식화되었다. ‘신의 선교’라는 명칭 자체가 ‘수직하향적’ 선교론 같은 느낌을 주지만, 실은 그런 주장을 폈던 교회의 선교가 제국주의의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는 반성적 성찰을 담은 것이라는 점에서, ‘수평적 선교’에 강조점이 있다. 이러한 ‘교회의 선교’에 대한 IMC의 반성은 1948년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창립으로 이어졌고, 제3차 WCC 뉴델리 대회에서 ‘신의 선교’론을 공식 채택함으로써, WCC 중심의 에큐메니컬 신학이 태동하게 되었다.

한데 이렇게 에큐메니컬 신학이 태동하는 1950~1960년대는 알다시피 좌우 이념대립의 시대였다. 바로 그 무렵 서양의 냉전시대를 상징하는 독일의 아데나워 체제(1949~1963) 아래서 독일 개신교의 평신도 엘리트들 8명이 튀빙겐 각서(Tübinger Memorandum, 1961)를 발표하였다. 그 골자는 아데나워 체제의 냉전주의 정책에 반대하는 평화의 신학을 천명하는 데 있다. 특히 폴란드와 체코의 영토로 환원된 슐레지엔(Schlesien) 지방에 대한 독일 아데나워 정부의 반(反)환원주의에 대해 비판을 가했다. 이것은 1965년 독일개신교회연합(EKD)의 ‘동방백서’(Ostdenkschrift) 속에 거의 그대로 채택되어 선포됨으로써 독일 개신교의 공식입장으로 자리잡았다. 그로부터 1개월 남짓 지난 1965년 11월12일, 임지현 교수가 주목한 폴란드 가톨릭교회 주교단의 사목서신이 독일 가톨릭교회로 발송되었다.

한편 교황 요한 23세가 주도한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1962년 10월11일에 시작하여 그의 후임인 바오로 6세에 의해 1965년 12월8일에 종료가 선포되었는데, 여기서 가톨릭교회와 개신교회, 동방정교회, 심지어 비그리스도교계 종교들과 이념들과의 수평적 화해와 일치가 천명되었다. 신의 사역 속에 담긴 정의와 화해의 정신과 부합한다면 말이다. 바로 이 공의회 기간 중에 전달된 폴란드 가톨릭교회의 사목서신은 공의회의 기조와 큰 틀에서 부합하는 것이었다.

임 교수가 정확히 지적한 것처럼 개신교와 가톨릭을 아우르는 신학의 기조는 ‘수평적 화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초월적 신이 용서와 구원을 하사한다는 수직하향적 화해신학과는 반대로, 신이 자신의 신성을 해체하고 하방하여(incarnated) 불의와 맞서고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했다는 점에서 수평적 화해신학이라는 얘기다.



혼종성의 지역



한데, 임 교수가 지적하듯, 폴란드 주교들의 ‘선제적 화해’(preemptive reconciliation)의 메시지에는 슐레지엔 지방에 대한 폴란드의 영토주권을 확인받으려는 의도가 포함되어 있었다. 요컨대 더 중한 피해자가 먼저 사과를 함으로써, 가해의 책임을 더 중하게 짊어져야 할 독일 가톨릭교회로부터 오데르-나이쎄 강 국경선을 지지한다는 동의를 얻어내고 싶었던 것이다. EKD가 먼저 표명했듯이 말이다.

문제는 독일 주교단의 편지는 영토문제에 대해 입장을 표명하지 않은 채 그곳에서 추방된 이들의 고통을 거론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표면적 논리로 보면, 폴란드 주교단은 국가의 관점을 대변하고 있는데, 독일 주교단은 추방자의 관점을 대변하고 있다. 독일 주교단의 됲프너 추기경이 슐레지엔이 폴란드 영토임을 명료히 표명했어야 했다는 후일담은, 필시 이 말을 할 당시의 정황을 반영한 것이겠다. 그때에는 튀빙겐 각서와 EKD의 동방백서의 논조를 독일 정부가 받아들여 동방정책을 추진하던 때였고, 그것이 독일과 폴란드 사이의 높디높은 장벽을 허물고 화해를 도출하는 데 기여했다는 전 세계의 찬가가 빗발치던 때였다. 됲프너 추기경은 이런 분위기에서 과거 독일 가톨릭의 모호함을 반성하는 말을 한 것이다. 하지만 화해를 향한 이러한 역사 경로는 필요하고 정당했지만, 이 필요와 정당성은 국가 대 국가의 화해라는 관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즉 여기에는 다른 시선의 필요와 정당성이 가려져 있다는 점에서 그 한계가 있다.

