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8/30

알라딘: 사회는 왜 아픈가 - 자발적 노예들의 시대 이찬수

알라딘: 사회는 왜 아픈가
사회는 왜 아픈가 - 자발적 노예들의 시대   
이찬수 (지은이)모시는사람들2020-12-10

328쪽

책소개

인간 개인은 물론 사회가 평화보다는 폭력과 갈등, 안전보다는 위험과 위기에 더 자주 더 오래 노출되는 현실의 원인을 짚어 보고 그 대안을 제시하는 책이다. 사변적이고 이론적인 글들이 아니라 저자가 직면하는 삶의 매순간, 구체적인 사회 현실(사건)을 통해서 저자가 생애 전체에서 일관되게 추구하는 행복한 삶, 평화로운 사회로의 전진을 모색한다.

나를 포함한 사회가 아픈 근원적인 원인을 성찰하고 인간적인 얼굴을 한 대안들을 40개의 다양한 사회의 제 부문과 요소, 인간관계 들을 통해서 제시한다. ‘사회의 아픔’의 원인과 대안에 관한 과학적인 접근을 시도하되 저자의 종교적 감수성 덕분으로 그 근저에 ‘사회적 영성’의 심층 맥락을 굳건히 자리매김하고 있다.


목차
책을 내며

제1부 사회는 왜 아픈가
1. 공감이 신앙이고 공생이 구원이다: 평화학이 던지는 질문
2. 연기해야 연극이 된다: 평화들의 조화와 신율
3. 그러나 위험하고 피로한 사회: 자발적 노예들의 시대
4. 예수도 폭력을 썼다: 폭력과 비폭력의 경계
5. 동성애를 혐오하는 이들에게: 혐오와 차별의 천박한 내면
6. 우리도 난민이었다: ‘내로남불’의 난민론
7. 인권은 나의 권리인가: 자권(自權)과 타권(他權)
8. 더 큰 폭력이 더 큰 원인이다: 이스라엘-IS-미국
제2부 세상[世]을 어떻게 넘을까[越]
9. 평범함이 모이면 무력해지는가: 도덕적 개인과 비도덕적 사회
10. 예외가 일상이 되다: 일상의 속살
11. 권력의 목적은 권력이다: 호모 사케르
12. 왜 배가 바닷속으로 들어갔는가: 그들이 세상[世]을 넘는[越] 방식
13. 폭력이 왜 권력이 되는가: 국가와 주권
14. 왜 정치인은 국민을 파는가: 정치와 종교의 모순들
15. 권위는 누가 주는가: 대통령이라는 거대한 호칭
16. 서로 주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증여론
17. 나도 때론 정치하고 싶다: 함께 느리게
제3부 무엇을 내려놓아야 할까
18. 누구를 위한 자유인가: 자유무역협정
19. 자유도 돈으로 사는가: 우리 시대의 장발장
20. 나는 두통을 소유한다: 소유와 존재
21. 오리는 아플 권리도 없는가: 생매장과 살처분
22. 사람이 사람을 죽일 수 있는가: 사형제도
23. 핵발전은 필연인가: 통제 불능의 문명
24. 자연이 공격해온다: 재난과 인공지진
25. 이자를 금하라: 금융경제와 이자놀이
26. 아이도 국가를 위해 낳는가: 저출산 혹은 저출생
27. 학교는 왜 아픈가: 대학의 종말
제4부 한국과 일본은 왜 꼬였나
28. 한국의 시간을 복원하라: 한국 속의 일본
29. 동해는 동쪽인가: 푸른 바다 또는 평화의 바다
30. 일본은 왜 우경화할까: 영혼의 정치학
31. 평화를 내세워 전쟁할 것인가: 책임없는 평화주의
32. 왜 다케시마를 고집할까: 평화헌법 9조에 노벨 평화상을
33. 호국영령도 여러 가지다: 일본 군국주의의 기초
제5부 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
34. 왜 사람을 쫓아낼까: 아프지만 이긴 사람들
35. 법은 왜 상처를 줄까: 법력, 금력, 권력
36. 왜 자기도 모르는 짓을 할까: 종교의 앵똘레랑스
37. 김 교수는 왜 아팠을까: 악의 발생에 대한 상상
38. 왜 큰 것을 숭배할까: 박사학위에 대한 나의 고백
39. 깨어 있어야 하는가: 중취독성(衆醉獨醒)
40. 나는 무슨 공부를 해 왔나: 심층학의 가능성

