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8/30

이병철 2108 -문명전환의 주체에 대한 소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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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
2108 
-문명전환의 주체에 대한 소회/
문명은 인간이 구축하지만, 전환은 스스로 이루어진다. 

나는, 그리고 우리는 문명전환의 주체가 될 수 없다. 인간이 지금의 문명을 만들었지만 만들어진 이 문명은 이제 그 자체로 자기 운명의 주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모든 문명은 붕괴한다. 인간이 그 한계의 조건을 만들어내면 스스로 붕괴된다. 그러므로 이 붕괴는 누구도,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다. 성주괴공은 우주 존재계의 필연적 법칙인 까닭이다. 
지금 이 문명은 스스로 그 끝점을 향해 무너지고 있다. 문명의 겨울, 혹한과 침묵의 긴 겨울을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겨울이 지나야 봄이 오듯이 이 문명의 겨울이 지난 뒤에, 그 동토의 긴 터널을 지난 뒤에 얼어붙고 무너진 그 자리에서 비로소 다시 새로운 문명이 태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겨울과 봄이 잇대어 있지만 봄이 겨울에 앞서 올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붕괴와 탄생은 서로 분리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붕괴를 조건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것이 세워지는 까닭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모든 선천 문명은 그 자체로 후천 문명을 품고(배태하고) 있는 것이다. 겨울의 한복판에 들어서 있는 입춘의 절기처럼 이 문명의 가장자리 또는 그 한복판에서 이미 새로운 문명이 태동하고 있음을 본다. 
이 문명, 무너져내리는 이 문명을 잘 떠나보내는 것은 새로운 문명을 잘 태어나게 하는 전제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호스피스의 역할은 새로운 출산을 돕는 산파의 역할처럼 필요한 일이다. 
문명의 대전환기, 나의 역할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나는 이 문명의 종말을 예감하면서 오랫동안을 이 문명 다음에 도래할 새 문명의 탄생을 돕는 산파의 역할을 꿈꾸어 왔다. 그러나 지금 나는 당면한 문명전환의 과정에서 새로운 문명의 출산을 돕는 산파가 아니라 무너져내리는, 이미 임종 상태로 치닫고 있는 이 문명을 잘 마무리하게 돕는 호스피스의 역할이 나의 역할임을 뒤늦게 깨닫고 있다. 나 자신이 이미 낡은 문명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호스피스 역할은 나를, 나의 임종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이제야 자각한다. 
나는 이 문명과 나 자신의 마무리를 함께 돌봐야 하는 호스피스이어야 하는 것이다. 내가 산파의 역할을 꿈꾸고 애쓴 것은 무망한 것이었음을 좀 더 일찍 자각했어야 했다. 
임종의 마무리 과정이나 새로운 출산의 과정에는 모두 두려움과 고통이 따른다. 그리고 낡은 것의 임종과 새로운 것의 출산 그 전환과정에 따르는 혼돈은 필연적이다. 이 혼돈의 시기, 그 과정은 기존의 지식이나 문법이 작동되지 않는다. 가보지 않았던, 경험하지 못했던 어둠 속 혼돈의 길인 까닭이다. 
이 전환의 과정을 애벌레가 나비로 되기 위해 번데기로 되는 변태의 과정으로 이해하든, 또는 임종과 출산의 과정으로 이해하든 전환의 과정은 필연적으로 빅카오스적인 혼돈이나 블랙홀 같은 어둠을 통과해야 하는 것이다. 
내가 정말로 두려워하는 것은 이것이다.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빛이 사라진 캄캄한 어둠 속의 갈피 잡을 수 없는 불안과 두려움이 인간을, 우리를, 나를 파멸시키게 될 것이란 그 두려움, 이것은 나에겐 죽음보다 더 깊은 공포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등장하게 될 아노미 상황에서의 불신과 살육과 전쟁과 파시즘을 피해갈 수 없으리라는 불안이다. 
그러나 이 과정을 우리가 휩쓸리지 않고 지켜볼 수 있다면, 그 카오스적 혼란과 블랙홀의 어둠 속에서도 고요한 중심과 빛을 찾아낼 수 있으리라. 가슴 속에 열린 하늘을 품고 있는 이들은 전환의 혼돈, 그 깊은 어둠에서도 빛을 잃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이 전환의 시기에 사랑과 수행이 더욱 절실한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서로를 품어 안으며 미리 죽는 연습을 통해 죽음 너머를 지켜보는 것이다. 

나의 만트라이기도 한 시 한 편이다. 무너져내리는 세계, 이 문명을 예감하며 오래전에 이 시를 썼다. 