슐레지엔 지방은 독일, 폴란드, 체코가 불행하게 뒤얽히면서, 세 나라가 그런 악연들과 그로 인한 고통들을 국민국가 형성의 소재로 활용한 역사를 가진 땅이다. 그러므로 그 땅의 역사를 무시하면서 용서와 화해를 논할 수는 없다. 하지만 문제는 그 땅에서 벌어진 모든 고통들을 국가가 전유하는 것은 부당하다. 더욱이 슐레지엔처럼 변경지대(frontier zone)는 혼종성이 훨씬 더 강한 반면 특정 국가에 대한 귀속성이 낮은 지역이라는 점에서, 그 지역에서 발생한 폭력의 희생자들을 국민국가 서사 만들기의 도구로 삼는 일은 차라리 성화가 아니라 ‘2차 폭력’이다.

하여 독일 주교단이 독일계 실향민의 고통을 대변하고자 한 것은, 설사 그 뒤에 아데나워 정부처럼, 오데르-나이세 국경선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의도와 뒤얽힌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 의의를 단순히 폄하 할 수만은 없다. 하여 나는, 임 교수의 비평과는 달리, 독일 주교단의 편지 속에 신에게 용서를 구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수직적 화해신학의 수사가 담겨 있다고 하더라도, 그 땅의 사람들을 영토분쟁 중인 두 국민국가의 관점으로 환원시키지 않고 있다는 점을 주목하고자 한다. 이런 문제의식은 폴란드 주교단의 서신에서 우리가 읽어내지 못했던 점이고, 그 혼종적 장소성(hybrid placeness)에 내포된 체험들, 그 체험의 소리들, 영토분쟁 중인 국민국가에 의해 은폐된 그 소리들에 관심을 기울이게 하기 때문이다.



누락된 사람들



아우슈비츠에서 죽임당한 이들의 범주에는 유태인과 정치범 외에, 정신질환자, 집시, 성소수자 등도 무수히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정신질환자, 집시, 성소수자들 등등에 대한 증오는 나치만의 책임인가.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해체된 지 60여년 후인 2천년대 후반, 폴란드에서 ‘오드가와’(Odwaga)라는 동성애자 치료시설이 있다는 충격적 보도가 있었다. 또 그 무렵 가톨릭 인구가 전 인구의 절대다수인 폴란드에서 전체의 50% 이상이 동성애를 죄악으로 보고 있다는 조사가 있었다. 가톨릭 국가들의 평균치를 훨씬 상회하는 수치다. 이것은 여전히 폴란드 가톨릭교회가 동성애자에 대한 편견을 수정하지 않고 있음을 뜻한다. 정신질환자나 집시도, 말할 것도 없이, 나치뿐 아니라 많은 폴란드 국민들의 배제와 편견의 대상이었다. 하여 나치에 의해 이들이 대대적으로 죽임당하기 전, 그러니까 나치가 점령하기 이전에도 폴란드에서 그들의 몸은 존중받지 못했다. 그런데 폴란드인의 희생자의식을 형성하는 데 이들 존중받지 못했던 몸들의 죽음이 국민의 죽음으로 해석되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폴란드인의 희생자의식은 국민국가적 주체를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물론 이것은 임 교수의 지론인 ‘희생자의식 민족주의’(victimhood nationalism)의 논리에 의거한 것이다.

한데 폴란드 주교들의 선제적 사과의 대상에는 이들이 누락되어 있다. 바로 이 점이 내가 이 사목서신에 대해 갖는 비판적 문제의식의 핵심이다. 그 서신은 나치에 의해 희생당한 모든 죽검을 동질화하여 민족으로 소환함으로써 희생자의식 민족주의를 담론화하고 있는 텍스트의 하나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 동질화된 죽음들은, 생존에는 결코 동질화된 몸으로 표상되지 않았었다. 그들의 몸은 죽어야만 국민으로 소환될 수 있는 몸이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목소리는, 살았든 죽었든, 묵살되어야 하는 목소리다.