접기
책속에서
P. 25~27 평화조차 의도와 목적이 자기중심적으로 설정되어 있으면, 평화라는 이름으로 폭력이 발생한다. 평화라는 말을 가장 많이 하는 종교들이 도리어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데서 잘 볼 수 있다. (중략) 한마디로 ‘자기중심적인 평화(ego-centric peace)’를 내세운다. 이것이 현실이다. (중략) 평화라는 이름으로 평화를 이루려면 그 자율은 타자를 포함하는 자율이어야 한다. (중략) 성경에 “유대인이나 그리스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차별이 없다.”(갈라디아서 3,28)는 선언이 나온다. 타자를 긍정하면서 타자를 살리는, 그런 의미에서 하나됨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연기해야 연극이 된다: 평화들의 조화와 신율)  접기
P. 31 자본주의는 더 많은 자본을 생산하기 위해 인간에게 주체적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것을 요구한다. 자본주의는 본질적으로 더 많은 성과를 닦달하듯 요청한다. (중략) 사람들은 자신을 착취해 성과를 극대화하기 시작했다. 성과 사회의 본질이 개인의 자유를 능가해 온 셈이다. 신자유주의는 자발적으로 자기를 착취해 더 많은 성과를 산출할 것을 요구하는 시대적 흐름이다. 자발성의 이름으로 스스로를 속박하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노예의 길로 들어서는 것이다. (그러나 위험하고 피로한 사회: 자발적 노예들의 시대)  접기
P. 56 타자로부터 동의를 받으려면 자신을 설명할 뿐만 아니라 타자와 타협하고 수용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타자가 동의할 수 있을 정도의 자기 개방성을 담보해야 한다. 그럴 때에야 비로소 정체성의 확립 과정이 폭력적이지 않을뿐더러 정당성을 얻는다. 자신 안에 있는 폭력성을 인정하면, 폭력성을 혐오하기보다는 폭력에 분노하며 폭력을 줄이는 길에 나서게 된다. 혐오와 폭력은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하거나 외면하는 데서 비롯되는 일이다. (동성애를 혐오하는 이들에게: 혐오와 차별의 천박한 내면)  접기
P. 64 인권에서 더 중요한 것은 사실상 ‘남[他]’의 권리이다. 자신의 권리만 주장하다가, 결국 갈등으로 치닫는 경우를 종종 보기 때문이다.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경쟁적 성과사회라는 구조적 갈등을 그대로 전제하기에 제기되는 것이다. 나만 내세워서 인간의 권리가 확보되는 것이 아니다. 남의 권리[他權]도 볼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인권은 나의 권리인가: 자권(自權)과 타권(他權))  접기
P. 97~98 권력은 자신을 위해서 존재하지 타자를 위해서 존재하지 않는다. 권력은 인간을 버림으로써 존재하는, 인간에 대해 폭력적인 성향을 보인다. 권력의 집합체로서의 국가도 인간을 인간으로 대하기 힘들도록 되어 있다. 국가는 거대한 틈, ‘공(空)-간(間)’이다. (권력의 목적은 권력이다: 호모 사케르)