-지켜보기(觀)/ 

하나의 끝점이/새로운 시작의 그 처음이다// 
끝과 시작이/ 하나로 휘도는 거센 소용돌이/ 그 출렁임 속에서/ 당신을 본다/ 당신을 보는 나를 보고// 
안팎 동시(同視)/ 지켜보는 이를 지켜보는 자리/여여하다// 
고요한 중심/ 환한 미소// 

하나의 문을 닫는 것은 하나의 문을 여는 것이기도 하다. 임종과 출산은 이어져 있고 애벌레와 나비도 고치 속의 번데기로 이어져 있다. 따로인 것은 어느 것도 없다. 임종을 잘 마무리하는 것이 다른 편으론 잘 태어나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번 생을 안심하고 마무리할 수 있는 것은 잘 죽는 것, 잘 죽어주는 것이 새롭게 태어날 생명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불안과 두려움 없이 임종을 잘 맞이하게 하는 것. 감사하며 기쁨으로 임종을 맞이하게 하는 것이 전환의 문명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해야 하는 그 전부라 믿는 것은 이런 까닭이다. 
감사할 때 기뻐할 수 있다. 이 문명의 종언이 새로운 문명의 출산을 위한 통과의 과정임을 안다면 어찌 감사하고 기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다만 오직 하나의 아픔이란 전환기, 카오스적 혼란과 어둠 속에서 두려움과 아픔으로 고통받고 신음하는 이들, 그 생명들에 대한 미안함과 연민이다. 

새롭게 다가오는 그 문명이 디스토피아일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런 과정을 통과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환한 미소 그 밝음을 잃지 않고 우리 모두, 모든 생명과 존재계가 하나로 이어져 있음을 잊지 않는다면 그 사랑과 연민 속에서 마침내 나비의 꿈에 이를 것임을 믿는다. 그런 점에서 새로운 문명은 생명이 둘로 나누어졌던 문명에서 다시 하나인 문명으로, 나와 세상이 분리되어 있던 세계에서 그 둘이 하나인 세계로의 이행일 것이라 싶다. 
그것은 내가 오랫동안 인간의 자기 정체성으로 여겨왔던 ‘신령한 짐승’의 회복과 다르지 않으리라 여긴다. 흔히 말하듯 도래할 문명을 생태문명이어야 한다면 그것은 인간이란 종(호모 사피엔스)이 다시 땅과 하늘을 이어 소통하는 신령한 짐승이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지구의식의 회복이란 내겐 그렇게 다가온다. 

우형(又形), 태극의 또 다른 무늬로서의 궁궁(弓弓)을 생각한다. 이미 문명의 겨울이 깊어졌다. 지금 우리가 타고 있던 배는 침몰하고 있고 편안하게 살았던 집은 무너지고 불타고 있음을 본다. 그러나 그 속에서 새로운 문명이 또한 태동하고 있음을 안다. 혹한의 겨울 가운데서 봄의 기운이 태동하고 있는 것처럼 무너지는 이 문명의 뒷자락 속에 이미 새로운 문명이 돋아나고 있음을 느낀다. 생생한 느낌으로 전해져 온다. 

새로운 문명, 온생명이 하나인 그 문명의 탄생은 이미 그런 삶을 삶고 있는 이들에 의해 피어나고 있다. 도처에서, 문명의 겨울 속에서 봄을 준비하는 이들을 본다, 새롭게 구명정을 마련하고 새로운 거처와 새 땅에 뿌릴 씨앗을 준비하고 있는 산파의 역할은 그들의 몫이다. 
잊었던 만트라를 다시 챙긴다. '고요한 중심 환한 미소'. 

내가 그렇게 지켜볼 수 있다면 호스피스에 충실하면서도 문명의 새봄이 옴을 설레며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으리라. 그렇게 그 봄의 출산을 돕는 산파들에게도 고마움과 격려를 보내리라. 
내 마지막 역할이 호스피스로서 새 문명의 출산을 돕는 산파들에게 고마움을 연결하는 것일 수 있기를 마음 모은다. 남은 걸음, 더 열린 가슴의 환한 미소로 죽어가는 이 문명과 눈 맞추며 밝고 가볍게 호스피스의 그 길을 걸어가리라. 

호스피스 역할로서 내가 마음 모아야 할 일들/ 

-감사하기/ 감사를 잊지 않기, 깊게 감사하기, 감사로 온몸, 온 존재를 흠뻑 적시기. 이번 생에, 인연에, 천지만물의 은혜에 깊게 감사하기. 
-기뻐하기/ 미소로 온몸, 온 존재를 가득 채우기, 밝음으로 채우기, 내가 먼저 밝음 되찾기 
-기도하기/먼저 가슴 열기, 불안과 두려움 속에 고통받고 죽어가는 모든 존재, 모든 생명의 평화와 안식을 위해. 환한 아픔이 될 수 있기를 
-축복하기/빛과 사랑을 보내기, 미소와 꽃을 건네기, 내가 먼저 꽃으로 피어 있기 
(이 소회는 엊그제 여름 지리산연찬에서 이튿날 새벽에 다가왔던 생각과 느낌을 다시 정리해 본 것이다)