한편 추방당함으로써 또 다른 강요된 침묵의 대상이 되어야 했던 이들을 독일 주교단이 대변하고 있었다. 독일 주교들도 폴란드 주교들처럼 국가주의에 흡수되어 있었을지 모르지만, 그들이 편 논지는 두 국민국가의 영토 갈등 사이에서 자신들의 존재의 얼이 새겨진 장소를 상실하게 된 이들의 고통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바로 이 점이 내가, 독일 가톨릭교회 주교들의 의도가 무엇이든 간에, 그들의 주장에 주목해야 한다는 요체다.



1991년 캔버라에서 춤추는 영(spirits)



WCC 제7차 대회가 호주의 캔버라에서 열렸다. 이때 주제발표자의 한 사람인 정현경은 WCC 역사상 가장 파격적이고 가장 의미심장한 퍼포먼스를 벌였다. 그것은 이 세상의 온갖 불의들에 의해 죽임당한 한 맺친 영들을 소환하는 ‘초혼제’(招魂祭)였다.

WCC의 에큐메니컬 신학의 출발점에 제3차 대회에서 공식 채택된 ‘신의 선교’ 신학이 있었다면, 제4차 웁살라대회(1968)에선 인간화(humanization)가 신학의 중심 키워드로 부상했다. 그리고 1975년 제6차 나이로비 대회에선 ‘구조악’이 화두로 제기되었다. 이러한 인간화, 구조화 등의 키워드는 모두 ‘신의 선교’ 신학을 구성하는 해석적 틀이 구체화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물론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이것은 수평적 화해신학의 내용이 발전적으로 채워지는 과정이기도 했다.

한데 캔버라에서의 ‘초혼제’는 전혀 다른 방식의 화해신학적 화두가 던져졌다. ‘신의 선교’ 신학이라는 말 속에는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일 수도 있고, 부처일 수도 있으며, 알라일 수도 있는, 혹은 여러 이념들의 ‘절대적 진리들’이 전제되어 있는데, 그럼으로써 수평적 화해신학적 틀이 만들어졌는데, 캔버라에서는 진리의 논리들이 아닌 ‘영’이 소환되었다. 수많은 진리들과 얽혀 있기도 하지만 그 진리들과 항구적으로 동거하기를 거부하는, 모든 고정된 것들을 해체하는 영을 말이다. 그 ‘영’은 저 위에 있기도 하고 저 아래 있기도 하며 바로 여기에 있기도 하다. 그 영은 내 안에 있기도 하고 네 안에 있기도 하며, 우리 사이에 있기도 하다. 그 영이, 아니 그 영들이, 특히 부조리한 세계 아래에서 한을 품은 채 죽어간 이들의 영들이 소환되었다. 그런데 그 영들은 부조리함에 의해 상처 입고 죽임당한 영들이다. 그 부조리함들은 때로 진리의 얼굴을 하고 있다. 하여 진리라는 이름의 폭력에 난도질된 이들은 소리조차 내지를 수 없다. 왜냐면 그들은, 그 죽임당한 이들은 진리의 적이거나 최소한 진리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여 그들은 하소연할 말을 빼앗겼다. 그 빼앗긴 말을 정현경은 ‘한의 소리’로 표상했다. 일찍이 김지하가 화두를 던졌고, 민중신학자 서남동과 안병무가 주목했던 ‘한’, 그 말이 되지 못한 소리를 정현경은 그리스도교가 얘기했던 ‘영’(프뉴마)으로 현상해냈고, 그 영을 소환한 것이다.