저자 및 역자소개
이찬수 (지은이) 
저자파일
 
신간알리미 신청
서강대학교 화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니시타니 케이지(西谷啓治)의 불교철학과 칼 라너(Karl Rahner)의 철학적 신학을 비교하며 박사학위를 받았다. 강남대학교 교수, (일본)WCRP평화연구소 객원연구원, 코세이가쿠린 객원교수, 난잔대학 객원연구원, 성공회대학교 대우교수,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 HK연구교수를 지냈고, 한국문화신학회 회장으로 일했으며, 한국평화종교학회 부회장, 인권연대 운영위원 등으로 봉사하고 있다.
그동안 종교학, 죽음학, 평화학 등과 관련해 77권의 단행본(공저/역서 포함)과 88편의 논문을 출판했는데, 평화학과 관련한 책으로는 『평화와 평화들』, 『한국인의 평화사상1.2』(공편), 『평화의 여러가지 얼굴』(공편), 『아시아 평화공동체』(편저)를 비롯해, 『세계평화개념사』, 『아시아공동체와 평화』, 『평화의 신학』, 『세계의 분쟁』, 『평화인문학이란 무엇인가』, 『녹색평화란 무엇인가』, 『폭력이란 무엇인가』, 『재난과 평화』, 『탈사회주의 체제전환과 발트3국의 길』, 『사회주의 베트남의 역사와 정치』, 『양안에서 통일과 평화를 생각하다』, 『동아시아의 대동사상과 평화공동체』, 『근대 한국과 일본의 공공성 구상 1.2』, 『우리 시대 혐오를 읽다』 외 여러 권의 공저서와 번역서들이 있다.
국가보훈처 산하에 있으면서 한국보훈복지의료공단에 소속된 보훈교육연구원장으로 취임한 이래 평화 및 복지국가의 형성에 기여하는 보훈 연구와 교육이 될 수 있도록 뒷받침하고 있다. 접기
최근작 : <통일로 가는 보훈>,<보훈의 여러 가지 얼굴>,<사회는 왜 아픈가> … 총 53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지금 우리는 아프다!
개인의 정서적(코로나 블루), 육체적(코로나19 팬데믹) 아픔은 물론이고 경제적이고 사회적(거리두기)인 차원에서도 아픔이 일상화, 보편화되었다. 사람과 사회뿐만 아니라, 동식물(ex. 조류독감, 생물대멸종)도 아프고, 나아가 지구 전체가 심각한 질병(ex. 기후위기, 지구온난화)에 빠져 있다. 이 아픔은 지금-여기에서 예외적이고 도드라지는 것은 아니다. 인류가 의식을 갖게 된 순간부터 아픔은 우리 삶의 일부이기는 했다. 그러나 ‘늘 아프다’고 해서 아픔을 당연시하고, 묵묵히 견디기만 하면서 살 수는 없는 것이 인간이다.

우리는 왜 아픈가?
아픔을 야기하는 것을 폭력이라고 이름 지을 수 있다면, 우리가 아픈 까닭은 ‘폭력은 지속적이고 일상적인 데 비해, 평화는 간헐적이고 예외적’이기 때문이다.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 맑고 깨끗한 하늘과 바다가 돌아온 것처럼, 우리는 “대체로 흐린, 그러나 가끔 맑은” 세상(사회) 속에서 살아간다. 대체로 흐린 우리 사회와 우리의 삶의 속살은 위험, 피로, 폭력, 혐오, 차별, 아동폭력, 성폭력, 방치와 방임, 난민, 세월호, 국가 폭력, 정치와 종교, 생매장, 살처분, 사형, 핵발전, 문명과 통제, 재난, 이자, 학교의 종말, 전쟁, 법과 상처, 금력, 권력, 숭배, 중독 같은 세포들로 점철된다. 그런 가운데 우리는 몸도 아프고 마음도 아프고, 나도 아프고 너도 아프고, 이겨도 아프고 져도 아픈 가운데 살아간다.

사회는 왜 아픈가?
개인적 질병과 사고로 인한 고통이 아니라면, 우리가 아픈 까닭은 대체로 우리가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생겨난다. 얼마간의 아픔은 (개개의) 타인으로부터 오거나, 타인과 나를 비교하는 데서 오고, 대부분의 아픔은 사회적인 차원에서 (직접적/간접적) 주어진다. 개인(국민) 국가의 주인이면서 국가권력의 통제에 종속되듯이, 우리(개인)는 사회를 구성하는 주체이면서, 사회에 종속된다. 사회로부터의 일탈은 일시적이고 예외적이며, 사회에 순응하고 예속되는 것이 일상적이며, 보편적이 되는 것이다.
개인의 아픔이 대체로 개개인의 생존 욕구, 자기 확장의 욕망으로부터 비롯되고, 사회적 갈등과 고통이 그 개인들의 욕망 대 욕망의 부딪침으로 야기되는 것이라는 것만 놓고 보면, 아픔의 근본적인 원인은 개인의 욕망인 것 같지만, 특히 근대의 ‘성과(자본 확장) 중심주의 사회 및 경제 시스템’이 자리 잡으면서, 개인의 욕망조차도 사실은 사회적인 산물이라는 점이 점점 명확해지고 있다. 개인의 일탈(갈등, 폭력, 살인-사형)조차도, 사회적 책임을 묻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개인의 모든 폭력에 면죄부를 주는 일이 아니며, 그렇게 되지도 않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누가, 왜 아픈가?
오늘날 사회는 근대 시기의 정치사회로부터 경제사회로 전이되어 왔다. 사실상 사회는 경제사회가 형성되면서부터 비롯되었다. 정치권력이 경제권력을 좌우하던 아주 짧은 시기가 있었으나 대체로는 경제권력이 실질적으로 정치권력을 좌우하는―현 단계에서는 ‘신자유주의’라고 불리는―체제가 현대 사회 근본 체제이다. 개인의 아픔이든, 사회의 아픔이든 자생적이며 불가항력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 내적 - 인간(을 비롯한 모든 ‘아픈 것들’) 외적”인 것인 까닭이 여기에 있다. 개인의 책임은 그 전제 위에서 아픔의 근본 원인에 무지한 채 종속되거나, 그것을 알면서도 그 체제의 양지에 서는 쪽을 선택하여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순간 생겨난다. 무지해서 수용하든 자발적 선택으로 수용하든 “자발적인 노예가 되기로 선택”한 것은 매한가지다.

아픔은 어떻게 이길 수 있는가?
이 책 『사회는 왜 아픈가: 자발적 노예들의 시대』는 저자가 “사회의 병리 현상을 관찰하면서, 때로는 사회 구성원인 나 자신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며” 써 나간 사회비평 에세이이다. 사회가 아픈 이유를 차근차근 성찰하되, 스스로 그 일부로 자리매김하여, 인간의 얼굴을 한 실천적 대안들을 치열하게 모색한다. 특히 기독교 목사이며, 평화학의 전공자이자 평화운동가로서, 그 자신이 겪은 해직의 아픔을 객관화하고, 사회적 아픔들을 주관화하여 공감하면서, 평화의 폭넓은 의미 속에서 그 대안들을 찾아나간다.
결국 저자가 끝내 도달한 해결의 종점, 혹은 해결의 출발점은 인간의 정신성 ? 사회적 영성의 차원이다. 국가나 사회 차원의 정책적 대안은 그다음의 문제이다. 인간(개인) 자신의 아픔도, 사회의 아픔도(사회의 주체로서 개인), 그리고 이 지구상의 아픔도 결국은 인간이라는 근원적 존재로부터 해결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인간 ‘외적 존재’로부터의 해결은 생각만 해도 끔직한 일이다. 그것은 이른바 ‘강한 인공지능의 괴담’ 같은 것을 상상하게 하기 때문이다.)