이렇게 ‘영’이 화두가 된 정현경의 퍼포먼스는 그 영들의 소리를 대언하는 무당으로서 신학자를 표상함으로써, 신학자의 신학은 진리들의 장벽들로 둘러싸인 폐쇄 공간들, 그 공간의 무게에 짓눌려 있는 이들을 화해의 당사자로 불러냄으로써 보다 급진적인 수평적 화해를 주장했다. 여기까지가 WCC의 화해의 신학의 절정이다. 이후 WCC 대회들은 이 급진적 화해신학을 감당할 수 없어 절충의 선들을 만들어내는 데 급급했다. 그리고 우연인지 WCC가 창출했던 세계의 진보적 신학의 장은 급격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한편 이러한 WCC 신학적 전개와 비슷한 관점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일치교령 속에도 스며 있었다. 나는 이런 문제의식으로 독일 가톨릭교회와 폴란드 가톨릭교회의 대화를 재평가하고 그 의의를 오늘 한국과 일본의 기억공간과 접속시킬 것을 제안하고자 한다.





2010년대 한국과 일본, 그리고 가톨릭교회



임지현 교수는 한국과 일본, 그리고 동아시아의 냉전적 기억공간 속으로 폴란드 주교들의 사목서신의 문제의식을 소환하여 참고하고자 했다. 물론 그것은 과거 폴란드 가톨릭교회의 기억을 정전(Canon) 삼겠다는 것은 아니다. 말 그대로 그것은 레퍼런스다. 그리고 이렇게 함으로써 그가 말하고 싶은 것은 어떻게 ‘대화’를 할 것인가의 문제다.

하지만 나는 폴란드교회의 주교들뿐 아니라, 독일교회의 다른 문제의식도 어떻게 대화할 것인가에 관한 러퍼런스 목록에 끼워 넣었다. 사실 이렇게 끼워넣기 전에 그 문제의식을 제5회 WCC 컨버라대회의 초혼제 담론 속으로 통과시켰다. 말했듯이, 내가 보기엔, 컨버라의 초혼제는 이제까지 WCC가 만들어낸 절정의 화해신학의 가능성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아마도 독일 주교들도 상상하지 못했을 놀라운 신학적 문제의식이 그 편지의 서사 속에 융합될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한국과 일본의 가톨릭교회는 대화를 해야 한다. 두 나라가 서로 희생자의식 민족주의에 따라 줄다리기 하는 대화가 아니다. 한 쪽이 먼저 사과를 하고 다른 쪽이 그 사과에 응답하는 식의 대화로도 충분하지 않다. 그런 대화는 국가주의 프레임에 갇힌 대화로 환원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내가 주목한 것은, 폴란드 교회의 ‘선제적 사과’와 결코 무관하지 않을 국가주의 프레임 안에서 수행되는 화해와도 다른 대화다. 그 대화는 국가주의 담론의 형성과정에서 ‘누락된 이들의 소리’를 다시 듣기 위한, 나아가 그 소리를 언어화하여 많은 이들이 알아차릴 수 있게 하는 대화다. 한국과 일본의 국민국가가 형성되면서 만들어진 기억공간 속에서 이름도 없이 사라져 간 이들의 소리를 두 나라 교회가 함께 청취하고 그 소리에 언어를 입히는 일에 동참하는 대화여야 할 것이다.

2018년 WCC 부산대회에서는 이런 누락된 이들의 감추어졌던 소리에서 이야기를 발견하는 과정을, ‘주변을 향한 선교’(Mission to the margins)가 아니라 ‘주변으로부터의 선교’(mission from the margins)라고 명명했다. 그 누락된 소리가 바로 신의 ‘신음 소리’이고 그 소리의 해독이 자신을 향한 ‘신의 신탁’이었다는 것이다. 즉 세상의 교회들은 선교의 주체로서 침묵을 강요당한 타자의 소리를 발견하고 그 소리가 말이 되게 하는 일에 함께 나서야 하는데, 그 과정은 타자를 향한 선교였지만, 그 결과는 그 타자로 인해 자신이 구원을 받게 되는 역설이 일어난다는 얘기다. 민중신학의 민중 메시아론적 문제제기가, 그 논지를 알지 못했을 것으로 보이는, 다른 신학자들의 입으로 제기되었다. 아무튼 이러한 급진적인 수평적 화해신학은 한국과 일본의 갈등상황에서, 교회의 대화가 지행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생각의 실마리를 줄 것이다. □

출처: https://owal.tistory.com/594?category=196094 [올빼미의 밥상(김진호. 민중신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