아픔은 어떻게 치유되는가?
저자는 말한다. 자기중심적인 평화 대신에 타자를 포함하고 긍정하는 평화를 추구할 때, 성과 중심 사회 체제에 내몰리다가, 스스로 내달리는 자발적 노예 상태를 거부할 때, 타자와 협의하고 타자의 동의를 수용할 때, 타의 권리보다 타자의 권리 ? 우리의 권리를 앞세울 때, 국가권력에 자기 자신의 근본적인 존엄과 천부의 권리를 위임해 버리고 스스로 종속되기를 거부할 때, 국민의 이름으로 자기 권력을 강화하고 자기 이익을 극대화하는 정치와 종교의 본질을 꿰뚫을 때, 소유의 충동과 욕망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하여 내려놓고 비워줄 때, 자유라는 이름의 자본이 던진 미끼를 좇아 돌진하는 어리석은 길에서 돌아설 때, 문명이 시작되면서 인간의 아픔도 시작되었다는 것을 깨달을 때, 우리 인간의 삶의 매 순간에 저질러지는 실수와 과오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할 줄 알게 될 때, 정죄하는 자로부터 정죄 받을 줄로 알고 조신하며 조심하는 사람으로 거듭날 때, 끊임없이 ‘큰 것’을 좇아 밖으로 나도는 마음과 몸을 우리-나 안으로 끌고 들어와 스스로 심층적인 공부를 계속해 나갈 때 우리의 아픔은 치유될 수 있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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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가 아프다, 사람이 아프다, 내가 아프다˝ 신자유주의 시대의 경쟁사회에서 자신도 모른체 사회의 폭력적인 구조와 자본의 확대를 위해 자발적인 노예의 삶으로 살아가게 한다. 중층적으로 이루어진 사회의 아픔을 파헤치고, 자기중심적 욕망들을 극복하기 위한 성찰적 길을 제시하고 있다. 
전철후 2020-12-21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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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
     
칼 마르크스의 인간해방과의 만남

   2020년은 지구의 아픔을 인류가 함께 느끼던 시간이었다. 울리히 벡(Ullich Beck)은 『위험사회』에서 전 지구가 세계화로 들어서면서 산업화·근대화가 물질적 풍요를 가져다주지만 동시에 새로운 위험요소를 불러오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위험들은 일국적 차원에 그치지 않고 세계가 하나의 사회로 통합되면서 ‘위험의 세계화’가 되어가고 있음을 말한다. 코로나19가 이를 대변해 주고 있다. 코로나 19로 인해 그동안 신자유주의 체제에 익숙해진 인간은 어쩔 수 없이 패러다임 전환의 시기를 겪으면서 많은 몸살을 앓고 있다. 그리고 그 아픔의 원인이 무엇이며, 어떠한 결과를 양상하고 있는지 드러나기 시작했다. 신자유주의의 거대 구조는 자유 경쟁이라는 이름으로 구조적 폭력을 개인 안에 자율적으로 내면화시키는 방식으로 그 폭력을 감내하는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구성원 각자가 자본이 가하는 폭력의 피해자이면서도 그 폭력을 자발적으로 내면화시킨다. 폭력을 당하면서도 그 폭력을 폭력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나아가서 폭력을 확대·재생산해 낸다.

    최근 이찬수교수(보훈교육원 원장)는 『사회는 왜 아픈가: 자발적 노예들의 시대』라는 저서에서 신자유주의 시대의 폭력의 원인과 과정 그리고 욕망을 제어하고자하는 정신적 가능성을 통찰력 있게 살펴주었다. 저자는 십수년 동안 사회의 병리 현상을 관찰하면서, 때로는 사회의 구성원인 저자 자신을 비판적으로 성찰해 갔다. 사회의 구성원인 저자 역시도 비판적 대상의 일부가 되어 있다는 사실을 겸허하게 수용하는 자세를 가진다. 사회가 아픈 이유를 성찰하되 단순히 객관적 비평문에 머물지 않고, 가능한 인간의 얼굴을 한 실천적 대안을 담아내고 있다. 저자는 사회도 개인적 욕망들의 합집합에 머물지 않고 거대한 욕망을 돌파할 수 있는 심층의 영역이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고자 했다. ‘사회의 영성’(Spirituality of Society) 내지는 ‘사회적 정신의 심층’이라고 해도 좋을 긍정적 영역을 말하고자 했다.

    저자는 사회가 아픈 근본적인 이유에 대해서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중심성들이 충돌하는 현장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라 한다. 자기중심적 욕망들의 각축장이 되게 만드는 사회는 상대를 딛고 넘어서라며 경쟁적 성과를 끊임없이 부채질하며, 결국 개인인은 저마다의 자기에게 유리한 선택을 하게 한다. 그 경쟁은 더 많은 업적을 낳고 재화를 산출하며, 기존 사회의 구조를 확대시키고 다시 정당화시킨다. 그러면서 개인은 자기가 만든 사회에 종속된다. 문명을 만든 인간이 문명의 법칙에 예속되어 가는 것이다. 이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노예의 길로 들어서는 것이라 한다. 저자가 말하는 이 사회란 사적 혹은 가정적 영역이었던 ‘이코노미들’이 중층적으로 뒤섞여 다차원적으로 뻗어가고 잇는 유기체적 집단이라고 정의한다. 이러한 사회에 대한 통찰은 집단의 구성원들이 저마다의 욕망에 기반 해 정치를 이용하거나 그 통제에서 벗어나려 시도하면서, 끝모를 자기변화와 확장을 계속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그 과정에 나타난 성과 지향의 신자유주의는 사회를 ‘질환’이라 할 수 있을 영역으로 이끌고 있으며, 사회적 아픔의 구조적 원인을 제공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이러한 자발적 노예들의 성과사회는 자기 주도적으로 자유롭게 일한다고 하지만 보이지 않는 강제가 작용된다. 성과사회는 신자유주의의 경제시스템에서 ‘자본’을 확장시키는 근본 동력으로 작용하고, 그 시스템이 요구하는 자유 경쟁은 심신의 피로 뿐만 아니라 아픔도 더 수반하게 한다. 저자는 사회가 왜 아픈지 답을 하려면 경제의 문제도 되물어야 한다고 말한다. 인간 문화와 사고 형태, 그리고 신념은 경제활동이 수행되는 방식과 관련이 있다. 칼 마르크스(Karl Marx)가 지적 하듯이 신자유주의 체제를 양산해 낸 근대화는 생산력을 획기적으로 증대시켰으나, 자본주의 사회의 계급 구조의 모순과 인간 소외 현상을 발생시키고 있다. 산업적 생산방식은 인간으로 하여금 폭력을 가하게 하거나 파괴하게 하며, 자기 자신과 자기가 만든 산물과 자연으로부터 소외된 인간들은 결국 타인으로부터도 소외된다.

    특히,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으로 인한 계급구조의 모순과 인간소외 현상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궁극적으로는 인간해방을 지향한다. 종교적 차원에서 인간해방은 신과 인간의 세계와의 관계를 인간 자신에게로 복귀시키는 것이라 한다. 인간 자신에게로의 복귀는 자신도 모르게 내면화된 자기중심적 사유를 멈추고 “성찰” 할 줄 아는 인간이다. 저자 역시도 노예로부터의 해방되기 위해서는 성찰을 통해서 기존의 흐름을 중단하면서 시작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면서 피로사회에서 인간답게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성과사회에서 피로에 지친 인간에게 평화는 과연 무엇일까? 자유경쟁 속에 내몰린 인간이 진짜 자유와 평화라는 이상을 구현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던진다. 종교의 역할은 이러한 자유경쟁에 속박되는 모순을 멈추고 해체시키며, 보이지 않는 갈등과 구조적 폭력의 희생자를 해방시킴으로써 적극적인 평화를 구현해 내는 길이다.

    마르크스는 1844년 『헤겔법철학비판』에서 “철학이 프롤레타리아트에게서 물질적 무기를 발견하듯이 프롤레타리아트는 철학에서 지적(知的) 무기를 발견한다. 철학은 오직 프롤레타리아트의 철폐에 의해 실현될 수 있고 프롤레타리아트는 오직 철학의 실현에 의해 철폐될 수 있다.”라고 말한다. 여기서의 철학은 개인의 이해관계와 공동체의 이해관계가 조화를 이루고, 고통에서 해방된 자유로운 존재들이 자신들의 진정한 자아를 표현하는 유물이다. 『사회는 왜 아픈가: 자발적 노예들의 시대』는 지금 시대의 사회의 총체적 변혁이 내재적 사회영성의 인간해방을 낳을 것이라는 철학적 길을 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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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철후 2021-01-13 공감(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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